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위 한국 복자 시복식 터
한국 천주교사에 길이 남을 역사적 순간인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식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 앞에서 거행되었다. 광화문 광장은 조선시대 의금부, 포도청, 서소문 형장 등 한국 제1세대 순교자들이 목숨을 바친 장소들과 밀접하게 연결된 곳이다.
통상 시복미사는 바티칸에서 교황청 시성성 장관 추기경이 교황을 대리해 거행해왔으나 이번에는 교황이 직접 순교자의 땅을 찾아 시복미사를 거행하는 감격스러운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이날 순교자 124위 시복식은 한국 천주교회 역사상 세 번째로 열리는 시복식이다. 앞서 일제 강점기인 1925년(79위)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직후인 1968년(24위)에 열린 시복식은 모두 로마에서 열렸다. 이때 복자품에 오른 순교자 103위는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한국에 직접 방문하여 시성하였다.
시복식은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위원장인 마산교구장 안명옥 주교의 시복청원문 낭독에 이어 시복 청원인 김종수 신부(로마 교황청 한인신학원장)의 124위 시복자의 순교자 약전 낭독으로 진행되었다. 이에 교황께서는 “공경하올 하느님의 종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을 ‘복자’라 부르고 5월 29일에 축일을 거행하도록 허락한다”는 시복 허락 기도로 시복선언을 하였다. 교황의 시복 선언에 이어 김형주(이멜다) 화백의 124위 복자화 ‘새벽 빛을 여는 사람들’이 공개되는 순간 신자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오면서 분위기는 절정에 달했다.
1784년 천주교회가 전래된 이 후 거의 100년 이상 한국 교회는 모진 박해에 시달렸고 엄청난 고초를 겪어야만 했고, 이러한 박해를 통해 죽음으로 신앙을 증거 한 수많은 순교자들이 배출되었으며, 그 순교자들 가운데 103위의 순교자들이 1984년 시성되었다. 103위 시성식은 한국 천주교회의 큰 기쁨이요 영광이었다. 그러나 시성식이 끝났으나 한 가지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있었다. 신해박해(1791)와 신유박해(1801)의 순교자들이 아직도 시복 시성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주교회의는 신유박해 200주년 기념해인 2001년 10월 18일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한국 순교자들의 시복 안건을 통합적으로 추진해 온 결과, 윤지충과 동료 123위의 시복 시성 조사가 완료되고 이 시복 조사 문서들은 2009년 6월 3일에 교황청 시성성에 정식 접수되었고, 시복을 위한 절차도 완결되어 2014년 2월 7일 교황 성하의 재가를 얻었다.
하느님의 종 124위는 1791년 신해박해 3위, 1795년 을묘박해 3위, 1797년 정사박해 8위, 1801년 신유박해 53위, 1814년의 1위, 1815년 을해박해 12위, 1819년의 2위, 1827년의 정해박해 4위, 1839년의 기해박해 18위, 1866년과 1868년의 병인-무진박해 19위, 1888년의 1위로 신유박해 전후의 순교자들이 시복 추진의 중심에 있다.
교황께서 재가하신 윤지충과 그 동료 123위 시복 결정은 대략 세 가지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첫째, 한국 천주교회는 1984년 시성식을 통해 103위의 성인을 보유하고 있다. 그런데 103위 성인들보다 더 초기에 순교하신 순교자들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아쉬움으로 남아 있던 차 초기 순교자들의 시복을 추진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이번 124위 시복 결정이 재가 됨으로써 그 동안의 염원이 현실로 이루어진다는 의미가 있다.
아울러 124위의 시복 결정은 그 추진의 역사가 시복청원을 한 지 5년이 채 안되는 짧은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상당이 빠른 시일 안에 결정이 재가 됨으로써 한국 천주교회의 자발적인 역랑과 철저한 준비를 보편교회가 높이 평가한 의미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124위의 시복을 위해 한국 천주교회의 신자들이 순교자의 삶을 본받고 삶으로 실천하면서 순교자의 영성을 현양하고 열심한 기도로 동참한 노력도 높이 평가 받는 의미도 찾아볼 수 있다.
