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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정시대 후반기, 족보의 탈락자와 부름을 받은 자
...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신 5:9,10)
<왕정시대 후반기 왕의 계보> ①요시야 -> ②여호아하스 -> ③여호야김 -> ④여호야긴(여고냐) -> ⑤시드기야 -> 예루살렘 함락(남왕국 멸망)
<왕정시대 후반기 마태복음 족보> ①요시야 -> ④여호야긴(여고냐) ->// 후손 없고(?), 나라 패망
** ② ③ ⑤는 ①요시야의 아들로 형제이며, 족보에서 탈락됨
인간의 탐욕을 채워주는 바알 신과 제도를 남왕국 유다로 들여온 여호람의 직계손 3대는 족보에서 징계를 받습니다. 왕들의 계보를 기록한 마태복음 족보에서 그 이름들이 탈락합니다. 탈락한 이름은 아하시야(6대), 요아스(7대), 아마샤(8대) 3대 왕입니다. 사실 여호람(5대)도 족보에서 이름이 탈락되어야 마땅합니다. 여호람은 북이스라엘 악녀 이세벨의 딸 아달랴와 결혼하여 바알 신과 제도를 유다 왕국으로 끌어드린 왕입니다(대상 21:11). 그리고 왕권을 지키기 위해 반역도 하지 않은 여섯 형제를 모두 죽인 사악한 왕이기 때문입니다(대상 21:13).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과 그 후손에게 하신 약속 때문에 여호람을 바로 멸족 시키지는 않고(대하 21:7, 삼하 7:12) 족보에도 이름을 남겨 둡니다. 그 대신 여호람은 불치병으로 창자가 빠져서 8년을 통치하고 일찍 죽어야 했습니다. 죽은 후에도 백성들에게 분향을 받지 못했고, 조상들의 묘역에 장사 되지도 못합니다(대상 21:19,20).
그다음 왕정시대 후반기에 가면 왕들의 족보는 다시 요시야의 아들 3명이 모두 이름을 올리지 못합니다.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시드기야 3형제입니다. 남왕국 유다에 바알을 처음 들여온 시기는 아하시야, 요아스, 아마샤가 족보에서 탈락하고, 이제 다시 남왕국의 멸망을 초래한 왕들의 이름도 다시 탈락합니다. 여호야긴 왕은 족보에 이름이 남기는 하지만, 그 후손은 왕이 나지 못했고, 자손도 사실상 끊어져서(렘 22:30) 법통상의 아들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 대신 하나님은 베들레헴 기업을 지키고 이어오는 누가복음 족보의 이름을 통해서 다윗 왕가의 계보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와의 계명을 주실 때, 계명을 어긴 사람은 3, 4대까지 죄를 묻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계명을 지키면 천대까지 은혜를 베풀겠다고 하십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보면서 하나님의 구속사를 실제로 그렇게 이어오고 있다는 것을 기록으로 확인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리고 역사의 전면에는 족보를 더럽히는 왕이나 지도자를 대신하여 선지자를 불러 세웁니다. 여기서 부름을 받은 선지자가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등입니다. 에스겔과 다니엘은 포로기에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예레미야의 호소와 눈물
내가 너희를 기름진 땅에 인도하여 그것의 열매와 그것의 아름다운 것을 먹게 하였거늘 너희가 이리로 들어와서는 내 땅을 더럽히고 내 기업을 역겨운 것으로 만들었으며 제사장들은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말하지 아니하였으며 율법을 다루는 자들은 나를 알지 못하며 관리들도 나에게 반역하며 선지자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무익한 것들을 따랐느니라(렘 1:7,8)
예레미야는 베냐민 땅 아나돗에 사는 제사장 힐기야의 아들입니다(렘 1:1). 선지자 활동을 하지 않았으면 제사장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왕과 거짓 선지자들에게 미움도 받지 않고 일생을 편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과거를 보면서 죄를 사하는 제사만 드리고, 백성들의 생활이나 미래는 보지 않으므로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불러낼 수 밖에 없습니다. 예레미야는 주전 627년경 요시야 왕 13년에 부름을 받아서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 왕 11년까지, 약 41년 기간을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이사야보다 약 100년 뒤에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예레미야도 이사야나 미가처럼 유다의 왕과 지도자, 백성들의 바알 숭배를 경고합니다. 그리고 강대국 바벨론과 이웃 나라에 대한 외교 정책에도 관여합니다(렘 27장). 예레미야는 왕에게 바벨론에 대항하는 반 바벨론 동맹(에돔, 모압, 암몬)에 가담하지 말 것을 권고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이 권고는 그 당시 거짓 선지자들에 방해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렘 28:2~5).
거짓 선지자들은 평안을 말하며, 유다는 재앙이 닥치지 않는다고 말했고, 왕들과 지도자들은 이 거짓 선지자의 말을 듣고 예레미야를 배척했습니다. 왕들은 반 바벨론 외교 정책을 펴다가 느부갓네살에게 잡혀가서 죽거나 눈알이 빠지거나 장기 투옥을 당합니다. 백성들도 잡혀가고 연이어 남왕국 유다도 망했습니다. 이처럼 왕과 지도자는 거짓 선지자들의 달콤한 말을 좋아하고, 선지자들의 쓴소리는 싫어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지도자들이 영적으로 둔감하고, 역사적 인식이 빗나가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왕과 지도자들의 이런 약점을 지적하고 돌아서기를 강구했으나 듣지 않았고(렘 7:34, 9:11,13~17), 결국 나라가 종말을 맞습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멸망을 보면서 눈물로써 탄식하여 그를 “눈물의 선지자”라고 부릅니다(애 1:1,2). 우리는 예레미야의 활동에서 이런 부분은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평소에 다루지 않아서 잘 모르고 있는 희년법에 관련된 예레미야의 활동을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희년법을 실행한 예레미야
그러나 그들의 성읍 주위에 있는 들판은 그들의 영원한 소유지이니 팔지 못할지니라(레 25:34)
보라 네 숙부 살룸의 아들 하나멜이 네게 와서 말하기를 너는 아나돗에 있는 내 밭을 사라 이 기업을 무를 권리가 네게 있느니라 하리라 하시더니(렘 32:7)
예레미야서 32장은 예레미야가 그의 사촌 하나멜의 밭을 기업 무르기로 찾아주어 희년법을 실행한 이야기입니다. 이 기업 무르기는 시드기야 왕 재위 10년에 있었던 일입니다(렘 32:1). 이때는 나라가 패망하기 1년 전, 곧 주전 587년이나 586년 사이입니다. 하나님은 나라가 패망하기 직전인데 예레미야에게 기업 무르기를 하라고 합니다. 기업 무르기를 해도 나라가 빼앗기고 포로로 잡혀가면 경작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기업 무르기 대상지인 아나돗은 북이스라엘 베냐민 지파의 지역으로 나라가 앗수르에게 빼앗기고 135년이 지났습니다. 그러함에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소망을 주려고 합니다. 지금은 유다가 죄악으로 나라가 패망할 수밖에 없지만,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귀환하여 농사를 다시 짓게 될 소망을 기업 무르기로 보여주십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은 대체로 여기까지입니다.
