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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와 감사 / 왕하 5:8-14, 눅 17:11-19
세계에서 담배 제일 많이 피우는 나라는 우리나라. 15세 이상 흡연율 68.2%, 지난 해 중학생 3.7%, 고교생 남 30.2% 여 4.7%, 미국 의학계 보고에 의하면 하루 1갑 이상 피면 나이들어 눈이 멀어진다(실명). 1년에 30만명 이상 실명.
어느 날 곤히 자는 사자의 등 위에 작은 생쥐가 올라가서 장난을 치다가 그만 사자에게 잡혀버렸다. 놀라 깨어난 사자가 쥐에게 야단을 쳤다. 생쥐는 온몸을 떨면서 한번만 용서해 주면 은혜를 꼭 갚겠다고 사자에게 빌었다. 그래서 사자는 쥐같이 작은 짐승이 무슨 은혜를 갚을 수가 있겠느냐고 비웃으면서 그 쥐를 놓아 주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쥐는 산길에 올러 나왔다가 사자의 울음소리를 듣고 놀라 그 우는 장소로 달려가 보았다. 전날의 그 사자가 사냥꾼이 쳐놓은 밧줄에 걸려 꼼짝하지 못하고 울부짓고 있었다. 사자가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밧줄은 더욱 죄어들었다. 쥐는 사자를 안심시키고, 날카로운 이빨로 밧줄을 끊기 시작했다. 드디어 밧줄이 끊어지고 사자는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그리하여 작고 힘없는 짐승이라고 얕잡아 보았던 사자는 눈물을 흘리며 그 생쥐에게 감사했다고 한다. 이것은 이솝의 우화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이처럼 동물세계에서는 실제로 은혜에 보답하는 실례들이 많다. 그래서 흔히 은혜를 모르는 사람을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잘 아는 숙어 중에 반포보은(反哺報恩)이라는 말이 있다. 까마귀 새끼가 자란 뒤에 늙은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어 보답한다는 데서 생긴 말이다. 참으로 흐뭇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 사회에서는 이런 보은의 미담들이 점점 사라지는 것 같다. 우리가 받은 누세홍은(累世鴻恩, 여러 대 동안 입은 커다란 은혜)에 대해 어떻게 보답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간성이나 인격을 가늠할 수 있고, 우리 기독교에서는 그 사람의 신앙 상태를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시 116:12절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이것은 어느 시인의 고백이다. 이처럼 우리는 많은 은혜를 받고 산다. 그러나 그 은혜에 대한 반응이 반드시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오늘 분몬에 보면 나병으로 고생하던 병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고침을 받는다. 그러나 받은 그 놀라운 은혜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는 너무나 다르다. 물론 그중 한 사람은 깍듯이 그 받은 바 은혜에 대한 감사를 표했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전혀 그 은혜에 대해서 무관심했다. 전자는 열의 하나, 곧 10%도 안되는 극소수였고, 후자는 90% 곧 대부분의 인간이 그 그룹에 속한다고 본문은 말해 주고 있다. 은혜를 모르거나 무시하는 한쪽 그룹과 은혜를 알고 감사라는 다른 쪽, 이렇게 두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좀더 구체적으로 따지고 보면, 우리 인간들은 대략 다음의 네가지로 은혜에 대해 반응을 보이고 있다.
1. 은혜를 악으로 갚는 사람이 있다.
은혜도 모르고 감사할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지만, 그중에는 더러는 자기가 받은 은혜에 대하여 욕되게 또는 악으로 갚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행위를 배은망덕(背恩忘德), 또는 은반위구(恩反爲仇)라고 말한다. 이런 사람들은 은혜를 전혀 모를 뿐만 아니라 도리어 손해를 끼치는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배은망덕한 생활을 하는 것에 대하여 선지자들을 통해 많이 책망하고 있다, 핏덩어리 아기를 주어다가 정성을 다해 길러 놓았더니 창녀로 변해 집을 뛰쳐나갔다는 비유(겔 16장)로 말씀하시기도 하며, 비참한 생활을 하는 창녀 고멜을 돈주고 아내로 맞아히여 살 길을 열어 주었는데도 계속 옛생활을 못잊어 도망가는 그 꼴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라고 호세아서에서 비유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구약 전반은 모두 이런 가슴 아픈 배은망덕에 대한 기록들이요, 책망들이다. 신약에서는 이런 못된 사람으로 가룟 유다를 생각할 수 있다. 그는 예수님의 신임을 받아 가장 중요한 회계의 직분을 맡았다. 그리고 주님은 그를 훌륭한 제자로 만들려고 많은 노력을 쏟으며 기회를 주셨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스승을 은 30냥에 팔아버리고 만다. 참으로 슬픈 장면이다. 그래서 서양속담에는 ‘키스를 하거든 이빨이 몇 개 남았는지 잘 세어보라’는 말까지 생겼다. 배신을 조심하라는 말이다.
