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16세기의 명필 강한(姜漢)의 글씨 음각 목판본 본문과 양각 목판본 跋文이 있는 아동 수신서인[동몽수지(童蒙須知)] 목판본 單冊으로 권말에 尹孝聘‚ 鄭蘊(1569-1641)의跋文, 崇禎丙子後五十一年丙寅(1686)夏刊 간기가 있다. 표지 개장, 전체 배접하였으나 내용 부분 보존 상태 대체로 양호하다. <크기> 23.3×36.2cm
2월, 丁卯胡亂이 일어나자 江都 行在所로 달려가다. 차자를 올려 和議를 반대하다. ○ 漢城府 右尹, 병조 참판이 되다. ○ 〈跋南冥學記類編〉을 짓다. 外舅인 姜翼의 行狀을 짓다. ○ 4월, 서울로 돌아오다. ○ 8월, 도승지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않다.
外曾孫嘉善大夫兵曹參判兼同知經筵春秋館事鄭蘊謹跋
제목題目저자著者판版형태形態주기註記
한글동몽수지
한문童蒙須知
저자명주희 朱熹(宋)
필사본
판식 광곽크기(반곽기준): 15.1
행자수(반엽기준) 6행 12자
주기註記
발(跋)上之十一年乙丑(1685) 淸明下澣 九代孫通訓大夫行榮川郡守 申應澄拜手謹識.
인기(印記)黙史, 原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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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16세기의 명필 강한(姜漢)의 글씨 음각 목판본 본문과 양각 목판본 跋文이 있는 아동 수신서인[동몽수지(童蒙須知)] 목판본 單冊으로 권말에 尹孝聘‚ 鄭蘊(1569-1641)의跋文, 崇禎丙子後五十一年丙寅(1686)夏刊 간기가 있다. 표지 개장, 전체 배접하였으나 내용 부분 보존 상태 대체로 양호하다. <크기> 23.3×36.2cm
본고는 개인이 소장한 盧守愼 編 『童蒙須知』 를 소개하고 형태서지적 관점에서 분석한 것이다. 현전하는 『동몽수지』 는 1517년 金安國의 주도로 경남 安義에서 간행된 것을 시초로 중간본과 삼간본이 지속적으로 간행 되었다. 초간본은 본문이 5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姜漢이 글씨를 쓰고 尹孝聘이 발문을 썼다. 중간본은 초간 본과 본문 구성이 같으며, 鄭蘊의 발문이 첨가되었다. 삼간본은 본문과 발문의 서체가 다르지만 구성은 동일하 며, 鄭顯의 발문이 추가되었다. 초간본과 다른 판본으로는 漢文口訣이 부기된 한문현토본과 柳成龍의 跋文이 부기된 훈자몽학첩합편본 등이 있으며, 이들은 中國本 『동몽수지』 와 구성과 체재가 유사하다. 노수신본은 1555년 무렵 조카들의 훈육을 위해 편찬하였으며, 1574년에 그의 벗 許忠吉이 경북 榮州에서 木板으로 간행하였다. 노수신본은 중국본과는 달리 노수신의 독창적인 견해로 본문의 단락을 나누었으며, 구분 한 단락 아래에 註釋을 붙였다. 주석의 수준은 독자층을 고려해서 간단한 어휘의 풀이나 문단의 전체적인 의미 등의 설명에 치중하였다. 본문에는 구두점을 표기하였으며, 欄上에 한글 懸吐를 더하였다. 주석과 한글 현토는 다른 조선본 『동몽수지』 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이다. 노수신본은 懸吐, 註釋, 본문 구성 등을 통해 그의 독창적인 견해와 학문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지만 노수신 이후 유사한 사례를 남긴 이가 없으며, 『동몽수지』 언해로 진전되지 못한 점은 아쉬움이라고 하겠다.
원소장처 : 함양 안의 밀양박씨 박명부 종가 / 현소장처 : 함양 안의 밀양박씨 박명부 종가
수록정보 119책 / 고서 / 경부 / 경부
동몽수지(童蒙須知)
원소장처 : 함양 안의 밀양박씨 박명부 종가 / 현소장처 : 함양 안의 밀양박씨 박명부 종가
宋나라 朱熹(1130~1200)가 童蒙敎育을 위해 아동이 반드시 알아야 될 유교적인 規範과 지식을 모아서 편찬한 것으로 조선후기에 간행한 책.
