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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묻지 않았기 때문에
2008년 6월 15일 / 대예배 / 대상 10:13-14
성경에는 두 사람의 사울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구약에서 등장하는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인 사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사울입니다. 두 사람이 아주 대조적인데, 오늘은 구약에 등장하는 사울 왕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사울은 왕이 된 후 처음 2년 동안은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려야 하는지,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살피면서 나라를 다스렸던 왕이었습니다.
그러던 왕이 집권 2년을 넘기지 못하여 하나님과의 거리가 자꾸 멀어지게 됩니다. 초기에는 전쟁에 출정할 때마다 하나님의 뜻을 물었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기도 했지만, 점차 나라가 강해지고, 군사력이 막강해지자 하나님께 묻는 일도,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노력하는 시도도 없어집니다.
그뿐 아니라, 위기에서 나라를 구했던 다윗에게 심한 질투심을 느끼게 되었고, 자기의 딸 미갈과 결혼을 시켜 사위로 삼았음에도 사위에 대한 질투심이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증오로 변하여, 마침내 사위 다윗을 살해하려고 뒤를 쫓아다닙니다. 사울은 하나님과 전혀 관계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성경은 사울 왕의 이런 후반기 인생을 가리켜 ‘불순종과 불신의 삶’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울 왕은 이 당시 백성들을 생각하는 왕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과 야욕으로만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자신의 의지로만 살았습니다. 사위인 다윗을 살해하려고 동분서주하느라, 국정은 피폐되고, 군인들은 피곤에 절어 살았으며, 나라는 황폐해져 갔습니다.
그렇기에 사울 왕을 따랐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떠났습니다. 종교적으로 이끌어 줄만한 제사장도 없고, 초기에 그에게 하나님의 뜻을 말해주었던 사무엘 선지자도 죽고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사울 왕을 떠났고, 하나님의 능력도 사라졌던, 사울왕 역시 기도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종교적으로 말한다면 암흑기이었습니다. 이런 시기에 사울 왕은 생애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됩니다. 당시 이스라엘에게는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던 블레셋 민족이 쳐들어왔습니다.
삼상 28:4-6 / 바로 이런 때 블레셋 족속이 전군을 모아 가지고 이스르엘 골짜기까지 올라와 수넴 성읍을 점령하고 그곳에 진을 쳤다. 사울도 즉각 이스라엘의 전군을 집결시켜 길보아산에 진을 쳤다. 5) 그런데 북서쪽을 가로막으며 진을 친 블레셋 군대를 건너다본 사울은 너무 놀라서 싸울 힘을 잃고 말았다. 6) 그래서 사울은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여호와께 여쭈어 보았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꿈으로도 예언자를 통해서도 그에게 대답하지 않으셨다. 사울이 놉의 제사장들을 전멸시킬 때에 제사장 아비아달이 하나님의 뜻을 알아내는 에봇을 다윗에게로 가져갔기 때문에 사울에게는 그 우림이라는 제비도 없었다.
다급해진 사울 왕이 하나님께 물었다고 했습니다. 평소에는 찾지도 않았고, 하나님의 뜻을 묻지도 않았던 사울 왕이 몹시도 급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기는 했는데, 하나님은 그에게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마도 사울 왕이 “하나님 어쩌시렵니까? 이 백성들을 이렇게 죽이시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살 수 있습니까? 화를 푸시고 도와주십시오.”라고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꿈, 우림, 선지자의 말씀으로도 대답하지 않고 침묵만을 지키셨습니다.
다급해진 사울 왕이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는지, 신하들에게 점을 치는 무당을 찾아보라고 했습니다. 신접한 여인, 곧 무당을 찾아 그 무당에게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어 보겠다는 것입니다. 사울 왕은 집권 초기에 하나님 말씀대로 무당과 온갖 잡신들을 예루살렘에서 추방시켰습니다.
