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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한시감상
근정전 / 변계량
勤政殿 卞季良
煌煌金殿照層巒(황황금전조층만) 찬란한 금빛 궁궐 첩첩 산을 비추는데
樹葱籠景氣閒(수총롱경기한) 옥 같은 나무 푸르러 경관이 여유롭네
閶闔九天開日月(창합구천개일월) 구천의 천문(天門)에 밝은 빛이 열리니
衣冠五夜集鴛鸞(외관오야집원란) 선비들은 오경(五更)에 궁전에 모여드네
衆心離合分毫忽(중심리합분호홀) 민심은 순식간에 이합집산(離合集散)하니
百代興衰可鑑觀(백대흥쇠가감관) 역대의 흥망성쇠 거울로 삼아야지
裁決萬機猶未罷(재결만기유미파) 나랏일 처리 아직도 끝나지 않았는데
日斜花影上欄干(일사화영상난간) 해 기울자 꽃 그림자 난간으로 올라왔네
〈감상〉
이 시는 근정전을 노래한 것으로, 시간의 경과에 따라 궁중의 하루 일과를 잘 그려 내고 있다.
근정전(勤政殿)이 뒤에 있는 진산(鎭山)인 북악산(北岳山)을 배경으로 장대하게 솟아 있고, 옥 같은 나무들이 무성하게 푸르러 좋은 풍광을 이루고 있다. 날이 새어 궁궐 문이 열리자 만조백관(滿朝百官)들이 열 지어 조정으로 모여들고 있다. 민심은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 역대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거울로 삼아 경계해야 한다. 정무(政務)에 바빠 처리해야 할 나랏일이 많이 남았는데, 해가 서산으로 기울자 꽃 그림자가 난간으로 올라와 풍경이 아름답다. 변계량(卞季良)은 이 시에서 궁궐의 장엄한 모습 속에 정무(政務)에 바쁜 신하들의 모습과 치국(治國)을 위한 경계를 노래하여 관각시인(館閣詩人)다운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변계량은 관각체(館閣體)를 풍미(風靡)한 사람으로 『홍재전서(弘齋全書)』 「일성록(日省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우리나라의 관각체는 양촌(陽村) 권근(權近)으로부터 비롯되었는데 그 이후 춘정(春亭) 변계량(卞季亮),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 등이 역시 이 문체로 한 시대를 풍미하였다. 근고(近古)에는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호곡(壺谷) 남용익(南龍翼), 서하(西河) 이민서(李敏敍) 등이 또 서로 그 뒤를 이어 각체가 갖추어졌다. 비유하자면 대장(大匠)이 집을 지을 때 전체 구조를 튼튼하게만 관리하여 짓고 기이하고 교묘한 모양은 요구하지 않지만 사면팔방(四面八方)이 튼튼하게 꽉 짜여서 전혀 도끼 자국 따위의 흠은 보이지 않는 것과 같으니, 이 역시 한 시대의 거벽(巨擘)이 될 만한 것이다.
‘살아 있는 호곡(壺谷)이 두렵다.’고 한 말은 관각가(館閣家)에 지금까지 전해 오는 미담이다. 언젠가 옥오재(玉吾齋) 송상기(宋相琦)의 문집을 보니, 이러한 각 문체가 역시 호곡과 서하의 규범과 법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다만 농숙한(濃熟) 기력은 아무래도 미치지 못하였다
(我國館閣體(아국관각체) 肇自權陽村(조자권양촌) 而伊後如卞春亭徐四佳輩(이이후여번춘정서사가배) 亦以此雄視一世(역이차웅시일세) 近古則李月沙南壺谷李西河(근고칙이월사남호곡이서하) 又相繼踵武(우상계종무) 各體俱備(각체구비) 比若大匠造舍(비약대장조사) 間架範圍(간가범위) 只管牢實做去(지관뢰실주거) 不要奇巧底樣子(불요기교저양자) 而四面八方(이사면팔방) 井井堂堂(정정당당) 了不見斧鑿痕(요불견부착흔) 此亦可爲一代巨擘(차역가위일대거벽) 生壺谷可怕(생호곡가파) 館閣家至今傳(관각가지금전) 以爲美談(이위미담) 曾觀玉吾齋宋相琦文集(증관옥오재송상기문집) 這箇各體(저개각체) 亦從壺河規度中出來(역종호하규도중출래) 而但氣力終不及濃熟(이단기력종불급농숙)).”
