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양명 39살, 사민평등론 해석(新四民論)은 잘못입니다.
2018-13, 2018년 9월 5일
* 1980년대 등소평이 개혁개방을 주장할 때, 많은 중국인 학자들도 ‘유교 자본주의’를 주장하면서 개혁개방을 지지하였습니다. 물론 명청시기의 자본주의 맹아에 관한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유교 자본주의를 주장하였습니다. 이때 미국학계에서는 일본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의 경제성장에 관심을 갖고 사상적 기초를 찾으려고 시도하면서 유교에 주목하였습니다. 어떤 화교 학자들은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 4개국을 아시아의 네 마리 작은 용(四小龍)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4개국이 중국 대륙의 젖을 먹고 자라서 경제성장을 하였다고 보는 것입니다.
정말로 말이 안 되는데 한국학계는 꽤 신기한 것처럼 받아들였습니다. 정말로 어리석은 짓이었습니다. 한국이 무슨 중국의 경제적 덕을 봐서 경제성장을 하였고 무슨 유교의 윤리를 통하여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이루었습니까? 조선 후기부터 자각한 지식인들의 경세사상이 시작되고 오랜 세월 동안 각가지 난리를 겪고 나라를 잃기도 하고 전쟁을 겪으면서도 개인이나 국가 모두 잘살아야겠다는 사회경제적 또는 정치적 의지에 따라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발전시킨 것입니다. 구태어 막스 베버에 근거하여 지나치게 특정 종교에 의지할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발전시켜온 경험과 앞으로 개선하려는 의지와 가치가 무엇인지를 연구하여 한국 현대적 발전의 논리를 설정해야할 것입니다.
당시 미국에서 활동하였던 여영시(余英時) 선생이 1986년 겨울에 『중국 근세 종교윤리와 상인정신』이라는 논문을 발표한 뒤 1987년 작은 책을 대만에서 출판하였습니다. 막스 베버가 마르크스 유물사관에 반대하고 서양 기독교의 신교 윤리에는 ‘속세에 대한 내면적 교리문답(inner worldly as catechism, 入世苦行)’을 주장하였는데, 이것을 여영시가 빌려서 중국 근세의 상인정신에도 막스 베버가 말한 이런 정신이 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여영시의 저서는 모택동의 『중국공산당과 중국혁명』이 반영한 중국의 유물사관 곧 자본주의 맹아론을 뒤집는 다른 연구관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영시 선생이 위의 저서를 출판할 때, 여영시 선생이 하버드대학에서 박사과정 공부할 때의 지도교수였던양연승 선생은 중국 상인의 근원과 원래 뜻을 밝히는 논문「원상고(原商賈)」를 써서 서문에 실어주었습니다. 양연승 선생이 밝혔듯이 일본학자 소도우마(小島祐馬)이 쓴 「원상(原商)」(1936)을 이어서 같은 제목으로 논문을 썼습니다. 다시 말해 일본학자들의 연구성과를 참고하였고 그들과 많은 교류를 하였습니다. 사실상 양연승과 여영시 모두 왕양명이 아래 글에서 "사민의 근원과 원래 뜻을 밝혀서 쓴 글(得其源流,故爲之論著之)"이라는 말에 따라 상인정신의 원래 뜻을 밝힌 셈입니다.
