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그리스도의 편지라
2023. 10. 8.(주일낮예배) 고린도후서 3:1-9
연극 신의 아그네스에서 주인공 역할을 맡은 윤석화 씨를 아는가?<사진> 그런데 윤석화씨가 영국 런던에 출장가서 쓰러졌다. 그래서 에어앰블런스를 타고 런던에서 서울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연세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윤석화 씨는 뇌종양으로 20시간이 넘는 수술을 받았다. 그렇게 수술을 받은 윤석화 씨는 정신을 차린 후에 담당의사에게 퇴원 시켜 줄 것을 당부하였다. <박정자, 윤석화, 손숙>
나를 내보내 주세요. 이렇게 병원에서 삶을 연명하는 것은 나답지 않아요. 3개월을 살든, 6개월을 살든 중요하지 않아요. 하루를 살아도 괜찮으니 윤석화답게 살다 윤석화답게 죽을 수 있게 도와주세요. 연극배우 윤석화, 어느 날 갑자기 뚝딱 만들어진 거 아니에요. 당신이 내 팬이었다니 도와주리라 믿어요.
윤석화는 자신의 팬이었던 주치의 강석구 박사에게 나답게 살고 싶다고 퇴원시켜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그래서 윤석화는 병원에서 퇴원한다.
이렇게 퇴원한 윤석화는 어떤 삶을 살았겠는가? 너무 힘이 없어서 대부분의 시간을 누워서 지냈다. 그런데 그러한 과정에서도 윤석화는 암에 짓눌려 살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괜찮으냐는 말을 들으면 암 빼는 건강하다고 대답하였다. 그 무엇에도 짓눌리지 않고, 자기 삶을 살아가는 것이 윤석화 답지 않는가? 저는 이 기사를 읽고 나다운 것이 무엇일까? 하는 질문을 해 보았다.
어떻게 사는 것이 나답게 사는 것인가? 성경신학자들이 알고 싶은 것 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형상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다고 말씀하였다. 그런데 그 모양과 형상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성경은 기록하지 않았다. 그래서 성경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이 무엇일까? 하는 질문을 하고 있다.
여러분 생각에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이 우리가 가진 눈,코,입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신학자들은 대리통치로 해석한다. 고대 사회에서 전국을 통치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왕은 자기 통치영역이라는 것을 표하기 위하여 2가지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 하나가 국경지역의 왕의 형상으로 만든 동상을 세우는 것이다. 이것을 통하여 왕의 통치 영역을 표시하였다. 그리고 또 하나는 총독을 파송하여 왕을 대신하여 통치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모양과 형상이다. 천지만물을 다 창조하신 하나님은 여섯째날에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다. 그리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다스리라 고 명령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음받은 아담은 정복과 다스림을 통하여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는 사명을 가진 것이다.
이것이 아담다운 삶의 모습이다. 아담답다는 것은 내 자손이 얼마나 많으며, 내가 얼마나 일을 잘하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하여 하나님이 이런 분이야! 하는 것이 나타날 때 아담다운 모습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 저와 여러분에게 아담다운 모습이 있는가? 이제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란다. 오늘본문은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쓴 편지이다. 당시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을 부추겨서 교회를 소란케 하는 유대율법주의자들이 있었다. 이렇게 고린도교회에 바울을 대적하는 비방자들을 부추기는 유대율법주의자들은 바울에게 추천서가 있느냐?를 물었다. 산헤드린공회에서 파송한 추천서도 없는 바울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바울의 대답은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는 것이다. 바울을 통하여 복음을 듣고 변화된 그 성도들이 바울의 편지라는 것이다. 그 부분을 읽기 바란다.
