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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기독교 역사 및 몽골 일반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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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기독교 역사 및 몽골 일반 개관
발제자 : 김봉춘
몽골이라는 나라가 한국에 특히 한국 교회에 각인 된 것은 불과 20년이 안되는 일이며 그리 길지 않는 기간 동안 한국교회가 몽골(교회)에 쏟은 ‘디아코니아’는 선교역사에 기록될 만한 일들이었다. 이 글에서는 몽골의 기독교 전래 역사와 현대까지의 기독교 전래 과정을 살펴보겠다. 이를 통해 향후 선교방향을 설정하는데 길잡이가 되는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12가지의 주제로 나누어 기술해 보고자 한다.
1.페레스트로이카
현대 몽골선교의 문은 러시아의 페레스트로이카로부터 시작된다. 러시아의 개혁, 개방과 더불어 구소련의 영향하에 있던 공산국가들이 자연적으로 개방정책을 택하였고 이와 더불어 시장경제체제로 전환할 수 밖에 없었으며 기독교 역시 이 시기에 유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2. 몽골선교와 한국인
몽골의 개방과 더불어 가장 먼저 몽골에 들어 온 한인은 대사관 외에 선교사였다. 유학생 신분으로 입국한 선교사들은 한몽관계사, 문화, 역사, 언어 등의 다양한 부분을 연구하며 선교사로서의 자리를 잡아간다. 몽골은 한국과 인종적, 언어적, 역사적 유사성으로 인하여 선교사가 이질감을 느끼지 않고 쉽게 정착할 수 있는 장점이 있으며 더군다나 한국 교회에 맞춤형 선교에 적합한 지역이었다. 예컨대, 근거리 동인종, 구 공산권, 알타이 언어권, 한류, 개척 선교지 등은 한국 교회의 선교취향에 적합한 지역으로 여겨진다. 몽골 역시 아시아에서 가장 친근하고 발전모델로 삼을 나라로 한국이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에 한국인에 대한 수용 정서가 이미 자리잡고 있었다.
3.몽골에 유입된 기독교 전래 역사
몽골 선교가 흔히 ‘기독교의 흔적이 없는 나라’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미 6세기에 경교(네스토리안)가 전래되었으며 이는 당나라시절에 중국 몽골 전역에 전파되었음을 유물과 유적을 통해 볼 수 있으며 심지어는 경주 불국사에까지 유물이 남아 있다.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는 1625년 경에 중국의 심서성에서 한 인부가 집을 짓느라고 땅을 파던 중에 돌비석을 발견하고는 기이하게 생각하여 비석을 세척한 결과 한문과 시리아어가 새겨진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이 비석을 보호하려고 근처의 한 절(금승사)로 옮겨 보호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독교 비석이다. 중국의 권위있는 학자들이 경교비를 연구한 결과 비문은 당나라 때 서법일 뿐 아니라 역사적 사실과 부합되는 것을 밝혀냈다. 경교비는 당 덕종 2년(781년)에 경정이 비문을 쓰고 여수함이 글씨를 썼다. 경정은 당시 총 주교로 30여권의 경서를 번역하였으며 또 불교의 승려들과 불경을 번역하기도 한 학자였다.
6세기를 거치면서 몽골 초원과 중앙아시아 일대를 장악한 부족은 투르크(돌궐)족이다. 현재 신강 지역에 살고 있는 위구르족도 투르크족 계열이다. 몽골 초원에서는 몽골족이 등장하기 훨씬 이전부터 그 지역에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동방 기독교의 일파인 네스토리우스교는 635년 아라본(알로펜) 선교사에 의해 처음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에 들어 온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중국은 당 태종이 동복 형제를 죽이고 왕에 즉위한 즈음(627년)이다.
