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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130
8월23일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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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냥 사랑이 아니라, 진실한 사랑, 불같은 사랑, 순수한 사랑!>
수난과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께서는 금권과 타락으로 얼룩진 성전 정화작업을 실시하십니다. 다음으로 행하신 일은 유다 지도자들과의 치열한 논쟁이었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 한 점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당시 가난한 백성들, 세리들과 죄인들, 고아와 과부들은 기쁘게 예수님을 환대했고, 그분을 메시아로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당대 나름 잘 나가던 지도층 인사들, 바리사이, 사두가이, 율법학자, 헤로데 당원들은 끝끝내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을 넘어, 그분에게 난감한 질문들을 던지면서, 그분을 옴짝달싹할 수 없는 올가미 속으로 밀어넣으려고 발버둥을 쳤습니다.
마태오 복음 22장에서는 예수님과 유다 지도자들 사이에서 치열하게 펼쳐진 이른바 ‘마지막 논쟁’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던진 질문은 존경하는 랍비, 메시아로 오신 주님께 겸손하게 여쭈어보는 질문이 아니라, 그분을 시험하고 곤경에 빠트리려는 야비한 의도의 질문들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세금 문제, 부활 문제, 다윗 자손 메시아 문제, 그리고 오늘 복음에 소개되고 있는 ‘가장 큰 계명’ 문제였습니다. 난감한 질문을 던지면서 계속 예수님께 태클을 걸었지만, 결과는 예수님의 연전연승이었습니다.
계속되는 논쟁에서 연전연패를 거듭한 적대자들은 또 다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질문 한 가지를 던집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마태오 복음 22장 36절) 그 어떤 질문에도 거침없으셨던 예수님께서는 신명기 6장 5절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또 다시 촌철살인의 말씀으로 그들의 말문을 막아버리셨습니다.
복잡하게 말씀하지 않으시는 예수님, 요약과 종합의 명수이신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구약 성경 신명기를
인용하시면서, 구약 성경 전체를 사랑의 이중 계명으로 요약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게 첫째 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오 복음 22장 37~40절)
예수님께서는 못배우고 가난한 백성들도 쉽게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도록 신앙의 진리를 아주 간단히 종합해서 설명하십니다. 이 또한 그분께서 우리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를 잘 알수 있는 대목입니다.
하느님 사랑, 인간 사랑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아주 쉽게 가르치십니다. 한 인간 존재가 하느님을 깊이 사랑해야 그 사랑을 바탕으로 이웃 사랑이 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사심없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임을 강조하십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동일한 중요성을 부여함을 통해, 두 사랑이 지닌 불가분의 관계를 부각시키신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유다인들이 실천하던 이웃 사랑은 상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이웃 사랑의 실천은 동족 유다인들에게만 적용시켰고, 사마리아 사람들이나 이방인들은 사랑의 실천 대상에서 제외시켰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랑에 대한 개념을 크게 확장시키셨습니다. 사랑은 국경이나 인종을 넘어서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뿐 아니라 이방인들, 원수까지도 사랑의 대상에 포함시킬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냥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해 사랑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오랫동안 제 마음 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오늘 하느님을 향한 우리들의 사랑 안에 얼마나 진심, 진정성, 정성이 포함되어있는지 성찰하며,
큰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그저 습관적으로, 아니면 의무적으로, 마지못해 그분을 대해온 것을 크게 뉘우칩니다.
그분께서 가장 우리에게 바라시는 사랑은 그냥 사랑이 아니라, 진실한 사랑, 불같은 사랑, 순수한 사랑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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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사랑의 계명은 인생의 정북향>
2010년 한 여성이 치명적인 자동차 사고를 당해 식물인간이 되었습니다. 당시 임신 4개월 때였습니다. 다행히 태아는 건강한 상태였습니다. 이후 그녀는 제왕절개 시술이 가능해질 때까지 5개월간 집에서 남편의 보살핌 속에 누워 있었고, 9개월이 되자 병원으로 옮겨져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산모는 상태가 더 안 좋아졌습니다. 의사들은 산모는 회복하기 어려우니 준비를 하라고 말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를 지키던 가족들도 다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그녀를 지키는 이가 한 명 있었습니다. 바로 그의 아들이었습니다.
아기는 엄마의 머리맡에 앉아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서툰 말투로 대화도 건네며 단 한 번도 칭얼대지 않았다고 합니다.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는데 이도 제대로 나지 않은 아기가 엄마의 병원음식을 씹어 자신의 입으로 엄마의 입에 넣어주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치 어미 새가 새끼에게 먹이를 먹여주는 것처럼 행동하던 2013년 5월, 아기가 작은 소리로 엄마를 부를 때 엄마가 눈을 떴습니다.
중국 장롱샹 씨의 기적 같은 이야기는 영국의 일간지 ‘데일리 메일’에 기사화 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인터뷰에서 엄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그때서야 3년의 세월이 지났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제 머리맡에서 미소 짓는 아기가 제 아들이라는 사실도 그제야 알게 됐고요.”
의사들은 의아해했습니다.