〈주석〉
〖煌〗 빛나다 황, 〖巒〗 산 만, 〖琪〗 옥 기, 〖葱籠(총롱)〗 초목이 푸르고 무성함. 〖景氣(경기)〗 경관.
〖閶闔(창합)〗 전설상의 천문(天門), 궁문(宮門), 궁전(宮殿). 〖鴛鸞(원란)〗 조정의 관리. 한(漢)나라 궁전의 이름. 〖毫忽(호홀)〗 아주 짧은 시간. 〖萬機(만기)〗 집정자(執政者)가 처리할 각종 정무(政務). 〖干〗 난간 간
각주
1 변계량(卞季良, 1369, 공민왕 18~1430, 세종 12): 본관은 밀양. 자는 거경(巨卿), 호는 춘정(春亭). 4세 때 고시(古詩)의 대구(對句)를 암기하고 6세 때 글을 지었으며, 1385년 문과에 급제하여 전교주부(典校主簿)가 되었고, 1392년 조선 건국 때 천우위중령중랑장(千牛衛中領中郞將) 겸 전의감승(典醫監丞)이 되었다. 1407년(태종 7) 문과중시에 을과(乙科) 제1인으로 뽑혀 당상관이 되고 예조우참의가 되었다. 태종말까지 예문관대제학·예조판서·의정부참찬 등을 지내다가 1420년(세종 2) 집현전이 설치된 뒤 집현전대제학이 되었다. 당대의 문인을 대표할 만한 위치에 이르렀으나 전대의 이색(李穡)과 권근(權近)에 비해 격이 낮고 내용도 허약해졌다는 평을 받았다. 그에게 있어 문학은 조선 왕조를 찬양하고 수식하는 일이었다. 「태행태상왕시책문(太行太上王諡冊文)」에서는 태조를 칭송하면서 조선 건국을 찬양했고, 경기체가인 「화산별곡(華山別曲)」에서는 한양도읍을 찬양했다. 정도전에게 바친 「봉정정삼봉(奉呈鄭三峰)」에서도 정도전이 완벽한 인재라고 칭송했다. 정도전(鄭道傳)·권근(權近)의 뒤를 이어 조선 초기 관각문학(館閣文學)을 좌우했던 인물이다. 20년 동안이나 대제학을 맡고 성균관을 장악하면서 외교문서를 쓰거나 문학의 규범을 마련했다. 『태조실록』의 편찬과 『고려사』를 고치는 작업에 참여했으며, 저서에 『춘정집(春亭集)』 3권 5책이 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제락천정 / 변계량
題樂天亭 卞季良
樂天亭上又淸秋(낙천정상우청추) 낙천정 위로 또 맑은 가을이 왔는데
地戴明君佳氣浮(지대명군가기부) 이 땅에 명군 모시니 서기(瑞氣)가 떠오르네
疎雨白鷗麻浦曲(소우백구마포곡) 부슬비 속 백구는 마포 어귀 날고
落霞孤鶩漢山頭(낙하고목한산두) 지는 노을 외로운 오리는 한산 위로 날아가네
仁風浩蕩草從偃(인풍호탕초종언) 인풍이 호탕하니 풀이 좇아 절로 쓰러지고
聖澤瀰漫水共流(성택미만수공류) 성스런 은택이 가득하니 강물도 함께 흐르도다
宵旰餘閒觀物象(소간여한관물상) 정사(政事)에 바쁘신 여가에 풍광을 감상하니
人間仙境更何求(인간선경갱하고) 인간의 선경(仙境)을 어디서 또 구하리오
〈감상〉
이 시는 태종의 이궁(離宮)이자 한강의 명승지인 낙천정에 쓴 시로, 관각시인(觀閣詩人)답게 임금의 덕을 찬미(讚美)하고 있다.
