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宋子大全卷一百八十九 / 墓表 / 大司成尹先生墓表
尹倬 | 1472 | 1534 | 坡平 | 彥明 | 平窩 |
尹八松煌諸子嘗以其先祖國子公墓表見屬。余未暇作。其後書六七至。未嘗不以爲言曰。本朝文治莫盛於己卯。上則搢紳以堯舜君民爲任。下則章甫之士以講服程朱爲務。于斯時也。簡於搢紳之中而爲之章甫之師。不問可知其人也。俄而蔑貞禍作。衆賢魚肉。先祖亦以廢斥。久後只敍京兆以沒。吾後昆等竊念東漢之末。大學諸生三萬餘人。郭有道爲之冠。而仙舟之載。亦非他人。然有道終不與李杜騈首於碪鐵。旣無求免之心。則奚必以得免者爲可少哉。惜其微言格論不少槩見。豈淫禍之餘。爲衆所諱。而深夜發篋。獨少劉草堂哉。然有其實者殾必報。圭庵宋先生實爲其徒。而蔚然爲乙巳領袖。李文純先生尋其緖論以語學者。而李文成先生尙論當時。必以歸功。是可謂志之不倦者矣。如以爲匪人之世。秩祿猶存云爾。則仕於京,檜之時。而龜山,文定顧不得爲儒賢哉。況京兆之劣容。孰與西掖祕府之顯榮乎。跡其事。其金慕齋,李陰崖之儔匹。而不得並享其崇報者獨何歟。不佞謹拱而復曰。子之言宜也。且皆可徵而不誣矣。所可恨者。以文純之縝密。親承旨訣。而所論格致之說。是大學第一義。而未能詳盡於答問之際。使後人者未能卒開其關鍵。豈非斯文之所恨哉。然竊尋其語脈。則似得夫晦翁之遺旨。而文成之論默與之契焉。豈公獨詣之見歟。抑或有師承者歟。間嘗惟念圭庵之所成就如此。則公之所以爲師者可見矣。豈公以直道敎人。而自爲則少貶乎。李文純旣以尹先生公誦於前。而李文成以趙文正並美於後。則其推許之隆。又可見矣。猶曰莫爲之後則未也。此數者足以爲公之重矣。何必多乎哉。又按公家乘。公十六而孤。能自得師。束脩於朱溪君深源之門。精通經術。篤志力行。旣成進士。缺 必居上游。登第未久。編配朔寧。中廟反正。首專師席。自直講以至大司成。凡十數年不離太學。雖他遷。諸生踵門帖帖而請益。公亦以爲己任。不少倦也。其啓發奬進之效。蓋不可周知矣。雖謂之到今而受賜。非過言也。藐余末學。無所知識。第以圭庵之從孫。獲聞其緖餘。而又嘗講論乎二李先生之書矣。敢述其議論之末。略敍公始終而俾鐫諸表陰。後之人將以文純之所稱稱之曰。大司成尹先生墓其可矣。時崇禎壬寅八月日。
.......................
宋子大全卷一百五十四 / 碑 / 大司成尹先生神道碑銘 幷序
余嘗爲大司成尹先生述其墓表矣。其諸裔又將伐大石。備載事蹟。以揭于阡道。
謹按先生諱倬。字彥明。坡平人。上十四世祖瓘。有大名。今名公鉅人。多其子孫。高祖坤。以翊戴功開封號。諡昭靖。曾祖希齊。行檢校參議。贈贊成。祖培。掌令。橫罹淫禍。事見家乘。考師殷。官縣監。妣雲峯朴氏。府院君從愚女。先生以成化壬辰生。始從朱溪君深源學。朱溪以宗室子。實倡性理之學。弘治辛酉。先生年三十。擢第隷成均。燕山甲子。編配朔寧。中廟卽位。起廢由直講。歷司藝,司成。以至大司成,同知成均館事。其他遷之可考者。惟弘文校理,禮曹正郞而已。其餘皆在成均。蓋是時。靜菴諸先生皆萃於朝。倡明道學。期以堯舜君民。而庠序諸生。亦皆薄藻繪陋章句。講說周,孔,程,朱。故諸老先生。皆撤皐比。以推先生。先生亦自喜。諄諄不倦。雖退食之暇。挾冊詣門者連武焉。如宋文忠公麟壽,李文純公滉。皆承講授。又如洪相國暹,元判書混。皆屛爵位。終執席間之禮甚謹焉。其後文純公每以所聞於先生者。擧似學者。必稱尹先生。而其所誦大學格致之說者。似不失乎晦翁之遺指矣。己卯七月。上遣承旨韓忠。分御廚往成均。餉其師生。翌日。皆詣闕箋謝。上御正殿引見。先生同靜菴及金大成湜登對。又引諸生講書於前。九月。上謁文廟訖。御明倫堂。諸賢被對。與諸生講論尙書,周易等書。一時傳爲盛事。其十一月。衮,貞等以陰謀起士禍。先生別職當議讞。卽謝不出。群小益不悅先生。坐廢退斥。久之。僅敍漢城左尹。已而出爲松京留守而卒。實甲午十一月廿八日也。明年二月廿五日。葬長湍府東基谷里午向之原。先生前娶縣令韓士信女。生先智。兵馬使。再娶大司憲李陌女。生先哲。副正。其季先正。女壻許鑄,許明。皆蔭仕。其後雲耳益蕃以昌。至今五六世。殆數百人。其顯者。孫暻僉知。暒承旨。俱歷淸選。玄孫煌大司諫。名行著稱。烇弼善。臨亂效節。二房子姓。皆力學修行。模範一世。其外出。如監司洪命耇。奮義死難。判書洪命夏。爲世名臣。皆本於先生。其餘別見下方。嗚呼。我東肇自檀箕上下數千年間。惟本朝之治。最號文明。而論其尤盛。則又莫如己卯之世。擬之則周公制禮之後宋之元淳之間乎。當此時。久處師儒之職。以專作新之任。則其學術之正。譽望之隆。不待言而可知也。其門下諸賢。又蔚然以賁明宣之際。則其功亦可謂盛矣。今大學庭中。有先生手植文杏數株。先生每以語學者曰。根深者末必茂。故其學於先生者。皆敦本實恥夸毗。久而無弊。能有其傳。蓋爲已下學之功。爲學者之先務。此其徵也歟。近世李文成公珥。最於此學。擇而精語而詳。而亟稱於先生。必以靜菴竝美。後之學者。以是爲正。則其於尙論也。庶乎其得之矣。銘曰。
詩歌棫樸。作人之德。在中宗世。誰任其職。有美先生。學有本末。王曰汝賢。宜承宜弼。姑長我學。以敎以育。士曰吾王。爲我擇師。棄爾談戲。捨爾文詞。進退函丈。爾質爾疑。公在于泮。多士式訛。於樂泮宮。載絃載歌。如古皐契。贊襄咸皆。夔在虞庠。栗溫是諧。濟濟彬彬。庶躋以寧。讒人罔極。卒壞于成。雖則壞之。令聞不已。宏儒髦士。聿追遺指。亦有聞孫。其德克似。其德維何。忠信文行。惟爾有孫。敬彼壇杏。
[주-D001] 明 : 一本明下有號平窩三字[주-D002] 由 : 一本由下有成均二子[주-D003] 子 : 字
....................
