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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17호
안산영당 (安山影堂)
분 류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 인물기념 / 사우
수량/면적
1동
지정(등록)일
1989.05.29
소 재 지
경북 성주군 벽진면 자산3길 366-31 (자산리)
소유자(소유단체)
관리자(관리단체)
이용택
· 상 세 문 의 : 경상북도 성주군 문화관광과 054-930-6792
성주 이씨들의 선조 가운데 나라에 공헌하고 사회에 본보기가 될만한 13분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지내는 건물이다.
지은 시기는 확실치 않으나 선조 14년(1581), 당시 성주 이씨의 후손인 이현배가 성주목사로 부임해오면서 이곳을 고쳐 지었다. 원래 월항면 인촌리 이장경의 묘 앞에 있었는데 그의 묘를 이장하면서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겼다. 그 뒤 숙종 6년(1680) 임금이 ‘안산서원’이란 이름을 내려 주었고, 나라에 공를 세운 조상 22분의 영정을 모시게 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등으로 소실되어 현재는 13분을 모시고 있다. 고종 6년(186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을 피하기 위해 이름을 ‘안산영당’으로 고쳤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안산영당과 안산재, 삼문이 있고 후대에 세운 객사, 관리사 건물이 벽을 사이에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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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峯影堂(안봉영당)과 安山書院(안산서원)
安山書院과 安山影堂 案內圖
安山書院
安山書院 懸板
隴西郡公 神道碑
安山影堂
中央主壁
東便
西便
星州郡(성주군) 月恒面(월항면) 仁村洞(인촌동) 禪石寺(선석사) 옆 胎封(태봉)에 모셔진 隴西郡公(농서군공)의 山所(산소)를 移葬(이장)한 후 禪石寺(선석사)에 奉安(봉안) 되어있던 影幀(영정)을 景泰年間(경태년간 1451年(朝鮮 文宗 1年)-1456年(世祖 2年))에 安峯寺(안봉사)로 옮기게 되었다고 하나, 確實(확실))한 根據(근거)를 찾지 못하였으며, 일부 기록에서는 禪石寺(선석사)에 여섯 분의 影幀(영정)을 모셨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13位 中에서 高麗朝(고려조)에 모셔졌던 여섯 분은 隴西郡公(농서군공), 密直司事 貞節公(밀직사사 정절공), 政堂文學文烈公(정당문학 문열공), 平壤尹 泰齋公(평양윤 태재공), 參知政事 仲善公(참지정사 중선공), 門下侍中 敬元公(문하시중 경원공) 등 모두 高麗朝(고려조)에 돌아가신 분이시고 그 외에 일곱 분은 高麗末(고려말) 또는 朝鮮初(조선초)에 돌아가신 분이시다.
[註] 우리 門中(문중) 族譜(족보) 丁卯譜(정묘보), 辛未譜(신미보), 丁巳譜(정사보)까지의 影堂重建記(영당중건기) 또는 重修記文(중수기문)에는 모두 安峯影堂(안봉영당)으로 記錄(기록)하고 있는데, 1796年(正祖 20年) 安山書院(안산서원)으로 昇院(승원)한 이후부터 庚寅譜(경인보)와 甲子譜(갑자보), 乙未譜(을미보)에서 記文題(기문제)를 고쳐서 安山書院 上板記(안산서원 상판기) 또는 安山影堂 重建記(안산영당 중건기), 또는 影堂(영당) 延峯(연봉) 新舊(신구) 事跡記(사적기)를 安山(안산) 延峯(연봉) 兩院(양원) 事跡記(사적기)로, 또 後孫(후손) 鳳興(봉흥) 公이 쓴 安峯影堂 重修記(안봉영당 중수기)를 安山書院 重修記(안산서원 중수기)로 고쳐 쓴 것으로 보아, 書院(서원) 昇院(승원) 후부터 安山影堂(안산영당) 安山書院(안산서원), 安山齋(안산재)로 부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2. 1546年(朝鮮 明宗 元年) 安峯影堂(안봉영당)에 十三位(십삼위)의 影幀(영정)이 奉安(봉안)되어 있었음을 확인.