예레미야의 기업 무르기는 필자도 아직 이해하지 못한 수수께끼가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기업 무르기를 한 땅은 숙부인 살룸의 아들 하나멜의 밭입니다. 그러면 예레미야와 하나멜은 사촌 간입니다. 그리고 예레미야의 아버지는 아나돗의 제사장 힐기야이고, 살룸은 숙부입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와 하나멜은 모두 제사장 가문으로 레위 지파이며, 아나돗에 있는 밭은 베냐민 지파의 지역에서 레위 지파에게 분배된 기업입니다(수 21:17,18)
여기서 필자가 이해하지 못한 의문이나 희년법에 관련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레위기 희년법에서 레위 지파에 분배된 기업은 레위기 25:34에서 보듯이 거래가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팔리게 되고, 무르기가 가능한지 의문입니다. 레위 지파는 제사장과 성전관리의 직분을 담당하여 기업을 분배하지 않았고, 분배된 목초지도 경작에서 다른 지파와는 구별됩니다. 또 백성들이 내는 십일조를 기업으로 주었기 때문에 생활에 어려움이 없습니다(민 18:21). 성읍도 48 성읍을 분배받았고(수 21:41,42), 십일조 집행권도 있어서 인구 비례로 보면 이런 대우는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후한 것입니다. 레위 지파에게 분배된 토지는 레위인 개별 기업도 있지만, 도피성이 있는 부지는 공익용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래도 예레미야에게 기업 무르기를 말하는 것을 보면 레위기 25:34의 거래 금지는 25:23의 말씀대로 영구 거래만 금지하고, 25:15,16에서 허용한 시한부 사글세 거래는 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하겠습니다. 아무튼, 예레미야에게 돌아올 상속권은 민수기 상속법을 따라서 하나멜이 자녀(아들과 딸)가 없고, 다른 상속자도 없다면 예레미야에게 돌아오게 됩니다(민 26:6~11). 이때 상속권은 무르기의 권리와 의무가 동반하게 됩니다(레 25:24, 렘 32:8).
두 번째, 무르기는 이미 팔린 토지에 값을 치러서 경작권을 되찾아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촌 하나멜의 밭은 현재 팔려있는 것이 아니고, 경작권이 하나멜에게 있어서 그 권리를 예레미야에게 팔겠다는 말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친족 간의 토지 거래이지, 무르기는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누가 가난하여 몸이 팔리면, 그 몸값을 형제나 친족이 대신 치러서 자유하게 해주면, 이것이 무르기이고, 속량입니다. 내 몸이 형제에게 돈을 받고 팔린다면, 그것은 형제가 형제의 노동력을 사서 고용하는 것이지 무르기는 아닙니다. 이런 거래는 형제의 몸을 사서 부리는 것이지, 이를 풀어주는 무르기가 될 수 없습니다. 토지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르기는 이미 팔린 것을 되사서(다시 찾아서), 또는 빚 담보를 풀어서 경작권을 찾아주는 것이지, 팔고 사서 경작권을 잃거나 빚을 지는 거래를 무르기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세 번째, 기업 무르기에서 증인을 세웁니다. 매매증서는 두통을 작성하여 하나는 인봉하고, 다른 하나는 인봉하지 않고서 이를 구분하여, 인봉한 증서는 바룩에게 명하여 오랫동안 보존하게 합니다. 기업 무르기에 증인을 많이 세우고, 거기에 다시 인봉하여 오랜 기간 보관하게 하는 등 엄격한 거래 절차를 밟고 있습니다. 이렇게 증인을 세우고 인봉을 한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에서 귀환하게 될 것을 미리 알려준 것이었습니다(렘 32:44). 희년법 연구자인 장진광 목사는 인봉한 매매증서가 영구 보존용으로 성전에 보관할 문서이며, 궁극적으로 기업 무르기가 완성될 마지막 때에 개봉될 문서로 보기도 합니다.
주) 장진광, 희년과 복음, 도서출판 두란노, 1994, 63쪽~65쪽.
그런데 룻기를 보면 보아스가 엘리멜렉의 기업을 무를 때에 증인을 세웠습니다(룻 4:2~4). 이 경우에는 토지가 제삼자에게 경작권이 팔려있었으므로 값을 치른 무르기로 기업을 되찾은 경우입니다. 곧 이 거래는 친족 간의 거래가 아니고 제삼자와의 거래인 경우입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의 기업 무르기도 제삼자에게 팔린 하나멜의 밭을 무르기로 되찾아 준 것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라면, 은 17세겔의 거래 대금은 하나멜에게 주었다기보다 현재 아나돗 땅(밭)의 경작권자에게 지불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어떤 거래인지 내용 확인이 어렵습니다.
네 번째, 기업 무르기라는 절차가 생략된 것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사촌 하나멜이 경제적 사정이 어려워서 기업을 제삼자에게 팔아야 하는데, 이런 경우 친족인 예레미야는 그 팔린 기업을 무르기 하여 되찾아 줄 의무가 있습니다. 지금은 하나멜이 기업 경작권을 제삼자에게 팔아서(담보로 잡혀서) 자금 융통을 해야 하지만, 나라가 이미 패망 직전이라서 그 기업을 담보로 돈을 빌려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멜이 기업 무르기를 해야 하는 의무자인 예레미야에게 바로 돈을 빌린 것으로 볼 수가 있겠습니다. 이런 경우 은 17세겔의 금액은 하나멜이 필요한 자금으로 넘어가지만, 경작권은 하나멜에게 그대로 존속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하나멜이 죽으면 상속권이 예레미야에게 돌아옵니다. 룻기에서 아무개는 상속권이 자동(무상)으로 돌아오므로 값을 치르는 기업 무르기는 거절했습니다(룻 4:6).
다섯째, 예레미야서 32장에서 기업 무르기를 말하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될 것이라고 몇 차례 말하고 있습니다(렘 32:15,43). 여기서 “산다”는 말은 레위기 희년법에서 토지를 상품처럼 팔고 사는 것과 개념이 다릅니다. 그런데 이를 토지의 소유권 매매로 생각하면 오해가 생깁니다. “산다”는 용어는 히브리어로 “카나”인데 이는 “얻다”, “습득하다”, “획득하다”라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토지를 상품처럼 산다는 것이 아니고, 기업권, 상속권, 경작권을 확보한다는 의미입니다. 땅을 “판다”는 뜻도 실상은 금융거래로 땅을 저당 잡히고 돈을 빌린다 또는 땅을 임대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될 것이라는 말은 실제로 돈을 주고 매입을 한다는 뜻이 아니고,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하여 각자 자기 기업으로 돌아가서 농사를 짓게 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기업 무르기와 희년법의 구속사적 이해
...너는 베냐민 땅 아나돗에 있는 나의 밭을 사라 기업의 상속권이 네게 있고 무를 권리가 네게 있으니 너를 위하여 사라 하는지라 내가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인 줄 알았으므로(렘 32:8)
필자는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신 이 “기업 무르기”는 성경이 말하는 경제구원(토지 담보 해지)의 유일 수단으로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스라엘 왕과 지도자, 그리고 백성들은 바알 제도를 희년법보다 우선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세우신 기업 무르기를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 예로는 유대인들은 그들이 만든 613개 항목에 달하는 유대인 율례(조상들의 유전)를 들여다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유대인이 만든 613개 항목의 율례에서 경제와 희년법 관련 조항을 보면 웃음이 나올 정도로 이상합니다. 레위기 19:9는 추수에 대한 규례로 추수할 때는 다 거두지 말고 밭 모퉁이의 일부를 남겨서 가난한 자가 먹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 규례를 지키기 위해 이 구절을 8개 항목(216조~223조)으로 쪼개어서 지킵니다. 레위기 본문은 19장 9절과 10절 두 절 뿐인데, 그들은 이 두절을 무려 8개 항목으로나 세분하여 지루하게 나열합니다. 그리고 안식년 규례도 무려 10개 항목(326조~335조)이나 됩니다. 그것도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행동 요령이나 절차를 같은 내용임에도 쪼개고 또 쪼개어 세분합니다.
