행주산성
역사적 의미보다 한강 전망에 끌려 자주 오는 곳이다. 한강에 유인되어 오르다 보면 많은 기념물을 만나고 진짜 역사 유적도 만난다. 1970년 이후 건립된 기념물들 사이로 만나게 되는 1602년 건립한 행주대첩비가 그것이다.
최근의 기념물도 전망과 잘 어우러지므로 풍광을 즐기며 역사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행주대첩비가 끌어내는 임진왜란, 권율등의 주제들은 여전히 무겁지만, 여유롭게 당시를 되짚어보게 한다. 주변에 포진한 맛집과 카페도 편안한 소풍을 부추겨 옛날 돌아보는 마음을 가볍게 한다.
방문일 : 2021.3.3.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내동 산26-1
행주산성 입구. '대첩문'이 세워져 있다.
권율장군 동상
권율 도원수상. 1986년 건립, 김세중 조각가 작품이다. 동상을 둘러싸고 4편의 부조 작품이 있다.
1. 구경하기
1) 행주산성 幸州山城
행주산성(사적 제56호)은 7~8세기경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덕양산의 산성이다. 해발 124.8m의 덕양산 능선을 따라 축조되어 있으며, 길이는 약 1km에 이른다. 성의 남쪽은 한강이 인접해 있고, 동남쪽으로는 창릉천이 산성을 돌아 한강으로 유입되고 있어 자연적인 해자가 조성되어 있다.
이 산성은 1593년(선조 26) 권율(權慄)이 거둔, 전적지로서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으로 유명하다. 현재 성안에는 1603년에 세운 행주대첩비와 1963년에 다시 세운 대첩비가 있다. 1970년에 대대적인 정화작업을 벌여 권율을 모시는 충장사(忠壯祠)를 건립하고 정자와 문도 세웠다.
매년 3월 14일 행주대첩제를 진행한다. 충장공 권율 도원수의 행주대첩을 기념하기 위해 충장사에서 고양시장이 초헌관이 되어 장군의 영혼을 불러들이기 위해 향을 피우고 제례를 지내며, 그 밖의 여러 가지 문화 행사가 개최된다
행주산성 사진전. 행주치마 관련 행사 사진도 전시되어 있다.
충장사 진입로에 설치된 홍살문
충장사. 권율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1970년 건립되었다. 매년 행주대첩제를 이곳에서 지낸다. 고양시장이 초헌관이되어 향을 피우고 제례를 올린다.
충장사 앞 전사청.
대첩기념관. 안타깝게도 코로나로 문을 닫았다.
진강정이 보인다. 오르막길이 끝나갈 무렵 보이는 정자와 오른편의 한강은 이곳이 얼마나 좋은 풍광을 가진 곳인지 보여준다. 유물이 아니어도 유람 삼아서도 올만 한 곳이다.
덕양정. 1970년 진강정과 함께 건립한 정자이다. 전망이 압권이다. 한강을 완전히 품고 있다.
행주대첩비와 비각. 이곳 행주산성 권역의 존재 의의인 핵심 기념물이다. 아마 너무 마모가 심해 보물이 되지 못한 거 같다. 경기도유형문화재 74호다.
마모된 대첩비.
2) 행주대첩비 幸州大捷碑
경기도 시도유형문화재 제74호
건립시기 1602년(선조 35)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내동 산26-1
대리석재의 비로서 기단부는 묻혀 있다. 앞면의 상부에 약간의 균열이 있고, 측면에는 상부에서 하단까지 약 3㎝ 정도로 쪼개져 있으며, 마멸이 매우 심하여 부분적으로 수십자밖에는 알아볼 수 없는 상태이다.
비문은 최립(崔岦)이 짓고 한호(韓濩)가 썼으며, 김상용(金尙容)이 ‘元帥權公幸州大捷碑(원수권공행주대첩비)’ 9자를 두전(頭篆)하였다. 비음은 사위인 이항복(李恒福)이 짓고, 김현성(金玄成)이 썼다. (비음[碑陰] 비신의 뒷면(에 새기는 글))
비문에는 막료와 사병들이 그의 공적을 사모하여 비를 세우게 되었다는 동기를 적고 있다. 즉, 1593년 2월 권율이 정예군 2,300명을 거느리고 행주산성에 주둔, 일본군의 공격에 맞서 육박전으로 승리하고 적군의 깃발·투구·갑옷·무기 등을 노획한 혁혁한 전과를 밝히고, 권율의 가문과 같이 좋은 가문에서 비롯된 인격과 덕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밖에 없었으며 나아가 이를 기리지 않을 수 없어 비를 세운다는 등의 내용이 실려 있다.