혼수상태에 빠진 엄마는 음식을 겨우 삼킬 수만 있었고 씹지 않은 것들은 소화를 시키지 못했습니다. 아기가 어떻게 이것을 알고 음식을 씹어 엄마의 입속에 넣어주었을까요?[출처: ‘왓칭 2: 시야를 무한히 넓히려면’, 김상운, 정신세계사]
바다에서 길을 잃고 방향을 모를 때는 정북향에 있는 북극성을 찾는다고 합니다. 북극성만 놓치지 않으면 한 방향으로 계속 나아갈 수 있고 결국엔 육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쪽일 거야, 저쪽일 거야’를 생각하다보면 바다 한가운데서 빙빙 돌다 좌초하기 십상입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란 책으로 유명한 ‘스티븐 코비’ 박사는 강연을 할 때 사람들의 눈을 감아보라고 한 다음 각자가 생각하는 정북향을 손을 들어 가리켜보라고 합니다. 그리고 눈을 뜨면 웃음바다가 됩니다.
각자 다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서로 협의를 해서 한 방향을 정하라고 합니다. 다수결로 한 방향을 정했을 때 코비 박사는 주머니에서 나침반을 꺼내 올바른 방향이 어느 쪽인지 일러줍니다.
그러면 청중은 또 웃습니다. 정북향은 다수결로 정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나침반이 필요할까요? 그냥 흐르는 대로 살아가면 되지 않을까요?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인생을 회고합니다. “저는 현 직장에서 목표를 정했고 결국에는 달성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종사하고 있는 전문분야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그 대가로 개인적인 삶과 가정생활을 희생해야 했습니다.
나는 아내와 자녀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합니다. 심지어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조차 알지 못하며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이제 나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도대체 직장에서 출세가 그만한 가치가 있었던 것인가를.” 이것이 존재의 이유를 찾지 못한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맞게 될 운명일 것입니다.
존재의 이유는 존재하고 있는 사람들이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존재하게 해 준 이가 정하는 것입니다. 스마트폰이 스스로 자신의 존재이유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스마트폰을 만들어준 사람이 정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정한대로 살아야 망가지지 않습니다.
모든 만들기 어려운 것은 다 만들어진 것입니다. 만들어진 것에는 항상 그 만든 이가 존재합니다. 집도 만든 이가 있고 스마트폰도 그렇고 더 만들기 어려운 모든 동물과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인간을 만드신 분이 사람이 되셔서 인간을 만드신 이유가 바로 ‘사랑’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미워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용서하고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해 주는 것이 먼저가 되어야지 돈 벌러 나가거나 공부하러 학교에 가는 것이 우선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큰 성공을 했어도 미운 마음이 있다면 결국 실패한 인생입니다. 방향 먼저 잘 잡아놓고 다음에 다른 일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헛수고만 하다가 인생을 허비합니다.
장롱샹 씨의 아기는 어떻게 이 ‘사랑’의 진리를 알았던 것일까요? 아마 우리 안에 사랑해야 한다는 진리가 넣어져있는 것 같습니다. 어린이 때는 잡다한 생각으로 집중력이 흐트러지지 않아서 존재의 이유가 보이는데, 자라면서 세상이 그 진리를 보는 눈을 가리는 것 같습니다.
사랑보단 경쟁을 택하는 것입니다. 이런 어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후회하지 말라고 또 이렇게 정북향을 말씀해 주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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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2,34-40 : 가장 큰 계명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버리시자 군중은 예수님을 우러러 보았다. 바리사이들은 무리의 힘으로 예수님을 이기려고 한다. 논증으로는 그분을 이길 수 없다고 느끼자 무리로 그분을 이겨보려고 한다. 그들은 예수님을 떠보려고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인지 묻는다. 예수께서 계명을 달리 말씀하시면 그것을 빌미로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한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36절) 이 바리사이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서, 그리고 무언가를 배우지도 않고도 그분을 스승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언가 석연치 않은 면이 있다. 그는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그렇게 부르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37절)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가장 큰 계명이며 첫째 계명이다.
첫째 계명은 하느님을 공경하는 것과 관련한 모든 것을 가르쳐 준다.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선의 바탕이기 때문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39절)는 것이다. 둘째 계명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다. 첫째 계명은 둘째 계명을 실천할 수 있도록 준비해주고, 둘째 계명에 의해 증명 된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 굳게 서 있는 사람들은 모든 일에 있어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 안에 가치관이 확실히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모든 것 위에, 즉 우리의 가치관의 첫 자리에 하느님이 자리하고 계셔야 한다. 하느님보다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다른 것이 첫 자리를 차지할 때는 우상숭배가 되고 마는 것이다. 하느님-인간-세상 재물로 순서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을 올바로 실천할 수 없다.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라고 하셨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사람은 사랑을 할 줄 알고 사랑을 해야 하고, 사랑을 받아야 하는 사랑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존재이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당신의 모상대로 지으셔서 이 세상에 당신의 대리자로 세우셨다면, 우리는 그 인간의 모습을 통해서 하느님을 관상할 수 있어야 하지 않는가?
그러기에 우리가 보는 나의 이웃은 바로 눈에 보이는 하느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하느님을 사랑하면서 우리는 또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어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겠는가? 그런 사람은 거짓말쟁이라고 하였다. 상대도 하느님의 모습이고 나 자신도 하느님의 모습이라면 인격적인 사랑의 나눔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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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홍보국장/전주교구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독서는 시어머니 나오미의 뒤를 따르려고 고향과 종교를 버리는 룻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룻기는 이스라엘의 국경을 뛰어넘는 하느님의 구원 역사의 보편적인 소식을 담고 있습니다. 하느님 백성에 속하지 않으면서 더욱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멸시하던 모압 사람 룻이, 과부인 시어머니에게 충실함과 극진한 사랑을 보여 주면서, 뒷날 베들레헴의 가정으로 이어지는 구원의 연결 고리가 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바리사이들 간에 벌어진 논쟁에서 전개됩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이 질문은 라삐 학교가 모세 법을 갈라놓았던 613개의 계명을 감추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대화를 나누는 이들에게 잘 알려진 성경의 본문을 상기시키십니다.