죽석관유집 제3책 / 묘지(墓誌)
판돈녕부사 겸 이조판서 윤공 묘갈명〔判敦寧府事兼吏曹判書尹公墓碣銘〕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우리나라의 대성(大姓)으로 고려의 태사 휘 신달(莘達)이 시조이다. 문숙공(文肅公) 휘 관(瓘)은 동북면의 9성을 개척한 예종(睿宗) 때의 명신이다. 본조(本朝)에서는 파평군(坡平君) 휘 곤(坤)이 우리 태종(太宗)을 보좌해서 공신이 되었다.
4대 아래 휘 탁(倬)은 대사성(大司成)으로 경술(經術)에 달통하여 사도(師道)를 담당했다. 또 4대 아래 한성부 서윤(漢城府庶尹) 휘 흡(熻)은 팔송(八松) 선생의 아우이다. 팔송 선생은 이미 준절(峻節)한 순유(醇儒)로 온 나라에 명성이 높았다. 형제 또한 모두 어질어 선조의 덕을 이어 후손들의 앞길을 열어 주니, 근원이 풍성하여 하류가 넉넉한 것이었다. 근세에 이르러서는 고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휘 동섬(東暹)이 같은 항렬에 인물이 많다고 알려졌는데, 휘 동수(東洙)와 휘 동원(東源)이 학행(學行)을 그 집안에 대대로 전했고, 휘 동도(東度)는 영의정이 되어 밝은 정치를 보좌했고, 휘 동승(東昇)은 참판을 지냈는데 영조(英祖)께서 양신(良臣)이라고 자주 칭찬하셨다.
공은 서윤공(庶尹公)의 4대손으로 참판공(參判公)은 공에게 막내이다. 여러 공들이 단문(袒免)의 친척으로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현달하여 명성이 알려졌으니, 일대(一代)의 성사(盛事)였다. 공의 자는 덕승(德升)이고, 호는 팔무당(八無堂)이다. 증조 휘 해거(海擧)는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조부 휘 부(扶)는 호조 정랑이었고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아버지 휘 언교(彦敎)는 생원으로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어머니 신창 맹씨(新昌孟氏)는 전부(典簿) 휘 숙하(淑夏)의 따님이다. 공은 4살 때 할아버지 판서공의 명으로 백부의 후사가 되었다. 백부는 생원으로 좌찬성(左贊成)에 증직된 휘 현교(顯敎)이고, 그 부인 경주 이씨(慶州李氏)는 교리 휘 인소(寅熽)의 따님이자 좌의정 휘 경억(慶億)의 손녀이다.
공은 숙종 경인년(1710, 숙종36) 2월 15일에 온양(溫陽) 금곡리(金谷里) 맹씨댁에서 태어났다. 공은 어릴 때 부친을 여의어 할아버지 판서공이 가엽게 여겨 공부하라고 다그치지는 않았으나 학업이 날로 진보하여 벗들 사이에 명성이 자자하였다. 을묘년(1735, 영조11)에 생원ㆍ진사 두 시험에 다 합격하였다. 공은 스스로 문호(門戶)가 쇠약해졌다고 생각하고 뜻을 가다듬고 과거 공부에 힘썼는데, 당시 교유하던 사람들이 나중에는 대부분 명공대인(名公大人)이 되었다.
갑자년(1744, 영조20)에 명릉 참봉(明陵參奉)에 제수되었는데, 마침 능역(陵役)이 있어 그 공로로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로 승진하였다. 의금부 도사, 호조 좌랑을 거쳐 금구 현령(金溝縣令)으로 나갔다. 갑술년(1754)에 증광시에 갑과로 급제하여 정3품 하계(下階) 통훈대부(通訓大夫)가 되었다가 정3품 상계(上階)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올라서 중추부(中樞府)를 거쳐 평산 부사(平山府使)로 나갔다.
을해년(1755) 판결사(判決事)와 승지(承旨)에 제수되었다가 대사간(大司諫)으로 옮겨서 국문(鞫問)하는 자리에 참여하였다. 죄수 중 박문수(朴文秀) 공을 무고(誣告)한 자가 있었는데, 주상께서 처음에는 불문에 부치셨다. 승지가, 양사(兩司)가 박문수를 붙잡아 오기를 마땅히 말씀드렸어야 하는데 말씀드리지 않았다는 명목으로 공을 꾸짖어 문책하기를 청하자 공이 인혐(引嫌)하여 체차되었다. 얼마 안 되어 예조 참의에 제수되었는데, 그때 마침 인빈(仁嬪)의 부모 묘소에 치제(致祭)하라는 명이 있었다. 어떤 이가 전모(前母)에게도 함께 치제해야 한다고 했는데, 공이 “은(殷)나라 사람은 간적(簡狄)에게 제사 지내고, 주(周)나라 사람은 강원(姜嫄)에게 제사 지내니 각각 자신이 나온 곳〔其自出〕을 주로 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사를 올리는 취지는 인빈을 낳은 것〔其所生〕을 기리는 것이니 함께 제를 올리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라고 하니 주상이 이를 따르셨다. 사당에 신주를 합설할 때 이르러서는 계실(繼室)이 전배(前配)보다 위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중간에 여주 목사(驪州牧使)로 나갔다.