낙천정에 다시 가을이 왔는데, 밝으신 임금님을 모시고 낙천정에 오르니 상서로운 기운이 피어오른다. 부슬비가 내리는 가운데 마포 어귀에는 흰 갈매기가 날고, 저녁이 되어 노을이 지자 한 마리 오리는 북한산 위로 날아가는 한가롭고 태평스러운 광경이 펼쳐지고 있다. 임금님의 인(仁)한 풍모가 호탕하니 풀인 백성들이 감화되어 쓰러지고, 성스러운 은택이 저 한강에 흐르는 강물만큼이나 가득하다. 임금께서 정치에 바쁘신 여가에 잠시 이곳 낙천정에 올라 풍광을 감상하고 있으니, 인간 세상에 이곳을 빼면 어디가 선경(仙境)이란 말인가?
권별(權鼈)의 『해동잡록』에 변계량의 문재(文才)에 대한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자는 거경(巨卿)이며, 호는 춘정(春亭)이다. 중량(仲良)의 아우이며 문장이 뛰어나게 묘하며 법칙에 알맞아 아담하다. 특히 시(詩)에 능숙한데 맑으면서 난삽하지 아니하고 담담하면서 천박하지 아니하였다. 신우조(辛禑朝)에 나이 17세로 급제하였다.
태종(太宗)은 친구로서 이를 대했고 오랫동안 대제학을 맡아서 20여 년이나 되었으며 큰 나라를 섬기고 이웃 나라와 외교하는 문사(文詞)가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관직은 대제학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密陽人(밀양인) 字巨卿(자거경) 號春亭(호춘정) 仲良之弟(중량지제) 文辭高妙典雅(문사고묘전아) 尤長於詩(우장어시) 淸而不苦(청이불고) 淡而不淺(담이불천) 辛禑朝(신우조) 年十七登第(년십칠등제) 我太宗待以故舊(아태종대이고구) 久典文衡(구전문형) 二十餘年(이십여년) 事大交隣詞命(사대교린사명) 皆出其手(개출기수) 官至大提學(관지대제학) 謚文肅(익문숙)).”
〈주석〉
〖樂天亭(낙천정)〗 태종의 이궁(離宮). 〖鶩〗 집오리 목, 〖偃〗 쓰러지다 언, 〖草從偃(초종언)〗 『논어(論語)』 「안연(顔淵)」에, “군자지덕풍(君子之德風) 소인지덕초(小人之德草) 초상지풍(草上之風) 필언(必偃)”라는 말이 나옴. 〖瀰〗 물이 넓다 미, 〖漫〗 넘쳐흐르다 만, 〖宵旰(소간)〗 소의간식(宵衣旰食, 아침 일찍 옷을 입고 밤늦게 저녁을 먹음)의 준말로, 왕이 정무에 부지런함.
〖物象(물상)〗 외계(外界) 사물(事物).
동년회우왕윤 설연 여유고불부 이시기 / 변계량
同年會于王輪 設宴 余有故不赴 以詩寄 卞季良
今夕神仙醉紫霞(금석신선취자하) 오늘 저녁 신선이 자하주에 취하리니
錦筵銀燭映靑娥(금연은촉영청아) 비단 방석 은촛불이 예쁜 소녀를 비추이리
夜深踏月婆娑舞(야심답월파사무) 야심토록 달빛 따라 너울너울 춤을 추니
滿帽花枝影半斜(만모화지영반사) 모자에 가득 꽃가지 그림자 반쯤이나 기울었네
〈감상〉
이 시는 동년(同年) 과거급제자들이 왕륜사에 모여 잔치를 열었는데 일이 있어 가지 못하고 시를 부쳐 준 것으로, 자긍(自矜)·화려함·해학·여유를 누리는 배타적(排他的) 기득권(旣得權)을 가진 관각문신(館閣文臣)들의 분위기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오늘 저녁 동문 급제자들이 신선처럼 신선이 산다는 자하동(紫霞洞)에 모여 자하주(紫霞酒)를 마시며 취할 것이요, 비단 방석과 은으로 된 촛불이 있는 화려한 잔치에 예쁜 기생까지 함께하고 있을 것이다. 밤이 깊도록 흥에 겨워 너울너울 춤을 추니, 과거급제 후 받은 어사화(御賜花)가 반쯤 기울었을 것이다(술에 취한 동료들의 모습을 해학적으로 그린 것이다).