그런데, 위기에 처하자 사울 왕은 자신이 내쫓은 그 무당을 밤에 찾아간 것입니다. 신분이 노출될까봐 변장을 하고는 엔돌이라는 곳에서 점을 쳐주는 무당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그 무당에게 죽은 사무엘 선지자의 영혼을 불러오라고 다그쳤습니다. 무당이 한 영을 불렀습니다.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사울 왕이 무당에게 그 혼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냐고 묻자, 무당은 ‘겉옷을 걸친 노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사울 왕이 그것이 선지자 사무엘의 혼인 것을 알아차리고는 얼굴을 땅에 묻고 절을 했습니다. 무당의 초혼술로 나타난 사무엘의 혼과 사울왕과의 대화가 시작됩니다. 사무엘이 “왜 나를 불러 귀찮게 하느냐?”라고 하자, 사울은 “블레셋이 나를 치려 군대를 동원했는데, 너무 급해서 하나님께 여쭈어 봤는데도 하나님께서는 아무 말씀을 하시지 않아 어찌해야 좋을지를 당신에게 물으려고 불렀습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사무엘은 왜 하나님께서 사울 왕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아무 응답을 하지 않는지의 이유를 설명하였습니다.
삼상 28:16-19 / … 여호와께서 이미 너를 떠나 네 원수가 된 줄을 잘 알면서 네가 무엇을 더 얻으려고 나까지 찾아와서 물어 보느냐? 17) 여호와께서는 이미 내가 세상에 있을 때에 전하였던 예언의 말씀을 이제 그대로 실현하셨다. 여호와께서 이제 이 나라의 왕위를 네 손에서 빼앗아 너의 가까이에 있는 다윗에게 주겠다. 18) 여호와께서는 일찍이 아말렉 족속을 전멸시켜 버리라고 네게 명령하셨으나 너는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 너는 그들을 전멸시키지도 않았고, 그들이 기르는 가축을 모조리 죽여 없애지도 않았다. 19)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제 너를 이스라엘 군대와 함께 블레셋 족속의 손에 붙여 버릴 것이다. 내일이면 너와 네 아들들이 지하로 내려와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혼으로 나타난 사무엘은 사울 왕에게 “하나님께서 사울 왕을 떠나 사울의 대적, 곧 원수가 되셨기 때문에 사울 왕의 기도를 듣지 않으셨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과 사울의 관계가 더 이상 “나의 백성, 나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니라, 깨어진 관계라는 말입니다. 깨어진 정도가 아니라 대적, 곧 원수지간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사울이 처음 왕이 되어 사무엘이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을 때만 하더라도, 사울 왕은 ‘하나님의 신에 크게 감동이 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계속해서 하나님의 뜻을 물었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인가, 잘 나가는, 요새 말로 소위 ‘뜨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나라도 잘되고, 백성도 만족하고, 국방력은 막강해지고, 영토는 넓어지고, 인근의 이방 민족들까지 자신을 두려워하고 ... 이러니까 무서운 게 없어졌던 것입니다. 이제까지 잘 되고 있는 현실이 마치 자신만의 힘인 것으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잘했으니까!”로 자신의 공을 치하하기 시작하면서, 점차로 그의 인생에서 하나님을 멀리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더 이상 사울이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사울은 자신의 이름을 갖다 놓고, 하나님을 그의 인생 속에서 지워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상황이 급박하니까, 하나님을 다시 찾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사울에게서 버림을 받으신 하나님은 더 이상 사울을 도웁지 않으셨습니다. 그러기에 혼으로 나타난 사무엘은 하나님과 사울 왕과의 관계를 ‘대적의 관계, 원수의 관계’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사울 왕을 도우시는 분이 아니시고, 사울의 대적이 되셨던 것입니다.
■ 얼마 전 어떤 기독교 신문에서 ‘신자는 많은데 제자는 없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믿는다는 사람은 많은데 순종하고 따르는 사람은 없다는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편의주의적인 신앙관 때문입니다. 신앙의 우선순위가 1-2번째도 아닙니다. 3-4번째나 될까요? “이것 먼저 하고, 저것 먼저하고, 여유가 있으면 신앙생활하지 뭐!,” 이게 우리의 모습이어서는 안 됩니다. “
이런 편의주의적인 신앙관은 결국 하나님보다는 나를 먼저 생각하게 하고, 순종보다는 거역과 더불어 하나님께 변명만을 합니다. 그리고 정작 내가 급할 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 하나님은 “네가 언제 하나님의 목소리에 순종했느냐?”고 물으실 때, 아무 대답도 못하고 맙니다.
