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밀레니얼 연대
미얀마-타이 ‘쌍둥이 독재자’에 맞서는 청년들
2021년 2월 1일, 33년 만에 미얀마에서 다시 쿠데타가 일어났다. 민주주의민족동맹(National League for Democracy)을 이끌던 국가 고문 아웅산 수치는 1988년처럼 제일 먼저 대중의 눈에서 사라졌다. 민 아웅 흘라잉 장군이 정권을 잡으며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했다. 쿠데타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수많은 미얀마 시민들은 양푼, 냄비, 프라이팬을 들고 나와 세차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망설임이 없었다.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일어선 미얀마 시민들은 쿠데타 세력의 어떠한 슬로건도 군부독재를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영국의 식민통치가 남긴 상처가 아물기도 전인 1962년 미얀마는 첫 쿠데타를 경험했고, 2015년까지 군부독재 아래 있었다.
타이의 쁘라윳, 미얀마의 민 아웅 흘라잉
2021년 2월 10일 타이의 쁘라윳 짠오차 총리는 미얀마의 민 아웅 흘라잉 장군이 타이와 미얀마의 민주화를 위해 함께 노력하자는 서한을 보내왔다고 발표했다. 총리의 발표 전부터 온라인에서는 쁘라윳과 민 아웅 흘라잉을 “쌍둥이 독재자”라고 부르고 있었다. 이론적으로 타이는 군부독재 국가가 아니다. 2014년에 일어난 마지막 쿠데타의 주동자 쁘라윳 장군은 1019년 군복을 벗고 지금까지 총리를 연임하고 있다. 미얀마 역시 2015년부터 자유 총선거를 시행했고 아웅산 수치가 국가고문이 되면서 민주화의 길을 차근차근 걷고 있었다. 2020년 말에 실시한 총선거에서도 그가 이끈 민주주의민족동맹은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쁘라윳과 민 아웅 흘라잉은 선거를 통해 압도적 지지로 선출된 여성 정치인을 쿠데타로 몰아내고 정권을 잡았다. 모든 쿠데타 세력이 그렇듯 둘 다 쿠데타의 합법성을 주장했다. 민 아웅 흘라잉은 비상시 대통령이 “국방부와 국가안보회의와 협력”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1년까지 유지할 수 있다”는 미얀마 헌법 417조(2008년 개정)를 근거로 들었다. ‘비상시’를 멋대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아웅산 수치가 범죄에 연루됐다며 고소했다. 쁘라윳 또한 쿠데타를 일으키고 정권을 잡은 뒤 잉락 친나왓 전 총리로 인해 국가가 분열됐다며 ‘국가평화질서회의(National Council for Peace and Order)’를 세우고 의장직을 맡았다. 3개월 만에 그는 단독후보로 출마해 총리로 선출된다.
쿠데타를 일으키기 이전부터 쁘라윳과 민 아웅 흘라잉은 세력 확장에 집중했다. 타이에서는 여전히 2006년에 군부 쿠데타로 퇴출당한 탁신 친나왓 전 총리를 지지하는 대다수 서민들이 2010년에 일으킨 대규모의 반정부 시위를 군부세력이 폭력적으로 탄압한 기억이 생생하다. 뼈아픈 민주화의 실패를 만회하려는 듯 우파세력의 끈질긴 방해에도 불구하고 2011년에 탁신 친나왓의 여동생인 잉락 친나왓이 타이의 첫 여성 총리로 선출되지만, 그에 대한 반대세력이 이미 왕정파를 중심으로 형성돼 있었고, 이는 2014년에 쁘라윳이 상대적으로 쉽게 쿠데타로 정권을 잡을 수 있는 기반이 됐다.