배타적 기득권은 성품을 형성하기도 하는데, 『필원잡기』에는 변계량의 고집스러운 성품에 대한 일화(逸話)가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문숙공(文肅公) 변계량(卞季良)은 고집스런 성품이었다. 선덕(宣德) 연간에 흰 꿩을 하례하는 표(表)에 ‘유자백치(惟玆白雉)’라는 어구가 있었는데, 문숙공이 말하기를, ‘자(玆)는 중행(中行, 글자를 가운데 줄에 씀)으로 써야 한다.’ 하니, 제공들은, ‘성상(聖上)에 속한 것이 아닌데, 왜 중행이라 이르는가?’ 하였으나, 문숙공은 자기 의견을 고집하였다.
제공들은 취품(取稟, 임금에게 문의함)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는데, 세종(世宗)께서는 제공들의 의견을 옳다고 하니, 공이 다시 아뢰기를, ‘농사짓는 일은 남자 종에게 물을 것이요, 길쌈하는 일은 여자 종에게 물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나라를 다스릴 때에 매와 개를 데리고 사냥하는 일이라면 문효종(文孝宗)의 무리에게 묻는 것이 마땅하오나, 사명(詞命)에 이르러서는 노신(老臣)에게 위임하는 것이 마땅하오니, 다른 사람의 의견을 가볍게 따라서는 안 됩니다’ 하여, 세종이 부득이 그의 의견을 좇았다.
(卞文肅公季良性固執(변문숙공계량성고집) 宣德年間(선덕년간) 賀白雉表詞中(하백치표사중) 有惟玆白雉之語(유유자백치지어) 文肅曰(문숙왈) 玆字宜中行(자자의중행) 諸公曰(제공왈) 不屬上(불속상) 何謂中行(하위중행) 文肅固執之(문숙고집지) 諸公曰(제공왈) 宜取旨(의취지) 世宗是諸公之議(세종시제공지의) 文肅復啓曰(문숙부계왈) 耕當問奴(경당문노) 織當問婢(직당문비) 殿下爲國(전하위국) 若鷹犬宜問文孝宗輩(약응견의문문종배) 至於詞命(지어사명) 當依任老臣(당의임로신) 不可輕許他議(볼가경허타의) 世宗不得已從之(세종부득이종지))”
〈주석〉
〖赴〗 나아가다 부, 〖紫霞(자하)〗 신선이 타고 다니는 자색빛 노을. 여기서는 신선이 산다는 자하동(紫霞洞)이나 신선이 마시는 자하주(紫霞酒)를 말함.
〖靑娥(청아)〗 예쁜 소녀. 〖婆娑(파사)〗 춤추는 모양. 〖帽〗 모자 모.
시위 / 변계량
試闈 卞季良
春闈曾見士如林(춘위증견사여림) 봄철 과장 선비들 수풀처럼 모였는데
萬萬花容有淺深(만만화용유천심) 모두들 꽃 같으나 재주는 제각각이네
李白桃紅都自取(이백도홍도자취) 흰 오얏꽃 붉은 복사꽃 저마다 뽐내지만
天工造化本無心(천공조화본무심) 조물주의 조화는 본래부터 무심타네
〈감상〉
이 시는 과거(科擧) 시험장의 정경(情景)을 읊은 것으로, 관각(館閣) 문인들이 자주 노래하는 소재이다.
봄이 되어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한 선비들이 수풀처럼 많이 모였는데, 봄에 피는 꽃처럼 제각각 다른 재주를 지니고 있다. 하얀 오얏꽃 같은 이도 있고 붉은 복사꽃 같은 이도 있어 저마다 자신의 능력을 뽐내지만, 조물주가 특별한 꽃에 사적인 마음을 더 줌이 없듯이 군주는 무사(無私)하게 인재를 선발할 것이다.
