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글쓰기36 ㅡ 따스한 크리스마스 (사소)
"빛이 여기저기 나니까 따뜻하게 보이긴 해요."
왕년에 아나운서를 했다던 사십 대 중반, 멀대같이 큰 키의 부원장은 기분이 조금 들뜨면 얼굴이 벌게진다. 살짝 기분파여서 인터넷에서 엄청 큰 크리스마스트리를 검색하고 있다고 하는 걸 보니, 찬성하면 금방이라도 사고 싶은 마음인가보다. 틈만나면 발전소(주방을 우리는 발전소라 부른다)에 가서 뚝딱뚝딱 간식을 준비해 샘들을 먹이는 게 기쁨인, 오십 초반의 단순 해피한 귀염둥이 실장이 합세를 한다. 멀대 부원장과 함께 학원 내 전등을 여기저기 꺼보더니, 카페같이 만들어졌다며 지나가는 사람마다 분위기에 찬성을 강요하는 거다. 그 사이로 오직 진지함만 가진 수학샘이 시험 기간인지라, 더 진지한 표정으로 지나가면서 좀 어두운 것 같다는 엄숙한 의견을 내지만, 맹구 오누이 같은 부원장과 실장은 살짝 어두워야 분위기가 제 맛이 난다고 맞장구를 치면서 좋아라하고 지나가던 샘들도 해피해져서 삐그시 웃는다.
해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학원샘들은 이리저리 공간을 꾸미고 재 탄생 시키는 걸 좋아하는 원장의 일을 기다리며, 언제 할 거냐고 묻곤 한다. 지난 토요일에는 신입 4개월 차인 상담 과장과 같이 크리스마스 데코를 했다. 장식을 하자니 크리스마스를 준비할 때면, 들떠서 행복해 하던 얼굴들이 하나 둘떠오른다. 몇은 떠났고 그리고 소중한 사람들은 학원 식구로 남았다. 상담 과장은 잔뜩 긴장하고 경직 됐던 얼굴이 스르르 풀리면서 이렇게 하면 어떻냐는둥 말이 많아진다. 그동안 몇 번이고 힘을 빼도 괜찮다 괜찮다 말 해줬지만 너무 열심히 하려해서 날이 선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했었다. 세파에 고단했을 그녀가 아들과 함께 따뜻한 둥지를 틀고 이곳에서 안식을 찾길 바라는 마음이 드는 순간이다.
첫 작품은 3.4년 전부터 입주해 있는 인형들의 배치를 바꿔 새로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입양 3년 차 특등 구염둥이 커다란 하양 곰돌이 에게는 빠0바0트에서 이벤트로 받은 빨강초록 망토와 모자를 씌우고 산타 양말을 겨우 낑겨 신겼다. 입양 2년 차 특대형 보라 곰돌이 에게는 LOVE가 수놓인 하트 쿠션과 노란표지 김주대 시집, 아기 펭수를 안겨서 로비의 접대 역할을 맡겼다.
이번 장식의 주 특징은 당근 출신들을 대거 주연급으로 발탁됐다는 거다. 엄마를 하늘 나라로 보내드리고 나선 마음이 허전할 때면 자꾸 당근을 기웃거리며 인형을 사러 달리곤 했었다. 작년에 그렇게당근에서 2만 원을 주고 산, 헝겊 빈티지 인형 둘이 미니 서랍장 위에 앉으니 원래 있던 제 집처럼 편안해보인다. 다리가 길쭉하고 헝겁 모자를 쓴 눈사람과 다리가 긴 갈색의 둥근 뿔을 가진 사슴, 그 둘의 무릎 위로 당근에서 5천 원을 주고 산, 불 밝힌 작은 집을 놓으니 커플의 다정한 분위기가 살아난다.
