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9:51-62 - 결단의 기도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저희가 가서 예수를 위하여 예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촌에 들어갔더니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고로 저희가 받아들이지 아니하는지라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함께 다른 촌으로 가시니라 길 가실 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추운 겨울이 지나가고 따뜻한 봄 햇빛이 대지를 녹일 때면 목동들은 양들을 끌고 나가 겨울 동안 길게 자란 양털을 깎는다고 합니다.
지금은 기계화되어 아주 쉽고 빠르게 깎지만 옛날에는 하나하나 사람의 손으로 깎는 중노동이었습니다. 이렇게 한 마리 한 마리 털을 깎고 있는 도중에 늦추위가 몰아쳐 눈보라가 날리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당황한 목동은 양들을 다 깎은 양, 절반 정도 깎은 양, 못 깎은 양으로 구별하여 우리에 몰아 넣은 다음 눈보라가 지나가고 다시 따뜻한 햇빛이 대지를 비칠 때 우리를 열고 양들을 끌어낸답니다. 그럴 때 깎다만 양은 예외 없이 감기에 걸리고 그 중 다수가 죽는 것을 경험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결단이 부족하여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앞으로 계속 전진하든지 아니면 차라리 뒤로 물러서든지 어느 쪽으로든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중간에서 어쩔 줄 모르고 방황하며 시간만 허비하다가 일을 그르치는 경우를 민족적인 차원에서나 개인적인 일에서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란 것도 한 마디로 말해서 계속적 결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처음 전도하실 때 말씀하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는 결단의 촉구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회개하라"란 말의 뜻은 결코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죄만을 뉘우친다는 개인적인 후회의 감정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날 우리가 살아온 모든 생활 특히 우리가 섬겨온 주권(Power)에 대하여 완전히 부정하고 이젠 새로운 주권으로 하나님을 받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주권이 지금 곧 이 세상에 다가오니 "너희는 너희가 섬겨온 옛 주권을 버리고 새 주권을 영접하라. 그 새 제도와 나라에 대하여 충성을 약속하라. 지난날의 모든 생활을 완전 백지화하고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충성을 약속하라"라는 단호한 결단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그의 서신에서 "두 마음을 품은 자는 무엇을 얻기를 바라지도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저것에 미련을 갖고 방황하는 자, 두 마음을 품은 자에게서는 아무 것도 기대할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복음서에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마음이 청결한 자란 절대로 깨끗하게 마음이 텅텅 비었다라는 뜻이 아니라 오직 하나만을 생각하는 마음, 한 가지 일에 집중하는 단순한 마음을 가진 자를 뜻하며 그런 자만이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올라가시기로 굳게 결심했다고 하였습니다. 며칠 후면 유월절입니다. 이 유월절이 되면 12세 이상의 이스라엘 남자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예수님도 평소에 1년에 세 번 정도는 늘 올라가시던 길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38선처럼 막혀서 못 가는 길도 아닙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새삼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을 결심하셔야 했습니까? 본문에서의 '굳게 결심했다'란 말의 헬라 원뜻은 '얼굴을 굳게 했다'는 뜻입니다. 예루살렘을 바라보면서 굳은 얼굴, 심각한 얼굴을 했다는 말은 비상한 결심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결심은 성경 신학적 입장에서 본다면 훨씬 전으로 소급해 올라갈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40일 금식 기도후 광야에서 사단에게 시험받으실 때에(마 4:1-11) 사단은 배고픈 그에게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하고, 세상을 구원할 뜻을 가진 그에게 성전에서 뛰어내려라. 그러면 세상 모든 사람이 너를 우러러 볼 것이라고 유혹할 때 예수께서는 모두 거절하셨습니다. 이미 그 때 예수님은 어떤 마술적인 이적에 의해 백성을 구할 것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 구원하시기로 결심하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유월절을 앞두고 다시 한 번 굳게 결심을 합니다. 마음이 약해져서도 결심이 무너져서도 아닙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이때 예루살렘에서는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여 이번 유월절을 기해 예수님을 잡아서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었음이 나타납니다. 