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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당 김은호(以堂 金殷鎬) 연구
1.서론
이당 김은호(以堂 金殷鎬 1892~1979)는 근대 한국화의 새로운 전개 상황에서 천부적인 세필묘사의 재질과 섬세한 성격으로 수묵담채화 편중의 전통화단에 채색화의 바람을 일으키며 이당예술의 독보적 실현을 이룬 작가이다.
전통적인 기법정신으로서 그의 새로운 채색화법은 1920년 이후 전통회화 양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한편, 1925년 일본유학의 결과로 서구화법이 가미된 신일본화를 통해 사실주의를 흡수하며 자기만의 독자적 양식을 정립하였다.
후에 후진양성에 뜻을 두어 조선미술원과 고려미술원 등에서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으며 그들에 의해 후소회(後素會)가 설립(1936년)되어 수묵화 계열과 균형잡힌 발전을 지향한 다채로운 채색화계열을 형성시키게 된다.
이당은 독보적인 섬세한 필선과 현실적인 아름다움을 갖는 채색기법으로 누구보다도 주목과 찬탄의 대상이 되어온 작가이다. 그의 채색화는 특히 미인도와 인물풍속화에서 그 기량을 인정받아 왔으며 그 외에도 화조화류와 일상적 소재를 그린 채색화가로 유명하다.
그의 화사하고 깔끔한 화면들은 때로 신일본화의 추종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통적 회화사상과 예법을 충분히 소화하여 익히고 계승하되 시대적 변화에 따른 대중의 미의식을 존중하며 자신의 細技를 예술적 기교와 독자적 조형미로 발전시키려 한 그의 작품세계는 한국 근현대 전통화단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본고에서는 이당 김은호의 작품세계를 미인도에 국한시키지 않고 화조화와 수묵화로 확대시켜 살펴보고 이러한 이당의 회화가 만들어지게 된 시대적, 미학적 배경과 작가관을 아울러 분석해보고자 한다.
2.본론
2-1. 시대적 배경
근대란 봉건체제에서 벗어나는 시민적 자각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개항이전에 이미 한국엔 그 나름의 근대적 자각이 싹트고 있었으며 이 같은 근대적 자각이 서구적 근대화의 방법적 도입과 어떻게 대응되면서 근대화의 독자적 유형을 형성했는가를 가늠해 보는 것이 우리의 근대를 추적하는데 바람직한 방법이 된다.
사실 17세기 이후 조선왕조 후기의 문화계는 민중문화라고 부를 수 있을 새로운 문화영역을 형성해 갔으며 그 결과 성리학적 문화체제는 서서히 무너져 갔다. 이후 실학사상의 대두와 일반민중의 의식이 성장함에 따라 충분히 외국의 근대문화를 주체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된다.
그러나 결국 보수적 정치세력과 주체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서구의 근대문화는 단순한 이식과 모방의 영역에 머물게 된다. 근대화가 곧 서구화로 등식되고 그 서구화란 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불구적 근대화의 과정을 겪게 된다. 한국의 근대적 자각이 정신사적으론 이미 18세기에 분명히 싹트고 있으나 19세기로 이르면서 위축된다.
한국화에 있어서 근대회화의 기점은 대략 19세기말에서부터 시작한다. 이 시기의 회화는 소림과 심전에 의한 조선후기 회화의 전습과 신문화의 영향에서 비롯한 근대적 상황을 작품속에 구체화시키려는 움직임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서구미술의 전래와 일본화(일본채색화)의 영향에 의해 강한 자극을 받으면서 조선후기의 회화와는 이질적인 변화가 실질적으로 이루어지게된다. 이와같은 근대적 채색화의 형성은 이후 일제식민기간동안 전반적인 한국회화에 일본화의 영향을 지대하게 주게된다.
더욱이 일본이 동양지역에서는 서구문명을 가장 먼저 받아들여 동양의 전통회화에서는 볼수 없었던 신일본화의 확립이 이루어지면서 그 영향력 또한 커졌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근대적인 채색화의 형성과정에 있어서 일제에 의한 국권상실이라는 정치적, 사회적 불안은 오히려 우리의 것을 고수하려는 복고적 경향의 것과 새로운 것이 공존하게 된다. 이는 전환기적인 시대적 특징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김은호가 활동하던 시기의 우리나라는 일본 제국주의를 경유한 서구적 제도와 문물이 전통적인 질서를 대신해 나가던 상황이었으며 이로써 근대 화단은 과거와는 크게 다른 양상을 보이며 전개되었다. 봉건시대 절대적 문화가치의 기준이었던 중국의 영향 일변도에서 서구화된 일본의 문화가 잠식해 들어오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화단 전체가 일본화풍의 영향을 직, 간접적으로 받게 된다, 중국에서도 서구화에 성공한 일본의 체제를 연구하면서 한편으로는 문화적인 영향을 수용하기에 이른다. 서양화를 수용하여 새로운 화풍을 형성하고 이로써 전통화의 근대화를 이룬다는 것은 조선, 중국, 일본 모두에게 적용되었다.
그러나 근대기 우리나라에 있어서 화풍의 근대화는 정부주최의 조선미술전람회에 의해 전통화가 포괄적이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는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조선미술전람회는 화가들의 작품을 평가하고 등급화하였는데 국내에서 가장 권위있는 전람회로서의 평가는 화가의 생계와 명예에 직결된 문제였기에 전람회가 요구하는 양식을 수용하지 않기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근대기 회화는 '화풍의 근대화'라는 전통화의 극복이라는 주제에 대해 화가들이 심사숙고할 여지를 일정 부분 빼앗긴 채 타인에 의해 주입된 화풍으로 흐르게 되었다. 이런 상황은 수묵화단보다 채색화단에서 더욱 심한 양상을 나타낸다.
2-2. 김은호의 생애
이당 김은호는 1892년 6월 24일 경기도 인천의 김기일의 2대 독자로 태어났다. 이당의 어려서 이름은 良殷이며 마을 서당에서 한문을 배운다. 그의 아버지가 위폐범으로 몰려 가산이 몰수되면서 집안이 어려워지고 이당은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인쇄소 직공, 도장 파는 일과 이발소 잡역, 제화공, 측량조수 등의 일을 전전하며 생계를 근근이 유지하게 된다.
교회 교인인 영풍서관의 주인으로부터 책을 베끼는 일감을 받아 작업다던 중 백당 현채 노인과 김교성 중추원참의에게 세필 솜씨를 인정받게 된다. 김교성이 서화미술회의 선생으로 있던 심전 안중식에게 보낼 편지 한 장을 써주게 되면서 이당의 화가로서의 길은 시작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미술학교였던 서화미술회는 한일합방으로 흉흉해지는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일본이 소위 문화정책을 내세워 이왕직과 손잡고 만든 것으로 이완용이 회장을 맡고있었다. 畵科의 선생이 소림 조석진과 심전 안중식으로 전통화법을 익힌 이들이 교재로 사용하던 것도 개자원화보와 같은 전통화보로 전통적 학습방법을 그대로 물려받고 있었다.