정조(正祖)는 『홍재전서(弘齋全書)』 「일득록(日得錄)」에서 변계량 시의 풍격(風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국초(國初) 변계량(卞季良)과 최항(崔恒)의 문장은 진실하고 꾸밈이 없기 때문에 후생(後生) 소자(小子)들이 종종 모여서 비웃곤 한다. 그러나 그 글의 좋은 점은 바로 풍부하면서도 잡되지 않고 질박하면서 화려하지 않은 데 있다
(國初卞季良崔恒之文(국초변계량최항지문) 眞實無文彩(진실문무채) 後生小子(후생소자) 往往相聚而笑之(왕왕상취이소지) 然其好處(연기호처) 正在於富而不雜(정재어부이부잡) 質而不華(질이불화)).”
“국조(國朝)의 문장가(文章家) 중에서 변계량(卞季良), 최항(崔恒) 같은 사람들은, 문세(文勢)가 원만하고 중후하여 자구(字句)를 다듬는 데나 주력하는 후세 사람들이 미칠 바가 아니다. 지금의 경박한 풍조를 돌려 순후(淳厚)함으로 돌아가게 하자면 마땅히 이들을 법으로 삼아야 하겠지만, 습속(習俗)이 이미 고질화되어 비루하게 여기며 배우려 들지 않는 데야 어쩌겠는가
(國朝文章(국조문장) 如卞季良崔恒輩(여변계량최항배) 文氣渾重(문기혼중) 非後世雕斲者所可及(비후세조착자소가급) 今欲反漓回淳(금욕반리회순) 當以此爲法(당이차위법) 而無奈習尙已痼(이무내습상이고) 卑之不肯學(비지불긍학)).”
〈주석〉
〖試闈(시위)〗 과거 시험장. 〖都〗 모두 도.
감흥 칠수 / 변계량
感興 七首 卞季良
其四(기사)
春蠶復秋蛾(춘잠복추아) 봄철의 누에가 가을에는 나방 되니
歲月無停期(세월무정기) 세월은 멈출 기약이 없구나
人生非金石(인생비금석) 인생은 금석처럼 단단하지 않으니
少年能幾時(소년능기시) 젊은 시절 얼마나 되겠는가
馳名日拘束(치명일구속) 이름을 내려니 날마다 얽매이고
靜言心傷悲(정언심상비) 말없이 지내자니 마음이 슬프구나
旣壯不努力(기장불노력) 젊어서 노력을 하지 않으면
白首而無知(백수이무지) 백발이 성성토록 아는 것이 없다오
思之一長歎(사지일장탄) 생각하며 길게 탄식하니
庶幾來可追(서기래가추) 오는 것을 따를 수 있을 것 같네
〈감상〉
이 시는 입신(立身)의 어려움과 빠른 세월 그리고 다가오는 미래에 대한 기대에 대해 노래한 것이다.
봄에는 누에였던 것이 가을이 되면 어느새 나방이 되어 하늘로 날아간다. 세월이 너무나 빨리 지나간다. 그러한 세월을 살아가는 사람의 삶은 쇠나 바위처럼 변화가 없는 것이 아니니, 젊은 시절이야 얼마나 되겠는가? 세상에 이름을 떨치려니 날마다 세속의 일에 얽매여야 하고, 가만히 지내자니 마음만 아플 뿐이다. 젊어서 학문에 정진하지 않으면 늙어서 아는 것이 없게 되니, 젊은 시절에 학문에 노력해야 한다. 이런 것을 생각하며 길게 탄식하니,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지만 앞으로 다가오는 것은 따라갈 수 있으니, 미래에 대해 희망을 가지자.
〈주석〉
〖蛾〗 나방 아, 〖停〗 머무르다 정, 〖庶幾(서기)〗 거의 되려함.
〖來可追〗 『논어(論語)』에, “초나라 광인인 접여가 공자 앞을 지나며 노래하였다. ‘봉이여, 봉이여! 어찌 덕이 쇠하였는가? 지나간 것은 간할 수 없거니와 오는 것은 오히려 따를 수 있으니, 그만둘지어다! 그만둘지어다! 오늘날 정사에 종사하는 자들은 위험하다’(楚狂接輿歌而過孔子曰(초광접여가이과공자왈) 鳳兮鳳兮(봉혜봉혜) 何德之衰(하덕지쇠) 往者不可諫(왕자불가간) 來者猶可追(내자유가추) 已而已而(이이이이) 今之從政者殆而(금지종정자태이))”라 하였음.
