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문과 문풍지
차 윤 섭
“엊저녁 오던 비가 개이고 차가워진 바깥 날씨
웅 ∼ ∼ 웅 ∼ ∼ 문풍지 우는 소리
스사삭 ∼∼∼ 스사삭 ∼∼∼ 뒤뜰 대숲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소리가 스산하다.”
이렇게 겨울이 문턱이면 예전엔 우리 선조들이 겨우살이 준비를 서두를 때다. 먹거리 준비는 김치 담그는 것이 제일이요, 입을 거리 준비는 솜 바지 꾸며 시침 넣는 일이요, 사는 거처 준비는 문에 새 한지 바르고 문풍지 달아 찬바람 막는 일이다.
겨울이 깊어 가기 전에 꼭 해두어야 하는 겨우살이 준비 중 한가지가 문 새로 바르고 문풍지 다는 일이다. 햇빛 좋은 날을 택해 일년내 드나듦에 쓰여 구멍 나고 더럽혀진 문짝들을 돌쩌귀에 꽂힌 쇠막대를 뽑고 문짝을 떼어내어 비스듬히 새워두고는 물바가지에서 두 볼이 불룩하도록 입안에 물을 잔뜩 머금고는 세차게 압력을 주어 문을 향해 내 뿜는다. 이러기를 여러 번으로 온 문짝에 고루고루 물이 뿌려지고 나면 그 동안 문에 붙어 있었던 한지가 물을 머금고 투명한 색깔로 변하면 문 살에 붙어 있던 묵은 한지를 떼어 낸다. 물을 너무 많이, 또 너무 오래 뿌려두면 문 살이 뒤 틀리기 때문에 이렇게 입으로 적당히 물을 품는 방법이 가장 제격이다. 종이를 떼어내어 벌거숭이가 된 문 창살 사이를 적당히 물기 젖은 보드라운 걸레로 그 동안 켜켜이 쌓여 있었던 먼지 자국들을 말끔히 닦아 내면 오래된 문 창살이라도 노르스름한 나무의 제 색깔이 되살아 나서 마음 또한 개운해진다.
이때쯤에 미리 쑤어둔 밀가루 풀에 물을 섞어 적당한 묽기로 풀을 준비하는 동안 벌거숭이 문 창살의 물기도 다 마르게 된다. 볏짚에서 벼 이삭 모가지만 뽑아 가지런히 모아 적당한 굵기로 둥글게 붓처럼 묶어 만든 풀비를 풀 물에 적셔 문 창살에 조심스레 고루고루 잘 발라야 한다. 너무 많이 바르면 흘러내리게 되고 너무 적게 바르면 종이가 창살에 제대로 붙지 않고 뜬 부분이 생기기 때문이다. 골고루 적당히 다 바른 문 창살에 미리 준비해 둔 깨끗한 한지를 두 사람이 맞잡고 네 귀를 잘 맞추어 살며시 붙이고 방 빗자루로 슬슬 쓸어주면 한쪽으로 밀리지도 않고 잘 붙게 된다. 종이 바른 문 위에 다시 바가지의 물을 한입 머금고는 세차게 품는다. 최대한 작은 입자로 넓게 퍼지도록 조심스레 물을 품어야 한다. 하얗던 한지가 물을 머금고 투명색으로 변하면서 문 창살에 찰싹 달라붙게 된다. 양지 바른 곳에 세워두고 한동안 햇빛을 쬐면 물기에 젖어 늘어졌던 한지가 마르면서 탄력이 생겨 팽팽하게 되는 것이다. 한지가 팽팽하게 탄력을 받은 문에 가느다란 댓가지를 두드리면 흡사 장구 소리와 같은 청아한 소리가 나야 잘 발라진 문이라고 했었다.
이제 문고리 부근에 깨끗한 댓잎(竹葉)을 아래위로 여섯 잎을 마주놓아 눈(雪) 모양의 무늬를 만들고 그 위에 어른 손바닥 만한 크기의 한지를 겹으로 덧발라 손이 많이 닿는 부분을 튼튼하게도 하고 멋스러움도 살렸다. 창문 밖으로 밝은 햇빛이 비칠적엔 그 아련한 댓잎의 실루엣이 용자(用字) 문살과 어우러져 소담한 한 폭의 동양화 죽엽도(竹葉圖)와 진배없게 선조들은 멋스러움을 살렸다.