예수는 이 사실을 먼저 아시고 이 위급한 상황에서 그의 결심, 십자가를 통한 구원을 새롭게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떤 극단주의 신학자는 예수는 자살을 했다라고도 말합니다. 왜냐하면, 죽을 길임을 뻔히 알면서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으니 이것이 자살이 아니고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기의 죽음을 선택 할 수 있는 사람은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 길이 죽음의 길임을 분명히 알면서도 스스로 선택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순교사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유대 사람을 죽일 때 일부러 돼지고기를 갖다 주고 먹으라고 한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절대로 돼지고기를 먹지 않기 때문이랍니다. 그런데 어느 동정심 많은 사람이 그를 불쌍히 여겨 몰래 돼지고기 대신 쇠고기를 갖다 주고는 "이것은 사실 쇠고기입니다. 당신이 불쌍하여 살려주려고 하니 눈 딱감고 드십시오"라고 말했답니다. 그러나 그 유대인은 "아니요. 나도 그것이 쇠고기인 줄은 압니다. 그러나 다른 모든 사람들은 그것을 돼지고기로 알고 있기 때문에 먹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며 끝내 먹지 않고 죽었답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입니다. 고개 한 번 끄덕이거나 말 한 마디만 그들이 원하는 대로하면 죽지 않고 살 수 있는데 이것을 거부해서 죽는 것은 사실 자살이라고 말해도 좋을 수 있는 순교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죽음의 길임을 알면서도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갈 것과 그리고 십자가를 지기로 결심합니다. 사실 이러한 결심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인간은 예수를 믿느냐? 믿으면 죽이겠다 하는 극한 상황 속에서는 쉽사리 죽기를 결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는 얼마든지 피할 수도 있고 안 갈 수도 있는 길이었습니다. 지금 예수 앞에는 두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는 죽음의 길이요 다른 하나는 삶의 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시고 그 고난을 바라보면서 한 순간 한 순간,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는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하면 그 길이 얼마나 어렵고 적극적인 결단을 요구하는 길이었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한 번 결심한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또 한 번 자신의 결심을 새롭게 해야 했던 것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죽을 시기'를 택했다고 했습니다. 시기를 잘 선택한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아무 때나 죽는 것은 자기 생명의 낭비일 뿐이며 희생도 함부로 하면 역시 헛된 것이 될 뿐입니다. 희생해야 할 때 희생하고, 죽어야 할 때 죽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오늘 본문에 나타난 대로 '승천할 기약이 차 가매' 적절한 시기를 생각하셨고 그는 그래서 바로 유월절을 택하신 것입니다. 그는 만백성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질 십자가 고난의 날짜를 바로 유대인들의 자신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 양을 죽여 바치는 유월절로 택한 것입니다.
기록에 보면 당시 유월절 하루 동안에 잡는 양의 수는 무려 18만 6천 마리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한 날을 자신의 죽음의 날로 택한 것에 예수의 위대한 신앙적 결단이 있습니다.
사람은 삶과 죽음의 시기를 잘 선택해야 합니다.
저는 한 선배 목사님으로부터 만날 때마다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왜정 말년에 신사 참배의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었을 때 목사님은 마침 상처한 후 새로 후처를 맞이했던 때라 순교를 택해야 할 그 시간에 처와 아이들을 생각하며 그만 신사 앞에 꾸벅 절을 하고 말았답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 목사님은 그 일만 생각하면 정신이 번쩍번쩍 들고 땀이 줄줄 흐른답니다. 이것이 죽을 때 죽지 못한 사람들의 돌이킬 수 없는 한입니다. 물론 이것은 극단적인 예입니다만, 우리는 순간 순간의 삶 속에서 그러한 결단을 요구하는 경우를 많이 당하게 됩니다. 잘 때 자고, 공부할 때 공부하고, 먹을 때 먹고, 죽을 때 죽어야 합니다.
우리가 돈을 버는 일도 때를 잘 맞추어야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많이 나누는 사업에 대한 이야기 가운데 주식이라든지 또는 부동산 투기 등과 같은 것은 역시 그 투자 시기를 잘 맞추어야 하지 않습니까? 만일 마지막 "막차"를 타게 되면 그 투자는 완전히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삶 전체도 이와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똑같은 일이지만 시간의 차이에 의해 그 가치가 달라집니다.
