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기 진안에서 활동한 학자.
[가계]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양래(陽來), 호는 후산(厚山). 고려 정당문학(政堂文學) 봉성산군(封星山君) 문열공(文烈公) 매운당(梅雲堂) 이조년(李兆年)의 후예로 아버지는 월암(月庵) 이동범(李東範)이다. 아들로는 이면수(李冕洙)·이곤수(李袞洙)·이필수(李鞸洙) 등이 있다.
[활동 사항]
이도복(李道復)[1862~1938]은 단성현(丹城縣)[현 경상남도 산청군(山淸郡) 신안면(新安面)] 월명산(月明山) 아래 신안동에서 태어났다. 성품이 곧고 재주가 비범하여 사우들의 추종을 받았고, 1882년(고종 19)에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1888년(고종 25)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에게 사사하였으며, 한유(韓愉)·정재규(鄭載圭)·전우(田愚) 등과 교류하였다.
1905년(광무 9)에 면우(宰宇) 곽종석(郭鍾錫)을 만나 을사조약 체결에 비분강개한 마음을 털어 놓고, 조약 무효와 오적을 참할 것을 상소 했다. 그 해 5월 송병순과 함께 만동묘에 들어가 『연재집(淵齋集)』을 교정해 간행하였다.
1919년에는 서울에 올라가 이완용(李完用)·김윤식(金允植) 등 7적을 토벌하자는 글을 지금의 종로인 종가에 걸었고, 장수군 장계면 금곡리에 들어가 송나라 때 의사 홍호(洪皓)가 휘종(徽宗)에 고한 고사를 들어 신릉부(新陵賦) 한 편을 지었다.
스승의 문집 간행에 힘쓰다가 경술국치 이후, 간재 전우를 비롯한 호남 선비와 서로 교류하며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러나 망국의 설움과 비분한 마음은 어쩔 도리가 없어, 그 뒤 영호남의 유서 깊은 고적을 일일이 답사한 뒤, 1925년 ‘마이동천’의 구곡형승을 즐겨 「이산구곡가」를 짓고 이곳에 머물기로 작정하여, 진안군 마이산으로 입산했다. 이듬해인 1926년 이산 정사에 은거하였다. 그 후 진안 지역의 정신적 지주로 일제의 온갖 탄압 속에도 민족 정기를 바로 세우는 데 노력하였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는 『후산집』 11권이 있으며, 『연재집』·『면암문집(勉菴文集)』을 교정하고, 『치종록(致宗錄)』·『기정종감(紀政宗鑑)』 등을 편집하였다.
[묘소]
묘는 전라북도 장수군 산서면 고둔치 간좌에 있고 단운(丹雲) 민병승(閔丙承)이 행장을 찬하고 상농(相農) 송종국(宋鍾國)이 묘갈명을 찬하였다.
[상훈과 추모]
현재 진안군 마령면 평지리 모사실에 있는 영곡사(靈谷祠)에 스승인 연재·면암과 함께 배향되었다. 또한 2010년 경 마령면 동촌리 마이산이산묘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성주 이씨 경무공파 세보』
『영남 선유 묵적』
황충기, 『역대 한국인 편저서 목록』(국학 자료원, 1996)
『백운 면지』(백운 면지 발간 추진 위원회, 2008)
『후산집(厚山集)』
『진안지(鎭安誌)』(진안 향교, 1925)
『전라 문화의 맥과 전북 인물』(전북 대학교 전라 문화 연구소, 1990)
『진안 군사』(진안 군사 편찬 위원회, 1992)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