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혹한의 땅 러시아, 조국 잃은 탄식 마저 얼어붙던 혹한의 땅, 이곳에 잊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의 할아버지는 최재형 선생님입니다. 할아버지를 공경하며 그가 항상 자랑스럽습니다. 그 당당한 체구, 그 바리톤조의 진동적인 풍부한 음조, 형형하고 압력적인 눈, 어데로든지 당당한 거인이다.-----1931년 6월 1일 잡지 <삼천리>에 실린 글—
나는 이동휘 선생의 후손, 베케노트 마랏입니다.
사지에 처한 나를 네번이나 구해준 그대로
내가 가장 신뢰하는 유일한 고굉(忠臣)이고,
그 은혜는 평생 잊을 수 없다.-----고종 황제의 술회------
제 고조부는 이범진이며 증조부는 이위종입니다.
누구보다 뜨거운 삶을 살아온 이들, 그리고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지금 시작됩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러시아 제2의 도시이자 옛 수도), 러시아의 옛 수도인 이곳에 <집으로> 사절단이 도착했습니다.
손현주/배우: 이 사람들 왜 이렇게 안와,
허일후/아나운서: 그러게요. 갈데가 되게 않은데~ 빨리 오셔야 되는데~
충성, 세 사람이 뛰어온다, 배우 고창석, 배우 한보름, 역사 선생님을 맡을 정상규 단원입니다.
허일후: 사실 러시아도 중요한 곳이잖아요.
정상규: 사실 러시아만큼 독립운동사의 이야기가 끝도 없이 펼쳐지는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국민들에게 많이 안알려져 있어서 저희 MBC 집으로 사절단이 각자가 사관이라는 마음으로 러시아에서의 독립운동을 국민들에게 잘 전달했으면 좋겠습니다.
한보름: 저도 독립운동가 하면 한국을 기본으로 중국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러시아 독립운동 하면딱히 생각나는 분들이 없더라구요. 이번 기회에 저도 공부하고 이걸 보시는 분들도 제가 느끼는 경험들을 많이 사랑하셨으면 좋겠어요.
허일후: 그리고 또 우리가 빼놓을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임무가 있습니다. 자, 초청장, 우리 독립운동가 후손들에게 한국으로 초대하는 초청장을 잘 전달을 해서 집으로 돌아오실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야 되니까 하여튼 우리의 잊혀진 역사를 되새기면서 파이팅! 했으면 좋겠어요. 자, 하나, 둘, 셋- 집으로!! 가시죠!!
넓은 땅 맡은 임무가 많아 발걸음도 바쁩니다.
허일후: 여기가 춥긴 춥다.
고창석: 그런데 우리 만나자 마자 어디 가는거예요?
허일후: 러시아에서도 우리가 꼭 만나뵈어야 할 중요한 후손이 계십니다.
손현주: 보름씨, 튜립은 뭐예요?
한보름: 저희가 오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처음으로 가는 곳이라 관련있는 후손분이 이 튜립이랑 인연이 있어서 준비했어요.
정상규: 저희가 가는 곳은 대한제국의 초대 외교관이자 독립운동가로 생을 마감하신 분이 거쳐하셨던 장소입니다.
허일후: 지금으로 따지면 영사관 같은 곳이네요.
정상규: 그렇죠, 거기가 바로 여기입니다!!
지금은 아파트로 변한 옛 러시아 공사관 자리, 대한제국 주러공사관-1901~1905년 초까지 러시아 주재 대한제국 초대상주공사 이범진이 집무하던 장소,
허일후: 이 건물에는 1901년부터 1905년 까지 이범진 러시아 주재 대한제국 초대 상주공사가 집무하셨습니다. 상주를 하셨다는게 중요 하네요. 그런데 여기 우리가 자리를 확인을 하고 오니까 이걸 보지 그냥 지나가시는 분들은 거의 발견하기가 쉽지 않겠어요.
한보름: 그냥 지나칠거 같애요.
손현주: 이것도 글씨가 너무 작아~
허일후: 그러면 오늘 만나뵐 분이 바로~
정상규: 바로 이범진 공사의 고손녀 시죠. 율리야 선생이 오셨습니다!!
율리야/이범진 공사의 고손녀: 안녕하세요.
일동: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독립운동가 이범진, 이위종의 후손, 율리야씨(피스쿨바 율리야-독립운동가 이범진의 고손녀, 독립운동가 이위종의 증손녀), 마음을 담은 선물을 건넵니다.
피스쿨바 율리야: 안녕하세요. 저는 율리야 입니다. 모스크바에서 여러분을 뵈려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허일후: 원래 모스크바에 사시는데 저희를 만나러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와주셨군요 감사합니다.
율리야: 대단히 감사합니다. 매우 기쁩니다. 이 꽃은 저한테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 증조 할아버지 이위종께서 네델란드 2차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셨거든요. 네델란드는 튤립의 고향이잖아요. 감사합니다.
허일후: 아니 그런데 아까 튤립을 준비한게, 우리가 헤이그 특사하면 이준 열사를 많이 알고 있는데 같이 가셨던거예요, 정대표님?
정상규: 정확하게 이준, 이상설, 그리고 이위종 이 세명이서 헤이그 특사 3인방이었는데 이위종 열사의 선친께서 바로 여기 계신 이범진 선생이십니다. 父子가 모두가 독립운동가였고 외교관이었습니다.
일동: 아, 그렇군요.
허일후: 보름씨가 또 이렇게 선물을 준비했는데 저도 한국에서부터 들고 온게 있습니다. 대한민국 독립운동 사적지 표지판, 이게 이미 유럽을 돌고 계속 들고 다녔는데 이게 바로 여기 오신분들이 정확하게 어디인지 알 수 있게 여기 보면 QR코드 있잖아요. 이 QR코드에다 핸드폰을 살짝 갖다대면 바로 이범진 선생님의 이야기를 동영상으로 볼 수가 있도록 저희가 제작을 한 겁니다.