그러나 진작 토지 거래에 대한 규례는 “땅은 아주 팔지 말라(339조)”와 “희년에는 땅을 돌려주라(340조)”라는 단 두 조항뿐입니다. 그리고 기업 무르기에 대한 조항은 찾아보아도 나오지 않습니다. 이들이 추수 규례를 8개 조항, 안식 규례를 10개 조항으로 했다면, 희년법이 말하는 토지 거래에 대한 법은 그 중요성과 거래 절차 등을 감안할 때 적어도 20개 조항은 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 율례 613개 조항에서 토지 거래에 대한 것은 단 2개 조항만 있고, 그 내용은 단순하게 표기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기업 무르기는 아예 없습니다. 룻기를 보더라도, 지금 나온 예레미야의 기업 무르기를 보더라도, 이 거래에는 증인을 세우고, 인봉을 하고, 엄격한 과정과 절차를 따릅니다. 그런데 유대인 613개 조항의 율례는 이런 규정이 없고, 무르기는 용어 자체가 보이지 않습니다.
주) 유대의 전승을 따르면, 구약성에서 모세오경(토라)에는 613개의 계명이 포함되어 있다고 본다. 이를 중세시대의 유대인 랍비이며, 사상가로 알려져 있는 마이모니데스(Maimonides)가 최초로 613개로 분류하였다. 613개 조항 가운데서 "하라"는 긍정적인 계명은 248개이며, "하지 말라"고 하는 부정적 금지 계명은 365개이다. 248이라는 숫자는 사람의 몸을 이루고 있는 각 부분의 총합이며, 365라는 숫자는 1년을 뜻한다. 그들은 그들의 율례를 이렇게 사람의 몸 조직과 날짜라는 숫자에 맞추어 인위적으로 조정하였다.
유대인들이 기업 무르기를 싫어하는 것은 성경에서도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룻기 4:6에서 아무개가 기업을 무르기를 거부하는 것이 그 단적인 예입니다. 아무개의 가까운 친족 엘리멜렉이 가진 베들레헴 기업은 그냥 두면 상속권이 저절로 자기에게 돌아오므로 값을 치르는 무르기는 거부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38:9에서 오난이 기업 상속권이 걸린 계대결혼을 회피하기 위하여 설정하는 것에서도 확인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2:23에서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에게 계대결혼제도에 대하여 물을 때, 그 횟수를 과장하여 일곱 번이나 반복하는 예를 들어 질문합니다. 이것은 질문 태도에서 무르기 제도에 대한 거부감을 감지할 수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자질구레한 법규는 613개 조항이나 세분하여 엄격히 지키고, 한 가족의 생존권이 걸려있는 토지 거래는 두 조항만 두고서 기업 무르기는 숨겨놓고 지키든 말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를 빗대어 이렇게 비판합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킨다(마 23:24)”라고 말입니다. 이처럼 바리새인들의 종교는 겉으로 보면 하나님은 철저하게 섬기는 행위를 하고 있지만, 생활은 바알법을 따라서 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 희년법은 학자나 연구가들도 너무 쉽게 무시해 버립니다. 희년이란 2년 연속 휴경을 해야 하는데 이렇게 하면 경제가 마비되기 때문에 현실적인 실현성이 없으며, “실제로 실천 사례도 없는 것으로 하나의 유토피아적인 죽은 문자에 불과하다”라고 악평을 합니다. 롤랑 드보(R. de Vaux), 반 셀름(A. Van Selms) 등이 그 대표적 예입니다.
주) <드보(R. de Vaux), 반 셀름(A. Van Selms)> 이양구 역, 구약시대의 생활 풍속, 대한기독교출판사, 1983, 320쪽.
희년법은 크게 보면 토지 휴경, 토지 거래, 그리고 토지의 속량에 해당하는 무르기 이렇게 세 가지입니다. 토지 휴경은 생태계 보호를 위한 것이라고 보면, 굳이 2년 연속 휴경을 하지 않고도 그 취지를 살리기만 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토지 거래의 시한부 거래는 토지의 물리적 성질로 인하여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오늘날에도 주식과 같은 가격 불안을 보이는 금융거래는 이 시한부 거래 제도를 채용하면 해결이 되는 과학적 시장원리입니다. 또 토지를 속량하는 무르기는 토지 거래에서 발생한 빚을 없애는 유일한 방식입니다. 이것은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구원하신 십자가의 구원원리입니다. 그런데 이런 희년법을 “실천 사례가 없는 죽은 문자”라고 합니다.
이런 분들의 글을 읽어보면, 땅에 대한 이해도가 거의 없습니다. 토지의 영구 매매를 금지한 희년법의 경제적 이해도는 백치에 가깝습니다. 기업 무르기도 신앙적 의미만 알고, 이것이 부동산시장 문제의 근본 해법이 되는 것을 모릅니다. 유대인들은 희년을 모르면 토지를 거래하지 못하며, 무르기도 못하는데 성경 연구자들이 "희년은 죽은 문자"라고 합니다. 이들이 한평생 성경을 연구해도 “희년법의 경제적 내용은 낫 놓고 ㄱ자도 모르는 무지”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너무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예레미야와 기업 무르기의 주요 내용
지금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제시한 기업 무르기는 우리가 현실적으로나 영적으로 반드시 알아야 할 주제입니다. 이에 관한 내용을 몇 가지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기업 무르기는 생존의 필수재인 토지 경작권을 되찾아 주어서 한 가계의 생존과 안정, 그리고 경제적 자유를 지켜주는 필수적인 수단입니다. 한 가정의 생존과 경제적 자유는 기업이 없으면, 안전을 보장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희년법은 기업 무르기를 레위기 25:24에서 25:28까지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둘째, 토지의 안식과 휴경은 환경보호를 위해서 있으나, 기업 무르기는 토지의 시장문제, 곧 경제문제를 해결하는 유일 수단입니다. 여기서 유일 수단은 다른 대안이 없다는 뜻입니다. 지금도 토지와 주식 등 가치가 시간 흐름에서 커지는 영구재의 거래는 반드시 성경 희년법이 가르쳐 준 시한부 거래나 사용가치로만 거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토지 휴경에 필요한 희년은 굳이 지키지 않아도(취지만 살려도) 되겠지만, 토지 거래에 필요한 기업 무르기는 지금도 반드시 지켜야 금융시장에서 발생하는 빚 문제와 생활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습니다.
실무적인 예로는 기계나 건물, 자동차 등 감가상각성 자산, 어업권, 광업권, 특허권 등입니다. 이런 자산은 사용 기한이 곧 수명이 있어서, 시간 흐름으로 가치가 작아지므로 거래 가격 안에 성경 희년법이 말하는 무르기가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거래는 팔고 사도 가격 문제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토지와 주식, 가상화폐 등은 이렇게 거래를 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고, 같은 수익을 내는 자산임에도 투입 비용은 절반으로 낮아집니다. 임료나 배당 수익은 같은 크기인데 투자비(매입가격)는 절반 정도로 낮아지고, 가격이 가치물로 실현된다는 뜻입니다.
(희년법의 경제적 해석과 기업 무르기의 시장원리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필자의 책, <한가위 희년 나라>를 참고하셔요.)
셋째, 기업 무르기는 생활 실무이며, 역사성을 가집니다. 무르기를 하려면 희년이 언제인지 연도를 알아야 합니다(레 25:15,16). 토지 거래에서 경작권의 기간계산에 필요한 기준일자도 매년 7월 10일입니다(레 25:8,9). 계절로는 포도와 같은 가을 추수를 다 마치는 시기입니다(레 23:39, 출 23:16). 예레미야의 기업 무르기는 시드기야가 통치한 주전 587년 경입니다. 예레미야의 기업 무르기에 적용할 기간계산은 주전 563년에 도래하는 18회 희년입니다. 그러면 예레미야의 기업 무르기에서 남은 잔여기간은 24년입니다. 예레미야가 기업 무르기를 할 때 지불한 가격은 은 17 세겔입니다(렘 32:9). 그러므로 아나돗에 있는 레위 지파 살룸(아들 하나멜)의 밭에 대한 24년 기간의 무르기 가격이 은 17 세겔이었습니다.
