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동 마천리의 부인 호칭 때기(宅)에 대한 잡설
내 어머니의 택호는 두동때기(두동宅)였다. 할머니는 평촌때기(平村宅)였다. 그 옛날 50년대부터 70년대까지 웅동면의 부인을 타인이 호칭할 때는 때기(댁 : 宅)라고 이름하는택호(宅號)가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표준어는 두동댁 평촌댁이 되겠으나 남부경남 특유의 된소리 발음으로 웅동면에서는 때기로 발음되었다,
이 때기는 웅동면을 포함한 창원군 전체 김해군 고성군 등 남부지방 해안지방 대부분이 사용하던 언어로 알고 있다. 내 선친은 김해군에서 주로 교편생활을 하였는데 김해군 각지에서도 댁을 때기로 발음하는 것을 많이도 듣고 성장했다.
8. 15 해방 이전 웅동면 마천리에서는 타지역에서 새댁이 시집을 오면 한 달 이내에 동네 원로들이 마천리 소재 인천 이씨 재실 소성재(마천리 동쪽 끝 내곡마을 들어가는 입구 느티나무 근처에 있었는데 해방 당시에 헐렸다고 했다.)에 모여 택호를 정하여 공표를 했다.(웅동면의 다른 동네는 어찌 정했는지 잘 모른다.)
택호는 주로 새댁의 친정마을 이름을 댁 앞에 붙여 주었다. 그래서 두동이 고향이던 내 어머니는 두동때기가 된 것이다. 내가 성장하던 5-60년대 당시의 마천리 부인들의 택호를 기억나는 대로 열거하자면 이러하다. 갈전때기(창원구 대산면 갈전리), 소새때기(웅동면 소사리), 죽국때기(웅천 죽곡), 어은동때기(진해 어은동), 얼남때기(월남때기 : 동기 조윤식의 어머니 : 웅동면 월남리에서 마천리로 시집을 왔다.), 마천때기, 본동(本洞)때기, 생니때기(上里宅 : 조국의 할머니) 더문때기 과냥골때기 웅천때기 읍내때기 앵길때기(영길때기) 차안때기(창원때기) 대답때기 중촌때기 안골때기 후리질때기 수치때기(웅천 수치리 : 부암리 방앗간을 하던 동기 이영순의 모친)등등이다.
그런데 살던 동네가 중복이 되어 중복된 동네를 먼저 시집을 온 존재가 택호를 선점한 경우도 더러 있었다. 즉 마천리에서 살다가 마천리로 시집을 온 경우이다. 이 경우 먼저 시집을 와서 택호를 받은 사람이 마천때기라는 택호를 선점하였다(26회 선배 손일의 할머니가 만처이때기였다.) 그런데 내 할머니도 내 할머니의 친언니도 마천리에서 살다가 마천리로 시집을 갔다.
먼저 내 할머니의 친언니의 택호는 본동때기(本洞宅 : 28회 후배 이명희의 할머니)였다. 이는 마천리에서 살다가 마천리 사람과 결혼을 했으나 손일의 할머니가 마천때기를 선점하였기에 부득불 본동에서 본동으로 시집을 온 것으로 우회한 것이다. 즉 마천리를 본동으로 표시한 것이다. 내 할머니의 팽춘때기(평촌때기 : 平村宅)라는 택호는 더 기발하다. 이미 마천때기 본동때기가 존재하는 터라 더 우회하여 같은 동네에서 같은 동네로 평지이동을 하였다고 평촌댁이라고 작호한 것이다. 그리고 마천리의 동기 이영숙의 모친 이웃때기도 있다. 마천리가 친정인 경우가 많다보니 이웃에서 시집을 왔다고 이웃때기라고 한 것이다. 그녀는 이웃때기가 아니라 이욱때기로 불리워졌다. 모두 기발한 작호가 아닐 수 없다.
웅천때기(마천리 동기 장재우의 모친)도 마찬가지이다. 마천리에는 웅천에서 시집온 분이 두 분이 있었다. 동기 장재우의 모친 웅천때기와 후배 이명희의 모친 음니때기(읍내때기)이다.(둘은 친구였다.) 한 명은 웅천때기 그대로 작호하고 한 명은 이를 피하기 위하여 웅천읍내의 웅천은 떼고 읍내때기로 작호한 것이다.
소사때기도 마찬가지이다. 내 모친 한 항열 위인 배씨 친척이며 부산으로 이사간 소사출신 할머니가 소사때기(소새때기)였다. 이 바람에 같은 소사에서 마천으로 시집온 조변현의 어머니이자 조국의 할머니는 생니때기(상리때기 : 上理宅)가 되었다. 마천리보다 소사리가 위에 위치하였다 하여 상리(上理)라고 작호한 것이다.