우리 門中의 지금까지 나타난 記錄으로는 처음으로 1546年(明宗 元年) 正月 13日 黙齋公(묵재공 1494年(成宗 25年)-1567年(明宗 22年))께서 安峯寺(안봉사)에 가셔서 拜謁(배알) 했는데 당시 모셔진 影幀(영정)은 堂中央(당중앙)에 隴西郡公 眞影(농서군공 진영), 西壁之南(서벽지남)에 李百年 御簇(이백년 어족), 其次(기차) 文烈公 眞影(문열공 진영), 其次(기차) 李仲善 眞影(이중선 진영), 其次(기차) 敬元公 眞影(경원공 진영), 其次(기차) 西壁之西(서벽지서)에 李麟起 御簇(이인기 어족), 其次(기차) 大提學(대제학) 仁敏 眞影(인민 진영), 其次(기차) 仁任 眞影(인임 진영), 其次(기차) 李元具 眞影(이원구 진영), 其次(기차) 李崇仁 眞影(이숭인 진영), 其次(기차) 東壁之北(동벽지북)에 李濟 眞影(이제 진영), 其次(기차) 文景公 眞影(문경공 진영), 其次(기차) 漢城府尹 眞影(한성부윤 진영) 등 13位가 奉安(봉안)되어 있었다고 記錄(기록)하고 있음.
3. 安峯影堂(안봉영당)의 影幀(영정)은 壬辰倭亂(임진왜란) 때에는 전혀 被害(피해)를 입지 않았다.
芝江公(지강공 1562年-1617年)의 安峯影堂 板上記(안봉영당 판상기)에 보면 “1587年(丁亥; 宣祖 20年) 봄에 聘君(빙군)을 따라서 密城(밀성;밀양)으로 가게 되었는데 길이 星州로 나 있어 곧장 가서 參拜(참배)를 하였더니 . . . . (壬辰亂 前의 상황임). 1592年(宣祖 25年) 壬辰倭亂(임진왜란)에 安峯影堂(안봉영당)도 잿더미가 되었을 것이라 우려하여 1596年(宣祖 29年) 봄에 천리를 신발을 싸고 달려가서 安峯影堂(안봉영당)으로 나아가 보았더니 여러 影幀(영정)들이 또렷하게 지난날과 같아서, 敬虔(경건)한 精誠(정성)으로 祭(제)를 올렸다.” 는 내용으로 보아 壬辰倭亂(임진왜란)으로 인한 影幀(영정)의 피해는 없었던 것으로 思料(사료)되는데, [註] 우리 門中(문중)의 여러 文獻(문헌)에서 盜難(도난) 또는 火災(화재) 등 被害說(피해설)이 있으나 이는 1689年(肅宗 15年) 靖憲公(정헌공)의 安山影堂 重建記文(안산영당 중건기문)에 “天星(천성)이 한번 돌자 兵禍(병화 壬辰倭亂)가 닥쳐 스님 敬宗(경종)이 影幀(영정)을 품고 保護(보호)하여 불속에 잿더미를 벗어나게 되었다”라는 기록과 그 후 1796年(正祖 20年) 後孫(후손) 鳳興(봉흥) 公의 安峯影堂 昇院記(안봉영당 승원기)에도 “壬辰倭亂(임진왜란)에 僧(승) 敬宗(경종)이 影幀(영정)을 帳護(장호)하여 병화를 면하니 天佑神助(천우신조)함이다”로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로 인하여 後世(후세)에 여러 文獻(문헌)에서 壬辰倭亂(임진왜란)에 影幀(영정)의 일부가 불에 탓 거나, 잃어 버렸다는 기록들이 생기게 된 것으로 보이며, 이는 芝江公(지강공)의 安峯影堂 判上記(안봉영당 판상기)는 보지 않고, 癸丑譜(계축보) 序文(서문) 내용 중 “一冊(일책)으로 등사하여 상자 속에 소장 하다가 임진왜란의 병화 중에 일어버리고, 또한 安峯僧舍(안봉승사)에 所藏(소장)하여오던 一本(일본)이 겨우 불에 탄 잿더미 끝에 보전되었음을 들었으나 李惟諴(이유함)이 가져가 잃어버리게 되어 恒常(항상) 懇切(간절)히 慨嘆(개탄)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 기록을 잘못 이해하고 쓴 것이 아닌가 思料(사료)된다.
芝江公(지강공)께서는 1601年(宣祖 34年)과 1609年(光海君 元年)에도 安峯影堂(안봉영당)을 찾아 祭(제)를 올린 기록이 있고. 1615年(光海君 7年) 調度使(조도사)로서 巡行(순행)하다가 星州(성주)에 도착하여 宗族(종족)을 모아서 犧牲(희생)과 술로 祭(제)를 올리고, 遺像(유상)을 우러러 바라보니 먼지가 끼어 흐리고, 혹은 찢어지기도 하였으며, 可히 識別(식별)하지 못할 곳이 十中 六 七이나 되었다. 緋緞(비단)과 影幀(영정) 걸대와 祭物(제물)을 갖추어 祝文(축문)을 써 祭祀(제사) 지냈다는 기록이 있고, 1617年(光海君 9年) 關東地方(관동지방) 觀察使(관찰사)가 되었으나 그 해에 돌아가셔서 影堂(영당)은 重修(중수)를 하였으나 그때까지 遺像(유상)은 補修(보수)하지 못하였다.
