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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 노성면 교촌리의 명재 윤증 선생 고택에서 돋보이는 건축물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누마루 입니다.
윤증 선생의 13세손이신 윤완식 씨께서 말씀하시는 고택의 숨은 이야기와 제사와 차례등의 가례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누마루라고 하면 다락처럼 높게 지은 마루를 일컫는 말입니다.
아래의 사진을 보면 사랑채 옆에 보이는 창문이 열어 젖혀진 곳이 바로 누마루 입니다.
측면에서 보는 누마루 풍경
천문에 대해서도 관심이 매우 많았던 사대부 집안이라 이곳에서 별자리등의 관하여 논하기도 하였다 하는군요.
13세손 윤완식씨는 전통 한옥은 바깥에서 바라보는 모습보다 안에서 내어다 보는 풍경이 참 맛을 느낀다고 합니다.
누마루의 분합문을 열어 젖히고 앉아 있는 모습에서 신선이 따로 없음을 느끼기에 충분하군요. 확트여진 공간에서 바람이 전하는 시원함을
여유롭게 잠시 부려 봅니다. 바깥을 향해 보는 사방이 한폭 한폭 그림같습니다. 분합문의 크기 비율이 요즘의 16:9의 와이드 비전과 매우 흡사한
구조라고 하는군요. 그래서 그런지 정말 멋진 바깥 풍경이군요. 이곳에서 바둑을 두고 있으면 영락없이 신선이요, 글을 읽고 있으면 누구도
지조있는 선비가 되겠습니다.~~
누마루와 연결되어 있는 사랑채의 아들이 기거하는 방과 연결되어 있는 구조 입니다.
이곳은 사랑채의 대청으로 누마루의 분합문을 열고, 사랑채의 문또한 열어 걸쇠에 걸치면, 동에서 서로 바람길이 시원하게 열리게 되는 것이지요.
대청의 창문 역할의 널판지문을 활짝 열게되면 300년 전통의 맛이 간직되어 있는 장독대의 웅장함이 시원스럽게 펼쳐집니다.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스럽게 통하는 열린 구조 랍니다. 특히 아침 햇살이 들어오는 사랑채의 아침은 정말 고즈넉해서 마음이 정갈해 집니다.
장독대에서 바라보는 사랑채와 누마루 입니다.
뒷문으로 연결된 골방과 사랑방 사이에 설치된 `미닫이여닫이문`. 한쪽은 여닫이로 다른 한쪽은 미닫이로 되어 있어서 두 짝을 합쳐 밀면 활짝 열리도록 설계돼 있다.
안채에서 상을 나르기 편하도록 고안된 것이라고 하는군요. 또한 오래전에는 사진에 보이는 문틀 전체를 들어올려 방 한가운데로 옮겨 한방에서 부모와 아들 내외가 잘 수 있도록 설계한 것은 며느리에 대한 배려로 정말이지 놀랍기 그지 없습니다. 이러한 설계 방식이 300여년 전에 고안된 것이라니 정말 놀랍지요
오늘 저희들이 잠을 자게될 사랑채 입니다.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습니다. 달빛에 비치는 문살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싶습니다. 잠이 올지 모르겠습니다.~~ㅎㅎ
13세손 윤완식 선생께서 사랑채의 분합문을 열어 걸쇠에 걸고 계십니다.
사랑채 대청마루의 창문까지 열리니 시원하기 그지 없습니다. 300년 고택에서 불어오는 5월의 봄바람이 달콤하군요.
누마루와 사랑채에서 건양대학교 김 문준 교수님을 모시고 기호유학에 대한 말씀을 듣는 유익한 시간 이었답니다.
기호라 함은 역사적으로 경기와 충청지역을 말하지만 더 넓게는 호남지역까지도 아우른다고 합니다., 금강을 기준으로 남쪽은 호남, 서쪽은 호서라 부른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의 유학은 16세기 퇴계와 율곡이라는 거유의 등장으로 기호유학과 영남유학이라는 양대 산맥을 형성하며 발전을 했다고 합니다. 물론 16세기는 성리학의 전성기로서 많은 유학자가 나타나 조선 성리학의 꽃을 피웠으나 기호 유학과 영남유학이 구별되어 학파적 성격을 띠고 상호 대립하며 발전한 것은 퇴계와 율곡 당시가 아니라
17세기 갈암 이현일, 우암 송시열등 그들의 후예들에 의해서라고 할 수 있답니다.
