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전 9월말일에 옷가지 몇벌과 책 몇권을 담은 가방 하나 들고 서울에 왔고 그 가방을 들고 동생이 인터넷검색 및 면담을 통해 정해진 '역학학원'을 찾아갔다. 에정된대로 사주공부하러 갔다. 학원에서 시간을 보내는동안 동생은 하숙집을 찾아놨다. 그날부터 서울생활이 시작되었다. 지난해 10월1일이 만4년이 되었으니 지금은 만4년6개월이 되었다.
동생은 새 인생의 시작의 계기로 삼고 예전에 만났던 일체의 인맥을 끊을것을 타당성있게 설득하며 강조했고 난 겉으로만 수긍했다. 즉 시골생활에서는 '남 좋은 일 다 하고 남는것은 아무것도 없는 일은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사실 눈에 띄게 남는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곧 '빚'이었다. 어쨌든 거의 1년정도는 동생의 부탁을 들어주려 많이도 참았다. 가까운 친구 몇 사람과는 전화연락을 가끔씩 했다.
다른방보다 큰 방이었지만 탁 트인 시골생활을 하다 두어평 공간에 처박혀있다보니 감옥살이가 따로 없었다. 누워 다리를 좀 길게 뻗었다 싶으면 딱딱한 콘크리트 벽이다. 세면장과 벽 하나인 방인지라 10여명의 학생들이 밤이고 낮이고 새벽이고 들랑거리는 바람에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월급쟁이 하숙생이었다. 매달 생활비가 통장에 입금되었다. 그렇게 1년정도의 시간을 보내고 '개업'의 압박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학원에서는 생전 처음 듣는 사주용어들이 쏟아지는데 때로는 재미도 있지만 거의 '까막눈'의 세월이었다. 학원에서는 고급 상술전략이라는 것을 충분히 느꼈지만 여하튼 3-4년은 공부해야만 한다는 것을 수업시간에 간간히 들었다. 13년째 공부하는 아줌마도 있었다. 10여년이상 영업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철저한 사명감으로 무장된 사람도 있었다. 어쨌든 난 사주공부하는 사람들의 이모 저모를 많이 들었고 '천하에 싸가지 없는 사기꾼집단'이라는 인식도 갖게 되었다. 물론 아주 인간적인 사람들도 있다.
개업의 압박에 힘이 실릴때 가끔 정읍 백학의농원을 찾았다. 최영단선생님께 말씀드렸다. '그냥 혀~' '학원 다니면서 예습복습을 한차레도 하지 않았고....' '수업시간에는 원장의 눈만 쳐다보고 있어~~손님이 찾아오면 입을 열면 그냥 나와~말 나오는대로 하면 되어~' 이게 전부였다. 엉뚱하면서도 이해가 안되고 오히려 머리만 복잡한 답변이었다. 몇차례 여쭸지만 같은 말씀뿐이었다. '내 손님은 따로 있는 것이여~'는 한두번 들었다.
개업에 큰 힘이 되어준 친구가 있다. 사주명리학을 17년정도 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3년정도는 거의 매일 삼각산을 들랑거렸던 친구이다. 내가 무척 힘들때마다 희망을 주었던 친구다. 시간이 지나 살펴보면 '잘 풀린다'는 년초의 사주 감정은 틀렸지만 그 희망으로 어려운 시절을 지나오도록 힘을 실어준 친구였다. 학원에 한번 놀러왔다가 원장님과 면담 후 다음날부터 나와 함께 2-3개월을 같이 공부했다. 그 친구의 가정에 복잡한 일이 있을때 자기가 풀어보고 나한테 물어봤다. 상반된 견해였지만 결국 내 말이 맞았다며 여러차례 감탄했다. 중요한 결정의 싯점에서도 내 의견을 좇았다. 그 친구가 '이미 너는 17년 이상 공부한 나보다 월등히 낫다.충분히 개업해도 좋다'며 희망을 주었다.