각 影幀(영정)에 보면 1655年(孝宗 6年)에 隴西郡公(농서군공)의 影幀(영정)은 重摹(중모)하고, 貞節公 百年(정절공 백년)과 泰齋公 麟起(태재공 인기)의 影幀(영정)은 簇子(족자)에 그려진 影幀(영정)이라 改摹(개모)하지 못하고, 位牌(위패)로 奉安(봉안)한 것으로 보이며, 그 외 十位의 影幀(영정)은 改摹(개모)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芝江公(지강공)의 記文(기문)이 安峯影堂 板上記(안봉영당 판상기)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 처음으로 安峯影堂(안봉영당)이란 懸板(현판)을 붙인 것으로 思料(사료)된다.
4. 1689年(肅宗 15年) 절 안 東廡(동무)에 있던 影堂(영당)과 齋室(재실)을 절 밖 東便(동편)에 新築(신축)하다.
靖憲公(정헌공 1628年(仁祖 6年)-1718年(肅宗 44年))의 安峯影堂 重建記(안봉영당 중건기)에 보면 “1677年(丁巳; 肅宗 3年) 절에서 東으로 새로 터를 잡게 되어 1684年(甲子; 肅宗 10年) 봄에 시작하여 影堂(영당) 6間과 齋室(재실) 4間을 1689年(肅宗 15年)에 完工(완공)하고, 先代(선대) 18位의 影幀(영정)과 神主(신주)를 모셨다” 는 기록으로 보아 追封(추봉)된 位牌(위패)는 元孝公(원효공), 肅憲公(숙헌공), 留守公(유수공), 樵隱公(초은공), 芝江公(지강공) 다섯 분으로 사료됨.
5. 安峯影堂(안봉영당)의 影幀(영정)을 다시 重摹(중모)하다.
1750年(英祖 26年) 鶴庵公(학암공) 應協(응협 1709年(肅宗 35年)-1772年(英祖 48年))의 影堂(영당) 延峯(연봉) 新舊(신구) 兩院(양원) 事蹟記(사적기)에 보면 1738年(英祖 14年) 가을에 參拜(참배)를 하였고, 1745年(乙丑; 英祖 21年) 봄에 畵工(화공)을 雇用(고용)하여 1746年(英祖 22年) 丙寅(병인)에 重新(중신) 즉, 重摹(중모)하였으며, 奉安(봉안) 되었던 舊(구) 影幀(영정)에도 1746年(英祖 22年) 重摹(중모)한 것으로 記錄(기록)하고 있다.
6. 1745年(乙丑; 英祖 21年)에 延峯書院(연봉서원)을 건립하다.
1797年(正祖 21年) 後孫(후손) 鳳興(봉흥) 公의 重修記(중수기)에 보면 “盧四印(노사인) 慶麟(경린)과 黃錦溪(황금계) 俊良(준량)이 차례로 本州(본주) 牧使(목사)로 와서 士林(사림)의 議論(의논)을 따라 梅雲)(매운), 樵隱(초은) 兩 先生을 위하여 迎鳳書院(영봉서원)을 創建(창건)하고 退溪(퇴계) 李滉(이황) 先生에게 請(청)하여 事蹟(사적)을 記錄(기록)하고 規模(규모)와 儀節(의절)을 정하고 賜額(사액)을 나라에서 물어서 揭扁(게편)한 후에 金文敬公(김문경공)의 추제로 인하여 位次(위차) 上下關係(상하관계)로 衆論(중론)이 분분하여 이에 大賢(대현)의 定案(정안)에 맡겨서 忠祠(충사)를 別設(별설) 하였으니 退溪詩(퇴계시)에 이른바 [鳳山儒館(봉산유관)이 極恢悵(극회창)한데 聚訟賢祠挾謗傷(취송현사협방상)이라]함은 이것이 깊이 傷心(상심)하고 痛惜(통석)하는의미라” 로 기록하고 있다.