■ 124위 시복 기념 바닥돌, 광화문 광장에 설치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시복 1주년을 맞아 시복식이 거행됐던 서울 광화문 광장에 2015년 8월 23일 기념 표석(바닥돌)이 설치됐다.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는 이날 오전 광화문 북측 광장에서 교구장 염수정 추기경 주례로 조규만ㆍ정순택ㆍ손희송 주교와 사제단이 함께한 가운데 기념 표석 ‘한국 천주교 순교자 124위 시복터’ 축복식을 거행했다.
가로 170㎝, 세로 100㎝ 크기로 제작된 기념 표석에는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2014년 8월 16일 이곳에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을 복자 반열에 올려 이를 온 세상에 선포하신 것을 기리고자 이 돌을 놓습니다”라는 글이 한글과 영문, 한문, 스페인어로 새겨져 있다. 기념 표석 관리는 세종로본당에서 맡았다.
염 추기경은 이날 축복식 인사말을 통해 “지난해 시복식을 통해 순교자들은 자신을 박해한 이들까지 용서하고 화해하며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성의 고귀함을 드높이 증언하였음이 드러났다”며 “그래서 빛이 사방을 덮고 교화가 만방에 비추는 이곳 광화문은 박해자와 순교자가 화해하는 평화의 광장이 됐다”고 선언했다. 이어 염 추기경은 “이제 124위 시복 1주년을 맞는 이 시간을 통해 교황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세 가지 열쇳말인 기억과 희망, 증언이 우리 사회에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가 되어 곳곳에서 소중한 열매를 맺기를 기원한다”고 밝혔다.
축복식에는 양두석(토마스) 서울 순교자현양회장과 권길중(바오로) 한국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장, 김종덕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박원순 서울시장, 우윤근(스테파노) 국회가톨릭신도의원회장, 양준욱(요한 사도) 서울시의회 가톨릭신우회장 등이 함께했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 순교자
◆ 박해 시기별 순교자
○ 1791년 신해박해 3위
1791년 12월 8일 한국천주교회에서 첫 번째로 참수된 윤지충 바오로, 그 뒤를 이은 권상연 야고보는 전주 남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이로부터 2년 뒤 원시장 베드로는 충청도 홍주에서 매를 맞아 죽음으로써 순교하였다.
○ 1795년 을묘박해 3위
윤유일 바오로와 최인길 마티아, 지황 사바는 주문모 신부를 보호하기 위하여 죽을 때까지 매를 맞으며 자신들의 목숨을 주님께 바쳤다.
○ 1797년 정사박해 8위
정사박해로 인해 이도기 바오로는 1798년에 충청도 정산에서, 방 프란치스코와 박취득 라우렌시오는 1799년에 홍주에서, 정산필 베드로는 같은 해 덕산에서 순교하였다. 또한 1799년에 원시보 야고보, 1800년에는 배관겸 프란치스코가 청주에서 순교하였다. 인언민 마르티노와 이보현 프란치스코는 1800년에 해미에서 순교하게 된다.
○ 1801년 신유박해 53위
124위 중 가장 많은 순교자를 낳은 박해는 역시 신유박해이다. 이해 3월에 조용삼 베드로는 경기도 감영에서 옥사한다. 4월에는 최창현 요한,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최필공 토마스, 홍낙민 루카가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게 된다. 같은 날 처형된 이승훈 베드로는 아직 순교 사실에 대한 이론이 있으며, 그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연구가 끝나지 않아 현재 시복 대상에 빠져 있다.
같은 해 4월 최창주 마르첼리노, 이중배 마르티노, 원경도 요한는 경기도 여주에서 순교하며, 윤유오 야고보는 경기도 양근에서 순교한다. 5월에는 최필제 베드로, 윤운혜 루치아, 정복혜 칸디다, 정인혁 타데오, 정철상 가롤로가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다. 음력 4월 초에는 심아기 바르바라가 포도청에서 매를 맞아 순교한다. 1801년 5월 31일 조선의 선교사로서 첫 번째로 주문모 신부가 새남터에서 장렬하게 순교한다.
같은 해 7월 강완숙 골롬바, 강경복 수산나, 김현우 마태오, 문영인 비비안나, 김연이 율리아나, 이현 안토니오, 최인철 이냐시오, 한신애 아가타가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다. 윤점혜 아가타와 정순매 바르바라는 그해 7월 양근과 여주에서 각각 순교한다. 음력 5월에는 김이우 바르나바가 서울 포도청에서, 이국승 바오로가 공주에서 순교한다. 8월에는 김광옥 안드레아가 예산에서, 김정득 베드로가 대흥에서, 한정흠 스타니슬라오가 김제에서, 김천애 안드레아는 전주에서, 최여겸 마티아는 전라도 무장에서 순교한다.