이렇게 예레미야는 사촌 하나멜의 기업을 무르기 하여, 18회 희년을 24년 앞당겨 지켰습니다. 이것은 전에 룻과 보아스가 약 500여연 전에 행한 기업 무르기과 같은 희년법의 준수입니다.
이처럼 기업 무르기는 생활 실무이고, 기간계산의 기준일인 희년을 알아야 토지 거래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만든 613개 조항에는 무르기 규정이 아예 들어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백성들은 토지 거래에서 이런 제한 조건이 붙는 무르기는 모르거나 알아도 무시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시간 흐름에서 희년법은 점점 약화되어 가다가 파기되어 무용지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에서 본대로 롤랑 드보나 반 셀렘 같은 성경학자는 희년이 실천 사례가 없고, 유토피아일 뿐, 죽은 문자라고 했습니다. 또는 일부 학자는 “바벨론 포로기 이후 제사장이 만든 문서인데 모세오경에 삽입된 것”이라고 보기도 합니다(신명호, 앞의 책, 62쪽, 각주 참조). 이처럼 평생을 성경을 연구하고, 전해도, 희년법은 흠이 많고,지키기도 어려운 하찮은 내용으로 보입니다. 한국식으로 말하면 사람이 만든 민법, 상속법, 부동산등기법은 그대로 지키면서 하나님이 제정하신 희년법은 시나 소설처럼 생각하고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희년은 죽은 문자"라고 하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말을 하게 됩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이 점에 유의하여 자기를 한번 돌아보고, 몇 번이고 곱씹어 보아야 할 부분입니다.
넷째, 기업 무르기는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유일한 방법론, 곧 속량이라는 구원원리가 들어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구원의 원리를 따라서 십자가에서 희생되어 우리를 살려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기업 무르기는 그 방법 안에 토지의 물리적 성질인 창조원리, 경제구원의 필수 수단인 시장원리, 값을 치른 희생으로 사랑의 희생원리가 모두 들어있고, 서로 유기적으로 융합되어 있습니다.
다섯째, 하나님은 기업 무르기를 예레미야에게 명하면서 희년법과 바알법의 차이를 알려 주셨습니다. 기업 무르기는 빚은 갚고 생존의 땅을 다시 찾아 자유와 안전을 보장해 주는 법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지도자나 백성들이 선호하는 바알법은 탐욕을 채워주는 제도입니다. 바알 숭배는 가증한 물건들을 내 집에 세워서 집을 더럽히며, 바알 산당이 있는 힌놈의 골짜기에서 자녀까지 불에 살라 바치는 사악한 제도입니다(레 32:34,35). 바알 신봉자들은 부자가 굶주린 백성들을 헐값에 사서 종으로 부리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기업 무르기로 구별하여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무르기가 있는 희년법은 날짜, 계절, 연도가 필요한 역사성과 과학성, 그리고 합리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알법은 사람의 탐욕을 채우기에 편리하게 만든 제도이므로, 이런 기업 무르기의 역사성이나 경제적 합리성이 없습니다. 이것이 우상이 표방하는 거짓 종교이며, 그런 삶의 방식은 무당이 뽑아내는 점괘나 푸닥거리와 별반 다를게 없습니다.
여섯째, 하나님은 이 기업 무르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현재와 미래의 역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나의 생존권이 걸린 기업이 팔려있으면, 나의 생활이 어렵고 경제적 자유를 잃게 되는데 기업 무르기는 이 문제를 해결하여 줍니다. 이와 같이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라는 망하고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지만, 포로에서 다시 돌아온다고 합니다(렘 32:44). 그래서 잃었던 주권과 자유를 회복하여 나라를 다시 세운다는 것입니다. 팔려나간 기업을 누가 무르기를 해주면 삶의 문제가 해결 되듯이, 지금 잃어버린(잃을) 나라도 그렇게 하나님이 회복해 주실 것이라는 소망입니다.
일곱째, 기업 무르기는 무르기의 최종 완성자, 메시아를 대망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때가 되면 그들이 내 백성이 되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렘 32:38), 다윗에게 의로운 한 가지가 나서 이 땅에서 공평과 정의가 실행될 것이라고 합니다(렘 33:14~16). 여기서 공평과 정의를 현실적 의미로 보면, 성경 희년법이 실제 생활 복음으로 실행되어 완성될 때 가능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명하신 기업 무르기는 경제적, 역사적 의미가 큰 주제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알법을 따르기 좋아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년법을 알려주기 위하여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기업 무르기를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사람이 생각하지 못한 일을 미리 계획하시고, 실행하시는 분입니다.
안식법과 희년법 준수를 촉구하는 예레미야
시드기야 왕이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백성과 한 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계약을 맺고 자유를 선포한 후에 여호와께로부터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렘 34:8)
희년법을 따라 사촌 하나멜의 기업 무르기를 해 준 예레미야는 이제 이스라엘 기득권층인 부자들에게 신명기 면제년(안식년) 규례와 희년법의 준수를 촉구합니다. 시드기야 왕은 이런 예레미야의 권고로 예루살렘에 있는 방백들과 자유를 선언하고, 히브리 종들을 풀어주는 언약을 맺습니다. 이때는 주전 587/586년이라고 보면, 이 시기에 가장 근접한 안식년(면제년)은 주전 585년으로 추정이 됩니다. 곧 이때가 안식년은 아니었고, 아마도 바벨론 침입으로 인해서 백성들이 잡혀가는 것을 피하고자 왕명으로 행한 임시 조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지역의 범위도 예루살렘 도성에 국한된 조치로 보입니다. 그래도 이 조치가 안식년과 희년에 해야 할 "자유의 선언(선포, 레 25:10)"을 왕이 직접 한 것이므로 상당한 의미를 가집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벨론 군대가 애굽 군대와 맞서기 위해 일시 퇴각하자 풀어준 종들을 다시 잡아 와서 종으로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다시 예레미야를 불러 알려줍니다. 이 자유의 선언은 7년이 되면 종을 풀어주는 제도라고 합니다(신 15:12). 하나님은 이 제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출해 준 그때 만든 법인데 이것을 어겼다고 꾸짖습니다. 430년 종살이로 고통을 받은 백성들이 지금 이런 종들이 겪을 고통이나 역사를 잊어버리고 동족을 불러 종으로 부리고 있습니다(렘 34:13,14).
그래서 하나님은 형제와 이웃에게 자유를 선언하고, 이 법을 이행하지 않은 너희를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붙이고, 열방 중에 흩어지게 하겠다고 하십니다(렘 34:17). 이와 같이 몸이 빚의 담보로 팔려서 묶인 사람을 풀어주고, 빚은 탕감하며, 땅을 쉬게 하여 안식년 생산물은 가난한 자에게 제공하도록 한 제도는 레위기 안식법과 신명기 면제년 규례에 있습니다. 이것을 크게 보면 모두 희년법의 제도권 틀 안에 들어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하여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전쟁과 나라의 패망, 그리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갈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레미야 34:17과 같이 안식년과 희년법을 지키지 않은 대가라고 합니다. 여호와가 그들에게(바벨론) 명하여 (종을 풀어주었다가 다시 잡아간) 성으로 들어오게 합니다. 그리고 그 성을 불사르고 취하게 하고, 성읍이 황무하여 거민이 없게 하겠다고 하십니다(렘 34:22).
희년법 파기와 70년 포로기의 예언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렘 29:10)
이에 토지가 황폐하여 땅이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더라(대하 36:21).
