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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복수
Marx’s Revenge(2002)
메그나드 데사이 지음, 김종원 옮김, 아침이슬 2003.
자본주의의 미래Ⅱ: 막판 게임인가, 아니면 유일한 게임인가?
자본주의는 20세기를 넘어 살아남았다. 사실 단순히 살아남은 정도가 아니었다. 자본주의는 자신에게 다가온, 파시즘이나 레닌주의 같은 만만치 않은 도전을 누르고 승리했다. 자본주의는 하나의 진지한 전망이었던 자본주의 밖 사회주의를 제거했다. 자본주의 내 사회주의는 여전히 존재하긴 하지만, 이제는 과거의 창백한 그림자일 뿐이다. 자본주의 내 사회주의는 자신의 목표를 대부분 달성했기 때문에 동면(冬眠)에 들어가 있는 상태라고 주장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1960년대나(크로슬랜드의 사상처럼), 혹은 자본주의 내 사회주의가 다시 한 번 자본주의의 최근 위기를 다루게 된 1970년대라면 이런 주장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내 사회주의는 서투르게도 일을 망쳐 버렸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적들에게 지적 우위를 선사했다. 신자유주의 정부들(대처, 레이건, 콜)이 민주적 승리를 거두도록 한 점이나, 또는 심지어 그들의 방법을 모방한 것(1983년 이후 미테랑과 1994년 이후 영국 노동당이 그랬듯이)을 볼 때 이 점은 분명하다. 더 심각한 문제는, 1970년대에는 견고하게 보였던 자본주의 내 사회주의의 성과−완전 고용, 복지국가, 산업 및 공익사업에 대한 국가 통제−가 부식되어 왔다는 것이다.513-514
자본주의는 단순히 살아남은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다시 전성기를 맞고 있다. 임박한 붕괴의 전망 같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노쇠화의 전망조차도 보이지 않고 있다. 이것은 예견 자체가 불가능했던 20세기의 결과이다. 많은 진영에서 여전히 이 같은 사실을 믿지 않고 있다. 새로운 처방의 불의와 불평등과 그에 드는 비용을 지적하는 사람들도 많다. 케인스주의의 전성기로 복귀를 갈망하는 이들도 있다. 실로 케인스주의 정책은 자본주의 내 사회주의의 옛 버전을 여전히 옹호하는 사람들의 유일한 목표가 되어 있다. 평론가는 독일이나 일본의 코포라티즘을 추켜세우고, 이를 앵글로색슨 체제−기업 소유권이 경합의 대상이고 실제로 빈번하게 소유권을 놓고 경합이 이루어지는 체제−와 대비시켰다. 교섭 및 고용 충원에서 강력한 노조 권한이 작용하는 노동 시장이 미국과 영국의 노동 유연화 체제에 비하여 우월한 것으로 칭찬 받았다. 재정 수입 규모, 사회안전망의 견실함, 대외무역 및 외국인 자본에 대한 격리 정도 등이 모두 자본주의의 대안을 가리키는 지표가 되었다.
그러나 그 체제는 모두 자본주의의 서로 다른 버전일 뿐이다. 그 어떤 새로운 생산양식도 가시적인 대안으로서 수평선 위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어떤 경기든 자본주의간의 경합이었을 뿐이다. 두 경쟁 버전, 즉 앵글로색슨 버전 대 대륙 유럽-일본 버전 간의 경쟁이었다. 자본의 자유 이동, 금융 시장의 자유화, 운송 및 정보 전달, 커뮤니케이션 등의 새로운 기술은 적어도 현재로선 앵글로색슨 모델에 유리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수익성−자본주의의 성공을 가늠하는 확실하고 유일한 시험대−의 견지에서 볼 때, 앵글로색슨 경제가 코포라티즘 경제보다 세계화의 첫 10년(1990년대) 내내 더 순조롭게 진행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윤은 증가하고 있었다. 더욱이, ‘노동의 종말’이라는 초기의 우울한 예언에도 불구하고, 앵글로색슨 경제에서는 대륙 유럽의 경제와는 대조적으로 높은 수준의 고용이 내내 계속되었다. GDP와 소득의 성장 면에서 보면 사정은 더욱 호전되고 있었다.314-315