[咸陽] : [藍溪書院], 1626년(仁祖 4) 跋 線裝 不分卷1冊 : 四周單邊 25.3 x 19.0 ㎝, 有界, 5行8字, 上下內向黑魚尾 ; 33.2 x 23.0 ㎝ 表題: 童蒙須知 版種: 陰刻(第1~19張), 陽刻((第20張 이후) 간행시기: 중간발문에 기재된 鄭蘊(1569~1641)의 관직을 지낸 시기에 의함(승정원일기 1626년(인조 4) 1월 27일 기사 참조) 行字數: 6行12字(第20張 이후) 魚尾: 上下內向一葉?二葉花紋魚尾 混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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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曾孫 嘉善大夫 兵曹參判 兼同知經筵春秋館事 鄭蘊 謹跋
인조
2
1624
갑자
天啓
4
56
1월, 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公州로 왕을 호종하다. ○ 3월, 형조 참판이 되다. ○ 10월, 대사간이 되다. ○ 11월, 仁城君에게 全恩할 것을 청하고 피혐하다.
인조
3
1625
을축
天啓
5
57
5월, 대사간에 제수되었으나 상소하여 사직하다. ○ 7월, 도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직제학, 상서원 정이 되다. ○ 12월, 약방에 입직하다.
인조
4
1626
병인
天啓
6
58
1월, 啓運宮의 喪禮를 논의하다. ○ 4월, 형조 참판, 동지의금부사에 제수되다. 대사간이 되다. ○ 5월, 慶尙道 觀察使에 제수되다. ○ 10월, 대사간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귀향하다.
인조
5
1627
정묘
天啓
7
59
2월, 丁卯胡亂이 일어나자 江都 行在所로 달려가다. 차자를 올려 和議를 반대하다. ○ 漢城府 右尹, 병조 참판이 되다. ○ 〈跋南冥學記類編〉을 짓다. ○跋外曾祖姜琴齋手筆童蒙須知。○ 外舅인 姜翼의 行狀을 짓다. ○ 4월, 서울로 돌아오다. ○ 8월, 도승지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않다.
인조
6
1628
무진
崇禎
1
60
도승지, 예조 참판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인조
7
1629
기사
崇禎
2
61
윤4월, 이조 참판이 되자 謝恩하고 곧 돌아오다.
桐溪先生文集年譜 / [附錄] / 文簡公桐溪先生年譜 문간공 동계 선생 연보(文簡公桐溪先生年譜)
인조
5
1627
정묘
天啓
7
59
2월, 丁卯胡亂이 일어나자 江都 行在所로 달려가다. 차자를 올려 和議를 반대하다. ○ 漢城府 右尹, 병조 참판이 되다. ○ 〈跋南冥學記類編〉을 짓다. 外舅인 姜翼의 行狀을 짓다. ○跋外曾祖姜琴齋手筆童蒙須知。○ 4월, 서울로 돌아오다. ○ 8월, 도승지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않다.
7년 정묘(1627) 선생 59세 ○ 외증조 강금재(姜琴齋 강한(姜漢))가 손수 쓴 《동몽수지(童蒙須知)》에 발문을 썼다. 七年丁卯 先生五十九歲 ○跋外曾祖姜琴齋手筆童蒙須知。
2월, 丁卯胡亂이 일어나자 江都 行在所로 달려가다. 차자를 올려 和議를 반대하다. ○ 漢城府 右尹, 병조 참판이 되다. ○ 〈跋南冥學記類編〉을 짓다. ○跋外曾祖姜琴齋手筆童蒙須知。○ 外舅인 姜翼의 行狀을 짓다. ○ 4월, 서울로 돌아오다. ○ 8월, 도승지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않다.