먼저 하느님에 대한 사랑에 관해서 모든 경건한 유다인이 아침과 저녁마다 반복해서 바치던 ‘쉐마’(이스라엘아, 들어라!: 신명 6,4) 기도를 인용하십니다. 그리고 이웃에 대한 사랑에 관해서는 레위기 본문(19,18)을 상기하십니다. 레위기에서 이웃의 개념은 친척과 같은 나라 사람만을 뜻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모든 남자와 모든 여자로 확대하십니다. 예수님의 대답이 주는 새로움은 두 가지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형제에 대한 사랑을 주님의 법의 핵심이요 본질로 정의하십니다.
그다음, 예수님께서는 법의 전문가들이 하느님과 이웃을 서로 달리 구분된 것으로, 그래서 다른 수준에서 해석하고 설명하던 두 계명을 통합하시고 이를 동일하게 여겨야 할 원칙과 요약으로 나타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은 따로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 곧 성경 전체를 요약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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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가장 큰 계명>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37-40)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라는 말씀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계명의 근본정신이다.”라는 뜻입니다. “둘째도 이와 같다.”라는 말씀은, “‘하느님 사랑’ 다음으로 ‘이웃 사랑’을 말할 수 있는데, ‘이웃 사랑’도 ‘하느님 사랑’과 똑같이 계명의 근본정신이다.” 라는 뜻입니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라는 말씀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모든 율법과 모든 계명의 근본정신이라는 것을 다시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하나의 사랑입니다. 두 사랑이 하나가 될 때에야 비로소 완전한 사랑이 됩니다. 이웃 사랑 없이 하느님만 사랑하는 것은 ‘위선’입니다.(1요한 4,20)
그러면 반대로, 하느님 사랑 없이 이웃만 사랑하는 것은? 무신론자들이 이웃 사랑 실천을 하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일률적으로 판단할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빗나갈 가능성이 늘 있습니다. 세속에서는 사랑과 좋아하는 감정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사랑은 ‘아가페’, 즉 ‘하느님의 완전한 선과 자비의 실현’을 뜻합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과는 다른 것입니다.>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라는 말씀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사랑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온 마음’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표현은 조금 다르지만, 사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사랑하는 것과 온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은 같은 뜻입니다.) 사랑할 때에는 사랑 외에는 다른 것이 끼어들면 안 됩니다.
산상 설교에 언급되어 있는 위선자들은, 겉으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이 하느님을 향하지 않고 다른 곳을 향해 있는 자들입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마태 6,5)
기도할 때에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마음이 하느님만을 향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위선자들은 마음이 자기 자신을 향해 있습니다. ‘거룩한 사람’이라는 칭찬과 존경을 사람들로부터 받기를 바라는 욕망이 마음속에 숨어 있는 상태에서 바치는 기도는 기도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라 2,20)
이 말들을 간단하게, “주님은 나의 모든 것”이라고 줄일 수 있습니다. 주님을 향한 마음 외에는 다른 마음도, 다른 생각도, 다른 욕심도 없는 것, 이것이 주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리고 ‘주님에 대한 사랑’은 ‘주님에 대한 믿음’과 하나입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함으로써 믿음이 완성됩니다. 만일에 믿음이 없다면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고, 사랑이 없다면, 말로만 믿는다고 말하는 빈껍데기 믿음이 될 것입니다. (믿음 없이는 사랑이 없고, 사랑 없이는 믿음도 없습니다.)
사랑 실천의 대표적인 예는 ‘착한 사마리아인’인데(루카 10,33-35), 그는 강도를 당한 사람이 간절하게 바라고 있었을 바로 그 일을 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정반대의 모습을 보인 사람들로는, 그 이야기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인을 예로 들 수도 있고(루카 10,31-32),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를 예로 들 수도 있습니다.(루카 16,19-21)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그가 화를 내면서 아버지에게 한 말을 원문대로 번역하면 이렇게 됩니다.
“보십시오, 나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당신을 섬기며 당신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나에게 당신은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당신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는군요."(루카 15,29-30)
그는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고, 동생을 동생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그의 마음에 사랑은 하나도 없고, ‘화’만 잔뜩 들어 있음을 나타냅니다. 사랑이 없으니 동생의 굶주림은 보이지 않고, 방탕하게 살았던 죄만 보입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사랑이 없으니까 자기가 아버지에게서 받고 있는 사랑은 보이지 않고, 자기의 욕망을 채우지 못한 일만 보입니다.
사랑 없는 사람의 눈에는 남의 죄만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자기 자신은 회개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자비하게 행동하고, 또 모든 사람의 구원을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은 외면하면서, 자비 없는 정의와 심판만 주장합니다. 그러나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서는, 또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처지를 보시고, 그래서 우리를 가엾게 여기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처벌하려고 하지 않으시고,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려고 애를 쓰십니다.
