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저주시는 바의 하나님
2019. 10. 6(주일낮예배) 에베소서 1:3-6
목사님들의 세미나가 있었다. 그때 강사님은 목사님의 가정에 사랑이 넘쳐야 성도들의 가정과 교회에 사랑이 넘칠 수 있다고 하면서 지금 사모님께 다 사랑한다는 문자를 보내라고 하였다. 강사의 말에 모든 목사님들은 휴대폰을 꺼내어 사모님께 사랑합니다는 문자를 보내었다. 그런데 강사의 눈에 한분의 목사님은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이 보였다. 경상도에서 오신 목사님이었는데, 강사는 그 목사님을 앞으로 불렀다. 그리고 특별히 목사님은 사모님께 전화해서 사랑한다는 말을 하라고 하였다. 경상도 목사님은 모든 사람이 다 보고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사모님께 전화를 했다. 그리고 사모님께 여보 사, 여보 사를 몇 번 반복했다. 그러자 세미나에 참석한 모든 목사님들의 입술은 사랑해 사랑해를 외치고 있었다. 그때 경상도 목사님은 용기를 내어서 이렇게 말했다. 여보 사찰집사 뭐하노?
여러분은 사랑한다는 말을 잘 하십니까? 이 시간 옆의 분에게 인사합시다.
다같이 / 사랑합니다.
신애라씨가 가족행복 입양추천강연을 세바시에서 했다. 차인표와 결혼한 신애라씨는 1998년에 아들 차정민를 낳았다. 그리고 2005년에 예은이를 입양하고, 2008년에 예진이를 입양하였다. 그리고 예은이와 예진이를 입양한 신애라씨는 매일 아이들의 손을 잡고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나님 아버지 저는 잘 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 이렇게 예쁜 딸을 선물로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 딸을 낳은 생모가 어디에 있던지 건강하게 잘 살 수 있게 해 주세요
일반적으로 입양을 하면 아이에게 입양사실을 알리지 않는다. 그런데 신애라씨는 아이를 입양한 후 매일 친모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예은이와 예진이는 입양되었고, 친모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한 것이다.
왜 신애라씨는 아이의 손을 잡고 친모를 위해 기도했겠는가? 입양받은 아이들은 엄마에게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기의 인생은 버림받은 인생이라는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그런데 신애라씨의 생각은 달랐다. 아이를 낳아서 키울 수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친모가 10달동안 지켜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너는 버려진 아이가 아니라, 지켜진 아이라는 것을 꼭 기억하라는 것이다.
버려졌다는 것을 기억하는 아이와 지켜졌다는 것을 기억하는 아이의 삶은 똑같겠는가? 같은 상황이지만, 그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고 기억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인생을 어떻게 해석하고, 또 어떤 것을 기억하고 사는가? 구약 성경의 제일 마지막인 말라기는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다는 하나님의 고백에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였습니까?하는 반문으로 시작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였지만, 그 사랑을 인정하지 못하고 불평과 불만이 가득한 것이 이스라엘이었다. 이러한 이스라엘을 통하여 하나님은 돌아오기를 강력하게 외치는 성경이 바로 말라기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돌아오기를 얼마나 원했던지 말라기 제일 마지막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말 4:5-6)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돌아오라고 말씀하시고, 너희가 돌이키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심판할까 두렵다는 말씀으로 구약성경을 끝맺는다.
왜 하나님이 돌아오라고 말씀하시고, 심판할까 두렵다는 말씀을 하시겠는가?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에 따라 아담을 지으셨다. 그런데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여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여 하와를 만드시고, 아담과 하와가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였다. 독처하며 혼자 하나님을 예배하던 아담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기쁨을 나눌 수 있는 하와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예배하며 그 기쁨을 나누어야 할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일에 함께하였다. 그 후 이 세상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와 자신을 예배하는 자로 나뉘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노아시대에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취하는 세상이 되었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자신을 예배하는 타락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러한 세상을 물로써 심판하시고, 노아와 그의 가족만을 구원하여 주었다. 그런데 노아의 후손들을 지난 주 말씀드린 것처럼 성과 대를 쌓아서 흩어짐을 면하고, 또 자기의 이름을 내려하였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의 언어를 혼란케 하여서 흩어버리셨다. 이것이 바벨탑사건이다.