공이 승정원에 있으면서 왕명을 출납한 것이 누차 주상의 뜻에 부합하였다. 주상께서 공이 주도면밀하여 곁에 둘 만함을 알아보신 까닭에 공이 조정에 있을 때에는 승지로 일한 적이 가장 많았다. 국제(國制)에 승지는 6방(房)이 있어 6관(官)의 일을 분장하게 되어 있는데, 주상께서 공이 예에 밝다고 하여 항상 예방(禮房)을 시키셨다.
정축년(1757, 영조33)에 주상께서 명릉(明陵) 제문에 친압(親押)하려 하였는데, 그때 주상은 태모(太母 인원왕후)의 상중이었다. 공이 나아가 “친압은 제사의 일인데, 최복(衰服)을 입고 행함은 옳지 않은 듯합니다.”라고 하자, 주상께서 “나도 본래 의심스러웠는데, 승지가 이렇게 말한 것이 옳다.”라고 하시고 옷을 갈아입고 예를 행하시고는 특별히 녹비(鹿皮)를 하사하셨다. 주상께서 일찍이 하교하기를 “무릇 친제(親祭)에는 이조 판서가 찬작(瓚爵)을 올리면 이조 참의가 이를 받아 올리는데, 신 앞에서 전을 올리는 자의 품계가 오히려 낮으니 마땅히 그 질차(秩次)를 바꿔야 한다.”라고 하셨다. 공이 “‘올린다’고 하는 것 또한 신위(神位)를 위주로 하여 말하는 것이지 헌관인 참의에게 올린다는 말이 아닙니다.”라고 상주하였다. 주상께서 옳다 하시고 고치지 않았다.
신사년(1761) 여름, 주상께서 조정에 나오지 않고 정양하고 계실 때 특별히 명을 내려 공에게 내의원 부제조(內醫院副提調)를 겸하게 하셨다가 다시 조정에 복귀하셔서는 그간의 노고를 인정하여 공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시켰다. 공이 입시하니 주상께서 공을 맞아 웃으며 “아침에는 옥이고 저녁에는 금이니, 금옥처럼 훌륭한 사람이로세.”라고 하셨다. 이때부터 13차례나 도승지를 배수하였고 부총관(副摠管)과 승문원 제조(承文院提調)를 겸하였다.
겨울에 충청 감사(忠淸監司)를 배수하였다. 호서 지역에는 본래 토호가 많았는데, 공이 똑같이 법으로 다스려 조금도 관용을 베풀지 않으니 도내의 모든 사람들이 잘 다스린다고 칭송하였다. 이듬해 여름, 작은 일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는데, 후임자가 마침 병에 걸려 길을 떠날 수 없었고 당시 큰 가뭄이 들어 대신들이 공의 유임을 청하였다. 처음에 호서 백성들은 공이 파직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기우제 지낼 필요 없다. 단지 우리 순찰사님을 유임시키면 된다.”라고 하였는데, 공이 유임되자 크게 기뻐하였다. 공이 다시 사직 상소를 올렸으나 비답이 없었다.
7월에 정언(正言) 유선양(柳善養)이 계사(啓辭)를 올려 공이 죄인 엄홍복(嚴弘福)을 위하여 양식을 대 주고 집을 사 주었다고 파직을 청하였다. 주상께서는 “내가 그 사람을 안다. 결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대간의 계사가 있으니 공무를 볼 수는 없다.”라고 하고 결국 계사대로 처리하라고 하시고는 엄교(嚴敎)를 내려 유선양을 체직시켰다. 홍복이란 자는 그 집이 공이 다스리는 지역에 있어 일찍이 성이 다른 먼 친척이라고 공을 찾아와 단지 만나 봤을 뿐이었다. 공이 이미 서용(敍用)된 후에 상소하여 사정을 밝히니 주상께서 잘 알았다는 비답을 내리시고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使)를 제수하셨다. 공이 장차 돌아가려 할 때 수천 명의 백성들이 에워싸고 절을 하며 울면서 “공께서 우리를 버리고 돌아가시니, 우리는 죽어 구렁텅이에 버려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해 가을 큰 흉년이 들자 대신들이 공을 호서 안집사(湖西安集使)로 천거하였다. 벽지까지 순행(巡行)하면서 주상의 은덕을 베풀려는 마음을 널리 알리니 흩어졌던 백성들이 모여들었다. 조정에 돌아와 대동미 걷는 기한을 늦추고 올해 환향(還餉)을 그만두게 하기를 청하였다. 또 도내의 환곡 비축분이 적어 환곡의 수요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데 만약 이것을 가져다가 진휼하는 자금으로 삼는다면 농민들이 반드시 곤궁해질 것이니 다른 도의 곡식을 옮겨 진휼함이 마땅하다고 말했다. 재상들이 대동미를 걷는 데에는 기한이 정해져 있어 이를 늦추면 국가 재정에 문제가 생긴다고 하자, 공은 이에 문제를 제기하며 “지금 비록 피부를 벗기고 골수를 뽑더라도 민력(民力)을 감안하면 반드시 낼 수 없을 것이니 괜히 혼란만 가중시킬 따름이다. 어찌 그 기한을 늦추어 은덕을 베푸는 것만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대사헌(大司憲),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병조 참판(兵曹參判)을 역임했다.
