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표제/저자사항: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 / 장 자크 루소 지음; 주경복; 고봉만 [공]옮김
Rousseau, Jean-Jacques[1712-1778] 주경복 고봉만[1963-]
|발행사항: 서울: 책세상, 2002., 2019.
|형태사항: 241p.; 21cm
|총서사항: (책세상문고·고전의세계; 017)
|주기사항: Rousseau, Jean Jacques 원표제: Essai sur l'origine des langues où il est parlé de la mélodie et de l'imitation musicale(1781)
Jean-Jacques Rousseau의 (언어 기원론: 멜로디와 음악적 모방에 대하여 Essai sur l'origine des langues, où il est parlé de la mélodie et de l'imitation musicale)(Genève : Du Peyrou, 1781)
*루소 사후에 발간된 책이다.
*기회가 된다면 다음 논문들을 찾아 읽어보자.
특히 E. Claparèd,〈루소와 언어의 정념적 기원>,〈장 자크 루소 회보Jean~]acques Rousseau) 24권(1935) 95〜120쪽). 그리고 장스트로뱅스끼의 주해들이 달린 이 책.
-역33. 루소는〈인간 불평둥 기원론〉(〈루소 전집〉3권 143쪽)에서 욕구와 정념의 밀접한 상호의존성을 주장하였다. 그에 반해 디드로는〈백 과전서〉의〈백과사전〉항목에서 언어의 기원올 욕구에서만 비롯하 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역5. 보스Du Bos의 <시와 미술에 대한 비판적 성찰Réflaction critiques sur la Poèis sur la Peinture(17l9)
-역35. 여기서 ‘기하학자’의 언어는 모페르튀Pierre Louis Moreau de Maupcrtuis 의 언어 기원에 관한 수학적 추론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루소와 동시대인이며 수학자였던 모페르튀(1698~1759)는〈언어의 기원과 말의 의미에 대한 철학적 생각 Réflexions philosophiques sur l'origine des langues et la signification des mots>(1748)이 란 글에서 언어를 매 우 합리적인 체계라고 설명하였다.
-역36. 《백과전서〉의〈언어〉항목에서 보제Beauzée가 제시한 내용이나 <인간 지식의 기원에 대한 시론〉의 2부 1 절 8장에서 콩디야크가 ‘언어 의 기원’에서 “운율은 노래에 가깝다”(§66)거나 -“언어의 기원에서 문체는 시적이다”(§67)라고 언급한 내용과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역37. 루소는<고백록〉1 부 1 장에서 ‘나는 생각하기에 앞서 느낀 다. 그건 인류의 공통된 운명이다’라고 말했다(〈루소 전집〉1 권 8쪽). 〈에밀〉과〈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는 감각 작용에서 사고 작용으로 넘어가는 것에 대하여 길게 설명하였다.
-역39. 《에밀〉(〈루소 전집〉4권 506쪽) 이후로 루소는 ‘적극적 행위’와 ‘소극 적 행위’를 구별하면서 ‘애정어리고 부드러운’ 정념과 ‘중오에 차고 잔인한’ 정념을 이분법적으로 설명하였다«루소 전집〉1권 805쪽). 클라파레드E. Claparèd는 그의 글〈루소와 언어의 정념적 기원>에서 이에 관한 루소의 독창적 논지를 체계적으로 정리했다(〈장 자크 루소 회보Jean~]acques Rousseau) 24권(1935) 95〜120쪽을 참고하라).
-역41. 라미 신부의〈수사학과 말하는 기술〉(1701) 136〜140쪽에서 정념 과 비유의 관계가 일목요연하게 제시되었다. 플뢰리Fleury 신부의 (시론Discurs sur la poésis〉(1713)에서도 이 문제가 다루어졌다.
-역53. 루소는 앞서 글쓰기에 관해 논한 다른 학자들의 저술올 참고한 것 으로 여겨진다. 예를 들어〈백과사전> 5판(1741)에서 챔버스가 서 술한〈알파벳>,〈문자〉.〈상형문자〉,〈목소리〉.〈낱말〉둥의 항목을 비롯하여 콩디약의〈인간 지식의 기원에 대하여》등을 꼽을 수 있 다. 이러한 저술들은 대개 라미 신부의〈수사학〉4판의 1권 5장에 서 다뤄진 내용을 참고하였다. 루소의 글쓰기 이론에 대한 문헌학적 계보를 말하자면 다옴과 같은 연구들에서 언급된 바 있다: James G. Février, 1959, Histoire de l'écriture, Paris; M. V. David, 1965, Le débat sur Us écritures et l’hiéroglyphe aux XVIle et XVIIle siècles, Paris; A. Leroi-Gourhan 1965, Le Geste et l’écriture, Paris; J. Derrida, 1967, De la grammatologie, Paris: I. J. Gelb, 1952, 겨 study of writing, Chicago (불어번역본: 1973, Pour une théorie de l’écriture, Paris) < 옮. 여기서 A. Leroi-Gourhan 1965, Le Geste et l’écriture은 찾아볼 수 없다. 그가 1965년도에 쓴 책은 Le Geste et la parole이다. 위 기록은 오류이다.>
-역103. 《신 엘로이즈〉2권 16장에서 루소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의 목적은 인간을 이해하는 것인데, 방법은 다양한 관계에 비추어 연구 하는 것이다"
서평
-루소의 기호학
[헤르코게네스: 소크라테스 선생님, 이 친구 크라튈로스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있는 것들 각각에는 저마다 올바른 이름이(ονόματος ορθότητα) 본래 자연적(φύσει)으로 있다. 그리고 이름이란 사람들이 자신들의 언어로 어떤 것의 이름을 부를 때, 그렇게 부르기로 합의하고 부르는(ἐπιφθεγγόμενοι) 말의 조각(φωνῆς μόριον)이 아니다. 오히려 이름을 붙이는 올바른 규칙은 본래 있는 것이며, 그것은 그리스 사람이든 이민족 사람이든 누구에게나 똑같다”라고요.] <플라톤, 『크라튈로스; 이름의 올바름에 대하여』, 김인곤, 이기백 옮김, 이제이북스, 2007., 383a~b.>
본래 이 작품의 특히 이 부분은 서양 철학사에서 최초로 언어자연생성론(φύσει)과 언어협약론(ἐπιφθεγγόμενοι)의 대립을 정식화했다고 널리 알려져 있다.(위의 책 해제 참조) 그런데 루소가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에서 플라톤의 『크라튈로스』언어자연생성론에 찬성표를 보내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플라톤의《크라틸로스》가 보기보다 그렇게 우스꽝스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35) 자연생성론자 루소가 찬성할만한 부분은 아마도 “올바른 이름이(ονόματος ορθότητα) 본래 자연적(φύσει)으로 있다”는 이 부분일 것이다. 이 뒤로도 이 작품에서는 플라톤 특유의 변증법이 진행되면서, 언어는 “합의하고 부르는(ἐπιφθεγγόμενοι) 말의 조각(φωνῆς μόριον)이 아니”라 자연의 성질을 내포하고 있다는 관점이 계속 견지된다. 그렇지만 18세기 사람 루소가 찬성하면서도 약간은 미심쩍어하는 까닭은 “올바른 이름”에 대한 플라톤의 논증이 과학적이지는 않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실제로 여기서 제시하는 어떤 단어들에 자연이 내포 되어 있다는 것을 증언한다는 플라톤의 어원론 거의 대다수가 틀린 것으로 밝혀졌다(위의 책 해제 참조).
