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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공(文正公) 권기(權技) 묘 대한민국풍수지리연합회(대풍련) 통합간산이 4월말에 있었다. 이번에는 충북괴산지방의 양음택을 합동간산하였다. 비가 오는 중에 300여명이 한꺼번에 움직이다보니 조금 어수선하게 진행되었지만 회원님들의 적극적인 협조와 학문에 대한 열망이 좋은 결과를 만들어 주신것 같아 기쁘다. 문정공 권기 선생은 양촌 권근선생의 조카가 된다. 인명사전에도 잘 안나오는 분으로 프로필은 묘갈에서 인용해 첨부하였다. 이곳은 최근에 묘역 뒤로 도로가 개설되어 맥이 손상을 당한 곳이다. 국세는 비교적 안정감 있으나 재혈이 조금 낮게 되어 오히려 묘역 뒤에 있는 양천허씨 허담의 묘가 정혈지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
문정공(文正公) 권기(權技) 권기(1405~1467년)는 1432년(세종 14년)에 등과(登科)하여,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병조좌랑(兵曹佐郞), 좌·우간의대부(左·右諫議大夫)와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등을 역임하였으며, 1457년(세조 3년)에는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었다. 묘갈문에는 그의 가계(家系)와 관력(官歷), 그리고 가족사항이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권기 묘갈(權技 墓碣) 유명(有明) 조선국 통정대부(通政大夫) 행 강릉도호부사 겸 강릉진병마절도사(行江陵都護府使兼江陵鎭兵馬節度使) 권공(權公)의 묘(墓) 공의 휘(諱)는 기(技)이다. 공의 가문은 안동(安東)의 대성(大姓)으로 증조부 휘 고(皐)는 검교시중(檢校侍中)을 지냈으며 시호는 충정공(忠靖公)이다. 조부 휘 희(僖)는 검교좌정승을 지냈으며 시호는 정간공(靖簡公)이다. 부친 휘 우(遇)는 예문관 직제학을 지냈으며 호는 매헌(梅軒)이며 문학으로 이름을 떨쳤다. 모친 정부인(貞夫人) 남양 홍씨(南陽洪氏)는 판사(判事)인 휘 빈찬(斌贊)의 따님이다. 공은 영락(永樂) 을유년(태종 5, 1405년) 6월 경인일에 태어났다. 공은 어려서부터 기예(技藝)와 무학(武學)을 좋아했다. 세종 기유년(세종 11, 1429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임자년(세종 14, 1432년)에 등과했다. 예문관 검열을 사직하고 여러 차례 사헌부 감찰을 지냈다. 무오년(세종 20, 1438년)에 참시관(參試官)으로서 진사(進士) 신숙주(申叔舟) 등 100인(人)을 선발했다. 신유년(세종 23, 1441년)에 병조좌랑으로서 ~ 이하 2자 빠짐 ~~ 권숭순(權崇淳) 등 8인(人)을 선발했다. 사간원 정언(正言), 사헌부 지평(持平), 병조와 형조의 정랑(正郞)을 역임했으며, 사간원 지사(知事), 사간원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사간원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에 올랐다. ~ 이하 2자 빠짐 ~ 간신(諫臣)의 기풍이 있어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발탁되었으며 원종공신(原從功臣)의 칭호를 하사받았다. 얼마 후 내금위장(內禁衛將)을 겸직하였으며 신중하(申重夏)가 ~ 이하 두 자 빠짐 ~ 사(使)에서 물러나 서울로 가자, 인하여 병마강릉부사(兵馬江陵府使)로 돌아왔으며 인하여 본도 절도부사(節度副使)를 겸하였다. 조금 있다가 옛 직책에 복귀하였다. 정해년(세조 13, 1467년) 11월 신묘일에 병환으로 가정(柯亭)에서 졸하였으니 향년이 63세였다. 이듬해 무자년(세조 14, 1468년) 2월 임인일에 예장(禮葬)을 받고 문정공(文正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괴산의 북쪽 5리쯤에 있는 교촌(校村) 뒤 수진동(水津洞) 임좌병향(壬坐丙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부인의 묘도 같은 자리에 썼다. 