비록 오래 지속되지 못한 미술학교이기는 하나 서화미술회에서 양성된 화가들은 근대기 화단을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해냈다. 오일영, 이용우, 김은호, 박승무, 최우석, 이상범, 노수현 등으로 이들은 화단의 견인차 역할을 한 화가들이다,
이들은 서화미술회에서 수묵화와 채색화기법 등 전통적인 모든 화법을 지도받았다. 1912년 서화미술회에 입학하고 '내림그림'이라는 찬사를 받았던 김은호는 입학한 지 얼마되지 않아 어진을 봉사하는 천운의 기회를 얻었다.
당시 김은호의 세필인물화의 뛰어난 실력은 '그림천재'로 일컬어지면서 널리 알려지고 있었다. 보기드문 실력의 김은호는 어진을 봉사한 후 많은 초상화 제작을 주문받았으며 이로 인해 이전의 궁핍한 생활에서 벋어나게 된다.
김은호의 초상화 기법에 대하여는 육리문을 표현하는 조선 전통의 초상기법이라는 주장과 서양화, 일본화로부터의 자극과 근대적 미감에 기인하여 대상인물의 사진을 참조하게 됨으로써 대상에 대한 관찰방식이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버린 시대상황의 결과로서 전통과는 다른 인물기법을 사용하였다는 주장이 있다.
초상을 그리면서 살림을 꾸려가던 김은호는 초상에서 뿐 아니라 화훼분야에서도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게 되고 서화협회 등의 전람회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가가 된다.
서화미술회를 마치고 안정된 기반을 마련한 김은호는 1919년 기미년 독립만세 운동 당시 독립신문을 돌리다 체포되어 약 1년간의 옥고를 치루게 된다. 이후 생활은 다시 어려워지고 생계를 위한 화업은 계속되었다.
1922년 문화정책을 표방한 일본은 자국의 제국미술전람회를 본떠 조선미술전람회를 개최하였고 우리나라 대부분의 서화가들이 출품하게 된다. 제 1회 선전에서 김은호는 <미인승무도>를 출품하여 4등상을 차지한다. 세필채색화에서 단연 독보적인 존재였던 김은호의 작품들은 당시 가장 인기를 얻던 것들로 동료들의 시샘도 유달랐던 것 같다.
1925년 김은호는 다소 감정적으로 얽혀있던 우리나라 화단과 떨어져있기 위해 일본유학을 떠나게 되고 이는 당시의 부호였던 단자 이용문의 도움으로 이루어져 소정 변관식과 함께 가게 된다.
일본에 도착한 그들은 선전의 심사위원이었으며 제 3회 선전에서 김은호와 변관식의 작품을 각각 3등 4등으로 뽑아주어 지면이 있던 일본 남화의 대가인 小室翠雲을 방문하여 지도를 의뢰하게 된다.
남화를 하던 그는 변관식의 지도를 수락하되 김은호에게는 북화를 하는 화가를 소개시켜 주게 된다. 김은호의 스승이 된 화가는 제국미술전람회의 심사위원으로 있던 結城素明이었다. 그는 비록 한때 폐단이 많았던 문부성미술전람회를 외면하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연구를 위한 단체를 만들기도 하였지만 그렇다고 반관전의 기치를 내세웠던 화가는 아니었다.
폐단의 심각성으로 인해 문부성전람회는 제국 미술전람회로 바뀌면서 변화를 꾀하였는데 여기서 그가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사실은 제도권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화가였음을 입증하다. 일단 김은호는 結城素明을 소개받기는 했지만 화풍의 구체적인 지도를 받았다고 보기는 현재 남아있는 작품으로 확인해 볼 때 단정짓기가 쉽지 않다.
결성소명이 풍경같은 산수에 관심을 두고있던 화가였던데 비해 김은호의 최대 관심화제는 미인화였다. 김은호와 결성소명의 화풍의 공통점으로는 대형화면의 느낌보다 자신의 주변을 주제로 하는 소풍경과 생활풍경을 그린 사실을 들 수 있다.
아마도 김은호는 스승의 가르침에 의존하기보다는 동경미술학교를 자유로이 드나드는 것을 허락받아 당대의 주도적인 화풍을 스스로 익혀나갔던 것 같다. 김은호는 동경 제국미술전람회에서 조선화가로는 최초로 입선하는 영광을 안았다.
입선작은 한복을 입고 거문고를 타는 여인을 그림 미인화로 그 구도는 수직과 수평의 비례를 고려한 정적이면서도 예리한 느낌을 주는 일본화적 구도이다. 재능이 있는 화가답게 일본 현지의 현황을 잘 파악한 김은호는 일본의 구도와 화법을 수용하여 자신의 화면에서 구사하였다.
일본에서 활동하던 당시에도 김은호는 선전의 출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일본에서 일시 귀국한 1927년 제 6회 선전에 출품한 풍경화로 특선을 차지한다. 이 작품은 전경을 크게 포착하여 일본 회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구도를 취하고 있는 전형적인 일본적 산수풍경화풍이다.
나뭇가지가 부채골모양으로 펴진 소나무의 형태는 일본 大和會에서 볼 수 있는 전형화된 소나무의 모습이다. 화면이 종장도 횡장도 아닌 서양의 풍경화에서 볼 수 있는 사이즈의 구성은 당시 일본 산수풍경에서 유행하던 것이였다.
이러한 풍경화는 다음해 선전에도 출품된다. <모춘의 아침>이라는 이 작품은 과거 동양화에서는 볼 수 없는 사이즈로 제작되었는데 이도 역시 전경의 소나무를 중심으로 화면에 배치하여 후경과의 원근감을 과장하고 있다.
제국미술전람회에서의 입선작에서 보여준 일본화풍을 따른 구도를 김은호는 산수풍경에서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일본화의 영향은 미인화나 풍경뿐만 아니라 화조화에서도 보이고 있어 김은호가 전 장르에 걸쳐 일본화의 영향을 받고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김은호는 일본에서 보다 다양한 일본화를 접하고 그 본질적인 성격을 파악, 흡수하여 화면에 이를 전폭적으로 수용하면서 일본화풍에 동화되어 간다. 그가 일본에서 주로 관심을 두었던 분야는 전문분야였던 미인화를 포함하여 산수풍경과 화조였다.
그리고 그가 주로 그렸던 이러한 분야들은 동경화단과 경도화단의 주제선택의 차이에서 오는 일면을 반영하고 있다. 동경의 일본화 신파가 역사화와 같은 사상과 이념성에 강하게 경주해 있었던 반면 경도화단은 산수풍경과 화조와 같은 평이한 주제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경도화단의 화풍은 당시 부상하는 부르조아 계층에게 인기가 높았던 것으로 동경화단의 작품들 일부가 기존화법과의 격차로 인해 거부감을 주던 사실과 비교해 볼때 대조적이다. 1920년대 후반 김은호의 휴학기에 그려진 작품들은 일본 근대화풍의 사실적이면서도 평이한 주제를 바탕으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화풍을 주로 발표하고 있었다.
1928년 귀국 후 김은호는 제작에 힘을 쏟는 한편 후진양성에도 큰 역할을 한다. 백윤문과 김기창, 장우성,이유태, 조중현, 조용승 등이 그의 밑에서 기량을 익히고 학습했다. 1930년대 중반부터 오늘에 이르는 우리의 전통회화의 현대적 흐름에서 앞에 열거한 '낙청헌 출신 화가'들의 활약과 위치는 중요하다.