루소의 말에 힘입어서, 어찌하였든, 이제 우리는 언어철학사에서 플라톤 뒤로도 계속되는 언어자연생성론과 언어협약론의 대립 중에, 견해가 비록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을망정, 이 언어자연생성론의 계보에 루소를 놓을 수 있게 된다. 이밖에도 이렇게 노정할 수 있는 증거는 여러가지인데, 특히 “우리는 언어의 기원을 연구함에 있어서 자연의 질서 그 자체를 따르려고 노력해 보자”(63) 직접 말할 때가 그렇다. 루소에게는 말하고자하는 욕망은 ‘자연의 질서 그 자체’를 따라서 이루어진 것인데, 여기서 자연히 일어나는 말하고자하는 욕망 자체를 본능으로 간주한다면 우리는 또 한명의 대표적 언어자연생성론자 니체 또한 만날 수 있다. “그렇다면 언어를 벌들이나 개미떼 등처럼 본능의 산물로 간주하는 일만 남습니다. (중간생략) 본능은 어떤 존재의 가장 내적인 핵심과 하나이기조차 한 것입니다. 유기체들의 무한한 합목적성 그리고 그들의 생성의 무의식성, 이것이 철학 본연의 문제입니다.”(니체, 『언어의 기원에 관하여. 이러한 맥락에 관한 추정』, 김기선 옮김, 18쪽)
그렇다면 루소에게 과제는 자연이 이 “올바른 이름”을 생성하는 회로도를 제시하는 것이다. 우선 간단히 말하자면, 루소는 자연 속에서 인간 존재는 정념<la passion>을 갖게 되는데, 인간에게는 이 정념을 기호화작용<signification>으로 만들 수 있는 "고유의 어떤 능력"<une faculté propre à lʼhomme>(19)이 있어서, 이 능력을 바탕으로 말을 만들고 하게 되는 것으로 본다. 루소는 시대적으로는 다윈의 진화론과는 무관하지만 그가 진화론을 알았다면, 이 능력이 진화적으로 우리 몸에 아로새겨져서 기억(mémoire)된다는 설명을 덧붙였을 것이다. 루소는 특히 말함은 그림과는 달리, 지속성을 통해서, 이 정념의 생성을 더 생생하게 표현할 수 있는 기호라는 점을 함께 강조한다. 베르그송의 용어를 빌리자면, 여기서 정념은 이질성 그 자체가 생성되는 하나의 장으로서 지속의 본연의 성질을 가장 잘 드러낸다는 ‘의식의 흐름’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루소는 이와 함께 그림보다 음악이, 음악에서도 화음보다 선율이 더 진정한 루소기호학의 요소라는 것을 강변한다. 이때에도 중요한 것은 지속이다. 루소 언어생성론의 회로도를 「14장 화음에 대하여」를 독해하여,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이와 같다(앞의 항을 뒤의 항은 ‘모방’하면서 재현해낸다): 정념-선율의 분출[음성신호]-선율(의 발휘)[언어 자체로서의 음조, 영혼의 움직임으로서 어투들(les tours)]-선율의 말함(la parole)-선율의 언어<능력>(langage)-음악. 이는 단순하고 단일한 정념이 복잡화되고 체계화되는 과정, 단일한 흐름에서 복합의 체계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단순 반복이 아니라, 모방이고, 되풀이인 것이다.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는 원시 언어는 더 정념체에 가까웠을 것이나, 문자를 통해 이 정념을 기호화<signifiance>하면서, 언어의 생성론적인 힘이 퇴화했다는 학설까지 나아간다. “욕구의 산물이 아니라 즐거움의 산물로서 최초의 언어들은 오랫동안 그 기원의 징표를 간직하고 있었다.”(84) 루소 특유의 사유 특징인, 문명화가 인간의 본성을 끌어내렸다는 주제가 여기서도 어김없이 보존되고 있었던 것이다. 루소와 함께 내가 생각하기를, 언어가 그 유용성만큼 무엇에도 견줄 바 없는 기호이기는 하지만, 인간 사유를 고정화하고, 관념화하여, 사유 자체가 공간적이고, 장면적이며, 분절된 것과 같은 착각을 그 대가로 지불해야만 했다는 점에서, 언어발달 특히 문자발달의 고도화가, 심리와 생명의 멈추지 않는 흐름에 대해서만큼은 기묘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한마디로 생생한 지속과 문자 중심의 언어관은 배리관계일 수밖에 없다. 루소파들에게는 언어적 존재론의 진화사에서 중요하되, 전부일 수는 없는 한 거대한 작품으로서 문자를 고려할 때만이 돌파구가 생길 것이다.
루소의 기호학! 생성하는 정념을 표현하려 자기자신에 내재한 자연의 권능을 발휘하고, 또 이 발휘의 굴곡들을 몸에 아로새겨 긴 자연사 속에서 기억하고, 이제 이 기억을 충력삼아서 말과 선율을 만들어내는 존재, 이 존재의 기호학에 매료된 사람은 모두 자기도 모르게 루소의 멜로디에 귀를 적시고 있는 사람들이다.
예컨대, 앙드레 르루와-그루앙(André Reroi-Gourhan, 1911~1986).
“모든 기호가 생리학과 그 이미지가 편입될 수준에 의해 만들어진 질서 안에서 세분된 이미지에 불과하다. 흉내와 춤 움직임의 상형이 기반에 놓이고, 이어서 언어활동과 뗄 수 없는 몸짓이 생겨나고, 아주 일찍 상형과 경계를 이루게 되었다. 여기에 이어서 음악이나 시의 청각적 재현이 이루어지는데, 그 이유는 음악은 몸짓과의 유대가, 시는 언어활동과의 유대가 시각적 형태와 중개물이 되기 때문이다. 시각적 형태는 그림에서처럼 인간에게 지배적인 감각을 동원하는 것이며, 여기서 상징체계는 구체적 운동에서 가장 멀리 있고, 지적인 것으로 알려진 결과 현실적 형태가 상실되고 기호밖에는 남지 않게 된다. 문자는 시각적 미학과 이어지는데 그것은 순수하게 지적인 이미지로서, 상징을 완전히 내부화하기에 이르게 된다.”
<앙드레 르루와-그루앙,『행위와 말2-기억과 리듬』, 강형식 옮김, 연세대학교대학출판문화원, 76쪽>
본문
제1장 우리의 생각을 소통하는 여러 가지 방법에 대하여
말을 한다는 것은 동물들 사이에서 인간을 구별 짓는다. 언어<le langage>는 민족을 구별 짓기도 한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말하는 걸 듣고 나서 그가 어디 출신인지 안다. 사람들은 각자 용 도와 필요에 따라 자기 나라 언어<la langue>를 배우게 된다. 그것이 다른 나라 언어가 아니고 자기 나라 언어라야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 점을 설명하려면, 습속 이전에 지역적인 것과 관련되는 어떤 이유가 있으므로 거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아 야 한다. 말은 원초적인 사회 제도이기 때문에 자연적 요인에 영향을 받으며 형성될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자기와 마찬가지로 느끼며 생각하는 닮은꼴의 존재라고 인식하면, 이내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나누고 싶은 욕구가 생겨서 그럴 방법을 찾게 된다. 그 방법은 감각에서 찾아야 한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교감 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감각이다. 그래서 생각을 표현하는 데에 감각적 신호들<lʼinstitution des signes sensibles>을 이용하는 제도<les seuls instrumens>가 생겨났다. 언어<le langage>를 창조한 사람들이 이런 걸 따져가면서 해낸 것은 물론 아니고 단지 본능적으로 그런 결과를 얻었다<Les inventeurs du langage ne firent pas ce raisonnement, mais lʼinstinct leur en suggéra la conséquence.>
몸짓 언어와 음성 언어<la langue du geste & celle de la voix>가 모두 자연스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몸짓 언어가 더 쉽고 관습의 제약도 덜 받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귀보다 눈으로 더 많은 대상을 지각하기 때문이 다. 그리고 형상이 소리보다 더 다양하고 더 많이 표현하며 더 적은 시간에 더 많은 것을 말한다. 그림을 그리는 일이 사 랑 때문에 생겨났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랑을 나누기 위해 말을 하게 되었을 수도 있지만, 그 경우에 덜 만족스러 웠을 것이다. 사랑은 말로 충족되지 않는다. 사랑은 말을 뛰 어넘는다. 사랑은 더 생생한 자기표현 방법을 취한다. 연인 의 그림자를 혼연히 더듬던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에게 무슨 말을 했겠는가?2 막대기로 그림자의 형체를 그리면서 그녀 는 어떤 소리를 냈겠는가?
13~14.
몸짓으로 표현하는 법을 익힌 뒤로 우리는 무언극의 기술<lʼart des pantomimes>올 잊어버렸다.5 그것은 우리가 훌륭한 문법을 가짐으로써 이집트인의 상형 문자를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6 옛날 사람들이 가장 생생하게 말했던 것이 무 엇일까 생각해 보면, 그들은 말이 아니라 신호로 그것을 표 현했으리라. 그들은 말로 하지 않고, 보여준 것이다.//
타르키니 우스와 트라시빌리 우스는 양귀비꽃을 꺾음으로써, 알렉산드로스는 절친의 입에 인장을 댐으로써9, 디오게네스는 제논 앞에서 서성거림으로써 말로 하는 것보다 자 기 뜻을 더 잘 표현하지 않았던가?
16.
//대사가 없는 무언극만으로는 당신의 마음을 거의 혼들지 못할 것이다. 정념<Les passions>은 자기 나름으로 표현하기 위한 몸짓과 어조 가 있다. 그리고 우리를 전율하게 만들면서 감각적으로 숨길 수 없는 그런 어조들은 마음속 깊은 데까지 파고든다. 이는 우리도 모르게 넋을 빼앗기도록 마음올 움직이고,우리가 듣는 것을 느낌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눈으로 볼 수 있는 신호들이 더 정확한 모방을 가능하게 하지만, 관심을 끄는 데에서는 소리가 더 자극적 이다.
18.
마찬가지로 다시 살펴보면, 생각을 나누는<옮. 소통하는> 기술의 발명은 이러한 의사소통에 쓰이는 감각 기관에 의존한다기보다는 인간 고유의 어떤 능력<une faculté propre à lʼhomme>에 좌우되는 것으로 보인다.28 이 능력 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신체 기관들을 언어 소통의 용도 에 사용토록 해주는데, 만일 이 기관들이 없으면 다른 기관 올 마찬가지 목적에 사용토록 해 줄 것이다. 인간에게 아무 렇게나 조잡한 신체 조직올 하나 갖게 해 보라, 아마도 그는 별다른 아이디어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 동료들 사이에 한쪽이 행동하고 다른 쪽이 느낄 수 있는 어떤 소통 수단이 있기만 하다면, 그들은 결국 온갖 생각들을 주고받기에 이를 것이다.19
제2장 말의 첫 발명 은 욕구가 아닌 정념에서 왔다
욕구는 원초적인 몸짓을 유발하였고,정념은 원초적인 목소리를 토해내게 하였다고 생각할 만하다.// 최초 인간 언어를 기하학자의 언어쯤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지만, 우리가 보기에 그것은 시인의 언어였다.
25.
그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사람은 추론하는 게 아니라 느끼는 것으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자기 욕구를 표현 하기 위해 말을 하게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내가 보기에 이 런 견해는 수긍될 수 없다.
25.