공은 성격이 온화하면서도 굳세었으며 기품은 엄숙하고도 ~ 이하 두 자 빠짐 ~ 하였다. 집안을 다스림은 화목하게 하였고 관직에 나가서는 삼가서 보답하였다. 시문(詩文)을 좋아하였으며 일을 잘 처리하는 재간과 국량이 있었으나 크게 시행해 보지는 못하였으니, 안타깝도다. 공은 성주 이씨(星州李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안무사(按撫使) 흥문(興文)의 따님이다. 3남 5녀(역자주 - 원문은 5녀이나 문맥상 6녀의 오기로 생각됨)를 낳았는데 장남 율(慄)은 --이하 2자 빠짐 -- 병조좌랑으로 임오년(세조 8, 1462년)에 등과하였다. 차남 침(?)은 을유년(세조 1, 1465년) 진사시에 합격했다. 장녀는 김중권(金仲權)에게 시집갔으며, 차녀는 생원 허담(許憺)에게 시집갔고, 셋째 딸은 사직(司直) 허숭(許崇)에게 시집갔다. 셋째 아들 종(悰)은 경인년(성종 1, 1470년)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넷째 딸은 별제(別提) 유팽수(柳彭壽)에게 시집갔으며, 다섯 째 딸은 장사랑(將仕郞) 이원형(李元亨)에게 시집갔고, 여섯 째 딸은 호군(護軍) 조운총(趙云聰)에게 시집갔다. 이하 8자 빠짐 ~ 나머지는 어리다. 율(慄)은 성주 이씨(星州李氏)에게 장가들었으니 감찰(監察) 이유(李洧)의 따님이다. 1남 2녀를 낳았는데 딸 둘은 어리다. 침(?)은 의령 남씨(宜寧南氏)에게 장가들었는데 집의(執義) 남수문(南秀文)의 따님이다. 2남 1녀를 낳았다. 종(悰)은 용인 이씨(龍仁李氏)에게 장가들었는데 ~ 이하 5자 빠짐 ~ 중권(仲權)은 아들 운(運)을 낳았다. 허담(許憺)은 2남을 낳았는데 장남은 수(粹)이고 차남은 정(精)이며, 딸 다섯은 어리다. 허숭(許崇)은 3남을 낳았는데 어리다. 팽수(彭壽)는 2남을 낳았는데 어리다. 공(公) ~ 이하 9자 빠짐 ~ 휘 풍(風)의 따님이다. 황명(皇明) 성화(成化) 경인년(성종 1, 1470년) 한식(寒食)에 비석을 세우다. 척질(戚侄) 정헌대부(正憲大夫) 행 의정부 좌참찬 겸 예문관 대제학 지성균관사동지사(行議政府左參贊兼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同知事) 서거정(徐居正) 기록하다. 조봉대부(朝奉大夫) 한성 판관(漢城判官) 홍흥(洪興) 쓰다. <다음블로그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에서 인용> |
문화재지정 | 미지정 |
문화재명칭 | 문정공(文正公) 권기(權技) 묘갈 |
소재지 | 충북 괴산군 괴산읍 서부리 산 1-7 |
관리자(연락처) | 안동권씨 |
▼문정공(文正公) 권기(權技) 묘갈
▼문정공(文正公) 권기(權技) 묘비각
▼문정공(文正公) 권기(權技) 묘갈을 새롭게 써서 세웠다.
▼문정공(文正公) 권기(權技) 묘 전경
▼문정공(文正公) 권기(權技) 묘도비(墓道碑)... 신도비라는 말은 들어봤지만 묘도비는 처음 듣는 것 같다. 아마도 후손들이 신도비를 세울 수 없는 직책이라 궁여지책으로 묘도비라고 쓴 듯... 양반가문의 고심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문정공(文正公) 권기(權技) 묘 측경
▼문정공(文正公) 권기(權技) 묘 정면... 석물은 최근에 세운것이다.
▼문정공(文正公) 권기(權技) 묘 무인석... 무인석을 세운 것도 이상하지만 비에 젖은 무인석이 화난 표정이다.
▼문정공(文正公) 권기(權技) 묘 후경
▼문정공(文正公) 권기(權技) 묘 후경... 조안산이 좋아보인다.
▼문정공(文正公) 권기(權技) 묘 뒤에 있는 허담(이조판서) 묘... 이 묘가 정혈처를 차지했다고 말한다. 아마도 경사면이 아니고 평탄원만해서 그런 것이고, 당판도 제일 넓어서 그런 것일테지만 뒤에 도로가 나서 맥이 상처를 입어서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문정공(文正公) 권기(權技) 묘 뒤쪽으로 난 도로가 나무 사이로 조금 보인다.
▼석초 스승님과 야초실용풍수지리학회 회원님들과 함께 인증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