(고후 3:2-3)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3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고린도교회를 우리의 편지라고 말하는 바울은 사람이 쓴 편지는 먹으로 돌판에 쓰지만, 너희는 하나님의 영으로 마음판에 쓴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바울의 사도성은 무거운 돌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너희의 삶과 입술의 고백을 통하여 증거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말씀의 의미이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편지로 부름을 받지 않았는가? 2023년 인구센서스에 의하면 한국의 종교인은 36.6%, 무종교인이 63.4% 로서 한국은 종교인의 수가 점점 줄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종교인 36.6% 중 불교 16.3%, 개신교 15%, 천주교 5.1%이다. 도표를 참조해 보면 2017년과 비교해 볼 때 불교는 3.3%가 줄었고, 천주교는 1.3%가 줄었다. 그런데 개신교는 무려 5.3%가 줄었다. 급속도로 기독교 인구가 감소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심각한 것은 개신교 총인구수가 771만명인데 무려 226명이 가나안 성도라는 것이다. 이들은 예수님이 나의 구주라고 고백하고 있지만, 교회 출석은 하지 않는 것이다. <도표2>
왜 이렇게 교회 안에 가나안 성도가 많은 것인가? 설교를 준비하다가 가나안 성도의 삶을 다시 시작하며 라는 글을 읽었다. 이 분은 소위 말하여 대형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오랜 시간 가나안 성도로 살았다. 그리고 다시 교회에 등록하여 3년동안 신앙생활을 하다가 다시 가나안 성도의 삶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분이 다시 가나안 성도로 돌아가는 이유가 충격적이다. 왜냐하면 출석하는 교회의 목사님 설교도 성경적이라 좋았고, 또 교회에 특별한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다시 가나안 교회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왜 다시 가나안 성도로 돌아갔겠는가? 제가 그 글의 한 부분을 읽어드리겠다. 이 내용을 듣고 여러분이 답을 찾아보기 바란다.
교회 간사님의 설득으로 억지로 청년 모임에 가면 다들 불편해하는 게 느껴져 가만히 병풍처럼 있다가 오는 게 여간 곤욕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처음부터 함께 했던 사람이 아니라 낯설어서 더 그랬던 것일 수 있겠죠. 세상 모임은 몰라도 적어도 교회 공동체에선 하나님 안에서 한마음 한뜻으로 누구나 친구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생각했는데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함에 안타까웠습니다. 그렇게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마음을 터놓고 진지한 신앙 얘기 나눌 모임 한 번 갖지를 못하다보니 공동체에 남아 있을 이유를 찾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가나안 성도의 편지에 미안한 마음이 없는가? 저와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편지로 부름받았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편지로 부름받은 저와 여러분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과 관용함을 나타내 보여야 한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해야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편지인 저와 여러분은 건강한 교회공동체를 세워가야 한다. 그래서 교회 안에 온전한 사랑이 있어서 모두 하나되는 그러한 교회로 세워가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통치가 내 삶의 영역과 교회 안에서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의 편지된 사명을 잃어버리는 순간 교회 안에 외로운 사람이 늘어나고, 세상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도무지 알 수 없어서 가나안 성도는 늘어가고, 한국 땅에 기독교인의 수는 감수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가나안 성도를 만드는데 저와 여러분이 일조하고 있지 않는가? 바울에게는 추천서가 없다고 말하는 유대율법주의자들에 의하여 흔들리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너희가 우리의 편지가 아니냐?고 말을 한 사도 바울은 6절에서는 자신이 누구인가?를 이야기 한다. 6절을 함께 읽기 바란다.
(고후 3:6)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였다고 고백한다.
무슨 말인가? 옛언약인 율법은 우리를 정죄하고, 심판의 자리에 이르게 한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세워진 새언약은 우리 죄의 용서함과 그리스도의 승리하심 담고 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새언의 일꾼이 되어서 하나님의 사랑과 용납함을 그의 입술과 삶을 통하여 나타내는 것이다. 바울은 그렇게 새언약의 일꾼으로 살아가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그리스도의 편지된 저와 여러분의 삶의 모습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일명 없다 시리즈라는 것이 있다.
10대 철이 없다. 20대 답이 없다. 30대 집이 없다. 40대 돈이 없다. 50대 일이 없다. 60대 낙이 없다. 70대 이가 없다. 80대 처가 없다. 90대 시간이 없다. 100대 다 필요없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정말 있어야 하는데, 없어서 힘들고 어렵게 하는 것들이 있다. 그런데 아무리 어렵고 힘이 들어도 우리가 나타내어야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음받은 저와 여러분의 삶에 그리스도의 편지된 삶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새언약의 일군된 삶을 통하여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관용하심으로 하나됨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자여교회의 모습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편지된 성도, 새언약의 일군된 교회가 되어서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는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