영상 속 이야기가 궁급해 집니다. ----이범진 주러시아 상주 공사입니다. 한일의정서 체결이후 이범진 공사는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따르지 않았습니다. 끝내 민족의 해방을 열망했던 이범진, 그의 정신은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허일후: 그래서 요렇게 대면 고조 할아버님(이범진)의 이야기가 한국인들도 그리고 영어 자막으로 다른 외국인들도 알 수 있게 저희가 준비했습니다.
율리야: 대단합니다. 감사합니다. 매우 중요한 어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어플이 생겨서 정말 놀라고 기뻤고요. 지금 이 어플 덕분에 모든 사람들이 한국의 독립운동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알게 되었고 심지어 상트페테르부르크와 같이 먼 곳에서도 알게 되었습니다.
허일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오시는 관광객들도 이곳을 잊지않도록 사절단이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오늘 저희가 초대받은 곳이 있데요, 단장님! 가실까요?
손현주: 어딘데요?
허일후: 좋은 곳이예요. 가시죠!!
해외 독립운동 사적지 표지석은 추후 설치될 예정으로 QR코드 인식시 관련영상이 재생됩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총영사관저로 향하는 사절단, 안녕하십니까? 권동석 주상트페테르부르크 총영사,
권동석/주상트페테르부르크 총영사: 대한민국 총영사관 관저 2층에 자리잡고 있는 이범진 공사 전시관입니다. 이범진 공사가 근무했던 근무 장소를 저희가 복원사업을 해서 거기다 만들어야 되는데 아직은 그런 준비가 안되어 있어서 임시로 저희 관저 내에다가 임시 전시관을 만들었습니다.
이곳을 통해 이범진 선생에 대한 자세한 역사를 마주했습니다. 외교관으로서 독립운동가로서 위대한 삶을 살았던 선생, 그는 왜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걸까요.
권동석: 1905년 을사늑약 이후에 공사관이 폐쇄가 되거든요. 폐쇄가 된 이후에는 이범진 공사님께서는 남아계셨잖아요. 러일전쟁으로 일본이 이겼기 때문에 그 이후에는 외교관 신분이 아니었고 본국에서 지원을 못받지 않습니까. 그때 생활비를 러시아 정부에서 지원해 줬습니다.
일동: 아~아~
권동석: 그것도 아주 비밀리에~
허일후: 그만큼 러시아에서도 이범진 선생님을 인정했다는 얘기네요.
정성규: 그 이유가 있어요. 이유가 뭐냐하면 당시 연해주에서 최재형 선생님이 동의회를 만들었을때 가지고 있었던 전재산, 1만 루블을 줬거든요. 본인이 전재산을 독립운동하는데 다 주었으니 돈이 없는 거죠.
허일후: 생활비도 남기지 않고 다 털어서 독립운동에 지원했네요.
정성규: 당시 그 1만 루블이 현재 가치로 약 80억원에 해당합니다.
공사관을 떠나 작은 아파트에 기거하면서 조국의 독립만 바라보던 이범진, 이범진 공사가 마지막으로 거주한 체르노첸스카야 거리 5번지, 그가 독립운동 지원금을 맡긴 사람은 아들 이위종, 이 돈은 연해주로 전달됩니다. 이렇게 탄생한 항일의병단체가 동의회인거죠. (동의회-1908년 만들어진 러시아 지역 항일의병단체),
손현주: 우리가 지금 이범진 선생님의 묘소를 가고 있잖아요 저희도 감개가 무량합니다.
율리아가 스마트폰에 내장된 이범진 부부와 이위종 가족사진을 손현주 단장에게 보여준다.
고창석: 너무 멋진 시다.
율리야: 이 사진은 고조부(이범진 공사)가 워싱턴에서 근무할 때의 사진입니다. 이범진 공사와 이위종입니다.
고창석: 그런데 여기 사진보면 이위종 선생님이 애기잖아요, 애기~. 헤이그 파견 때 나이가 20살이라고 얘기들었거든요. 그런데 지금 제 딸이 18살인데 그게 상상이 안돼요, 사실. 혹시 율리야 선생님께서 이위종 할아버님과 똑같은 역할을 맡으셨다면 정말 어떠셨을까 후손으로서 할아버지처럼 할 수 있을까 사실 약간 궁금해요.
율리야: 저는 그게 정말 감동적인 질문이라고 생각해요. 저도 가끔씩 그런 질문을 자신한테 물어봐요. 나는 그런 어린 나이에 공적인 자리에서 연설을 할 수 있을지, 한국을 대표하는 상태에서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모르겠어요, 할 수 있을지, 못할 것 같습니다.
--------내가 살해 당해도 신경 쓰지 마라
--------너희들은 특명을 다하라
--------대한제국의 독립 주권을 찾아라
--------고종황제가 헤이그 특사에게 전한 말
이위종이 약관의 나이에 한국을 위한 호소문을 발표하게 된 데는 아버지의 영향이 컸습니다 (이위종이 발표한 한국을 위한 호소문-을사늑약의 부당함과 일본의 조선침략을 규탄함), 외교관 아버지를 따라 다니면서 쌓게 된 외국어 실력과 더불어 진정한 애국심까지 배우게 되는 거죠. (1910년 8월 4일 프랑스 정기간행물에 실린 이범진과 이위종 사진).
율리야: 가족 모두가 항상 우리의 선조가 한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영웅이란 정말 자랑스러웠습니다. 불행히도 선조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어서 우리가 그 부분에 대해서 연구하기로 했죠. 그리고 그들의 업적과 삶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려고 합니다.
고창석: 정말 제가 놀랐던게 율리야 선생님이 한국국적을 갖고 있다는 그 이야기를 듣고 제가 너무 놀랐거든요.
율리야: 한국 국적을 준 대한민국에 항상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또한 한국 사람들이 우리 가족 모두를 가족처럼 받아들여줘서 감사하죠. 저도 한국 사람이 돼서 정말 감사하며 자랑스럽습니다.
파르골로보 북방묘지 러시아, 구국을 위해 최후를 바친 이범진 선생의 묘---이범진 공사 순국비, 이범진 공사는 1852년 9월 3일 한국 서울에서 탄생하여 1911년 1월 26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순국한 대한의 충신이다--------경술국치가 일어난 이듬해, 1911년 1월 13일, 선생은 조국을 위해 마지막 복수를 결심합니다. 비장하게 써내려간 한장의 유서---
우리나라 대한제국은 망했습니다.