요한 1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1요한 4,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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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최종수 윤호요셉 신부님]
내가 내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거나 내 가족마저도 사랑하지 못할 때가 있듯 남을 사랑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가족만큼은 책임졌던 전통이 늙은 부모님을 모시던 미풍양속이 자본주의 사회로 접어들면서 해체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치매 걸린 늙은 부모님을 여행지에 버리고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식은 부모의 뒷꼭지를 보고 따라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한 자식은 그처럼 그 자식에게도 효도를 받습니다. 어릴 적 부모님께 한 효도를 자녀들이 보고 배우기 때문입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은 자신을 위한 사랑인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일방적이고 조건이 없지만인간의 사랑은 대부분 쌍방적이고 조건적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극치는 순교입니다. 순교 또한 쌍방적인 행위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기 때문에 하느님과 신앙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금 강조하지만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자신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내가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데 이웃이라고 해서 별다른 모습을 갖고 있겠습니까?
이웃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빵 한 쪽 나누지 못했다면 나에게 나눠줄 사람도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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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이재희 베네딕도 신부님]
바리사이파들은 항상 예수님을 눈에 가시로만 여겼습니다. 그래서 뻔히 다 알면서도 예수님의 속을 떠보기 위해 질문을 던집니다. 그들은 예수께 율법, 즉 의무 규정에 관하여 질문을 던집니다.
선생님 율법서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 예수님은 사랑이라고 대답하십니다.
첫째 계명은 하느님 사랑이고 둘째 계명이 이웃사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두 계명을 지키는 사람의 태도와 방법을 함께 말씀해주십니다. 즉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는 그러한 열정과 정신으로 임해야 하는 것이 바로 사랑의 계명입니다.
천주교 신자라면 이 두 계명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참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실천하기 어렵기에 사랑의 계명을 들을 땐 왠지 부담되고 의무만으로 생각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랑의 계명을 말씀하실 때 율법과 의무사항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또한 우리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주기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입으로만 사랑을 이야기하는 바리사이들과 십자가 죽음으로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분명 율법에 관해 물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만족과 기쁨인 사랑에 관하여 대답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은 기록의 충실성에 관해 묻고 있는데 예수님은 사랑의 충실성에 관해 대답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은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율법의 순위로 말하려 하지만 예수님은 더 많이 행할 수 있는 것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은 의무 규정에 대해 묻고 있는데 예수님은 사랑함으로써 얻는 진정한 해방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에 대해서도 한계를 매기려 했지만 예수님은 모든 한계를 뛰어넘는 인간의 근본적 자세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힘들지만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주님은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고통과 죽음으로써만 가능하다는 것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어느 날 복도를 가다가 복도 끝에 걸려있는 고통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하느님의 사랑을 절실히 깨달았고 그 후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합니다.
결국 사랑의 계명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것을 얼마만큼 실천하느냐 일 것입니다. 얼마나 실천하느냐는 바로 자기희생을 얼마나 감수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사랑이란 말보다 더 좋고 아름다운 말도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생텍쥐페리는 “어린 왕자”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 오아시스가 있어서 그래”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것이 사랑입니다.
우리의 삶이 각박하고 메마르다 하더라도 서로가 오아시스 같은 충만을 누릴 수 있도록 사랑의 실천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누구나 다 알고는 있지만 그 실천이 참으로 어렵다는 것도 알기에 언제나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다짐하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2000여 년 전 예수님께 물었던 그 율법교사가 우리에게도 똑같이 묻는다면 어떻겠습니까?
“첫째 계명은 하느님 사랑이고 둘째 계명은 이웃사랑입니다”
율법교사의 질문에 우리도 똑같이 대답을 별로 어렵지 않게, 별로 망설임 없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리를 아는 천주교 신자라면 질문자체에 어려움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쉽지 않게, 가볍지도 않게 간직해야 할 말씀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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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강영구 루치오 신부님]
<사랑의 바다에 빠져라>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예수께서는 사랑에로 초대합니다. 계명은 그릇입니다. 나와 너, 그리고 우리를 담는 그릇입니다.
계명은 너와 나의 삶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울타리입니다. 계명은 바른 삶을 위한 길잡이입니다.
계명이라는 그릇 속에서 비로소 출렁거리던 나도 잠잠해질 수 있습니다. 계명이라는 그릇에 담겨 쏟아지지 않고 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계명의 인도를 따라 가면 사랑이라는 바다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바다입니다. 세상의 모든 강물은 바다로 흘러듭니다. 바다는 흘러드는 모든 것들을 말없이 받아들입니다.
바다는 온갖 쓰레기와 더럽게 오염된 강물들을 받아들이고 정화의 과정을 거쳐서 새 생명을 선사합니다.
하느님은 바다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것은 사랑의 바다에 빠지라는 말씀입니다.
바다에 빠지면 죽고 맙니다. 그러나 사랑의 바다에 빠져서 죽은 사람은 아무도 사람도 없습니다.
누구든지 새 생명으로 거듭납니다.사랑하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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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랑>
마태오 22,34-40 (가장 큰 계명)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사이들이 한데 모였다.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사랑>
당신만큼
당신이 행복할 때
당신만큼
나도 행복한 것
당신이 외로울 때
당신만큼
나도 외로운 것
당신이 기쁠 때
당신만큼
나도 기쁜 것
당신이 슬플 때
당신만큼
나도 슬픈 것
당신이 아플 때
당신만큼
나도 아픈 것
당신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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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두 동반자…>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영원한 두 동반자가 계십니다.
“하느님과 이웃”입니다.