여영시는 왕양명의 아래 글을 인용하여 획기적인 ‘새로운 사민론(사농공상, 新四民論)’이라고 찬양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중국 사상사 또는 철학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나 유행하는 화제에 부화뇌동하는 어설픈 학자들은 여영시의 주장을 높이 평가하고 널리 선전하였습니다. 특히 일부 양명학 연구자들도 중요하다고 높게 평가하였습니다. 이런 풍조는 중국은 물론 한국에서도 유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이 시기에 일본이나 중국이나 대만에서 명청시기 사회경제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상업발달을 인정하지만 자본주의 맹아를 인정하지 않는 경우도 있고 유교 자본주의 또는 상업정신에 크게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여영시는 일찍부터 지식인(士)들이 생업에 종사하려는 치생(治生)에 관심을 두어왔고 특히 명청시기 왕양명이 활동하였던 16세기 지식인들을 대표하여 왕양명이 강남지역의 상업발전을 반영하여 새로운 사민론을 주장하였다고 보았습니다. 더구나 왕양명의 아래 글을 설명하면서 왕양명의 새로운 관점은, “도(道) 관점에서 사농공상의 완전히 평등한 지위를 인정하고 고하관계를 인정하지 않았다.”(대만, 연경출판사 초본 105쪽)고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그런데 도(道)는 생업을 말하는 생인지도(生人之道)이며 절대자 하나님에 대한 속세에서의 교리문답 또는 속세에 들어가서 종교적 고행이라는 특별한 뜻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여영시가 지나치게 과도하게 해석한 것이고 결국에 독자들을 오해시킨 것입니다.
전습록 습유에 비슷한 조목이 있는데 왕양명은 지식인(士)이 생업에 종사하더라도 공부하고 강학하는 것이 선비의 가장 중요한 일이며 성현이 되는 것이 목표라고 강조하였습니다. 명청시기에 지식인이나 관원들이 신분을 이용하여 각종 이익 사업에 끼여들어 사회적 정치적 문제가 되었습니다. 왕양명은 이러한 나쁜 열신(劣紳)이 농부 수공업자 상인보다 못한 사람들이라고 비난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 명청시기의 자본주의 맹아 또는 상업발전의 사상적 배경에는 왕양명의 신사민론이 있었다고 보는 관점은 지나친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변화와 양명학을 직접 연결시키는 것도 큰 문제가 있습니다.
사실상 명청시기에 모든 사람들은 사민 가운데 지식인(士, 儒戶)이 되어 관원이 되는 것이 가장 큰 희망이었습니다. 분명히 사민에는 차별이 있었습니다. 명나라 말기에 인구가 대략 1억5천만 정도이고 지식인(士)과 관원들을 합하여 대략 60만명 정도이고 하급 아전(胥吏)는 80만-120만 정도라고 추정합니다. 따라서 지식인으로서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관원이 되는 것은 가장 빠르고 좋은 계층상승기회이었습니다. 3년마다 수만명이 응시하여 대략 200명 정도 진사 합격자를 뽑는데 합격 비율이 상당히 낮았습니다. 청나라 말기에 유행한 이야기 가운데 70살이 넘어 과거시험에 합격하였는데 너무 기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물론 학교의 학생이 되거나 관원이 되는 극히 소수 사람들에게는 각종 특혜도 많았구요.
중국에서 사민론은 『관자』에서 나왔지만, 일본학계에서 일찍부터 주장한 소위 당송변혁기 곧 북송 초기에 이르면 농지가 부족하여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없었습니다. 양연승 선생도 당송변혁기를 참고하여 북송 초기를 중국사를 양분하는 시대 구분에 해당한다고 보았습니다. 사실상 이때 사마광은 농업만큼 수공업과 상업이 중요한 경제적 역할과 기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수공업과 상업의 경제성장 역할을 지지하였습니다. 따라서 초보적이지만 시장의 공정함을 강조하는 공정한 시장경제를 도입하자고 건의하였습니다. 이것이 원나라를 거쳐 명나라 명태조와 명성조의 국가정책에도 반영되었습니다.
명나라 말기에 나타난 일반적인 경세와 전문적인 경제(經濟)에 관한 정책 제안서적들이 많이 유행하지만, 왕양명을 특별하게 다루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명나라 말기에 각종 개혁을 주도하였던 장거정(張居正)은 나여방과 호직 등 많은 양명 후학들을 정치와 관직에 참여시키지 않고 멀리 떠나보냈습니다. 명나라 말기에 양명학자들이 개혁에 동참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청나라가 쳐들어와서 명나라가 멸망하자, 많은 지식인들은 명나라 멸망의 죄가 양명학에 있고 양명학이 세상에 무관심하였다고 비판하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비판도 사실상 잘못입니다.