예레미야가 희년에 대한 마지막 사역으로 이스라엘의 당면한 미래사를 백성들에게 알리고 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서 70년 간 포로로 생활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지도자와 백성들이 바알신을 섬기고, 바알법을 따라서 희년법을 어긴 것에 대한 징계입니다. 이러한 바알 우상이 세운 제도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백성들에게 자유를 주지 않고, 억압하거나 수탈하는 제도이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 신을 섬기는 이유는 그 신이 무슨 신통력이 있어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 바알 우상은, 우상이 만든 제도가 아모리의 율례와 아합 집의 행위와 같이 탐욕을 채워주기 쉬운 정치나 경제제도를 운영하기 때문입니다. 바알은 부와 권력의 독점을 부추기는 신이고, 그들의 율례는 그 부와 권력을 키우기 쉽도록 만드는 제도입니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희년법을 지키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징계를 하신다는 경고를 한두 번도 아니고 20여 회가 넘도록 경고를 반복했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알법을 따르지 희년법은 지키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탐욕을 채워주기 쉬운 제도를 선호하기 때문에 토지의 소유와 영구매매를 금지한 희년법은 거부하고, 바알법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예언한 70년 포로기는 안식년법과 희년법을 어긴 대가로 받은 것입니다. 본문에서 70년 포로기는 토지의 안식년을 70회를 지키지 않은 벌칙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기간은 찾아보나 주전 1102년 7회 희년 이후부터 주전 612년 17회 희년까지 490년 기간이었습니다. 여기서 490년 기간은 10회 희년 기간(490년 = 49년×10회)입니다. 이 기간을 안식년 기간으로 환산하면 안식년은 7년마다 돌아오므로 70 안식년(70 = 490/7년)을 지키지 않은 기간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70년 포로기의 벌칙은 예레미야 34:17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해야 할 안식 규례, 곧 자유의 선언과 토지의 안식과 무르기 등을 하지 않은 벌칙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땅을 70년간 쉬게 하고, 사람은 포로로 잡혀가서 그 땅을 경작하지 못하게 합니다. 바알을 섬기고 자기 욕심만 채우면서 하나님과 이웃, 그리고 땅의 안식과 무르기, 속량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벌을 주어서라도 바로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70년 기간은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루살렘 패망한 주전 586년부터 스룹바벨 성전이 완공된 주전 516년까지 70년 기간입니다. 다른 하나는 느부갓네살에게 바벨론 포로로 처음 잡혀갔던 주전 608년경(또는 605년 갈그미스 전투)부터 3차 포로 귀환 시기인 주전 538년경까지 70년(또는 67년) 기간입니다. 이 기간은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는데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70년 포로 생활"은 백성들에게 생존권 보장과 자유를 주기 위해 만든 안식법과 희년법을 70회나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한 벌칙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이런 벌칙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70년 포기에 대한 상세한 것은 앞에 올려져 있는 다른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참고> : https://cafe.daum.net/bongampeople/kHHl/8
예레미야의 희년 사역에 대한 평가
애굽의 400년 종살이도, 광야 공동체의 40년 방랑 생활도 사람들이 땅과 희년에 대한 무지함으로 인한 훈련이었거나 연약함 때문에 받은 벌칙이었습니다. 그렇게 오랜 기간 호된 경험을 하고도 사람들은 다시 땅과 희년법이 보장하는 자유와 안식의 소중함을 모릅니다(무시합니다). 그래서 바알법을 따르다가 다시 70년 포로 생활이라는 벌칙을 받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 신을 섬기는 잘못은 알아도, 토지의 안식과 사람의 자유를 보장하는 희년법을 어겨서 포로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은 잘 모르고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희년법과 관련된 사역을 한 것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먼저 사촌인 하나멜의 밭에 기업 무르기를 해주었습니다(렘 32:8). 이것은 예레미야가 성경 희년법을 따라 친족의 어려운 경제문제를 해결해 준 것으로 사적인 사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다음은 예레미야가 시드기야 왕에게 권고하여 예루살렘 부자들이 동족의 종살이를 풀어주는 자유를 선언하게 했습니다. 이것은 예레미야가 안식년(면제년) 법을 따라 기득권층과 빈곤층의 경제적 차별과 신분의 차별 문제를 (일시적이지만) 해결하여 준 것입니다. 이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제와 신분에서 발생하는 격차를 없애주고, 자유와 평등이 제도적으로 보장되는 희년법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 자유를 선언하는 법을 지키지 않으면 징계를 받는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렘 34:17). 이것은 예레미야가 정치와 사회에 대한 개혁을 희년법으로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백성들에게 알린 것으로 공적인 사역이었습니다.
그다음은 이러한 안식년 면제의 법과 토지를 쉬게하고, 기업을 속량하는 희년법을 지켜야 함을 알려주고, 이를 장기간(490년, 70 안식년, 10회 희년) 지키지 않으므로 70년 포로 생활을 하게 되는 이유를 알렸습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에서 다시 귀환하게 될 것(렘 29:10)과 다윗의 후사로 구세주가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을 예언했습니다(렘 33:15). 이것은 예레미야가 이스라엘 백성과 역사는 물론 세상 구원이 희년법의 순종 여부와 직접 관련이 있다는 것을 만민에게 알린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속사에 관련된 사역입니다.
이처럼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세운 희년법 사역자로서 친족은 물론 사회와 나라까지 구원하실 하나님의 구속사에 직접 쓰임을 받은 선지자이었습니다.
포로기의 예언자, 에스겔과 다니엘
제 삼십년 사월 오일 내가 그발강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으니...(겔 1:1)
유다왕 여호야김이 다스린 지 삼 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을 에워샀더니(단 1:1)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잡혀간 포로 중에는 에스겔과 다니엘이 있습니다. 에스겔은 B.C. 597년 느부갓네살의 2차 침입 때 포로로 잡혀갔고 바벨론 포로수용소에서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은 B.C. 605년 느부갓네살의 1차 침입 때에 바벨론으로 잡혀가서 왕실에서 예언한 선지자입니다. 두 사람 모두 포로의 신분으로 잡혀가서 바벨론에서 선지자 활동을 했습니다. 또 그들은 역사적 범위를 뛰어넘어 계시록처럼 멀고 먼 미래에 있을 세상을 상징적, 묵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에스겔은 30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예언을 했으며, 이스라엘의 죄악을 지적하고,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이웃 나라 왕들에게도 닥쳐올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지금은 나라가 망하고 포로가 되었지만, 하나님이 나라를 다시 회복시켜 주신다고 합니다. 이런 모습은 바로 에스겔이 본 미래의 환상으로 나타나는데, 에스겔의 환상은 하나님이 미래의 성전 건축과 회복된 나라에서 희년법 원리대로 기업을 재분배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또 다니엘은 주위의 강대국들이 패망할 것을 사후에 쓴 역사 기록처럼 생생하게 예측을 합니다. 70 이레는 희년의 성취자로 오실 메시아와 세상의 종말에 대해 기간을 보여주며, 예언하고 있습니다.
특히 에스겔 성전과 기업 재분배는 아직 이루어지진 않았지만, 이를 통하여 앞으로 하나님이 인도하는 미래의 세상을 미리 내다볼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미래에 있을 에스겔 성전과 희년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보여주신 성전은 이 세상에서 실제로 지은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런 가시적 성전이 지어질 것으로 보기도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이 성전이 보여주는 영적인 내용과 실제적인 의미는 성경 구속사에서 생생하게 살아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에스겔 성전은 실제로 건축된 솔로몬 성전보다 더 상세한 설계와 구조로 되어있고, 세밀하며, 장엄한 모양새입니다. 이 말은 에스겔 성전은 환상으로 보여주고 있지만, 실제적인 성전이나 다름이 없고, 그 성전은 심오한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서 성전의 구조를 구체적으로 말하기는 지면 관계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성전이 보여주는 구조를 기업과 희년에 관련된 부분만을 요약하여 정리해 보겠습니다.
