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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문학: 아아아, 아 - 정용준, ‘떠떠떠, 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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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들으십니까? 내가 늘 혼동에 빠질 때가 말의 어떤 측면을 초점으로 삼을 지 선택해야할 계제를 밟을 때이다. 내가 말을 다룰 때뿐만 아니라, 남의 말을 들을 때도 그가 어느 측면을 말하는 지가 그의 언어철학의 반 이상을 미리 말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사실 일반기호론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우리는 문제를 확대하지는 말자.
말함의 세 방식의 관계들이 있으며, 이것이 단순히 역전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기실, 아예 다른 차원이라고 해도 될 만큼 새로운 들음의 세 방식의 관계들이 있다. 항들은 이렇다. 우선 말한몸: 말은 영혼을 지닌 몸에서 뱉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말한)말의말: 뱉어진 말은 회자(回咨)될지언정 내 몸을 벗어나서 그 자체로 자기 영토를 점유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말한 말을)듣는몸: 이 말 또한 누군가의 몸에 수신되는 것이다. 여기서 이루는 관계들은 오로지 세 가지 뿐인데, 이런 문제들을 예시해 볼 수 있다. 말한몸: 말은 어떻게 몸에서 만들어지는가? 말한몸-말의말: 말을 하는 사람이 말씀의 세공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만나는 말의 자율적 세계란 무엇인가? 말한몸-(말한)말의말-(말한 말을)듣는몸: 영혼의 의도가 몸을 통과하여 말을 통해 타자에게 닿는다면, 이 영혼의 움직임은 타자의 몸을 파고들 수 있는가? 파고든다면 영혼의 어느 깊이만큼 도달할 수 있는가? 오해하지 말 것은 더 많은 항을 다룰수록 더 풍성하거나 엄밀한 학인 것은 아니다. 예컨대, 말한몸-말의말-듣는몸에 초점을 두는 사람은 타자의 영혼까지 고스란히 닿지 않는 말의 요소는 경시해버릴 수 있다. 그런데 이 사항은 말하는 몸-말의 말이 초점이 될 때는 굉장히 중시되는 것이다. 이 뒤에는 보기에만 역전된 항일 뿐, 그 자체로 충분히 새로운 문제들이 제기된다. 듣는몸#: 들은 사람은 자신의 자연을 되풀이하는 방식으로 말을 알아듣는가?, 듣는몸#-(듣는)말의말#: 들은 사람은 들은 말 그 자체의 기호학적 자율성을 향유하는 방식으로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가? 듣는몸#-(듣는)말의말#-(들는 말을)말한몸#: 들은 사람은 말 속에서 말이 내뱉어지는 과정을 추적하여 말을 내뱉은 몸을 체감하는 것이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이 경우 체감은 몸을 파고들어 영혼의 어디까지 가닿는 것인가? 주의사항은 마찬가지이다.
말이 말함과 들음으로 이중분절된다고 볼 때에 두 분기의 세 방식은 각각 다른 말함관계와 들음관계와 쌍을 이룰 수 있고, 말함과 들음 중 어떤 것을 더 중시하느냐에 따라서 앞에 두는 것이 달라지므로, 사실상 언어철학의 주제화 방식은 총 18개의 방식만이 이론적으로 존재한다. 이론적일 뿐만이 아니라 각각의 예를 들어볼 수 있을 만큼 이는 기호이론에 대한 실체적인 교차들이다.
이제는 알아들음의 어려움을 자세히 말해 볼 수 있다. 한 관계를 말하고자 하면, 앞에서 예도 들었듯이, 나머지 방식들의 구성들이 빠져나가고 결국 그의 언어철학, 달리 말해 그의 언어 이해의 약점으로 남게 된다. 한 예를 더 들어보자. 언어를 쓰는 사람이 그 언어를 통해 자기 영혼을 암시하고 그 암시체가 타자의 영혼까지 공명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말한몸-말의말-듣는몸], 즉 철학이 언어로 가능하다고 믿는 철학자는 언어의 자율성을 둔 진화인 언어의 탈영토화 운동[말한몸-말의말]의 이미지에 대한 고찰을 어느 정도 포기하게 된다. 그는 아나그램(anagramme), 리포그램(lipogramme, λειπογράμματος), 팬그램(pangramme) 등속에는 관심이 덜한 것이다.