애환이 깃든 택호도 있었다. 더문때기 관암골때기 당다공때기 등이다. 이는 대한제국(大韓帝國) 융희(隆熙) 2년(1908년) 웅동수원지가 일제에 의해 준공되기 이전에 그곳을 포함하여 주변지역에 존재했던 동네이름이다. 웅동수원지와 정수장 펌프장 부속건물 등을 아우르는 일대에는 다섯 동네가 있었다. 이 동네들이 일제의 웅동수원지 건설공사의 희생양으로 모조리 철거되어 당시에는 논밭이던 들판에 이주시키니 이곳이 곧 현재의 소사리이다. 그래서 우리들이 국민학생이던 당시만 해도 다섯 동네의 철거지인 소사리가 웅동면의 마을 중에서 인구가 가장 많았다. 철거되기 전의 다섯 동네 이름은 관암리 더문리 당다공리 띠끼리 등인데 나머지 한 동네 이름도 내 할머니에게 들었으나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웅동출신 박인규 변호사 부친인 박남정 옹의 부인이 더문때기이다. 그녀는 웅동수원지가 건설되기 이전 웅동면 더문리에서 성장하여 마천리로 시집을 왔다. 마천리 내집 바로 아래 그녀의 집이 있었다. 내 할머니가 그녀를 호칭할 때는 더무이 성님이라고 했다. 1896년생인 내 할머니 보다 연세가 많았기 때문이다.
웅동중학교 전신인 웅동고등공민학교 설립자 장영실 씨의 모친이 과냥골(관암골 : 관암리)때기이다. 그의 가형은 장만실 씨인데 한때 소사리에서 방앗간을 운영했으나 방앗간 사고로 급사했다. 주인공들은 별 생각없이 평생 그 택호들을 본명보다 더 많이 타인들에게 호칭되며 살았으나 이미 외압에 의해 소멸된 고향의 택호를 그들의 이름인 양 지니고 생을 마감한 것이니 애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자모를 삭감시킨 택호도 있었다. 마천교회 원로 손장로의 부인 대답때기이다. 그녀는 대장동의 윗동네 대다북에서 마천리로 시집을 왔다. 동네재실에서 곧 바로 대다북때기로 작호를 했는데 타인들이 이를 호칭하자니 길어서 불편했다. 그래서 이웃들은 처음 택호인 대다북을 삭감하여 대답으로 개칭을 하였다. 대답때기! 굳 아이디어가 아닌가?
택호는 해방 이전에 주로 작호되었다가 5-60년대에는 이 전통이 없어졌다. 시대가 변하고 동네원로들도 몰하니 그것을 계승발전시킬 주체가 사라진 탓이 아닌가 한다. 따라서5-60년대에 마천리로 이주했거나 시집온 여인들은 택호가 없었다.
동기 이벵테(이병태라고 하지 않겠다. 그는 병태라는 이름보다 벵테가 훨씬 더 쌈빡하다고 했다. 동기 여러분도 앞으로 그를 호칭할 때는 결단코 벵테로 하시기 바란다.)는 웅동면 가주리에서 살다가 국민학교 입학전인 50년대 중반에 마천리로 이사를 왔다. 주무석도 마찬가지이다. 주무석은 1958년 국민학교 2학년 당시 경남의령에서 살다가 그의 부친께서 웅동국민학교로 전근을 하여 이후 웅동에서 정착했다.
이들의 모친을 타인들이 호칭할 때는 벵테네 무석이네였다. 택호보다는 훨씬 정감이 떨어진다. 간편하고 부르기 쉽기는 하나 멋도 없고 격도 없다. 그러나 본인들도 어찌할 수 없는 시대적 변이였다. 이후로는 웅동이라는 곳의 주민 대부분이 도회지로 해체되는 과정을 거치며 연대감과 동질감도 따라서 해체되었으며 택호도 이제 기억 속에만 남아있는 무형의 문화적 유산이 되었다.
지금은 오전의 조용한 시간이다. 한때 우리들이 살았던 향토색 짙은 웅동에서의 유소년 시절을 회억해 보다가 내 어머니 두동때기의 고향 두동을 떠올리게 되었다. 개발의 삽에 휩쓸려 현재는 흔적도 남지 않은 두동의 모습을 그동안 접하고는 나는 충격을 받았다. 앞으로는 그곳에 더 크고 화려한 현대식 건물들이 들어서서 한다하는 신도시가 조성될 것이다. 이 글은 옛모습이 사라져 가는 내고향 경남 창원군 웅동면에 헌사하는 작은 성의이며 찬가라고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