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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실천자가 되자 / 사 50:4-11, 약 2:14-26
어느 여고 선생님이 자기반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으니 사춘기를 지나는 여학생들이 자기 나름대로 사랑에 대한 느낌, 사랑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사랑은 아름다운 것, 고귀한 것, 달콤한 것, 괴로운 것, 뜨거운 것’이라며 나름대로 사랑에 대한 감상적인 정의를 내렸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선생님은 그래도 한 생을 살아온 분이기에, ‘사랑은 받을 때보다 줄 때 느끼는 감정, 사랑은 말이 아니라 사랑에 빠질 때 알 수 있는 것’이러고 말했다 한다. 학생들은 정신적이고 감상적인 측면에서 사랑을 정의한 반면, 선생님은 생활적이고 실제적으로 부딪치는 환경 속에서 정의했던 것이다.
우리가 ‘믿음’하면 어떤 이상적인 세계, 정신적인 세계, 미래적인 세계, 또는 감상적인 세계, 곧 한 차원 다른 어떤 세계 속에서 믿음을 정의해 보려고 한다. 그런데 한 교회를 담임하는 목회자의 입장에 있던 야고보는 믿음은 그렇게 추상적인 것이 아니고 생활적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다. 바로 그러한 내용이 야고보서에 기록되어져 있다. 특별히 약 2장은 믿음의 실제적인 내용, 믿음의 실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약 2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13절의 내용은 인간적인 편견과 차별을 없애야 한다고 가르친다. 14-26절의 내용은 행함을 통해서 믿음을 온전하게 하라는 실천이 있는 믿음을 강조하고 있다. 믿음의 실천을 강조하기 직전에 인간적인 편견, 인간적인 차별을 극복해야 할 것을 전제하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 이래로 인간이 가진 가장 큰 편견과 차별은 ‘가난한 자’를 두고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이 있다. 가난하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고통을 당하며 땀을 흘리고 있는가? 그것까지는 좋다. 눈물을 흘리고, 고통을 당하고, 땀을 흘리는 것은 결딜 수 있지만, 참기 어려운 것은 내가 가난하기 때문에 남들로부터 차별을 당하고, 멸시를 당하는 것, 냉대를 당하는 것은 정말 참기 어려운 고통일 것이다. 세상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인 그의 몸된 교회에서까지 그 사람이 얼마만큼 소유하고 있는가 때문에 자신의 인격과 자신의 신앙과 자신의 인생을 평가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볼 때 우리의 삶이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른다. 이 점을 극복하기 전에는 바른 믿음의 실천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편견을 극복하라고 권고를 하고 있다.
2:1-4절에 이렇게 반문하고 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이것은 2천년 전 예루살렘교회의 실상만이 아닌 것이다. 오늘 우리들의 실상은 이것보다 더 심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가 성서를보면 볼수록 느끼는 것이 있다. 하나님은 우쭐대는 부자보다도 가난한 자의 곁에서 그를 위로해 주시고, 그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시고 그를 통하여 더 큰 역사를 펼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강하고 부유한 애굽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그 애굽 휘하에서 고통을 당하며 억압을 받으며 가난한 노예생활을 하고 있던 그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켜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자기 독생자 외아들을 이 땅에 보내실 때 나사렛의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게 했다. 더욱이 베들레헴 초라한 말구유에 태어나게 하셔서 일생동안 가난하게 생활하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한번은 자신의 신상에 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여우도 굴리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신 첫번째 설교는 가난한 자를 향한 메시지였다. 눅 4:18절상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겠다고 말씀하신다. 이러한 측면을 바라볼 때 예수님은 일생을 가난하게 사시면서 가난한 자의 곁에서 가난한 자의 목자가 되어주셨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그렇다. 열두 제자들 중에서 단 한사람, 세리 마태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가난한 어부, 서민들이었다. 교회사를 바라보면 볼수록 교회사에 뚜렷한 역사를 남긴 분들은 가난한 성직자들, 가난한 성도들, 가난한 교수들이었던 사실을 볼 수 있다. 마틴 루터도 가난한 광부의 아들이었고, 칼빈 역시 파리대학의 고학생이었다. 이처럼 스스로 부유하다고 우쭐대는 사람보다는 오히려 환경이 어렵고 가난한 가운데 겸손을 찾고, 그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그 삶을 통해서 역사의 주인이 되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역사를 보면, 부유한 자들이 역사의 현상유지에 매달려 있을 때, 오히려 가난한 자들은 역사를 변화시키고 새롭게 창조하는 힘이 되어왔음을 볼 수 있다. 가난한 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더 크게 나타내셨다.