그러므로 꼭 해야 할 일 둘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입니다. 왜냐면,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둘이자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손이나 발은 둘이자 하나인 것과 같이 언제나 하느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캐나다에 사는 한 자매가 설암(혓바닥에 생긴 암)에 걸려 혀를 자르게 되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수술 전에 자매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때 그 자매가 눈물을 흘리며 마지막 말을 이렇게 했답니다.
“하느님, 그래도 당신을 사랑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습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 두 계명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이 세상의 어떤 것에도 빼앗기지 말라. 왜냐하면, 오직 하느님 그분만을 완전히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인생의 가장 큰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네 마음을 다하고.”라는 말은 한 마디로 “몸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느님 사랑에 푹 잠기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께서 “아가서 대한 강론”을 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합니다.”
사랑이 참된 사랑이라면 자신의 시초로 돌아가고, 자신의 기원으로 돌아서며, 자신의 원천으로 흘러가야 합니다. 자신의 시초, 기원, 원천으로 돌아가고 흘러가라!는 것은 “하느님과 첫사랑을 회복하라.”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첫사랑은 “저희에게 숨을 불어 넣어주신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과 첫사랑, 첫 마음을 기억하고 회복하여, 거기에서 항상 내 가슴에 품을 수 있는 사랑에 물줄기를 받아야 합니다.
특히, 우리가 기도하실 때, 기도 제목과 기도 지향을 꼭 두셔야 합니다. 그 기도 제목과 지향의 첫 번째가 하느님과의 첫사랑을 우리 가슴에 회복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그래도 당신을 사랑합니다.”
예전에 목포에서 사목하면서 노숙자 음식 대접할 때에, 한 노숙자가 저에게 하셨던 말입니다.
“당신이 믿는 신(하느님)은 찬미 영광 받으셔야 합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에게 힘들고 아픈 일이 있어도 여전히 하느님께는 저희를 사랑하고 계심을 느끼고 은총을 입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그래도 하느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아멘.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내 마음을 다하고, 내 목숨을 다하고, 내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 그래도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고운님들에게는 몸과 마음에 치유의 은총이 베풀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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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232)
♧♧ 시편 44편 21-22절….
"저희가 만일 저희 하느님의 이름을 잊고 낯선 신에게 저희 손을 펼쳤다면 하느님께서는 마음속에 숨겨진 것도 아시는데 그런 것을 알아채지 못하실 리 있겠습니까?"
이 구절에서... 다윗은 조건문을 사용하여 고통 받는 이스라엘 대한 하느님의 구원의 필연성을 더욱 강조하여 나타내고 있습니다. 즉 만약 이스라엘이 참으로 하느님을 잊어버렸거나 또는 이방 민족의 신을 섬기는 죄악을 저질러 하느님과 맺는 계약을 파기했다 할지라도 당신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께서 자애를 베풀어 구원해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물며, 그 같은 범죄도 저지르지 아니한 당신 백성을 구원하시지 않겠느냐?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마음속에 숨겨진 것도 아시는데...’라는 말은 하느님은 사람의 마음속까지도 다 아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에(요한복음 2장 24-25절. 참조), 자신들이 하느님 앞에서 그 어떤 죄악도 은밀히 숨겨 놓지 않았으며 18절, 19절에서와 같이 하느님의 계약의 말씀을 충실히 이행하였음을 분명히 아실 것이라는 말입니다.(잠언 16장 2절. 로마서 8장 27절. 참조)
♧♧ 시편 44편 23절…
"그러나 저희는 온종일 당신 때문에 살해되며 도살될 양처럼 여겨집니다."
* 저희는 온종일 당신 때문에 살해되며... 이는 다윗이 이스라엘이 고난 받고 핍박당하는 것을 단순히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의인의 고난, 즉 불의한 세상이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들을 미워하며 핍박한 탓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사실 현 세상도 에페소서 2장 2절에 나온...공중을 다스리는 지배자, 곧 지금도 순종하지 않는 자들 안에서 작용하는 마귀가 그 권세를 부리고 있는바 의인에 대한 불의한 자들의 핍박은 필연적입니다.
이는 초대 교회 당신 그리스도인들이 당한 박해 역사에서 충분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로마서 8장 36절. 참조) 그리고 사도 바오로도 경건한 삶을 사는 이들에게 이런 핍박이 닥칠 것을 저희에게 예고하였습니다.(티모테오서 2서 3장 12절. 참조) 그러나 이런 고난은 경건한 이에게 더욱 하느님만 굳게 의지하게 해주는 단련의 은총이니 오히려 유익한 것이 됩니다(시편 119편 17절. 참조).
* 도살될 양처럼 여겨집니다...
12절의 ‘저희를 잡아먹힐 양들처럼...’과 같은 말입니다. 한편 이러한 표현은 고난 받는 종의 노래, 곧 메시아의 수난을 예언하는 노래인 이사야서 53장 7절(참조)에도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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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공동체 안에서 매사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오직 자기 자신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 공동체를 기대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잘못한 것, 개선해야 할 점이 있다면 고쳐야 하겠지요.
그러나 공동체에서 잘 되고 있지 않은 것만 지적하고 있다면, 또 몇몇 사람의 약점과 실수에만 집착하고 있다면 분명히 이룰 수 없는 공동체를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분들은 불평과 함께 부정적 에너지 전파에만 큰 힘을 쏟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바른 모습은 올바른 대안과 해결책을 먼저 바라보고 제시하는 것이 아닐까요? 성지에 있다 보면 다양한 본당의 신자들을 만나게 되는데, 어느 신자분이 자신의 본당 신부님 미사에서 큰 은혜를 받는다면서 늘 감사한 마음이라면서 신부님 자랑을 하는 것입니다.