일반 역사에서 본다면 유명한 로마의 황제 율리우스 시저의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그는 3월 14일 저녁 많은 친구들을 청해서 연회를 베풀고 있었다. 거기서 친구들이 어떻게 죽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이냐고 물었다. 그는 ‘급사하는 것이 아마 제일 좋은 죽음이겠지’라고 대답했다. 그 다음날 그는 결국 브루터스라는 자객의 칼에 찔려 갑작스러운 죽임을 당했다. 그 자객 브루터스는 황제가 친아들처럼 신임하고 사랑하던 신하였다. 너무나 어이없는 죽임을 당하며 시저는 마지막으로 원망스러운 눈길로 ‘네가 내 아들 브루터스가 아니냐?’ 하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따금씩 신문에서 자기의 친부모를 거리로 내쫓거나, 심지어는 돈 문제로 부모를 죽이는 금찍스러운 패륜아에 대한 기사를 읽는다. 유학간 학생이 교통사고를 보고 도와주니 어느날 재판을 받으러 나오라 해서 알아보니 사건을 뒤집어 씌운 것이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참을 수 없는 일은 이처럼 선을 악으로 갚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은혜를 모르는 자식을 두는 것은 독사에 물리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다’라고 영국의 문호 셰익스피어가 말했다. 우리는 이처럼 은혜를 악으로 갚는 짐승보다도 못한 인간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될 것이다.
2. 은혜를 모르고 사는 사람이 있다.
비록 은혜를 악으로 갚는 가장 악한 사람은 아니더라도, 또는 자기를 기른 부모를 헤치는 패륜아는 아니더라도 자기가 받은 은헤에 전혀 무관심하거나 감사할 줄 모르며 사는 사람들이 의외로 절대다수라는 데 문제가 있다. 오늘 본문에 보면 10명의 나병환자들이 고침을 받았으나 그 중 한명만이 돌아와 감사를 표했다. 나병은 보통 감기와 같은 병이 아니다. 그 당시로서는 최악의 병이었다. 불치의 병으로 천형의 병이요 죄값으로 받는 저주로 인정되던 병이다. 그 병에 일단 걸리면 가정과 사회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어 살아야만 했다. ‘나는 부정합니다’를 연거푸 외침으로 다른 사람의 접근을 막아야 하는 병이었다. 가정에서나 마을에서 쫓김을 받아 외롭게 토굴이나 산속 또는 일정한 곳에 감금되어 살아야만 하는 병자이다. 그들은 가장 고독한 사람들이었다. 오늘의 AIDS 환자들처럼 죽을 날을 불안 속에 기다려야 하는 병이다. 손발이 다 떨어지고 신경이 다 죽어 불을 만져도 뜨거운 것을 모르고 전신이 쪼그라들어 결국 죽어야 되는 무서운 질병이었다. 그런 무서운 병을 예수님은 말씀 한마디로 고쳐주신 것이다. 자기들의 운명이 완전히 뒤바뀌어진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놀라운 혜택을 받았으면서도 감사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들은 아마 지옥 같은 삶을 청산하고 다시 가정과 사회로 돌아가서 누릴 그 희망찬 삶에 대한 생각으로 꽉 차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실수는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신 분을 까맣게 잊었다는데 있었다. 그래서 주님은 감사하러 온 한사람에게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라고 탄식하며 물으셨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일은, 사형선고를 받은 사형수가 죽을 날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불안 속에 떨며 지내던 중 대통령이나 높은 사람이 무기로 감형 선고를 하거나 무죄 선언을 해서 석방되는 일과 같은 일이다. 그런데 그들은 고마음을 표하지도 않은채 제 갈길을 가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나병환자 10명 중 9명이나 이와 같이 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깊은 교훈을 던져주고 있다.