본문 2:5절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이처럼 인간의 눈길로는 가난한 자를 천하게 여기거나, 냉대하거나, 차별하거나, 어떤 편견을 가지고 바라보지만, 하나님은 인간이 얼마만큼 소유하고 있는가는 보시고 그 사람을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믿음과 인격과 그 사람의 삶을 보고 자기 능력의 사람으로 사용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인 교회 안에서는 물질소유의 많고 적음에 따라서 인간을 서로 구별짓는 일이 없어야 한다. 적어도 믿은의 공동체로 모 우리 안에서 이런 관계를 극복할 수 있을 때 믿음의 바른 실천자가 되는 것이다.
두 번째 부분인 14-26절의 말씀에서 믿음의 바른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곧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고 가르쳐 준다. 사실 행위는 나무의 열매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진리를 뿌리에 비교한다면, 믿음은 나무 줄기에 비교할 수 있고, 행함은 그 나무가 맺는 열매에 비교할 수 있다. 그 열매를 보고 그 사람이 진리에서 있는지, 믿음의 줄기를 세우고 있는지를 판단할 수 있다. 그 열매를 보고 나무가 좋은 나무인지 나쁜 나무인지 품질을 구분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나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고 내 자신의 믿음을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행동은 믿음의 열매이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세례를 베풀면서 말하기를 ‘세례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했다. 회개를 했으면 거기에 합당한 생활의 열매를 맺으라고 바른 행위를 강조하고 있다. 세리였던 삭개오가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다. 그가 정말 회개했는지 정말 예수를 믿었는지 무엇을 보고 알 수 있겠나? 그것은 바로 그의 행위를 보고 알 수 있는 것이다. 삭개오는 예수님께 말하기를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라고 고백했다. 이 행동으로 미루어 볼 때 삭개오는 회개한 사람이었다. 과연 삭개오는 믿음의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을 가리켜 믿음의 조상이라고 한다. 아브라함을 바라볼 때마다 그의 전적인 순종과 믿음과 헌신을 엿볼 수 있다. 그러면 무엇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을만큼 아브라함의 생을 돋보이게 하느냐 말이다. 거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갈대아 우르 지방에 있을 때의 일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렀을 때 아브라함은 두말없이 그곳을 떠나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머나먼 가나안 땅으로 이주해 갔다. 순종하며 이사가는 그 모습을 보고 아브라함을 믿는 사람인 것을 분별할 수 있었다. 또한 100세에 얻은 외아들을 모리아산에서 제물로 바쳤다. 이 구체적인 행동도을 볼 때 아브라함의 전적인 믿음과 전적인 헌신을 볼 수 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바라본다.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고 과연 저 사람이 크리스천이구나! 참 믿음이냐 거짓 믿음이냐, 바른 믿음이냐 그릇된 믿음이냐를 분별하는 것이다. 행위는 곧 믿음의 열매라는 사실이다. 그러면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구체적인 행위의 열매를 맺을 때 믿음이 바로 서 있다는 것을 나타낼 수 있겠나? 저는 성서를 볼 때 최소한 세가지를 찾아볼 수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이러한 행동을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과연 하나님의 백성의 믿음 속애 사는 사람이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1. 솔직하고 정직한 행동이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바라볼 때 ‘저 사람은 예수를 믿기 때문에 정직한 사람’임을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 간혹 성서를 보면 우리를 당황하게 하는 내용들을 접하게 된다. 그토록 사랑의 주님께서 축복해 주시고, 격려해 주시고, 위로해 주시는 주님께서 인정사정없이 욕설을 퍼붓는 장면이 나온다. 마 23장을 가리켜서 ‘욕설장’이라고 한다. 예수님의 욕설을 보면 엄청난 것들이 있다. ‘화 있을진저’ 곧 저주를 부르짖은 욕설이 9번이나 나오고, ‘회칠한 무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라는 말들이 많이 나온다. 그런데 누구에게 이런 욕설을 하고 있는가? 그토록 사랑과 축복과 위로와 희망이 되신 주님께서 유독 한 종류의 사람에 대해서는 온갖 욕설을 다 퍼붓고 있다. 그것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라고 말한다. 또한 종교인들이다. 정직하지 못한 종교인들을 가리켜서 이렇게 욕설을 퍼부은 것이다. 2천년 전 정직하지 못한 종교인들을 향해서 인정사정없이 꾸짖었던 그 예수님의 음성이 오늘 우리들의 가슴 속에도 들려오고 있다.
