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견(正見)】②
우리의 행복과 주변의 행복은 자기가 얻은 정견의 정도에 달려 있다. 잘못된 견해로 빚어진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실제를 철저하게 접하는 것 즉 자신의 안팎에서 벌어지는 일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것이다. 정견은 이념도 아니고 어떤 체계도 아니며 심지어는 길도 아니다. 그것은 인생의 진실을 간파하는 지혜, 곧 우리를 이해와 평화와 사랑으로 충만케 하는 살아 있는 지혜인 것이다.
앞으로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 분명해 보이는 짓을 하고 있는 아이들을 종종 보게 된다. 어른들은 애써 그 사실을 알려 주려 하지만, 아이들은 들으려 하지 않는다. 이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정견의 씨앗을 자극해 주는 것이다. 그러면 나중에 곤란한 경우를 당했을 때 아이들은 우리가 지도했던 덕을 보게 될 것이다. 오렌지를 한 번도 먹어 보지도 못한 사람에게 그것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아무리 설명을 잘해 준다 해도, 그 사람이 직접 경험해 보는 것만 못하다. 직접 경험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한마디라도 내뱉는 순간 그 사람은 벌써 그 말에 사로잡히게 되기 때문이다. 정견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올바른 방향을 가르켜 줄 수 있을 따름이다. 정견은 스승이 전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스승은 이미 우리 심전(心田)에 있는 정견의 씨앗을 확인하는데 도움을 주고, 수행을 해야겠다는 확신, 즉 일상생활이라는 토양에 씨앗을 심어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농부이기도 하다. 우리는 건전한 씨앗에 물을 줘서 정견이라는 꽃이 피어나게 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건전한 씨앗에 물을 주자면 전념하는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마음을 집중해서 숨을 쉬고 걸으면서 그러니까 매순간마다 전념하는 자세를 잃지 않고 살아 가야하는 것이다.
1966년 필라델피아 평화대회에 참석했을 때 한 기자가 내게 물었다. “북베트남 출신입니까? 아니면 남베트남 출신입니까?” 북베트남 출신이라고 하면, 그는 내가 친 공산주의 성향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남베트남 출신이라고 하면, 친미 성향을 가진 사람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중부 베트남 출신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가 선입견을 버리고 바로 지금 눈앞에 펼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선(禪)의 어법이기도 하다. 한 선승이 멋지게 생긴 기러기가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는 함께 길을 가고 있는 사형(師兄)과 그 기쁨을 나누고자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사형은 허리를 굽히고는 신발에 든 조약돌을 꺼냈다. 그가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는 이미 기러기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가 “무엇을 보라고 했던 게냐?”하고 물었지만, 사제(師弟)는 잠자고 있을 따름이었다. 태허(太虛)선사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무를 등지고서 있는 한 그 그림자밖에 볼 수 없다. 진짜 나무를 보고 싶다면, 고개를 돌려야 하리라.” ‘비유를 통한 가르침’에는 말과 관념이 사용된다. 그러나 ‘본질을 직접 보여주는 가르침’은 행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플럼 빌리지에 한번 와 보면, 플럼 빌리지에 대한 관념이 생긴다. 그러나 그 관념이 실제의 플럼 빌리지인 것은 아니다. “나는 플럼 빌리지에 다녀왔다.”고 말하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플럼 빌리지에 대한 하나의 관념을 갖게 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관념은 그곳에 전혀 가본 적이 없는 사람 것보다는 좀 더 나을 수 있겠지만, 여전히 하나의 관념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은 진짜 플럼 빌리지가 아니다. 실제에 대한 개념이나 지각은 실재 그 자체가 아니다. 자신의 지각과 관념에 사로잡히면 실재를 잃고 마는 법이다.
수행한다고 하는 것은 관념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래야 진여(眞如)에 도달할 수 있다. ‘무념(無念)’은 비개념의 길이다. 관념이 있는 한 실재도 진실도 없다. ‘무념’은 잘못된 관념이나 개념과 전혀 상관이 없다. 무념은 전념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전념이 있기 때문에 옳은 것을 보면 옳다하고 틀린 것을 보면 틀리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좌선을 하는 중에 토마토 수프 한 그릇이 눈앞에 어른거린다면, 수행을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호흡에 집중했어야 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전념을 수행하면 이런 식으로 말하게 될 것이다. “숨을 들이마시면서 나는 토마토 수프를 생각하고 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정념이다. 옳고 그름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주관적인 것이다.
옳은 견해와 잘못된 견해는 상대적인 말일 따름이다. 좀 더 깊숙이 들여다보면, 모든 견해는 잘못된 견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떤 견해도 진실일 수는 없다. 견해는 다만 한 점에서 바라보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관점’이라 부르는 것이다. 다른 점으로 옮겨가 보면, 사물이 달라 보일 것이기 때문에 첫 번째 견해가 전적으로 옳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불교는 여러 가지 견해를 모아 놓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잘못된 견해를 없애는데 도움을 주는 수행일 따름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견해는 언제든지 더 나아질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그렇기에 궁극적인 실제의 관점에서 본다면, 정견은 모든 견해가 사라진 상태를 말한다.
수행을 처음 시작하는 경우 가르침이 애매하게 느껴진다. 그렇다고 개념적인 이해를 도모하는 것은 결코 온당치 못하다. 정견의 씨앗, 즉 불성의 씨앗은 우리 안에 있지만, 무지와 슬픔 그리고 실망 같은 번뇌로 겹겹이 가려져 있다. 우리는 자신의 견해를 실천에 옮겨 보아야 한다. 배우고 곰곰이 생각하고 실천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의 견해는 진짜 체험을 통해 점점 현명한 것이 된다. 정념을 수행하면 모든 사람들 속에 깃들어 있는 불성을 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정견이다. 때때로 그것은 불모(佛母), 즉 자유를 얻게 해 주는 이해와 사랑의 힘이라는 말로 설명된다. 전념하는 자세로 살아가면 정견이 싹을 틔울 것이고 팔정도의 다른 요소들 역시 꽃망울을 터뜨리게 될 것이다.
팔정도의 여덟 가지 수행은 서로를 돕는다. 우리의 견해가 좀더 ‘올바로’ 되어감에 따라 팔정도의 다른 요소 역시 성숙해지는 것이다. 정어는 정견을 바탕으로 삼고 있는데, 그것은 또한 정견을 살찌우기도 한다. 정념과 정정은 정견을 강화하고 성숙하게 한다. 정업은 정견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정명은 정견을 분명하게 해 준다. 정견은 팔정도의 나머지 요소 전부의 원인임과 동시에 결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