外曾孫嘉善大夫兵曹參判兼同知經筵春秋館事鄭蘊謹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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盧守愼 編 『童蒙須知』의 書誌的 분석
全在東
한국서지학회 서지학연구 제82집 2020.06 pp.217-243
본고는 개인이 소장한 盧守愼 編 『童蒙須知』 를 소개하고 형태서지적 관점에서 분석한 것이다. 현전하는 『동몽수지』 는 1517년 金安國의 주도로 경남 安義에서 간행된 것을 시초로 중간본과 삼간본이 지속적으로 간행 되었다. 초간본은 본문이 5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姜漢이 글씨를 쓰고 尹孝聘이 발문을 썼다. 중간본은 초간 본과 본문 구성이 같으며, 鄭蘊의 발문이 첨가되었다. 삼간본은 본문과 발문의 서체가 다르지만 구성은 동일하 며, 鄭顯의 발문이 추가되었다. 초간본과 다른 판본으로는 漢文口訣이 부기된 한문현토본과 柳成龍의 跋文이 부기된 훈자몽학첩합편본 등이 있으며, 이들은 中國本 『동몽수지』 와 구성과 체재가 유사하다. 노수신본은 1555년 무렵 조카들의 훈육을 위해 편찬하였으며, 1574년에 그의 벗 許忠吉이 경북 榮州에서 木板으로 간행하였다. 노수신본은 중국본과는 달리 노수신의 독창적인 견해로 본문의 단락을 나누었으며, 구분 한 단락 아래에 註釋을 붙였다. 주석의 수준은 독자층을 고려해서 간단한 어휘의 풀이나 문단의 전체적인 의미 등의 설명에 치중하였다. 본문에는 구두점을 표기하였으며, 欄上에 한글 懸吐를 더하였다. 주석과 한글 현토는 다른 조선본 『동몽수지』 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이다. 노수신본은 懸吐, 註釋, 본문 구성 등을 통해 그의 독창적인 견해와 학문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지만 노수신 이후 유사한 사례를 남긴 이가 없으며, 『동몽수지』 언해로 진전되지 못한 점은 아쉬움이라고 하겠다.
【8일】이른 아침에 출근하여 숙배(肅拜)를 하기 위해 대궐로 가서 보루문(報漏門)에 있었는데 마침 회양 부사(淮陽府使) 조언필(曺彦弼)이 도착하였다. 와서 나를 맞아 서로 이야기를 하였는데 그는 옛날 계해년(1563, 명종18)에 해남에서 선정(善政)을 하였던 성주(城主)이다. 사시에 숙배를 하고 옥당으로 돌아와 아침밥을 먹었다. 부응교 신점(申點)과 수찬 정윤복(丁胤福)과 저작 이경중(李敬中)과 정자 김수(金睟)가 회의를 하였다. 정윤복이 먼저 말하기를, “자전(慈殿)의 큰 증세는 비록 그쳤지만 아직 쾌차하지 않았습니다. 전일 전하께서 이미 경연에서 말씀을 하셨고, 어제 또 약을 새로 올렸으니 급히 하례를 올리는 것은 지극히 미안합니다. 십분 쾌차하시기를 기다린 뒤에 행하는 것도 늦지 않습니다.” 하였다. 드디어 차자를 올려 정자 김수가 차자를 기초(起草)할 때 나는 신점, 정윤복, 이경중과 함께 4명이 《대학연의(大學衍義)》와 《상서(尙書)》에서 세 번 강독할 분량을 교정하였다. 차자를 정원에 바치고 각자 흩어졌다. 나는 서문(西門)으로 향하다가 승지 최응룡(崔應龍)을 대궐 안에서 만났다. 서로 보고 매우 기뻐하며 잠시 이야기를 하고 나왔다. 판서(判書) 원혼(元混)을 찾아 수성군(壽城君)의 마을 집으로 찾아가 경서의 토석(吐釋)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말소리가 매우 낭랑하였다. 어찌 70세 노재상(老宰相)으로 가능할 수 있는 것인가 하고 탄복하였다. 원공(元公)이 강한(姜漢)이 쓴 《동몽수지(童蒙須知)》를 개간(開刊)할 자료를 나에게 주기에 공경히 받아 물러났다.