이 내용은 黙齋公(묵재공) 李文建(이문건)이 星州에서 流配生活(유배생활)을 하시면서 高麗(고려) 때부터 鄕賢(향현)을 寺刹(사찰)에 모시던 단계로부터 서서히 儒敎的(유교적)인 敎育機關(교육기관)인 書院(서원)을 건립하여 先祖를 享祀(향사)하는 새로운 단계를 도모하고자, 당시 儒生(유생)을 많이 배출한 영주의 白雲洞書院(소수서원)의 예를 들어 이를 星州에 실현해보고자, 星州地域(성주지역)에 書院(서원)을 건립하여 儒生(유생)들의 講學所(강학소)를 마련하고, 鄕村(향촌)의 先賢(선현)을 祭享(제향)하여 후세에 龜鑑(귀감)으로 삼고, 星州의 젊은 士子(사자)를 위하여 공부할 곳을 마련하자는 뜻으로, 1555年(明宗 10年) 새로 赴任(부임)한 盧敬麟(노경린) 星州牧使(성주목사)와 상의하여, 書院(서원)을 건립, 鄕村(향촌)의 先賢(선현)을 祭享(제향)하여 후세에 귀감으로 삼고자, 祭享人物(제향인물)로 文烈公(문열공) 李兆年(이조년)과 文忠公(문충공) 李仁復(이인복)과 文敬公(문경공) 金宏弼(김굉필)로 정하고 退溪(퇴계) 李滉(이황)에게 의견을 구하여, 迎鳳書院(영봉서원)의 記文(기문)을 받았는데, 기문 내용에 文烈公(문열공)을 일러 “公은 난세를 당해 昏暗(혼암)한 임금을 섬기면서도 능히 忠義(충의)에 분발하여 정성을 다 하였으며, 面前(면전)에서 直諫(직간)하여 逆鱗(역린)의 화를 꺼리지 않았다. 급기야 끝내 임금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어서 과감히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온 臣下(신하)의 節義(절의)를 온전히 하였다”하였으며, 李仁復(이인복)을 일러 “公은 體質(체질)이 重厚(중후)하고 學問(학문)이 孤高(고고)하여 그 이름이 중국에까지 알려졌다. 亂(난)을 당하여 적을 토벌하는 大義(대의)를 세웠고, 役僧(역승) 辛旽(신돈)에 대해서는 先見之明(선견지명)이 있었다.”로 기록하였으며, 1558年(明宗 13年)에 공사를 着工(착공), 1559年(明宗14年) 完工(완공)을 보게 되었으니, 모두 50여 간으로 正堂(정당)을 誠正堂(성정당), 東齋(동재)를 克復齋(극복재), 西齋(서재)를 敬義齋(경의재), 門樓(문루)를 高明樓(고명루)라 하고 또 風詠壇(풍영단)을 두었으니, 이 모두를 일러 迎鳳書院(영봉서원)이라 했는데, 盧敬麟(노경린)의 사위인 栗谷(율곡) 李珥(이이)가 安峯寺(안봉사)에 讀書(독서)하러 올라갔다가 文烈公(문열공)의 影幀(영정)에 念珠(염주)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이를 문제 삼아 중론이 분분하여 鄕賢(향현)을 享祀(향사)할 것인가 道學者(도학자)를 享祀(향사) 할 것인가에 激烈(격열)한 論爭(논쟁)을 불러 일으켰으며, 결국 1560年(明宗15年) 黃俊良(황준량)이 星州牧使(성주목사)로 부임하여 중국의 程子(정자)와 朱子(주자)를 봉안하기로 하고, 文敬公(문경공) 金宏弼(김굉필)을 配享(배향)하기로 하였으며, 書院(서원) 이름도 川谷書院(천곡서원)으로 고치게 되었고, 書院(서원) 옆에 忠賢祠(충현사)를 지어 文烈公(문열공)과 樵隱公(초은공)의 위패를 봉안 하였으며, 뒤에 陶隱公(도은공)도 같이 봉안 하게 되었던 것이다. 훗날 이를 恨歎(한탄)한 우리 門中(문중)과 士林(사림)에서 迎鳳書院(영봉서원)과 이름이 비슷한 延峯書院(연봉서원)을 다시 建立(건립)하게 된 것이다.
