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익, 의형제 제안해 ‘왕족’될 뻔
한국 근대화의 시작과 알렌의 위상
진단학회에서 편찬 간행한 한국사 총서에서 이선근 박사는 “우정국 문턱에서 저격당한 민영익의 생명을 구해주게 된 것은 한·미 양국의 우호관계를 가장 밀접하게 만든 이상한 인연이 되었다”며 “이때부터 미국에서 보내온 선교사라면 왕실부터 호의를 갖고 특별히 돌봐주었다”고 말했다. 이 박사는 “이때부터 미국에서 전래된 기독교는 단시일에 장족의 발전을 보이게 됐고, 나아가 그들의 부대사업으로 시작한 교육, 의료, 학술의 모든 시설은 진실로 이 나라의 근대문화를 소개하는 영광을 차지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 겨레가 자유와 민주를 알고 평등과 사랑을 알게 된 것도 이때부터였으니 한국 근대화에 미국적인 요소가 뿌리 깊게 박힌 것은 결코 심상한 인연에서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다”고 평가했다. 이 책에는 한국 근대화의 시작이나 그 진행이 기독교 없이 불가능하였다는 입장을 단호하게 명시하고 있다.
알렌, 어느 위치까지 올라갔나
24세의 민영익이 명성황후의 조카로 당시 한국의 실권자였다는 것이 참으로 기막힌 우연이다. 그런 사람의 생명을 살려냈으니 알렌의 위상은 하루가 다르게 올라갔다. 26세의 젊은 의사로서는 더 이상 바랄 수 없는 모든 영광이 그에게 밀려온다. 민영익은 알렌에게 형제의 의를 맺자고 제안한다. 알렌은 왕족이 될 뻔했다. 민영익은 알렌에게 고가의 백자도 선물한다. 알렌은 백자의 가치를 알고 워싱턴의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기증했다. 한국 백자의 가치가 이때부터 세계를 매료시켰다.
알렌이 공식적으로 고종 임금의 어의, 곧 고종의 개인의사로 발탁된 것은 1885년 5월이다. 최초의 서구식 병원인 광혜원이 세워지고 한 달 후의 일이다. 알렌은 궁정에 자주 드나들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알렌이 명성황후를 치료하기 위해서 그 거처 안방까지 드나든다는 소문은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보통 국민은 물론이고, 외국인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영광이었다.
이렇게 해서 알렌은 고종 임금이나 명성황후 그리고 왕세자와도 마주앉는 일이 아주 잦았다. 그의 영향력은 누구도 무시할 수 없었다. 알렌이 외국 사람들이나 특히 선교사들에게서조차 경원시되었다면 그것은 그의 성격 탓도 있었겠지만 가파른 신분상승 때문이었을 것이다.
급부상한 영광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한 알렌
알렌은 남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위상이 올라간 기회를 통해 알게 된 모든 내외국 고위급 인사들의 성격이나 역할 및 공적들을 다 수집해 체계화했다. 후에 선교에 유용한 자료들로 작성한 것이다. 이런 성격과 꼼꼼함은 알렌이 선교 초기 최적의 인재였다는 것을 방증한다. 당시 한동안 화제가 됐던 선교사들이 후에 그림자도 없이 사라진 후에도 알렌이 우리 곁에 기념비적 존재로 남아 있는 까닭이 여기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은 길이 남는다.
알렌과 함께 동역한 포크
총애를 받던 알렌이라 할지라도 혼자서는 위대한 일을 해낼 수 없었다. 그때 등장한 동료가 바로 미국 대리공사 포크였다. 푸트는 1885년 초에 사임하고 없었다.
포크는 당시 고종 임금의 신임을 이미 받고 있었다. 고종의 비밀 사명을 받아 일한 경우도 여러 번 있었다. 잠시 일본에 근무하면서 일본어를 마스터했고, 더불어 중국어와 한국어도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었다. 문장력도 탁월했다. 그래서 한미수호조약 이후 미국에 파견된 한국사절단을 미국에서 영접하는 역할을 맡았을 정도였다. 알렌은 미국 국무부에 보낸 서한에서 포크를 백만명 중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한 인물이라고 극찬할 정도였다. 알렌에게 당시 이런 인재와 함께 동역하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는 오묘하다. 역사는 신화가 아니다. 다 다른 사람들이 각각 그들의 특성과 사명을 가지고 사는 현장이다. 큰일을 이루는 데는 이런 사람들의 복합적인 화합이 필요한 것이다.
가시적인 기독교 기관의 의미
1882년 한미수호조약을 맺을 때 한국이 조약문 속에 꼭 넣기를 고집한 문구가 있었다. 바로 ‘불립교당’, 즉 교회당을 세우지 않는다는 조항이다. 한국 조정이 당시 대단한 신학적 소견을 가지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교회가 세워져 기독교라는 것이 현실적으로 눈에 보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제 알렌은 기독교의 보이는 실체를 세워야겠다고 확신했다. 믿음과 사랑의 실체, 그것을 가시적으로 역사 안에 세워놓고 당당하게 그 실상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믿었다. 알렌은 병원을 세우기로 결심했다. 그는 결단한다.
기독교는 역사적 종교라고도 한다. 역사 안에 예수님도 보이게 오셨다. 기독교는 보이는 것이 있어야 한다. 근대 초기에 서울에는 서양식 건물로 YMCA와 세브란스병원 그리고 명동성당, 이런 거대건물들이 남북으로 하늘 높이 뻗어 솟아 있었다. 다들 거기에 압도되고 있었다. 한국의 근대화 그 상징이 개신교의 세브란스병원과 YMCA, 그리고 구교의 명동 성당이었다.
[출처] [한국선교 130년 최초 선교사 알렌 이야기] (8) 한국 최초의 서구식 병원 설립 준비|작성자 뱅갈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