그 곁에 있던 다른 신자들의 표정이 너무나 밝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긍정적인 에너지가 옆의 분에게 전달된 것입니다. 잠시 뒤에 또 다른 신자분을 만났는데, 이분께서는 자기 본당 신부님이 너무 조용하게 말해서 미사가 너무 지루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신부님 흉을 봅니다. 이때 주변의 분위기는 어떠했을까요? 분위기가 냉랭해집니다. 불만족이라는 부정적 에너지가 주변에 전달되기 때문입니다.나중에 알고 보니 이 두 분은 같은 본당에 다니시는 분이었습니다. 똑같은 신부님에 대해서 받아들이는 반응이 이렇게 정반대입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신부님에게만 문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 자신의 마음에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오늘 예수님을 만난 바리사이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이 바리사이들은 어떻게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주님을 이기려고만 합니다.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되지 않자, 오늘 복음에서처럼 무리를 지어서 그분을 이기려고 한데 모이기도 합니다.
그들에게는 조금도 사랑의 마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기기 위해 이러한 질문을 던집니다.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율법에는 총 613개의 계명이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613개 중에서 어떤 계명이 가장 크냐는 질문이었습니다. 만약 어느 한 가지를 콕 찍어 말하면 “왜 다른 계명은 중요하지 않으냐?”면서 따질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질문에는 사랑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불만족이라는 부정적 에너지만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계명을 다음의 두 계명으로 정리하십니다. 바로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이 없는 이들에게 사랑을 이야기함으로써 사랑의 중요성을 다시금 강조하신 것입니다. 사랑을 품고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내 안의 부정적 에너지는 내려놓고 긍정적인 사랑의 에너지를 세상에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율법의 계명을 충실히 따르는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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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보석 줍기>
-하느님 사랑과 생명의 선물-
요즘의 기쁨과 행복은 틈틈이 지인들에게 나누는 꽃인사와 아름다운 사진의 선물들입니다. 흡사 사랑의 보석을 주워 선물하는 기분입니다. 제 강론을 매일 정리하여 보내 주는 자매님의 ‘보석’이란 말마디도 좋습니다.
“신부님, 오늘의 보석, 강론 말씀입니다. 오늘도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사랑하는 자매님, 옥매화꽃 아침인사 받으세요.”
어제 주고 받은 메시지입니다. 언젠가 보속으로 말씀 처방전을 써드렸을 때, “아, 보속補贖이 아니라 보석寶石이네요! 살아있는 생명의 보석이요!” 찬탄하던 어느 수녀의 말도 생각납니다. 더불어 선배 노신부의 “나는 보물寶物이 아니라 고물古物입니다.”라는 유머스런 말도 생각납니다. 얼마전 어느 자매의 카톡메시지도 좋았습니다.
“매일 아침 받는 꽃인사, 소확행입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합니다. 매일 직접 풍경과 꽃들을 보시는 신부님! 참 좋으시겠어요. 소확행? 아시는지요?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줄여서 앞글자만 요즘 많이 씁니다.”
행복은 과거나 미래가 아닌, 멀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닌 가까이 오늘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늘 나라의 행복을 사는 이들이 소확행의 삶을 사는 이들입니다. 어제 ‘보석 줍기’란 시를 나누고 참 행복했습니다. ‘보석 줍기’ 대신 ‘행복 줍기’로 바꿔도 그대로 통합니다.
-“아침
산책 때마다
보석 줍기에 바쁘다
어찌
아침뿐이겠는가
하루 전부가 보석 줍는 시간이다
이보다
더 큰 행복이
더 큰 부자가 어디 있겠는가
눈이 열리니
임께서
곳곳에 뿌려 놓으신
참 좋은
하느님의 선물
살아 있는
아름다운
사랑의 보석들이다.
보석중의 보석
하느님의 보석은
사람이 아니겠는가
주어 담느라
사진 찍기 바쁘다
어찌 사진寫眞 보석뿐이랴
간간히 건져 올리는 시詩 보석 또한 좋다
만나는 사람 모두가 참 보석이다”-
제 휴대폰 갤러리는 그대로 사진 보석 창고입니다. 바로 오늘 말씀이 보석 줍기, 행복 줍기의 비결을 알려 줍니다. 사랑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의 눈’이 열리면 곳곳에서 발견하는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인 생명의 보석들, 사랑의 보석들입니다.
보석중 보석이 사람입니다. 만나는 사람 모두가 참 보석들입니다. 참 보석의 하느님의 자녀가, 빛의 자녀가 되는 비결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다음 사랑의 이중계명의 실천뿐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이 둘은 구별할 수 있을 지언정 분리할 수는 없습니다. 둘이자 하나요 하나이자 둘인 상호보완의 아가페 사랑입니다. 참으로 눈만 열리면 곳곳에 널려 있는 하느님 사랑의 선물들입니다.
우선적인 것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갈림없는 마음으로 주 우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죄가 없어서 마음의 순수가 아니라 이렇게 하느님을 사랑할수록 마음의 순수요 열정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5,8)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할 때 눈이 열려 하느님을, 하느님의 선물들을 보고 사랑하게 됩니다. 저절로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들, 보석중의 보석인 참 보석들인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우리의 이기적 탐욕적 불순한 사랑을 부단히 정화하여 주님의 아가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게 합니다.