그들은 친목도모의 동문모임이면서 미술계 진출의 공동의욕을 다짐한 후소회를 조직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다. 이당은 후소회 이외에도 조선미술원(1936년)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선전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며 갈등을 겪기도 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은 김은호는 하지만 역시 당대의 세필채색화의 일인자로 공인되어 전람회의 심사위원이라는 자격을 부여받게 된다. 그러나 이 시기(1937년) 서울에 와 있던 일본인 화가들의 반대로 심사참여의 자격으로 격하된다.
해방을 맞이하여 김은호는 1937년에 제작한 '애국금채회' 여성들이 수집한 금비녀를 일본총리에게 헌납하는 그림이 빌미가 되어 친일화가로 낙인찍히는 수모를 겪게 된다. 그러나 그의 세필채색화의 유명세는 쉽게 누그러지지 않았으며 국회의장 신익희의 주문으로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초상을 제작하는 등 해방 이전에는 미치지 않을 지라도 여전히 높은 인기를 구가하였다.
1957년에는 제 6회 국전의 비리를 비판하고 그 해 10월 21일자 신간에 '선배의 도의를 찾자'를 발표, 공정하지 못한 국전심사에 회의를 갖고 한동안 외면하였다.
이 시기의 그의 작품중에는 고유한 여장의 아름다움에 역점을 둔 초기의 작품을 연작하거나 화법을 게속하였는데 특히 1958년에 원각사 벽화에 그려진 <승무>는 세 번이나 거듭 그려진 작품으로 그가 미인도 연작중에서도 승무에 더욱 많은 비중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1960년 들어서서 새로운 창의성과 만년의 정열을 전과 다르게 산수화 작업에 몰두한다. 이미 40대 중반에 확립시킨 인물 채색화의 대가라는 평가를 고수하면서 한편 1960년 초기부터 산수 풍경화에 투명하고 강렬한 순색을 농담과 담채의 화파적인 필치와 독특한 수법으로 전개시킨 작품들을 해나간다.
그의 산수화풍은 남종화법의 절충된 새로운 양식과 사실적 현실감각이 구비된 품격으로 인정받고 있다.
1961년 5.16혁명으로 재 편성된 대한민국 미술전람회의 동양화 분과 위원장을 역임하여 제 10회 국전에 <춤>을 발표하였으며 그후 춤추는 자태에서 마음껏 색채감을 발휘한 <장고무><무희>등의 미인도를 발표한다,
1965년에 3.1문화상을 1968년에는 예술원상을 수여받았다. 그는 또한 만년에 이르기까지 놀라운 정력과 활동으로 조금도 흐트러짐 없는 기량을 발휘하는 초상화를 제작하였는데 1962년에 강릉의 오죽헌에 <신사임당><이율곡>과 경남 밀양에 있는 <아랑>, 1966년에 해남 우수영의 <이충무공>과 <간디상>을 1967년에는 <안중근>초상화를 그렸다.
1960년대 이후의 만년에도 이당의 새로운 정신적 젊음과 팔순의 노경을 흐트러짐 없는 예술의 정열을 반영하여 새로운 색채표현법과 치밀한 사실주의를 그려냈으며 개인전과 그룹전을 통해 화의에 따라 자유롭게 알맞은 수법을 취한 기량을 선보였다.
1966년 중앙일보 주관 제 1회 현대동양화 10인전에 <군선도> 등의 작품을 출품하였고 1970년 '이당선생 회고전'에 <청선산수>등 60여점의 작품과 자료를 전시하였다.
1971년 서울신문사 기획의 '6대가전', 1972년 국립현대미술관 기획의 '한국근대미술60년전', 1973년 국립현대미술관 기획의 '한국현역작가 100인전' 등에 지속적으로 작품을 발표한 그는 팔순의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세필기교에서 여전히 뛰어난 기량을 선보이고 있었다.
1977년 중앙일보에서 자서전 '서화백년'이 간행되고 이듬해 한국근대미술연구소에서 화집 '이당 김은호'가 간행되었다. 일제치하와 한국동란 등 만장한 환경속에서 끊임없이 작업에 몰두해 온 그는 1979년 2월 7일 87세의 나이로 생애의 막을 내린다.
김은호는 조선왕조 말기 태어나 일제침략의 어려운 상황에서 타고난 재능을 발휘, 초상화를 제작하여 왕조 마지막 어용화사로서 당대 최고의 명성을 얻었다, 초상화에서의 성공은 여인의 추상적인 아름다움을 가공의 인물로 구체화시킨 미인화로 이어졌다,
초상 인물화 부분에서의 최고의 명성은 미인 인물화가 협전 및 선전에서 좋은 금액으로 팔려나간 것과 수상이라는 매개를 통해 입증되었고 그의 화단에서의 입지는 더욱 확고해졌다. 이렇듯 인물화에서의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면서 후진양성에도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2-3. 김은호의 작품세계
(1) 인물화
이당 김은호는 20대 중반에 이미 어용까지 그린 인물초상화의 제 1인자로 전통화단에 군림하였다. 미인도 초상화로 대표되는 정밀한 선과 현실적인 채색의 조화는 시대적 양식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그의 초상화 및 미인도에서 보여지는 사실적인 아름다움은 과거의 영정 형식과 미인도 수법의 현대적 전개로서 이당의 독보적 표현으로 평가되고 있다.
우리가 흔히 세필화가의 경지로 말하는 이당의 수법은 대체로 1930년 후기로 보게되는데 1943년 22회 국전 출품작<승무>에 대하여 윤희순은 "신진작가들 중의 향토적 고유한 풍은 이당의 승무에서 그 근원적인 전형을 엿볼 수 있다, 이당은 상의 人이 아니라 技의 人이다. 技에서 이루어진 품이기 때문에 누구보다고 순수한 회화의 人이라 하겠다. 그리고 미인화가로뿐만 아니라 향토화가로서도 높은 자리에 있다. 무녀의 용필의 묘, 유려한 선, 적채의 고아 의문에 이르기까지 닦여진 기법은 완전하다. 전통의 기법인으로 유일한 존재인 이당에게 더 무엇을 요구한다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이당의 화면을 성실히 관조하면 장내의 다른 작품들이 소루한 기법에서 저회되고 있는지를 깨달으리다. 이당은 심전, 소림 이후의 기법인으로는 최고봉이다."라고 평하고 있다.
윤희순이 지적한 완벽한 기법과 그 전통적 품격의 경지는 바로 이당 예술을 일관하는 특질로 보아지며 또한 회화예술의 본질로 접근해간 한 방법의 확실한 구현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이당의 예술은 그 어떤 화제 필법에도 구애됨이 없이 풍부한 역량의 작가로서 전통회화 사상과 화법을 소화하여 양식적으로는 전통에 근거하고 있으며 거기에 새로운 현대감각을 부여함으로써 어느 一技에 치우치지 않고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서양화법과 신일본화법을 시대감각에 맞게 소화한 데서 비록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당은 북종화법인 선묘채색으로 역사화와 어진 등 명인의 초상화를 제작하였고 신일본화풍을 도입하여 그의 독자적인 신화법으로 작품을 제작하였으며 만년에 이르기까지 줄곧 정제됨과 단아함, 선려와 세필채색으로 일관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당은 1912년 서화미술회에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전통화법을 익히게 된다. 전통화법을 익히게 된 이당은 심전에게서 조선말기의 전통적인 초상화법을 상세히 배우게 된다.