폐하는 모든 권력을 잃었습니다.
저는 적을 토벌할 수도 복수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깊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자결 외에 제가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오늘 목숨을 끊으려 합니다. --------이범진 공사가 고종황제에게 남긴 유서--------
비통함을 남기고 순국한 이범진 선생, 이범진 공사의 시신이 안치됐던 표트르 파블롭스키 병원, 한복입기를 즐겼던 외교관, 그의 장례식은 많은 러시아 시민들의 애도 속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치러졌습니다. 1911년 촬영된 이범진 공사 장례식 영상, 하지만 공동묘지 정비작업중 소실됐다는 선생의 유해, 가묘만 남은 현실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손현주: 집으로 사절단이 늦게 찾아뵈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율리야: 그래도 결국 우리를 찾아 주셔서 감사들입니다. 고조 할아버지(이범진)는 정말 젊은 나이 인생의 전성기에 돌아가셔서 유감스럽지만 하지만 돌아가시면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큰 역할을 하셨어요. 어떻게 보면 독립을 위해 당신의 목숨을 바치신 거죠.
손현주: 증조 할아버지의 묘소는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거든요.
율리야: 증조 할아버지(이위종)께서 묻히신 곳이 어딘지 모르는 것은 굉장히 슬픈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증조 할아버지(이위종)가 어디에 묻혀 계시는지 찾기 위해 최선을 다 하려고 합니다.
진심어린 연설로 세계를 감동시킨 이위종, 아버지의 자결로 큰 상심에 빠진 그는, 연해주 지역에서 활동했다는 이야기만 전해질 뿐, 행적을 찾지 못한채 위패로만 모셔져 있습니다.
손현주: 100년전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혹한의 땅 러시아에서 조국을 위해 희생과 헌신을 하신 이범진 선생님께 감사말씀을 드리고요 그의 후손 율리야님께 한국으로 초청하는 초청장을 드리겠습니다. 나라를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 명문가 이범진 이위종 父子를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러시아에서 처음 맞는 밤, 단장인 제가 긴급회의를 소집했습니다.
손현주: 나 단장포기할래~, 여길 오니까 러시아 라는 지역이 너무 넓어, 우리나라의 약 171배, 세계에서 가장 영토가 넓은 러시아,
허일후: 세계 지도의 한 반을 차지해요.
정성규: 사실 러시아에서 펼쳐진 한국의 독립운동사를 봤을 때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 따로 있고 독립운동 사적지가 밀집한 장소가 따로 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팀을 나눠서 가는 것도 방법이에요.
지역을 나눠야 하는 상황, 단원들은 어떤 결정을 내릴까요 후손 밀집지역 카자흐스탄 VS 사적지 밀집지역 연해주~
한보름: 저는 이번을 계기로 역사를 배워보고 싶어서 개인적으로 저쪽 연해주로~
고창석: 개인적으로는 뭐 사적지도 좋지만 저는 사람 만나는 게 좋아요. 오늘 또 율리야 선생님도보니까 머리도 중요하지만 가슴이 뛰는 거라 후손을 만날 수 있는 카자흐스탄이 좋습니다.
손현주: 그럼 제가 고창석씨랑 카자흐스탄 갈게요.
허일후: 제가 블라디보스토크에 정 작가님과 한보름씨랑 잘 챙겨서 가겠습니다.
일동: 하나 둘 셋 파이팅!
각자의 길을 선택한 <집으로> 사절단, 허일후, 정성규 그리고 한보름 3명은 비행기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연해주로 출발, 그리고 손현주 단장과 고창석씨는 비행기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카자흐스탄으로,
연해주팀은 겨울 바다에 도착했네요. 오, 바다다 바다, 연해주 최남단에 위치한 포시예트 항구, 당시 한인들이 이곳을 통해 러시아로 이주,
허일후: 우리가 얼어있는 바다 위를 걸어보는~, 이런 경험을 다해 보네요. 정말 진짜 오래 걸렸다. 다들 고생 많았어요. 아니 우리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지금 비행기로 10시간 그리고 차로 4시간을 달려서 여기로 왔어요.
한보름: 14시간을 달려서 드디어 여기에 도착했어요.
허일후: 진짜 고생 많았습니다. 그런데 여기가 어디예요?
정성규: 여기는 포시예트 항구입니다.
허일후와 한보름: 그런데 여기에 왜 우리가 온 거죠?
정성규: 여기가 최초의 한인 마을이 만들어진 곳입니다.
1860년대 한인들은 굶주림을 벗어나기 위해 두만강을 건너 포시예트를 통해 연해주로 건너왔구요. 그리고 1867년 13가구의 한인들이 바로 인근 지신허 마을에 정착 했습니다. (한국-포시예트-지신허-블라디보스토크), 이후 점차 블라디보스토크 쪽으로 거주지를 넓혀 나가고 개척지를 거쳐서 신한촌을 만들게 됩니다. 1900년 초 블라디보스토크 개척지, 신한촌/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분주하게 움직이는 단원들, 이들이 향한 곳은 신한촌입니다.
한보름: 저기 태극기 보여요.
허일후: 여기구나 이쪽에서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사셨던 거예요?
정성규: 맞습니다. 여기가 고려인들 최초의 한인 마을 중에서도 독립운동가들이 가장 많이 살았던 중심지, 독립운동의 성지 바로 신한촌입니다.
신한촌에서는 1920년에 독립운동을 기리기 위한 움직임도 있었는데요. 3.1운동을 기념하면서 고려인들은 신한촌 중심에 지금은 사라진 독립문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탑이 세개가 있다.
한보름: 이 세개의 탑은 뭔 의미 하나요, 작가님?
정성규: 일단 이 세개의 돌기둥 조형물은 가운데는 대한민국을 나타내고요, 왼쪽은 북한, 오른쪽은 고려인 한인사회를 나타냅니다. 신한촌 기념비-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사라지게 된 신한촌을 기리기 위해 1999년 세워진 기념비,
한보름: 그래서 각자 길이가 다른 거예요?