나는 이러한 상황들이 말함과 들음의 교통 자체의, 즉 언어자체의 불가능성의 예시라고 보지는 않는다. 18개의 방식은 언어가 그 자체로 미분화되어 있어서 어떤 이데올로기로도 특권화 될 수 없는 본원적인 세포분열 상태의 다양체라는 것을 드러내는 한 시도일 뿐이다. 이 차이들을 바탕으로, 언어철학은 각자의 속도를 지니고서 수렴이 아니라 성장해나가야 한다. 이는 참으로 본원적인 분열이라서 꼭 학자들이 아니라도, 말하는 사람은 어떤 입장을 안 가질 수 없이 가지면서 언어의 이 성장에 참여할 수밖에 없다. 알아들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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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준의「떠떠떠, 떠」는 말을 부정하던 자가 말을 긍정하기까지의 서사이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모음을 모조리 증오하던 말더듬이가 모음을 말하기까지의 이야기이며, 말함을 통해서 자기부정을 자기긍정으로 전환하기에 성공하는 이야기이다. 이 언어의 긍정성에 대한 이야기는 말미에 더 엄밀하게 다루기로 하고, 「떠떠떠, 떠」의 언어관부터 이야기해보자.
단도직입하자면, 「떠떠떠, 떠」는 [말한몸-(말한)말의말, 듣는몸#-(듣는)말의말#] 주제화하고 있다([듣는몸#-(듣는)말의말#, 말한몸-(말한)말의말]는 아니다). 이는 말한자의 의도가 듣는자에게까지 침투하는 것[말한몸-(말한)말의말-(말한 말을)듣는몸]은 다루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다루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말더듬이인 화자는 말 내뱉기를 최소한으로만 하려고 하면서 그나마 내뱉는 말들도 ‘떠떠떠, 떠’와 같은 더듬거림이기 때문에, 이러한 방식의 언어 주제화를 작가가 신뢰하지 않는다고도 볼 수 있다. 화자는 소설 초반부에서는 자신이 내뱉는 말의말을 염오하면서 말한몸에 대한 사고만 하는데, 말더듬이의 이런 서사는 말의말 없이 말한몸이 단독으로 어떻게 목도될 수 있는지 드러내는 소중한 문학적 자료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소설이 전개되면서 그는 말의말과의 관계까지도 갈망하게 된다. 그리고 화자의 상대역인 여성도 말하는 사람의 영혼과는 상관없이 말 그 자체에 매달리면서, 말이 불러오는 자신의 변용을 즐기는 데에 몰두한다([듣는몸#-(듣는)말의말#]). 이 여자는 말더듬이와는 상반되게 말함을 굉장히 즐기는 사람이다. 화자와는 일관되게 반대방향으로 여자는 소설 말미에서는 입을 닫게 된다. 이렇게 이들은 말하는 영혼의 의도를 서로에게 침투하려 하지도 않고, 침투되는 법도 없이, 각각 말하지않으려함-말하려함, 말하려함-말하지않으려함이라는 각자의 세계 안에만 영원히 자기를 은닉하여, 이에 따라 비대칭적인 내용의 대칭적인 형식을 띄게 된다―말하지않으려함-말하려함, 말하려함-말하지않으려함 이 운동의 교차에는 혀의 발견이 있다. 대칭적인 형식이란, 말의말을 가운데 둔 대칭을 일컫는다. 곧 [말한몸-(말한)말의말, (듣는)말의말#-듣는몸#-]. 화자가 자기 부정을 언어 부정의 서사로 전환할 때면 어김없이 여자의 다변의 언어긍정이 묘사되는 방식으로 이 대칭은 소설 형식에마저 투사되고 있다. 이는 소설이 지나치게 단순히 직조된 느낌을 줄 수도 있는 소설가의 도전이었다.