이런 사실 한가지만 미루어 보더라도 언어의 기원이 사람들의 최초 욕구에서 기인하는 것은 분명히 아니라는 말이 된 다. 사람들을 결속시키는 수단이 그들을 갈라놓는 요인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언어 의 기원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단 말인가? 정신적인 욕구, 즉 정념에서 온다. 생존의 필요가 사람들을 서로 피하게 한다면,모든 정념은 사람들을 가까워지도록 한다. 사람들로부터 목소리를 토해내게 한 것은 배고픔도 목마름도 아니고 사랑,증오,연민, 분노 같은 것들이다. 손에 잡은 열매는 도 망치지 않으므로 사람은 말을 하지 않고도 그걸 먹을 수 있 다. 사람은 말을 하지 않고도 포식할 먹잇감을 쫓아갈 수 있 다. 그러나 젊은이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부당한 공격자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본능적으로 억양, 외침,불평이 터져 나 온다. 보다시피 이렇게 가장 오래된 말들이 생겨났고,바로 그런 까닭으로 최초 언어들은 단순하고 체계적이기에 앞서 음악적이고 정념적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무턱대고 하는 것이 아니므로,뒤에 가서 다시 설명하기로 한다.
26.
제3장 처음의 언어는 비유적이었다
인간이 말을 하게 된 최초의 동기가 정념이었던 만큼, 최초의 표현들은 비유<des Tropes>였다. 비유적인 언어가 제일 먼저 생겨 났고, 그것의 고유한 의미는 마지막에 정해졌다. 사람은 사 물의 실제 모습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그것들에 진짜 이름을 붙여 부르게 되었다. 사람은 먼저 시를 읊둣이 말을 했을 뿐 이다. 이치를 따져볼 마음을 먹은 것은 오랜 뒤의 일이었다.
그런데 이쯤에서 독자들은 나를 멈춰 세우고는 이렇게 물을 것 같기도 하다. 비유란 의미를 전용하는 것인데42, 어떻 게 하나의 표현이 고유한 의미를 갖기도 전에 비유될 수 있 느냐고 말이다. 나도 그 마음을 이해한다. 그러나 내가 말하려는 것을 이해하려면, 우리가 전용하는 말 대신 정념이 우 리에게 떠올리게 하는 관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 하면 생각을 바꾸어 놓음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말을 바꾸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비유적인 언어는 아무 런 의미도 갖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한 가지 예를 들어서 물음에 답해 보겠다
29.
보다시피 이런 식으로 정념<la passion>이 우리의 눈을 현혹시키고, 처음 우리에게 주어진 생각<la premiere idée>이 참된 것이 아닐 때, 비유적인 말<le mot figure>이 본래의 말에 앞서 생겨난다. 낱말과 명칭에 관해 내가 이야기한 것은 문장 표현의 차원에도 어 렵 지 않게 적용할 수 있다. 정념이 일으키는 착각의 이미지<Lʼimage illusoire>가 가장 먼저 떠오르고 그에 부응하는 언어<le langage> 또한 가장 먼저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 뒤에 정신적으로 깨우침이 생기면서 처음에 범했던 오류를 인식하고, 그런 오류를 일으켰던 것과 똑같은 정념이 작용할 때만 그런 언어 표현을 사용하게 될 때, 언어는 곧 은유적으로 된다.
30
제4장 최초 언어의 변별적 성격과 그 언어가 겪어야 했던 변화에 대하여
최초의 언어는, 그것이 아직까지 존재한다면, 어휘와 구문에 상관없이, 다른 언어들과 구별되는 고유 특징들을 보존하고 있을 것이다.48 이 언어의 모든 표현들은 이미지와 느낌 과 비유로 지어졌을 것이 틀림없다. 그뿐만 아니라 기능적인 부분에서도 이 언어는 처음 뜻했던 목적에 부응했을 것이고, 서로 소통하려는 정념에 따라 피할 수 없게 생겨나는 느낌을 감각과 오성에 호소했을 것이다.
34.
그리하여 자연 상태의 목소 리, 음성, 음조, 배음은 관습의 산물인 조음 작용과 별로 상관 이 없으므로 사람들은 말을 하는 대신에 노래를 할 것이다. 대부분의 기본 낱말들은 의성어로 되었거나 정념적인 음조를 갖거나 감각적인 대상 효과로 이뤄질 것이다. 그런 낱말 들에는끊임없이 의성-의태어의 성격이 배어나며 느껴질 것 이다.
34~35.
이런 언어는 같은 것을 서로 다른 관계로 표현하느라 동의어를 많이 갖게 될 것이다.49 이런 관계들을 표현하는 데에 추상적인 말과 부사는 별로 사용되지 않는다. 그 대신 말의 흐름에 운을 주고, 문장에 부드러움을 주기 위해 확대사,지소사, 합성어,허사가 많이 사용될 것이다. 그래서 불규칙과 파격이 많다. 이런 언어는 활음, 배음, 화음,그리고 음성의 아름다움에 애착을 갖기에 문법적인 유추에는 소홀했으리라. 이런 언어는 논증 대신에 금언을 애용하고, 설복 없이 설득하며,추론 없이 서술할 것이다. 이 언어는 어떤 면에서는 중국어를51, 다른 면에서는 그리스어를, 또 다른 면에서는 아람어를 닮았을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을 다각적으로 넓혀 보라, 그러면 플라톤의《크라틸로스》가 보기보다 그렇게 우스꽝스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35.
제 5장 글쓰기에 대하여
필요가 늘어나고, 세상사가 복잡해지며, 문 명이 발전함에 따라 언어는 성격을 바꾸어 간다. 언어가 더 정확해지면서 덜 정념적이게 된다. 이런 언어는 감정을 관념 으로 대체한다. 그것은 더 이상 마음이 아닌 이성에 호소하 는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음조는 사라지고,조음이 늘어난 다. 언어는 더 정밀해지고 더 명확해지지만, 더 밋밋해지고 더 먹먹해지고 더 차가워진다. 이러한 진행은 아주 당연해 보인다.
39.
언어를 비교하여 오래된 순서를 판단할 수 있는 한 가지 다른 방법은 글쓰기로부터 찾아볼 수 있는데,그것은 글쓰기 의 완성도와 반비례한다.53 글쓰기가 조악할수록 그 언어는 더 오래된 것이다.//
39~40.
두 번째 (글 쓰는) 방식은 관습적인 문자로 낱말과 명제를 표상하는 것이다. 이것은 언어가 완전히 형태를 갖추고, 전 체 언중이 공통의 규칙을사용하도록 결합되어 있을 때만 가 능하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이미 ‘이중관습’이 존재하기 때 문이다.54//
40.
세 번째 방식은 말하는 목소리를 음성적이거나 조음된 성질에 따라 일정 수의 기본 요소로 분해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상할 수 있는 모든 낱말과 음절을 구성할 수 있다.//
40.
이 세 가지 글 쓰는 방식은 사람들을 민족별로 분류해 볼 수 있는 세 가지 상태에 꽤 정확하게 상응한다. 사물을 묘사 하는 것은 야생인들에게 어울리고, 낱말과 명제를 부호들로 표상하는 것은 미개인들에게 어울리며,알파벳을 쓰는 것은 문명인들에 어울린다.55
41.
글 쓰는 법은 말하는 법과 전혀 관련이 없다. 글 쓰는 법은 다른 성 질의 욕구들과 관련이 있다. 그 욕구들이 란 민족들의 지속 기간과는 별도로 완전히 독립적인 정황에 따라 좀 더 일찍 또는 좀 더 늦게 생겨난다. 태고의 민족들에게서는 그 런 욕구가 전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여러 세기에 걸쳐 상형 문자가 이집트인들의 유일한 표기법이었 는지 알지 못한다. 그런데 훨씬 덜 편리한 문자를 가지고 있 었던 멕시코인들의 예를 통해 보더라도, 그러한 글쓰기가 개 화된 민족을 충족시킬 수 있다는 것이 입증된다.
42
글쓰기는 언어를 정착시키는 게 틀림없어 보이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언어를 변질시키는 것이다. 글쓰기는 언어의 낱말이 아니라 그 속성을 바꾼다. 그것은 표현성을 정확성으로 대체한다. 우리는 말할 때 감정을 표현하고, 글을 쓸 때는 생 각을 전달한다. 글을 쓸 때는 모든 낱말을 공통적으로 사용 하는 뜻의 범위 안에서 써야 한다. 그러나 말하는 사람은 성 조를 이용하여 그 뜻을 변용하면서 자기 마음에 들도록 특정 하여 사용한다. 뜻을 명확히 해야 할 부담이 적기 때문에, 그 는 더 많을 것올 힘 있게 표현한다. 그러기에 구술에만 쓰이 는 언어의 생동감을 글로 쓰는 언어가 오래도록 보존하기는 불가능하다. 목소리를 글로 쓸 수 있지만, 음성을 글로 쓰지 는 못한다. 그런데 음조가 있는 언어에서 인간 언어를 가장 힘 있게 하면서 평범한 문장을 본래의 것과 달리 특유하게 만드는 것은 음성과 음조와 온갖 억양들이다. 이런 언어를 보충하려고 우리가 취하는 수단들이 글말을 확대시키고 연 장시킨다. 그러고는 책에 쓰는 말투에서 이야기하는 말로 넘 어가면서 말 자체를 무기력하게 만든다68. 글로 쓰는 것과 똑 같이 말을 하면, 말을 하면서도 읽기만 하는 것에 지나지 않 는다.
45
제6장 호메로스가 과연 글을 쓸 줄알았을는지
//말로 할 때는 구별이 되는 방언 들도 글로 쓸 때는 서로 동화되고 섞여서 부지불식간에 모두 하나의 공통분모로 수렴된다. 어떤 민족이 글을 읽고 배울수 록 그들의 방언은 그만큼 소멸한다. 그리하여 글을 별로 읽 지 않고 전혀 쓰지 않는 민중 속에서 은어의 형태로 방언이 명맥을 잇는 것이다.