그의 최초작품인 <순종초상>을 비롯하여 <최제우상> <최시형상> <김인국상> 등 초기작들은 대부분이 전통적 양식수법을 기반으로 한 역사인물화와 초상화가 대부분이다. 최시형상이 사진을 참고로한데 비해 김인국상은 직접 모델을 대하며 그린 초상화이다.
제작 방식은 전통적 양식에 기인하되 배경의 비전통적 장식문양과 사실성으로 이당의 창조적 요소들을 찾을 수 있다. 1915년 서화미술회 화과를 졸업한 이당은 미인도를 그리기 시작했는데 인물이 지닌 표정뿐만 아니라 전신의 동작에서 포착되는 우아한 선감의 표현과 세필기법의 뛰어난 개성적 색채의 효현을 유감없이 표출시키고 있다.
특히 <승무>는 아름다운 여인의 승무하는 자태를 묘사한 것으로 하얀 고깔 속에 비치는 여인의 모습과 무복의 주름이 그의 정교하고 섬세한 선으로 율동미를 잘 표현하고 있다.
일찍부터 대가의 분위기로 화단에 굳건한 위치를 차지한 이당은 1920년대 그의 나이 30대에 들어서서 개성있고 독창적인 면모를 보이기 시작한다.
이당은 선전과 협전을 통하여 초기의 전통적 화법을 지속하면서 명랑하고 장식적인 일본채색주의를 흡수하는데 이 당시의 인물화는 초기보다는 현실적 정경을 더욱 많이 다룬 일상생활의 소재가 작품의 특징으로 나타나게 된다.
1921년 제 1회 협전에 출품한 <逐蝶美人圖>와<愛蓮美人圖>는 그 좋은 예로 나타난다. 당시 신문보도에서는 '색채에 있어서 선명하고 고요한 수법으로 관객의 안목을 놀라게 하였다'라고 보도하고 있어 그의 화법이 매우 참신했음을 말해준다.
더구나 <逐蝶美人圖>는 그 시대로서는 파격적인 그림값인 3백원에 당장 예약되면서 이당의 화단위치와 기량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알려주고 있다.
꽃바구니를 들고 있는 미인도 역시 사녀도의 옛그림에서 자주 등장하는 소재이며 비록 도식적이고 장식성이 강하게 보이는 배경처리 기법을 주로 쓰고 있지만 비교적 사실감이 큰 현실적 시각으로 표현된 조망이며 색채감각에서도 화풍의 시대에 따른 변이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이는 이당의 시대적인 새로운 화법 개척의 의지에 전통화법의 바탕이 절충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1923년 제 3회 협전에 출품한 <의사>는 당시 유행이던 투명한 흰숄을 길게 돌려 뒤로 나부끼는 모습으로 신식 헤어스타일과 굽 높은 구두에 길지 않은 치마를 입은 그시대의 매력적인 신 여성상을 표현하고 있다. 섬세하고 감미로운 표현은 이당의 세필기량과 정밀한 색채구사의 참신성에 의해 뒷받침되고있다.
구도와 소녀의 자태, 특히 얼굴 묘사는 일본화의 신화법에서 영향받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1923년 제 2회 선전에 출품한 <아가야 저리가자>는 화면전체가 완전히 현실적 사실주의로 일관되어 있으며 현실시각을 존중하고 있다.
주변현실과 일상적 인물 풍속을 소재로 다룬 이당의 새로운 화법이 섬세한 필치로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 또한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일본화적 구도와 기법을 원용하되 그 소재가 한국의 민속적인 부분에서 취해졌음이 다를 뿐임을 간과할 수 없다.
이당은 단순한 전통적 계승에 만족하지 않고 신일본화법에 감화를 받으면서 작업에 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화법안에는 새로운 근대화법인 서양화법의 음영법이 가미되어 독자적인 세필채색의 특징을 나타나고 있다.
유학을 계기로 1920년대 후반에는 주제면에서나 기법면에서 거의 일본화풍을 따르게 되나 1930년대 접어들면서 그는 일본화풍을 완전히 소화하여 그만의 독특하고 섬세한 필치로 작품을 전개시켜 나간다. 이당이 동경으로 건너간 1925년 당시는 1868년 명치이래 신일본화가 융성하던 시기였다.
그곳에서 이당은 몽롱하고 애잔한 신일본화풍에 감명을 받게 된다. 1926년 제국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하게 되고 서울에서도 활동을 계속한다. <간성>은 선전 출품작으로 새로운 현실적 표현감각과 색채면에서 한결 부드러워진 이당의 미인도의 특징이 잘 나타난 작품이다.
채색화에 있어서 기법적으로 일본화의 영향을 농후하게 반영한 작품이라 볼 수 있지만 이러한 현실을 포착하여 현실 시각에 중점을 두었다는 것이 이당이 새로 개척한 회화방법이었다.
1930~1936년까지 이당은 선전에 출품하지 않고 후진양성에만 힘을 기울이는 한편 고전적인 신선도를 전통양식으로 수없이 제작하게 된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반시대적인 그림에도 불구하고 그림의 사회적 요구는 그쪽 대로의 전통애호와 충족의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사회적 명성이 이미 정상에 달하고 그 자신 예술적 완숙기에 이르고 있던 1937년 이당은 선전에 '추천작가'겸 '심사위원'으로 복귀하게 된다. 1939년 이당은 미인도<춘향상>을 제작하게 되는데 화가 자신의 회고록인 '서화백년'에서 그 작품에 대한 제작경위를 밝히면서 1910년대 어진 제작이래 가장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라고 말하고 있다.
6.25동란으로 파괴되어 이후 다시 그리게 된 것으로 고유복식의 함초롬함과 오묘와 농염이 아닌 앳된 표정으로 싱그러움과 청순함을 보여주는 여인으로 과장되거나 관념적인 면이 보이지 않는 현실적인 여인상이다.
1940년대부터 일제말까지 이당은 당시 시대와 환경에 좌우됨이 없이 자신의 특기인 인물화를 통해 한국적이며 향토적인 정취를 살리고 있다. <화기>나 지속적으로 지작된 승무미인도가 그러하다.
해방직후 정치적 불안정과 좌우익간의 대립이 차츰 안정을 보이면서 서울의 미술계는 과거 조선미술전람회의 참여작가와 추천작가급을 대표하는 친일협력인으로 이당을 비판한다. 그러나 그는 1949년 정부주관의 제 1회 국전에서 국가적인 우대제도의 추천작가 범위에 다시 포함된다.