너희는 제비 뽑아 기업으로 삼을 때에 한 구역을 거룩한 땅으로 삼아 여호와께 예물로 드릴지니라 ... 그중에 성소에 속할 땅은 길이가 오백 척이요 너비가 오백 척이니 네모가 반듯하며 그 외에 사방 쉰 척으로 전원이 되게 하되(겔 45:1,2)
에스겔 성전은 공간 면적이 정사각형 구조입니다. 성소에 속하는 땅은 길이와 너비가 각각 50척으로 네모반듯하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예물로 드리는 땅도 길이와 너비가 각각 25,000척을 네모반듯합니다(겔 48:20). 성전 안에 있는 지성소의 크기도 길이와 너비가 각각 20척입니다.
에스겔 성전의 구조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아래는 <박윤식, 여호와 삼마 에스겔 성전, 구속사 시리즈 11권 상, 휘선, 2020, 433쪽.)의 내용을 참고로 필자가 요약한 것입니다.
① 제사장과 레위인의 분깃은 길이가 25,000척 너비가 10,000척입니다(겔 45:1,3,5).
② 성읍의 기지는 길이가 25,000척, 너비가 5,000척입니다(겔 45:15)
③ 성읍의 길이는 동서남북 사면이 각각 4,500척, 주위 뜰이 각각 250척입니다(겔 48:17).
④ 성전의 외곽 담은 500장대(3,000척)입니다. 사면 담은 500척, 주위 뜰은 50척입니다.
⑤ 성전 문간의 크기가 길이 50척, 폭이 25척(겔 40:13,21,25,29,33,36), 바깥뜰 문간 너비, 안뜰 문간 너비가 각각 50척, 번제단 안뜰의 장이 100척입니다.
⑥ 성전의 길이가 100척(겔 41:13,15), 거룩한 방 복도의 길이가 100척, 두 방의 거리가 100척, 너비가 50척입니다.
⑦ 성전에 올라가는 계단의 수는 25개입니다. 바깥들 계단은 7개(겔 40:22,26), 안뜰 문간은 8개(겔 40:31, 34,37), 성전으로 들어가는 계단은 10계단(겔 40:49), 합이 25계단입니다.
이에 대하여 박윤식 목사는 에스겔 성전의 25라는 수는 숫자 10과 7로 이루어진 것이며, 25의 배수인 50은 희년과 관련된 숫자라고 합니다. 그분은 에스겔 성전에서 50은 10번 사용되었으며(겔 40:15,21,25,29,33,36,42:2,7,8,45:2), 25는 7번(겔 40:13,21,25,29,30,33,36) 사용되어 둘을 합치면 성경에서 승리의 수인 17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희년은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을 7번 지난 다음 해 50년에 돌아오는 해입니다. 성경에서 7은 완전수로 안식일(7일), 안식년(7년), 희년(7안식년)을 나타내며, 10은 그 완전수의 내용적인 충족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에스겔 성전은 시간의 완성을 나타내는 숫자 7과 49년, 그리고 내용적인 충족을 나타내는 10과 50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구조입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에스겔 성전의 위치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분배한 기업과 맞물려 있다는 점입니다. 희년이란 원래 백성들에게 기업이 공평하게 분배되어 삶의 문제가 해결되고, 자유가 최고조에 달하는 때를 말합니다. 에스겔 성전은 바로 기업의 분배와 시간과 공간을 함께하면서 건축되고 있습니다.
에스겔이 본 희년과 기업 분배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너희는 이 경계선대로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게 이 땅을 나누어 기업이 되게 하되 요셉에게는 두 몫이니라(겔 47:13).
에스겔서의 종결 부분인 47장과 48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 땅을 분배하고 있습니다. 에스겔서 47장 1~7절은 북쪽 땅을 단 지파를 비롯한 에셀, 므낫세, 에브라임, 르우벤, 유다 등 일곱 지파에게 분배합니다. 47장 23~29절은 남쪽 땅을 베냐민, 시므온, 잇사갈, 스불론, 갓 지파에게 분배합니다.
그리고 북쪽 일곱 지파와 남쪽 다섯 지파 사이에는 예물로 드리는 땅이 있습니다. 예물로 드리는 땅의 정중앙에 성전이 있고, 그 성전 양쪽에 왕의 기업이 있습니다.
에스겔의 기업 분배의 원칙
에스겔서의 기업 분배에는 몇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첫째, 땅을 공평하게 나누었습니다(겔 47:14). 그 방법은 여호수아의 토지 분배와 같이 지파별, 가족별로 제비를 뽑아서 나눕니다.
둘째, 요셉에게는 두 몫의 기업을 줍니다.
셋째, 이방인에게도 기업을 분배합니다.
넷째, 예물로 드린 땅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의 분깃이 분배됩니다.
다섯째, 예물로 드린 땅은 거룩한 곳이며, 그중 성소는 지극히 거룩한 땅입니다.
여섯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분배된 기업의 정중앙에 성전과 성소가 위치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전체 기업의 관리는 성전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것입니다.
일곱째, 왕에게도 별도의 토지를 분배합니다(겔 45:7,8). 가나안 진입 초기에 행한 기업 분배에는 왕의 땅이 없었습니다. 왕에게 필요한 토지를 분배한 대신에 왕이 백성들을 압제하지 못하게 합니다(겔 45:9). 왕도 희년법에 대한 권리와 의무가 있으며, 백성들의 기업을 취하거나 산업에서 쫓아내지 못합니다(겔 46:47,48). 이 조치는 아합 왕이 나봇의 포도원을 강제로 탈취한 것과 같이 지도자나 권력자들이 백성들의 산업을 취한 것(사 5:8. 미 2:6)에 대한 예방 조치라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에스겔 성전은 땅을 분배하기 전에 성전 문지방 밑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전 문지방 밑에서 솟아난 물이 성전을 감돌아 강이 되고 점점 불어나서 사람이 건널 수 없을 만큼 많아집니다. 그래서 강가에서 나무가 무성하고 생물들이 많아지고 생기를 얻습니다. 강 주위에 먹을 과일이 풍성하며, 실과는 먹을만하고, 잎은 약재료가 됩니다(겔 48:13)
성전의 생명수는 예수님과 복음을 상징합니다. 복음은 생명수와 같이 점점 자라서 세계로 뻗어갑니다. 그런데 이러한 에스겔 성전과 기업 분배는 실제로 행한 적이 없습니다. 토지 분배를 한 경계를 보면 실제와 드릅니다. 땅의 경계는 산맥과 강이 있는 자연 형태를 감안해야 하므로 직선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에스겔 성전과 토지 분배는 직선과 네모반듯한 형태입니다. 이것은 토지 분배에 대한 영적, 상징적인 의미가 들어있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에스겔 성전의 건축과 기업의 재분배는 미래에 넘겨진 우리의 과제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구속사가 제사법(성전)과 희년법(기업)으로 성취되어 가는 과정을 성도들에게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초막절 마지막 날,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에스겔 생명수와 같은 생수가 배에서 흘러내린다는 말씀을 하십니다(요 7:37).
이것은 신약에서 교회에 임하는 성령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성령이 임하니 모두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가진 재물을 내어놓고 코이노니아를 합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내어놓은 토지는 속하는 날(속죄일, 속량절)에 각자에게 분배하여 경제문제를 해결하고, 초막절 축제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초막절 잔치가 끝이 나서 8일째 성회를 마치면 모두 집으로 돌아가서 농사를 짓기 시작합니다. 분배받은 토지는 이때 밀과 보리의 씨를 뿌리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른 비를 내려서 땅을 적셔주고, 뿌린 씨앗은 생기를 얻어서 싹을 네게 됩니다.