을유년(1765, 영조41)에 주상께서 육상궁(毓祥宮)에 제사를 지내고 재신(宰臣)들의 부모에게 쌀과 고기를 내리셨다. 공의 어머니인 맹 부인(孟夫人)이 여든 살인지라 잔치를 열어 헌수(獻壽)하게 하고 아울러 여러 신하들에게 하사품을 내리시니, 공이 전(箋)을 올려 사은(謝恩)하였다. 주상께서 공의 어머니의 기거가 어떤지 자주 물으시니 당시 사람들이 모두 영광스러운 일이라 했다. 그때 왕세손에게 병이 있어 도승지로서 내의원을 겸하여 맡았다. 주상께서 공에게 승정원에서 숙직하라고 명을 내리셨는데 오래 지나서야 왕세손의 병이 나았다.
그다음 해에 논상(論賞)하여 가의대부(嘉義大夫)로 품계를 올려 주었고, 예조 참판,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를 연이어 제수하였다. 정해년(1767, 영조43) 맹 부인이 돌아가시자 동생인 참판공과 함께 3년간 시묘살이하면서 매일 묘소에 곡하며 비바람이 불어도 그치는 법이 없었다.
경인년(1770) 이조 참판에 특별히 제수되었는데, 공은 중비(中批)라서 나아가기 어렵다 사양하다 세 번 제수되고서야 배수했다. 형조 참판, 조지서 제조(造紙署提調)를 역임하였다.
신묘년(1771)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에 제수되었다. 5월에 잘못된 왕실의 계보를 바로잡는 일로 진주 부사(陳奏副使)에 차견(差遣)되어 호조 참판을 배수하고, 명을 받은 지 7일 만에 길을 떠났다. 주상이 직접 거둥하셔서 사신을 서교(西郊)에서 전송하시며 어서(御書)와 납약(臘藥)을 하사하시고, 아들 하나를 관리로 등용하셨다. 7월에 대릉하(大凌河)에 이르러 병이 나서 위독해져서 상사(上使)와 서장관(書狀官)에게 먼저 가라고 권하니 모두 손을 잡고 차마 이별하지 못했으나 공은 태연할 뿐이었다. 병에 차도가 있어 밤을 도와 급히 달려가려 하자 아랫사람들이 말고삐를 잡고 말렸는데 공은 듣지 않았다. 겨울에 일을 마치고 돌아와 자헌대부(資憲大夫)로 품계가 올라가고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에 제수되었다. 얼마 뒤 이조 판서에 특별히 제수되었으나 힘써 사직하여 체차되었고, 곧바로 병조 판서로 옮겨 비변사(備邊司)ㆍ선공감(繕工監)ㆍ종부시(宗簿寺)의 제조(提調)를 겸하였다. 정사를 행하면서 묻혀 있던 인재를 발탁하고 요행으로 승진하려는 자를 억눌러 모두가 공평하다고 칭찬하였다.
임진년(1772, 영조48)에 평안 감사(平安監司)로 나갔는데, 아우인 참판공이 절사(節使)로 패강(浿江 대동강)을 지나가게 되었다. 공이 매우 기뻐하며 같이 시를 지어 벽에 새겼는데, 보는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했다. 이듬해 참판공이 연경(燕京)에서 돌아왔는데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나니, 주상께서 애도하며 특별히 공을 체차시켜 돌아갈 수 있게 해 주셨다. 이때부터 공도 늙은지라 서호(西湖 서강) 가에 집을 짓고 공무를 벗을 때마다 곧바로 나귀를 타고 거기로 갔고, 이로써 만년의 계획을 삼았다.
병신년(1776, 정조 즉위년)에 영조께서 승하하시자 국장도감 제조(國葬都監提調)에 차견되었다가 산릉도감제조 겸 동영우원비각(山陵都監提調兼蕫永祐園碑閣)으로 옮겼고, 그곳에서의 공로로 정헌대부(正憲大夫)로 품계가 올라갔다. 기해년(1779)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고, 계묘년(1783)에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정미년(1787)에 숭록대부(崇祿大夫)로 품계가 올라갔다. 기유년(1789)에 팔순이 되어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가 되었다. 자주 벼슬을 옮기고 승진하여 의정부의 좌우참찬(左右參贊), 예조ㆍ형조ㆍ공조의 판서,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판돈녕부사 겸 판의금부사(判敦寧府事兼判義禁府事), 지경연사(知經筵事),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도총관(都摠管), 사복시(司僕寺)ㆍ상의원(尙衣院)ㆍ관상감(觀象監)ㆍ전설사(典設司)ㆍ평시서(平市署)ㆍ장원서(掌苑署)ㆍ종묘서(宗廟署)의 제조(提調) 등이 되었는데 한 관직에 오래 머문 적이 없었다.
임자년(1792) 4월 5일 정침(正寢)에서 고종(考終)했으니 향년 83세이다. 조문과 치제(致祭)를 규례에 따라 내렸다. 처음에는 고양(高陽) 화전리(花田里)에 안장했다가 갑인년(1794)에 용인(龍仁) 우산(愚山) 간좌(艮坐) 언덕으로 이장(移葬)하고 두 부인을 부장(祔葬)하였다.
공은 천성이 자애롭고 성실하며 인품이 조용하고 담백했다. 행동거지에 법도가 있었고 용모는 보통 사람에 지나지 않았으나 빼어난 재주를 안에 품고 있었다. 일을 할 때는 묵묵히 계책을 세우며 모든 일에 정신을 집중하였다. 하루 종일 단정히 앉아 말을 급하게 하거나 갑자기 화를 내는 일이 없었으며, 상서롭고 온화한 기운이 돌아 따스하여 친근할 만하였다. 어머니를 모시면서 효성스럽다고 칭찬이 자자하였다.
영조께서 일찍이 측근 신하들에게 “윤 아무개는 조용하고 차분하니 반드시 어버이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동생 참판공과 우애가 돈독하여 날마다 만나고 그가 세상을 떠나자 조카를 아들처럼 대하였다. 이 마음을 친척에게 미루니 촌수가 먼 형제들이 모두 공에게 의지하였다.
