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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종’ 김수환 추기경 시복추진 심포지엄 [연재3]
제2주제
김수환 추기경의 사목 환경
김수태(충남대학교 명예교수)
1. 머리말
한국교회사연구소에 의해서 20여 년 만에 김수환 추기경(1922~2009)을 다시 만났다. 평전을 쓰기 위해서 추기경을 짧게 만났고, 그가 당시까지 썼던 글들을 다 읽었을 때로 돌아가는 듯했다. 오랜만에 추기경이 쓴 글이나 말을 읽으면서 정신이 맑아졌다.
그동안 필자가 교회나 그 구성원에서 나온 글이나 말을 통해서 이러한 경험을 맛보기를 얼마나 갈구했는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어쩌면 이미 시간이 지난 흘러간 글이나 말이 아닌가 싶었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말과 글과 삶이 쉽게 분리되는 오늘과 같은 시절에 추기경의 삶과 신앙이 일치하는 살아있는 말과 글로써 생생하게 다가왔다. 역사 속의 한 인물에 대해서는 언제나 새롭게, 거듭해서 다시 읽어야 할 필요성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리고 추기경에 대한 시복 운동을 왜 전개하는 것일까 하는 소박한 질문도 일어났다. 이것은 현재 추진하고 있는 최양업 신부에 대한 시복 운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어떠한 인물이 교회의 복자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해서 시복 운동을 추진한다는 설명으로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이 이 시대와 이사회 속에서 왜 복자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읽거나, 잘 듣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추기경이 훌륭하지 않은가, 모두 그를 잘 알고 있는 것이 아니냐 하면서 그냥 그렇게 추진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해인지는 모르지만, 그가 우려하였듯이 어떤 경우에는 순교자와 같이 교회의 다른 인물처럼 추기경을 혹시나 우상화하는 것이아닌가 하는 두려운 생각까지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필자는 추기경이 말로나 글로만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여전히 살아서 움직이는 존재라는 사실이 더 강조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우리가그처럼 사람으로서 신앙인으로서 이 세상과 교회 안에서 제대로 잘 살아가야 할 것이며, 오늘과 같은 복잡한 현실 속에서도 그 흐름을 거슬리면서 비판적인 예언자가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도 그러할 것이다. 어쩌면 희망까지 잃어버린 채로 살아가는 이시대의 사람들에게 우리가 사람으로서 신앙인으로서 조금이라도 더 이러한 어둠 속을 헤쳐나가고, 비추어 주는 한 줄기의 희미한 빛이 되어야 한다는 점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 이 시대와 사회 속에서 추기경을 새롭게 다양하게 그리
고 구체적으로 만나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추기경이 어느 날 시복이 되더라도 종교적 역사적 의미를 올바르게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사실과 함께 필자는 추기경에 대한 시복 운동이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지면서 주목하고 있다. 늘 그러하듯이, 교회안에서 대부분을 차지하는 평신도들의 적극적인 참여 없이, 해당 교구와 그곳을 움직이는 사제들이나 한국교회사연구소와 같은 일부 기관에 의해서 시복 운동이 추진되는 것이 아닐까 싶어서이다. 대전교구에서 김대건 신부가 유네스코에 의해서 세계의 기념 인물이 되도록, 내포 천주교회의 유산을 세계문화유산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거나 추진할 때도 그러했다. 그 과정을 바라본 필자만이 아니라, 누구나 우리나라와 인접한 일본의 경우와 그것을 비교해 보면 너무나 다르게 움직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어떠한 한 인물이 시복되더라도 소수의 사람이나 해당 기관의 복자가 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새길 필요가 있을 것이다. 어떠한 사람이든지 한국만의 복자가 아니라, 신자이냐 아니냐의 여부를 떠나서 세계 속에서 모든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고, 만날 수 있는 살아있는 복자가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이다.
설혹 지금과 같이 시복이 추진된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시복 운동이 추진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더욱 새로운 고민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굳이 최석우 몬시뇰의 말까지 인용하지 않더라도, 한국 천주교회의 시복·시성 대상이 되는 인물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못한 현실을 바라볼 때 그와 같은 느낌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오늘과 같은 몇 번의 학술발표회로써 시복 대상이 되는 인물에 대한 연구가 충분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김수환 추기경을 위한 연구소가 대학에 있지만, 그곳에서 지금까지 무엇을 어떻게 해왔는가를 잘 알고 있다.