정성규: 네, 맞습니다. 그리고 뒤로 한번 보시면은 8개의 돌이 놓여져 있습니다.
허일후: 표지석 같이 만들어져 있네요.
정성규: 네, 이 돌들의 의미는 조선 8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려인들이 이것을 만들 때 조선에 대한 그리움,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이런 돌들을 만든 겁니다.
허일후: 어떻게 보면 조선 8도 우리 땅을 다시 찾아오겠다는 의지의 상징이기도 하겠네요.
정성규: 맞습니다.
신한촌 독립운동가들을 기리는 한국 관광객들의 추모글귀,
허일후: 신민회와 권업회를 결성을 했군요.
정성규: 이위종 선생, 그리고 헤이그 측사의 주인공이었던 이상설 선생이 전부 다 여기서 활동하셨습니다. 권업회-1911년 신한촌에서 결성된 항일운동단체 이동휘 이상설 최재형 이종호 홍범도 등이 주축으로 활약했다, 1911년에 만들어진 권업회는 항일운동단체인데요. 이동휘 이상설 최재형 신채호,
이동휘
여러분은 생각하시오
나누면 망하고 합하면 흥하나니
우리의 광복을 희망하며
서로를 나누지 말자------1913년 10월 12일 이동휘 선생의 연설 중에서-----------
오직 광복만을 희망했던 단체였던 권업회는 권업신문을 창간해서 민족정신을 높이고 한편으로는 한민학교라는 교육기관까지 설립했는데 안타깝게도 현재는 그 자리만 이렇게 남아있습니다.
이곳 혁명광장(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은 이름만 들어도 러시아 사람들에게는 가슴이 설레이는 장소입니다.
허일후: 아니 여기가 관광지면 우리가 여기 굳기 올 필요가 없잖아요?
정성규: 러시아 사람들에게는 관광명소이지만 우리 고려인들에게는 가슴 아픈 역사의 장소입니다.
한보름: 이곳이요? 무슨 일이 있었어요?
정성규: 바로 이곳에서 1937년에 러시아 사람들이 고려인들을 강제이주시켰던 그 장소입니다. 당시 일본의 어떤 간첩들 하고 동양인들과 구별이 안된다는 이유로 이곳에 살고 있는 17만명의 고려인들이 무조건 다 강제이주 당했습니다. 3일 안에 기차를 타지 않으면 전부 사살한다는 명령을 내렸어요. 그래서 고려인들은 간첩으로 몰리지 않으려고 살기 위해서 자신의 삶의 터전을 전부 버려야 했던 거죠. 그런데 그건 핑게죠.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그 당시에 이런 이유도 있었어요. 학교도 짓고 너무 고려인들이 정착을 잘 하니까 그들이 약간 자치권을 요구할까봐 이들을 빨리 이주시켜버린 거예요. 러시아 사람들은 여기에 연해주 고려인들을 이용한 거죠. 땅 개간하는데 이용하고 또 보내버린 데가서 이용한 거죠. 당시 17만명이 여기 모여 있었기 때문에 운송하는 열차가 굉장히 부족하다 보니까 화물열차 그리고 가축수송열차를 가지고 왔어요. 가축수송열차에다 고려인들을 다 태우는 거야. 한 30일 넘게 열차가 갔다고 했잖아요. 그 안에서 위생상의 문제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요. 가슴 아픈 강제이주 역사,
그렇게 17만명의 한인들은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유슈토베, 알마티-프룸제-카리간다-쿠스타나이, 사마르칸트, 크를오르다-아스트라한, 쿤구라드.
그 중 한 지역인 카자흐스탄, 아픔을 간직한 후손의 집을 찾았습니다.
손현주: 여기가 이동휘 선생님의 후손이 사시는 데요. 짧게 설명을 하면은 대한제국의 군인이자 정치가 그리고 독립운동가였거든, 함경도, 평안도 그리고 연해주 더 나아가서는 북간도 까지 넓게 독립운동을 하셨던 분이죠.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까지 역임하신 분이셨어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 신년하례 기념사진, 독립운동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이동휘 선생, 이동휘(1873~1935)-러시아, 북간도 지역 독립운동을 주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 오직 민족의 독립만을 위해 평생을 바칩니다. (신민회-1907년 이동휘, 안창호 등이 주도해 만든 항일비밀결사 단체), 하지만, 1935년 신한촌에서 사망,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위패만 모셔져 있습니다 (서울특별시 동작동 국립묘지 현충원, 순국선열 이동휘 영위,
손현주: 이동휘 선생의 후손은 어떤 모습일까?
긴장되는 순간, 베케노프 마랏/이동휘의 증손자, 당연히 밝은 웃음으로 맞이해 주십니다.
손현주: 저희들은 <집으로> 사절단 단원들입니다.
베케노프 마랏: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두분은 지금 이동휘 선생님의 후손 집으로 오셨습니다. 찾아와 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손현주: 저희들이 더 고맙습니다.
베케노프 마랏: 이제 안으로 들어가시죠.
손현주: 초대해 주시고 환대해 주셔서 사절단 단장으로 대단히 감사합니다.
베케노프 마랏: 저희 한테는 큰 영광입니다. 이렇게 멀리서 유명한 분들이 오시고 증조 할아버지(이동휘)에 대해 많이 신경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손현주: 가족소개를 부탁들여도 되겠습니까?
베케노프 마랏: 일단 제 아내부터 소개해 드릴게요. 사랑하는 내 아내 굴자이나입니다. 내 사랑하는 큰딸 아이게림입니다. 카자흐탄 알마티는 저의 고향입니다. 그러나 증조 할아버지(이동휘)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사셨고 독립운동가였습니다. 그리고 1930년대에 돌아가셨고 증조 할머니(이동휘 아내)와 나머지 가족들은 강제 이주로 우즈베키스탄에 오게 됐습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증조 할머니(이동휘 아내)도 병으로 돌아가셨고 그 뒤로 후손들은 카자흐스탄 알마티까지 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고창석: 제가 독립군역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어떤 모델이 이동휘 선생님이었다고 작가가 말씀해 주셔서~그때서야 저도 알게 되었습니다.