예학(禮學)에 밝아 의심스러운 예문(禮文)이나 변례(變禮)에 대해 두루 연구하면서 상례(喪禮)와 제례(祭禮)에 대해 예설을 고증하여 편수하되, 반드시 고례(古禮)에 근본을 두고 시의에 맞게 하여 《이례홀기(二禮笏記)》라는 제목으로 책을 썼다. 자신을 수양하고 집안에서 실천하며 임금에게 지우(知遇)를 입어 보필하며 국사를 논의하는 것이 모두 예교를 벗어나지 않았다. 신라와 고려 이래 서예로 이름난 사람들은 팔분체(八分體)를 잘 쓰지 못했는데 공이 비로소 한(漢)나라와 위(魏)나라 비석들의 탁본을 얻어 열심히 공부하고 익혀 그 신묘한 경지에 나아가 단아하면서 힘차고 아름다운 글씨를 써서 일가를 이루었다. 세상에서 팔분체를 쓰는 자들은 모두 공의 글씨를 모범으로 삼는다. 전서와 예서를 잘 쓴다고 자부하던 중국 사람이 공의 글씨를 보고 크게 칭찬하면서 한나라 비석의 탁본을 바치며 성의를 표시했다. 공적으로 사적으로 금석문을 많이 썼는데, 그 일부라도 얻은 사람들은 잘 보관하며 보물로 여겼다.
관료 생활을 한 지 50년 동안 두 임금을 모시면서 조금도 오점이 없었으며, 오랜 세월 살면서 여러 변고를 겪으면서도 공을 지목하여 죄를 주지 못했으니 마침내 당대의 완인(完人)이었다. 정조 신해년(1791, 정조15) 어용도(御容圖)가 완성되자 공이 어명을 받아 표제(標題)를 썼다. 주상께서 서향각(書香閣)으로 거둥하시고 시신(侍臣)들은 전(殿) 위에, 입첨(入瞻)하는 경대부(卿大夫)들은 뜨락에 있었다. 당시 공은 82세였는데 얼굴에 화기가 가득하며 눈이 빛났고 차분히 걸어 나아가 붓을 움직여 글씨를 썼다. 글씨가 완성되고 자리로 돌아가니, 주상께서 이를 보고 말씀하기를 “이 중신(重臣)은 매우 차분하고 고요하다. 고요한 사람이 장수한다더니 정녕 그렇구나.”라고 하셨다. 이때 본 사람들은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조윤형(曺允亨) 공 또한 글씨 잘 쓴다고 하여 일을 맡아 그 자리에 있다가 탄식하기를 “나는 이렇게 쓸 수 없다.”라고 하였다.
전배(前配) 풍산 홍씨(豐山洪氏)는 첨정(僉正) 중범(重範)의 따님이고 영안위(永安尉) 주원(柱元)의 증손이다. 계비(繼配)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통덕랑(通德郞) 정환(廷煥)의 따님이고 선묘(宣廟)의 별자(別子)인 경창군(慶昌君) 주(珘)의 5대손이다. 두 부인 모두 부덕(婦德)이 있었는데, 전배는 자식이 없고 이 부인(李夫人)은 4남 1녀를 두었다. 광부(光孚)는 군수(郡守)이고, 광온(光溫)과 광렴(光廉)은 모두 진사인데 일찍 죽었으며, 광렴은 다른 곳의 양자가 되었다. 광수(光垂)는 목사(牧使)이고, 딸은 한충유(韓忠裕)에게 시집갔다. 측실의 아들로 광민(光珉), 광감(光瑊)이 있고, 딸은 정언유(鄭彦裕)에게 시집갔다. 선규(善圭)와 서유돈(徐有敦)의 처, 임영철(林穎喆)의 처는 광부의 자식들이다. 조운로(趙雲路)ㆍ이로(李潞)ㆍ홍수경(洪秀儆)의 처는 광온의 자식이다. 정언(正言) 명규(命圭)는 광렴의 자식이고, 후규(厚圭)와 정기식(鄭基植)의 처, 정문승(鄭文升)의 처는 광수의 자식이다. 내외 증손 약간 명이 있다.
나는 공의 집안과 세교가 있는 집의 후배로 항상 공을 배알하고 공의 덕 있는 풍모를 뵈었다. 이제 아들 군수공이 행장을 주며 명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니 의리상 사양할 수 없어 행장에 근거하여 그중 큰일들을 중심으로 서술한다.
이어서 명을 붙인다.