결국 사무엘의 예언대로 사울 왕은 길보아 전투에서 자신의 3아들들과 함께 비참하게 죽게 됩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 본문을 보면 이런 두 가지의 이유 외에 더 근본적인 이유를 봅니다. 그것은 사울의 그 마지막 시기에 무당을 찾아갔다는 것입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급박한 시기에 사울 왕은 자신의 집권 초기에 내쫓고 청산했던 가장 사악하고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무당을 찾아간 것입니다. 사울은 그것마저 거역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 용서를 구하지 않고 과거의 모습으로 다시 옛 모습으로 되돌아갔을 때, 하나님은 사울 왕을 완전히 심판하셨던 것입니다.
잠언 26:11에서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고 말씀하시듯 사무엘은 과거의 악습과 더불어 죄악을 범한 것입니다.
▶ 눅 15장에서 예수님께서 ‘탕자의 비유’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탕자가 어떻게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왔습니까? 아니 아버지를 자신이 있던 죄악의 도시, 방탕의 거리로 초청을 해서 만났습니까? 아닙니다. 그 아들은 그 곳을 떠났습니다. 죄악의 도시, 방탕의 거리, 유혹의 도시를 떠나 아버지의 품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 곳에 가지 않았습니다.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실패도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실수가 반복되는 것을 막을 줄 압니다. 실수의 횟수를 줄이고, 마침내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습니다.
대상 10:13-14 /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를 배반한 죄 때문이었다. 그는 여호와의 가르침은 따르려하지 않았다. 심지어 무녀를 찾아가 죽은 사람을 불러내어 물어 보기는 하면서도 여호와께는 묻지 않았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게 하시고, 그의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넘겨주신 것이다.
여호와께는 묻지 않았다는 말은 사울 왕이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려는 일체의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삼상 28:6절에서 이미 그가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려는 약간의 노력은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무엇을 뜻하는 겁니까? ① 성심성의를 다해 하나님께 묻지 않았으며 ② 응답의 전제 조건인 그의 죄에 상응하는 진실한 회개를 한 후에 묻지 않았다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할 것 같습니다. 즉 여기서 ‘묻다’라는 히브리적 의미는 ‘주의하여 찾다’라는 뜻으로서(시 77:02; 119:10) 그가 비록 형식적으로는 여호와의 뜻을 구했을지 모르나 전심(全心)으로는 구하지 아니했음을 시사해 주는 단어입니다. 적어도 전심으로 구했다라는 말을 할 때는 금식과 눈물의 기도가 수반되어야만 하는 것인데, 그런 면에서 사울 왕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자중하며 근신하며 기도를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는 기도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기도를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외면함, 말씀의 종과의 단절, 기도의 등한함 등 이러한 것들이 그의 영성 부분들을 메말라 버리게 하였음에도 그는 그것을 회복하고자 하는 마음을 전혀 같지 않은 채 인간적인 방법으로만 계속 나아갔습니다.
▶ 반면 하나님께 묻지 않았던 사울과는 달리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였던 사람 다윗은 그 결과가 어떠한지 봅니다. 대상 14:8-11을 봅니다.
대상 14:8-11 /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아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자 블레셋 족속이 그 소식을 듣고 전군을 동원하여 다윗을 잡으려고 공격해 왔다. 다윗도 군대를 거느리고 그들과 맞서려 나섰다. 9) 블레셋 족속은 이미 예루살렘 근처의 르바임 골짜기를 점령하고 있었다. 10)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왕이 된 사람이었기 때문에 다윗을 쳐서 굴복시키려는 블레셋 족속의 침략은 하나님을 치러 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다윗이 하나님께 어떻게 해야 옳은지를 물었다. “제가 블레셋 족속을 쳐들어가면 주께서 그들을 제 손에 넘겨주시겠습니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넘겨주겠으니 어서 가서 그들을 쳐라!” 11) 그래서 다윗이 르바임 골짜기의 바알부라심으로 진격하여 블레셋 족속을 격파한 뒤 이렇게 외쳤다. “물이 뚝을 무너뜨리며 거침없이 흘러내리듯 여호와께서 나의 군대를 물처럼 사용하시어 원수들의 전선을 뚫고 무너뜨리셨다!” 그래서 그곳 이름을 바알부라심이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이것은 ‘무너뜨리시는 주님’이라는 뜻이다.