그 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를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되게 하였다. 하나님은 그 이스라엘을 통하여 예배를 받으시고, 그들과 함께하려 하였는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가 아니라, 자신의 이름과 영광을 위하여 산 것이다. 이러한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돌이키고 또 돌이키셨던 하나님은 말라기 4장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심판할까? 두렵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돌이키기를 하나님이 얼마나 원하고 있다는 말인가?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영화가 있다.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지 못한 료타는 그의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하여 일벌레처럼 살았다. 이런 료타가 결혼하여 아들 케이타를 낳고 6년을 살았다. 그런데 산부인과에서 아이가 바뀌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료타는 케이타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는데, 자기처럼 근성이 없는 것 때문에 속상해 했는데, 케이타가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아들을 바꾸기 위하여 주말이면 자신의 친아들인 류세이를 키운 가정과 함께 적응기간을 보낸 후 케이타를 보내고, 류세이를 데리고 왔다. 그런데 류세이는 엄격한 료타의 집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기 집으로 도망가 버렸다. 그래서 료타는 류세이를 데리러 갔는데, 케이타는 아버지가 자기를 데리러 온 줄 알았다. 그런데 류세이를 데리고 가는 것을 보고 아빠 료이는 이제 더 이상 나의 아버지가 아니구나! 하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렇게 케이타를 버리고 류세이를 데리고 온 료이는 케이타를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한다. 그래서 이전과 달리 거실에서 총싸움도 하고, 장난을 치면서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간다. 료타는 이제 자신의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날 저녁 아내가 우는 것을 발견한다. 아내는 류세이에게 사랑을 주는 것이 케이타를 배신하는 것같아 마음이 너무 아프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료이도 마찬가지였다.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하여 류세이에게 사랑을 줄때마다 케이타에게 미안했던 것이다. 그래서 료이는 케이타를 만나러 간다. 그런데 료이가 집에 도착했을 때 케이타는 아빠를 보고 도망을 가면서 아빠는 내 아빠가 아니잖아! 하고 말한다. 그 케이타를 따라가면서 료이는 이렇게 말한다.
케이타 미안해, 아빠가 케이타가 보고 싶어서 약속을 깨고 왔어. 6년간은 아빠였어. 제대로 해주진 못했어도 아빠였어. 아빠도 피아노 하다 그만뒀어. 인제 미션같은 것은 없어.
이 부분이 영화의 클라이막스인데, 이 부분을 해설자는 아빠도 피아노 하다 그만뒀다는 말은 너는 내 아들이야! 봐 아빠와 똑같잖아 하는 말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케이타는 그러한 아버지의 말에 료이를 아버지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이 영화의 제목이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이다. 료이는 아버지가 되기 위하여 아들을 더 이해하고 아들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그 케이타가 아버지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그때 비로써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이 료이와 같이 그 아버지가 되고 싶어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여 주시고, 또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도록 우리를 부르고 또 부르시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이 오늘 본문 6절에 도 담겨져 있다. 이제 오늘 본문 6절을 읽어보기 바란다.
(엡 1: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거저 주신다는 말은 accept 받아들인다 인정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은 아무런 이유와 조건없이 우리를 받아주시고, 또 인정하여 주었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이 말씀의 의미를 알겠는가? 제가 아버지가 되고 알게 된 것이 있다. 제가 아들일 때는 공부를 잘해야 아버지의 아들이 되는 줄 알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원하고 바라는 만큼의 자리에 서기 위하여 정말 힘겹게 살았다. 그런데 제가 아버지가 되고 나니 그게 아니다는 것을 알았다. 아들이 하는 일이 잘되면 기분이 좋다. 그런데 아들이 하는 일이 잘되지 않아 힘들어 하는 것을 보면 너는 내 아들이 아니야! 가 아니라, 아버지로서 더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이것이 아버지이다.
그런데 이 아버지의 마음의 원조가 바로 하나님이다. 누가복음 15장은 잃었다가 찾은 기쁨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잃은 양의 비유, 읽은 드라크마의 비유, 잃은 탕자의 비유를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잃은 것을 찾은 목자와 주인과 아버지는 공통적으로 기쁨의 잔치를 베풀었다.
사실 잃었다가 찾았지만 기쁘지 않은 것이 있다. 한번 생각해 보기 바란다. 잃었다가 찾았지만 기쁘지 않은 가장 대표적인 것은 무엇이겠는가? 바로 살이다. 며칠을 굶고 운동하여서 겨우 빼 놓았는데, 어느날 다시 회복된 살을 보면 짜증이 난다.
그런데 잃어버린 아들을 찾으면 그 기쁨이 얼마나 크겠는가? 비록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다 탕진하고 거지가 되었지만, 아버지를 향하여 돌아올 때 아버지는 아직도 상거가 먼데 그 아들을 먼저 알아보고 달려간다. 그리고 그 아들을 안고 입을 맞추며 아들을 위하여 준비해 둔 옷과 신발과 가락지를 끼우고, 살찐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베푸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죄악가운데 뒹굴어서 온 몸에 냄새가 난다고 거절하지 않는다. 그 아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시는 것이다. 아니 더 나아가서 그 아들이 돌아왔다는 것만으로 기뻐하시며 즐거워 하시는 것이다.
잘 보시기 바란다. 아버지의 유산을 가지고 간 둘째가 흥청망청 그 유산을 쓸 때에는 주위에 많은 사람이 따라다녔을 것이다. 그런데 유산을 다 탕진하고 거지가 되었을 때 그들은 다 둘째를 떠나 버렸을 것이다. 아니 둘째가 도와달라는 말을 했을 때 거절했을 것이다. 둘째는 거절의 상처와 아픔을 가진 것이다.
그런데 그 거절의 상처를 어떻게 치유받을 수 있었는가? 심리학의 교과서라고 불리는 리즈부르보가 쓴 5가지의 상처라는 책이 있다. 그 책에서 리즈부르보는 거부, 버림받음, 모욕, 배신, 부당함을 5가지의 상처라고 하였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상처를 받으면 그 상처를 가리기 위하여 가면을 쓴다고 하였다. 마치 우리가 일을 하다가 손가락에 상처가 나면 반창고를 붙이는 것처럼 그냥 상처를 가리기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