바로 이는 그대로 공동체 일치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모두가 사랑의 하느님 중심으로 하느님 사랑을 키워갈 때 저절로 함께 하는 이웃을 사랑하게 되고 공동체의 일치도 깊어지게 됩니다. 하느님 사랑 빠진 이웃 사랑은 불완전하고 부패하기 쉽고 깊어지지도 않습니다. 하여 매일, 평생, 규칙적으로, 끊임없이, 마음을 다해 공동체가 하느님께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사랑의 시편성무일도와 미사의 공동전례기도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더불어 끊임없이 깊어지는, 성장, 성숙하는 이웃 사랑입니다. 한마디로 하느님 사랑 빠진 이웃 사랑은 맹목盲目이고, 이웃 사랑 빠진 하느님 사랑은 공허空虛하다 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참 사랑에 이 둘은 필수의 보완 관계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인생 허무虛無와 무의미에 대한 답은, 인간 무지無知에 대한 답은 사랑뿐입니다. 사랑해서 비로소 사람입니다. 사랑은 우리 삶의 의미일뿐 아니라 우리 삶의 모두입니다. 사랑 없이 무슨 기쁨, 무슨 재미, 무슨 맛으로 삭막한 광야 인생 살아 낼 수 있을런지요. 저절로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라는 코헬렛의 탄식이 나올 수 뿐이 없습니다. 판관기에 이은 룻기가 새롭습니다. 반짝 오늘만 맛보기로 나오는 제1독서 룻기입니다.
룻기에 나오는 나오미와 룻의 고부姑婦간의 사랑이 감동적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일치의 모범입니다. 참으로 비워지고 비워져 텅 빈 충만의 사랑 가득한 가난한 여인들입니다. 나오미와 룻, 모두가 하느님 사랑의 빛나는 보석입니다. 마지막 부분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나오미;“보아라, 네 동서는 제 겨레와 신들에게로 돌아갔다. 너도 네 동서를 따라 돌아가거라.”-
-룻;“어머님을 두고 돌아가라고 저를 다그치지 마십시오. 어머님 가시는 곳으로 저도 가고. 어머님 머무시는 곳에 저도 머물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저의 겨레요, 어머님의 하느님이 제 하느님이십니다.”-
‘어머님’ 대신에 ‘예수님’을 넣어도 그대로 통하는 우리의 고백이 될 수 있겠습니다. 룻의 하느님 사랑은 시어머니 나오미에 대한 사랑을 통해 환히 드러납니다. 완전히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하나된 경지를 보여줍니다. 하여 자랑스런 예수님의 족보에 편입된 이방인 여자 룻이요 다윗도 예수님도 그 후손이 됩니다. 그대로 이런 룻의 ‘사랑의 DNA’(?)가 예수님의 사랑의 이중 계명에 이어지고 있음을 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실천에 항구하고 충실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끝으로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사랑의 보완 관계를 잘 보여주는 ‘하늘과 산’이란 자작시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늘 있어/산이 좋고
산 있어/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신비를 더하고
산은 하늘에/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이가/되고 싶다/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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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견고한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명함>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고(1요한4,16) 우리가 깨끗하지 못해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기에 사랑하실 수밖에 없으십니다.
따라서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십니다.”(마태 5,45) 우리가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주님에게는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에는 한계가 없고 그 깊이 또한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성 요한은 “하느님께 대해 어떤 특별한 것을 알려 하거나 느끼고 싶어 하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가득 찬 마음을 지닌 채 주님을 향하는 것으로 만족하시오!
사랑에 불타는 영혼은 조금도 피로하지 않고 또 남을 피로하게 만들지도 않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막의 은수자 까롤로 까레또도 “이해하려 들지 마시오,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알려들지 마십시오. 결코 알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사랑하기를 힘쓰십시오. 사랑 안에서, 사랑 안에서만 버림받은 예수님과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 구체적인 이웃 사랑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이 계명을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받았습니다.”(1요한4,20-21)
"견고한 사랑은 그리스도인들의 명함입니다. 다른 명함은 거짓이며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그분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요한 13.35 참조)
우리는 지치지 말고 일치로 향하는 길과 서로를 갈라놓는 장애와 장벽을 넘어 하나가 되는 다리를 만들고 또 만들라는 부름 받았습니다. 믿는 이들은 언제나 상호 존중과 대화로서, ‘주님의 제자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경쟁은 누가 더 큰 사랑을 내어 놓을 수 있는지를 찾는 것'(요한 바오로 2세, 2001.09.27 강론)임을 알고, 모범이 되어 서로 도와야 합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성호경을 기억하십시오. 십자가를 긋는 동작을 통해서 위로부터 아래로의 하느님과 나의 사랑을, 동시에 옆으로의 이웃과 나의 사랑을 생각하게 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의 근본이고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회피하지 마십시오. 사랑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도,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선물, 그것은 사랑입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그러므로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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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마태 22,36)
예수님께서 당신을 시험하려는 바리사이 율법 학자의 질문을 받으십니다. 무수한 조항들로 이루어진 율법 중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게 없겠지만 그 모두를 아우르는, 근간이 되는 조항을 제시해 달라는(제시해 보라는) 요구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7)
예수님께서 첫째가는 계명으로 하느님 사랑을 이야기하십니다. 모든 계명은 하느님과 맺은 관계에서 파생된 것이기에 하느님을 빼고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계명은 어떻게 하면 하느님을 더 사랑하고 더 잘 섬길지 안내하는 길잡이입니다.