연구라고 할 수 있는 연구가 얼마나 이루어졌는가, 우리가 추기경에 대해서 알아야 할 주제를 제대로 다루어졌는가에 대해서도 한 번쯤은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추기경에 대한 전문 연구자가 거의 없다는 점이나, 단독 연구서조차 하나 없는 현실에서도 시복이 추진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추기경에 대한 새로운 평전이 나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연구를 바탕으로 한 것은 아니며, 특정한 주제에 치우쳤다는 지적도 찾아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1) 김대건 신부나 최양업 신부에 대해서도 그러한 상황은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연구자로서 부끄러운 현실이 아닐 수가 없다,
사실 추기경과 같이 현대의 역사적 인물을 연구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고, 무척 오랜 시간과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인물을 구성하는 역사적 조건들에 대하여 다양한 분야에서의 이해와 그것을 유기적으로 통합시킬 수 있는 능력과 안목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그래서 현대의 역사적 인물에 대한 연구의 수준이 한 나라의 학문적 수준을 반영한다고까지 언급되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인물에 대해서 쉽게 많이 아는 척하는 것보다 조금은 더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더욱 객관화시키면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더욱 두드러진 현상이지만, 연구자들이 역사 속의 인물에 대해서 너무 쉽게 접근하고 다루는 경향을 찾아볼 수가 있어서 조금은 아쉬운 느낌까지 들기도 한다.
따라서 비록 시간이 걸리더라도 학문적 토대 위에서 시복 운동이 전개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늘 궁금하게 여긴다. 왜 그러한 바탕 위에서 그 사람에대한 올바른 현양을 하지 않는지도 의문이 일어난다. 사람의 우열을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나란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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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광, 「감수의 말」, 아, 김수환 추기경 (1), 2016, p.11에서 “물론 작가 이충렬의 작업에는 천주교 추기경이었던 김수환의 전통적 종교활동에 관한 부분은 상대적으로 약하게 서술되어 있다.”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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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과 똑같은 사람이며, 신앙인이지만, 어디에서 나와 같으며,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면서 어디에서 그리고 어떻게 해서 나의 길과 그 사람의 길이 달라졌을까, 그때 그래도 사람으로서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서로 연결될 수 있을까를 돌아보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의 교회는 아직도 이러한 노력보다도 조금은 손쉬운 방법과 길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어떻게 하면, 언제 이러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이 계속 던져지곤 한다.
필자에게 맡겨진 주제인 「김수환 추기경의 사목 환경」에서도 마찬가지의 상황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오랜만에 추기경에 대하여 다시 공부할 수 있도록 해주었지만, 조금은 덜 구체적이며, 새롭게 공부할 수 있는 주제는 아니었다. 추기경이 부딪쳤던 사목 환경, 즉 사목의 현실이 어떠한가에 대해서 누구나 어떠한 식으로든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추기경이 좋아하는 시나 노래에 잘 드러나고 있듯이, 어두운 밤이었다.2) 그는 이를 격동기였다고 말하였다.3) 이와 같이 추기경의 사목 환경이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교회의 안에서나 무척 힘들었을 것이라고 하면서도, 그 구체적인 과정 하나하나에 깊은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대부분 그 결론에 주목하고 있는 것같다. 그 어두움과 그 밤이 어떠했기에, 추기경이 그 어두운 밤을 밝히는 별과, 길을 알려주는 등대가 되고자 했는가를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필자 역시 추기경의 사제 수품 50주년을 기념한 화보집인 김수환(2001)에 실린 「교회와, 민족과 함께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라는 글에서 그의 사목 방향을 다루면서 사목 환경에 대해서 언급한 바가 있다. 그러나 다른 주제로 바꾸지 않은 이유가있다. 필자는 추기경에 대한 평전을 통해서 세 가지 측면에서 그의 사목 방향을 설정한 바가 있다. 한국 정치의 민주화, 한국 사회의 인간화, 그리고 한국 교회의 쇄신이 그것이었다. 이 세 가지 주제가 추기경의 삶과 신앙에 서로 맞물리고 있었다고 보았다. 특히 세상과 교회의 경계를 허물고자 한 추기경에게 사회가 인간화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삶과 신앙과 사상에서 출발점이었으며 종착지였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 그는 정치가 민주화되어야 하고, 또 교회가 쇄신되고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추기경은 정치의 민주화가 이루어진 뒤에도 그것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하면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사회, 즉 사회의 인간화를 계속해서 주장하였다. 꼭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교회의 쇄신과 변화도 이를 위해서 중단되지 않고 추진되기를 바랐다. 이러한 사실들이 추기경이 교회 밖에서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교회 안에서 부딪쳤던 사목 환경이었다고 이해하였다. 그러나 필자가 이와 같이 글을 쓴 이후에도 추기경의 사목 방향에 대해서는 제대로 주목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새롭게 나온 몇 평전들에서도 여전히 혼란스러운 양상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4) 이는 추기경의 사목 환경에 대한 역사적인 검토가 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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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김수환 추기경 구술, 평화신문 엮음,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증보판), 2009, p.457.
3) 앞의 책, p.217.