몽골족은 1206년 헨티지역의 다달지역에서 당시 여러부족을 점령하고 나라 이름을 ‘몽골제국-Ikh Mongol Uls' 이라고 국명을 정한다. 몽골의 13세기는 몽골 최대의 시대였다. 칭기스칸, 쿠빌라이로 대표되는 시대이며 유럽과 아시아 전역을 점령하여 칭기스칸은 역사상 가장 많은 지역을 점령한 왕으로 기록된다. 또한 13세기에는 궁정에까지 예배처소가 있었음이 당시 몽골을 방문했던 마르크폴로, 카르피니, 루브룩, 등 많은 카톨릭 선교사들에 의해 전해진다.
칭기스칸은 조치, 차가타이, 오고타이, 톨루니의 네 아들을 두었는데 톨루니의 부인인 소르칵타니에게서 네 손주를 얻었다. 믕케, 훌레구, 쿠빌라이(1260-94), 믕허가 그들이다. 칭기스칸의 가계를 보면, 조치(Jochi), 차가타이(Chagatai), 오고타이(Ogetai), 툴루이(Tolui)의 네 아들이 있는데 톨루이의 부인인 소르칵타니가 기독교인이었다고 전해진다. 소르칵타니는 몽골 제국의 역사에 있어서 각각 탁월한 역할을 감당한 세 명의 기독교도 자매 중 1인이었다. 첫째인 이바카-베키(Ibaca-beki)는 칭기스의 부인이 되었고, 둘째 벡툴미쉬(Bektutmish)는 칭기스의 장남인 조치(Jochi)의 정실이 되었다. 그러나 칭기스의 넷째 아들인 톨루이와 결혼한 소르칵다니는 세 명의 제국 왕자들인 몽골 대 칸의 황제, 중국의 황제, 그리고 페르시아의 황제의 기독교도 모친이 되었다. 쿠빌라이는 몽골제국의 4대와 5대 대칸이 되고 훌라구는 서아시아 원정을 주도하여 후일 일 칸국의 창시자가 된다. 어쨎든 남편의 사망 이후 극도의 어려움에 처했던 톨루이 가문이 결국 믕허의 즉위로 대권을 장악하기까지 그녀의 역할은 결코 과소 평가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런 배경을 놓고 생각할 때, 기독교도였던 그녀가 자식들에게 끼친 영향 역시 심대했고 믕허, 쿠빌라이, 훌라구 등이 모두 기독교를 적극 보호하거나 적어도 관대한 정책을 취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소르칵타니는 1252년에 사망했다. 그러나 믕허, 쿠빌라의 모친로서의 그녀의 명성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몽골인들의 후대에 전승되었다. 1251년 카라호름을 방문한 수도사 루브룩이 남긴 보고에 의하면 그녀의 막내 아들인 아릭 부케는 기독교도였다고 한다. 당시 궁정의 상황(플라노의 카르피니신부)에 의하면 궁정에서 예배가 드려졌다고 한다. 믕허가 몽골의 왕위에 오르고 쿠빌라이에게 고려침공을 명한다. (한.몽관계) 믕허가 남송 공격하던 중 사망하자 쿠빌라이가 집권하고 국명을 ‘원-Ikh Yuan Mongol Uls’으로 개명한다.
중국 남부와 인도북부까지 정벌하는 등 아시아 대부분을 지배하는 중에 내부 분열과 1338년에 대두한 명나라 주원장에 의해 1368년에 멸망하게 된다.
4.이슬람의 유입
카스피해와 볼가강 유역을 중심으로 유입된 상인들에 의해 전파된 이슬람은 왕족인 조치를 개종하기에 이르렀다. 현재는 몽골의 서부지역인 바양을기 지역과 울란바타르의 날라이흐 지역에 집중되어 있으며 터어키 선교사들에 의해 활동하고 있다. 이슬람의 유입이 경교의 쇠퇴와 연관되어 있다. 즉, 경교가 그 맥을 잇지 못한 여러 가지 이유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네스토리안들이 급격히 쇠퇴하게 된 데에는 다음의 몇 가지 중요한 환경적, 정치적, 사회적 요소들이 작용했다. 첫 번째는 돌발적인 흑사병의 확산이다. 이 흑사병은 중국의 운남성과 동남아 북부 일부 지역에 서식하고 있었는데 몽골군이 이 지역을 공격한 후 초원으로 돌아가는 행렬에 이 균을 묻힌 채 몽골 초원지대로 이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몽골의 쥐나 타르박 등 지하에 서식하는 설치류들 사이에 퍼져있던 균들이 몽골 군대나 상인들과 접촉하면서 주기적으로 중앙아시아, 중동을 거쳐 유럽으로 확산되어 간 것이다.