기호 유학은 크게 보면 율곡학파와 우계학파가 주류였는데, 윤증 선생은 우계 성혼 으로부터 시작한 성혼 학맥을 따르고 있다, 성혼의 문하에는 그의 사위인 윤황,을
비롯하여 이시백, 안방준, 강항, 황신, 김덕령, 신흠 등이 있고, 본래 이이, 성혼, 송익필 세 사람은 동향 출신으로 나이도 비슷하고 우의가 돈독하여 그의 문인들도
세 문하를 자유롭게 왕래하여 사승 관계가 겹치고 있답니다. 성혼의 학문은 사위인 윤황을 통해 아들인 노서 윤선거로, 다시 손자인 윤증으로 계승 되었다,
윤증은 송시열의 사랑을 받는 제자 였으나 묘지명 사건, 예송 등 복잡한 사건으로 반목과 갈등으로 사제의 관계를 끊게 되고 정치적으로는 노론과 소론의 길을 달리
걷게 되었다 합니다. 기호 유학은 개방적 학풍속에서 매우 다양한 유교문화를 꽃 피웠다. 그 내용에 있어 성리학, 양명학, 기학, 의리학, 예학, 실학등 매우 다양하게 전개
하였다,
17세기는 전쟁으로 인한 국력의 쇠퇴, 민생의 위기, 광해의 패륜으로 인한 윤리강상의 위기, 당쟁의 심화로 인한 지도층에 대한 불신 등으로 민심의 이반과 유교사회의
기반이 중대한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윤리 강상의 재건이라는 학문적 필요성이 요청되어 예학을 확립하고 예를 생활화 함으로써 사회 혼란을
바로 잡고자 하였다.
이밖에도 어질게 정치를 하라의 공자님의 사상과 동물은 모르고 하고 사람은 알고 한다, 천도와 인도는 같은 것이며 인간의 본질은 착함을 강조하신 맹자사상에 대하여도 말씀, 또한 족보의 유래가 일본인들이 조선인 스스로가 조상을 업신여기도록 하는데서, 유교사상을 형편없이 여기게 하는데서 기인했다 하니 처음 알게되는
사실에 적잖이 놀라움을 금치 못한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피가 섞인 사람들은 친해야 한다며 한 사람이 생계를 책임지는 구조인 집성촌의 발달은 기호유학 문화권의
중심인 충청도에서 잘 나타난다고 합니다. 아산 외암 민속마을이 그러한 예를 잘 보여 줍니다. 전국적으로 집성촌이 많은 것으로 압니다. 집성촌의 유래와 의미에
대해서 다시한번 고찰해 보아야 겠습니다.
우리나라를 둘러싼 강대국의 힘의 흐름이 점점 유교문화에 다시 집중을 보이며 연구하는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으므로 정부정책의 변화도
필요한 시점임을 강조 하시더라구요. 듣고 있는 한시간 내내 소름과 마음의 전율이 느껴지는 진지한 시간이었습니다.
명재고택에서의 기호유학에 대하여 강연을 들으면서 밤이 깊어 갑니다.
지금은 전등불 이지만 아주 오래전에는 호롱불에서 나오는 빛으로 창호문살이 환하게 비추었겠지요.
불이 비치는 문살이 왠지 포근하지 않나요?
단잠을 자러 들어 갑니다.~~
짜잔~~ 벌써 새벽이 밝아 옵니다. ㅎㅎ
아침 일찍 고택에서 문틈을 향해 들어오는 신선한 아침 공기가 참 좋습니다.
살짝 보이는 퇴마루와 넓은 정원의 배롱나무가 제일 먼저 인사를 합니다.
누마루로 들어가는 문이 고풍스럽게 다가 옵니다.
아침 식사후에 13세손 윤완식 선생께서 들려주는 고택이야기 입니다.
17년차 나시는 형님께서 따님들만 두고 돌아가셔서 고택의 운영전반을 맡게 되었다는 말씀을 시작으로 차레날과 제사상에 올리는 음식은 매우 간소하게
차린다고 합니다. 특히 떡이나 , 기름진 전등은 준비를 하지 않는다고 하는군요. 고기 또한 한토막만을 올리며, 양력설을 오래전부터 지내는데 이는
양력이 실제 생활에서 편리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게다가 생일상도 차리지 않는다는군요. 추석날에도 송편을 하지 않고 하얀 백설기를 올리는데 이는
하얀 백설기처럼 마음이 변함없이 오래 살자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합니다.
조상은 사대까지 모시며, 제주는 맑은 청수로 대신한다고 하는군요, 음식을 만들때는 수다를 떨지 않게 창호지로 입을 가리고 하고, 지방을 쓸때도 마지막의
"신위"라는 부분에서 신 자를 빼고 쓴답니다. 이는 기독교에 종교를 가지신 누님에 대한 배려로 그전에는 제사시에 절을 하지 않으시다, 지방을 바꾼 뒤로는
제사에 참여하여 절을 한다고 하시는군요. 제사 음식에는 양념을 과하게 하지 않아 먹는 사람들의 건강을 생각 하신답니다.