그런데 오디세이아와 일리아스라는 두 가지 시는 트로이 공략이 있은 뒤에 지어졌을 텐데, 그 공략을 벌였던 그리스 인들은 글을 알았고, 그 공릭을 노래한 시인은 글을 몰랐다 는 것이 별로 타당해 보이지 않는다. 문제의 시들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릇이 각인되어 남아 있다가, 상당 한 시간이 흐른 뒤에 어렵사리 글로 기록되면서 집대성되었 다. 호메로스의 시가 다른 시들과 비교되면서 온전히 매력을 드러내게 된 것은, 그리스에서 글로 쓰인 책과 시가 늘어나 기 시작할 때부터였다. 다른 시인들은 글로 썼는데, 호메로스만 노래로 시를 지어 읊었다. 그런데 그 숭고한 노래가 황 홀하게 경청되는 일이 그치게 된 것은 스스로 느끼지도 못하는 것에 대하여 판단하려고 참견하는 미개인들이 유럽을 가 득 메웠을 때였다.
제7장 그대 운율에 대하여
뒤클로의 이런 설명과그 행간의 맥락을 미루어 생각해 보면, 불어에서는 (그리스어의 경우와 다르기 때문에) 음악적인 음조가 아닌,운율 음조와 목소리 음조만 인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이 불어에 철자 상의 악상을 붙여서 쓰기는 하지만 그걸 쓴다고 해서 발음에 영향을 주는 것은 결코 아 니다. 악상 시르콩플텍스는 어떤 글자가 삭제되었다는 걸 표시해 줄 뿐이고, 악상 그라브는 장소를 뜻하는 부사 ou를 접 속사 ou와 구별하거나 전치사 a를 동사 a와 구별하기 위해 쓰일 뿐이다. 이런 악상 부호는 (서로 혼동되기 쉬운) 단음절 어들 사이에 시각적인 구분을 해 줄 뿐, 발음상으로는 아무 것도 해 주는 것이 없다77. 그처럼 프랑스인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음조의 개념은 그들의 언어에서 사용되는 악상 부호의 명칭에 전혀 적합하지 않다.
56
이 모든 것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원칙이 확인된다. 자연적인 진보를 통해 문자화되는 모든 언어는 그 성격이 변한다. 명료함을 얻는 대신에 힘을 잃는 것이다. 문법과 논리를 완 성하려고 집착할수록 그런 진보가 가속된다. 어떤 언어를 썰 렁하고 단조롭게 만들려면, 그 언어를 말하는 민중 속에 교 육 기관을 세우기 만 하면 된다.//
58.
//글의 의미를 규정하는 부호들과 발음올 조정하는 부호들 사이에는 차이가 꽤 있다. 글로는 매우 명료하면서도 말로는 사용할 수는 없는 그런 언 어를 자음들만으로 만들어 내는 일은 쉬울 것이다. 대수학이 어떤 면에서 그런 언어의 성격을 지닌다. 어떤 언어가 발음 에서보다 철자법에서 더 명료하다면,그건 말로 사용되기보 다 글로 더 많이 사용되었다는 징후다.//
59.
제8장 언어 기원에 있어서 일반적인 차이와 지역적인 차이
내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모두 일반적 관점에서 생각하는 원시 언어들과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것들이 지속되며 만들어 내는 진보를 설명하는 데에 적합하지만,그 언어들의 기원과 상호 차이점들을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 그 언어들을 구별하는 주요인은 지역적인 것이고, 그런 요인은 언어가 발생하는 풍토와 언어가 형성되는 방식에서 비롯된다. 북방 언 어와 남방 언어들 사이에 나타나는 일반적이고 특징적인 차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로 그 요인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
인류는 더운 지역에서 태어나 추운 지역으로 확산된다. 추운 지역에서 인구가 증가하고, 이어서 더운 지역으로 다시 역류한다. 이런 작용과 반작용을 통해 지구상에서 격변이 일 어나고, 주민들 사이에 지촉적인 인구 이동이 벌어진다. 우리는 언어의 기원을 연구함에 있어서 자연의 질서 그 자체를 따르려고 노력해 보자. 본론에서 좀 길게 벗어나더라도 자주 언급되어 진부할지 모르는 주제에 대해 언급하려고 한다. 인 간 제도들의 기원을 찾기 위해서는 항상 이 주제를 되짚어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63.
제9장 남방 언어의 형성
최초의 인간들은 사냥꾼이었거나 목동들이었지, 밭을 가는 농부는 아니었다. 최초의 재산은 가축 떼들이었지,논밭이 아니었다. 토지를 서로 나누어 가지기 전에는, 아무도 그 것을 경작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농업은 도구가 필요한 기술이다. 추수할 씨앗을 뿌리는 일은 미래에 대비하는 것이 다. 사회생활을 하는 인간은 자신의 활동 범위를 넓히려 하 지만, 고립되어 사는 인간은 활동 범위를 줄이려 한다. 자신 의 눈이 볼 수 있고 팔이 닿을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면, 그에게는 더 이상 권리도 소유권도 없다. 키클로페스82 족이 각자 자기 동굴 입구에 돌을 굴려다 쌓아서 울타리를 만들 때 자신과 가축은 안전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법이 보살펴 주지 않는사람의 수확물은 누가 지켜 줄 것인가?
//초기에 인류가 흩어져 살았던 동안에, 가정을 이루어 주거가 정착될 때까지 농경 생활은 없었다. 정착하지 않는 민족은 땅을 경작할 줄 모른다. 옛날에 유목 민들이 그랬고, 천막 생활하는 아랍인들이 그랬고, 마차 속 에서 생활하는 스키타이인들이 그랬다. 오늘날에도 유랑하 는 타르타르인들과 아메리카 야생인들이 여전히 그렇다.
우리에게 기원이 알려진 모든 민족들 중에서 최초의 미개인들은 일반적으로 농사지어 곡식을 먹기보다 탐욕스럽게 육 식을 했던 것으로 밝혀진다. 그리스인들은 땅을 경작하도록 처음 가르쳐 준사람의 이름을 이야기한다. 그들도 세월이 많 이 흐른 뒤에야 이 기술을 알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들은 트립톨레모스83 이전에는 도토리만을 먹 었다고 덧 붙이기도 하는데,그것은 있을 법한 일이 아니고, 그들 자신의 역사와도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트립톨레모스가 육 식을 금지하기 이전에 고기를 먹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 은 이런 금지에 대해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 같다.
//
사람들이 처음으로 케이크를 먹은 것은 인류의 성찬식이나 다름없었다. 사람들이 정착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자 신들의 움막 둘레에 조금씩 땅을 개간했다. 그것은 밭이라기 보다 오히려 정원에 가까웠다. 조금 거둬들인 곡식을 두 개 의 돌 사이에 놓고 빻았다. 그것으로 사람들은 몇 개의 케이크를 만들어 잿더미 속이나 숯불 위에 아니면 뜨거운 돌 위 에다 놓고 구웠다. 그것은 잔치 때나먹는 것이었다. 이런 고 대 풍습은 유대인들 사이에서 유월절에 성수되었고, 페르시아와 인도에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지켜진다. 그런 곳에서는 발효하지 않은 빵만 먹는다. 보통 때는 이런 빵을 판 모양으 로 얇게 구워서 식사 때마다 먹는다. 사람들은 빵이 더 많이 필요할 때만 발효시킬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적은 양의 빵 으로는 발효가 잘 되지 않기 때문이다.
70~73.
이 런 혼미한 상태에서도 살아가기는 해야 했다. 가장 활동적이고 가장 건장한 사람들이 항상 앞장섰는데,이들은 과일과 사냥만으로 살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잔인하게 살생을 즐기는 사냥꾼들이 되었다. 시대가 흐름에 따라 전사,정복자, 권력 찬탈자가 되었다. 역사는 이런 초창기 왕들 이 저지른 범죄들로 기념비를 더럽혔다. 전쟁과 정복은 인간 사냥과 다름없었다. 인간을 정복한 그들이 피정복자들을 잡 아서 먹지만 않았을 뿐이다. 그 후계자들이 배웠던 것은 바 로그 점이다.
덜 활동적이고 더 온순한 대다수 사람들은 가능한 한 빨리 정착하고서 가축을 양식으로 삼기 위해 붙잡아 모아 길을 들 임으로써 인간의 목소리에 순종하도록 만들었고, 가두어 지 키며 증식시키는 법을 배웠다. 이렇게 하여 목가적인 삶이 시작되었다.
인간의 생업은 그것을 원하는 욕구와 더불어 펼쳐진다.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세 가지 방식,즉 수렵, 가축 사육, 농사 중에서 첫 번째인 수렵은 육체에게 힘을 쓰며 손재주와 달리 기를 숙련토록 시키고,정신에게는 용기와 꾀를 내도록 만든 다. 그것은 인간을 강건하고 사납게 만든다. 사냥꾼들의 고 장은 오랫동안사냥의 터전이 되지 못한다.88 먼 곳으로가서 사냥감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말타기가 생겨난다. 도망가는 사냥감을 잡아야 한다. 그래서 투석기, 화살,투창 둥의 경무 기들이 만들어진다. 목가적 기술은 휴식과 한가로운 정념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데, 가장 자급자족적인 기술이다. 그것 은 별로 힘들이지 않고 인간에게 먹고 입을 것을 공급해 준 다. 그것은 인간에게 살 곳까지 제공해 준다. 초기 목동들의 천막은 짐숭 가죽으로 만들어졌다. 노아의 방주와 모세의 성 막 지붕도 짐승 가죽이었다. 농사로 말하자면, 더 느리게 생겨나지만, 일단 생겨나면 온갖 기술에 관계한다. 그것은 소 유권과 통치와 법 그리고 점차적으로 선악의 지식과 떼 어 놓을 수 없는 인류의 곤궁과 범죄를 가져온다.<A lʼégard de lʼagriculture, plus lente naître, elle tient à tous les arts; elle amene la propriété, le gouvernement, les loix, & par degré la misère & les crimes, inséparables pour notre espece, de la science du bien & du mal.> 그리스인 들은 트립톨레모스를 유익한 기술의 발명자로만 여겼던 게 아니라 교사로, 더 나아가 그들에게 최초의 규율과 법을 전 수한 현자로도 여겼다. 반면에, 모세는 농업을 부정적으로 판단한 것 같다. 그는 농업의 창시자가 악인이어서 하느님이 그의 제물을 거부하는 것으로 묘사했기 때문이다.913 그 최초 의 농부는 자기 성정을 통해 농사 기술이 나쁜 효과를 일으 킨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던 것 같다.〈창세기〉의 저자는 헤로 도투스보다 더 멀리 보았던 것이다.