신흥유감 / 변계량
晨興有感 卞季良
早年遊學也悠悠(조년유학야유유) 젊어서 유학하던 일 아득하더니
只向名途走不休(지향명도주불휴) 다만 명예의 길을 향해 쉼 없이 달렸네
昨夜燈前倍惆悵(작야등전배추창) 어젯밤 등불 앞에 매우 서글퍼지니
雨聲如別一年秋(우성여별일년추) 빗소리 한 해의 가을을 이별하는 듯
〈감상〉
이 시는 새벽에 일어나 감흥(感興)이 있어 지은 것으로, 자신의 삶을 회고하고 회한(悔恨)에 잠겨 읊은 노래이다.
가을비 오는 밤, 등불을 켜 두고 스승의 문하에서 수업하던 예전을 추억하니, 아득하기만 하다. 그런데 대의(大義)는 이룬 것이 없고 공명(功名)에만 빠진 자신을 되돌아보니, 서글퍼진다. 밖에는 가을비가 내리고 있는데, 벌써 한 해가 또 가려나 보다.
이 외에도 홍만종은 『소화시평(小華詩評)』에서 변계량과 정사룡(鄭士龍)의 시를 서로 견주어 다음과 같은 평을 남기고 있다.
“우리나라 춘정 변계량이 지은 ‘강마을에 새벽 되자 환한 빛이 하늘과 닿았고, 버드나무 방죽에 봄이 찾아오니 누런빛이 땅 위에 떠도네(「장부경도(將赴京都) 장단도중(長湍途中) 기정정곡(寄呈鼎谷)」)’라는 시구가 있고, 호음 정사룡이 지은 ······라는 시구가 있다. 두 사람 또한 모두 신령의 도움이 있었다고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춘정의 시는 경물묘사가 신선하기는 하지만 신령스러움을 볼 수 없다. 호음의 시는 지극히 맑고 허허로운 기상이 있으니, 신령의 도움을 얻었다고 해도 과찬은 아닐 것이다
(我東卞春亭季良(아동변춘정계량) 虛白連天江郡曉(허백련천강군효) 暗黃浮地柳堤春(암황부지류제춘) 鄭湖陰(정호음) ······兩公亦皆矜神助(양공역개긍신조) 春亭詩寫景雖神(춘정시사경수신) 未見其神處(미견기신처) 湖陰詩極有淸虛之氣(호음시극유청허지기) 雖謂之神助(수위지신조) 亦非過許(역비과허)).”
〈주석〉
〖悠悠(유유)〗 아득한 모양. 〖惆〗 슬프다 추, 〖悵〗 슬프다 창
영회 / 이석형
詠懷 李石亨
虞時二女竹(우시이녀죽) 순임금 때의 두 여인의 대나무요
秦日大夫松(진일대부송) 진시황 때의 대부였던 소나무
縱有哀榮異(종유애영이) 비록 슬프고 영화로움이 다름은 있지만
寧爲冷熱容(영위랭열용) 어찌 차고 뜨거운 얼굴을 하리오
〈감상〉
이 시는 가슴속의 마음을 읊은 것으로, 세조(世祖)의 왕위찬탈과 사육신(死六臣)의 단종(端宗) 복위(復位) 운동을 배경으로 풍자(諷刺)의 뜻이 담겨 있다.
순임금 때의 두 왕비인 아황(蛾黃)과 여영(女英)이 순임금의 죽음을 듣고 상강의 대나무 숲에 눈물을 뿌리고 죽은 것은 단종 복위를 계획했다 처형된 성삼문(成三問) 등을 비유한 것이고, 진시황제가 비를 피하고 소나무에 대부라는 직위를 내린 것은 신숙주(申叔舟) 등 세조의 왕위찬탈을 도운 사람들에 비유한 것이다. 비록 사육신(死六臣)의 죽음이 슬프고 신숙주 등의 영화가 다름은 있지만, 그렇다고 슬픈 사육신이 기운이 빠져 차가운 얼굴을 할 것이 뭐가 있으며, 신숙주 등이 기뻐서 열이 날 정도로 뜨거운 얼굴을 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해동악부(海東樂府)』에는 이 시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일화(逸話)가 실려 있다.