앞장들에서 주장했듯이, 21세기 동안 경제와 사회에 관한 지식인들의 사고는 대부분 자본주의가 쇠약해져 갈 것이라는−사멸하는 것은 아니더라도−전망에 입각해 있었다. 모든 사회과학은 ‘국가주의적’이었다. 국가가 경제 통제권을 쥐고서 사회 문제를 완화시키는 으뜸가는 행위자라는 전제를 당연시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 앞에 있는 것은 이러한 종류의 세계가 아니다. 사라질 것 같지 않고 오히려 개별 국가가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변화의 폭과 속도를 지시하는 자본주의야말로 우리가 직면해 있는 세상이라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했다. 물론 부정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존재한다. 세계화는 일어나지 않았다든가, 새로운 게 없다든가, 국제화를 두고서 딱지를 잘못 붙였다든가 하는 등등의 억지 주장들이 펼쳐졌다. 국가는 세계화에 직면하여 무력하지 않다는 주장이 격정적으로 개진되기도 했다. 프랑스의 사회당 출신 총리 리오넬 조스팽은, 시장은 승리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종(從)이지 주인이 아닐 것이라고 하며 자신의 입장을 드러냈다. 폴라니는 시장을 파괴적이며 역기능적인 디스토피아라고 강하게 비판한 바 있다. 세계화가 자기 파괴적일지도 모른다(자기 파괴를 할 것이다?)는 두려움에 찬 희망이 부분적으로 이러한 폴라니의 비판이 부활하는 하나의 배경이 되었다.515-516
세계화에 대한 승리주의적 설명도 존재한다. 국경 없는 세계, 역사의 종말, 누구나 누릴 전례 없는 번영, 나라마다 민주주의가 꽃피고 집집마다 VCR을 구비하는 세상이 올 것이라는 예언이 쏟아졌다.
이러한 분석에서 빠져 있는 것은 자본주의라는 생산양식의 변증법적 모순 개념이다. 자본주의는 이윤 동기에 의해 추동되는 축적 체제이며 생산성 증대를 위해 새로운 기술을 끊임없이 모색하는 체제이다. 그 때문에 자본주의는 경기순환과 파동과 공황에 빠져드는 경향을 띤다. 자본주의는 일자리를 파괴하고 경제를 구조조정 할 때조차 빈곤과 불행을 완화할 최선의 장치이다. 글로벌 금융 시장은 개별 국가에 대해 강력한 규율로 작용하지만, 그 스스로는 매우 변덕스러우며 안정성이 극히 취약하다. 선행한 혁명적 단계−18세기 말의 제1차 산업혁명과 19세기 말의 제2차 산업혁명−에서처럼 기존 산업과 고용은 쇠퇴하고 새로운 기술과 숙련이 우세해지면서 불평등이 눈에 띄게 증대한다.
그러나 선행한 산업혁명은 주로 북서유럽과 미국에 영향을 미쳤다. 그 혁명이 세계의 다른 지역에 영향을 준 것은 제국주의를 경유해서였으며, 따라서 대부분 부정적인 방식−새로운 생산양식의 건설 없이 기존 양식을 파괴하는−으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번 단계는 진정으로 글로벌하다. 자본의 영향, 금융 시장의 헤게모니, 증대하는 상업의 침투는 제1세계, 제2세계, 제3세계 모두가 경험하고 있다. 사실, 이렇게 세계를 숫자로 범주화하는 것은 이제는 게으른 짓이다. 자본주의의 수혜와 비용은 세계의 모든 부분에 대칭적으로−평등하게는 아니더라도−부과된다. 200년 사이에 처음으로 자본주의의 요람−대도시, 중심부−이 주변부만큼이나 변화의 급속함에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516-517
1999년 11월 시애틀의 WTO 회의장 밖에서 시위하는 군중 가운데는 환경 문제나 재분배 문제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보다 자신의 고소득 일자리를 위해 보호무역을 요구하는 AFL-CIO(미국 노총) 소속 노조원이 더 많았던 것도 이런 맥락 때문이었다. 자유무역을 만인의 적이라고 규정하면 자본주의 선진국의 잘 사는 시민들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다. 자유무역 체제가 되면, 저임금 노동자가 많은 다른 나라들로 토끼가 다 넘어갈 것이다.
