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동 걸기 / 최미숙
어느새 3월이다. 벌써 꽃망울을 터뜨린 매화와 산수유가 봄을 알리고, 나뭇가지도 새순을 틔우려는지 한창 물이 올랐다. 조용했던 학교도 다시 활기가 넘친다. 아직 마스크를 벗지 않아 갑갑하지만 아이들은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쉬는 시간이면 복도에는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전력 질주하고, 다른 반이 된 친구 찾아 교실을 기웃거리는 아이들로 북적인다. 예전에는 3월만큼은 선생님 눈치 보느라 군기가 바짝 들어 온 학교가 적막이 감돌 정도였는데 학기 초라는 말이 무색하다. 어쨌든 올해(2023년)도 이 아이들과 글쓰기를 할 예정이다. 한 번 했던 일이라 작년보다는 쉽겠지만 그래도 걱정이 앞선다.
2022년은 목표했던 개인 수필집과 학생 문집까지 발간해 나름 보람된 한 해였다. 처음부터 학생 글쓰기를 계획하지는 않았다. 독서 수업을 하려고 6학년 학생 여덟 명을 뽑았는데 방과 후 수업과 학원 가느라 매번 반 이상이 오지 않았다. 최소 여섯 명은 돼야 아이들도 재미있을 텐데 그조차도 힘들었다. 더군다나 책 읽기 싫어 빠진다는 학생도 생겼다. 생각다 시간 제약이 없는 글쓰기로 방향을 틀었다. 계획대로 될지 걱정이었지만 그냥 부딪치기로 했다. 교실에 모인 아이들에게 글을 써 책을 만들자고 했더니 놀란다. 몇 년 전 6학년과 함께 만들었던 시집을 보여 주며 열심히 하면 완성할 수 있으니 해 보자며 다독였다. 책 읽고 토론하고 글까지 쓰는 것은 억지로는 할 수 없다. 하기 싫은 애들을 끌고 가려면 나도 힘들고 맥빠진다.
5월부터 하고 싶다는 아이만 남겨 월요일 아침과 수요일 오후에 만나기로 했다. 또래 친구가 쓴 글을 읽고 어떤 글이 ‘좋은 글’인지부터 공부했다. 솔직하게 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더니 한 아이가 “정말 솔직하게 써도 돼요?” 묻는다. “글쓰기가 어려우면 어렵다, 선생님이 싫으면 싫다”라고 써야지 남 듣기 좋은 말로 포장하면 ‘죽은 글’이라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일단 전날 있었던 일을 주제로 한 편만 써 보자고 했다. 그래야 내가 무슨 말이든 시작한다. 당황한 아이들은 빈 종이만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한참만에 드디어 연필을 끄적인다. 혹시 누가 들여다볼까 봐 왼손으로 종이를 감싸 안으며 감추기까지 한다. 다 쓴 글은 같이 읽고 고쳐야 할 곳을 이야기했다. 학교에서 미처 완성하지 못하면 집에서 써 가져오게 해 다음 날 개인별로 첨삭 지도했다. 정리한 글은 컴퓨터에 파일로 보관하라고 일렀다.
여름 방학이 되자 읽을 책을 몇 권씩 주며 감상문 쓰기 숙제를 냈다. 성실하고 욕심 있는 아이는 그 말도 헛듣지 않고 어떻게든 한다. 하기 싫은 아이에게는 강제하지 않았다. 글을 많이 쓴 순서대로 싣겠다고만 말했다.
개학하자 아이들을 다시 불렀다. 하기 싫어 딴청 피우고 심지어는 나를 피해 다니기도 했다. 웃음이 나왔다. 애들 마음 백 번도 이해한다. 아마 그만두고 싶을 때가 많았을 것이다. 그래도 일단 시작했는데 여기서 멈추거나 일일이 데리러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나마 주제를 줄 때마다 꼬박꼬박 써 오는 애들이 있어 다행이었다. 무엇이든 본인 하기 나름이다. 글도 성실해야 쓴다. 그런 아이는 열심히 노력한 덕에 11월 마칠 때쯤 망설이지 않고 쓰는 수준까지 됐다. 중학교 가면 글쓰기만큼은 자신 있을 것이다. 원고 수를 세어 실을 순서대로 이름을 불렀다. 스물네 편부터 일곱 편까지 총 132편이 모였다.
12월 23일 눈이 펄펄 오는 날 책을 받았다. 제목은 「꿈 실은 마차」로 총 100권을 주문했다. 상자를 열자 노란 표지가 화려하다. 나와 아이들이 노력한 결과다. 다음 날 학생 작가 아홉 명을 교장실로 불러 세 권씩 주며 고생했다고 격려했다. 한 권은 본인, 나머지 두 권은 직접 사인해 친척들에게 주라고 했더니 입꼬리가 올라간다. 5, 6학년 각 반에도 다섯 권씩 줬는데 서로 읽으려고 했단다. 23년 글쓰기 할 아이를 모집하려면 5학년에게는 특히나 동기 부여가 필요했다.
책이 나오자 도 교육청 독서 담당과 지역 교육지원청 장학사, 독서 지도에 관심 있는 선생님에게 한 권씩 보냈다. 그중 지도했던 과정을 알 수 없어 아쉽다는 최 교장님의 조언이 있었다. 학생들 글이라 될 수 있으면 교사인 나를 나타내지 않으려 맨 앞장에 ‘책을 내며’란 짧은 글로 대신했는데 최 교장님 말씀처럼 궁금해하는 선생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2023년)는 후배 양 교장과 함께 카페를 만들어‘일상의 글쓰기’에서 한 것처럼 가르쳐 보자고 했다. 각 학교 학생이 글을 써 올리면 첨삭하고 내용을 공유하면 서로에게 도움되지 않을까 싶다. 예산도 300만 원이나 확보해 뒀다. 독서 행사도 하고 학생 문집까지 만들 생각이다. 쉽지는 않겠지만 그만둘 수도 없게 됐다. 양 교장이 이미 카페 단장도 끝냈고 아이들만 모집하면 된다. 같이하는 동무가 있어 더 힘 난다.
2022년, 힘들어하는 애들을 채근하고 다독이며 열심히 달렸다. 지치기도 했지만 나 스스로도 많이 성장했고 좋은 결실까지 맺어 뿌듯했다. 이제 개학도 했으니 서서히 시동을 걸어야겠다. 혹시 알겠는가, 내가 가르친 아이 중 나중에 유명한 작가가 탄생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