특이한 것은 제사나 차례 지낼때 절을 함에 있어서 일반적인 우리네는 팔을 구부려 머리를 방바닥에 닿을 듯 하는데 선생님 집안에서는
아래의 사진과 같이 한다고 하는군요. 이 또한 이유가 있는데.. 사내들이 너무 자신을 낮추지 마라는 의미가 있다고 하는군요.
고택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사적인 가족들의 생활이 너무 노출이 되는 것에 불편함과 시골 생활에 대한 고독과 외로움 부분 때문에 2년간은 힘이
들었다고 하네요. 13세 종부이신 아내분께서 처음에는 논산으로 내려오길 거절 했지만, 조상들의 얼이 담긴 고택과 전통 음식을 잘 보존하기 위하여 지금은 아주 열정적으로 일을 하신다고 하는군요. 이해가 충분히 가는 부분 입니다.
사대부집안의 전통과는 다르게 검소한 생활을 한 가풍답게 윤완식 선생은 어려서도 생일상을 잘 차리지 않고, 밥보다는 고구마를 많이 먹어서
지금은 입에도 대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함께 생활했던 노비에 대한 표식을 모두 없애주어 그들이 인권을 보장해 주는 진정한 개방의 지도층 이었음을
짐작케 합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호칭에 대한 부분도 말씀을 해주셨는데.. 예를 들면 신랑에게 "아빠" 또는 " 오빠" 라고 부르거나, 남편의 여동생 신랑에게 " 고모부" 라는것등은
유교적 사상에 맞지 않는다고 합니다. 게다가 나이 어린 시동생에게 " 도련님" 호칭도 아니랍니다. 올바른 것은 "서방님" 이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서방이라는 것은 학업을 정진하는 나이가 되었을때 부르기 시작하는 것으로 글공부 방에 들어선 남자를 의미한다고 하는군요. 그러니까 고모부도 작은올케서방님 이라고 해야하는 것이지요. 여편네가 지금은 여성을 비하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데, 이도 여자들이 생활하는 안채의 편에 있는 여자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비하의 뜻은
전혀 없는 것이지요. 반대로 여자들이 남편들을 호칭할때 남편네 라고 하는 것이 맞다고 합니다.
안채와 광채사이에 비스듬한 공간을 주어 안채가 광채로 인해 햇빛이 차단되는 것을 방지하여 해가지는 시간에도 충분한 햇빛을 받게끔 하는
것이 눈에 띠는 공간입니다.
안채의 뒤안에서 바라볼 때 사진 우측을 보시면
안채와 광채가 약간 비스듬히 건축이 된걸 보실수 있습니다.
안채의 동쪽 부분에는 며느리와 과년한 딸들이 기거했던 곳으로 뒤안에 조성된 넓은 공간과 화단의 조성이 바로 이들을 배려하기 위한 구조라고 보여 집니다.
바깥 활동이 제한되었던 그 시대에 화단에 커다란 매실나무를 심어 이에 올라가 바깥 풍경을 보게 했다는 군요
17세기 조선시대 사대부 집이라면 솟을 대문과 높은담장들이 둘러쳐져 있어 그 위엄을 나타내는게 일반적인데, 명재 고택은 눈씻고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다만 안채는 아녀자들이 기거하는 곳이라 그들을 위한 배려가 돋보이게 지어졌지요. 행랑채가 없어서 대문을 열면 안채로 바로 진입하기 때문에 내외벽을 두어
방문객들이 안채의 중심부분과 바로 보이지 않게 하였습니다. 보통 사대부의 집안이라면 안쪽에 사당을 설치하는게 일반적이지만 담장 바깥쪽에 설치한 것이 특이한
구조입니다.
명재윤증고택의 개방성은 세도가의 위세가 강요된 것이 아니라 윤증선생이 평소에 주력했던 향촌민과의 교화와 보살핌의 차원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는 공개를 해도 부끄러움과 감출것이 없다는 유학자적 자신감이라고 봐야 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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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한옥을 잘보다 로젠택배 나와서 먼가했네요.
아마 택배사 테이프를 사용해서 등의 찟어진데를 붙였나봐요.^^
사진 보면서 작은 부분이지만...관리에 조금 아쉬움이 드는 사진 이었습니다.
옥의티처럼... 느껴지는군요. 그래도 유익한 시간이였지요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배운...
깨달음을 준 인문학 여행이었습니다^^
인문학을 듣는시간을 저도 가지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