미얀마에서도 쿠데타 직후에는 이에 동조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컸다. 이는 민주주의의 상징이던 아웅산 수치가 미얀마의 통합을 이끌어내지 못한 데 대한 실망과 불만 탓이었다. 2016~17년에 자행된 소수민족인 로힝야 학살에 대한 아웅산 수치의 묵인이 그들이 쿠데타에 찬성하는 대표적 이유였다. 학살의 주역은 민 아웅 흘라잉 장군이었지만, 아웅산 수치는 2019년 말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열린 재판에서 예상을 깨고 아예 학살 자체가 없었다며 민 아웅 흘라잉과 군부세력을 옹호하고 나섰다. 쿠데타 초기 일부 시민의 지지에는 아웅산 수치에 대해 ‘당해도 싸다’고 여기는 반발 심리가 깔려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군부는 쿠데타 직후 방글라데시 정부에 서한을 보내 로힝야 문제를 빠른 시일 안에 해결하겠다고 했다. 동시에 국경 지역의 로힝야족 마을을 방문해 유력자들에게 돈을 주고, 그들이 쫓겨난 이유는 아웅산 수치 때문이라고 선전했다고 한다.
쌍둥이 독재자는 쿠데타 직후 행보도 비슷했다. 제일 먼저 인터넷을 차단하고 언론을 통제해 표현의 자유를 제한했다. 특히 이들이 소셜미디어 통제를 강화한 이유는 청년·학생들 중심의 반쿠데타 움직임이 인터넷을 통해 조직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런 통제는 여전히 잘 안 먹히고 있다. 쿠데타가 일어난 지 3일 만에 앙곤에서는 타이 민주화운동의 상징인 세 손가락이 보이기 시작했다. 미얀마 연예인들은 빨간색 옷을 입고 세 손가락을 든 사진을 찍어 소셜미디어에 올렸다. 코로나19와 싸우고 있는 의료인들이 방호복을 입고 쿠데타에 반대한다는 메시지를 들고 있는 사진이 올라오기 시작했고, 법의 수호자인 변호사와 판사의 동조 시위, 그리고 스님들의 거리시위로 이어졌다. 군부의 위협이 있었지만 2021년 2월 22일에는 미얀마 주요 도시에서 2월 1일 쿠데타 이후 최대 규모의 쿠데타 반대 시위가 벌어지는 등 시민들의 저항은 갈수록 강해졌다.
‘미얀마=악인’ 이미지 깨는 타이 청년들
미얀마의 민 아웅 흘라잉과 타이의 쁘라윳을 ‘쌍둥이 독재자’라고 하지만 민 아웅 흘라잉의 실질적 멘토는 타이의 막후 실력자 쁘렘 띤나술라논 전 추밀원장이었다. 육군 출신인 쁘렘은 2006년 탁신 친나왓 전 총리를 몰아낸 쿠데타의 배후로 알려진 인물이다. 2016년 전 국왕의 서거 후 현 국왕이 즉위하기까지 섭정을 했고, 2019년 98살의 나이로 사망할 무렵까지도 타이 왕실과 군부의 실세로 알려져 있었다. 민 아웅 흘라잉은 2012년 쁘렘을 처음 만난 순간부터 그의 군인으로서의 경험과 정치력을 배우려고 했다고 한다. 쿠데타를 일으킨 민 아웅 흘라잉도 타이 군부가 밟아온 길을 복기하듯 걷고 있다. 미얀마에서 국가 비상사태가 1년 안에 종료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믿지 못했고, 실질적으로 그 1년은 군부독재를 유지할 시스템을 재정비하는 과도기간이 되었다. 쿠데타 1주년을 기념하며 2022년 2월 1일 미얀마 시민들은 거리를 완전히 비우는 침묵시위에 동참함으로써 그들의 식지 않는 저항 의지를 보여주었다. 만달레이에서 승려와 청년들이 가두시위를 벌였다고 타이의 미디어가 보도했고, 학생 운동가들의 소셜미디어에는 미얀마의 민주화를 응원한다는 글과 사진이 올라왔다.