하이라이트는 작년에 당근에서 3만 원을 주고 산 한쪽 면이 둥근 고재 미니 탁자에 주기로 했다. 한옥 대문짝을 잘라 만든, 두껍고 조그마한 탁자는 아담하지만 많이 묵직하다. 바로크풍 주물다리에 상판은 동그란 한옥 쇠문고리를 달고 있어 퓨전이 조화롭고 은근 엣지있는데 당근 앱에서 보자마자 마음이 훅! 가버렸다. 훗날 시골에서 동네 서점 카페라도 하며 늙어가면 어떨까? 아님 커피를 한 잔 놓고 사위어가는 노을을 보기에 딱 좋은 탁자라는 생각에 소장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놓은 사람은, 보기보다 가져가기 쉽지 않을거라 했었다. 대체나 주물다리가 어찌나 무거운지 엿장수에게 팔아도 가락엿 한 가마니를 바꿔 먹을 무게였다.
고재 탁자를 가져 올 때는 도저히 혼자 들 수 없어서 튼실한 직원님에게 살짝 애교를 부리며 부탁했었는데, 그 직원은 지금도 고재 탁자 옆을 지날갈 때면, 하마터면 허리나갈 뻔했다는 둥 가끔씩 불평을 가장한 너스레를 떨곤한다. 3만원에 동그란 의자와 삼줄기 미니 카펫까지 덤으로 받았으니 럭셔리 아이템을 거져 얻은거나 다름없다. 그래서 볼 때마다 횡재한 것 같고 당근 재활용으로 환경보호에 도움이 되었으니 학생들에게 의기 양양하게 "이거 얼만 줄아니?" 자랑하며 더 빛낼 절호의 기회다.
고재 미니 탁자와 딸린 식구들을 조금씩 밀어서 학원 입구 쪽에 틈새에 우선 배치했다. 그 위에는 빛나는 하얀빛 철사 사슴과 파란 유리병을 놓았다. 파란 병 위에는 빨간 펠트 사슴을 올리고 그 옆에는 금은빛 오너먼트가 달린 미니 초록 트리를 올렸다. 그리고 중앙에는, 동그란 유리 세상을 가진 눈사람, 눈보라 워터볼 오르골을 놓았다. 앞에는 당근에서 모셔온 빨간 잎사귀의 두 개의 인조 미니 포인세티아를 놓고, 선물 포장지에 붙은 걸 챙겨 두었던 빨간 리본이랑 빨간미니 가방도 재활용해 살짝 곁들여 놓으니 참! 아기자기해 보인다. 배치가 완성되자 전기 코드를 꼽고 버튼을 누르니 상담 과장은 " 와!" 하면서 낮은 탄성을 지른다.
따뜻한 빛 워터볼 안은 눈사람과 조그만 집 위로 눈송이가 솟구치는 세상 , 눈 보라가 한없이 퍼붓고 있고 그 모습이 적막하면서도 참 따스하다. 마치 살고 싶은 작은 세상같아 마냥 보고 있고만 싶어진다.
워터볼 곁을 맴돌며 디테일을 손보고 있을 때, 학생들에게 벌써 소문이 났는지 두셋씩 함께 와서 사진을 찍으며 좋아한다. 수업 중인 샘들의 눈치를 보며 오르골의 음악을 "3분만! 이다 " 하고 속삭이며 들려주니, 학생들은 행복한 감탄사를 연발한다. 지네들끼리 해맑게 웃으며 사진도 찍어주고 핫템이라느니 감동이라느니 반짝반짝 빛들과 함께 튀어 오른다. 시험기간이라 "쉿! " 하면서 음악을 껐지만, 아이들의 웃는 모습이 오르골처럼 남아 맴도는 것 같다.
모두가 퇴근한 뒤, 남은 장식을 마무리하며 이렇게 작은 기쁨으로 우리가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원을 한다.
학원 실내 불을 모두 끄고 돌아 본다.
크리스마스 불빛들만이 고요히 깜박인다.
다음 날 세례식을 하는,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분을 위해서도 짧게 기도한다.
나는 죽는 날까지,
남이 불편하지 않을 만큼은,
철이 없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집으로 향했다.
첫댓글 영원히, 철이 없으시길 기원합니다^^. 한때는 아이들 성화에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워 놓은 적도 있었는데, 죄없는 미오의 위장 안에 역시 죄없는 트리가 부분 부분 이사하는 걸 본 뒤로는 예수님 생일을 기념하는 나무를 포기했습니다.
미오가 좀 괜찮아 졌는지...뮤즈님에게도 따스한 크리스마스가 되기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