“이석형(李石亨)의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세종 때에 삼장원(三壯元)에 올라 그 이름이 한때 으뜸이었으며, 성삼문·박팽년 등과 서로 가장 친하였다. 세조가 즉위하자 마침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복을 마치자 곧 전라 감사를 제수받았다. 병자년 6월 25일에 성삼문 등의 옥사(獄事)가 일어났으나, 석형은 외임(外任)에 있었기 때문에 연루되지 않았다. 27일 순찰 길에 익산(益山)에 이르러 여러 사람이 모두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시 한 수를 지어 벽 위에 써 놓고, ‘병자년 6월 27일에 지었다’고 썼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라 하였다.
그때 대간이 그 시의 뜻을 국문하기를 아뢰어 청하니, 세조가 그것을 보고 말하기를, ‘시인의 뜻이 있는 곳을 모르니, 어찌 반드시 그렇게 하랴?’ 하여, 일은 마침내 그치고 말았다
(李石亨延安人(이석형연안인) 英廟朝(영묘조) 登三壯元(등삼장원) 名冠一時(명관일시) 最與成三問朴彭年諸人相切(최여성삼문박팽년제인상절) 光廟受禪(광묘수선) 適丁內憂(적정내우) 服闋(복결) 卽除全羅監司(즉제전라감사) 丙子六月二十五日(병자륙월이십오일) 成三問等獄事起(성삼문등옥사기) 石亨以外任之故(석형이외임지고) 不爲連累(불위련루) 二十七日巡到益山(이십칠일순도익산) 聞諸人盡死(문제인진사) 遂題一詩于縣壁上(수제일시우현벽상) 書曰丙子六月二十七日作(서왈병자륙월이십칠일작) 詩曰(시왈) 虞時二女竹(우시이녀죽) 秦日大夫松(진일대부송) 縱有哀榮異(종유애영이) 寧爲冷熱容(영위랭열용) 其時臺諫啓請鞫問詩意(기시대간계청국문시의) 光廟覽之曰(광묘람지왈) 詩人命意(시인명의) 不知所在(부지소재) 何必乃爾(하필내이) 事遂止(사수지)).”
〈주석〉
〖二女竹(이녀죽)〗 열녀(烈女)의 상징으로 쓰이는데, 순(舜)임금이 남쪽에 순행하다가 죽자, 그의 두 비(妃)가 상강(湘江)에서 슬피 울 때, 피눈물이 대숲에 뿌려져 반죽(斑竹)이 되었다고 함.
〖大夫松(대부송)〗 진시황(秦始皇)이 태산(泰山)에 놀러 갔다가 도중에 비를 만나, 다섯 소나무 밑에서 비를 피했으므로, 그 소나무에 대부(大夫)의 벼슬을 주었다고 함.
각주
1 이석형(李石亨, 1415, 태종 15~1477, 성종 8):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백옥(伯玉), 호는 저헌(樗軒). 김반(金泮)의 문인이다. 1442년(세종 24)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정언이 되었다. 1447년 응교로 있을 때 문신 중시에 급제했다. 1451년(문종 1) 집현전직제학으로 춘추관기주관을 겸직했으며, 이때 정인지(鄭麟趾) 등과 『고려사』·『치평요람』의 편찬에 참여했다. 1453년 계유정난으로 세조가 병권과 정권을 장악하자, 정인지·신숙주 등과 더불어 훈구파의 대표적 인물로 부상했다. 1455년(세조 1) 첨지중추원사를 거쳐 전라도관찰사로 나갔다. 1456년 6월 사육신(死六臣) 사건이 일어나자, 사육신의 절의를 칭송하는 시를 익산 동헌에 남겨 대간에서 치죄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세조에 의해 예조참의에 올랐다. 1460년 황해도관찰사로 세조의 서계(西界) 지방순행을 도왔다. 그 뒤 대사헌·호조참판 등을 거쳐 팔도체찰사로 호패법(號牌法)의 시행을 감독했다. 1468년 세조가 죽은 후 고부겸청시승습사(告訃兼請諡承襲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70년(성종 1) 판중추부사가 되고, 이듬해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으로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저서로 『저헌집』이 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