같은 해 10월 김종교 프란치스코와 홍필주 필립보가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다. 같은 달 전주에서는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윤지헌 프란치스코가 순교한다. 11월에는 유중철 요한(이순이 루갈다와 동정부부)과 유문석 요한이 전주에서 순교하고, 12월에는 현계흠 바오로가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다.
1802년 1월(음력 1801년 12월)에 김사집 프란치스코가 청주에서 순교한다. 같은 달 손경윤 제르바시오, 이경도 가롤로, 김계완 시몬, 홍익만 안토니오가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다. 같은 달 정광수 바르나바는 여주에서, 한덕운 토마스는 남한산성에서, 황일광 시몬은 홍주에서, 홍인 레오는 포천에서 권상문 세바스티아노는 양근에서, 이순이 루갈다와 유중성 마태오는 전주에서 순교한다.
○ 1815년 을해 박해 12위
을해박해 직전인 1814년 12월 해미에서는 성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가 옥사한다.
음력 4월에 김윤덕 아가타막달레나가, 음력 5월에 김시우 알렉시오와 최봉한 프란치스코가, 그해 말엽에는 서석봉 안드레아가 대구에서 순교한다. 김강이 시몬은 12월에 원주에서 순교한다. 김희성 프란치스코와 구성열 바르바라, 이시임 안나, 고성대 베드로와 고성운 요셉 형제, 김종한 안드레아와 김화춘 야고보가 대구에서 12월에 순교한다.
1819년 8월에는 조숙 베드로와 권 데레사 동정부부가 서울에서 참수되어 순교한다.
○ 1827년 정해박해 4위
6월에 전주에서 이경언 바오로가 순교하고, 11월에는 박경화 바오로가 12월에는 김세박 암브로시오가 대구에서 옥사로 순교한다. 1835년에는 안군심 리카르도가 대구에서 옥사한다 .
○ 1839년 기해박해 18위
5월에 대구에서 이재행 안드레아, 박사의 안드레아, 김사건 안드레아가 순교한다. 같은 달 전주에서 이일언 욥, 신태보 베드로, 이태권 베드로, 정태봉 바오로, 김대권 베드로가 순교한다. 9월에는 최해성 요한이 원주에서 순교한다. 10월에 김조이 아나스타시아, 11월에 심조이 바르바라가 전주에서 옥사한다. 12월에 이봉금 아나스타시아는 김조이의 어린 딸로 교수되어 순교한다. 같은 달 원주에서 최 비르지타가 교수되어 순교한다.
1840년 1월 홍재영 프로타시오, 최조이 바르바라, 이조이 막달레나, 오종례 야고보가 전주에서 순교한다. 최양업 신부의 모친 이성례 마리아는 같은 달 당고개에서 순교한다 .
○ 1866년 병인박해 19위
3월에 청주에서 오반지 바오로가, 대구에서 신석복 마르코가 순교한다. 12월에는 공주에서 김원중 스테파노가 순교한다. 청주에서 순교한 장 토마스와 경상도 함안에서 순교한 구한선 타데오는 1866년 어느 달에 순교하였는지 확인되고 있지 않다. 병인박해는 가장 혹독한 박해였기 때문일 것이다.
1867년 1월에는 진주에서 정찬문 안토니오가, 통영에서 김기량 펠릭스베드로가, 상주에서 박상근 마티아가 순교한다. 같은 해 서울에서 순교한 송 베네딕토와 베드로, 이 안나 가족 순교자 역시 어느 달에 순교하였는지 확인되고 있지 않다.
1868년 여름에 동래에서 이정식 요한과 양재현 마르티노가 순교한다. 9월에는 이양등 베드로와 김종륜 루카, 허인백 야고보가 울산에서 순교한다. 같은 달 박 프란치스코와 오 마르가리타 부부 순교자가 경기도 죽산에서 순교한다. 10월에는 박대식 빅토리노가 대구에서 순교한다 .
1888년 4월에는 신앙의 자유가 생겼지만 지방의 인식 부족으로 진주에서 윤봉문 요셉이 순교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