베케노프 마랏: 네 봤어요.
고창석: 제 영화를 보셨어요?
손현주: 네, 네
고창석 선조의 업적을 알게 된 계기가 어떻게 되는지?
베케노프 마랏: 어머니께서 20년전 이 책을 쓰셨을 때 저도 말만 듣고 잘 몰랐는데요 어머니가 이동휘에 대한 정보가 없어서 외할아버지(이영일)에게 전달받아 이 책을 20년 전에 쓰셨고 아이게림에게 주셨는데요. 우리도 그때 까지는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사실 이 책을 처음 쓰기 시작한 사람은 이영일 우리 외할아버지 입니다. 그런데 외할아버지도 이동휘에 대해 별 말씀을 하지 않으셨어요.
베케노바 굴자이나: 외할아버지가 시작하셨고, 어머니가 완성하신 거죠.
베케노프 마랏: 이 사진들은 어디가도 못찾으실 겁니다. 박물관이나 한국에 없는 사진들이죠. 여기는 왼쪽 이동휘(증조 할아버지)의 아버지시고 여기는 오른쪽 이동휘(증조 할아버지)의 가족사진입니다. 아주 희귀한 사진들입니다.
손현주: 책을 좀 봐도 되겠습니까?
베케노바 굴자이나: (사진에서) 이분이 마랏의 어머니
고창석: 오, 이 책을 쓰신 분~
손현주: 잊을 뻔한 선대의 역사를 되새겨 준 어머니, 이동휘의 손녀, 리 류드밀라(마랏의 어머니),
베케노바 굴자이나: 큰 딸 아이게림은 어머니를 많이 닮았습니다.
손현주: 소중하고 귀한 이야기가 담긴 책, 유일하게 남은 한장의 가족사진, 이동휘, 강정혜(이동휘 아내), 이승교(이동휘의 부친), 이동휘 선생이 작고하신 후 아내 강정혜는 남은 가족과 강제이주를 당합니다. 큰딸(이인순)과 둘째딸(이의순)은 성인이 된 후 여성독립운동가로 활동하기도 했죠. 이영일(이동휘 아들)은 강제이주후 움막에 살면서 갖은 고초를 겪었던 가족들, 각박함 속에서도 아들 이영일은 5개 국어를 구사하는 인재로 성장했습니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담아낸 아들과 완성시킨 그의 딸 (이동휘->이영일->리 류드밀라), 외증조 할아버지의 삶은 손주에게 전해지고 또 이어져 갑니다.
베케노프 마랏: 그거 아시나요?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것들을 간단하게 보려고 노력합니다. 저도 우리 선조가 독립운동을 하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돌아가신 것에 대해 아주 자랑스럽게 가치있는 인생을 사셨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번에도 ‘독립운동을 할 생각이 있는지’ 라는 질문을 받았는데요. 모든 사람들은 평범하고 평화롭게 세상을 즐기며 살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평화를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 일이 생긴다면 저도 나서겠습니다. 갑자기 보여줄 것이 있다는 마랏씨의 부인,
베케노바 굴자이나: 우리는 이 음식을 페고디 라고 해요.
고창석: 오, 만두예요?
베케노바 굴자이나: 네, 만두예요.
손현주: 잘 먹겠습니다. 저희도 한국 음식을 만들려고 재료를 준비해온 게 있습니다. 이 사람(고창석)이 요리를 잘 합니다. 삼고 볶은 당면에 어머니표 반찬을 넣어 만든 잡채,
손현주: 마랏 부부는 잡채를 좋아해 주실까요?
고창석: 버섯이랑 같이 드세요.
간은 제대로 배었을지 한국의 맛이 배어났을지 좌불안석이 따로 없습니다.
베케노바 굴자이나: 맛 있어요.
베케노프 마랏: 우리 아내가 나한테 항상 맛있는 음식을 해주지만 이분들이 자주 왔으면 좋겠어요. 너무 좋아요.
이번엔 페고디를 맛볼 차례, 정말 맛 있더군요.
고창석: 이 만두는 어느 분한테 배우셨는지?
베케노바 굴자이나: 시어머니와 시아버지에게 배웠어요.
고창석: 그러면 어머님이 책도 쓰시면서 업적도 보존해 주시고 한국 음식도 가르쳐 주시고 대단하십니다.
베케노바 굴자이나: 네 맞아요 아주 대단하고 재능이 많으신 분이셨습니다. 노래도 잘 하고 춤도 잘 추셨습니다.
고창석: 혹시 노래도 배우셨어요?
시어머니께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강제이주의 아픔을 딛고 가족과 대한민국의 역사를 이어가는 후손들, 초청장 전달과 함께한 가슴 따뜻했던 시간, 그들을 만나 진심으로 행복했습니다.
---------------------------------------------------------------------------------------
연해주 독립운동의 또 다른 중심지로 향하는 세 사람,
정상규: 한보름씨, 임시정부하면 어느 도시가 떠오르세요?
허일후: 임시정부하면 당연히~?
한보름: 상해
정성규: 상해는 중국에 있었던 임시정부인데 사실 이곳 러시아에 최초의 임시정부가 있습니다
허일후: 러시아 들어봤어요?
한보름: 한번도 안들어봤어요
허일후: 러시아에 임시정부가 있었어요?
정성규: 다 왔습니다. 가 보실까요? 바로 여깁니다.
한보름: 그런데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나봐요.
허일후: 철조망으로 철책이 처져있네요.
정성규: 현재는 중학교로 쓰이고 있어서, 일반인은 못들어가고 바로 이 장소가 100년전에 우리나라 최초의 임시정부가 있었던 터입니다.