그러나 또한 진정한 이해관계의 합치가 존재한다. 빈국과 부국의 이해관계만이 아니라, 각 현장−시애틀, 워싱턴 DC, 다보스, 프라하 혹은 IMF나 세계은행, WTO나 G-7 회담이 열리는 곳 그 어디서든−에서 세계화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는 사람들의 이해관계에서도 말이다. 이러한 사안들의 논리뿐만 아니라 비논리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 단계 자본주의를 최근 역사 과정들의 결과로 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세계화가 이제 겨우 막 시작되었을 뿐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이런 시각에서 말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세계화는 단지 새 세기−‘단기 20세기’의 끝인 1989년에 시작된−만큼이나 연륜이 짧다. IMF/세계은행으로 상징되는 1945년 이후의 글로벌 질서의 논리는 이 새로운 단계의 자본주의가 내거는 시장 주도 논리와 충돌한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가 밟아 온 경로를 되밟아−마지막으로−보고, 최근 역사와 함께 마르크스에게로 되돌아가야 한다.517
긴 시야로 본 자본주의
21세기의 도래는 새로운 시작일 뿐만 아니라 중단한 것의 속행(續行)이기도 하다. 세계는 1914년에 자신이 떠나 온 그곳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렇지만 그것은 원이 아니라 나선이다. 현재와 19세기는 많은 측면에서 다르기 때문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21세기는 단지 새로운 세기인 것만은 아니다. 새로운 천 년이기도 하다. 이전 밀레니엄이 도래했을 때 유럽은 ‘암흑시대’였다. 당시의 역동적인 세력은 세계를 정복한 힘을 가진 이슬람이었다. 중국은 기술 발전에서 가장 선진국이었고, 아마 가장 번영하는 나라였을 것이다. 카이로와 바그다드의 대학은 고대 그리스와 당대 인도의 지식을 보존하고 전달하고 확장해 나가는 과업을 수행하고 있었다.
유럽과 그 외의 세계(이렇게 표현하는 것 자체가 전형적인 유럽 중심주의이다) 사이의 역관계가 변화한 것은 이전 밀레니엄의 후반부에서였다. 대포를 탑재한 가볍고 빠른 범선은 이베리아 반도(스페인, 포르투갈)의 모험가들이 아메리카 대륙과 아프리카, 아시아와 지속적으로 접촉할 수 있도록 해준 결정적인 혁신이었다. 1492년의 콜럼버스와 1498년의 바스코 다가마는 세계 체제로서 자본주의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을 쏘았다. 이로써 근대 제국주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제국은 언제나 있었지만, 주로 토지에 기반을 둔 팽창이었다. 이제 처음으로 해상 제국을 보게 되었다.
이러한 팽창을 가능케 한 것은 전쟁과 항해술에서 일어난 일련의 혁신이었다. 그러나 팽창은 식민지에서 식민 본국으로 잉여를 이전−거대한 폭력으로 완수된−시켰다. 팽창은 또한 종교적 광신주의에 의해 조장된 인종적 오만의 시작이었다. 황금을 얻기 위해 신(神)과 대포가 사용되었다. 그 밀레니엄의 앞 세기들에서 이슬람 교도에 의해 식민지화된 이베리아 반도가 이제 유럽 인종주의의 오만한 선두주자가 되었다는 것은 역설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518-519
유럽 제국주의의 전도를 변화시킨 것은 18세기 말에 있은 기술상의 대약진이었다. 이제 서유럽은 초창기의 개척기 제국주의자의 온갖 약탈 행위보다 더 빠르고 더 대량으로 잉여를 산출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는 산업혁명 이후 새 생명을 얻었다. 이 새 단계를 특징짓는 지표는 황금과 대포라기보다는 직기(織機)와 선반(旋盤)이었다. 제국주의는 계속되었고, 심지어 19세기에는 한 걸음 나아가 아시아와 아프리카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제국주의의 토대는 바뀌었다. 제국주의는 시장과 천연자원을 찾았다. 단지 잉여의 이전뿐만 아니라 잉여를 증대시키는 기술의 수출도 있었다.
