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가 다 흘러도 전화 한 통 없다. 문자나 카톡은 넘쳐나지만 생생한 목소리로 나를 찾는 전화는 없다. 어쩌다 언니의 안부 전화나 남편으로부터 회식이 있어 저녁에 늦을 거라는 일정 보고가 다다. 책을 읽거나 글을 써도 가끔씩 심심할 때가 많다. 리모컨을 들고 시간을 죽이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짜증나기까지 한다. 재방송과 하나같이 받아들이기 싫은 정치권 뉴스에 질려서 화가 나기도 한다.
티비를 끄고 잠을 잘까 망설일 때 문득 핸드폰이 간절히 나를 부른다. 한참 바쁠 데 같은데, 그래서 기대도 안하는데 반가운 목소리가 반갑고
살갑다. 박미○선생님!
그 선생님을 안 것은 같은 아파트에서였다. 그것도 시어머니께서 들려준 정보에 의해서 선생님이고 그 선생님의 친정어머니가 아이들을 돌본다는 것이었다. 가까운 데 사시니까 아이들을 돌보다가 그 선생님이 퇴근하면 자기의 집에 돌아가신다는 거다. 나는 시어머니와 같이 사니까 육아에는 별 어려움이 없어 맞벌이 부부의 어려움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였다. 우리 아들과 그녀의 딸이 같은 유치원에 다녀서 같은 시간에 등하윈을 하였다. 할머니들끼리 친해져서 웬간한 가정사는 나누었던 것 같다. 어머니들끼리 나눌 수 있는 정보를 나에게 들려주면 나는 그대로 믿을 수밖에~
나는 새학기가 되었을 때 그 선생님이 장학사가 되어 고흥으로 발령을 받았다는 걸 알았다. 참으로 부럽고 샘나는 일이었다. 학생과 학부모부터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는 일개 교사가 그런 교사를 감독하고 지휘하는 장학사가 되었다는 것은 나에게 넘겨다 볼 수 없는 철옹성이었다. 언제까지 나는
작고 미미한 존재로 살아가야하나? 장학사 시험에 도전해 보면 어떨까 생각도 해보지 않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자식들이 같은 초등하쿄에 다니는 것이 인연이 되어 아주 가끔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면 가벼운 인사말로 소식을 나누게 되었다. 그때 그 선생님에 대한 나의 느낌은 올곧고 바른 선생님이었다. 단단하고 뛰어난 교사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런 나의 인상은 오랜 시간이 되어서 차츰 달라졌다. 자주 만나고 깊이 있는 생활사를 듣고서야 나와 그닥 차이가 안나는 펭범한 사람이라는 거다.
특히 내가 병가와 휴직을 번갈아내면서 관련 사항을 문의하고 처리하먼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러먼서 언뜻언뜻 내비치는 자신의 말을 통해서 차츰 스스럼없이 자유롭게 얘기하는 사이가 되었다. 자식이 대학을 가고 선생님은 교감과 교장을 거치며 더 자주 나른만났고, 내가 겅헝하지 옷한 과리자로서의 고충을 털어놓았다. 나는 달리 해 줄말이 없고 들어주는 수준이었다. 선생님도넋두리에 그쳤다. 그래도 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우리는치유되고정화되는 경허을 하게 되었다.
나는 멍예퇴직을 하였다. 명예퇴직을 하게 될 때의 상황을 떠올린다. 경력 미달과 청구 이유가 충분치 않아 밀리기만 하였다. 휴직을 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도 안되면 다시 휴직을 연장하자고 상의하던 겨울방학, 가족여행중에 내가 뇌출혈을 당했다.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이 전화벨을 눌렀다. 그 선생님께. 벨만 누르고 말을 못하니 받는 당사자는 얼마나 답답했을까? 남편에게 전화기를 넘기고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런데 그날이 명예퇴직 희망자 최종 심사가 열리는 날이었다. 그 선생님이 들어 맨 마지막 명단에 나를 넣은 거다. 이런 행은이! 그 이후 나와 그 선생님은 급히 친해졌고 내가 순천에 이사를 와서도 긴밀한 우정의 길을 유지했다. 도교육청이 있는 무안이나 순천대학으로 출장을 갈 때 돌아오먼서 우리집을 방문한다. 그때마다 살아가는 상황을 애기하면서 웃고 떠들고 공감하면서 같이 늙어가는 오만가지 비애를 나누게 되었다. 특히 그 선생님이 퇴근 후 드럼을 배울 때, 꾸준히 주변산을 걸을 때 같은 시간을 보낸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특히 그 선생님이 갑상선암에 걸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고생할 때 나는 견딜 수 없는 무력감을 느끼고 무사히 이겨내기를 주님께 기도했다. 다행히 거뜬히 이겨내셨고 어떻게든 살아지겠지하고 힘을 내었다. .
나는 그 선생닝께 가당치 않은 조언을 드린다. 종교를 가지라고~ 나는 항 상 내 곁에 하느님이 계신다고 생각한다. 그때마다 편안해지고 약간의 용기를 갖게 된다.
자주 하는 우리들의 대화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우선 이름 부를 수 있는 가족이 있음에 감사하고, 가족에게 의지하지 말고 오롯이 나로 살아가기를 꿈꾸먼서 즐거고 해복하게 살아가기. 아듀
.오늘의 당신 전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