사회와 관련하여 고찰되는 인간의 세 가지 상태가 앞에서 이야기한 구분과 잘 맞아떨어진다. 야생인들은 사냥꾼이고, 미개인들은 목동이며, 개화된 인간은 농부이다<Le Sauvage est chasseur, le Barbare est berger, lʼhomme civil est laboureur.>.
그러므로 우리가 기술의 기원을 탐구하든, 초기의 풍속을 관찰하든, 원칙적으로 모두 생존에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는 수단들과 관련된다. 사람들을 결집시키는 수단들은 원칙적 으로 기후와 토질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므로 다양한 언어와 그들 사이의 대 립적인 성격도 같은 원인들로 설명해야 한다.
74~75.
지상에 봄이 영원하고,어디에나 물과 가축과 방목장이 널려 있으며, 사람들이 자연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 일단 골 고루 사방에 흩어졌다고 가정해 보라. 나는 그들이 어찌 원 초적인 자유를 포기하면서 호젓하고 목가적인 삶을 버렸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하겠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데 그 들이 타고난 게으름91에 그토록 잘 어울리는 삶을 버리고 떠 난다는 것이 상상하기 힘든 것이다. 사회를 형성하면 불가피 하게 나타나는 예속과 노동과 곤궁을 스스로 짊어지려고 그 런 선택을 하리라고 상상하기 힘들다는 말이다.
<저자주91. 인간이 얼마만큼 게으름올 타고나는지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다. 마치 자고 먹기 위해서, 전혀 움직이지 않고 지내기 위해 사는 것 같다. 그들은 굶어 죽지 않을 만큼만 움직여서 이을 해결한 다. 그 달콤한 게으름만큼 미개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상태를 좋아 하도록 유지시키는 것은 없다. 인간을 불안하게 하고 준비성을 갖게 하며 활동적이게 만드는 정념은 사회 속에서만 생겨난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자신을 보존하려는 정념 다옴에 오는 가장 강 한 정념인 것이다. 인간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보면, 우리 주위에 서도 볼 수 있는 일이지 만, 각자가 일을 하는 것은 휴식을 갖기 위 함 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를 부지런하게 만드는 것은 역시 그 게으름이다.>
77.
<저자주96. 불은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에게도 큰 즐거움을 준다. 그들 이 그것을 보는 일에 익숙해지거나 따뜻한 열기률 느낄 때면 말이 다. 적어도 그들의 새끼를 따뜻하게 해주기 위해서는. 우리에게만큼 이나 그들에게도 불은 유익할 것이다. 그렇지만 야생 동물이든 가축이든, 우리처럼 그렇게 불올 다루는 솜씨를 가지고 있다는 말은 들 어본 적이 없다. 인간보다 먼저 잠시나마 일종의 사회를 형성하는 억측의 존재들을 생각해 보더라도,그들의 지능이 부싯돌로 불꽃을 일으켜 불을 지피거나 버려진 불을 보존할 정도까지 이를 수는 없었 다. 내가 믿기로 철학자들은 우리를 아주 공개적으로 조롱한다. 그들 의 글을 보면, 우리를 사실상 짐승으로 간주하고 있는 셈이다.>
인간의 위장과 내장은 날고기를 소화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인간의 입맛은 보통 그것올 견뎌내지 못한다. 방금 언급한 에스키모인들을 제외하면, 야생 인들조차도 고기를 구워 먹는다. 고기를 굽는 데 필요한 불은 보기에 즐겁고 몸 에 기분 좋은 열기를 제공해 준다. 불꽃은 동물을 달아나게 하지만, 인간을 유인한다.96 사람들은 공동의 불더미 주위에 모여서 축제를 벌이며 춤을 춘다. 그곳에서 자주 만남으로써 이루어지는 정다운 유대 관계는 인간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 에 동포들과 가까워지게 만든다. 그리하여 이 소박한 불더미 위로 마음속 깊이 인간애의 첫 감정을 느끼게 만드는 신성한 불꽃이 타오른다.
더운 고장에서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샘물과 강이 또다른 만남의 터였는데, 인간이 불 없이는 살아도 물 없이는 살 수 없는 만큼, 그런 장소들이 더욱더 필요했다. 특히 가축 을 길러 먹고사는 야생인들에게는 공동의 물터가 필요했다. 고대의 역사는 실제로 그들의 거래와 다툼이 일어나기 시작 한 곳이 바로 그런 곳들임을 알려 준다. 비가 잘 오는 곳에 서는 물을 쉽게 얻을 수 있기에,주민들의 교제가 늦어질 수 있다. 반대로, 건조한 곳에서는 우물을 파고 가축에 물을 먹 이기 위해 시냇물을 끌어오는 일에 협력해야 했다. 우리는 거기에서 까마득한 옛날부터 사람들이 서로 협력했던 사실 을 상상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런 고장은 사막으로 남겨졌거 나 인간 노동으로 살만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모든 걸 우리 입맛대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으므로 몇 가지 성찰해 볼 필요가 생긴다.
80~81.
//역사에 언급된 최초의 민족들이 기름진 땅이 나 편리한 강가에 살지 않았던 것은, 그런 유복한 풍토가 황량해서 그랬을 리는 없다. 수많은 주민들이 서로의 도움 없 이도 살 수 있어서 서로 간에 소통 없이 자기 가정 속에 고립 된 채 오랫동안 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물에서만 물을 구할 수 있게 메마른 곳에서는 우물을 파기 위해 모여야 했 고, 적어도 우물을 사용하는 데 서로 합의하기 위해서라도 함께 모일 필요가 있었다. 더운 고장에서 사회와 언어가 생 겨난 기원은 바로 그러했음이 틀림없다.
거기에서 가족 간의 최초 유대 관계가 형성되었고, 남녀 간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처녀는 살림살이를 위해 물을 길러 왔고, 총각은 가축에게<옮. 자신의 짐승에게> 물을 먹이러 왔다. 어린 시절부 터 같은 것들만 익숙하게 보아오던 눈에는 그곳에서 만나는 상대들이 더 정답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상대들에게 마음이 끌리며 설레었다. 알 수 없는 끌림에 그는 덜 거칠어 졌고,혼자가 아니라는 즐거움을 느꼈다. 물은 어느새 더 필요해졌고,가축은 더 자주 목이 말랐다. 사람들은 서둘러 그 곳에 왔고, 아쉬운 마음으로 떠나곤 했다. 시간을 표시하는 아무런 것도 없던 그 행복한 시절에는, 시간에 신경 써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시간의 척도는 즐거움과 지루함 밖에 없었다. 여러 해 나이 먹으며 시간을 이겨낸 떡갈나무 아래 에서 뜨거운 청춘들이 그들의 성<옮. 사나움, sa férocité>을 점차 잊어버렸다. 서로 에게 조금씩 길들여졌다. 서로 자신을 이해시키려고 애쓰면 서 사람들은 스스로 설명하는 법을 배웠다. 거기에서 최초의 축제가 벌어졌다. 발로는 즐겁게 뛰었고, 열성적인 몸짓은 충족될 줄 몰랐으며,목소리에는 열정적인 어조가 따라붙었다. 기쁨과 욕망이 뒤섞여서 한꺼번에 느껴졌다. 결국은 그 런 곳이 민족의<옮. 민중의> 진정한 요람이었다. 수정처럼 맑은 샘터에서 사랑의 첫 불꽃이 피어났던 것이다.<La fut enfin le vrai berceau des peuples, & du pur cristal des fontaines sortirent les premiers feux de lʼamour.>
아니 뭐라고! 그러면 그 시대 이전에는 인간이 땅속에서 불쑥 태어났다는 말인가? 남녀가 결합하지도 않고, 아무도 서로 합의한 게 없이 자식들이 저절로 태어나 세대를 이어 왔다는 말인가? 아니다. 가정은 있었지만, 민족이 전혀 없었 다는 이야기다. 가정의 언어는 있었지만 민중의 언어가 결 코 없었다. 결혼은 있었지만 사랑이 전혀 없었다. 가족마다 자족했고, 자기네 혈통으로만 대를 이었다. 같은 부모로부터 태어난 아이들이 함께 성장하면서 서로 자기 의견을 설명하 는 법을 터득했다. 나이가 들면서 남녀가 구별되었다. 그들 을 결합시키는 데에는 본능적 끌림으로 충분했다. 본능이 열 정을 대신했고, 친숙함이 이상형을 대신했다. 그들은 남매간 의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남편과 아내가 되었다101. 거기에는 말문을 꼭 열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고, 열렬한 열정의 어조를 습관이 되도록 토해낼 만한 동기가 전혀 없었다. 함 께 해내야 할 일이 있어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할 필요가 생기면 말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일이 흔치 않았고 또 그 럴 만큼 급할 것도 없었다. 한사람이 샘을 파기 시작해 놓으 면, 다른 사람이 이어서 완성했는데, 그런 걸 조금이라도 서 로 합의해서 할 필요조차 별로 없었고,때로는 아예 서로 얼 굴 보는 일도 없었다. 한마디로, 온화한 기후와 비옥한 땅에 서 주민들이 말을 하도록 하려면 아주 유쾌한 정념의 활력소 가 필요했다. 욕구의 산물이 아니라 쾌락<옮. 즐거움>의 산물<filles du plaisir & non du besoin>로서 최초의 언어들은 오랫동안 그 기원의 징표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것 들의.매혹적인 어조는 해당 언어가 생기도록 이끌었던 감정 들이 없어질 때 함께 사라졌다. 이때 인간들 사이에 개입된 새로운 욕구들<nouveaux besoins>이 각자 자신만을 생각하게 만들었고, 자기 마음을 내면에 숨기도록 강요했다.