鶴庵(학암) 先生의 事跡記(사적기)에 보면 1745年(乙丑; 英祖 21年) 鄕人(향인)들이 論議(논의)를 시작하여 延峯山下(연봉산하)에 書院(서원)을 건립하고, 隴西郡公(농서군공)과 文烈公(문열공), 文忠公(문충공) 仁復(인복), 文忠公(문충공) 崇仁(숭인), 文景公(문경공) 稷(직)의 五先生(오선생)을 奉安(봉안) 하였으니 建物(건물)은 壯大(장대)하고 아름다웠고 선비들의 道袍(도포)도 秩序整然(질서정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註) 迎鳳山(영봉산) 아래에 迎鳳書院(영봉서원)을 건립하게 한 것은 文烈公(문열공)께서 사시던 遺墟地(유허지) 임으로 選定(선정)한 것으로 보이며, 高麗(고려) 忠烈王(충렬왕) 20年(1294年)에 朝廷(조정)에서 安裕(안유)에게 선비를 뽑고자 貢擧(공거; 선발)를 주관하게 되어 合浦(합포)로 부터 門下生(문하생)인 文烈公(문열공)의 出仕(출사)를 위해 迎鳳山下(영봉산하) 長池村(장지촌)을 찾은 詩 내용에 “星山銀河(성산은하) 伊川(이천)을 뗏목 타고 건너와서” 라는 詩文(시문)이 있고, 迎鳳書院(영봉서원) 正堂(정당)을 誠正堂(성정당)으로 한 것은 文烈公(문열공)의 政堂文學(정당문학)을 考慮(고려)한 것이며, 東齋(동재)를 克復齋(극복재)로 한 것은 樵隱公(초은공)의 諱(휘) 復(복)자를 넣었으며, 西齋(서재)를 敬義齋(경의재)로 한 것은 文敬公(문경공)의 敬(경)자를 넣어 堂號(당호)를 정한 것으로 보인다.
7. 延峯書院(연봉서원)의 撤廢(철폐)
1796年(丙辰; 正祖 20年) 後孫(후손) 鳳興(봉흥) 공의 安峯影堂 重修記(안봉영당 중수기)에 보면 延峯書院(연봉서원)을 建立(건립)한 經緯(경위)와 “이어서 公儀(공의)가 없어지지 않아서 迎峯書院(영봉서원)에 가서 退溪(퇴계)의 세운 規模(규모)를 依倣(의방)하여 다시 書院(서원)을 創建(창건)하여 隴西郡公(농서군공) 이하 五賢(오현)을 俎豆(조두)하였다. 未久(미구)에 또 朝廷(조정)의 禁令(금령)으로 헐리어 撤享(철향)하게 되었으니<大院君(대원군)의 書院撤廢令(서원철폐령)을 말함>, 儒林(유림) 선비들의 歎息(탄식)과 子孫(자손)들의 慨嘆(개탄)되고 한스러움은 더욱 깊었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撤廢(철폐)된 正確(정확)한 年代(년대)는 알 수 없으나 開院(개원) 후 몇 해 못가서 撤廢(철폐)된 것으로 보인다.
8. 影堂(영당)을 書院(서원)으로 昇院(승원)하기 위해 대대적인 重修事業(중수사업)을 하다..
1797年(丁巳; 正祖 21年) 顯穆(현목) 公의 舊(구) 影堂重修記(영당중수기)에 보면 鳳興(봉흥) 公의 昇院(승원) 以前(이전)에 大大的(대대적)인 重修事實(중수사실)을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 ....그리하여 任員(임원)과 有司(유사)를 골라서 選出(선출)하고 가까운 道에 通告(통고) 하였으니 檢擧(검거)는 應培(응배)氏가 兼任(겸임)하고 都監(도감)은 즉 後孫(후손)이니 顯宅氏(현택씨 1775年(英祖 51年)-1814年(純祖 14年))였다. 顯舜氏(현순씨)도 역시 그때 副任者(부임자)였다....
㉯, ....그제 서야 材木(재목)을 모았더니 風柳(풍류)나무 한그루는 梵宇(범우)의 뒤에서 베어오고, 文杏(문행)나무 한그루는 寶輝樓(보휘루)의 앞에서 베어 왔으며, 講堂(강당)의 앞에서도 또 푸르게 솟아오른 文杏(문행)나무가 있었다. (中略) 그 때에 베었더니 세 그루의 나무를 모두 합하여 기둥의 계족으로 하였다....
以上(이상)의 기록으로 보아 昇院(승원)이 결정되고, 大大的(대대적)인 重修(중수)가 아닌 改築(개축)정도의 大工事(대공사)가 이루어 졌으며, 이때에 靖憲公(光迪)의 影幀(영정)을 奉安(봉안) 한 것으로 보인다.
9. 1796年(正祖 20年) 安山影堂(안산영당)에서 安山書院(안산서원)으로 昇院(승원)되다.