20세기를 끝으로 생산양식으로서 자본주의에 대한 도전은 끝났고, 그 과정에서 제국주의도−대륙 제국주의와 해상 제국주의 둘 다−패배했다. 수백 년에 걸쳐 제국주의와 뿌리 깊게 지속적으로 일체성을 맺어 온 유럽은 두 독자적 단계를 거치면서 자신의 제국 영토를 상실했다. 토지에 기반한 제국−오스만투르크, 합스부르크, 로마노프−은 1918년 이후 소멸했다. 로마노프 제국은 물론 다시 부활하여 전성기를 맞았지만 말이다(러시아 혁명 후 소련의 성립을 말한다-옮긴이). 그 다음, 1945년 이후에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같은 해상 제국이 포르투갈 및 벨기에 등의 해상 제국−마지막까지 제국 상실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한 나라들−과 함께 소멸했다. 이와 같이 자유민주주의적 자본주의의 승리는 500년간 지속한 모든 제국의 종말을 수반하였다. 물론 제국의 종식은 식민지 인민의 투쟁 없이 일어난 것이 아니다. 실로, 오랜 반제국주의 주창자였던 미국은 그 최종단계들에서 장기적인 탈식민지화 전쟁에 빠져들었다. 1945년에서 1975년까지 지속된 베트남 해방전쟁이 그것이다.519-520
세계화의 21세기 단계가 19세기 단계와 다른 점은 수많은 새로운 영토 국가(민족국가)의 존재이다. 20세기의 후반부(1945~89년)에는 탈식민지화가 냉전과 상호 작용하여 신생 민족국가의 경제와 정치에 많은 왜곡을 낳았다. 냉소적인 권력 정치 속에서 독재자들이 양 진영의 후원을 받았다. 그러나 전쟁의 세기가 유럽에서 레닌주의 국가의 평화적 붕괴로 끝남에 따라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수십개 탈식민지 국가에서뿐만 아니라 실로 동유럽에서도 자유민주주의적 단계가 시작되었다.
고전적 자유주의는 자유를 주창해왔지만,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경계하는 태도를 취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헤겔에 대한 마르크스의 미완성 비판이 민주주의의 시대에 그리도 급진적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무산자(프롤레타리아트)의 의회 진출을 인정한다는 것은 로크나 밀의 상상력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고전적 자유주의의 관점에서 자유란 재산의 열매를 거머쥐고 향유하는 자유를 뜻했다. 물론 여기에는 우리 자신의 노동력이라는 재산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일단 우리가 경제적인 재산의 자유를 정치적인 참정권의 자유로 확장하면, 자유민주주의에 내재하는 모순이 명확히 드러난다.
청년 마르크스는 그의 헤겔 비판에서, 참정권을 무산자에게 확대하면 그들은 유산자만 대표하는 의회가 중심 기구로 있는 이러한 국가 체제를 그냥 놓아두지 않을 것이며 결국 파괴할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투표권에 대한 재산 조항을 폐지하는 것은 아예 재산 자체를 폐지하는 행위가 될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그가 아직 정치경제학을 알지 못한 데서 나온 주장이었다. 그때 마르크스에게는 체제가 어떻게 프롤레타리아트를 생산, 재생산하는가, 즉 노동자가 어떻게 자신에 대한 착취로 이어질 계약을 자발적으로 맺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이해가 아직 없었던 것이다. 이를 이해하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마르크스는 《자본론》 1권−이 1권의 제6장은 노동력 매매를 주제로 한 장이다−을 발간하는 시점에 와서야 그 점을 이해했다.520-521
마르크스가 프롤레타리아트를 창조한 것은 의도하지 않은 심오한 결과를 가져왔다. 일단 계약의 자유, 노동력을 판매할 자유가 주어지자 계약 영역에서 신분상의 동등함은 다른 모든 영역에서 신분상의 평등에 대한 요구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기존의 모든 사회는 부와 권력의 불평등에 기초했을 뿐만 아니라 신분 위계제−협소한 피라미드 형태의−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일단 사람들이 교환의 주체이자 노동력의 판매자가 되자 신분상의 불평등은 유지되기 어려워졌다. 노동자의 참정권이 그 첫 단계였다. 비록 구체제에서는 참정권을 획득하는 데 상당히 오래 걸렸지만 말이다(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는 성인 남성의 참정권을 일찌감치 도입했다).
다음 단계는 여성의 참정권이었다. 성 차별 문제는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이는 남성 노동자의 경제적인 계약의 자유가 정치적 권리에 앞서 확립된 데 비해 여성의 경제적인 권리 확보는 정치적 권리에 비해 반세기나 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 및 노동자의 참정권 확보를 위한 운동은 탈식민지 투쟁을 자극했다. 그리고 그 투쟁이 이번에는 역으로 미국에서 인종 차별 반대 운동과 민권 운동에 새바람을 불어넣어 주었다. 신분 불평등의 제거는 경제적 계약권의 논리적 결론이다. 그리스인은 그들의 민주주의에서 신분상의 평등은 가지지 못했다. 여성도 노예도 투표권이 없었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신분 평등을 가져온 것은 계약의 자유이다.521-522
그러나 참정권도 신분 불평등의 제거도 경제적 불평등의 해결에는 결정적으로 기여한 게 없다.