이것이 에스겔 성전이 보여주는 생명수와 예수님이 말씀하신 초막절의 생수이며(요 7:37,38), 초대교회가 성령 강림으로 가진 재산과 토지를 내어놓고 공동체에서 재분배를 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행 2:44,45). 물론 초대교회는 내어놓은 토지를 자본재로 분배하기보다 당면한 구제를 위해 소비재로 사용해 버려서 신앙 공동체가 가진 한계를 보여줍니다. 교회가 아직은 오순절 교회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신앙 공동체는 영성이 자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주는 생수가 흘러넘치는 초막절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 공동체가 생활 공동체로 나아가야 온전한 나라가 세워지고, 세상이 회복된다는 뜻입니다.
세계의 역사를 미리 본 다니엘
다니엘은 BC 605년 바벨론 1차 포로로 잡혀가서 바벨론 왕의 신임을 받아서 총리가 되었습니다.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가서나 바로 왕의 신임을 받아 총리가 된 것과 비슷합니다. 요셉과 다니엘은 이방에서도 여호와의 신에 감동하여 신앙의 지조를 지켰으며, 현실 정치나 경제에도 탁월한 총명과 지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방 나라에서도 지도자가 된 인물입니다. 다니엘은 에스겔과 함께 바벨론 포로로 있었지만, 포로 생활과 선지자 활동은 다니엘이 더 길었습니다. 그리고 에스겔은 백성들이 있는 삶의 현장에서, 다니엘은 바벨론 왕실에서 주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다니엘이 신하들의 시샘과 고소로 사자 굴에 던져졌지만, 하나님이 살려 주신 이야기는 모두가 익히 알고 있습니다(단 3:8~27). 그리고 다니엘은 꿈은 통하여 미래의 있을 주변 강대국들의 흥망성쇠를 예측했습니다. 꿈에서 본 사자는 바벨론, 곰은 바사(페르시아), 표범은 헬라, 철은 앞으로 세워진 로마 제국을 말합니다.
그리고 다니엘은 숫양과 숫 염소의 뿔에 대한 이상으로 주변 강국들의 왕들에 대한 정치도 내다보고 있습니다. 숫염소는 헬라의 왕이며, 큰 뿔은 알렉산더 대왕입니다. 알레산더 대왕 이후 나라가 네 개로 나누어질 것도 예언합니다(단 8:8,22). 그런데 이웃 나라에 대한 다니엘의 이 예언은 모두 성취가 되었습니다.
희년 주기로 살펴본 다니엘의 70 이레
그런데 다니엘의 환상 중에 오실 메시아에 대한 70 이레의 예언이 있습니다. 다니엘의 여러 예언 중에 70 이레는 우리에게 구원의 계획과 사역을 시간표처럼 보여주는 예언입니다. 곧 70 이레는 오실 메시아의 초림과 재림에 관한 예언입니다. 70 이레는 내용이 묵시적 또는 상징적 언어로 보면 그 의미를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70 이레는 계시록과 같이 미래에 대한 예언이어서 학자나 연구자들마다 의견이 다른 부분이 많습니다.
필자는 평소에 성경을 보아도 실무적 검증이 가능한 경제나 희년법을 중심으로 보기 때문에 다니엘의 70 이레는 늘 관심 밖의 주제이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본 예레미야의 예언에서 70년 포로기가 실제로 성취되었고, 그 기간은 안식년과 희년의 주기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70 이레는 오실 메시아에 대한 기간과 관련된 예언이므로, 70 이레 역시 희년 주기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여겼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한 횃불언약에서부터 땅과 희년은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특별한 섭리로 인도하고 있음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다니엘의 70 이레도 기간과 관련된 희년 주기를 적용하여 풀어보았습니다. 그런데 희년 주기를 적용한 다니엘의 70 이레는 쉽게 이해가 되었습니다. 70 이레는 상징적 언어라기보다 생활 실무인 희년과 그 시간의 주기에 맞추어 놓은 예언이었습니다. 물론, 70 이레에 대한 해석은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르므로 조심스럽게 살펴야 할 부분입니다. 따라서 그 내용을 모두 다루려면 상당한 시간과 분량이 필요하므로, 여기서는 앞에서 정리한 내용의 일부를 골라서 소개만 하겠습니다. 상세한 것은 아래 주소에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희년 주기와 다니엘의 70 이레에 대한 종합 정리 및 요약>
소개한 글 : https://cafe.daum.net/bongampeople/kHHl/12
아래 글은 위의 글, 종합 정리 및 요약 중에 일부만 발췌하여 소개합니다.
4. 희년 주기로 살펴본 다니엘의 70 이레에 대한 정리
4.1. 희년 주기와 70 이레의 일반적 성취(단 9:24)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단 9:24)
(1) 70 이레는 “70의 일곱들”로 490(490 = 7×70)의 날이나 해를 뜻합니다. 그런데 ‘날(day)’은 해석이 불가능하므로 에스겔 4장 6절 또는 민수기 13장 34절에 근거하여 년(year)을 적용합니다. 그러면 70 이레는 490년이 됩니다.
(2) 70 이레는 7의 주기를 가지며, 전체 기간 490년은 안식년 주기 70회와 희년 주기 10회와 같습니다. 포로기 70년 역사가 490년 안식년과 희년을 불복한 것과 관련고 있으므로, 그 회복의 역사인 70 이레도 같은 안식년과 희년의 주기인 490년과 관련이 있습니다. 70년 포로기 역사는 지난 490년 희년 주기에서 레위기 안식법을 어긴 대가로 받은 징계입니다. 다니엘의 70 이레는 미래의 희년 주기 490년간, 이스라엘의 회복과 세상 구원을 위한 예언입니다. 70 이레는 세상과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아의 초림과 재림, 그리고 이 땅에서 이루어질 하늘 천국의 완성 과정을 미리 보여주는 하나님 구속사의 시간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70 이레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 희년 주기인 490년의 기간 예언을 따라서, 나사렛 회당에서 희년을 직접 선포하십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희년 주기와 관련된 70 이레, 490년의 예언을 직접 성취시키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70 이레는 희년 주기 1 이레 7년을 다시 이연(연계)시켜서 성취된 3년 반과 미성취된 3년 반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그래서 초림의 희년과 다시 완성될 미래의 희년 나라, 곧 메시아의 왕국을 구분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4) 희년은 서수(序數)인 7의 주기, 곧 7 안식일, 7 안식년, 49 희년의 주기를 기수(基數)인 50년으로 완성하는 때입니다. 구속사에서 희년은 시간의 완성기입니다. 여기서 490년은 이 기간이 10회 반복으로 그 완성이 충만하거나 절정에 이른 상태를 뜻합니다. 경제 사회적으로도 희년은 몸값이 소멸하여 종이 해방되고, 땅값이 소멸하여 토지 무르기가 종결되는 때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의 삶을 옥죄고 있었던 억압과 굴종이 사라지고, 한 사회(나라)에서 자유와 평등이 최고조에 달하는 때를 말합니다.
다니엘서 9장 24절에서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 부음을 받으며, 허물과 죄악이 그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성취되는 때는 이러한 희년이 성취되거나 완성되는 때를 말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이 임하여 기름 부음을 받으시고,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이 되는 희년을 직접 선포하셨습니다(눅 4:18,19). 이 해가 주후 26년, 7월 10일, 속하는 날입니다. 이 해는 예수 그리스도가 공생애를 시작한 30세, 30회 희년이었습니다.
이러한 희년 주기와 70 이레의 문자적 또는 내용적 성취는 희년법에 들어있는 안식년과 희년에 대한 성경 본문(레 25:8,9,10)을 적용하면, 그 누구도 부정하거나 다른 의견을 말할 수가 없다고 할 만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70 이레는 레위기 25:8에서 말하는 희년의 주기를 10회 반복하는 기간인데, 이를 구속사에 적용한 예언이었습니다.