글씨는 해서로서 자가풍의 석봉체(石峰體)이다. 비음은 송설체로 역시 뛰어난 것은 아니나, 비의 전체가 마멸이 심하여 서체상의 특징이나 그 평가를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재)
*신행주대첩비. 1960년대 건립되었다. 대첩비는 원본인 초건비와 중건비, 신행주대첩비 3개가 있다. 중건비는 1845년 건립되어는데, 행주서원에 보관되어 있다.
충의정. 영상교육관인데 코로나로 문을 닫은 것으로 보인다.
3) 행주대첩
1593년 2월 12일에 전라도관찰사 권율(權慄)이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왜군을 크게 무찌른 전투로 한산대첩, 진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불린다.
서울을 되찾으려던 권율장군과 퇴각하는 왜군은 행주산성에서 마주치게 된다. 승장(僧將) 처영(處英)도 승의병(僧義兵) 1,000명을 이끌고 권율을 따라 강을 건너니 행주산성에 포진한 총병력은 1만 명이 못 되었다.(우리 병력은 자료에 따라 2,300~10,000명까지 차이가 난다. 아마 행주산성 인근까지의 병력, 처영의 병력 합산 여부 등등에서 차이가 나지 않나 싶다. 여기서는 전문성이 가장 높은 이성무의 서술에 따라 4천으로 본다.)
왜군은 3만명에 달하지만 성 안 병사는 4천여명에 불과해 8대 1의 절대 불리한 싸움이었다.왜군은 총대장 우키타(宇喜多秀家)를 중심으로 고니시(小西行長) 등이 참전하였다.
1593년(선조 26) 2월, 권율은 선거이에게 전군을 거느리고 금천(衿川)의 광교산(光敎山)에 주둔하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정예병 4천 명을 뽑아 양천(陽川)에서 강을 건너 행주산 위에 진을 친 후 책(柵)을 설치하고 방비했다. 일본군은 행주산성에 얼마 되지 않은 군사가 들어간 것을 알고 이를 가볍게 여겼다. 그들은 단숨에 성을 함락하기 위해 수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공격해 왔다.
흙을 쌓아 조총을 막고, 한 번에 600발을 발사하는 비밀병기 화차의 도움으로 12시간의 혈전을 치르지만, 왜군의 마지막 9번째 공격 때에는 화살마저 떨어지게 된다. 이때 권율은 대검을 빼들고 승의군의 총공격을 호령하고 일본군과 치열한 백병전에 돌입하였다. 싸움의 와중에 화살이 떨어지자 마을의 부녀자들까지 동원되어 앞치마에 돌을 담아 날랐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행주치마'의 유래이다.
성 안에 무기와 군인이 부족한 상황을 눈치챈 적군이 기세를 올리려 하였다. 그러나 마침 경기수사(京畿水使) 이빈(李蘋)이 화살 수만 개를 실은 배 두 척을 몰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적의 후방을 칠 기세를 보였다. 이에 당황한 적은 성 안에서 물러나기 시작하였다. 성 안의 관군은 적을 추격해 130급(級)을 베었다.
행주대첩은 군은 물론 백성들까지 한마음으로 싸워 거둔 값진 승리였다. 권율의 행주대첩은 조선 육군을 무시하던 명의 장수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행주대첩의 마지막 과정을 실록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권율이 칼을 빼어 들고 독전하자 여러 장수들이 죽기로써 힘껏 싸우니 적은 포위를 풀었다. 적의 시체를 네 곳에 모으고 마른 풀을 쌓아 놓고 불을 질렀는데 시체 타는 냄새가 10리까지 뻗쳤다. 아군이 남은 시체를 거두었는데 참획한 것이 130여 급이었다.” - 《선조실록》 권 35, 선조 26년 2월 24일
진강정. 덕양정과 함께 1970년 건립한 정자. 전망 좋은 정자다. 아랫쪽 한강 제일 가까이 있는 정자다. 물좋고 정자 좋은 곳은 없다는 말이 있다. 다 좋을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곳 행주산성이야말로 물 좋고 정자 좋은 곳이다.
한강 방화대교가 내려다 보인다.
충훈정. 1986년 건립한 활터. 멀리 과녁이 보인다. 행주산성 권역을 들어서면 바로 오른편 아래쪽에 있다.
활터는 궁도대회가 열리기도 하는 국궁연습장이다.