세상에서 쉬운 일 갗으면서도 어려운 것 중의 하나가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일이다. 90% 곧 대다수가 이 부류에 속한다는 것이다. 제2차 대전 중 많은 공헌을 남긴 미국의 유명한 패턴 장군은 미3군을 총지휘했다. 대전이 끝니고 3군 산하에 있던 졸병 하나가 일선에서 후방으로 전송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날 그 졸병으로부터 패턴 사령관에게 편지가 왔다. 장군 휘하에서 근무한 것이 영광스럽다면서 우리를 잘 지켜주시고 보살펴 주신 장군의 은혜에 고마워 감사의 편지를 쓴다는 것이었다. 그 편지를 받아든 패턴 장군은 ‘내가 35년간 애써 군생활을 하며 휘하 장병들을 위해 일하는 동안 수백만 명이 내 손을 거쳐갓지만 오직 이 한 병사만이 나에게 감사의 편지를 썼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수백만 명 중 단 하나라도 이처럼 은혜를 생각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유감스럽게도 절대다수의 인간들이 이 부류에 속해 있다.
3. 은혜를 세어보며 감사를 표하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상대적인 입장에서 감사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남과 나를 비교하면서, 또는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의 형편을 대조하면서,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세어보면서 감사를 하는 사람들이다. 감사하는 사람들 중에 대부분이 여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우리가 곰곰이 형편을 비교해 보면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다. 개천에서 용이 났다는 말이 있다. 지금 그와 같은 고백을 할 사람들이 꽤 될 줄 안다. 우선 우리의 가정이나 주변을 살펴보자. 우리들의 부모님, 남편이나 아내, 친구들, 그리고 교회와 직장, 일터 등을 생각해 보면 그 모두가 다 주님의 크신 축복이 아니겠나? 그래서 오트만은 ‘주님께서 내려주신 복을 세어보아라.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라고 찬송시에서 말하고 있다. 시장이나 지하철 등에 걷지 못하는 사람들이 쭈그리고 다리를 질질 끌면서 물건을 사달라거나 적선을 하라는 것을 본다. 이 사람들을 보면 ‘나는 행복한 사람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지 않나? 그런저런 일들을 생각하면 우리는 머리를 숙여 하나님이 분에 넘치도록 내려주신 은혜를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본문에 소개된 한명의 사마리아인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의 지나온 과거를 회상해 볼 때 나병이 나은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축복이었다. 불치의, 수치스러운 병이 단숨에 깨끗해졌다는 것은 더 바랄 수 없는 은혜였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아홉은 축복받은 지금의 형편을 지나온 과거와 비교할 줄 몰랐다. 우리는 감사할 줄 모르는 그 아홉의 나병환자 같은 사람들을 짐승만도 못하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라고 힐책했다. 어느 농부가 소에게 먹이를 주는데 소가 너무 좋아하며 자기의 손을 핥는다. 그 순간 그 농부는 앞의 성서말씀인 사 1:3절이 생각나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우리는 짐승만도 못한 생활을 할 때가 많다. 바쁜 일과 중에서도 때때로 시간을 내어 하늘을 우러러 보며 받은바 은혜와 축복을 세어볼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해 질 수 있는 사람이다.
4. 감사할 조건이 전혀 없는데도 감사하는 사람이 있다.
본문에서 사마리아 사람은 나병이 고쳐졌는다는데 대하여 감사했다. 그러나 이런 경우와 달리 나병이 고침을 받지 못한 경우에도 감사하는 일이 있다. 이런 감사를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감사라고 말한다. 이런 감사야말로 믿지 않는 세상에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감사이다. 이것은 가장 아름다운 감사이다. 사도 바울은 실라와 더불어 빌립보에서 노방 전도를 하다가 전도했다는 죄로 감옥에 갇혀 무수한 매를 맞는다. 억울한 일이었다. 그러나 피투성이가 되어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부른다. 바로 그렇게 무조건 하나님께 감사할 때 하늘 보좌가 흔들리고 땅이 움직이면서 옥문이 활짝 열리게 되었다고 성서는 말한다. 행 16장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그와 같은 견딜 수 없는 아픔 속에서도 하나님이 옆에 계심을 체험했을 때 그들은 감사할 수 있었다.