윤씨 가문은 고려 때부터 현달하여 / 尹顯自麗
태사가 임금을 보좌했네 / 太師佐王
윤관은 삭주에서 위세를 떨쳐 / 瓘威于朔
이에 강토를 넓혔네 / 爰啓昄章
윤탁은 사도를 높이 세우니 / 倬抗師道
그 후손이 널리 번창하였네 / 厥後彌昌
모두 큰 가문이 되니 / 咸爲大家
종족이 번열하게 여러 갈래로 번성하였네 / 族羅條芳
번성한 공의 보계(譜系)는 / 蕃蕃公系
조상이 쌓은 선이 늦게 발복하였네 / 善積遲慶
공은 분발하여 스스로 노력하여 / 公奮自躬
훨훨 날갯짓하여 높이 날았네 / 矯矯厥翔
전형(銓衡)을 잡았고 번방(藩邦)을 지켰으며 / 持銓殿邦
내외직을 드나들며 요직을 두루 거쳤네 / 出入踐揚
승정원에서 왕명을 마땅하게 처리하여 / 喉舌惟允
임금의 병풍과 정간(楨幹) 역할을 잘하였네 / 屛翰惟良
신명이 안에 쌓여 있으니 / 神明內蘊
온화한 기운이 가득하였네 / 藹然和祥
그 기운을 발휘하여 정사에 베푸니 / 發爲施措
간략하고 마땅하지 않음이 없었네 / 靡不簡當
두 임금께서 칭찬을 하시니 / 二聖有褒
한 분은 고요하다, 한 분은 차분하다 하시네 / 曰靜曰詳
세상에는 이미 당파가 생겨 / 世之旣歧
매미 울 듯 시끄러운데 / 㘖㘖沸螗
공은 다투지 않으니 / 公自無競
아무도 비방하고 해치지 않네 / 人莫訾傷
평소에 강호에 뜻을 두었으니 / 雅志江湖
관직과 작록을 초탈하였네 / 外物軒裳
예는 본래 의절(儀節)이 많아 / 禮故多儀
저서가 매우 방대한데 / 紛羅囊箱
여러 견해를 절충하여 / 折衷群言
조정에서 임금의 하교에 답하였네 / 唯諾蕭堂
팔분체에 뛰어나 / 妙擅分隷
한중랑을 따라잡았네 / 追漢中郞
문자학에 방통하여 / 旁通小學
《급취》와 《범장》에 밝았네 / 急就凡將
위태로운 벼슬길에서 이름을 온전히 지켰고 / 名完畏道
조정에서 품계가 높았네 / 秩崇朝行
백발노인이 되어서까지 / 番番黃髮
복을 무궁히 받았네 / 受福無疆
우뚝한 저 무덤이 / 桓楹有崇
우산에 있네 / 愚山之岡
내 명이 어둡지 않으니 / 我銘不昧
비석에 새겨 멀리 후대까지 전하노라 / 刻示茫茫
[주-D001] 탁(倬) : 윤탁(尹倬, 1472~1534)으로, 자는 언명(彦明), 호는 평와(平窩)이다. 검교참의(檢校參議) 윤희제(尹希齊)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장령(掌令) 윤배(尹培)이고, 아버지는 현감 윤사은(尹師殷)이다. 어머니는 운봉 박씨(雲峯朴氏)로, 박종우(朴從遇)의 딸이다.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이자 종실(宗室) 이심원(李深源)에게 수학하였다. 1501년(연산군7)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사관(史官)을 거쳐 전적이 되었으나, 1504년 갑자사화 때 삭녕에 유배되었다. 1506년(중종1) 중종반정으로 다시 등용되어 사성, 대사성,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를 역임하였으나 1519년 기묘사화로 다시 파직되었다. 1525년 다시 등용되어 대사성, 동지성균관사 등을 역임하였다. 학문이 높아 조광조(趙光祖) 등 여러 대신들에게 도학(道學)을 가르쳤고 송인수(宋麟壽), 이황(李滉) 등이 그의 강수(講授)를 받았다.[주-D002] 팔송(八松) 선생 : 윤황(尹煌, 1571~1639)으로, 자는 덕요(德耀), 호는 팔송이다. 충청도 병마절도사 윤선지(尹先智)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돈(尹暾)이고, 아버지는 윤창세(尹昌世)이다. 저서로는 《팔송봉사(八松封事)》가 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주-D003] 형제 : 윤황의 형은 윤수(尹燧), 동생은 윤전(尹烇)ㆍ윤흡(尹熻)ㆍ윤희(尹熺)이다. 특히 윤전은 윤황과 함께 병자호란 당시 척화의 의리를 강하게 주장하였다.[주-D004] 동섬(東暹) : 윤동섬(尹東暹, 1710~1795)으로, 묘갈명의 주인공이다.[주-D005] 동수(東洙) : 윤동수(尹東洙, 1674~1739)로, 자는 사달(士達)ㆍ대원(大源), 호는 경암(敬庵)이다. 윤선거(尹宣擧)의 증손이고 윤증(尹拯)의 손자이며 윤자교(尹自敎)의 아들이다. 과거 시험을 포기하고 성리학 공부에 전념했는데, 우의정 최석정(崔錫鼎)의 추천으로 벼슬길에 나아갔다. 학문에 뛰어나 영조가 두 번이나 별유(別諭)로 소명(召命)하여 《주역(周易)》과 《성학집요(聖學輯要)》를 강의시킨 일이 있다. 저서로는 《경암선생유고》가 있다.[주-D006] 동원(東源) : 윤동원(尹東源, 1685~1741)으로, 자는 사정(士正), 호는 일암(一庵)이다. 윤선거(尹宣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증(尹拯)이고, 아버지는 대사헌 윤행교(尹行敎)이다. 1712년(숙종38) 윤선거의 《노서유고(魯西遺稿)》를 교정하여 간행하였고, 1731년(영조7) 윤증의 《명재유고(明齋遺稿)》를 편찬, 간행하였다. 1722년(경종2)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관료 생활을 하였다. 저서로 《일암유고》 6권이 있다.[주-D007] 동도(東度) : 윤동도(尹東度, 1707~1768)로, 자는 경중(敬仲), 호는 남애(南厓)ㆍ유당(柳塘)이다. 장령 윤순거(尹舜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진(尹搢), 아버지는 판서 윤혜교(尹惠敎)이다. 1745년(영조21) 정시 문과에 급제한 후 관료의 길을 걸어 1764년에 좌의정, 1766년에 영의정이 되었다. 시호는 정문(靖文)이다.[주-D008] 동승(東昇) : 윤동승(尹東昇, 1718~1773)으로, 초명은 동성(東星), 자는 유문(幼文)이다. 