"마음, 목숨, 정신"은 영육의 생명을 떠받치는 인간 존재의 정수입니다. 곧 온 존재를 다해 하느님을 섬기라는 초대입니다. 하느님 백성이라면 어느 누구도 이 의무에서 제외될 수 없습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9)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별개의 내용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사람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우리는 그 사랑으로 사랑을 합니다. 우리가 하는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흘러나옵니다. 그 사랑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겁니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40)
"달려 있다"는 표현이 매우 강하게 다가옵니다. 이스라엘 역사와 종교와 문화의 뿌리인 율법과 예언서가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고 하시는 예수님의 답변은 과연 핵심 체크입니다. 하느님과 그분의 모상인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는 진정한 하느님 백성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다윗 가문의 역사를 잇는 이방 여인 룻이 등장합니다.
나오미가 과부가 된 며느리 룻에게 제 동족 모압에게로 돌아가라고 하자 오히려 "룻은 시어머니에게 바싹 달라붙"(룻 1,14)습니다. 민족도 연배도 다른 두 여인 사이에 연대가 형성됩니다. 한때 제 식구였던 며느리가 여인으로서 새 삶을 찾아 행복하길 기원하는 시어머니와, 노년의 여인을 염려하는 젊은 룻의 충실함이 엮어낸 연대입니다. 서로에 대한 연민과 배려는 사랑의 다른 표현입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저의 겨레요 어머님의 하느님이 제 하느님이십니다."(룻 1,16)
시어머니와 며느리 관계의 허브라 할 수 있는 한 남성이 죽고 없어진 자리에 이제 하느님이 견고한 중심축으로 자리하시게 됩니다. 그들의 연대 중심에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하느님은 민족과 국가, 계급과 빈부, 연령과 성별의 장벽을 무너뜨리십니다. 인종도 직업도 출신도 전혀 다른 이들이 한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공통 분모로 하나가 됩니다. 아무 조건 없이 서로 돕고 때론 울타리가, 때론 디딤돌이 되어 줍니다. 이렇듯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결국 한 지점에서 만납니다.
"주님은 영원히 신의를 지키시네."(화답송)
억눌린 이, 굶주린 이, 잡힌 이, 눈먼 이, 꺾인 이, 의인, 이방인, 고아, 과부에게 하느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영원히 돌보시고 버팀목이 되어 주십니다. 남편과 아들을 잃은 노년의 과부와 이방인 과부, 약하디 약한 두 여인은 이제 하느님의 그늘에서 살아갈 것이고, 서로에게 하느님 닮은 신의를 지키는 존재들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역사는 그들을 거쳐 이어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온 존재를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의 기본이고 중심이며 절정입니다. 이 사랑을 가장 가난한 순간에도 발휘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사랑이 영원히 신의를 지키시는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랑 때문에 사랑을 그리워하는 참 사랑의 날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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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신부님의 영성의샘물※
♥기드온의 적(하느님의 적)은 악을 저지르게 만드는 막강한 군대와 같다.
그리스도인들이 구약성경을 읽을 때 이야기 내용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적들과 싸우기를 요구하고 대량 학살을 명령하시는 하느님이 우리를 혼란스럽고 의심스러운 상황에 빠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의 영성적인 의미를 찾기 위한 다른 독서법이 필요하다.
♣적들은 살과 뼈로 된 사람이 아니라 내적인 존재요, 우리 마음을 무겁게 가라앉히고 많은 악을 저지르게 만드는 막강한 군대 같은 무리다.
기드온 이야기는 바깥에 머물지 말고, 내면의 싸움에 투신하는 것이 본질적인 자세라고
우리에게 말해 준다. 악과 맞서고 내면의 적들(우리의 연약함과 죄일 수도 있다)과 대결하고 그것들의 이름을 부를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들을 쳐부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무장’(에페 6, 14- 17 참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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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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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사랑의 공명>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소임지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 수녀님이 어렵지만 더 많이 사랑하고
성녀가 되려고 노력한다는 말을 들은 후
그 수녀님을 위해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예쁜 마음으로 사랑하며 살려는 의지는
대견스럽고 기도해 주게 됩니다.
종은 치면 그 소리가 점점 퍼져
사람과 사람을 울리고 공간을 채웁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사람이
이기적이고 이웃과 단절되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며
이상만 높을뿐 실천하지 않는
바리새이와 같은 모습입니다.
빛이 확산되는 것이나
소리의 공명과 꽃의 향기는 솔직하기에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게 됩니다.
사랑하면 제 아무리 감추려해도 보이기 마련!
만일 당신이 사랑으로 가는 과정에서
미워하는 대상이 있다면 어렵겠지만
그런 상황을 봐 주는것도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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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 37)
가장 먼저도
가장 나중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최선의 삶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하느님 사랑이
무엇보다도
먼저입니다.
사랑을 통해
우리의 중심 또한
어디에
두어야 할지를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
사랑으로 돌아갈
우리들 삶입니다.
우리의 오늘 또한
하느님을
사랑해야 할
오늘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함께 사랑하길
원하십니다.
우리의 생명이란
하느님 사랑을
배우고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길을 먼저
지나가십니다.
지상에서도
천상에서도
하느님 사랑입니다.
마음과 목숨
정신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자유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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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편집/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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