화자는 발화를 기피하는데 이 기피는 세상에서 심지어 모음이 사라지길 원할 정도이다. 소설 초두이다.
[모음이 사라지길 원해. 혀끝이 입술에 부딪히기 않고 발음되는 단어들, 입천장에 혀가 닿지 않고 태어나는 부드러운 언어들, 입술 사이에 암초처럼 걸려 빠져나오지 않는 커다랗고 단단한 단어들, 이런 것들이 사전과 인간의 기억에서 모조리 지워졌으면 좋겠어. 아라비아, 암모니아, 에너지, 에스컬레이터, 매머드, 엘리베이터, 안나 카레니나, 옐로, 에어플레인, 윌리엄, 헬로. 27, 예스터데이, 파인애플, 테이블, 탁구‥… 이런 단어들이 삭제된다면, 아니 그것들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나는‥… 좀더 나아졌을까? 하지만 알아.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겠지. ... 상처를 주면 두 배로 늘어나는 플라나리아처럼 점점 많아질 뿐이야 나는 지쳤어. 더 이상 그것들에게 엉겨 거품처럼 버글대며 희미해지고 싶지는 않아.](9)
그런데 곰곰이 보면 그는 모음에 대해서조차 말하는 것을 꺼려할 뿐, 그의 사념을 전달하는 소설 문장들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모음을 유려하게 쓴다. 이는 작법의 한계를 노출한다기보다, 화자의 부정이 말 그 자체에 대한 부정으로만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화자의 이 증오가 자기 자신의 구성과 배치에 대한 부정이라는 것이고, 자기 존재의 긍정이 이러한 부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편집적인 상황을 명시하는 것이다. 언어 자체가 부정의 대상이 아니라, 사실은 언어가 부정의 도구처럼 쓰이는 것이다. 마치 칼과 같이 말이다. 그는 자신에게 억지로 말을 시켰던 죽이고 싶기까지 한 선생에게 반대로 “천천히 읽어봐, 한 문장씩, 또박, 또박, 또박”(13)이라고 말하는 것을 상상하는데, 이는 발화 자체를 꺼리는 그의 성격과는 일견 모순되는 것이지만, 그가 증오와 부정의 도구로서 언어를 여긴다고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사람 앞에 부정의 대상이 아닌 타자가 등장한다. 이끌리는 과정에 대해서는 이 단편 소설에 아쉽게도 규명이 없다. 단지 반대되는 것에 대한 이끌림이라는 것 정도가 제시된다. 이 여자는 말할 수 있는 자신을 긍정하면서, 이 말할 수 있음의 동력이 되는 자기 자신의 고유성을 함께 긍정하는, 끝없이 스스로 고백하기를 멈추지 않는 여자이다.
말하지 않으려는 자는 이 여자와 말의 사랑이 아니라, 몸의 사랑, 더 정확히는 혀의 사랑을 한다.