네스토리안의 묘비를 분석해 보면 많은 네스토리안들이 흑사병으로 죽어갔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흑사병은 네스토리안만이 아닌 모든 중앙 아시아인들을 몰살시켰다. 두 번째 이유는 급작스러운 급진적 이슬람의 확산이다. 몽골 제국의 후예 중 러시아, 킵차크 지역에 있던 조치의 가문과 이란, 중동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훌레구 가문은 이슬람을 국교로 받아들인다. 이 무렵에 확산되기 시작한 이슬람은 급진적 성향을 띠는 것으로 기존의 이슬람과는 달랐다. 그 이전에는 이슬람권 내에서도 유대교나 기독교를 자기들의 종교와 같은 뿌리를 가지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리고 정치권에서 이교도들에게도 개종을 강요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을 지나고 몽골 침입을 겪고 난 무렵의 이슬람은 기독교에 대해 적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중동에서 몽골을 계승한 티무르는 제국을 건설할 당시 자신의 정권의 이슬람권에서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다수의 네스토리안들을 포함한 중동 지역의 기독교도를 학살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바그다드에 선교 본부를 두고 있던 네스토리우스교 총주교는 현 이라크 북부의 쿠르드족이 거주하는 산악지대인 모술 일대로 피신하기에 이른다. 그 결과 선교 본부와 동방 지역의 여타 네스토리우스 주교구와의 통신이 단절되게 되고 더 이상의 선교사나 사제들의 파견이 중단되기에 이른다. 세 번째 이유는 네스토리우스 교단은 시리아어에 기초해서 예배를 집례하고 신앙을 전수해 왔다. 마치 라틴어에 의해 천주교 미사가 드려지고 아랍어로 이슬람의 신학과 의례가 유지되어 왔던 것과 같다. 중세 시기에는 ‘성스러운’ 언어로만 종교 교육과 의례가 진행되어 왔다.
천주교회가 마틴 루터의 가장 큰 죄목으로 지적한 것은 루터의 종교 개혁 그 자체보다는 그가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했다는 것이었다. 중세에는 말씀 자체가 대다수 교육받지 못한 대중에게는 접근 불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에 영적 생활은 말씀 그 자체보다는 전통과 의례에 초점이 맞추어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교회의 존속과 성장은 해당의 ‘성스러운’ 언어를 사용할 수 있었던 사제 집단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했다. 특히 동방에서의 네스토리우스 교단의 경우 시리아어를 사용할 수 있는 사제 그룹이 이란, 이라크, 또는 시리아 지역에서부터 지속적으로 파견되지 않으면 교회의 유지가 어려울 수밖에 없는 취약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흑사병에 의해 사제들이 몰살되고 또 이슬람의 성장으로 인해 선교 본국과의 연결이 끊어지게 되자 자연히 네스토리우스 교회는 성장을 멈추고 급격히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원나라가 붕괴한 뒤 북방으로 쫓겨난 몽골인들과 함께 있었던 기독교도들은 15세기 초 영락제의 집요한 공격으로 큰 타격을 받고 여러 부족으로 나누어진 채 혼란에 빠지고 그 마지막 군주인 테구스 테무르가 1388년에 부하에게 피살됨으로써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5.라마교(티벳불교)의 유입
몽골의 사실상의 맹주인 알탄칸(순의왕)은 1558년 청해원정에서 1천명의 라마승려를 사로잡았는데 이는 몽골 역사에 큰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지금의 내몽골의 수도 허흐호트에 ‘귀화성’을 지었다. 그는 티벳의 ‘아싱라마’ 승려로부터 윤회사상과 만트라를 배웠다. 쿠빌라이가 ‘팍파’를 초청했듯이 티벳에서 소남가초를 초청하였다.