허일후: 그렇구나, 전로한족중앙총회 결성장소 (당시 니콜스크-우수리스크 실업학교 이 건물은 1918년 6월 13일부터 23일까지 제2회 특별전로한족대표회의가 개최되어 민족의 자치와 항일독립운동을 추진하고자 전로한족중앙총회를 결성한 장소이다. 1919년 3월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서 전로한족중앙총회는 최초로 임시정부를 선포한 대한국민의회로 확대 개편하였다. 한-러수교 20주년 기념, 러시아 전체 한인들의 한인회 같은 이름으로 만들어졌고 소비에트 혁명이 있던 1917년 그 이후에 바로 만들어졌어요. (전로한족중앙총회-1919년 3월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서 최초의 임시정부를 선포한 대한민국의회로 확대됨),
대한국민의회에 몸 담았던 분들을 돌아보면 정말 대단하신 분들이시거든요. 문창범, 이동휘, 그리고 최재형 선생님까지 정말 어마어마한 분들이 여기 참여하셨고 의회 뿐만이 아니라 사법 행정기능까지 다 갖추고 있었어요.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않았던 독립선언서 두 장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허일후: 1919년이면 우리가 알고 있는 4월 11일, 임시정부수립일 이고~
정성규: 그건 상해~ 바로 중국 상해임시정부 수립일이 4월 11일이고, 그거 보다 한달전인 3월 17일에 러시아 연해주에서 임시정부가 최초로 선포됐지요.
허일후: 러시아에서 최초의 임시정부는 교과서에서도 거의 못보았던 거 같은데~
정성규: 저도 그걸 알게 된 건 오래 되지 않았습니다. 저도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되었죠.
허일후: 아니, 그런데 보름씨, 이것만 덜렁 있는 거 같애요. 혹시 안에 뭘 우리가 볼만한 자료가 없을까 그러니까 그때 당시의 뭔가 남아있지않았을까요?
정성규: 정말 남아 있으면 저도 보고 싶은데 안타깝게도 남아 있는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한보름: 그럼 이 현판 하나만 달랑 있는 거네요.
정성규: 그렇죠.
허일후: 아쉽네요 그 안에 당시 모습이 남아있으면 좋았을텐데~
정성규: 권한이 없다보니까 해외 독립운동 사적지를 관리하는 부분에서 어려움이 있어요.
허일후: 요즘 우리 한국관광객들이 블라디보스토크로 여행을 많이 오시거든요. 오실 때 빼먹지 말고 이런 것도 한번 둘러보면 좋을 것 같애요.
한보름: 한번씩 보시고 기억해 주시면~
정성규: 그러면 너무 좋죠.
새로운 역사를 발견한 연해주팀, 또 다른 사적지를 찾아갑니다.
허일후: 한글 보인다~ 최재형 고택, 독립운동가 최재형 고택 최재형 박물관 러시아 우수리스크, 최재형(1860~1920)-동의회,권업회 대한국민의회 등에서 활동, 대동공보사 사장 역임, 최재형의 유품과 독립운동의 흔적이 전시된 곳, 최재형의 페치카, 페치카는 러시아어로 난로라는 뜻으로 시베리아 항일운동의 대부였던 최재형의 동포를 향한 따뜻한 마음을 엿보게 하는 애칭이었다. 최재형의 가옥에 남아있던 페치카의 원형을 복원하여 전시하였다.
한보름: 페치카는 난로라고~
정성규: 당시 최재형 선생님의 별명이 최 페치카였습니다. 이유가 당시 러시아에서 자수성가 하셨던 인물로서 사실 최선생님이 노비 출신이세요. 8세 때 이곳으로 이민 오신 분이시기 때문에 러시아에 계신 많은 한인분들의 생계를 본인이 책임져 주셨기때무에 ~ 별명이 페치카였던 것입니다.
허일후: 추운 러시아에 가난한 한인들의 난로였었죠.
최재형 선생님은 고려인사회의 희망이자 등불이셨던 분입니다. 어른들에게는 경제적 도움을 주고 후학 양성을 위한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으셨고 또 러시아 지역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단체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셨어요. 연해주 독립운동의 심장 최재형,
허일후: 여기 익숙한 분들이 보여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만났던 이범진과 이위종 선생님,
정성규: 제가 앞서 말씀 드렸잖아요. 이범진 선생님이 재산 80억을 기부한 단체가 동의회고 이 돈을 지원받아서 동의회가 발기됐을 때 모였던 장소가 바로 연추지방 최재형 선생님의 집이었습니다.
허일후: 안중근 선생님하고는 최재형 선생님 하고는 어떤 관계였나요?
정성규: 당시 안중근 의사께서 의병을 일으켜서 활동을 하시다가 연해주 쪽으로 오십니다. 그러다가 최재형 선생님 밑에서 의병들을 조직해서 더 활동을 많이 하세요. 당시 수많은 전투를 실제 의병전투를 치르셨구요. 최재형 선생님께서 동의회 라는 조직을 만들었을 때 거기 의병부대에 의병장이라는 자리를 맡으시구 동의회 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전투에 참여를 합니다.
허일후: 사실 우리가 안중근 의사하면 떠오르는게 뭐 있어요?
한보름: 이토 히로부미~
허일후: 그렇죠, 이등박문을 하얼빈 역에서 저격했던게~ 그것도 최재형 선생님과 연관이 있는거예요?
정성규: 엄청난 연관이 있죠. 안중근 의사에게 총을 누가 주었을까요?
허일후: 어머~?
정성규: 바로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을 저격했던 그 권총을 제공해 주신 분이 최재형 선생님이세요.
안응칠(안중근 의사) 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누군가를 사살할 준비를 한다고 했다.
우리 집 벽에 사람 셋을 그려놓고
권총 사격훈련을 하고 있었다. -------------딸 최 올가가 기억하는 안중근-----------
정성규: 사실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의거가 있던 1909년에 대동공보사에 들르게 돼요. 이때부터 거사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걸로 보이고요. 최재형 선생님은 자신의 집을 안중근 의사의 사격연습장소로 제공합니다. 사격훈련을 도와준 건 물론이고 거사에 쓰일 권총도 지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등박문이 하얼빈역에 도착하는 그 기차 시간을 알려준거 역시 최재형 선생님이었습니다. 그리고 처단이 이루어진 다음에 안중근 의사가 중국에서 재판을 받지 않고 러시아에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변호사까지 선임을 해두었는데 그 계획은 안타깝게도 실패로 돌아갑니다. 안중근 의사가 일제에 의해 사형을 당한 후에는 그 미안함을 갚기 위해 안의사의 가족을 돌봐주었다고 합니다.