"승천할 기약이 차 가매" 예수는 그 적절한 때를 택하여 십자가를 지시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여기에 또 하나 지역의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는 갈릴리 한 구석에서 순교를 기다리다가 당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유대의 수도 예루살렘까지 올라가셔서 당했습니다. 원수들이 갖은 음모를 꾸미어 죽이려고 기다리는 그 곳으로 스스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에서는 이러한 과감한 결단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절대로 변명과 비굴함과 처절함으로 생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대단히 유감스러운 이야기입니다만 제가 미국에 있을 때 본 것이 있습니다. 전쟁이 위협이 있다 하여 미국으로 이민 와서 장사를 하다 실패하여 청소부로 일하던 어떤 교역자가 그만 교통 사고로 죽음을 당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의 최후가 너무나 비참하고 불쌍하다고 느꼈었습니다.
차라리 심방을 가다가 그런 일을 당했다면■. 전쟁의 위협이 있다하여 미국까지 도망쳤다가 결국 교통 사고로 죽었으니■.
우리 모두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갑시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으로 인기 절정에 있던 예수님, 이제 메시야로 확신하고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세속의 왕으로 군림할 것을 기대하는 바로 그 결정적인 시기에 백성들의 기대와는 달리 그는 십자가를 택합니다. 이 얼마나 중대한 결단입니까?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은 목회에 계속 실패하고 이제는 갈 곳이 없으니까 "에라, 감옥에나 가자" 하고 지금은 감옥에 들어가 있습니다. 자,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평해야 합니까? 이거저것 아무 것도 안되고 갈 데도 없는 진퇴양난에 있을 때 "에라, 죽음이나 택하자"하는 것이 과연 순교입니까?
예수님의 결단은 결코 그런 종류의 순교가 아닙니다. 그것은 할 수 없이 짊어지는 십자가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십자가입니다. 그 당시 예수의 능력과 인기라면 혁명이라도 일으켜서 유대 나라의 왕이 되는 것이 충분히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 인기 절정에서 엉뚱하게 십자가를 지십니다. 그런 예수님의 모습이 마태복음 16:16이하에서 예수님과 베드로의 두 가지 대화 속에 나타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고백을 하였을 때 그 고백을 한 베드로에게 크게 축복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다시 고난받을 것을 가르치셨을 때 그것을 만류하는 베드로의 두 번째 고백에 대하여 엄히 꾸짖으시고 "그래, 이제 곧 나는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참 예수님의 마음이며 그의 결단입니다.
그와 같은 결단을 갖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는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지나게 됩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가 그들이 싫어하는 유대나라의 왕이 되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으로 오해하여 그들의 땅을 통과하지 못하게 가로막습니다. 그것을 본 제자들이 "기도해서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 그들을 멸하게 할까요?"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제자들을 꾸짖으며 다른 길로 돌아서 가셨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귀중한 말씀입니까?
또 한 가지 생각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본문에 세 부류의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예수님, 이제 우리가 끝까지 주를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라고 대답하십니다. 두 번째로 "내가 부친을 장사 지낸 후에 주님을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고 하시며, 또 세 번째 사람이 "집에 가서 가족에게 인사를 하고 온 후에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할 때, 그에게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합당하지 않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먼저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진단할 수 있습니다. 일단 결심한 후에는 뒤돌아보거나 인사할 겨를도 없었으며, 오해를 해명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장사 지내게 하 라,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또 십자가를 향하여 가는 사람이 뒤를 돌아보거나 옛 정을 찾아 인사할 때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결단입니까? 그러나 그렇게 해야만이 우리는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결단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에게도 필요한 것입니다.
잡히시기 전날 밤에 예수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새도록 기도를 합니다. 일단 결심하고 떠난 길이지만 기도로 다시 결단 한 것이 곧 십자가의 길입니다. 우리들이 아무리 대단한 결심을 했다 하더라도 그 뒤에 기도로써 능력을 얻지 못하면 그 결심은 실천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도 함께 죽기를 결심한 흔적을 봅니다. 그러나 그들은 밤새껏 기도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음날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고 만 것입니다.
계속 기도하고 또 다시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하기로 희생하기로 그리고 죽기로 결단 내리는 것보다 더 큰 결단은 없습니다. 이 위대한 결단, 이것이야말로 만능의 신앙이며, 바로 이것이 십자가의 권능이요 부활의 능력입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기로 굳게 결심하신 예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오늘 우리에게 더욱 새로운 결단이 있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