달라이 라마는 소남 가초의 이름에 ‘가초(바다)’를 몽골어로 번역한 ‘달라이’와 스승을 뜻하는 티벳트어의 ‘라마’를 합성한 칭호이다. 이와 같이 달라이 라마 칭호는 소남가쵸에서 시작되었다. 1586년에는 하라호름에 에르덴조(에르덴-보배, 조-존귀한(jo bo의 티벳어/부처를 모신 절) 사원이 건립되어 현재까지 남아있다. 108개의 탑이 15m간격으로 세워졌다.
이에 앞서 현재의 몽골글자(cyrillic alphabet)는 1930년대 러시아에서 유입되어 사용하게 된 것이며 몽골문자는 티벳의 라마인 팍파(국사(國師)1239~1280)에 의해 1269년 만들어 졌다.
6. 명. 청시대의 몽골
누르하치의 후금은 1634년 릭단칸의 사망으로 원이 망함과 동시에 국호를 청으로 개칭하고 여진인과 몽골인의 대칸 자격인 복트세첸카 칸을 즉위시켰다. 1689년 청조와 러시아간의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말미암아 브리야트 몽골을 포함은 북부 지대가 러시아에 합병된다. 청나라 시대에 이르러서는 몽골인들의 잔재를 없애고 몽골인들의 연합을 막기 위해 몽골인들을 탄압하기 시작한다. 부족간 왕래금지, 지역간 결혼금지, 장남의 결혼금지, 장남 이외 아들 승려화 등이 그것이다. 자연히 몽골족은 주변부족이 되어 쇄약해진다.
7. 독립국가
1911년에 이르러 복트한의 주도로 몽골민족은 만주족(청)에서 독립을 쟁취하였으며 1921년에는 수흐바타르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에 의해 주권을 되찾았고 1924년에 러시아의 도움으로 몽골 인민공화국을 선포한다. 1950년대 중소 우호시대에는 중국과의 관계도 안정되어 있기 때문에 중국도 몽골에 대해 경제적으로 많은 원조를 했다. 그렇지만 중국과 소련 사이에 이데올로기 대립이 발생하자 몽골은 일관되게 소련을 지지한다. 중국과 소련이 무력적 대립관계에 접어 들면서 소련 군대는 몽골에 주둔하게 되고 몽골은 소련의 대중국 전략기지로 변하고 몽골과 중국은 사실상 국교가 단절되고 만다. 1962년에 소련은 코메콘(소련과 동유럽 경제상호원조회의)에 가입하고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권에 가입하여 몽골은 사회주의 분업의 한 축으로 편입되고 소련, 동유럽 국가들과 경제적 통합이 강화되었다. 이처럼 소련은 1980년대까지 몽골 인민공화국에 대해 정치. 경제. 문화를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친다.
8. 동서 문화의 통로로서의 종교유입
몽골제국이 아시아와 유럽을 정복하여 인력을 교류시켰으며 무역통로를 확장시켰다. 이 결과 자연적으로 문화와 종교의 전파가 이루어진다. 역참과 교통로가 개척되었고 이를 따라 인간집단의 이동이 도미노현상처럼 이루어졌다.
첫 번째로 몽골 제국이 등장함에 따라 동서 간에 대대적인 인적 교류가 이루어졌다. 몽골 원정군에 참가한 전사들은 신천지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고 반면에 정복지의 유능한 인재와 장인들은 몽골 땅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원나라의 쿠빌라이는 킵차크 초원 출신의 킵차크, 아스, 캉글리 등 유목민을 새로운 군단으로 조직하여 자신에게 직속하는 친위군단으로 만들기도 하고 윈난 지역을 개발하는 데도 중앙 아시아의 무슬림이나 위구르인을 대거 참여시켰다. 투르크계 유목민들은 몽골 군대의 진격을 피하여 아나톨리아 반도로 이주하면서 11세기 이후 계속된 이 지역의 투르크화가 더욱 촉진되었다.