조지 매티슨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유명한 맹인 설교가였다. 그는 항상 시간이 있을 때마다 ‘주님, 나는 나의 가시(맹인)에 대하여 감사해 본 일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내게 준 장미꽃에 대하여는 수천번 감사를 드렸습니다. 나는 내 십자가 때문에 장차 주님이 내게 주실 주님의 보상을 늘 생각했습니다. 나의 가시의 가치를 가르쳐 주시고, 내가 고통스러운 험한 길을 다 간 후 당신을 만날 수 있음을 늘 명심하게 도와주시고, 또 내 눈물들을 무지개로 변화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가시의 아픔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이 되어야 한다.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했다. 무슨 일을 만나도 감사하라는 뜻이다. 이것은 차원 높은 신앙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만 가능하다.
이런 무조적적인 가장 어려운 감사를 우리는 구약의 욥에게서 볼 수 있다. 그는 동방에서 제일가는 거부였다. 수천 마리 단위의 가축들에, 열남매의 자녀들이 있었고, 수많은 노비들을 가느리며 살고 있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갑자기 그 많던 그의 짐승이 다 죽음과 동시에 그토록 애써 모아놓은 전 재산이 다 날아가 없어지고 자녀들마저 몰살당하는 기막힌 비운을 만난다. 그때 믿음이 적었던 욥의 아내는 복만 주시는 하나님인줄 알았는데 화를 받게 된 데 대해 참지 못하고 하나님을 저주하고 욥에게 죽으라는 극언을 한다. 그때 욥은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2:10)라고 하며 하나님을 절대로 원망하지 않았다. 감사한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감사한 마음으로 살게 될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축복 또한 엄청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9명의 유대인 나병환자들은 육신의 병만 고침받았을 뿐이다. 그러나 감사와 감격으로 주님 발 아래 엎드렸던 그 한명의 사마리아 사람은 육신의 병은 물론 영혼이 구원받고 주님을 모시고 편안한 여생을 사는 큰 축복을 받게 되었다.
존 헨리 조엣은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은 예방주사와 같고, 항생제와 같으며 방부제와도 같다’라고 말했다. 옳다. 이것은 아마 가장 심오한 발견이라고 생각한다. 감사하는 마음이야말로 우리를 가장 불행하게 만드는 불평과 불만의 못된 병균의 침범을 미연에 방지하게 하고 배은망덕으로 들끓는 악한 마음의 독을 제거해 주고 건강한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 그런 실례가 있다. 한 의사에게 어떤 환자가 찾아왔다. 그는 삶에 아무런 흥미가 없었다. 기운이 다 빠진 비관적인 환자였다. 자세히 진단을 해봤으나 육체적으로는 아무런 이상이 없는 정상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환자와 대화를 통해 이 현명한 의사는 문제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누구에게도 감사할 줄 오르며 매사애 불평만 하고 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이 의사는 다음과 같은 처방을 냐려주었다. ‘오는 6주 동안 당신에게 조금이나마 친절을 보여 주고 도와준 모든 사람들에게 반드시 웃으면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하십시오.’ 그랫더니 그 환자는 ‘그러나 아무도 나에게 지금까지 도움을 주거나 친절을 베풀어 주지 않았는걸요’라고 대답했다. 그때 그 의사는 성서말씀을 인용하면서 ‘찾으면 반드시 친절을 베풀어 주는 사람을 만나게 될 거요’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6주가 지난 뒤 그 환자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다시 의사를 찾아왔다. 그런데 그는 더 명랑하고 친절하고 생의 의욕이 왕성하며 새로운 삶의 기쁨으로 충만해 있었다.
이처럼 감사의 생각으로 가득한 사람은 놀라운 신앙적인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시고 산다는 이 사실 한가지만 가지고도 얼마든지 감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나는 위에 열거한 네가지 종류의 사람들 중 어느 부류에 속해 있을까?’ 한번 깊이 생각해 보라. 감사할 조건이 전혀 없는데도 감사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1996-0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