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로 말하세요!” “몸통만 말하지 말고, 주어, 시제와 술어를 말하세요!” 내가 성도를 향해 곧잘 사용하는 표현이다. 말과 소리는 다르다. 입술에서 소리를 발한다고 말이 되는 것이 아니다. 말은 단어로 표현한다. 단어는 뜻을 담고 있다. 뜻이 없는 단어 사용은 말이 아니라 말소리에 불과하다. 교수 시절 학생들에게 질문하라고 수업 마무리 때 요구하면, 망설인다. 늦게 마칠 것 같으니 묻지 않을 수도 있겠으나 실제는 뭘 배워 아는 것이 없기에 질문하지 못하는 것이다. 또는 “그것도 모르는구나!”라는 핀잔을 들을까 걱정하기에 못할 수도 있다. 아무튼 질문하지 못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을 때 일어날 것이다.
“명사로 말하라”는 것은 개념을 지닌 단어로 표현하라는 것이고, 말에 의미를 지니라는 것이고, 충분히 알라는 것이다. 말(speech)은 단어들을 나열한다. 단어(words)는 뜻을 지닌다. 뜻을 지닌 것은 명사(nouns)라 부른다. 그 명사는 철학 용어로 개념(concept)이라 말한다. 명사로 표현하지 않으면 주로 형용사로 표현한다. 형용사(adjective)는 부수적이고 덧붙인 것이다. 개인마다 다르고 상황에 따라 변한다. 형용사를 주로 사용하는 자는 명사 사용이 부족하고, 명사 사용이 부족하다는 것은 개념이 부족하다는 것이고, 개념이 부족하다는 것은 지식이 결핍돼 있다는 것이다. 지식이 결핍돼 있다는 것은 지성이 부족하다는 것이고, 지성이 부족한 것은 학습하지 않은 것이다. 무의식으로나 습관적으로 형용사를 사용한다는 것도 학습하지 않은 것에 속한다. 질문이 없다는 것은 결국 지식이 결핍돼 있다는 것이다. 지식이 결핍하면 논리적 사고를 하지 못하고 감성적이고 즉흥적이고, 쾌락적이어서 기다리거나 사색의 시간을 가지지 않는다. 결국 대화의 결핍이다.
참된 믿음은 칼빈 선생(3권 2장 7항과 17장 11항)이나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 20문에서 말하길, 지식이다. 믿음을 왜 지식이라고 간단히 말하는지도 알만하다. 알지 못하면 고백하지 못한다. 바로 알지 못하면 바른 고백도 불가능하다. 알면 표현한다. 아는 것이 형용사적이면 모르는 것을 의미한다. 좋다! 싫다! 하고 싶다! 해야겠다!와 같은 표현 외에는 하지 않는 것은 개념이 없는 것이고, 개념이 없으니 지식이 없고, 바른 지식이 없으니 바른 신앙을 고수하기 어려운 것이다. 배우지 않은 것이다! 성경과 칼빈 선생이 배우는 것을 중생이라고 말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선행으로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선택된 자만 배우게 된다. 배우는 척할 뿐 배우는 것이 호기심이고 삶으로 옮기지 못한다.
영의 기능 또는 재능은 오성, 지성과 이성만 아니라 의지와 감성으로 표출한다. 오성(understanding)은 눈이나 귀를 보고 들으므로 생각하여 판단하는 기능이다. 세상에 많은 것이 널려 있다면, 그것은 사물일 뿐이다. 이것이 자신에게 대상, 사건과 경험이 돼야 한다. 이것은 오성의 역할이다. 오성이 범람한 사물을 사건으로, 사건을 생각하므로 또는 경험하므로 판단한다. 우리는 이 과정을 이해한다고 표현하다. 이해한다는 것은 사유했다는 것이고 정리했다는 것이다. 그 정리된 것을 개념(concept)이라 표현한다. 뜻을 지닌다는 것이다. 범람하는 사물이 자신에게 개인적으로 사유의 대상이 돼서 판단하면, 개념을 정리했다거나 뜻을 파악했다고 표현한다.
신앙고백의 내용 하나하나는 개념을 지닌 단어의 연속이다. 이 개념을 파악하지 못하면, 자신의 신앙을 정리할 수도 없고 표현하지도 못한다. 그 개념을 파악하기 위해 학습하는 것이다. 학습된 지식인 고백의 내용이 피상적이지만 개인적으로 되기 위해 사유하고 경험한다. 이 과정의 기간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중생 된 자는 이 과정을 밟게 돼 있다. 배우고 확실한 것에 거해야 한다. 배우고 또 배워야 한다. 그래야 바른 고백과 이에 따른 바른 삶이 나온다. 삶은 의지와 관련 돼 있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