두번째로, 몽골 제국의 출현함으로써 동서 두 세계의 교류가 비약적으로 촉진되었다. 제국 각지를 연결하는 역참이 정비되고 교통로의 안전이 확보되면서 여행자들은 유라시아 대륙 동과 서를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함께 중국 동남부의 항구도시와 페르시아 만의 서아시아 여러 항구를 연결하는 해상 루트가 활발하게 활성화 되었으며 이른바 몽골제국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아시아의 순환교통로가 완성된 것이다. 이러한 교통로를 이용하여 위구르 상인과 무슬림 상인들이 대규모 상업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4세기부터 본격화된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몽골 제국의 이룩한 세계적 규모의 경제발전이 그 배경이 되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 결과 한반도와 일본을 비롯한 유라시아 대륙과 북아프리카를 포함하는 대규모 경제권이 생겨나게 되었고 사람과 물건 문화와 정보가 활발하게 교류되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상업 뿐 아니라 종교인의 왕래도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또 로마 교황 인토겐티우스 4세의 사절로 중앙아시아를 거쳐 카라코룸을 방문한(1245~1247) 프란체스코파 수도사 플라노 카르피니, 프랑스 왕 루이 9세의 사절로 역시 몽골을 방문한 같은 교단의 수도사 루브룩, 북경에 카톨릭 교회를 연 몬테코르비노신부, 그리고 수 백 명이 훨씬 넘는 일본 유학승이 원나라를 방문했다. 모로코 태생의 이븐 바투타가 각지에 살고 있는 무슬림의 도움을 얻어 중동에서 중앙아시아, 그리고 인도를 거쳐 중국을 방문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즉, ‘로마의 평화’가 제 1세기에 사도들의 사역을 위해 길을 준비해 주었던 것과 같이 13세기 ‘몽골의 평화’는 콘스탄티노플을 지나 아시아를 횡단하여 세계의 절반에 대한 가톨릭 선교에 문을 열어 주었다.
몽골에 대한 가톨릭이 첫 선교로부터 1368년의 몽골 왕조의 몰락까지의 1세기와 4반세기(약125년) 어간에는 동방과 서방 사이의 무역과 문화 교류를 위한 아시아 횡단 간선도로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몽골 페르시아를 통한 구 비단길에 의해서든지, 혹은 몽골 러시아를 횡단하는 두 개의 북부 길이든지, 혹은 인도 주위의 해상로를 통해서든지 간에 극동은 이전보다는 유럽에 더 가까이 있게 되었다.
9. 몽골 제국 시대의 카톨릭 선교사들
당시 로마교회에는 두 선교 공동체가 설립되었는데 프란시스칸과 도미니칸(Domimicans)이었다. 이들은 전통적인 수도원주의에 대한 새로운 차원으로서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설교와 선교를 분명히 강조하는 가난과 구제를 서약한 걸식 수도회들로 불리웠다. 이들은 선교사와 전도자들이었다. 당시 선교사들에게는 두가지의 사명이 주어졌는데, 하나는 정치적인 것으로 침입자들에 의한 기독교 국가의 침입을 막아보자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영적인 것으로 그들이 개종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기독교를 전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다음 1242년에서 1342년 어간의 100년 간에, 7차에서 8차의 다른 가톨릭 선교단들이 파견되어 아시아를 횡단하는 길고도 힘든 여행을 해야만 했다.
1) 플라노 카르피니(Giovannida Plano Carpini/1245~1247)
1245년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프란체스카 선교회의 플라노 칼피니(Giovannida Plano Carpini)신부를 몽골에 파견하였다. 그런데 이 칼피니는 앗시시의 프란시스의 제자 중 한 사람으로 서방 유럽의 수도회를 초기에 조직한 사람이다. 칼피니 신부는 당시 63세임에도 불구하고 교황의 국서를 가지고 프랑스 리앙을 떠나 몽골 선교사로 파송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