충훈정 정면
2. 구경 후
행주대첩은 관군, 백성, 승려들이 모두 어울려 싸운 결과이다. 일본 내전에서 관민이 합동으로 싸웠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다. 싸움을 전문으로 담당하는 무사계급은 농민과 달랐다. 그들은 두 개의 칼을 차고 다니며 기분 나쁘거나 농민이 건방지다고 생각되면 언제든지 벨 수 있었다. 심지어 새 칼을 장만하면 잘 드는지 시험하려고 지나가는 아무나 베었다고도 한다. 농민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항상 무사들의 맘에 들도록 행동해야 했다. 무사는 협동의 대상이 아니라 공포의 대상으로 생사여탈권을 쥔 철저한 상하관계였다. 농민이 자발적인 협동을 하겠다면 무사들이 오히려 건방지다고 목을 베지 않았을까?
중국의 관은 고궁이 상징하듯이 너무나 아득하고 강하고 높은 존재여서 민중에게는 항상 굽신거리고 조아려야 하는 상전이지 그들이 자신들과 같은 눈높이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고궁의 그 높은 담장과 담장을 둘러싼 깊은 해자는 민중과의 거리를 말해준다.
우리는 초가의 담이나 궁중의 담이나 높이에서 별 차이가 없다. 조선 시대 왕은 가뭄이나 홍수가 들어 흉년이 걱정되면 언제든지 찬을 줄이는 감선(減膳)을 했다. 백성이 어려운 처지에 있는 것은 바로 자신이 당하는 것이었다.
임진란 중에는 1만이 넘을 것으로 추정되는 수많은 항왜가 투항하여 조선을 택하였다. 그중 일부는 상층에 편입되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사야가(沙也加) 김충선(金忠善)이다. 김충선은 임란 당시는 물론 이후에도 국가에 많은 공헌을 세웠다. 임란 다른 전투에서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상(賞)을 청하는 권율의 다음 장계에는 사야가와 함께 많은 항왜의 이름이 등장한다.
“이때 ... 항왜 손시로(孫時老)는 탄환을 맞아 왼편 가슴 밑을 뚫고 오른편 무릎 밑으로 나갔으나 아직 숨은 끊어지지 않았고, 항왜 연시로(延時老)는 말에서 떨어져 칼을 맞고 바로 죽었으며, 부정 임청옥(林靑玉)은 칼을 맞고 상처를 조금 입었다. 명병과 항왜 등의 참급(斬級)은 많게는 70여 급인데 분주하게 진퇴하는 동안에 거의 다 흩어져 없어졌으며, 명병은 두 급을 베고, 검첨지(儉僉知) 사고여무(沙古汝武)는 두 급을 베고, 훈련 부정(訓鍊副正) 이운(李雲)ㆍ항왜 동지(同知) 요질기(要叱其)ㆍ항왜 첨지(僉知) 사야가(沙也加)ㆍ항왜 염지(念之)는 각기 한 급씩을 베었습니다.” (선조30년 11. 22)
일본군은 수많은 조선인을 포로로 끌고 갔다. 도공(陶工)과 각수(刻手)는 특히 표적이 되었다. 도공은 심수관가 등 일본에 전문예술인 계층으로 안착하여 잘 살고 있다. 일부는 돌아온 사람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항왜는 조선에 머물러 돌아가지 않았고, 조선을 위하여 살다가 죽었다.
이것은 이해관계로만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거다. 조선이 준 감동이 이들로 하여금 조선을 택하게 한 것이다. 전쟁을 이용한 일종의 망명이었던 셈이다. 일설에는 아예 망명을 목표로 참전했다는 왜인도 있다 한다. 무장 사야가(沙也可) 또한 종군 7일 만에 자신이 지휘하는 3천 명의 조총부대를 이끌고 경상좌영의 병마사 박진에게 항복했다고 한다.
전쟁 중에도 민관을 넘어 승려까지 하나가 되는 공동체 정신과 뜨거운 나라사랑이 이들에게 감동을 주지 않았을까 싶다. 행주산성 싸움은 그런 점에서도 의미 깊은 전쟁이다. 권율은 행주산성에서 모두의 단결을 끌어내고, 이제 조선인을 넘어 항왜까지 포용하는 자세로 인간애의 승리를 보여준다. 그 긴 전쟁을 이 땅에서 치러내고서도 한중일 3국 중 우리만 정권이 교체되지 않았던 사유를 이곳에서도 찾아본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
이성무, 명장열전, 청아출판사
이상각, 한국사 인물 열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다음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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