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 고려사 절요https://db.history.go.kr/KOREA/,.http://contents.history.go.kr/
김용과 정세운의 관계
1. 조일신란 (응양군상호군과 용호군상호군): 응야군상호군이 더 높은 위치
9월. 조일신(趙日新)이 밤에 전 찬성사(贊成事) 정천기(鄭天起) 및 최화상(崔和尙)·장승량(張升亮) 등과 함께 길거리의 악소(惡小)를 모집하여 기철(奇轍)·기륜(奇輪)·기원(奇轅)·고용보(高龍普)·박도라대(朴都羅大, 박토라다이)·이수산(李壽山) 등을 제거할 것을 모의하고, 〈인원을〉 나누어서 그들을 체포하게 하였는데 다만 기원만을 잡아서 목을 베고 나머지는 모두 도망갔다.
조일신이 그 무리를 거느리고 성입동(星入洞)에 나아가서 시어궁(時御宮)을 포위하고, 숙직하고 있던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최덕림(崔德林), 상호군(上護軍) 정환(鄭桓), 친종호군(親從護軍) 정을상(鄭乙祥) 등 여러 사람을 죽였다.
왕이 공주와 함께 천동(泉洞) 별궁(別宮)으로 이어(移御)하였는데, 호위하는 군사가 적었으며, 길을 인도하고 따르는 자들이 모두 적의 무리[賊黨]였다.
이때 왕을 호위하는 응양군상호군은 김용이었다. 김용은 몸을 사렸고, 용호군상호군 정세운이 왕을 지켰다.
12월에 김용(金鏞)에게 장형을 가하였다. 조일신(趙日新)의 난에서 호위 군사들이 다수 상처를 입었는데, 김용은 홀로 면하였고 또 방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석: 조일신란에서김용은 몸을 사리고 왕을 호휘하지 않았다. 반면에 정세운이는 왕을 지켰다.
2. 부원배 척결:
기철(奇轍)·권겸(權謙)이 원 황실의 인척에 연결되어 그 힘에 기대어 권세를 부리면서 기강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민(田民)을 탈점하고 비리를 멋대로 저질렀다. 그리고 반역을 도모할 목적으로 사사로이 병장기를 제조하고 지방 군사들의 무기를 검열하기까지 했으며, 상국의 사신을 사칭해 유언비어를 유포하여 민심을 어지럽혔다.
마침내 비밀리에 모이는 시기를 알려 한꺼번에 반란을 일으키기로 약속하니, 종묘와 사직의 안위는 위태롭게 되어 일촉즉발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자 남양후(南陽侯) 홍언박(洪彦博)이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분연히 일어나 역적들을 모조리 섬멸해 다시 사직을 안정시켰으니 공이 커서 참으로 잊기 어렵다.
남양후 홍언박, 참정상의(參政商議) 경천흥(慶千興), 참정(參政) 안우(安祐),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정세운(鄭世雲), 판추밀원사(判樞密院事) 황상(黃裳),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유숙(柳淑), 상장군(上將軍) 목인길(睦仁吉), 장군(將軍) 이몽고대(李蒙古大, 이뭉구다이)를 일등공신으로 삼는다.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 김득배(金得培),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김원봉(金元鳳), 공부상서(工部尙書) 김림(金琳), 판사천감사(判司天監事) 진영서(陳永緖), 판태복시사(判太僕寺事) 김서(金湑), 상장군 김원명(金元命)·이운목(李云牧), 전 대부경(大府卿) 문경(文璟), 장군 주영세(朱永世), 내시감(內侍監) 방절타적첩목아(方節朶赤帖木兒, 방절도치테무르), 중랑장(中郞將) 장필례(張必禮) 등을 이등공신으로 삼는다.
또한 그 부모와 처에게도 작위를 주고 자손들에게 음직(蔭職)을 줄 것이며 차등을 두어 전민(田民)을 하사한다. 강중경(姜仲卿)은 이미 죽었으나 그 큰 공적을 잊기 어려우니 함께 녹권(錄券)을 하사하며, 그 부모에게 작위를 주고 자손들에게 음직(蔭職)을 준다.
분석; 기철 척살 공신에 정세운은 있어도 김용은 없다.
3. 홍건적란에서 총병관 교체:
1361년(공민왕 10) 10월에 홍건적이 2차로 침입해 오자, 1361년 11월에 공민왕은 복주(福州)로 파천했고, 개경은 함락되었다. 이에 공민왕은 총병관을 김용(金鏞)에서 정세운(鄭世雲)으로 대체하였다.
1362년(공민왕 11) 1월에 정세운은 안우(安祐), 이방실(李芳實), 김득배(金得培) 등과 함께 홍건적을 물리치고 개경을 되찾았다.
분석: 총병관(총사령관) 김용이 서경이 함락될 때 소극적이어 결국 개경까지도 빼앗긴다. 이에 정세운에게 총병관(총사령관) 자리를 빼앗긴다. 김용은 번인이 공민왕의 최고 측근이라고 믿고있었는데 자리가 불안해 졌을 것이다.
4. 결론
김용의 정세운에 대한 반감은 여러 차례 계속 누적되었다. 우리나라 3대 간신의 한 명인 김용에 의해 전쟁이 끝나자 마자 정세운, 안우, 이방실, 김득배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물론 공민왕도 대장군 무신들의 대거 귀환은 왕권에 대한 위협이라 반가워하지만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