서당에서 처음 『천자문』을 외운 뒤에 배우는 책이 바로 『동몽수지(童蒙須知)』이다. “어린이들이 꼭 알아야 할 책”이라는 뜻이다. 유교서적 가운데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이 널리 알려졌지만, 가장 많이 배웠던 책은 『천자문』이나 『동몽선습』, 『동몽수지』이고, 그 다음이 『소학』이다. 상급과정으로 올라갈수록 진학자가 당연히 줄어들기 때문이다. 책이름만 놓고 본다면 『천자문』은 유치원, 『동몽수지』와 『소학』은 초등학교, 『논어』 『맹자』는 중고등학교, 『대학』은 대학 교과서인 셈이다. 『천자문』은 천 개의 한자를 배우는 책인데, 글자만 많이 안다고 사람답게 살 수는 없다. “어릴 적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이 있는 것처럼,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여러 가지 좋은 습관을 연습하는 것이 중요하다. 『동몽수지』는 어른에게 인사하기,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기, 남들이 물어보면 또박또박 대답하기, 깨끗하게 옷 입기, 이런 생활 습관들을 가르치는 책이다. 『동의보감』에서는 어린아이를 나이에 따라 세 가지로 구분하였다. 처음 태어나 얼마 되지 않은 아이는 영아[初生曰嬰兒], 3세는 소아[三歲曰小兒], 10세는 동자[十歲曰童子]라고 하였으니, 동자는 어린아이 가운데 비교적 어른인 셈이다. 향교에 공부하러 다니는 학생을 교생(校生)이라고 불렀는데, 8-10세 정도의 어린이들은 동몽(童蒙)이라고 불렀으며, 교생 정원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서울의 사부 학당에는 이들을 가르치는 동몽교관(종9품)이 있었다. 『동몽수지』는 초등학교 3-4학년 어린이들이 배우기에 적당한 책이다. 로버트 풀검이라는 미국 작가가 30년 전에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는 책을 써서 세계적으로 많이 팔렸다. 우리나라 선조들은 서당에서 『천자문』과 『동몽수지』를 배우고 나서,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서당에서 배웠다”고 말했을 것이다. 과거시험을 치지 않을 일반인들은 더 이상 공부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동몽수지보다 더 좋은 책이 없다”고 칭찬한 중종 조선시대에는 임금도 날마다 공부했다. 어느날 이약빙이라는 학자가 중종에게 강의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경상도 관찰사 김안국이 『동몽수지』라는 책을 찍었는데, 어린이가 할 일을 뽑아서 만든 것입니다. 음식이라든가 옷같이 날마다 생활하는 일이 모두 써 있으니, 이 책으로 원자(왕세자)를 가르치면 좋겠습니다.” 그러자 중종이 이렇게 말했다. “이 책에는 사람이 평생 배우고 행할 이야기들이 들어 있다. 이 책보다 더 좋은 책은 없다. 『동몽수지』는 어린이들이 꼭 배워야 할 책이다.” 공자의 말을 기록한 『논어』나 맹자의 말을 기록한 『맹자』는 어린이들이 배우기에 너무 어려웠다. 그래서 송나라 때에 주희(朱熹)가 제자 임용중과 함께 어린이들이 배우기 쉽게 『동몽수지』라는 책을 썼다. 주희의 제자인 유자징은 중학생 수준의 학생들이 배워야 할 『소학(小學)』이라는 책을 썼다. 『소학』이라는 제목을 들으면 초등학생 어린이들이 배워야 할 것 같지만, 옛날 사람의 이름이나 역사 이야기가 많이 나와서 생각보다 어려웠다. 그러나 『동몽수지』는 어린이 눈높이에서 공부하는 방법을 설명한 책이기 때문에 쉽다. 『천자문』을 배울 때에는 날마다 “하늘 천, 따 지” 하면서 따분하게 글자만 몇 자씩 배웠는데, 『동몽수지』에는 자기들같은 어린이의 이야기가 나오니까 실감나게 배웠다. 송나라 때에는 여기 저기에 서당들이 많이 생겼는데, 공부하는 방법이나 규칙을 설명한 학규(學規)를 날마다 외웠다. 소리를 내서 크게 읽다가 보면 저절로 외워지고, 외우기만 한 것이 아니라 책에 쓰인 대로 습관이 들었다. 