타이의 청년과 학생들, 그리고 미얀마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은 2021년 2월 6일 방콕에 있는 유엔 사무소 앞에서 대규모 쿠데타 반대 시위를 벌였다. 국적을 불문하고 시위에 참가한 이들이 우려하는 바는 한 가지다. 바로 “합법적 군부독재”의 끈질긴 생명력이다.
2020년 9월부터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타이의 학생 청년 주도 민주화운동은 군부의 독재중독이 불치병이라는 것을 직시하고, 군부독재를 완전히 종식하려면 20세기식 정치의식부터 버려야 한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다. 어떤 형태로도, 이유로도 쿠데타는 정당화할 수 없는 것이다. 코로나19확진자 증대로 거리시위가 잠시 주춤한 사이에도 왕실을 풍자하는 코스프레부터 온라인 시위까지 타이의 민주화운동은 타이의 쿠데타 정부에 대항해 다양한 방법으로 진행됐다. 미얀마에서 쿠데타가 일어난 2021년 2월 1일부터도 타이 각지에서 반쿠데타 시위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쌍둥이 독재자 쁘라윳과 민 아웅 흘라잉 사진이 나란히 소셜미디어에 쏟아져 나왔다. 양은 냄비를 쓰고 나와 미얀마 국기를 들고 군부독재 타도를 외치는 타이의 젊은이들과 미얀마 이주노동자들이 나란히 행진하는 모습은 반목의 역사를 넘어 미래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보여줬다.
타이의 수많은 역사드라마나 소설에서 버마인(미얀마인의 옛 호칭)은 항상 악역이었다. 역사책에는 타이 아유타야 불상의 목을 베어버리는 버마군이나 국경 마을을 약탈하고 사람들을 잡아가 노예로 부리는 버마인 이야기로 가득하다. 2020년 말, 타이 정부는 미얀마 이주노동자의 코로나19감염이 늘고 있다는 이유로 방역대책을 강화하면서 민주화운동의 기세를 진정시키려 했다. 내부 분열을 막기 위해 외부의 적을 끌어들이는 전통적인 군부독재 정치기술이었다.
그러나 타이 학생들은 미얀마에서 벌어지는 폭압적인 상황에 공감하면서 이에 저항하기 위해 타이 곳곳에서 힘든 일을 도맡아 하는 미얀마 이주노동자들과 손을 잡았다. 타이 청년들이 미얀마의 청년들과 연대하는 배경에는 현재 동남아시아에서 퍼지고 있는 ‘밀크티 동맹’이 있다.
동남아 거리에서 찾을 수 있는 밀크티에서 이름을 따온 이 동맹은 2020년 4월에 시작됐다. 당시 타이의 한 배우가 홍콩을 ‘국가’로 표기한 포스팅을 올린 데 대해 중국 누리꾼(네티즌)이 단체로 공격하자, 타이의 누리꾼들이 홍콩의 민주화운동을 지지한다고 반격하면서 동맹이 시작된 것이다. 그 뒤 타이 학생들은 중국 정부의 홍콩 탄압과 대만과의 갈등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나서면서 세를 넓히기 시작했다. 반중·반독재 정서를 공유하던 타이·홍콩·대만의 학생 운동가들은 사실 그 이전부터 교류가 있었다. 홍콩 우산혁명(2014년)의 주역이었던 조슈아 웡을 타이 학생운동가 네띠윗 초띠팟파이산이 2016년 타이의 민주화운동인 ‘10월 6일 학살 40주년’ 기념식에서 초대한 것이다. 이처럼 밀크티 동맹은 아시아 각국에서 퍼지고 있는 반중정서로 시작했지만, 독재정부에 대항하는 청년들의 국제적 연대를 지향하는 운동으로 변모했다.