84~86.
제10장 북방 언어의 형성
길게 보면 모든 인간이 비슷해진다. 그러나 진행 순서는 다르다. 자연이 풍요로운 남방의 풍토에서는 정념으로부터 욕구가 생긴다. 자연이 메마르고 추운 고장에서는 욕구로부 터 정념이 생긴다. 그리고 언어는 궁핍의 우울한 산물인데 그 엄혹한 기원에서 비롯되는 영향을 간직한다.
89.
제11장 이런 차이들에 관한성찰
사람들의 활동을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모든 관계 속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에게 그렇게 하도록 가르쳐 준 사람은 없다. 우리가 타인을 대신할 때, 우리는 항 상 그 타인 그대로가 아니라 변형된 우리로서 타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성을 바탕으로 그들을 판단한다 고 생각할 때,우리는 그들의 편견을 우리의 편견과 비교할 뿐이다. 어떤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가 아람어를 좀 읽을 줄 안다고 코란을 뒤적이면서 미소를 짓는다. 그런데 만일 그가 웅변적이고 박력 있는 이 언어 속에서 마음올 사로잡기 이전 에 귀를 먼저 현혹하는 그 낭랑하고 설득력 있는 목소리로 계속해서 열정 가득한 음조로 복음을 외치면서 마호메트가 손수 코란을 전하는 것을 들었다면, 그는 이렇게 외치며 땅 바닥에 엎드렸을 것이다. “위대한 예언자시여, 하느님이 보내신 이여, 우리를 영광으로 인도하소서. 순교자가 되게 하 소서. 우리는 당신올 위해 이기길 원하며,아니면 목숨도 바 치길 원하옵니다;'라고. 광신은 언제나 우스꽝스럽게 보인 다. 왜냐하면 광신은 우리들 사이에 서로 이해할 수 있도록 공유시키는 목소리를 결코 갖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광신자들조차도 진정한 광신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사기꾼이거나 아니면 미친 자들에 불과하다. 우리의 언어들은 계시받은 사람들을 위한 억양 대신 악마 씌운 사람들을 위한 외침만 담고 있다.
96~97.
제12장 음악의 기원,그리고 관계들
최초의 조음이나 최초의 음성은 이 사람 저 사람 말을 하도록 만드는 정념의 유형에 따라 최초의 목소리로 이루어졌 다. 화가 나면 혀와 입천장으로 조음되는 위협적인 외침들이 쏟아진다. 하지만 상냥한 목소리는 그보다 부드러운데, 성문 이 그 목소리를 조절하여 하나의 음성을 만들기 때문이다. 다만 거기에 결합되는 감정에 따라 음조가 더 빈번하거나 더 드물고. 억양이 다소 높아진다. 그렇게 음률과 음성이 음절 을 이루며 생겨난다. 정념이 모든 발성 기관으로 하여금 말 하게 만들고, 목소리를 그 울림으로 조율한다. 그렇게 운문 과 노래와 말은 뿌리가 같다. 내가 앞서 언급한 적이 있는 우물가에서 오가는 최초의 이야기는 노래였다. 언어를 통해 주 기적이고 규칙적인 리듬의 반복과 음조의 선율적 억양이 구연되면서 시와 음악이 탄생하였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유복한 풍토와 행복한 시대에는 그 모든 것이 언어 자체일 뿐 이었다. 그때 타인과의 관계에서 오직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들뿐이 었다.
최초의 역사, 최초의 연설, 최초의 법은 운문으로 되어 있었다. 산문 이전에 시가 있었다. 그것은 당연했다. 왜냐하면 정념이 이성보다 먼저 말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음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선율 외에 다른 음악이란 것이 없었 고,말의 다양한 음성 외에 다른 선율도 없었다. 음조는 노래 를 만들고, 음링은 박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목소리 의 조음뿐만 아니라 음성과 리듬을 사용하면서 말을 했다. 스 트라본이 말하기를, 옛날에는 말하는 것과 노래하는 것이 같 은 것이었다고 한다. 이는 시가 웅변의 근원임을 보여준다고 그가' 덧붙여 말했다.1에 시와 응변은 같은 근원을 가지고 있으 며,처음에는 동일한 것이었다고 말해야 했던 것이다. 최초의 사회들이 결성되는 방식을 바탕으로 생각해 볼 때, 사람들이 최초의 역사를 운문으로 썼고, 최초의 법을 노래로 불렀다는 것이 놀랄 만한 일이었을까? 최초의 문법가들이 그들의 설명 법을 음악에서 찾았고,그들은 문법 선생님인 동시에 음악 선 생님이었다는사실이 놀랄 만한 일이었겠는가?105//
목소리와 조음만 사용하는 언어는 그러므로 절반의 풍요 로움밖에 누리지 못한다. 그런 언어가 사고를 전달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감정과 이미지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리듬 과 음성이, 다시 말해 선율이 더 필요하다. 바로 그것이 그리 스어에 있었지만 우리 언어에는 없는 것이다.
101~102.
제13장 선율에 대하여<De la Mélodie>
인간이 자신의 감각<ses sens>에 의해서 변모한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변화들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원인들을 혼동한다. 우리는 감각이<옮, 감각작용이, sensations> 미치는 영향력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는 감각들이<감각작용들이> 혼히 감각으로서<감각작용으로서> 뿐만 아니라 기호나 이미지로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과 그것의 정신적 효과는 정신적 원인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림이 우리에게 야기하는 감정들 <les sentimens>이 색에서 오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음악이 우리의 영혼에 미치는 영향력은 음성들의 작품이 아니다. 음영이 잘 깃들어 아름다운 색들이 시각을 즐겁게 하지만, 그 즐거움은 순전히 감각에서<옮, 감각작용에서, sensation> 오는 것이다. 그 색들에 생명과 영혼을 불어넣는 것은 소묘<le dessein>, 즉 모방<lʼimitation>이다. 우리의 정념을 감동시키는 것은 그 색들이 표현하는 정념이다. 우리에게 영향을 미쳐오는 것은 그 색들이 표상하는 대상들<les objets>이다. 흥미와 감정은 색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감동적인 그림의 선은 판화에서도 역시 감동적이다. 그림에서 그 선을 제거해 보라, 그러면 색이 더 이상 아 무런 역할도 하지 못할 것이다.
선율은 그림에서 소묘가 하는 소묘가 하는 역할을 바로 음악에서 수행한다. (음악에서의) 선과 형상을 나타내는 것이 선율인데, 그 음률과 음성은 (그림에서의) 색에 불과하다. 선율이 소리들의 연속일 뿐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을지 모른다. 물론이다. 하지만 소묘 역시 색의 배치일 뿐이다. 웅변가는 자신의 글을 쓰기 위해 잉크를 사용한다. 그렇다고 해서 잉크가 아주 웅변적인 용액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108~109.
그는 계속해서 말할 것이다. “프랑스 화가들은 아마도 무지개를 보았을 것입니다. 이런 자연으로부터 그들은 어떤 음 영의 느낌과 색조의 직감을 받았을 수 있습니다. 나는 여러 분에게 예술의 진정한 대원칙을 제시했습니다. 나는 예술에 대해 뭔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든 예술에 대해, 모든 학문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색의 분석,프리즘의 굴 절에 대한 계산은 자연 속에 오직 존재하는 정확한 비율과 그 모든 비율의 법칙을 제공해 줍니다. 우주 속의 모든 것은 비율일 뿐입니다.그러므로 그림을 그릴 줄 알면 모든 것 을 압니다. 색을 다를 줄 알면 모든 것을 압니다.”<옮. 루소가 비판하는 관점으로서 예시한 것이다>
110.
그러므로 회화가 보기에나 좋은 식으로 색을 배합하는 기술이 아닌 것처럼, 음악도 듣기에나 좋은 식으로 음성을 배합하는 기술이 아니다. 만일 그것에 불과하다면, 두 가지 모두 예술이 아닌 자연과학에 해당할 것이다. 예술의 반열에 오르는 것은 모방뿐이다. 그럼 무엇이 회화를 모방의 예술로 만드는가? 소묘가 바로 그것이다. 음악을 또 다른 모방의 예 술로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선율이다.
110~111.
제14장 화음에 대하여
음성의 아름다움은 자연에 속하는 것이다<La beauté des sons est de la nature>그 효과는 순전히 물리적이다. 소리 나는 물체와 그 소리의 수많은 분음들 에 의해 움직이는 여러 가지 공기 입자들의 결합에서 생겨나 는 것이다. 그런 모든 것이 어떤 유쾌한 감각을 제공한다. 세 상 모든 사람들이 아다운 소리를 들으며 기쁨을 누리게 되 리라. 그런데 그들에게 친숙한 가락으로 흥이 오르지 않으면 기쁨이 전혀 감미롭지 못할 것이고, 황홀한 기분을 만끽하지 는 못할 것이다. 우리 취향으로는 아주 아름다운 노래라 할 지라도, 그 노래에 전혀 익숙하지 않은 귀에는 언제나 별로 감동을 주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사전을 찾아봐야 알 수 있 는 언어나 마찬가지다.