따라서 왕양명이 사민론을 처음 주장한 것도 아니고 더구나 왕양명이 사회과학을 연구한 학자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왕양명의 개인적인 삶과 꿈에서 과연 막스 베버가 말한 대로 ‘속세에 대한 내면적 교리문답(inner worldly as catechism, 入世苦行)’이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사실상 왕양명은 언제나 관직을 관두고 은퇴하여 산속에서 수양공부를 하여 신선이 되고 싶었던 사람입니다. 세상에 들어가서 경제를 성장시키거나 수공업과 상업을 활성화시키려고 하였던 적이 없습니다. 왕양명이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초급 지식인(士)에게 과거시험을 포기하고 상업이나 수공업에 종사하라고 권한 적도 없습니다. 더구나 서양의 평등(equality) 또는 형평(equity)은 왕양명이 말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살아가는 생업의 사회경제적 기능에서 보면 사농공상의 역할이 동일하다고 보았을 뿐입니다. 다시 말해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는 본성을 본구(本具)하였다는 것을 강조하였을 뿐입니다. 따라서 여영시처럼 “사민이 평등하다.”는 해석은 지나치게 잘못된 것입니다.
다만 태주학파 왕간, 안균, 하심은, 나여방 등을 중심으로 대중에게 유교 윤리를 알리는 계몽운동을 펼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들도 사민평등론을 서양처럼 주장한 적은 없습니다. 뒤에 황종희는 명이대방록에서 지식인 중심의 여론에 근거한 계급정치를 강조하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이것도 민본(民本)을 발전시킨 것이고 결코 민주화(民主化)는 아닙니다.
우리 사회가 많이 성장하고 발전하였지만 아직도 공정한 시장경제를 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기업은 대기업대로, 중소기업은 중소기업대로, 심지어 작은 가게와 일반 막노동자까지도 공정하게 판매하고 일하는 상업윤리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강화도에서 하곡학의 심학을 계승하여 공정한 시장경제에 걸맞는 공정한 정신과 행동이 필요하겠지요. 물론 많은 분들께서 양심에 따라 공정하게 잘하시고 있지만요.
최근에 속경남 선생이 왕양명 연보 자료를 정리하면서 방린의 아들 방붕의 글을 찾았습니다. 왕양명 연보에서 연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왕양명은 방붕이 써온 어머니 행장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묘표를 짓지 못하고, 엉뚱하게 아버지 행장에 근거하여 상상하면서 아버지 묘표를 지어주었습니다. 왕양명이 비양심적으로 행동한 것입니다. 그래서 방붕도 어머니 비석을 세우지 못한 채 탄식한다고 적었습니다.
왕양명의 신사민론 해석이 지나치다고 비판하는 것은 서신 자료에 근거하여 사실을 설명한 것이며, 특히 양명학이 서양의 근대를 지향한 만병통치약처럼 선전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말씀드린 것입니다. 또한 미국의 중국학 연구자 또는 중국과 대만의 중국학 연구자 가운데 명성이 높은 학자들이 주장한 것이라고 일부 한국학자들이 살펴보지도 않고 그냥 한국에 소개하는 경우 신중해야할 것입니다.
------------------
여영시(余英時, 1930-현재) 선생에 관하여 간단히 설명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여영시 선생은 홍콩 신아서원(新亞書院, 현재 홍콩 중문대학)과 신아연구소에서 전목(錢穆, 1895-1990) 선생을 따라 공부하였고 석사를 졸업한 뒤 1955년 미국 하버드대학에 방문학자로 갔고 1년 뒤에는 박사학위 과정에 들어갔고 지도교수는 하버드대학에서 유명한 중국학 연구자 양연승(楊聯昇, 1914-1990)입니다. 여영시 선생은 1961년 박사학위를 받은 뒤에는 미국에서 미시간대학, 하버드대학, 예일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쳤습니다.