한보름: 저희는 실제로 안중근 선생님은 다 알지만 최재형 선생님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잖아요.
허일후: 저도 계속 <집으로> 프로그램을 하면서 느낀 게 물론 젊음과 몸을 바친 분들도 기억하고 존경해야 하지만 그 뒤에서 누군가 도우셨다는 거거든요.
정성규: 혼자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으니까 뒤에 분명한 조력자들이 있었는데 그런 분들이 지금 까지 조명받지 못해서 이번에라도 우리가 많이 알렸으면 좋겠습니다.
손현주: 우리는 알지 못했던 안중근 의사의 진정한 조력자, 최재형 선생에 대한 퍼즐을 맞추어가는 연해주팀입니다.
카자흐스탄 알마티, 최파벨/최재형의 손자, 맏형들도 임무수행에 나섰습니다. 저희는 사절단의 손현주 구요, 최파벨입니다. 최재형 선생님의 손자입니다. 들어오세요.
꼭 만나뵙고 싶은 분이 사는 곳, 소박함과 한국인의 후손임을 느끼게 하는 공간입니다.
고창석: 최재형 선생님은 제가 존경하는 독립운동가 중의 한분입니다. 그래서 제가 후손을 만난다고 해서 선물을 준비해 왔습니다. 최재형 선생님에 대해서 다시 제조명되고 있거든요. 이것은 최재형 선생님에 대해서 다시 발간된 독립운동가 최재형 책입니다. 그리고 뮤지컬 최재형 선생님의 일대기가 공연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팜플렛이랑 선생님의 별명이 페치카 라서 선생님에 대한 공연이 한국에서 만들어졌습니다. 페-치-카-
손현주: 언제 이런 선물을 준비하셨어요.
고창석: 아직 한가지 더 있습니다. 이 공연을 사실은 한국까지 오셔서 보시기가 힘들 것 같아서 제가 공연을 USB에 담아 왔습니다. 두고 두고 보시면 되는데 지금 당장 보시겠습니까?
최파벨: 그럽시다.
USB 동영상 상영--------------,말이 통하지 않지만 할아버지의 일대기를 바라보는 손자는 어떤 기분일까. 가슴이 벅차 올랐습니다.
최파벨: 정말 잘 만들었습니다. 전부 다 끝까지 봤으면 좋겠지요. 저에게도 몇가지 사진이 있는데 한번 보시겠습니까?
고창석: 네, 네
선생의 삶에 한발 더 다가갈 시간입니다.
최파벨: 저의 가계도입니다. 할아버님(최재형)한테는 11명의 자손이 있었습니다.
최재형 가계도--------------------------최재형-------------------
표토르=베라=나제즈다=류보프=파벨=소피아=올가=발렌틴=류드밀라=엘리자베타=비켄티
최재형 선생은 7남4녀, 모두 11명의 자녀를 둔 아버지였습니다.
최파벨: 저희 가족한테 남아있는 유일한 할아버지 사진입니다. 둘째 큰 아버지입니다. 그분의 이름이 파벨이어서 저도 따라서 파벨이라고 지었습니다. 이건 전쟁 때 둘째 큰 아버지께서 받으신 사형선고통지서입나다. 둘째 아들 최성학(파벨 페트로비치)-1930년대 스탈린의 대탄압 시 처형
넷째딸 류보븨 페트로브나-스탈린 대탄압 시 총살
셋째 아들 발렌찐 페트로비치-카자흐스탄 공화국 농업부에서 근무중 탄압
최재형의 사위 네명 총살
최재형 선생이 일제의 총탄에 쓰러진 뒤 남은 가족들의 삶도 쉽지 않았습니다. 스탈린의 대탄압과 강제이주의 비극에 상당수의 후손은 목숨을 잃었습니다.
최파벨: 남아있는 유품입니다. 컵(1896), 이 컵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가져온 컵입니다. 할아버지가 두번째 부인이신 엘레나 할머니를 위해 준비한 선물입니다. 지금 보이는 여행가방과 안에 담긴 물건은 오랜 시간 기차를 타고 다니시면서 할아버지가 지니셨던 유품입니다. 최재형의 여행가방과 유품들, 그 아픔 속에서도 후손들이 꿋꿋하게 지켜온 선생의 유품, 그것을 통해 선생의 삶을 돌이켜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 일일까요.
최파벨: 방금 보여드렸던 유품들은 발렌틴 형님이 최재형 박물관으로 보냈습니다.
손현주: 대단한 일을 하셨네~
최파벨: 그 박물관은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에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보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손현주: 혹시 최재형 박물관에 가보신 적이 있습니까?
최파벨: 못가봤습니다. 꼭 가보고 싶습니다.
생업에 쫓기며 살아온 시간, 할아버지의 업적을 알지만 단 한번도 우수리스크를 가보지 못했다는 파벨씨,
손현주: 사실 저희팀과 다른 한 팀이 더 있거든요. 블라디보스토크 팀이 전송해온 사진입니다. 우수리스크에서 사절단이 보내준 최재형 박물관 사진들, 할아버지가 쓰시던 난로 연해주에 남긴 흔적들, 유품인 시계까지, 몇장의 사진들로 그간의 아쉬움을 달래 봅니다. (최재형 가옥의 원형을 보존하기 위해 유리창문의 파손된 부분을 그대로 두었음),
손현주: 최재형 선생의 손자분이시지만 후손이고 만나뵙지 못했을텐데 몇살 때 누구를 통해서 알게 되었는지요?
최파벨: 1995~1996년까지 아버님은 아무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그때쯤 할아버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기 시작하셨습니다. 구소련 시절 한국어로 된 책을 출판하기도 힘들었고 한국어 사용을 금지했습니다. 그래서 아버님은 한국어로 잘 대화하지 않으셨어요. 시간이 지난 후 할아버지 시계에 적혀 있는 글을 본 적이 있는데 주변 사람들이 할아버지를 얼마나 존경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시계에는 ‘최 표트르(최재형)께, 항상 감사합니다 존경하는 연해주 주민’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할아버지를 알게 된 손자, 이 책 한권이 많은 것을 일깨워주었답니다. 바로 최재형 선생의 딸 올가 페트로브나의 회고록입니다.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가 이 책 안에 담겨 있었다는데요.