윤해거(尹海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부(尹扶), 아버지는 윤언교(尹彦敎)이다. 1746년(영조22) 진사로 춘당대시에 급제한 후 관료 생활을 하며 도승지, 대사성,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주-D009] 단문(袒免)의 친척 : 단문은 오복(五服) 이외의 먼 친척이 죽었을 때 두루마기의 오른쪽 소매를 벗고 머리에 사각건(四角巾)을 쓰기만 하는 상례를 말한다. 윤동섬과 윤동승은 형제간이고, 이들과 윤동수, 윤동원, 윤동도는 모두 윤창세(尹昌世)를 5대조로 함께 모시는 10촌 간이었다.[주-D010] 국문(鞫問) : 1755년(영조31) 5월에 벌어진 역모 사건과 관련된 국문이다. 이해 2월에 일어난 이른바 나주벽서사건이 일단락된 후 토역경하정시(討逆慶賀庭試)가 열렸는데, 이때 심정연(沈鼎衍)이 답안에 조정을 비방하고 집권파 대신들을 공격하는 내용을 기재하였다가 발각, 체포됨으로써 대규모 반역 모의가 드러났다. 소론의 몰락에 대한 불만을 품고 심정연, 신치운(申致雲) 등이 김일경(金一鏡)의 조카인 김인제(金寅濟), 김유제(金有濟), 김덕제(金德濟) 및 이준(李埈), 강몽협(姜夢協), 박사집(朴師輯), 유수원(柳壽垣) 등과 결탁해 역모했다는 것이다. 소론 측의 연루 사실에 대한 부인에도 불구하고,심정연ㆍ신치운ㆍ유봉성(柳鳳星)ㆍ유수원ㆍ이거원(李巨源)ㆍ박사집등 수십 명이 처형되었고, 이로 인해 소론은 세력을 잃게 되었다.[주-D011] 죄수 …… 체차되었다 : 《영조실록》 31년 5월 27일 기사에 따르면 영조가 친국하는 과정에서 김정관(金正觀)이, 박문수(朴文秀)도 김일경이 역적이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자백하였다. 이에 도승지 정홍순(鄭弘淳)이 대신(臺臣)이 박문수를 붙잡아 오기를 청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승지 남태회(南泰會)는 대신들을 추고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대사간 윤동섬(尹東暹) 등이 피혐하면서 체직을 청하였는데 영조가 윤허했다. 유언민(兪彦民)ㆍ서명응(徐命膺) 등이, 박문수를 체포하고 윤동섬 등을 파직하라고 청하자 이 또한 윤허하였다. 후에 대질심문 끝에 박문수의 결백이 밝혀졌고, 6월 2일에는 윤동섬을 예조 참의로 임명하였다.[주-D012] 그때 …… 있었다 : 1755년(영조31) 6월 23일, 앞서 영조가 격상한 숙빈 최씨와 격을 맞추어 인빈 김씨에게 경혜(敬惠)라는 두 글자 시호를 증시하고, 묘(墓)도 원(園)으로 격상하여 순강원(順康園)으로 올렸으며, 사당 역시 방(房)에서 궁(宮)으로 격상하여 저경궁(儲慶宮)으로 궁호를 올렸는데, 그와 관련된 일이라 추정된다. 숙빈 최씨는 영조의 생모이다. 인빈(仁嬪) 김씨(金氏)(1555~1613)는 선조의 후궁으로, 추존왕 원종의 생모이자 인조의 할머니이기도 하다. 본관은 수원이며,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김한우(金漢佑)의 딸이다. 어머니는 충의위(忠義衛) 이효성(李孝性)의 딸 이씨이다. 김한우의 전배(前配)는 전씨(田氏)이고, 후배(後配)는 인빈의 어머니 이씨이다.[주-D013] 간적(簡狄) : 간적은 유융씨(有娀氏)의 딸로, 제곡(帝嚳)의 차비(次妃)가 되었다. 어느 날 목욕을 갔다가 제비[玄鳥]의 알을 얻어 삼키고는 태기가 있어 은(殷)나라의 시조인 설(契)을 낳았다 한다. 《史記 卷3 殷本紀》[주-D014] 강원(姜嫄) : 강원은 유태씨(有邰氏)의 딸로, 제곡(帝嚳)의 원비(元妃)가 되었다. 들에 나갔다가 거인의 발자국이 있는 것을 보고 그대로 따라갔는데 그 후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가 곧 주(周)나라의 시조인 후직(后稷)이다. 《史記 卷4 周本紀》[주-D015] 명릉(明陵) :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 그리고 제2계비 인원왕후(仁元王后) 김씨(金氏)의 능이다. 1701년(숙종27) 인현왕후가 죽은 뒤에 이곳에 묘지를 정하고 명릉이라 하였고, 1720년 숙종이 죽자 이곳에 나란히 묻었다. 1757년(영조33)에는 인원왕후의 상을 당하여 영조가 친히 행장을 짓고 장례를 치렀다.[주-D016] 친압(親押) : 제향(祭享)이 있을 때 임금이 향실(香室)에 나아가 친히 축문(祝文)에 어휘(御諱)를 써넣는 일을 말한다.[주-D017] 아침에는 …… 금이니 : 윤동섬이 종2품으로 승진함에 따라 아침에는 옥관자를 달고 있다가 저녁에는 금관자를 달고 있음을 두고 한 말이다. 조선 시대에 1품 이상은 조각 없이 질이 좋고 작은 옥관자, 정2품은 조각 없는 소형 금관자, 종2품은 조각한 대형 금관자, 정3품은 조각한 대형 옥관자, 당하 3품 이하 서인은 뼈ㆍ뿔ㆍ대모ㆍ마노ㆍ호박 등을 사용한 관자, 상인(喪人)은 소발굽 관자를 달았다.[주-D018] 작은 일 : 《영조실록》 38년 5월 8일 기사에 따르면, 윤동섬은 전결(田結)을 잘못 보고한 것 때문에 대간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주-D019] 엄홍복(嚴弘福) : 1718~1762. 본관은 영월(寧越), 자는 성오(聖五)이다. 조선 중기의 유생으로, 조재호(趙載浩)와 함께 지내던 당시 사도세자가 노론과 반목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응교 이미(李瀰)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미는 재차 이 사실을 좌의정 홍봉한(洪鳳漢)에게 전달하여 조재호가 탄핵되는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1762년(영조38) 영조가 사도세자를 사사하였는데, 당시 노론의 영수 홍봉한과 소론의 영수 조재호가 서로 반목하는 상태였다. 