우리가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면서 얼마나 정직한가? 교회 안에서는 다 정직하다. 그러나 교회 문을 벗어났을 때 우리의 실제 삶이 얼마만큼 진실되고, 얼마만큼 참되고, 얼마만큼 정직하게 살아가고 있는가? 정직해야 한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정직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 ‘독사의 자식들아, 뱀들아! 하는 욕설이 우리의 귓전에 들려올 것이다.
2. 정의의 감각이다.
이는 정의의 울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이 가신 곳은 항상 사랑과 축복이 이루어졌다. 어린아이를 안아주시고, 병든 자를 고쳐주시고, 심지어는 죽은 자를 살려주셨다. 그런데 단 한곳, 예수님께서 채직을 들고 휘두른 폭력이 나타난다. 요 2장에 보면 예수님게서 채찍을 들고 주변에 있는 사람이나 물건이나 짐승들을 내리친 장면이 나온다. 왜 예수님이 폭력을 휘둘렀을까 하고 우리는 항변할 수 있을 것이다. 저는 이렇게 해석하고 싶다. 마땅히 깨끗해야 할 자리, 성스러워야 할 그 예루살렘 성전이 장사꾼들의 이해관계에 얽혀 더렵혀졌을 때에 예수님은 정의의 울분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채찍을 손에 드신 것이다. 깨끗해야 할 자리가 더러워졌을 때 채찍을 휘두르면서 내쫓으신 것이다. 그 장면을 볼 때 예수님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불의에 대한 정의의 울분’이라고 볼 수 있다. ‘불의에 대한 정의의 울분’이다.
미국의 유명한 학자로서 ‘존 로올스’라는 분이 있다. 그분이 쓴 책 중에 ‘정의의 이론’이라는 책이 있다. 그분의 글 속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현대사회의 가장 심각한 고민은 자원부족이 아니고, 환경오염도 아니고, 정의에 대한 도덕적 울분의 퇴색’이라고 말하고 있다. 인류는 정의를 위한 것이라고 하면 자기 목숨까지 내 놓으려 하는 울분을 가졌기 때문에 오늘의 세계가 이루어진 것이다. 정의감이 오늘 우리의 생활 속에 점점 냉각되어 가고 있다. 그 자리에 개인적 이기주의가 점점 만연되어 가는 것이다.
3. 작은자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다.
마 25장에 보면, 제자들을 어리둥절하게 하는 대화가 나온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꾸중을 한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어리둥절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항변하기를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이 말을 들은 예수님께서 40절에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라. 나보다 못한 어려운 자가 목말라 할 때 마실 수 있는 물을 줄 수 있고, 나보다 못한 어려운 자가 굶주릴 때 빵 한조각이라도 줄 수 있고, 병들었을 때 간호할 줄 알고, 감옥에 갔을 때 사랑으로 보살펴줄 수 있는, 바로 이것이 주님께로 향한 믿음이라는 것이다. 믿음이란, 지극히 작은 자 속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이다. 지극히 작은 자와 함께 계신 예수님, 지극히 작은 자를 위한 것이 곧 주님께로 향한 믿음이라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극히 큰 자에게는 충성하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다 하지만 지극히 작은 자에게는 멸시하거나 무관심한다. 오히려 외면하는 것이 우리의 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한 때는 그랬다. 예수님이 큰 자로 보여졌을 때는 예수님 앞에 나와서 ‘당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하나는 좌편에, 하나는 우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했으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작은 자로 보여졌을 때는 도망가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은 큰 자가 아닌 작은 자 속에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우리들 주변에는 적은 자가 얼마나 많이 있는가? 지극히 작게 보이는 자에게 할 수 있는 따스한 사랑이 곧 주님께로 향한 실천적인 믿음인 것이다.
여러분, 믿음의 실천자가 되기 위해서 정직하자. 정의에 대한 울분과 함께 살아가자. 작은 자에 대한 관심과 사랑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을 때, 그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바른 믿음이 이루어진다. (1995-0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