鳳興(봉흥) 公의 重修記(중수기)에 보면 “今年(금년)에 와서 마침내 影堂昇院(영당승원)의 論議(논의)가 생겨 遠近(원근)이 同聲相應(동성상응)하여 祭日(제일)을 仲春上丁(중춘상정)으로 하고, 多士(다사)가 會同(회동)하여 十九位를 合祀(합사)할세, 影幀(영정)이 있는 位에는 影幀(영정)을 뒤에 걸고 祠版(사판)을 앞에 모셔서 肅肅(숙숙)하고 雍雍(옹옹)하여 神人(신인)같이 기뻐하고 儀節(의절)도 詳備(상비)되어 진실로 星州有史以來(성주유사이래)로 처음 있는 盛事(성사)다.”라 기록한 것으로 보아 처음으로 安山書院(안산서원)의 懸板(현판)을 달게 된 것으로 보인다.
10. 安峯寺(안봉사)를 허물고 影堂(영당)과 齋舍(재사)를 현재의 위치로 移建(이건)하다.
1838年(戊戌; 憲宗 4年) 후손 月浦(월포) 佑贇(우윤 1792年(正祖 16年)-1855年(哲宗 6年))氏의 安山書院 移建記(안산서원 이건기)
㉮, 1835年(乙未; 憲宗 元年) 가을 祠堂(사당)에 들어가 展拜(전배)를 마치고 宗人(종인) 鐘英氏(종영씨)와 더불어 祠堂(사당)을 살펴보고 祠堂(사당)의 來歷(내력)을 仔詳(자상)하게 要請(요청)하여도 되겠는가? 하니 그간의 重修內譯(중수내역)을 설명하고 祠堂(사당)이 절간의 곁에 있었고 地勢(지세)도 치우치게 자리 잡은 缺點(결점)이 있었기에 形勢(형세)가 主客(주객)이 바뀐 듯 함이 있어서 항상 이러한 것을 한탄하여 온지가 오래였는데 지금 다행스럽게도 文民(문민)의 다스림이 두루 흡족하고, 道場(도장)이 廢墟(폐허)가 되었으니 眞實(진실)로 능히 그 廢墟(페허)가 됨으로 인하여 祠堂(사당)을 옮겨서 建立(건립)하면 이것이 하나로서 여덟 가지를 開拓(개척)하는 의미리라.
㉯, 1836年(丙申; 憲宗 2年)에 鐘英氏(종영씨)가 境內(경내)의 여러 宗人(종인)들과 더불어 六百餘金(육백여금)의 財産(재산)을 모아서 寶殿(보전)의 서쪽에 먼저 두어 칸의 佛舍(불사)를 지어 寶殿(보전)의 佛像(불상)을 모두 옮겼으니 즉 今日(금일)의 龍鳳庵(용봉암)이 이것이다.
㉰, 1838年(戊戌; 憲宗 4年) 正月에 그 곳을 개척하여 그곳의 材木(재목)들을 사용하고 그 곳의 기와를 사용하였더니 滿 一個 年(만 일개 년)이 차지 않았는데 工事(공사)의 일을 마쳤다.
㉱, 祠堂(사당)에 本來(본래)는 十九位(십구위)였으나 孤隱公(고은공)과 一齋公(일재공) 兩先生(양선생)과 桐谷(동곡)선생으로 아울러 配享(배향)하여 二十二位(이십이위)가 되었다
11. 1850年(哲宗 元年) 먼 甥姪(생질) 成均館祭酒兼(성균관제주겸) 經筵官(경연관) 唐城(당성) 洪直弼(홍직필)이 謹撰(근찬), 隴西郡公(농서군공) 神道碑(신도비)를 세우다.
12. 1868年(高宗5年) 大院君(대원군)의 書院撤廢令(서원철폐령)으로 安山書院(안산서원)의 堂號(당호)가 撤廢(철폐)되고 雲山精舍(운산정사)의 堂號(당호)를 쓰게 된 것으로 보인다.
13. 1913年(丙辰; 大韓民國 2年) 3月 安山影堂(안산영당)을 重修(중수)한 기록이 있다.
後孫(후손) 箕浩氏(기호씨)의 安山影堂(안산영당) 重修記(중수기)에보면 歲(세) 丙辰(병진) 寒食(한식) 禮尊之日(예존지일)에 享祀(향사)를 마치고 源澤(원택), 柄朝(병조), 敬浩(경호), 敎達(교달) 諸氏(제씨)가 跋文(발문)하여 影堂(영당) 齋室(재실)을 重修(중수)한 기록이 있다.
14. 1975年(大韓民國 64年) 安山影堂(안산영당)과 齋室(재실)을 重修(중수)하다.
