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님 달님 전래동화
옛날에 떡장사하는 어머니와 오누이가 살았습니다. 어머니가 떡을 머리에 이고 장사를 나갔다가 호랑이를 만났습니다. 호랑이는 떡을 주면 안잡아먹겠다고 하고는 떡을 받아먹고 어머니도 잡아 먹었습니다. 어머니를 기다리던 오누이는 밖에 ‘엄마가 왔다’ 하는 소리에 가만히 보니 엄마 목소리가 아니였습니다. 그래서 보니 호랑이가 엄마옷을 입고 떡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나타나 문을 열어달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누이는 뒷 창문을 열고 우물가에 있는 큰 나무위로 올라갔습니다. 호랑이가 방문을 열고 보니 오누이가 도망간 것을 알고 뒤쪽으로 가니 우물물에 오누이 그림자가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나뭇잎 하나가 떨어져 우물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호랑이는 위를 보니 오누이가 나뭇가지 위에 있는 것을 보고 나무에 올라가려고 애를 씁니다. ‘ 발에 참기름을 바르고 오르면 된다’ 는 오누이 말을 듣고 발에 참기름을 바르니 더 미끄러운 것이었습니다. 이번에는 ‘도끼로 나무를 찍으며 오르면 된다’는 동생이 실수로 알려주는 바람에 호랑이가 도끼를 가져와 찍으며 올라오는 것이었습니다. 오누이는 ‘하느님, 지금 호랑이가 우리를 잡아먹으려 올라오고 있습니다. 동아줄을 내려 주세요’ 기도를 들으신 하느님이 동아줄을 내려 주었습니다. 그래서 하늘로 올라가는 오누이를 본 호랑이도 기도를 합니다. ‘하느님, 저 오누이를 잡아먹게 동아줄을 내려주세요’ 그런데 썩은 동아줄이 내려왔습니다. 호랑이는 그 동아줄을 타고 오르다가 줄이 끊어져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오누이는 하늘에 올라가 동생은 힘이 좋으니 해님이 되고, 누나는 달님이 되었답니다.
일용할 양식
세상에서 주는 음식과 성령으로 이 모두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으로 어느 것이 더 나은 것이요 어느 것이 더 못한 것이 없습니다. 누가복음 11장5-13절에 보면 빵 세 개를 꾸어달라고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삼이라는 숫자와 ‘구하라, 찾아라, 두드려라’ 라고 세 말씀을 하십니다. 다시 한 번 생선대신 뱀, 달걀 대신 전갈 그리고 구하라 성령을 주신다는 부분에서 삼의 숫자의미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창조절
절기를 맞이하여 환경을 보존하자는 이야기는 창조세계를 지키자는 이야기로 하나님이 세우신 세상을 말하며 즉 자연을 보존하자는 이야기로 귀결됩니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주인이란 존재가 있다고 말하지 않고 있다는 점으로 세상이 망가지고 멸망한다는 얘기는 본래 주인이신 하나님에 창조물을 이야기 할 때 맞지 않는 것처럼 들립니다. 즉 망가지기는 하지만, 망하는 것은 아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주님이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믿음으로 지킵니다.
성도라면 언어에 조심을 해야 합니다. 말에는 내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오늘에 말씀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님이 자신의 창조세계를 관리하도록 세우신 청지기입니다. 그러므로 청지기는 자신의 의지를 따라 자신이 맡은 것들을 운용할 수 있지요. 물론 위탁관리인인 청지기는 관리를 맡긴 원 소유주와 긴밀한 의사소통을 통해서 모든 관리가 진행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여기에서 소유주의 동의 없이 진행된 일이 손해를 끼쳤다면 이에 따른 책임을 져야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항상 소유주이신 주님과의 긴밀한 인격적 교제안에서 창조세계가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관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 소유주이신 주님은 절대 손해보시지 않는분이십니다. 주님은 창조물인 사람이 다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자신과 모든 사람 그리고 온 창조세계에 유익이 되는 일을 행하십니다. 주님은 자신과 참된 교제를 나누는 백성이 일하는 결과가 모두에게 복된 결과를 맺게 하듯이 자기 백성도 동일하게 돌보십니다. 이는 어떤 경우라도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이 자신을 비롯한 모든 그분의 백성을 돌보신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설사 하나님의 돌보심이 사람이 생각하고 기대했던 바와 다르다 할지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책임져야겠다는 생각으로 주님외에 모든 것에 생기(생령)를 쓰지 말하고 하십니다.
세 번째 예수님은 자기 백성이 의심하지 않고 자신이 그들을 돌본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성령님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성령을 주시는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는 성령님의 충만함을 먼저 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충만함 속에서 하나님 백성은 자기를 돌보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일하심을 충만히 느끼며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충만은 나와 나의 이웃과 창조세계를 위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