밀크티 동맹의 주도세력인 밀레니얼 세대의 전략은 20세기의 민주화운동과는 다르다. 이들이 참가하는 반독재·반정부 시위대에는 주동자가 없다. 리더는 곧 타깃이 되고 사라질 수 있기 때문에 모두가 자발적으로 그리고 창의적으로 자신만의 투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곧 투쟁 방식과 구호의 다양화로 이어졌다. 2020년 이후부터 지금까지 타이와 미얀마의 반독재 투쟁에서 가장 두드러진 점은 시위자들이 요구하는 민주화가 반드시 민주주의의 정치적 제도화에만 제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적인 예가 성적 소수자와 여성들이다. 이들은 화려하게 치장하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무지개색 깃발을 들고 시위대의 선봉에 섰다. 유난히 많은 여성 시위대는 남성 중심적 가부장제에 반대하는 구호도 외쳤다.
ASEAN 국가들 외면… 더 빛나는 저항
밀크티 동맹은 ‘중국 제일주의’에 대한 반대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강대국 중심의 정치와 외교도 경계한다. 중국은 “내정간섭”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아직까지 미얀마 쿠데타에 대한 직접적 언급을 피하고 있긴 하다. 하지만 쿠데타가 일어나기 3주 전에 미얀마를 공식 방문한 왕이 외교부장은 민 아웅 흘라잉 장군과의 면담에서 총선거 결과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군부와 정부의 충돌이 불가피하다는 인상을 받고 돌아갔다고 한다. 시민들 사이에서는 미얀마에 대한 미국의 경제제재가 구체제의 답습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도 나왔다. 미국 주도로 이어진 경제제재가 독재자들을 굶긴 적은 없다는 것이다. 동시에 동남아시아국가연합, 곧 ASEAN 국가들의 미온적 태도도 비판을 받고 있다. 가장 비판적이었던 싱가포르가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을 뿐 대부분의 나라는 중국과 같이 “내정간섭”을 핑계로 여전히 언급을 피하고 있다. ASEAN이 손을 놓은 2021년 2월 쿠데타 이후 2022년 4월 현재까지 군부의 폭력적 탄압으로 사망한 미얀마 민간인이 1,700명 이상이고, 1만 3,000명 이상이 체포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2022년 1월 초에 ASEAN 의장국을 맡은 캄보디아의 훈센 총리가 미얀마를 공식 방문하면서 “합법적 군부독재”의 끈질긴 생명력은 다시 한번 증명되는 듯했다.
물론, 이미 타이와 미얀마에서 일어나고 있는 반쿠데타 민주화 시위에 비해 이들의 행보와 노력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이미 ASEAN이 중재할 거라는 희망도 거의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치 2월은 폭력의 계절이라는 듯 2022년 2월 말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함에 따라 전 세계의 이목이 유럽으로 향하게 되면서 미국이나 UN의 중재나 제재는 더더욱 요원해질 상황이다.
이런 상황이기에 오히려 타이와 미얀마에서 청년들의 움직임은 더 돋보인다. 이들은 군부가 시내 곳곳에 배치한 전투 경찰, 사복경찰, 극우 청년단들과의 충돌을 두려워하지 않고, 군부 쿠데타 정권에 반대하는 시위를 온오프라인으로 끊임없이 벌이고 있다. 타이와 미얀마의 젊은이들의 이러한 용기와 절박함은 어떠한 강대국도 자신들과 미얀마의 미래를 보호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역사적 성찰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이들은 20세기가 만들어낸 힘의 논리라는 구도에 갇혀 강자의 행보와 결정만 주시하는 비겁한 약자의 정치가 오히려 합법적 군부독재의 수명을 연장하리라는 사실을 직시하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소셜미디어와 밀크티 동맹과 같은 21세기식 전략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결국 밀레니얼 청년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군인과 총이 아니라 표현의 자유를 잃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싸움은 계속될 것이다. 이들이야말로 보이지 않지만 그 어떤 전쟁보다도 치열한 ‘민주화’ 전쟁의 주역이다.(261~272)
〔출처〕 키워드 동남아
강희정·김종호 외 지음, 한겨레출판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