『동몽선습』에는 목차에 오륜(五倫)이 차례로 나와서 다 가르쳤지만, 『동몽수지』에는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설명이 없다. 어린이들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남들이 하지 않는 방법으로 공부에 도전했던 소남 윤동규 소남 윤동규는 어린 시절에 치열하게 공부하였다. 남들은 『천자문』을 “날 일(日), 달 월(月), 찰 영(盈), 기울 측(昃)”, “찰 한(寒), 올 래(來), 더울 서(暑), 갈 왕(往)” 순서로 외웠는데, 그와 가장 친했던 후배 순암 안정복이 그의 행장을 지으면서 이렇게 썼다. “(윤동규는) 겨우 말을 배울 무렵에 주흥사가 지은 『천자문(千字文)』을 배웠다. 세로로 외울 때에도, 가로로 외울 때에도, 한 글자도 틀리지 않았다.” 요즘은 책을 가로로 쓰지만. 옛날에는 세로로 썼다. 그러니까 『천자문』은 세로로 읽어야 뜻이 통한다. “해와 달은 찼다가 기운다”, “추위가 오면 더위가 간다.” 줄거리가 있으니까 외우기도 쉽다. 그런데 『천자문』을 요즘 책처럼 가로로 읽어보면 문장이 안 된다. “날 일(日), 별 진(辰), 추울 한(寒), 가을 추(秋)”라는 네 개의 글자를 읽을 수는 있지만, 줄거리가 없으니까 외워지지가 않는다. 그런데 윤동규는 남들이 하지 않는 방법으로 공부에 도전했다.
동몽수지를 직접 써서 인천 어린이들을 가르쳤던 윤동규 조선시대에는 16세가 된 남자에게 호패를 만들어 주었다. 삼백년 전에 만들어진 윤동규의 호패에는 “윤동규, 서부, 을해생, 서학생”이라는 네 가지 정보가 적혀 있다. “서부 동네에 살고, 1695년에 태어났으며, 서학이라는 학교에 다니는 학생 윤동규”라는 뜻이다. 윤동규는 공부가 너무 좋아서 과거시험도 보지 않고 평생 책만 읽다보니 환갑이 넘은 뒤에도 학생으로 살았다. 소남 윤동규의 도림동 서재에는 인천 어린이 뿐만 아니라 광주에 살던 순암 안정복의 아들까지도 도림동에 장가들어 글을 배웠다. 성호 선생의 아들 이맹휴가 윤동규를 처음 보고는 안정복에게 이렇게 말했다. “소남 선생의 첫 인상이 비가 그친 뒤에 맑게 개인 하늘 같고, 밝은 달빛 같다.” 얼굴이 그렇게 생겼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마음이 맑은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소남의 서당은 날마다 봄바람이 부는 것처럼 따뜻해서, 어린이들이 모두 아버지처럼 소남을 따랐다. 친구들끼리 서로 도와주고, 모르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소남이 『동몽수지』를 직접 써서 어린 제자들의 인생공부를 시작하게 해주었다.
소남 윤동규가 직접 필사하여 가르친 동몽수지
소남 종가에 있는 책들은 목판본이나 활자본으로 출판된 것도 많지만 소남이 직접 베껴 쓴 책도 많다. 천주교 책들은 살 수가 없으니 성호 선생에게 빌려다가 베껴서 읽었고, 자기가 공부하려는 책은 다른 책의 뒷장에다 작은 글씨로 깨알같이 베껴서 읽었다. 그러나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려는 책은 깨끗한 종이에 해서체의 큰 글씨로 또박또박 썼다. 어린 학생들이 읽어보고, 그 글씨를 본따서 베껴 쓰게 한 것이다. 남동문화원에서는 소남 윤동규가 인천 어린이들을 가르쳤던 『동몽수지』를 쉬운 문장으로 번역하고, 인천 어린이들이 『동몽수지』의 가르침을 실연하는 모습도 사진으로 찍어 함께 편집하였다. 친필 영인본과 학부모들이 힘께 읽을 『동몽수지』 설명문도 실었다. 초등학교 교장들의 모임인 인천인성교육추진단에서 인천 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소남 선생의 『동몽수지』를 가르칠 날이 기다려진다.
소남의 후배인 순암 안정복이 『동몽수지』 목판본 뒤에 “윤동규 어른은 『동몽수지』를 주자가 직접 쓰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듯하다”는 견해를 붓으로 써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