이른바 화음<Lʼharmonie>라는 것 역시 유리하지 못한 경우다. 관습화된 아름다움만을 지니기 때문에 화음은 그것에 길들지 않은 귀에는 전혀 즐거움을 주지 못한다. 그것을 음미하며 감상하 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습관을 들여야 한다.//
115.
우리가 음의 비율과 화성법을 천 년 동안 따져본다고 할때,이런 예술에 대하여 어떻게 모방의 기술을 적용하지 않겠는가? 그 모방의 원칙이라는 것은 어디에 있는가? 화음은 무엇의 징표인가? 그리고 음의 동조와 우리의 정념 사이에 는 어떤 공통점이 있는가?
똑같은 질문을 선율에 대해서도 해 본다면, 답이 저절로 온다. 그것은 이미 독자들의 정신 속에 있다. 선율은 음성의 억양을 모방함으로써 불평, 고통이나 즐거움의 외침, 위 협,탄식 등을 표현한다. 정념의 모든 음성 신호는 선율의 분출에 해당한다. 선율은 언어의 음조를 모방한다. 그리고 선율은 개별적인 고유 언어에서<dans chaque idiome> 영혼의 움직임에 영향을 받은 어투를<les tours> 모방한다. 그것은 모방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parle> 한다. 그런데 선율의 언어<langage>는 조음이 되지 않을지라도 생생하고 강렬하며 열정적이어서 말 자체보다<la parole même> 백 배 이상 에너지가 있다. 바로 여기에서 음악적인 모방의 힘<la force des imitations musicales>이 생겨난다. 감성적 인 마음에 미치는 노래의 영향력이 바로 여기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화음은 몇 가지 변조 규칙을 통해 연속되는 소리들 을 결합함으로써 일정한 방식들로 선율과 협력한다. 음조를 더 정확하게 함으로써, 귀에 그 정확성을 확실하게 증언해줌 으로써, 협화음적이면서 미세한 음조에 결부된 음정들을 대 비시켜 확정해줌으로써 말이다. 그러나 화음은 선율에 방해 를 가하기도 하면서 그로부터 에너지와 표현력을 제거한다. 화음은 열정적인 음조를 지워버리고 화성적인 음정으로 대체한다. 화음은 웅변적인 성조에 들어 있는 만큼이라도 노래 에 있어야 할 선율을 (장조와 단조라는) 단 두 가지 선법에 예 속시킨다. 화음은 자기 체계 속에 들어오지 않는 많은 소리 와 음정을 지워버리거나 파괴한다. 한마디로, 화음은 말과 노래를 너무 분리시킨다. 그래서 그 두 가지 언어는 서로 경 합하고 대립하면서 모든 진실성을 상호 제거하고,감동적인 주제 속에서 순조롭게 어울릴 수가 없다. 그로 인해 사람들 은 강렬하고 진지한 정념을 노래로 표현하는 것을 항상 우스 꽝스럽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 언어에서 그러한 정념이 전혀 음악적인 억양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과, 북 방 사람들이 백조처 럼 노래하면서도 죽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게다가 화음에만 좌우되는 것처럼 보이는 표현들조차도 화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천둥소리,물소리, 바람 소리, 폭풍 소리는 간단한 화음으로 표현되지 못한다. 아무튼 소리 만으로는 인간 정신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 대상들이 서로 통하기 위해서는 말을 해야 한다. 어떤 모방에서든 언제나 일종의 이야기로 자연의 목소리를 보충해야 한다. 잡음 을 통해 잡음을 표현하고자 하는 음악가는 잘못 생각하는 것 이다. 그는 자기 예술의 단점도 장점도 알지 못한다. 그는 안 목도 지식도 없이 자신의 예술을 평가한다. 노래로 소리를 표현한다고 그에게 가르쳐줘야 할 터다. 만일 그가 개구리를 울게 한다면, 개구리가 노래를 부르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그에게 가르쳐 줘라. 모방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감동을 줘서 즐겁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의 따분한 모방은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에게도 흥미를 끌 지 못하며, 전혀 감명을 주지 못한다.
116~119.
제15 장 흔히 정신적인 영향을 받는다 가장 생생한 감각은
우리의 신경에서 일으키는 파동에 의해서만 음성을 고려한다면, 음악과 그것이 마음에 미치는 힘의 진정한 원칙을 찾기 힘들 것이다. 음성은 선율 속에서 소리로써 뿐만 아니 라 정서와 감정의 신호로써도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리 하여 음성들은 자기 이미지를 표현하여 우리가 분간하도록 하는 그런 움직임을 일으킨다. 우리는 동물에게서도 이런 정 신적 효과의 일단을 볼 수 있다.//
우리의 감각의 커다란 영향력이 정신적인 요인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왜 미개인들에게는 무렇지도 않은 느낌에 대해서 우리는 그토록 민감한 것일까?//
123~124.
그러므로 감각의 영향력에 대해 고찰하려는 사람은 감각기관을 통해 받아들이더라도,우연한 요인에 불과할 수 있는 지적이고 정신적인 느낌과 순수하게 감각적인 느낌을 분리 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감각적인 대상들에게 그들이 갖 지 못한 영향력을 부여하거나 그것들이 우리에게 드러내어 영혼의 감정을 사로잡는 어떤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오류를 피해야 한다. 색과 음성은 표상과 기호로서 많 은 것을 할 수 있지만, 단순한 감각 대상으로서는 그렇지 못하다. 음성과 화음의 소절들이 어쩌면 한순간 나에게 즐거움 을 줄 것이다. 하지만 나를 매료하고 감동시키려면, 그 소절 들이 음성도 화음도 아니면서 나도 모르게 나를 감동시키는 무엇인가로 나에게 다가와야 한다. 유쾌하면서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노래들 역시 싫증이 난다. 왜냐하면 가슴이 귀에 즐거움을 주는 것만큼 귀가 가슴에 즐거움을 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들을 더욱 발전시켜 감으로써 사람들은 고대 음악에 관해 어리석은 추론을 피하게 되었다고 나는 생 각한다. 하지만 영혼의 모든 활동을 물질화하고, 인간 감정 에서 도덕성을 모두 제거하려고 애쓰는 이 시대에, 만일 새로운 철학이 미덕에 대해서만큼 훌륭한 심미안에 대해서도 해롭지 않다면, 내가 오해한 것일 테다.
재16장 색과 음성 사이 의 유사성에 대한 오해
그렇게 감각은 저마다 고유한 영역이 있다. 음악의 영역은 시간이고, 그림의 영역은 공간이다. 동시에 들리는 소리들을 되풀이하거나 색깔들을 차례로 펼쳐놓는 것은 그것들의 구 조를 바꾸는 일이다. 귀가 할 자리에 눈을 놓는 일이고, 눈이 할자리에 귀를 놓는 일인 것이다.
130.
당신은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각각의 색상이 빛의 굴절 각도에 따라 결정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소리는 주어진 시간 에 물체가 진동하는 횟수에 따라 결정된다. 그런데 굴절각과 진동수의 관계들은 동일하므로 분명하게 유사성 이 있다.” 그 렇다고 치자. 하지만 그 유사성은 이성에 속하는 것이지 감 각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 문제가 아니다. 우선, 굴절각은 감각적이면서 측정할 수 있지만,진동 수는 그렇지 못하다. 진동체는 공기의 작용에 따라 끊임없 이 진동의 크기를 바꾸면서 소리도 바꾼다, 색은 지속되고, 소리는 사라진다. 그러므로 새로 생기는 소리가 사라진 소리 와 같다고 확언할 수 없다. 게다가, 각각의 색상은 절대적이 고 독립적인 반면에 각각의 소리는 우리에게 상대적일 뿐이 어서 비교를 통해서만 구별된다. 소리는 그 자체로 식별되는 절대적인 특성을 결코 갖고 있지 않다. 하나의 소리는 다른 소리에 비해서 낮거나 높고 강하거나 부드러울 뿐이다. 소리 그 자체는 그런 게 전혀 없다. 화성 체계 속에서도 하나의 음 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본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강조음도 주음도 화성음도 기본음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모 든 특성은 관계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음 체계 전체가 낮은 음 체계에서 높은음 체계로 변할 수 있어서 각각의 음은 음 체계가 음정을 바꿈에 따라 체계 내에서 순서와 위치를 바꾸 기 때문이다. 하지만 색들의 특성은 결코 상호 관계로 이루 어지지 않는다. 노란색은 빨간색이나 파란색에 상관없이 노 랗다. 어디서나 그것은 감지될 수 있고 식별될 수 있다. 그러 므로 그 색상을 만들어내는 굴절각에 눈을 고정시키면, 항상 같은 노란색을 볼 수 있으리 라고 확신할 수 있다.
130
그로부터 우리는 그림이 자연에 더 가깝고 음악은 인간 예술에 더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된다. 또한 우리가 느끼는 바로 는 음악이 그림보다 더 우리의 흥미를 끄는데,그것은 정확히 말해서 음악이 인간과 인간을 더 가까워지게 하고, 우리에게 늘 동류 인간을 생각토록 하기 때문이다. 그림은 혼히 생기 없이 죽어 있다. 그림은 당신을 사막의 심연으로 데려갈수도 있다. 하지만 음성 신호가 당신의 귀에 들리는 즉시 그것은 당신과 닮은 존재가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음성 신호들은 영혼의 목소리라 할 수 있다. 그 음성이 당신에게 고독을 이 야기한다면,그건 당신이 이미 그곳에 혼자 있지 않음을 말하 는 것이다. 새들은 지저귀고, 인간만이 노래를 한다. 사람들이 즉각 서로 소통하지 않고서는 노래도 교향악도 들을 수 없다. 감각하는 다른 존재가 현장에 있어 야 하는 것이다.