乙卯譜(을묘보)를 發行(발행)하고 後孫(후손) 雲一(운일)氏와 秉禧(병희)氏가 특별히 큰 財物(재물)을 出捐(출연)하고 星州의 在寅(재인)氏와 서울의 龍澤(용택)氏가 있는 힘을 다하여 허물어진 것은 補修(보수)하고 대문채도 고쳐 짓고, 담장을 따라 祭官(제관)들의 宿所(숙소)도 새로 建築(건축) 하는 등 二年 餘에 걸쳐 重修事業(중수사업)이 完遂(완수) 되었다.
이때 影堂祭床(영당제상) 밑의 箱子(상자)에 보관되어 있던 舊(구) 影幀(영정) 열두 폭을 收拾(수습)하여 大邱花樹會(대구화수회) 會長인 李朱夏(이주하)氏가 大邱(대구)에서 書室(서실)을 경영하는 李琪淳(이기순)氏에게 맡겨 表具(표구)하게 하였는데, 후에 이 影幀(영정)들을 모두 文化財(문화재)로 指定(지정)받았다.
15. 1989年 5月 29日 安山影堂(안산영당) 有形文化財資料(유형문화재자료) 제217號로 指定(지정)되다.
1988年 筆者(필자)가 慶尙北道(경상북도) 文化財(문화재) 審議(심의) 委員會(위원회)에 安山書院(안산서원)을 文化財(문화재)로 指定(지정)해 줄 것을 요청 하였던바, 副委員長(부위원장)이신 慶北大學校(경북대학교) 師範大學(사범대학) 金英夏(김영하) 敎授(교수)가 古建築擔當(고건축담당) 專門委員(전문위원)인 嶺南大學校(영남대학교) 崔英植(최영식) 敎授(교수)에게 調査(조사)를 命(명)하여 다음과 같이 조사 보고한 결과 安山書院(안산서원)은 文化財(문화재)로 指定(지정)되지 못하고, 安山影堂(안산영당)만 文化財資料(문화재자료) 第217號로 指定(지정) 받았다.
崔英植(최영식) 敎授(교수)의 調査(조사) 報告書(보고서)
가. 安山影堂(안산영당)
正面(정면) 3間, 側面(측면) 2間의 겹처마로 된 朴工瓦家(박공와가)로 建物(건물)의 前面(전면)에서 높은 돌계단을 따라 오른 후 四柱門(사주문)을 지나 影堂(영당)에 이르게 된다. 아주 큼직한 自然石(자연석)으로 基壇(기단)을 올리고 덤벙柱礎(주초)를 놓았으며 方柱(방주)를 세웠다.
上部構造(상부구조)는 三樑架(삼량가)로 方柱(방주)의 柱頭(주두)에 大樑(대량)과 납도리를 結構(결구)하고 大樑(대량) 中央(중앙)에 板台工(판태공)을 얹어 마루도리와 장혀(長舌)를 받치고 있는 연등천장으로 꾸며져 있다. 前面(전면)의 方柱(방주)를 中心으로 上部(상부) 內側(內側)은 草刻(초각)없는 甫兒只(보아지)로 大樑下部(대량하부)를 받치고 外側(외측)은 初翼工(초익공)으로 꾸미고 翼工上部(익공상부) 살 뺄목에 봉두고임을 하고 있다. 建物(건물)의 側壁(측벽)과 後壁(후벽)은 土壁(토벽) 칸막이로 되어 있고, 前面은 板璧(판벽)과 띠널 兩開板門(양개판문)으로 설치되어 있으며, 內部(내부)는 通間(통간)으로 바닥엔 廳板(청판)을 깔고 있다.
나. 安山齋(안산재)
前面(전면) 4間 側面(측면) 2間의 겹처마로 꾸며진 八作瓦家(팔작와가)로 御間(어간) 中央(중앙)이 三門의 中心과 一軸線上(일축선상)에 놓여있다.
2間 大廳(대청)을 中心으로 左右(좌우)에 間半(간반)의 溫突房(온돌방)이 對稱(대칭)으로 드리워져 있으며, 房(방)의 前面(전면)은 半間(반간)의 前退(전퇴)를 두고 아궁이는 兩側面(양측면)에 설치하고 있다.