개업의 압박에 이 친구의 조언에 힘 입어 '좋다. 해보자'며 간판을 걸었다. 봉천동에서 1년반,신촌에서 간판 걸고 1년반,그리고 신림에서 1년이 조금 넘었다. 신촌에서 간판 걸고 집안에 틀어박혀 있는 감옥생활은 때로는 보람과 재미도 있었다. 게을러 늦게 일어나는 사람에게 일찍부터 청소하고 손님 기다리며 시간 보내는 것은 보통 답답한 것이 아니다. 보통 아줌마들이 설겆이를 끝내고 찾는 시간이 10시이후부터다. 그리고 오후 2-3시쯤 되어야 한다. 이런 생활이 답답했다. 그리하여 꾀를 낸것이 '예약제'다. 즉 돌아다니며 걸려온 전화를 받고 예약을 받아 시간을 정하는 방식이다. 그러니 전화없이 찾아온 손님들은 허탕이다. 동생한테 들키지 않고 용케도 몇달이 흘렀다. 동생이 자주 찾아오지 않도록 이리 저리 핑계를 대어 단단히 일러두었었는데 어느날 동생이 신촌 인근을 지나다 반찬이며 뭐 한보따리 사왔는데 집에 사람이 없으니 얼마나 황당했겠는가.
2년전 4월쯤에 철학관 개업에 힘을 싣어준 친구와 나는 묘한 관계이다. J대 금교수와 인사동에서 막걸리잔 기울이다 전통문화 이야기가 나왔을때 '전통문화를 주장하는 학자,문화관계자들 모두 문제가 단단히 있다. 우리의 전통문화는 사라졌다. 그 문화의 맥을 그래도 잇고있는 사람들은 무속인이다. 3류가 아닌 괜찮은 무속인이다. 얼빠진 문화인들은 장사꾼 수준이다'며 평소의 생각을 말했다. 그 말이 펑미인비누를 개발하신 회장님과 연결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금교수를 만난 날 저녁에 친구에게 이 말을 전했더니 금교수를 소개해달라 부탁했고 곧 펑미인비누를 개발하신 회장님의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나와 함께 시작하자고 했으나 당시 나는 경제난에 쫓기고 있었다. 함께 공부하자며 독촉하는 친구에게 '돈 없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너 먼저 시작하고 서너달 후 나는 합류한다'고 했다. 이후 한달 반쯤 후 묘한 일로 주머니 사정이 나아졌다.
철학관 간판은 그냥 붙어 있었다. 비누를 만나 괜찮으니 몇 박스 사서 신문기자 시절 날 많이 도와준 사람들에게 선물을 했다. 나로인해 힘들었던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안고 선물했다. 좋다하니 카페 몇군데에 자랑하는 글 쓰며 달라는 사람 공짜로 줬다. 이후 한사람 두사람 사고 싶다기에 돈을 한푼 한푼 받다보니 오늘날의 '비누장사'가 되기 시작했다. 사주 감정 받으러 온 사람이 몇만원 주면 비누로 그에 맞게 되돌려줬다. 그렇게 맺어진 인연으로 현재 카페 회원도 몇 있다. 시골에서 만났던 사람들과 일체 연락을 하지 말고 '알찬 서울생활'을 하라며 독촉했던 동생의 말을 그래도 1년정도는 지키려 노력했다. 그렇다고 죄 짓고 도망다니는 사람도 아닌데....시골에서는 어느날 증발해버린 내 존재에 대해 궁금증을 안은 사람도 많았다 한다.
신문사를 4월에 퇴직하고 몇개월간 돌아다니며 '돈 벌러 서울간다'며 홍보를 하고 다녔지만 듣지못한 사람도 많았다. 이 카페 회원들 가운데 20여명쯤은 시골생활부터 현재까지의 나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얼굴도 모르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글로 만나본 회원들도 내 생활을 아는 사람은 몇 있다. 언젠가부터 서울생활의 나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었다. 나에 대해 감추거나 보탤것도 없다. 시골에서 여기 저기 많이 돌아다녔기에 웬만한 사람 붙잡고 '아느냐?'물으면 '안다'고 대답할만한 분위기가 많기 때문이다.
철학관에서 착실하게 몇년을 버티고 살다보면 돈도 잘 벌게 될것이라는 동생의 간절한 염원 그리고 동생을 통해 날 서울로 불러들인 무속인 아주머니는 항시 염려했었다. 옆길로 새지 않도록 수시로 감시를 했다. 아마도 뭔 귀신을 심부름시켜 날 감시도 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귀신도 날 감시하는데 실패했다. 결국 그토록 염려하던 일이 터졌다. 신촌에서 이사오던 시절 동생은 날 '배신자'로 낙인 찍었다. 무척 실망했다는 것을 잘 안다. 난 서울생활동안 지금껏 동생과 무속인에게 항상 고마워한다. 어떤 이유로든 서울로 불러주었기에 더 큰 세상을 구경하게 된 것이었다. 훨씬 더 많은 인맥이 만들어졌다. 나를 만나게 된 것은 '행운'이라며 과찬을 해 주는 사람들도 있다. 고마운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