그의 첫 국전작은 <초보>로서 걸음마를 시작한 아기를 그림으로서 역사적인 정부수립을 상징한 듯한 작품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1929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같은 명제로 출품된 작품의 초본을 이용한 제작으로 그의 재제작 사례는 인물화에서 그후 적지않게 보여지는데 아마도 60세를 전후한 시기로 새로운 창의성 발휘가 여의치 않게 된 연령적 한계를 말해준 것이기도 했다.
1950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역사 인물상을 통해 사실적인 생명감의 표현으로 인물화 역량의 권위를 발휘한다. 1950년대 이후 이당의 화단의 원로로서 특히 전통적 신선도와 세필채색화의 미인도, 화조도 분야의 유일한 거목이자 마지막 존재로서 이당세계는 각별한 의미를 갖게된다.
이 당시의 이당은 <신부성적>이나 <궁녀> <논개상> 등과 같이 한국적 정서나 민속적인 소재를 주제로 작업해 나가는 한편 동양의 옛그림을 소재로 한 신선이나 도인, 은자의 모습을 한 어부 등의 그림을 그려나간다. 1950년대 이후 이당은 더욱 세밀해진 필선과 더욱 정아해진 색조의 미인도를 발표한다.
당시는 전쟁 이후 차차 회복되어 가고 있던 사회의 여러분야에서 이당이 대명사처럼 되어 오던 미인도와 신선도, 화조화 등을 효청하는 일이 갈수록 잦아지던 시기다. 그에 따라 유사한 내용의 작품도 많아지게 되고 초기작품을 연작하는 상황도 나타나게 된다.
재제작되는 작품들은 원화와 다른 화풍으로 그려지기도 하며 현대적 조형수법을 나타낸 것들도 있다. 만년에도 흐트러짐 없이 예술의 정열을 반영하여 새로운 색채 표현법과 치밀한 사실주의를 그려냈으며 60년대 후반기에는 개인전과 그룹전을 통해 화의에 따라 자유롭게 알맞은 수법을 휘한 이당의 다양하고 풍부한 기량을 볼 수 있다.
(2) 화조화
이당의 작품은 소재에 있어서 인물뿐만 아니라 닭이나 꿩, 날짐승, 물고기 등 생활 주변의 일상적인 것에서 자신의 감수성과 정밀한 묘법 및 채색으로 북종화법을 적용해 갔다, 서화미술원을 졸업하던 즈음의 이당은 단절위기에 있는 북종화법의 전통을 다시 부활시키고 있었으며 또한 가장 뛰어난 채색화가의 위치를 굳혀나갔다.
1915년에 제작한 <화조>는 이와 같은 이당의 청년작가 시절의 북종화법을 보여준 것으로 표현대상의 정확하고 섬세한 묘사와 색채전개의 세련됨을 볼 수 있어 초년기의 예술적 감상과 필력을 볼 수 있다.
1928년 봄 일본에서 돌아온 직후 서양화수법의 주제선택으로 사냥꾼이 잡아온 죽은 꿩을 그린 작품을 선전에 출품하기도한다. 이 작품은 그 시기 이당의 표현경향과 주제의 자유로움의 폭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된다.
1950년대 이후에는 화단의 거장으로서 세필채색화의 미인도와 화조도 분야에서 유일한 거목이자 마지막 존재로서 이당세계는 각별한 의미를 갖게 된다. 일반적으로 김은호에 대한 회화사적 의의를 논할 때 반드시 언급되는 것 중의 하나가 채색의 사용이었는데 그러나 말년에 이르러 그린 1968년 작퓸인 <백목단>은 수묵위주로도 그자신의 화경을 십분 드러내 보여준 중요한 작품이다.
농염의 채색으로 그린 모란이 수폭에 이르나 백모란을 수묵위주로 그린 것은 유례가 드물다. 화면중에 다섯송이의 만개한 모란을 나타냈고 싱그런 잎을 능형 구도로 포함시켰다. 여전히 섬세한 세부처리에 불만을 표할 사람도 있겠으나 흐트러지지 않는 필선은 창의력의 결핍과는 구별되는 것이며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1973년 <화조일대>는 이당이 평생을 통해 끊임없이 그려오던 화조주제의 모든 소재가 총동원되고 있다. 여기에는 모란과 연, 백합, 도라지꽃, 연못과 언덕, 바위, 나무가 눈부신 장원풍경을 전개하고 있다.
연못에는 오리와 원앙과 금붕어, 언덕의 꽃과 나무 사이에는 꿩, 앵무새, 비둘기 멧새, 문조를 비롯하여 찬란한 온갖 색조와 생김의 새들이 쌍쌍으로 환상적 낙원을 연출하고 있다. 색채표현과 모든 대상의 정교함이 이전의 작품들과 유사하며 연작의 화조풍경으로 이루어져있다.
(3) 수묵산수화
이당초기의 산수화는 서화미술회에서 소림과 심전의 전통적 남종화법의 기본을 모방하였으며 점획이나 문필에도 능란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 별다른 변화없이 진행되다가 1918년 금강산 여행 이후 농묵과 담묵을 많이 쓴 수묵담채로 초기와는 다른 양식을 표현한다.
1942년 심사참여 작가로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대호정>은 화면구성과 시각, 공간감각 등 현대적인 감각이 짙게 배어나오는 그림이라 하겠다. 이 작품은 작가 자신의 사생이 아닌 조선후기 실경화첩을 토대로 그렸다고 화가 자신이 이미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종래의 조선후기 실경산수화와는 큰 거리감이 있는 풍경화에 드는 그림이다. 수묵위주의 청색을 가채하고 있으며 정확한 원근감, 세부 처리의 사실감 등으로 작가 자신에 있어서의 변모뿐만 아니라 전통산수에서 풍경화로의 추이를 재시도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40대 중반에 정립시킨 인물채색화의 대가라는 평가를 고수하면서 한편으로는 1960년대부터 산수풍경화에 투명하고 강렬한 순색을 농묵과 담묵의 수묵적인 독특한 필치로 다감성을 가지고 정상의 기류에서 상징적 거봉에 변함이 없었다. 이러한 풍경화로는 <풍악추명>과 <금강산하>, <우후금강>등의 작품이 있다.
이러한 작품들은 담묵선으로 풍경을 전개시키고 그 위에 맑고 눈부신 다채색을 부여하는 수법을 사용하였는데 이 방법은 전에는 볼 수 없었던 것으로 대상의 자연과 사실적 현실성에 조화를 이루고 있다.
맑고 짙은 하늘색의 먼산을 배경으로 하고 완전히 희고 눈부신 바위산에 노랑, 빨강, 연두색의 단풍이 든 나무들이 찬란하게 전개되어 현실감각의 아름다움이 잘 나타나지만 그것들과 전혀 충돌과 위화감이 없는 담묵만으로 처리된 소나무들이 거침없이 도입되면서 속된 현실감의 일변도를 제거시키는 독특한 화법이라 볼 수 있다.
60년대 이러한 채색과 농묵 변화가 선명한 수묵필의 특이한 방법으로 전개된 산수풍경은 금강산 스케치에서 강렬한 특색을 찾아 그린 것이며 산수풍경에서 보여준 남종화풍의 절충된 새로운 양식과 사실적 현실감각이 구비된 품격으로 인한 독보적 개성을 형성하였다.