右側房(우측방) 後壁(후벽)에 書庫(서고)를 꾸미고, 大廳(대청) 後壁(후벽)은 板璧(판벽)과 띠널 兩開板門(양개판문)을 머름중방위에 설치하고 大廳(대청)과 兩房(양방) 사이는 외여닫이 細箭門(세전문)으로 칸막이를 하고 있다. 構造(구조)를 보면 長大石(장대석) 基壇(기단) 위에 덤벙柱礎(주초)를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으며 側面(측면) 中間柱(중간주)와 房(방)과 前退(전퇴) 사이의 기둥만 方柱(방주)를 사용 했다. 우물 廳板(청판)으로 治粧(치장)한 大廳上部(대청상부) 架構(가구)는 五樑架(오량가)로 두리기둥 위에 柱頭(주두)를 얹어 柱心道里(주심도리)와 大樑(대량)을 함께 結構(결구)하고 있으며 童子柱(동자주)를 세워 中道里(중도리)와 宗樑(종량)을 結構(결구)한 위에 梯形(제형) 板台工(판태공)을 얹어 마루도리와 장혀를 받치고 있고 연등천장으로 構成(구성)되어있다. 前面의 平房(평방)과 倉房(창방)은 틈을 높여 틈새의 창방위에 花盤(화반)을 얹어 柱心道里(주심도리)와 장혀를 받치게 하고 또한 道里(도리)방향에 平行(평행)으로 柱頭(주두)에 첨차 꽂아 小累(소루)를 얹어 柱心道里(주심도리)와 장혀를 받치게 하고 있다. 두리기둥을 中心으로 柱頭(주두) 內側(내측)은 草刻(초각)없는 보아지로 大樑(대량)을 받게 하고 外側(외측)은 初翼工(초익공)으로 꾸미고 翼工(익공)위에 봉두고임을 하고 있다.
다. 調査者(조사자) 意見(의견)
1916年 1次 重修(중수)를 하고 1977年에 完全補修(완전보수)를 했다고 하는데 保存狀態(보존상태)는 아주 양호하다. 옛 書院(서원)의 配置形態(배치형태)는 전혀 찾아 볼 수 없지만 이곳이 예전에 절터라는 점과 실제 인접한 곳에 石佛(석불)을 마을 주민들이 單間石佛閣(단간석불각)까지 지어놓고 있는 실정이고 보면 安山書院(안산서원)이 이곳에 移建(이건)해 올 당시에 이미 書院建物(서원건물)은 거의 옮겨온 것은 없었을 것으로 思料(사료)되며, 書院建築(서원건축)으로 指定保存(지정보존)하기엔 곤란한 것 같고, 단지 단조롭긴 하지만 朝鮮中期(조선중기) 以後(이후)의 影堂資料(영당자료)로서는 가치가있다고 사료됨으로, 安山齋(안산재)는 제외하고 安山書院(안산서원)이라는 이름대신 安山影堂(안산영당)이라는 이름으로 文化財資料(문화재자료)로 指定(지정)할 것을 建議(건의)합니다.
===調査者 崔英植 專門委員 = = =
위와 같은 報告書에 의하여 1989年 5月 29日 慶尙北道(경상북도) 文化財資料(문화재자료) 第217號로 指定(지정)되었음.
16. 2010年 晉陽(진양) 姜熙大(강희대) 선생의 安山書院(안산서원) 重修記(중수기)
2008年 國會議員(국회의원)이며 大邱花樹會(대구화수회) 會長이신 李海鳳(이해봉) 議員과 星州花樹會(성주화수회) 李時雄(이시웅) 會長의 積極的(적극적)인 주선으로 文化財(문화재) 補修費(보수비)를 國家(국가)로부터 支援(지원)받아 影堂(영당) 6間, 齋室(재실) 4間과 外三門(외삼문)을 重修(중수)하고. 東西廡(동서무)를 신축하는 등 書院(서원)으로서의 面貌(면모)를 제대로 갖추어지게 되었다.
위와 같이 여러 차례의 重修 重建 事業을 거쳤고 影幀 또한 다섯 차례(1655年(孝宗 6年), 1714年(肅宗 40年), 1746年(英祖 22年), 1825年(純祖 26年))의 改摹(개모) 또는 重摹(중모)의 節次(절차)를 거쳐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現存(현존)하는 여러 文獻(문헌)에 보면 事實(사실)과 다른 내용들이 너무 많아 어떻게 是正(시정) 하여야 할 것인지에 대해 많은 硏究(연구)가 필요 할 것으로 보이며, 처음에는 影幀(영정)만을 寺刹(사찰)에 모셨는데 芝江公(지강공)께서 重摹(중모) 또는 改摹(개모)를 하면서 影幀(영정)을 復元(복원)하지 못한 貞節公(정절공)과 泰齋公(태재공)의 影幀(영정)을 位牌(위패)로 바꾸게 되고, 그 후 靖憲公(정헌공)께서 寺刹(사찰) 밖으로 나와 새로 影堂(영당)을 重建(중건)하면서 元孝公(원효공), 肅憲公(숙헌공), 樂山齋公(요산재공) 兄弟(형제)분과, 樵隱公(초은공)의 位牌(위패)를 추가로 奉安(봉안)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