양연승 선생은 북경 청화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1940년 미국 하버드대학에 유학하여 1942년 석사학위를 받고 1946년 『진서, 식화지, 역주(晉書,食貨志,譯注)』를 완성하여 박사학위를 받았고 하버드대학에 남게 되었습니다. 양연승의 주요한 전공은 중국 경제사이며 1952년 『중국화폐와 신용대출 간사(中國貨幣與信貸簡史)』를 출판하여 주요저작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북경대학 총장 호적(胡適, 1891-1962)은 1940년대 하버드대학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던 임화(任華, 西洋哲學)、주일랑(周一良, 魏晉南北朝史)、오우근(吳于廑, 世界史)、양연승(楊聯升, 中國史) 4명을 북경대학 교수에 임용하려고 하였고 3명을 임용하였으나 양연승은 미국 하버드대학에 남았습니다.
양연승과 여영시 두 분은 미국에 있는 중국학자(華人) 가운데 영향력이 가장 컸던 적이 있으며 현재까지도 대만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갖고 있고 중국에서도 영향력이 작지 않다고 합니다. 사실상 미국 좋은 대학의 중국학 연구와 북경대학과 대만대학에서 영향력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미국 학계에서 중국학자의 위치는 결국에 남의 집 추녀 밑에서 더부살이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미국학자들은 오만하고 중국학자들은 겸손할 수 밖에 없었지요. 또한 중국에 있던 중국학자들은 젊었을 때 좌익운동과 항일투쟁에 참여하고 문화대혁명 등 고난을 겪었는데, 미국에 있던 중국학자들은 중국 현지의 고난을 강건너 불보듯이 피할 수 있었고 또한 높은 월급 받으면서 즐기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청화대학 졸업하고 중국에서 고난을 겪었던 조려생(趙儷生, 1917-2007) 선생이 1987년 4월 미국에 갔을 때 작은 일 때문에 전화로 양연승 선생이 다투었는데 조 선생이 "나는 중국에서 항일투쟁하면서 힘들게 살았고 너는 미국에서 편하게 살았다."고 욕하였다고 합니다. 사실 이때 양연승 선생은 우울증이 심하여 정서 조절이 잘 안되었던 것을 조 선생이 오해하였다고 전하기도 합니다. 이야기 뒷면에는 지금도 앙금이 있습니다. 중국에서 공부한 학자들과 미국에 유학한 학자들 사이에는 서로 조금 무시하는 앙금이 있습니다. 그래서 중국에서 공부한 모종삼을 비롯한 후학들에 대하여 미국에 유학한 여영시 쪽에서는 탐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물론 서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지요.
어쨌거나 양연승 선생은 미국에서 일찍 정교수로서 높은 봉급을 받았고 중국 역사를 연구하고 강의하면서 가끔 중국 옛날노래 부르고 마작과 바둑을 두고 중국 식당에 가서 중국요리를 먹으면서 살았다고 합니다. 양연승 선생이 남긴 『일기』가 있는데 미국에서 일어났던 중국학자들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일기』를 보면 미국학자와 중국학자의 좋아하고 미워하였던 인간관계, 미국의 중국학자와 대만 및 중국의 중국학자들의 인간관계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고, 미국에서 중국학 연구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