특히 1970년 중앙일보 주최 '이당화백 회고전'에 출품한 <청록산수>는 구도와 취의가 이질적이며 여기에 전통적 화취와 산수관념이 거의 배제된 현대적 풍경과 수법이 지배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새로운 화법은 1976년 인사동 古屋堂고옥당 화랑에서 가진 개인전 때에는 더욱 간명한 색채의 필선구성의 묘가 집약되고 있다.
1974년 작품인 <풍악추명>은 80세가 넘은 고령에 제작한 그림으로 넓게 칠한 담채 처리가 눈에 띄이나 전통적인 선묘와 점묘가 복합된 다소 복잡한 구성이다, 그러면서도 여운을 느낄 수 있는 독자적인 화경을 보여준다.
80대 후반부터 타계할 때까지 김은호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천명했듯이 역사적으로 남을 그림에 혼신을 기울였고 그림분야로는 산수분야에 주력한 것으로 사료된다.
2-4. 작품세계분석
이당의 작품세계는 그의 특징인 유려한 필선과 우아한 채색으로 일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1930년대 이후부터 이당이 독자적으로 개척한 주로 젊은 여인을 주제로 한 고유의 민족색의 신화법과 현실적 색채표현으로 1940년대에 이어 50년대에도 많은 미인도를 세필채색으로 남기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심전과 소림에게서 배운 전통화법의 남화, 북화를 모두 소화하여 신선도를 제작한다.
1960년대 들어서는 산수화의 새로운 창의성과 만년의 정열을 특이한 세계로 완성시키기에 이르며 평생의 풍부한 화제와 채색기법 및 정밀한 선의 작업이 칠, 팔십대에까지 지속하고 있다는 점에서 놀랍다. 오당 안동숙은 이당이 화인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만년에 이르기까지 그의 예술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이당의 예술은 단아하고 정직한 생활관과 세계관에서 이루어지는 아담한 예술이다. 그러므로 선묘에 있어서 강약과 농담, 요철 또는 곡선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고 직선이요, 평면적이며 단아하고 아담한 필의가 되는 것이며, 사선이나 철선으로 유려하게 구축되는 청아한 예술이다.
그래서 어떤 객관 묘사에 있어서 정확한 관찰과 정확한 형태라야지 생략이나 왜곡, 변형 등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이당의 예술은 사실적인 기법위에서 양식적으로는 전통을 고수하기 때문에 본래의 동양화 정신인 평면성을 살리게 되는 것이다. 이 때 평면성은 객관성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 무한성의 사상은 동양예술의 본질적인 생명인 것이다.
이당은 자신의 예술에서 이 평면적인 양식을 살리면서 시대를 초월한 창작세계를 구축하였다. 작품의 색채에 있어서도 그것이 원색적인 듯 하면서도 화려하고 그 발색이 맑은 점은 이당의 청아한 사상과 생활감정에서 발산 된 것이라 하겠다.
과거 오색중 묵색 제일주의로 묵색만을 숭상하고 색채를 천시하던 시기에 이당은 '회화형식이라면 어떤 감정이든 색채에 구애됨이 없이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나아가서 분연한 자세로 자신의 작품에 강한 채색을 도입시켰다."
이당이 누구보다도 주목과 찬탄의 대상이 된 요소는 독보적인 섬세한 필선과 현실적인 아름다움을 갖는 채색기법이었다. 이러한 채색화는 결코 미인도나 그 범주의 인물풍속화뿐만 아니라 생활주변의 일상적 소재, 그 밖의 짙은 색채주의 풍경화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나타난다.
그의 화사하고 깔끔한 화면들은 신일본화의 추종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으나 그의 체내에 형성되어 있는 확실한 전통의식과 창의적 표현감각은 그의 모든 필선과 채색의 질을 자신의 것으로 발전시켰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채색화는 단순한 일본화의 영향이 아닌 전통적 회화사상과 모든 예법을 충분히 소화하여 익히고 계승하되 시대적 변화에 따른 대중의 미의식을 존중하며 자신의 특징인 세기를 예술적 기교와 독자적 조형미로 발전시켰다고 본다.
그 과정에서 이당은 신일본화의 장식적인 색채주의와 표현기법까지 적절히 흡수하여 독자적 조형미를 구현시켰다고 보는 것이다. 위에 상술한 김은호 작품세계의 전반적인 특성들을 토대로 하여 이당의 화풍특성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1) 세필채색화
세필채색은 초상화와 미인도 뿐만 아니라 신선도와 화조도등 그의 작품 전반에서 나타나는 이당의 가장 대표적인 특성이다. 이당의 세필채색은 담백한 채색을 부드럽게 쌓아올리고 유려한 선으로 표현한 작품들이다.
섬세한 필선은 쉽게 모방할 수 없는 필력으로 말년의 작품들에서도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북종화적 채색 방식의 지속은 그의 섬세하고 치밀한 성격과 잘 맞는 것이었으며 또한 인천 인흥학교 측량과 시절의 교육과 이후 생계를 위해 일했던 도장일이나 인쇄소 직공일, 측량조수 등의 일이 영향을 주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2) 소재 및 구도와 표현방법의 정형성(평이한 주제의 선택): 재제작과의 연관성
그가 평생에 걸쳐 일관되게 소재로 취한 것은 인물과 화조이다. 인물도 미인도내지 역사인물화, 신선도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의 세필채색의 분위기와 적합한 미인도들은 초기 신일본화의 영향하에 제작된 일상의 미인에서 역사인물화속의 춘향이나 논개 등의 미인도로 이어진다.
이외의 인물이라 해도 향토적 배경속의 할머니나 어린아이들이 전부다. 역사 인물화는 그 자신의 시대적 극복의 노력 혹은 시대적 요청하에 그려진 그림들로 화가로서의 창의적 측면이 부각된다기 보다는 노련한 재기의 구사로 그려진 작품들로 조선후기 초상화 양식에 이당만의 새로운 조형감각으로 제작된 작품들이라 할 수 있다.
신선도는 그의 후기 작업에서 많이 나타나는 소재로 현대적 변용이라기 보다는 전통적 화풍속의 탈속적 세계를 담고자하는 그의 의지가 나타나는 작업들이다. 그의 인물이라는 소재 선택은 놀라운 채색기법과 기량을 보이는 작품들이지만 형태나 구도, 조형요소의 정형성을 드러내는 작품들이다. 화조화에서 나타나는 특성 또한 인물화에서의 정형적 요소가 두드러지고 있다.