다윗은 과거에 골리앗을 이긴 경험과 지금까지 겪었던 신앙생활의 경험을 앞세워 싸우지 않고 여전히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도를 받아 승리하게 되는데 대상 14장 13-17절을 읽어보면 블레셋 군대가 또 다시 침범 해 오고 이때도 다윗은 또 다시 하나님께 기도하여 문제를 풀어가게 됩니다.
대상 14:13-17 / 얼마 뒤에 블레셋 족속이 다시 다윗을 치러 르바임 골짜기를 침범하였다. 14) 다윗이 이번에도 하나님께 어찌해야 할지를 물으니, 이렇게 대답하셨다. “이번에는 블레셋 족속을 정면에서 공격하지 말고, 그들의 뒤로 돌아 사시나무숲에 숨어 있다가 기습하되 15) 그 사시나무 숲 위에서 무슨 발자국 소리 같은 것이 들리거든 공격을 개시하여라. 그 소리는 내가 사시나무 숲을 밟고 블레셋 진영으로 쳐들어가서 너보다 먼저 그들을 공격하는 신호이다.” 16) 다윗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하여 블레셋 군대를 쳐서 이기고, 기브온에서 게셀까지 쫓아가면서 무찔렀다. 17) 이렇게 되자 다윗의 명성이 온 열방에 널리 퍼져 나가, 모든 민족들이 다윗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여호와께서 다윗을 그렇게 붙들어 주셨다.
사울과 다윗의 차이가 이것입니다. 사울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을 하지 않았으나 다윗은 언제나 하나님의 마음에 맞게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사울의 가문은 무너지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다윗에게 돌리셨는데 하나님은 성도들의 신앙과 기대를 저버리신 적이 없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성도들의 눈물 배인 기도를 멸시한 적이 없으십니다. 사무엘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한 말입니다.
삼상 12:23 / 나도 계속 여러분을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드리고, 가장 옳고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여러분에게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내가 만약 기도하기를 그친다면 스스로 죄짓는 일이 될 것입니다.
엡 6:18 / 여러분은 또한 항상 기도하십시오. 무슨 일에나 성령께서 원하시는 선 안에서 하나님께 간구하십시오. 여러분이 필요한 것을 계속해서 아뢰십시오. 각지에 흩어져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열심으로 기도하십시오.
기도를 쉬는 것은 기도를 잃게 하며 나아가서 믿음과 삶의 원리를 잃게 상실하게 하는데 사도들은 자신들의 사역 중에 제일을 기도하는 것으로 삼았습니다. 오늘날 많은 신앙인들이 기도를 쉬는 죄를 범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가장 큰 까닭이기도 합니다.
▶ 기도를 잃어버린 꺼진 불같은 사람 사울의 마지막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기도의 삶이 숨을 멈추고 있다면 지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성령님께 기도를 회복케 해달라고 간구하십시오. 그 분께서 우리에게도 새 힘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원인이 있으며 야고보서는 우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약 4:2-3).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어리석음은 한 숨 쉬며 원망과 불평을 하면서도 기도는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실패하는 자의 원인은 만나는 문제보다는 기도하지 않는데 있으며 여리고성을 함락시키고 승리의 기쁨을 누리던 이스라엘이 아이성 전투에서는 비참하게 패배하였는데 그 이유가 하나님께 묻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수 7:1-5).
문제가 크기 때문에 꼭 어려운 것이 아니고 문제가 작아서 쉬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이 개입해주셔야만 열리고 풀려지는 것이에요. 이제부터 각오를 새롭게 하고 거룩한 일을 고민하십시오. 그리고 은혜를 고백하십시오. 더 큰 역사를 고대하십시오. 그래서 주님의 뜻에 순종하고 더 많은 시간을 무릎으로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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