절암공 방린 묘표(乙酉, 을유년(1525)이 아니고 庚午(1510)이 옳음)
소주부(蘇州府) 곤산현(崑山縣)에 절암공(節庵公) 방린(方麟)이란 어른이 계셨는데, 처음에는 선비(士)가 되어 과거시험을 공부하였고 얼마 뒤에 버리고 처가 주씨(朱氏) 집에 들어가 살았다. 주씨네는 예전부터 상업에 종사하였다. 벗이 “자네는 선비를 버리고 상인이 되었는가?”라고 묻자, 방린이 웃으면서 “자네는 무슨 근거로 선비가 상인이 될 수 없고 상인이 선비가 될 수 없다고 말하는가?”라고 되물었다. 처갓집에서 곤산현 아문의 서리(胥吏, 아전)이 되라고 채근하자, 결국 곤산현 서리가 되었다. 벗이 “자네는 또다시 선비를 버리고 서리가 되었는가?”라고 묻자, 방린은 웃으면서 “자네는 무슨 근거로 선비가 서리가 되면 안 되고 서리가 선비가 되면 안된다고 말하는가?”라고 대답하였다. 몇 년 뒤에 탄식하면서 “내가 작은 이익을 벌려고 바쁘게 사는 사람이 되기 싫어 서리가 되어 풍속을 바꾸어보려고 하였으나 오늘날 보니 과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하고 서리도 그만두었다. 마침 흉년이 들어 수확이 나빴는데, 가진 재산을 모두 내놓아 배고픈 사람들을 구제하였다. 중앙정부에서 그의 행위가 옳다고 판단하고 관복을 입는 영광을 주었고 뒤에 멀리 복건성 건녕현(建寧縣) 서리 책임자에 임용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방린은 받지 않는 것처럼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부인 주씨와 함께 열심히 농사를 지어 집안을 세웠고 아들 방붕(方鵬)과 방봉(方鳳)에게 선비가 되도록 도왔다. 두 아들 모두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여러 지방관을 지냈다.(참고 : 방붕을 과거시험에 합격시켜준 고시관이 왕양명 아버지 왕화였고, 왕화는 방붕을 후계자처럼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방린은 늙어서 날마다 고향 선비들과 시를 짓고 술을 마셨다. 고향사람들은 그의 평생동안 남달리 떳떳하게 살았다고 말한다. 한림원 수찬(修撰) 고정신(顧鼎臣, 1473-1540)은 “내가 일찍이 방린이 아들 둘에게 보낸 서신을 본 적이 있는데 누누이 충효와 절의를 말씀하셨고 일반사람들과는 다르며 옛날 올바른 도리를 아는 사람과 비슷하였습니다.”고 말하였다.
왕양명은 “옛날에는 사민(사농공상)이 직업이 다르지만 도리는 똑같았는데 모두 마음을 다하는 것이 똑같았다.(四民異業而同道,其盡心焉,一也。참고 : 왕양명이 말한 盡心은 특별한 뜻이 없고 옛날부터 말했던 盡力을 당시 말로 번역한 것입니다.) 선비는 자신을 수양하여 남을 다스리고, 농부는 여러 가지를 생산하여 모든 사람들을 먹여 살리고, 수공업자는 기물을 편리하게 만들고, 상인은 화물을 유통시켰다. 각기 타고난 자질에 가깝고 힘이 닿는 것을 직업으로 삼아 마음을 다하였다. 중요한 결론은 사람이 살아가도록 하는 방법(生業)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 똑같다는 것이다.