(3) 시대적 흐름에 영합한 제작태도
그의 작품들에서 보이는 정형성과 다작의 형식은 시대적 분위기와 그 요구에 영합한 흔적을 지울 수 없는 특성을 지닌다. 그가 누구보다 시대적 분위기를 잘 읽어냈다는 것은 그의 작품특성의 변화와 다작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가 신일본화를 공부하러 일본으로 건너가고 그곳에서 당시의 유행하는 화풍을 일찌감치 읽어냈다는 것, 근대기 상업적 요구에 응하는 화조화와 초상화의 다작, 일제시대 말기와 전쟁후의 시대상이 필요로 했던 역사인물화의 제작 등이 그가 민감하게 시대를 읽어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시대적 요구사항에는 민감했으나 험난한 시대가 화가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일까에 대한 그의 고민이 너무나 소극적었다는 그의 한계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4) 성실함과 동양적 사고에 기반한 화가로서의 삶
그림은 작가 자신을 닮는다고 말한다. 이것은 작가의 삶의 태도나 특성이 그림의 특성으로 그대로 드러남을 말하는 것이다. 이당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섬세하고 깔끔한 화면구성은 그의 성실함과 유연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전통적 화법의 기반위에 제작되는 오차없는 화법구사와 동양화라는 틀안에서 그가 보여주고 있는 조형적 변화들이 그를 동양화 작가로서 인정받게 하는 것이다. 그의 변함없는 화풍의 모습조차 급격한 변화보다는 전통을 기반으로 한 동양적 사고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2-5. 김은호의 미술사적 의의
인물화의 일인자 –미술평론가 이구열-
이당 김은호화백하면 우리의 근대, 현대 전통화단의 명가들에 관해 다소라도 지식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가 화미한 색채가 부여된 미인도와 기타 군선도를 포함한 인물화의 최고 대가이며, 정밀한 밀선과 선려한 색채표현의 화조도에서 당대의 제1인자라는 인식으로 즉시 반응할 것이다.
그러나 이당은 그렇게 미인도나 신선도나 혹은 화조도에 독보적인 존재일뿐 아니라 산수풍경, 문인화, 그 밖의 어떤 화제와 기법에도 구애받지 않고 독특한 화경을 발휘한다. 이당은 자연과 현실 주변의 현실적 다채를 외면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반대로 표현미의 중요요소로 적극 취한 근대적 미의식과 신화법 개척이 우리 전통 회화를 발전시키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순수한 향토예술가 –미술사가 윤희순-
이당의 品은 <승무>에서 근원적인 전형을 볼 수 있다. 이당은 想의 人이 아니라 技의 人이다. 技에서 이루어진 品이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순수한 회화인이라 하겠다. 미인화가로서뿐 아니라 향토예술가로서도 높은 자리에 있다.
무녀의 용필의 묘, 유려한 선, 적채의 전아, 의문에 이르기까지 닦여진 기법은 완전하다. 전통기법인으로 유일한 존재인 이당에게 더 무엇을 요구한다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이당의 화면을 성실히 관조하면 장내의 다른 작품들이 얼마나 소루한 기법에서 저회하고 있는 지를 깨달으리라. 이당은 심전, 소림 이후의 기법인으로 최고봉이다.
절묘한 화풍의 영수 –시인 이은상-
동방화류의 정맥을 이어 온 이당선생은 금세기 화가중에서도 가장 특이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이당을 일러 한국화원의 최고봉이라 일컫는다. 그의 절묘한 화법과 특이한 화풍이 영수의 위치를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다.
일찍이 명대의 문 산이 구순에 이르러서도 손수 먹을 갈았고, 우리 영조 때 겸재도 구순이 훨씬 넘어 화필을 오히려 놓지 않았다더니, 이제 이당은 또한 그들에게 비길만한 고령에 앉아 능히 정심묘수로 세화를 그려놓고 스스로 입가에 자족의 웃음을 머금는 것을 보면 이는 분명 하늘이 선생에게 축복하신 것이니 어찌 경하할 일이 아니겠는가.
(1) 근대 채색화단의 대가: 한국 동양화단에 채색화의 영역 구축
조선시대 후기와 근대초기를 거치면서 한국화단은 채색화에 비해 수묵화가 우위를 차지하며 발전하고 있었다. 이는 유교사회의 전통과 더불어 도화원의 폐지라는 시대적 상황속에서 북종화계열의 채색화가 그 영역을 인정받지 못하게 되는 상황에 의한 것이기도 했다.
마지막 전통화 세대인 안중식과 조석진에 의해 길러진 제자들 또한 대부분이 수묵계열의 작가들이었다. 이런 가운데 채색화의 전통계승과 시대적 변용을 이루어 근대 이후 한국화단에 채색화의 영역을 구축했다는 데 이당의 영향이 지대했음은 분명하다.
그의 채색화는 분명 신일본화의 영향을 받으며 발전하였다는 점과 세필채색이라는 영역에 머물렀음이 분명하나 이는 시대적 변화에 순응하며 자신의 화풍을 변화시켰다는 것과 자신의 성격과 재주에 걸맞는 방식을 추구해나갔다는 점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한국화단에서 대가로서 인정받고 그로 인해 일제시대를 거치고 현대화단에까지 한국채색화의 입지를 굳건히 하게 된 것은 한국 동양화단의 다양성과 전통전습을 위해 그 노고를 인정해야 할 것이다.
또한 그 뒷 세대 채색화가들이 그의 작풍을 그대로 이어받았다기 보다는 새로운 채색화 경향을 연구하고 발전시킬 수 있었다는 점 또한 다행스러운 부분이다.
(2) 교육자로서의 이당
조선미술교육원과 고려미술교육원, 그리고 그 제자들에 의해 결성된 후소회에 이르기까지 그는 많은 제자를 길러낸 스승이었다. 그리고 그 제자들이 해방이후의 한국화단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음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더욱 다행스러운 것은 그 제자들의 화풍이 스승의 모방이 아니라 새로운 자기분야를 개척해 나갔다는 점에서 그의 교육적 성과가 있다 하겠다.
가장 특징적인 예가 바로 장우성과 김기창이다. 물론 이 두사람은 초기 작품에서 그의 스승의 작풍을 그대로 본받고 있다. 두사람 모두 이당식의 세필 채색인물화로 자신들의 입지를 굳혀나갔으며 그 화풍 또한 유사했다.
그러나 근대 이후 장우성은 신문인화의 대가로 김기창은 새로운 표현법의 거장으로 한국근현대미술사에 한 획씩을 긋게 된다. 이는 이당이 그의 제자들을 교육함에 있어 철저한 기본기를 가르치되 작가적 성향을 고루 갖추도록 노력했다는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제자들의 성과로 인해 이당의 평생에 걸친 세필채색인물화가라는 이름의 정형성을 조금은 극복하게 해주는 부분이 아닌가 한다.
(3) 근대적 성격을 다분히 지닌 화가
근대는 시민적 자각에 의해 비롯된 사회의 변화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또한 이 바탕으로 산업과 상업의 발달과 그로 인한 경제적 부의 형성이 나타나는 특성을 지닌다. 전근대와의 구별점을 이렇게 이해할 때 전근대적 그림과 근대적 그림의 차이를 상업적 활용도나 수용의 차이에서 찾을 수도 있다.
중국의 근대기 화가들이 상업이 번성하는 도시들을 근거로 활동했다는 사실과 우리의 근대화와 근대적 그림이 유사한 상황에서 발달하게 되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이당의 그림은 근대기 시대적 성격과 수요욕구에 적합한 그림이었다.
장식적이고 정형화된 그림의 지속적인 생산이 가능할 만큼 뛰어난 재주와 성실함이 이당에게 내재되어 있었다. 그의 경제적 불안정이 이러한 상황과 맞아떨어진 부분도 있다.