<희년 주기>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 년이 일곱 번인즉 안식년 일곱 번 동안 곧 사십구 년이라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니 ... 전국 주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희년이니... (레 25:8,9,10)
<70 이레 기간> 너는 일곱(70)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 년이 일곱(70) 번인즉 안식년 일곱(70) 번 동안 곧 사십구 년(490년)이라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니 ... => (70)은 안식년 수자 ‘7’을 ‘70’으로 바꾼 것.
70 이레의 에언은 “7 안식년을 7번 지나면 49년 7월 10일 ‘속하는 날(욤 키푸림)’의 희년이니, 전국 주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7 안식년을 70번 지나면 490년, ‘속하는 날’의 희년이니, (세계 만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그날 70 이레가 도래하여 메시아, 지극히 거룩한 자, 예수 그리스도가 기름 부음을 받고, 그 희년을 직접 선포하신다”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허물이 그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여 70 이레가 성취됩니다(단 9:24).
70 이레에 대한 상세한 것은 아래 주소로 들어가서 확인을 해야 합니다.
소개한 글 : https://cafe.daum.net/bongampeople/kHHl/12
희년법으로 본 왕정시대 종반기, 족보의 계승자와 탈락자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들을 낳으니라(마 1:12)
...그 위는 네리요 그 위는 멜기요 그 위는 앗디요 그 위는 고삼이요 그 위는 엘마담이요 그 위는 에르요 그 위는 예수요 그 위는 엘리에서요 그 위는 요림이요...(눅 3:27~29)
<왕정시대 후반기 왕의 계보> ①요시야 -> ②여호아하스 -> ③여호야김 -> ④여호야긴(여고냐) -> ⑤시드기야 -> 예루살렘 함락(남왕국 멸망)
<동시대 마태복음 족보, 마 1:12> ①요시야 -> ④여호야긴(여고냐) ->// 후손 없고(?), 나라 패망
** ② ③ ⑤는 ①요시야의 아들로 형제이며, 족보에서 탈략됨
<누가복음 족보, 눅 3:27~29> ①요림 ②엘리에서 ③예수 ④에르 ⑤엘마담 ⑥고삼 ⑦앗디 ⑧멜기 ⑨네리 ** 누가복음 족보에서 연대는 확인할 수 없으므로 ① ~ ⑨는 동시대를 근사치로 추정한 것임
<왕정시대 종반기에서 포로기 전반기까지 관련된 선지자> 예레미야 – 에스겔 – 다니엘
남왕국의 역사를 편의상 르호보암이 북왕국 통치를 시작한 주전 931년부터 아마샤 통치까지(주전 981년) 140년 기간을 초반기, 웃시야가 통치한 주전 790년부터 아몬 통치까지(주전 640) 약 150년 기간을 중반기, 요시야 왕의 통치 시작기인 주전 640년부터 북왕국 멸망한 주전 586년까지를 약 54년 기간을 왕정시대 종반기로 보겠습니다. 이렇게 분류하면 남왕국 왕들의 족보면,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왕정시대 초반기 말에는 아하시야, 요아스, 아마샤가 족보에서 탈락했습니다. 왕정시대 중반기는 이사야 선지자의 등장으로 그 가르침을 일부 수용한 웃시야, 히스기야, 요시야의 개혁으로 족보의 탄락은 면했습니다. 그러나 왕정시대 종반기는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시드기야 3형제가 왕의 자리에 오르기는 했으나 모두 족보에서 이름이 탈락했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족보는 요시야가 손자인 여호야긴을 직접 낳은 것처럼 기록했습니다.
요시아는 북왕국 16대 왕으로 솔로몬이 세운 시돈의 바알 석상과 아스다롯 목상을 가루로 만들어 버렸고, 북이스라엘의 우상 숭배지 벧엘은 묘실에 해골까지 청소를 했습니다(렘 23:12~20). 그리고 율법을 지켜서 정직한 왕이라서(왕하 22:2 하나님은 그를 이스라엘 역사에서 전후후무한 율법 준수자라고 합니다(왕하 23:25). 그래 8세에 왕이 31년간 통치했으며, 아들을 넷이나 두었습니다.
그러나 요시아가 전쟁으로 죽자 그의 셋째 아들 여호아하스(살룸)를 왕으로 세웠습니다. 여호아하스는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여 3개월 통치하고, 둘째 아들 여호야김에게 왕위가 넘어갔습니다. 그도 중한 세금으로 백성들의 삶을 어렵게 했고, 애굽의 봉신 노릇을 하다가 바벨론의 침입으로 죽습니다. 여호야김 왕이 친애굽주의를 취하니까 바벨론이 남유다를 침략해서 여호야김 왕을 잡아다 죽입니다. 그 뒤를 이어 여호야김의 아들 여호야긴이 왕(제19대)이 됩니다. 여호야긴은 3개월 통치하고, 바벨론으로 잡혀가서 37년간 옥살이를 합니다(왕하 25:27~30) 그 뒤 여호야긴의 삼촌, 곧 요시아의 넷째 아들 시드기야가 왕의 되어 11년을 통치했으나 바벨론으로 잡혀가서 눈이 뽑혀버렸습니다(왕하 25:7).
이렇게 남왕국 왕들이 바알 신을 받아들여서 종교적으로 음란(부패)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라는 바알 제도를 따라서 정치와 사회는 혼란에 빠지고, 경제는 빈부격차가 심해서 나라가 패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왕정시대의 종반기도 시대적 책임자인 왕들의 족보는 3명이나 탈락시켜 버립니다. 여호와의 계명을 어기면, 그 죗값이 3, 4대에 이를 것이라고 하는데(신 5:9), 우리는 족보에서 그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런데 같은 왕정시대에 하나님이 별개로 세워둔 누가복음 족보는 탈락자가 없습니다. 누가복음 족보는 소개된 이름에서 행적을 찾을 수가 없으므로 연대 확인이 불가능합니다. 같은 다윗 왕의 후손이라도 누가복음 족보는 대가 끊어지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희년법을 따라 기업의 상속권을 이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족보는 마태복음 족보와 달리 혈통이나 왕통보다 기업의 상속권을 중시한 계보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로는 왕들이 바알 신과 제도를 받아들인 죄악으로 종교와 사회, 정치와 경제가 쇠락하며, 결국 나라까지 망합니다. 왕과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가서 부끄럽고 고통스러운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족보에서 왕들의 이름은 6명이나 족보에서 탈락하는 창피를 당합니다.
하나님이 마태복음 족보는 14대씩 선택하여 기록한 이유를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왕정시대는 14명으로 사람을 추려서 선택해도 빠졌어야 할 인물들이 들어가고 있습니다. 왕들의 족보를 6명이나 탈락시키고 14명만 선택해도 여호람, 므낫세, 여호야긴과 같은 부끄러운 왕들의 이름을 넣어야 비로소 기별로 구분한 14대 족보는 형식을 갖출 수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왕과 백성들은 여호와 대신 바알 신, 여호와의 계명보다 오므리의 율례(사람이 정한 법), 희년법보다는 바알 경제법을 따라가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서도 누가복음 족보는 여호와를 섬기고 상속권을 지켜서 희년법을 따랐기 때문에 족보가 끊어지지 않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왕정시대에 백성들의 대표인 왕과 제사장을 대신하여 선지자들을 불러서 지도자로 삼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바알법 따르기를 좋아하는 왕들을 대신 희년법을 지키거나 촉구하는 선지자들을 세우고, 누가복음 족보의 계보자들과 희년법을 지켜오는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의 구속사를 이어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