이때 홍봉한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계기로 소론을 숙청할 계획을 세웠고, 소론과 세자가 결탁한 사실을 증명하는 과정에서 그 연원을 엄홍복으로 지목하였다. 이 일로 투옥되어 국문을 받았으며, 세자와 조재호의 관계를 시인하여 죽음을 당하였다.[주-D020] 엄교(嚴敎)를 …… 체직시켰다 : 《영조실록》 38년 7월 2일 기사에 따르면, 영조가 유선양의 상소를 보고 당습(黨習)을 의심하며 엄하게 꾸짖었다고 한다. 같은 날짜 《승정원일기》에 자세한 내용이 실려 있다.[주-D021] 이미 …… 밝히니 : 1762년 7월 5일 부호군(副護軍)에 서용되고, 15일에 상소를 올렸다. 《승정원일기》 영조 38년 7월 15일 기사에 자세한 내용이 실려 있다.[주-D022] 주상의 …… 마음 : 구체적으로는 환곡과 균역청의 신포(身布) 등 각종 조세 부담을 줄이고 진휼하는 대책을 의미한다. 윤동섬이 안집사로 내려간 후, 조정에서 취한 정책과 그에 대한 반응에 대해서는 윤동섬이 조정에 복귀하고 올린 보고에 자세하다. 《承政院日記 英祖 38年 11月 14日》[주-D023] 환향(還餉) : 원문은 ‘향적(餉糴)’인데, 1770년(영조46)에 규례가 정해진 환향일 것으로 추정된다. 환향은 군사용으로 비축한 양곡을 환곡의 예에 따라 농민들에게 대여했다가 회수하는 미곡으로, 각 도의 군영에서는 그 이자 수입으로 재정을 충당하였다. 윤동섬은 당해의 환향을 멈추고 회수를 이듬해로 늦추자고 주장한 것이다.[주-D024] 재상들이 …… 하자 : 신만(申晩), 홍봉한(洪鳳漢), 윤동도(尹東度) 등 재상들의 의견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영조 38년 11월 16일 기사에 자세히 나온다.[주-D025] 육상궁(毓祥宮) : 조선 숙종의 후궁이며 영조의 친어머니인 숙빈(淑嬪) 최씨(崔氏)의 신주(神主)를 모신 곳이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에 있다.[주-D026] 중비(中批) : 이조나 병조의 전형(銓衡)을 거치지 않고 왕의 특명으로 제수(除授)하는 일을 말한다.[주-D027] 잘못된 …… 차견(差遣)되어 : 박필순(朴弼淳)이 청나라 주린(朱璘)이 지은 《강감회찬(綱鑑會纂)》에 조선조 태조가 고려의 권신(權臣) 이인임(李仁任)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상소함에 따라 이를 바로잡고자 사신을 보내게 되었다. 이에 윤동섬이 진주 부사가 된 것이다.[주-D028] 납약(臘藥) : 동지 뒤의 셋째 술일(戌日)인 납일(臘日)에 즈음하여 임금이 근신에게 하사하는 약의 하나이다. 곧 섣달에 내의원에서 만드는 소합원(蘇合元), 안신원(安神元), 청심원(淸心元) 같은 것을 말한다.[주-D029] 상사(上使)와 서장관(書狀官) : 진주 정사(陳奏正使)인 우의정 김상철(金尙喆)과 서장관 심이지(沈頤之)를 이른다.[주-D030] 절사(節使) : 조선 시대 중국에 정기적으로 파견하던 사신으로, 정조사(正朝使), 동지사(冬至使), 성절사(聖節使)가 있다.[주-D031] 산릉도감제조 겸 동영우원비각(山陵都監提調兼蕫永祐園碑閣) : 영우원(永祐園)은 사도세자의 무덤을 일컫는 말이다.[주-D032] 팔분체(八分體) : 서체(書體)의 하나로, 예서(隷書)와 전서(篆書)를 절충하여 만든 서체인데, 진(秦)나라 때 왕차중(王次仲)에 의하여 만들어졌다고 한다.[주-D033] 완인(完人) : 행실에 조금의 오점도 없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특히 당쟁과 관련하여 한 점 오점을 남기지 않은 사람을 일컬었다. 원나라 유기(劉祁)의 《귀잠지(歸潛志)》에 “선비의 입신은 흰 실 같아야 하니, 삼가 조금이라도 더럽혀져서는 안 된다. 조금이라도 더럽혀지면 완인이 될 수 없다.[士之立身如素絲然 愼不可使點污 少有點污則不得爲完人矣]”라는 말이 나온다.[주-D034] 서향각(書香閣) : 조선 시대 규장각(奎章閣)에 딸린 서고(書庫)의 하나이다. 창덕궁 북원(北苑)의 주합루(宙合樓) 서쪽에 있는데, 매년 1월ㆍ4월ㆍ7월ㆍ10월 보름에 각신(閣臣)들이 어진(御眞), 어제(御製), 어필(御筆)을 옮겨 와 포쇄하던 곳이다.[주-D035] 고요한 사람이 장수한다 : 《논어》 〈옹야(雍也)〉에 “지자는 물을 좋아하고 인자는 산을 좋아하며, 지자는 움직이고 인자는 고요하며, 지자는 즐기고 인자는 장수한다.[知者樂水 仁者樂山 知者動 仁者靜 知者樂 仁者壽]”라는 말이 나온다.[주-D036] 한중랑(漢中郞) : 후한의 서예가로 초서와 예서에 능했던 채옹(蔡邕)을 가리키는 듯하다.[주-D037] 급취(急就) : 한나라 원제(元帝) 때 황문령(黃門令) 사유(史游)가 지은 아동용 문자 학습서로, 물명(物名)ㆍ인명(人名) 등이 운(韻)에 맞추어 3언, 4언, 7언으로 구성되어 있다. 당나라 안사고(顔師古)와 송나라 왕응린(王應麟)의 주석이 있다.[주-D038] 범장(凡將) : 한나라 무제(武帝) 때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지은 책으로 문자학의 기초 교재이다. 양웅(揚雄)의 《훈찬(訓纂)》ㆍ《방언(方言)》, 두림(杜林)의 《창힐훈찬(蒼頡訓纂)》ㆍ《창힐고(蒼頡故)》와 함께 중국 고대의 대표적인 자학서(字學書)로 일컬어진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태년 (역) | 2017
.........................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이자 종실(宗室) 이심원(李深源)에게 수학하였다.->종실(宗室) 이심원(李深源)에게 수학하였다.
*이심원과 김굉필은 동갑으로서 같은 점필재 제자이고 절친이었다. 윤탁은 김굉필의 제자가 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