132.
음악가는 듣지 못하는 것을 묘사할<옮. 그릴, peindre> 수 있는 반면에 화가는 보지 못하는 것을 표현할<옮. 재현하여 그려낼, représenter> 수 없다는 것이 음악가의 큰 이점 중 하나다. 동적으로만 이루어지는 예술의 가장 놀라운 점은, 그것으로 쉼의 이미지까지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수면, 밤의 정적, 고독, 침묵까지도 음악으로 그려질 수 있다. 우리는 소음이 침묵의 효과를 내고,침묵이 소음의 효과를 낼 수 있음올 안다. 즉, 한결같게 단조로운 낭독에는 잠이 오다가, 그것이 중단되는 순간에 깨어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음악은 어떤 한 가지 감각을 통해 일으킬 수 있는 정서와 비숫한 것올 다른 감각으로 일으킬 때 우리에게 더 친근하게 다 가온다. 그리고 강한 인상을 받을 때에만 관계를 느낄 수 있 어서 그런 힘이 없는 그림은 음악이 주는 인상을 대신해서 모방해 줄 수가 없다. 자연이 모두 잠들더라도, 그 자연을 관 조하는 사람은 잠자지 않는다. 그러므로 음악가의 기술은 대 상의 존재가 관조자의 마음<le cœur du contemplateur>에 일으키는 움직임의 이미지로 그 대상의 무감각한 이미지를 대체하는 데에 있다. 음악가는 바다를 출렁이게 하고,화염을 타오르게 하고,냇물을 홀러 가게 하며, 비를 내려 급류가 불어나게 할 뿐만 아니라 무서 운 사막의 공포를 묘사하고, 지하 감옥의 벽을 캄캄하게 하 고, 폭풍우를 잠재우고,대기를 평온하고 청명하게 하며,전 원에 오케스트라로 어떤 새로운 신선미를 풍겨 줄 것이다. 그의 기술이 그런 걸 직접 표현하지는 않을 것이고, 다만 우 리가 그런 것들을 볼 때 느끼는 것과 동일한 감정들을 영혼 속에 불어넣을 것이다.
133.
제17장 예술을 해치는 음악가들의 오류
어떻게 모든 것이 우리를 내가 언급한 정신적 효과로 부단히 되돌아오게 하는지 보라. 그리고 음성의 힘을 공기의 작 용과 근육 세포의 진동으로만 생각하는 음악가들이 예술의 힘이 어디에 있는지를 얼마나 모르는지 보라. 그들이 예술을 순전히 물리적인 인상으로 재단할수록,그들은 예술을 그것 의 기원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본래의 활력을상실하게 만 든다. 말로 하는 음조를 버리고 화성법에만 집착하면, 음악 은 귀에 더 시끄러운 것이 되고, 마음에 더 즐겁지 못한 것이 된다. 음악은 이미 말하기를 그쳤고, 조만간 더 이상 노래하 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음악은 온갖 화음과 화성을 갖겠지만 그것으로 더 이상 우리에게 음악적인 감동의 효과 를 안겨주지 못할 것이다.
137.
제18장 그리스인의 음악 체계가 우리의 음악 체계와 무관한 이유
어떻게 이런 변화가 일어났는가? 언어의 특성이 자연적인 변화를 거치면서 생긴 일이다.
141.
<옮. 이 장에서는 고대 그리스의 음악 체계에서 현대 음악 체계까지의 변화를, 협화음과 화성법, 음계의 변화를 중심으로 다루고 있는데, 나보다는 음악 전공자의 평가가 필요하다.>
제19장 음악은 어떻게 퇴화했나?
언어가 발전하는 만큼 선율은 새로운 규칙들을 따르면서 모르는 사이에 예전의 활력을 잃어 갔고,음정을 조절하는 일은 억양을 세분하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예를 들면 이명동음 발성법을 사용하는 일도 그런 식으로 조금씩 사라져 갔 다. 연극은 음악적 발성의 형식을 일정하게 취하기도 했지 만, 그럴 때에도 정해진 양식에 따라서만 노래했을 뿐이었 다. 그리하여 모방의 규칙이 증가하는 만큼 모방 언어는 약 화되어 갔다.
147.
//그처럼 선율이 더 이상 말하기에 붙어 다니지 않고 어느새 따로 존립할 수 있게 되자 음악은 언어로부터 더 독립적이게 되었다. 그래서 또한 음악이 시의 억양과 가락이나 다름없던 때에 발휘했던 놀라운 역할을 멈 추게 되었고, 나중에 언어가 이성에 대해서나 행사했어야 할 영향력을 시의 정념에도 행사하려고 했을 때 음악은 그런 놀 라운 역할을 멈추고 말았다.//
148.
선율은 망각되고, 음악가들은 온통 화음에 관심을 쏟음으로써,점차 모두가 장르, 모드, 음계를 비롯하여 새로운 국면 의 새로운 주제로 쏠렸다.//
151.
이런 식으로,노래는 점차 그것의 기원이 되는 언어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예술이 되었고, 화성학이 목소리의 억잉블 망 각시켰다. 그리하여 음악은 순전히 물리적인 진동의 결합 효과에 국한되면서 이중적인 의미에서 자연적 목소리였던 때에 낳았던 정신적 효과를 상실했다.
152.
제20장 언어와 통치의 관계
이러한 진보는 우연하거나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세상의 흥망성쇠에 관련된 것이다. 언어는 본래 인간의 욕구에 따라 형성된다. 그러므로 언어는 바로 그 욕구의 변화에 따라 바뀌 고 변질된다. 설득이 공권력 구실을 했던 고대에는 웅변술이 필요했다. 공권력이 설득을 대신하는 오늘날에는, 그 웅변술 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그리하면 짐이 기쁘겠노라.”120라 는 말을 하는 데에는 설득의 기술이나 수사적인 말이 필요 없 다. 그렇다면 군집한 민중에게는 어떤 연설을 해 줄 일이 남 았을까? 설교일 것이다. 그런데 임명하는사람이 민중이 아닌 데 설교로 민중을 설득할 일이 뭐가 있으랴? 민중 언어는 웅변과 마찬가지로 완전히 쓸모없게 되었다. 그렇게 사회가 최 악의 모습을 취했다. 그런 사회에서는 대포와 돈이 아니고는 아무것도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이제 민중에게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것이다. 혹시 있다면 길모퉁이에 격문을 붙이거 나 가가호호 군대를 보내서 “돈을 내라”고 말하는 것뿐이다. 그런 말을 전하기 위해서는 아무도 불러 모을 필요가 없다. 오히려 신민들을 흩어지게 해야 한다. 그것이 근대 정치의 첫 번째 원칙이라 할수 있다.
인간의 자유를 꽃피우는 데 적합한 언어들이 있다. 그것은 울림이 있고, 운율이 있으며, 조화가 있는 언어들인데, 그건 연설과 뚜렷하게 구별된다. 우리의 언어는 사람들이 소파에 앉아 중얼거리기에 편하도록 만들어졌다, 우리가 아는 설교 자들은 그들이 말하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듣지도 못하는데 사원에서 설교를 잘 해 보려고 고심하며 땀을 홀린다. 한 시 간 동안 큰 소리로 외치면서 탈진한 뒤에 그들은 빈사 상태 로 설교 단상에서 내려온다. 분명, 그렇게 피곤하게 애쓸 필 요가 없었을 텐데 말이다.
옛날 사람들은 공공의 장소에서 자신의 말을 민중이 쉽게 알아듣게 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런 곳에서 온종일 서 로 불편해하는 일 없이 이야기를 나눴다. 장군들이 자기 군 대에게 연설을 하고, 청중은 그들의 말을 잘 알아듣고, 그러 면서 그들은 전혀 지치지 않았다. 역사서에서 장군들의 연설 내용을 기록해 넣으려고 했던 근대 역사가들은 그들로부터 조롱을 받는 셈이었다. 방돔121 광장에서 파리 시민에게 프랑스어로 연설하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라. 그가 고래고 래 소리 지르며 연설을 하면, 사람들은 그가 소리 지르고 있 다는 것을 알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헤로도토스122는 야외에 모인 그리스 민중에 게 자기 역사서를 낭독하곤 했는데,그때마다 모두 박수 갈채를 보내며 환호했다. 오늘날 어떤 아카데미 회원이 모여 앉은 공중 앞에서 연구 논문을 읽어준다면,그의 말은 장내 뒤쪽에 앉은 청중에게 거의 들리지 않을 것이다. 이탈리아보 다 프랑스에 광장의 선동가들이 더 많지 않은 것은,프랑스 인들이 그들의 말에 귀를 덜 기울여서가 아니라, 단지 그들 의 말이 잘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달랑베르는 불어 음송 문 장을 이탈리 아식으로 낭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려면 아마도 귀에 대고 낭독해야 할 것이다. 아니면 전혀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모여 있는 민중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언 어는 모두 노예의 언어라고 나는 말하련다. 어떤 국민이 자 유톱게 살고 있다면, 그런 언어를 말할 리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피상적인 성찰을 마치고, 더 깊은 성찰로 이어질 수 있도록 준비하려고 한다. 다음에 인용하는 글의 대 목이 나에게 그런 시사점을 주었다.
“한 국민의 특성,풍속, 관심이 얼마나 언어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사실 속에서 관찰하고 예를 제시하면서 증명해 보이 는 일은 상당히 철학적인 검토가 필요한 문제일 것이다.”
155~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