깨끗한 한지로 잘 발라진 문짝들을 제자리를 찾아 돌쩌귀를 맞추면 문 바르기 겨우살이 준비가 되는 것인데 마지막으로 중요한 마무리가 문풍지 다는 것이다. 문과 문틀 사이로 스며드는 찬바람 막음으로 반 뼘쯤 넓이로 한지를 길다랗게 잘라 문과 문틀사이를 풀로 붙이고, 문의 여닫는 삼면은 풍지를 한면만 문에 붙여 바깥쪽으로 접어주면 문이 닫히면서 문풍지가 자연스레 문틈을 막아주어 문틈사이로 들어오는 찬 바람막이가 되는 것이다. 문풍지 없는 문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유난히 차가운 바람이라 “바늘구멍으로 황소바람 들어온다” 했던 것이다.
언제부터인가도 모르게 주거문화의 태반이 아파트 문화로 바뀌었고 단독건물 주택마저도 온통 유리 창문으로 변해버려 깨끗한 한지 바른 用字문 창살의 운치를 잊은 지 오래다.
유리창문이야 밖을 훤히 내다볼 수 있어 좋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 한지에 비길 바가 아니다. 유리는 그 물질자체가 열을 전달하는 도체(導體)라 바깥의 찬 기운을 완전히 차단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찬 겨울 날 유리창에는 결로(結露)가 생기고 기온이 더 내려가면 성에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전통의 우리 한지 문은 그토록 얇은 한지 한 겹이지만 바깥 찬 공기를 완벽하게 차단해 주며 닥나무 섬유질의 미세한 조직 사이로 안팎의 공기를 소통하게 해주고 은은한 빛으로 간접조명의 편안함은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직사광선에 비할 바가 아니다. 유리 문에는 직사광선을 피하고자 커튼이 필요하지만 한지 문은 그 자체로서 완전한 간접 조명이다. 닥나무 섬유질의 부드러움과 군데군데 섬유질 멍울은 무늬로서의 모양새도 훌륭히 해내는 신비로움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햇빛 밝은 낮이나 달 밝은 밤에는 창 밖의 나무그림자라도 창문 가득히 비치게 되면 이는 진정 먹의 농담(濃淡)으로만 그려진 동양화의 아련한 묵화 한 폭이다.
직접적이기 보다는 간접적이고, 직선적이기 보다는 완만 곡선적이며, 호화로운 색채이기 보다는 담묵(淡墨)적이고, 직사광선이기 보다는 간접채광을 택했던 우리 선조들의 문화적 심성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것이 한지 창문의 참 멋이라 생각한다.
도시에 살아 온지 수 십년인 지금에서야 한지 문과 문풍지를 생각하고 옛날의 그 운치에 잠시 젖어 보게 되는 것은 어저께 아파트 베란다에 문풍지를 달면서 이다. 베란다에 있는 스무 개 남짓한 난분(蘭盆)의 겨울나기 방편으로 알미늄 샷시 아래턱 문틈으로 찬바람이 황소바람으로 들어오는지라 신문지를 돌돌 말아 그 틈마다 꼼꼼히 끼워 넣는 것을 나는 “베란다에 문풍지 단다”고 한다. 매년 해오는 일이지만 집사람은 궁상스럽다고 한다. 그렇다고 난분을 실내에 들여놓을 수 도 없다. 실내가 복잡할 뿐만 아니라 실내에서 겨울을 나면 봄에 꽃대를 볼 수가 없게 되고 베란다에 그냥 두면 동해(冬害)를 입는다. 그래서 나름대로 터득한 방법이 알미늄 샷시에 문풍지(?)를 만들고 밤에는 유리문에 커튼을 치는 것이다. 그러면 문틈으로 들어오는 찬바람은 문풍지로 막고, 도체인 유리로부터 전도되는 바깥 찬 기운이 꽃나무에 직접 닿는 것은 커튼으로 막아 무사히 겨울을 날 수가 있는 것이다. 화초는 이렇게 적당히 추운 상태로 겨울잠을 자게 해야 봄에 꽃대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신문지 돌돌 말아 문틈에 끼우는 것을 문풍지라고 나름대로 자위하면서 잠시 우리 선조들의 한지 창문과 문풍지에 대한 옛 향수에 젖어본다.
아파트에도 안방 창문만이라도 유리문 대신에 한지 문으로 할 수 있을 텐데……
잊혀져 가는 선조들의 멋스러움에 아쉬운 여운이 남는다.
(2008. 11. 29)
첫댓글 시골에서 살던 어린 시절 추억을 더듬게 되네요. 그 방 안에서 화로주위에 식구들이 도란 도란 둘러앉아 추위를 녹이며 구워먹던 감자 맛은 요즘 맛볼 수 가 없다는 섭섭한 생각까지 모락거립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