(왕양명이 말한 사민 생업의 기능이 똑같다는 설명은 사민 생업의 상호관계 곧 국가 전체의 경제순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비가 마음을 다하여 자신을 닦고 남을 다스리고 농부가 마음을 다하여 모든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데, 수공업자가 기물을 편리하게 만들고 상인이 상품을 유통시키는 것도 선비와 농부와 똑같은 것이다. 수공업자가 마음을 다하여 기물을 편리하게 만들고 상인이 마음을 다하여 화물을 유통시키는데, 선비가 자신을 닦고 남을 다스리고 농부가 생산하여 모든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것과 똑같다. 그래서 ‘사민이 직업은 다르지만 사람들이 살아가도록 하는 방법이 똑같다.’는 것이다. 대체로 옛날에 순임금이 구관(九官)을 설치하였는데 농업을 담당하는 후직(后稷)을 앞에 두고 민생(상업)을 담당하는 설(契)를 뒤에 두었고, 수(垂)의 공공관(共工官)과 익(益)의 우관(虞官)을 수(夔)의 악관(樂官)과 용(龍)의 납언관(納言官)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은나라와 주나라 시기에는 이윤(伊尹)이 신야(莘野)에서 농업을 경영하여 부유하게 되었고, 부열(傳說)은 노예로서 바위에서 축대를 쌓았고, 교격(膠鬲)은 생선과 소금을 장사하였고, 여망(呂望)은 반위(磻渭)에서 낚시하였고 백리해(百里奚)는 시장에서 살았고, 공자는 창고지기와 짐승치기를 하였다. 이밖에도 공자가 만났던 사람들 가운데 의봉、신문、하괴、작륜(儀封、晨門、荷蕢、斫輪) 같은 사람들 모두 옛날에는 인(仁)을 아는 뛰어난 성현이며 고결하여 남들과 다른 선비이었다. 『상서』에서 말하니 믿을 수 있는 자료이다. 그런데 왕도가 시들고 학술이 어긋나면서부터 사람들이 본심을 잃고 이익을 얻으려고 경쟁하고 서로 앞서려고 하기 때문에 선비를 부러워하고 농부를 천시하고 관원이 되는 것을 영광스럽게 여기고 수공업자와 상인이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실제상황을 널리 살펴보면 경기변동의 시기를 맞추어 이익을 그물질하는 것이 갈수록 심해졌고 이름도 각가지로 많다. 선비가 이익을 최대화시키기 위하여 허황된 용어와 언변으로 세상을 속이는 것을 농부가 모든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것과 수공업자의 기술과 상인의 유통이라는 이익에 비교하면 선비의 죄가 넘치고 실제로는 이들을 따라갈 수 없다.(참고 : 지식인과 관원이 되어 이익만 추구하는 劣紳을 비난함) 나는 방린이 선비, 상인, 서리를 설명한 말을 보니 은연히 옛날 사민의 뜻에 맞아 뭔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아! 사민의 올바른 뜻이 사라진지 오래되었다. 방린은 올바른 사민의 뜻을 배운 적이 있을까? 아니면 타고난 재질이 뛰어났던 것일까? 아니면 혼자 깨달은 것이 있었을까? 나는 여기에 관하여 느낀 점이 많다.(참고 : 왕양명의 개인적인 추측) 나는 방린의 두 아들과 사귀었는데 뛰어나게 옛날 도리를 잘 지키고 학술에도 뜻을 두고 부지런히 공부하였다. 관직에 있으면서 백성을 다스릴 때도 세상을 구제하고 만인에게 이익이 되는 데 힘쓰면서 마음을 다하려고 노력하였다. 나는 이들 부자의 이야기 때문에 사민의 원래 뜻을 알았기에 이 글을 짓는다."고 하였다.
방린이 세상을 떠나자 고향 서쪽 마안산 기슭에 묻었다. 부인 주씨도 현명하다고 하며 합장하였다고 한다. 고향사람들이 묘지에 “명나라 예부 주사 절암공 방린의 묘”라고 표시하였다. 아! 방린 같은 분은 반드시 표시하여야한다.