[그녀의 어깨에 입을 맞추고 혀를 댔다. 단단하고 까슬까슬했다. 천천히 핥기 시작했다. 가능하다면 부드러워지길 원했고, 정말 그것이 가능하다면 혀가 지나가는 방향으로 쓸려 없어지길 바랐다. 아니, 그것이 옮길 수 있는 것이라면 차라리 쓸모 없고 딱딱한 내 혀로 옮겨 오고 싶었다](34) [정말 이상 했어‥… 뭐랄까, 네 혀는 말이야. 아, 그러니까 그 감각이‥… 아니야. 이것은 ‘감’도 아니고 그렇다고 ‘각’도 아니야. 정말 이상한 그냥, 어떤 느낌이었어. 그렇게 딱딱하고 굳어있던 네 혀가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기분이었어. 나는 애타게 너를 부르고 찾아 헤맸지. 그런데 그때, 어디에서 스며드는지 알 수 없는 따뜻한 물이 차올랐어. 어느새 내 혀는 수면 위에 떠 있는 작은 돌고래처럼 헤엄치고 있었어. 세상에, 너는 이 멋진 혀로 아무 말도 안할 수가 있었던 거니. 세상에! 상대에게 이런 감정을 일으키다니. 땅속에서 오래도록 잠들어 있던 생명들이 땅 위로 기어나오는 때가 있었다.//](31~2)
혀의 사랑은 말하기 이전에 몸이 있다는 것을 알린다. 일견 이는 부정의 도구로서 언어를 이용하고, 긍정의 확인이로서 몸을 변용하려는 화자의 세계가 입증된 것처럼 보이게 한다. 또 이 문장들이 암시하기를, 「떠떠떠, 떠」의 언어관에서는 말하기 이전에 감성의 촉발이 있었다. 즉 이 파토스가 설명의 세계 즉 로고스의 기원이며 심층이었다. 이 서술들은 우리가 너무나 순식간에 지나가버려서 망각해 버리는 순간들은 말의 촉발 순간과 그 심층의 영혼의 고유한 생장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 소설이 실린 소설집『가나』에는 이러한 서술들이 곳곳에 심겨져 있다. 말을 부정하는 자가 말을 가능한 한 희미하게 만들 때에 그 최고도의 투명성 아래에서 볼 수 있는 것들: 로고스 아래의 파토스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사랑하는 자들은 만족할 수 없었다. 사랑은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나 보다. 혀의 접촉이 변용된 감성의 전개가 각자의 영혼 안에서 각자 방식대로 더 깊은 영혼 쪽으로 잡아가면 갈수록 그들은 이 비대칭적인 내용의 결렬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매듭지을 수 있는 표현체를 더욱더 갈구하게 된다. 반대 방향으로 당겨지더라도 하나의 줄로 있을 수 있게 만드는 묶음으로서 언어가 욕망된다[말한몸-(말한)말의말, (듣는)말의말#-듣는몸#-]. 실재로 화자가 마지막 장면에서 가장 생기 있게 말하려고 입을 뗀 순간 여자는 간질로 보이는 지병이 도져서 쓰러진다. 앞서서 여자는 자신은 이렇게 쓰려졌을 때에 행복한 몽중에 빠지게 된다고 고백했었다. 마치 그 말에 자극된 것처럼 말이다. 양편으로 힘껏 잡아당겨야 하는 줄의 매듭이 모양세의 수사가 아니라, 실재의 견고가 중요하듯이, 더듬거림으로도 이는 이루어 질 수 있는 일이리라. 아니 고유하게 자율적인 의미론을 고집하지 않는 의성어와 같은 더듬거림이 더 잘 이룰 수 있는 일이다.
그리하여 드디어 「떠떠떠, 떠」의 언어관은 결론에 이르게 된다. [말한몸-(말한)말의말, (듣는)말의말#-듣는몸#-] 언어는 탈영토화일 뿐만이 아니라, 일종의 재영토화이다. 언어는 화자의 영혼의 편린을 담고서 출발하나, 화자의 몸을 떠나서 자기 영토를 꾸린다(탈영토화). ‘떠떠떠, 떠’가 그렇게 화자에게서 세상으로 튀어 올랐다. 그런데 언어는 마치 출발할 때의 화자의 영혼을 모방하듯이, 여기서 그치지 않고 화자가 예측할 수 없는 타자라는 정향의 출발점으로 작용하면서 힘을 발휘한다(재영토화). 여자는 꿈틀거리면서 자기만의 몽중 세계로 탐닉하고 있다. 이쯤 되면 우리는 「떠떠떠, 떠」가 예술가소설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떠떠떠, 떠」의 이상은 로고스에 고착화되지 않은 파토스의 힘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인데, 이 언어는 사람의 자연에게서 생산된 것에 그치지 않고 자기자신의 영토를 확장해나가면서 말의 자연을 건립해나가야 하며, 교점(交點)으로서 사랑을 증언해야 한다.