이는 이당이 근대성을 내포한 작업을 위해 노력하고 자신의 그림을 전근대성으로부터 탈피시키고자 노력했다기 보다 근대라는 사회적 수요욕구와 그의 작화태도 내지 작품성향이 균형을 이루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렇게 이해하면 이당은 참으로 시대를 잘 타고난 인물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4) 제도권을 벗어나지 않은 작가
그가 오늘날과 같은 정규교육을 받고 성장한 것은 아니지만 화업을 갖게되면서 그가 걷게 된 길은 한번도 제도권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또한 그의 작풍 또한 이러한 아카데믹한 또는 정형의 틀을 크게 깨뜨리지 않은 범주내에서 변화해 간다. 그것은 그의 본래적 성격과 더불어 그가 영향받은 스승들의 영향 또한 적지 않다고 본다.
소림과 심전은 전통화법에 근거한 교육을 한 마지막 전통화가들이었으며 그의 일본인 스승 또한 일본 제전의 심사위원으로서 당시의 변화를 거듭하던 일본화단의 제 특성들과는 달리 좀 더 보수적인 성향을 가졌던 인물이었다. 이러한 교육적 환경에 큰 문제없이 적응한 그의 성향 또한 유사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일찍부터 대가의 반열에 올라 인기를 누리게 된 그에게 갑작스런 변화는 기존의 평가를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압박이었을 수도 있다.
해방 이후와 전쟁 이후의 혼란스런 사회상과 상업적 혹은 정치적인 그림에 대한 수요의 증가는 이러한 그의 입지를 유지시키는 조건이 되주었으며 그는 타계할 때까지 큰 고난 없이 제도권 안의 대가로서 원로로서 생을 살게 된다.
제도권을 벗어나지 않고 활동하며 그 입지를 굳건히 했다는 것은 한사람의 인생이 평탄했음을 의미하기도 하겠지만 예술가에게 넘지 못할 한계로 남은 것일 수 도 있다.
(5) 신일본화의 수용과 독자적 조형성 확보
이당의 채색화풍이 신일본화의 영향을 받으며 변화 발전한 것은 사실이다. 그가 주로 쓴 소재와 구도, 채색 기법과 내용 등이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양식을 답습한 것임은 여러 자료를 통해 검증되어졌다. 일제식민지라는 시대적 특수성에 기인할 때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친일적 성향을 가진 인물로 비쳐질 수도 있다.
하지만 긴밀한 관계를 맺고있는 사회의 시대적 흐름속에서 이해할 때 그는 선진적인 문화의 영향을 스스로 받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독자적 조형성을 구축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현대의 수많은 한국작가들이 서구 미술을 추종하고 전습하는 상황과 일맥상통할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떠한 역사적 평가보다 그가 작가로서 자신의 작품에 얼마만큼의 심혈을 기울여 작업해나갔는지를 평가해 주어야 할 것이다. 물론 그는 시대적 요구와 기대에는 부응하였지만 식민지적 상황하에서의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고민은 많은 부분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후 그는 자신의 이러한 역사적 평가에 대해 수많은 역사 인물화를 그려냄으로써 그 부분을 채워나가려 한 것으로 보인다.
3. 결론
수묵화가 유교시대의 미술문화를 상징한다면 채색화가는 불교시대나 그 이전 시대의 미술문화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 두 양식 속에서 이당은 누가 뭐라해도 채색화가이다. 이당은 채색화가 수묵의 지위를 대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대적인 요청에 맞게 일본으로 건너가 채색화를 연구한다.
이당은 결국 신일본화 양식과 궤를 같이 하기도 하였으나 한국적인 미의식을 고취시키고 화법적으로도 근대적인 감각을 우리화단에 도입하는데 앞장섰다. 이당의 그림을 흔히 '내림그림'이라고 칭하는데 아마도 그가 이렇다 할 미술교육을 받은바 없음에도 불구하고 서화미술회 입학후 그 다음해 순종의 초상화를 그리는 등 그의 숨겨진 잠재력이 남다르게 나타났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1908년의 측량학과 졸업은 화가 수업시절의 생계유지 수단은 물론 그의 세밀채색화법에도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당의 초상화법은 조선조 후기에 나타난 초상양식보다 훨씬 근대적이다. 전통화법의 바탕위에 사진을 참고로 하되 서구의 음영법을 조화시키는 그의 인물화법이 그것이다.
1930년대 들어 백윤문과 김기창, 장우성 등 후진양성에 힘을 쏟으며 한국 근현대 화단에 채색화의 토대를 만드는 계기를 이루어내기도 한다. 1979년 타계하기까지 이당은 끊임없는 작품활동으로 화가들의 모범이 되었다. 변함없는 창작태도와 세밀한 화필의 구사는 그의 채색화 정신이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만년에 이르기까지 이당의 화풍에 이렇다 할 변화가 없었다는 말은 평가하기에 따라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나 선각을 요구하는 벅찬 시대에 태어나 자의든 타의든 험난한 시대를 거쳐야 했던 화가로서는 결코 긍정적인 평가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근대적인 동양화의 조형적인 명제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킨 그에게서 좀 더 창의적이고 발전적인 작가적 면모가 돋보였다면 하는 아쉬움을 갖게된다. '나는 평생 내가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지 못했다.'라고 한탄한 말년의 그의 말은 어려운 시대를 겪어온 노장이 스스로에게 보내는 변명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화가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창작의 수고로움과 변화해야 할 의무를 안고 사는 존재이다. 그가 제도권속에서 머물 수밖에 없었던 것과 지속적인 작품 요구에 응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그가 살아간 시대적 특수성에 요인을 둘 것만은 아니다.
그의 심리적 자세, 환경과 생활에 응하는 그의 태도, 창작자로서의 작가의 자세에서 그는 그러한 상황을 어쩔 수 없다라는 핑계하에 순순히 받아들인 수동적 인물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한 그의 성격을 뭐라 비판할 수는 없을 것이나 한국 근대화단의 거장으로서 그를 평가할 때 또는 화가로서의 한 사람의 삶으로 평가할 때 유약함으로 드러날 수 밖에 없음은 부정할 수 없는 아쉬운 부분들이다. 이러한 순응형 유약함은 20대 말기에 3.1 독립만세운동으로 고문을 받고 당시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스승 심전 안중식을 일제에 의한 고문으로 잃었으며 해방이 될 때까지 총독부의 감시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던 그의 개인적 환경을 고려할 때 오히려 민족적 비애를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역사적 한계이다. 제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당은 오히려 타협하지 않고 옳다고 믿는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며 본인의 몸가짐도 그러했다고 하니 오히려 안타까운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사실 그의 작품들을 보고있노라면 그 유려함과 섬세함에 고개를 젓게 된다. 어느 화가가 그만큼의 재기와 성실함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러한 그의 재기와 성실함이 그 주위에 많은 사람을 불러들이고 훌륭한 제자를 길러내게 된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 한국화단, 특히 동양화계는 분명 그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이당이라는 거장이 지녔던 장점과 더불어 그의 한계를 지각하고 극복해야 하는 것이 우리 화단에 그가 남긴 유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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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당 김은호(以堂 金殷鎬) 연구|작성자 청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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