節庵方公墓表(乙酉)
蘇之昆山有節庵方翁麟者,始爲士,業舉子,已而棄去,從其妻家朱氏居。朱故業商,其友曰:“子乃去士而從商乎?”翁笑曰:“子烏知士之不爲商,而商之不爲士乎?”其妻家勸之從事,遂爲郡從事。其友曰:“子又去士而從從事乎?”翁笑曰:“子又烏知士之不爲從事,而從事之不爲士乎?”居久之,歎曰:“吾憤世之碌碌者,刀錐利祿,而屑爲此以矯俗振頹,乃今果不能爲益也。”又復棄去。會歲歉,盡出其所有以賑饑乏。朝廷義其所爲,榮之冠服,後復遙授建寧州吏目。翁視之蕭然若無與,與其配朱竭力農耕植其家,以士業授二子鵬、鳳,皆舉進士,歷官方面。翁既老,日與其鄉土爲詩酒會。鄉人多能道其平生,皆磊落可異。顧太史九和云:“吾嘗見翁與其二子書,亹亹皆忠孝節義之言,出於流俗,類古之知道者。”
陽明子曰:“古者四民異業而同道,其盡心焉,一也。士以修治,農以具養,工以利器,商以通貨,各就其資之所近,力之所及者而業焉,以求盡其心。其歸要在於有益於生人之道,則一而已。士農以其盡心於修治、具養者,而利器、通貨,猶其士與農也;工商以其盡心於利器、通貨者,而修治、具養,猶其工與商也。故曰:‘四民異業而同道’。蓋昔舜敘九官,首稷而次契。垂工、益虞,先於夔、龍。商、周之代,伊尹耕於莘野,傅說板築於岩,膠鬲舉於魚鹽,呂望釣於磻渭,百里奚處於市,孔子爲乘田、委吏,其諸儀封、晨門、荷蕢、斫輪之徒,皆古之仁聖英賢,高潔不群之士。書傳所稱,可考而信也。自王道熄而學術乖,人失其心,交騖於利以相驅軼,於是始有歆士而卑農,榮宦遊而恥工賈。夷考其實,射時罔利有甚焉。特異其名耳。極其所趨,駕浮辭詭辯以誣世惑眾,比之具養、器貨之益,罪浮而實反不逮。吾觀方翁‘士、商、從事’之喻,隱然有當於古四民之義,若有激而云者。嗚呼!斯義之亡也久矣!翁殆有所聞歟?抑其天質之美,而默有契也?吾於是而重有所感焉。吾嘗獲交於翁二子,皆穎然敦古道,敏志於學。其居官臨民,務在濟世及物,求盡其心。吾以是得其源流,故爲之論著之云耳。”
翁既歿,葬於邑西馬鞍山之麓。配朱孺人,有賢行,合葬焉。鄉人爲表其墓,曰:“明贈禮部主事節庵方公之墓”。嗚呼!若公者其亦可表也矣!
방붕,『교정속고』,권3,「왕양명 문집 뒤에 붙이는 글」:
예전에 우리 어머니 장례식을 치루고 이천공 소보(邵寶, 1460-1527)가 명문을 지어주었다. 다시 어머니 행장을 적어서 왕양명 선생에게 보여주고 묘표를 써달라고 부탁하였다.(왕양명이 어머니 행장을 잃어버렸으면서 나에게 말하지 않고 몰래 유광록에게 상의하여 이천 소공의 원고를 얻었다. 유씨와 왕양명은 과거시험에 함께 합격한 동년이며 우리 형제들과도 친하다.) 그런데 유광록이 잘못하여 아버지 묘지문(미제 고공이 지음)을 왕양명에게 주었다. 왕양명은 묘지문에 근거하여 아버지 묘표를 지었는데 아버지를 중심으로 짓고 우리 어머니는 끝에 조금 써서 붙였다. 내가 왕양명이 지은 아버지 묘표를 펼쳐 읽으면서 끝까지 읽지도 않고 말아서 보관하고 비석을 새기지 않았다. 어느날 장거공 위교(魏校, 1483-1543)가 왕양명 문집에서 글을 보고 나에게 “글이 분명히 좋은데 아버지를 쓰지 않았으니 어떻게 합니까?”라고 말하였다. 나는 앞뒤 이유를 설명해주고 탄식하였다.