손현주: 책을 읽어보시고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이 어떤 부분이었는지요?
최파벨: 전체가 다 매우 흥미로운 서적입니다. 연해주에서는 도로를 건설했고, 학교까지 설립했습니다. 독립운동 후원도 하셨고요. 그리고 일본군이 진압을 시작하자 가족이 해를 입지 않도록 일본군을 직접 찾아가셨습니다.
1920년 4월, 일제는 연해주에 거주하는 고려인들에게 무자비한 만행을 저지릅니다. 무고한 한인들이 목숨을 잃고만 4월 참변,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내가 도망가면 너희 모두 일본군에 끌려가
고문을 당할 것이다.
나는 살아갈 날이 조금 남았으니 죽어도 좋다
너희는 더 살아야 한다”----------딸 최 올가의 회상--------------
러시아 독립운동의 대부로 늘 일제의 감시 속에서 살았던 최재형 선생, 가족의 안위를 위해 도주를 포기하고 기꺼이 마지막 운명을 받아들입니다. 러시아의 추위보다 나라를 잃은 나의 심장이 더 차갑다 라며 조국의 현실을 통탄했던 애국자, 시베리아의 별은 그렇게 지고 맙니다. 최재형의 순국장소를 찾아가 보는 연해주팀,
정성규: 여기가 최재형 선생님을 총살했던 장소로 추정이 됩니다.
한보름: 여기 어딘가에 추정된 장소인 거죠~
정성규: 맞습니다.
왕바실재 언덕-독립운동가 최재형이 일본군에게 끌려가 사형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
허일후: 바람도 많이 불고 진짜 황량하네~ 그런데 언덕이 공터네,
한보름: 정말 허허벌판이네요.
정성규: 여기가 고려인들 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높은 언덕이구요. 이곳에서 많은 한인들과 독립운동가들이 총살 당한 걸로 자료가 있습니다. 그 중에 최재형 선생도 계시지않나 저희가 추정을 하는 거죠. 아무 것도 남이 있지 않은 황량한 언덕,
-----------------------------------------------------------------------------------------------
고창석: 혹시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면 꼭 해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지?
최파벨: 힘든 질문이네요. 무슨 말씀을 드릴 수 있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차마 전하지 못하는 진심, 연해주 항일운동의 심장인 최재형 선생님께 감사인사를 뒤늦게나마 드립니다. 그리고 그의 후손 최 파벨님께 한국으로 초청하는 초청장을 드리겠습니다. 꼭 집으로 와 주십시오. 잊혀진 땅에서 잊혀진 이름, 그 이름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백년만의 귀향, 집으로. 끝. (MBC 임정100주년 기념특집 백년만의 귀향 집으로 2회, “잊혀진 땅, 잊혀진 이름”에서 정리).
① 100년전 경술국치로 주러시아 공사였던 이범진이 자결 순국한 건 배워서 알고 있지만 이동휘와 최재형에 대해서는 생소하다. 특히 연해주에서 최재형은 독립운동에 물심양면으로 동포들을 도운 독립운동가이다.
②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을 한반도에서는 불가능하니까 독립운동가들이 주로 중국 상해, 프랑스 파리, 러시아(연해주), 그리고 미주 지역에서 활동을 하였다. 이번 다큐에서는 러시아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을 알아본다. 특히 최재형 선생님은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한 최근에 새롭게 조명된 탁월한 독립운동가이다. 연해주 우수리스크에 최재형 박물관이 개설되었다.
③ 1910년1월13일 경술국치후 주러시아 공사였던 이범진이 자결로써 순국했다는 것과 그의 아들이위종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과 참석해 많은 언론인들 앞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한 유명한 연설을 했다는 건 알고 있다. 그런데, 이범진이 연해주 최재형이 동의회를 만들었을 때 전재산, 1만 루블 현재가치로 약80억원을 기부, 그의 아들 이위종이 이 돈을 최재형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항일의병단체 동의회는 1908년 설립,
④ 1937년 스탈린은 연해주 17만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시켰다. 3일안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기차를 타지않으면 간첩으로 인정 사살하겠다고 했다. 이때 한인들은 자신의 삶의 터전을 버리고 가축수송열차에 태워져 30일 넘게 열차를 타고 갔다고 한다.
⑤ 연해주에는 대한국민의회에 몸 담았던, 문창범, 이동휘, 최재형 등이 활동하고 있었고 1919년 4월 11일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인데, 연해주에서는 그거 보다 한 달 전인 3월 17일에 연해주에서 임시정부를 최초로 선포했다고 함,
⑥ 최재형은 안중근에게 자신의 집을 사격연습장소로 제공, 사격훈련을 도와준 건 물론이고 거사에 쓰일 권총도 지원, 이등박문이 하얼빈역에 도착하는 시간을 알려준다. 처단이 이루어진 다음에 안중근 의사가 중국에서 재판을 받지 않고 러시아에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변호사까지 선임을 해두었는데 그 계획은 실패, 안중근 의사가 사형 당한 후 그 미안함을 갚기 위해 안의사의 가족을 돌봐주었다. 최재형의 숨은 지원이 많이 알려지고 있다.
⑦ 1920년 4월, 일제는 연해주에 거주하는 고려인들에게 무자비한 만행을 저질렀다. 무고한 한인들이 목숨을 잃고만 4월 참변, 최재형이 딸 올가에게, “내가 도망가면 너희 모두 일본군에 끌려가 고문을 당할 것이다. 나는 살아갈 날이 조금 남았으니 죽어도 좋다. 너희는 더 살아야 한다”------딸 최 올가의 회상------러시아 독립운동의 대부로 늘 일제의 감시 속에서 살았던 최재형 선생, 가족의 안위를 위해 도주를 포기하고 기꺼이 마지막 운명을 받아들었다. 러시아의 추위보다 나라를 잃은 나의 심장이 더 차갑다 라며 조국의 현실을 통탄했던 애국자, 시베리아의 별은 그렇게 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