이렇게 달리 말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언어는 말하는 자들이 망각될지언정 사라지지 않는 교점이다, 자기 자신의 영혼을 각자의 방향으로 되돌아보게 만들지라도, 그리하여 심지어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영영 서로 만날 수 없을 정도로 자기 길에 빠져들게 만다는 한이 있더라도.
이 소설 마지막 문장은 초두와 대조되게, 모음이 잔뜩 강조되어 있다. ‘ㅏ’는 음운학상으로는 전설 저모음[a] 또는 후설 저모음[ɑ]이고, 실재로 발음되는 음성학상으로는 중설 근저모음([ɐ])이다.
[떠, 떠떠, 떠떠, 떠떠떠, 떠, 떠, 아아, 아아아하아아, 아아아,, 아, 사, 사, 사아, 아, 아아, 아아아, 라라, 라라라라, 라, 라라라, 아, 아아앙, 해.](38~9)
이렇게 말의 부정은 자기 부정으로서도, 타자부정으로서도 철회된다. 그리하여 그는 사랑에 힘입어 자기를 긍정한다. 말과 더불어 자기를 창조한다. 생의 연속 앞에서 이 전환은 각각의 단절이 아니라, 차라리 균열이다. 사랑이 일이킨 이 균열은 개념처럼 고착화된 삶을 산일(散逸)하게 하여 생 본연의 창조성을 복구한다. 생 본연의 창조성은 이 소설이 보이듯이 단순히 도구들만이 아니라, 말하는 자마저도 재영토화한다. 달리 말해 자기가 자기를 창조하게 한다. 그런 식으로 세계의 생성에 참여하게 한다. 역사를 생생하게 만든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말하는 이가 초두에서부터 부정했던 모음을 스스로 긍정하며 애써 말하려하는 것을 보면서 사고의 전환을 자극하는 언어와 기호의 심연이 지속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낀다. 이 소설은 우리들 생애에 어떤 균열을 도모한다. 모든 기호는 작가 자신에게는 물론이고 화자에게는 물론이고, 타자에게도 이만큼이면 세계의 생성에 참여하는 계기로 삼을 수 있겠냐고 묻는다. 가령 교통표지판 앞에서 우리는 금지와 긍정 정도만 읽고 나가겠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인민의 기치 앞에서는 철학 앞에서는 그럴 수 없다. 어떤 철학이든 처음, 달리, 새로이 읽혀야 한다. 즉 자신의 생으로 돌려세워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는 그가 스스로를 창조하려 지나간 길들을 가만히 따라가 보면서, 최후에 긍정한 그 무엇을 ‘아아’ 찾아야 하리라. ‘아아아, 아’, 그것은 언어를 외피로서만 가질 만큼 강력하리라. 그리고 이를 내 생애로 돌려 세워서 응해야 한다.
*정용준 2009년 《현대문학》을 통해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소설집 『가나』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 장편소설 『바벨』『프롬토니오』 『유령』 『세계의 호수』 『내가 말하고 있잖아』가 있다. / 정용준(정용준, 1981-) 광주, 조선대학교 러시아어과를 졸업, 동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수료했다. 2009년 현대문학에서 「굿나잇, 오블로」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바벨”이란 장편소설이 언어에 대한 소설인가 보다.
첫댓글 정용준, 장편소설 내가 말하고 있잖아(2020)
오늘의 젊은 작가 28권. 열네 살 소년이 언어 교정원에 다니며 언어적, 심리적 장애를 극복해 가는 과정을 담은 소설이다. 말을 더듬는 인물은 그간 정용준 소설에서 자주 만날 수 있었지만 이번 소설에서는 그 내면 풍경을 열네 살 소년의 목소리로 들려줌으로써 언어적 결핍에서 비롯된 고통과 고투의 과정을 한층 핍진하게 보여 준다.
언어를 입 밖으로 원활하게 표현할 수 없는 심리적 재난과도 같은 상황으로 인해 소년은 가족은 물론이고 학교, 친구 등 자신이 속한 세계로부터 배제된 채 유령처럼 겉돈다. 스스로를 깊이 미워하면서, 또 자신에게 상처 준 사람들을 향한 희미한 복수를 다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