내가 아는 것은 아버지가 10살 넘어 서협상 선생에게 배웠고 14살에는 전상빈 교수에게 과거시험공부를 배웠습니다. 17살에 포리 주씨 집안에 데릴사위로 들어갔는데 도시생활을 싫어하여 사양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과거시험공부를 졸업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외할아버지께서 졸업을 허락하지 않고 “여기에 그치지 말고 곤산현 서리를 해야한다.”고 강요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억지로 따랐으나 본래 뜻이 아니었습니다. 마침 관례대로 재산을 정리하여 쌀 400가마(10말 1가마)를 관청에 바치고 선비 명부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정도를 거쳐 이름을 올리지 못한 것을 가슴 아프게 여기고 다시는 관직에 나가지 않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그런데 다시 관례에 따라 멀리 복건성 복녕현 막료(서리)가 되었다가 그만두었습니다. 뒤에는 우리 두 형제가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관원이 되자 아버지도 국가의 은전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우리 아버지의 개략적인 일생입니다. 왕양명이 아버지 묘지글에서 “상인 주씨 장인이 사위가 졸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말을 보고 방린이 “처음에는 선비이었고 다시 상인이 되었고 다시 곤산현 서리가 되었으나 모두 버리고 떠났다.”고 적었습니다. 우리 아버지를 아주 많이 무고하였습니다. 대체로 우리 아버지는 하루도 상인이 된 적이 없고 서리를 한 것도 흔적을 남긴 것뿐입니다.
方鵬,『矯亭續稿』,卷三,「書王陽明文集後」:
昔我先妣之葬也,二泉邵公為之銘,復具狀請陽明子表其墓。(陽明失其狀,不以告予,密與劉光祿,取二泉文稿。劉與陽明同年,又與愚兄弟友善。)劉誤以先君墓誌應之(未齋顧公所撰),遂據以為表,專主先君,而吾母特附見焉。予展讀未竟,即卷而藏,不敢登石。他日,莊渠魏子於其文集中見之,謂予曰:“文固佳,然不類尊公,奈何?”予告之故,相與歎息而已。
謹按先君甫十幾,受學於徐子協祥,十四歲,改從錢教授尚賓,習舉業。十七,贅甫里朱氏,厭其闤闠之擾,辭歸,卒業。先外祖不許曰:“無已,當為郡從事。”先君勉強從之,非其志也。適遇例整其家貲,輪穀四百斛,登名仕版。自恨出非正途,誓不再出。復遇例遙受福寧州幕賓,致仕。後以愚兄弟登朝,獲沾恩典。此其出處大略也。陽明見志中有“朱商人不聽卒業”一語,遂曰:“公始為士,又為商,又為郡從事,□皆棄去。”不亦厚誣吾親哉!蓋先君未嘗一日為商,而從事亦寄跡爾。
------------------
佐藤一齋, 『(전습록)拾遺』, 제14조:
황직(黃直)이 여쭙기를 “원나라 허형(許衡, 1209-1281)은 학자들이 생업을 중요하게 여기라고 말하였는데, 선생님께서는 허형이 사람들을 잘못 가르쳤다고 비판하셨는데 무슨 까닭이 있습니까? 선비가 가난하더라도 앉아서 가난하도록 놔두고 생업을 경영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왕양명 선생이 대답하길 “다만 학자들이 생업에 종사하면서도 공부를 계속할 수 있다면 괜찮습니다. 만약에 허형처럼 생업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가르쳐서 학자들이 이익 얻는 것에 급급하다면 결단코 옳지 않습니다. 천하의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강학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까? 생업에 종사하는 것도 강학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별도로 종사하는 부업에 해당합니다. 그렇지만 생업이 중요한 일이라고 가르쳐서 다만 돈을 벌려는 마음을 일으키도록 하는 것은 안됩니다. 과연 생업에 종사하면서도 마음의 본체가 흔들리지 않도록 잘 조정할 수 있다면 하루 종일 상품을 팔고 사는 상업을 하더라도 성현이 되는 것에는 방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어찌 학문에 방해가 되겠습니까? 학문이 어찌 생업과 다른 두 가지 길이 되겠습니까?
直問:“許魯齋言學者以治生爲首務,先生以爲誤人,何也?豈士之貧,可坐守不經營耶?”
先生曰:“但言學者治生上,僅有工夫則可。若以治生爲首務,使學者汲汲營利,斷不可也。且天下首務,孰有急於講學耶?雖治生亦是講學中事。但不可以之爲首務,徒啟營利之心。果能於此處調停得心體無累,雖終日做買賣,不害其爲聖爲賢。何妨於學?學何貳於治生?”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