마르크스는 노동력이 일단 재산이 되면 그 다음에는 자유와 이동성을 가지게 된다는 점을 명확히 보았다. 노동력은 계약을 맺을 법적인 권리를 가졌다. 그럼에도 이러한 평등은 경제적인 불평등과 나란히 공존하였다. 고용주는 소득/부에서 자신의 피고용인 수백 명−수천 명까지는 아니더라도−에 필적한다. 법적 평등의 기초 위에서 체결되는 교환이 실행되는 것은 경제적 불평등의 맥락에서이다.
그러나 1867년뿐만 아니라 그 뒤에도 마르크스는 헤겔 《법철학》에 대한 자신의 비판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부는 고용주에게 어울리지 않는 과도한 권력을 주었다. 그러나 노동자의 힘은 수에 있었다. 노동력 시장에서는 수가 교섭력을 가름하는 데 중요하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마르크스 자신의 경기순환 이론은 이윤이 위협받을 때 어떻게 자본이 노동을 내몰 수 있는지 보여준다. 참정권이 널리 보급된−보편적이지는 않더라도−세계에서 정치적 결사는 경제적 결사(물론 서로 관련이 있지만)보다 더 강하다. 이는 정치권력에서의 변동은 경제적 변동처럼 순환을 형성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민주주의는 시장에 대한 도전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자본주의 밖 사회주의에 대한 도전임이 판명되었다.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가 이끈 독일 혁명의 패배는 독일을 공화국으로 만든 온건 개혁에 대한 지지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은 독일 노동자들의 신중한 결정 때문이었다. 독일 노동자들은 독립사회민주당(USPD)이 제안한 혁명적 대안인 소유권의 폐지를 원하지 않았다. 이는 공화국의 성립으로 기존 제국에서는 지배적이던 신분 불평등에 일격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사회민주당은 독일 국가 체제를 좀더 포섭적인 체제로 바뀌게 한, 호엔촐레른 왕조의 폐지에서 효과적인 역할을 했다.522-523
이와 같이 참정권을 가진 노동자는 민주주의에 편입됨으로써 자본주의의 주주(株主)가 된다. 민주주의 권력은 노동자의 교섭력을 일정 지점까지 밀어 올릴 수 있다. 만일 교섭력이 수익성을 너무 위협하면, 자본은 철수하거나 외국으로 이동한다. 나는 앞에서 마르크스를 물구나무 세워, 단기적으로는 자본과 노동이 주기적으로 충돌할지 몰라도−어쩌면 그 충돌 때문에−장기적으로 보면 양자 사이에 상호 보완할 필요가 있게 됨을 주장한 바 있다. 이 점은 또한, 우리가 《자본론》에 깔린 마르크스의 전반적 시각을 제대로 해석하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체제를 무너뜨릴 정도로 이윤율이 하락할 것이라고 결코 보증하지 않으면서 자본주의의 순환적 성격을 부각시켰다. 그리고 이윤율은 파국적으로 하락하지도 않았다. 노동자가 자본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결과가 자본주의의 철폐가 아니라 자본의 부족, 그리고 그 때문에 생기는 실업이라면, 단기적으로도 노자간의 이러한 상보성(相補性)은 강화된다.
이것이 선진 자본주의 나라의 노동자들이 도달한−비록 1980년대가 다 끝나서였지만−결론이었다. 어느 나라에서든 사회민주주의 정당은 자본이 일단 이동할 수 있게 되면 수익성 회복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일단 이동할 수 있게 되자 그때부터 자본은 노동자에게 갈등이 아니라 협력을 요구했다. 그리고 자본은 그 협력을 얻었다. 이에 대해서는 A. 시바난단이 영국 좌파가 1980년대 말에 취한 방향을 비판한 글에서 극적으로 묘사한 바 있다. “자본은 노동에서 해방되었다. 좌파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523
갈등은 자본주의에 풍토병적인 것이다. 그러나 만일 자본주의가 사멸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게 되면, 노동자의 행동뿐만 아니라 신념도 변화를 겪을 것이다. 물론 일거에 변화되지는 않을 것이다. 모든 나라에서 균등하게 이루어지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1990년대에 자본주의 내 사회주의 정당의 전반적 후퇴는 이러한 노자간 상보성을 노동 및 그 정치적 대행자들이 깨달은 데서 비롯된 것이다.524
(한번 더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