4) 두 개의 평전 가운데 이충렬, 아, 김수환 추기경 (1)과 (2)는 정치의 민주화에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구중서의 김수환 추기경 행복한 고난, 2019에서는 사회의 인간화에 조금 더 관심을 두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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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마도 추기경의 삶과 신앙에 대한 시대구분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서 그 하나의 이유를 살펴볼 수가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시기별로 추기경의 사목 환경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는가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그가 어떠한 시기에 무엇을 더 크게 강조했는가를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추기경의 사목 환경에 대한 필자의 접근이나 주장이 타당한가 아닌가를 언젠가 다시 검토해 보고자 하였다.
다음으로 추기경의 사목 환경에 대한 이해가 그의 사제 수품 이후에 초점을 맞추어진 부분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의 사목 환경에 대한 인식이 개인사와 한국 현대사에 대한 인식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순교자의 후손인 그가 겪은 가족사를 통해서 어떻게 그와 같이 사목 환경을 이해할 수 있었는가, 또한 신학생으로서 그가 겪었던 학창 시절과 학도병 시절은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 그리고 그것이 그의 사제 수품 이후 어떻게 연결되고, 발전되었는가 하는가에 대해서 파악해야 한다는 점에서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이러한 점에 더욱 주목하면서 추기경이 부딪친 사목 환경을 새롭게 정리해보고자 한다.
필자의 「교회와, 민족과 함께」라는 글은 김수환 추기경 전집(2001)의 편찬에 관여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바탕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번에는 그 이후에 나온 추기경의 구술 회고록인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증보판)을 중심으로 그의 사목 환경을 이해해 보고자 한다. 회고록은 2003년까지 평화신문에 연재된 내용이 초판(2004)으로 정리되어 나왔으며, 2007년의 연재분을 거기에 더해서 그의 사후에 증보판으로 나왔다. 이 책은 추기경이 직접 참여해서 자신의 생애와 사목활동을 언급한 거의 유일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추기경이 「책 머리에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에서,
“이 책은 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저의 일생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 자서전은 아닙니다. 소년기, 소신학교(동성 상업) 시절, 일본 유학과 학병 시절, 대신학교 생활, 6·25사변과 사제 수품 등 옛날이야기가 나오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서울대교구장 재임 30년(1968~1998) 동안 겪은 여러 시국사건을 비롯해 200주년, 서울 세계 성체대회 같은 굵직한 행사 등에 대한 회고담으로 흐를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5)
라고 하고 있듯이, 필자는 자서전은 아니지만 회고담을 통해서 그가 부딪쳤던 사목 환경을 체계적으로 살펴볼 수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특히 추기경이 그와 같은 사목 환경 속에서 추구하거나 실천한 목표가 무엇인가를 새롭게 파악할 수가 있을 것으로 보았다.
필자는 이를 추기경이 추구한 한국 사회의 민주화, 즉 민주주의라고 말해보고 싶다. 비민주적인 비인간적인 한국 사회가 어떻게 민주적이며 인간 중심의 사회로 바뀔 수가 있는가 하는 문제가 추기경의 최대 관심사였기 때문이다. 사실 그의 인간관, 국가관, 교회론 등이 모두 여기에 연결되어 있었다. 즉 우리에게 그가 어떻게 해서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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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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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의 민주화에 적극 참여했는가를, 특히 그의 민주주의론이 어떠한가를 구체적으로 말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추기경의 회고록을 통해서 현대 한국 천주교회의 민주주의 운동사를 또한 살펴볼 수가 있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추기경의 민주주의 론에 대해서도 앞으로 보다 본격적인 관심이 일어나게 되기를 바란다.
2. 한국 정치의 민주화 실천
추기경에게 사목 환경이란 교회 내와 교회 밖으로 구분된다. 그가 교회를 위한 교회로만 사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세상 속의 교회, 세상 안의 교회까지 지향했다. 그에 의하면 교회가 세상에서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정치와 사회였다. 경제와 문화까지 포함할 수 있지만, 그는 세상의 정치와 사회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이때 한국의 어떠한 정치 현실이 추기경의 사목 환경이었는가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추기경의 정치와 관련된 화두는 국가와 민족과 국민이었다. 나라가 없었을 때는 국가와 민족이, 그리고 나라가 있을 때는 국가와 국민이었다. 이에 그는 한국의 정치가 국가와 민족과 국민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고 있는가에 관심을 가지고서 발언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선산에서 보냈던 어린 시절부터 현실 정치에 대한 그의 관심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소학교에 다닐 때 일본인 아이들과 싸우면서 얻은 이마의 흉터에 대해서 ‘항일 독립운동의 상처’라는 농담을 할 정도였기 때문이다.6) 그는 당시부터 항일 전쟁(?)을 치렀다고 말하면서, 나라를 잃은 민족의 현실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대구에서 서울로 옮겨가서 들어간 동성 상업학교의 을조 반에서 그는 더욱 그러했다.7) 그는 갑조의 선생들로부터 3·1 운동과 일제 식민 통치의 만행을 듣고서 민족적 울분과 함께 “그럴 때는 신학생이 아니라 나라를 빼앗겨 신음하던 백성”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신학생 이전에 한국의 백성이라는 사실부터 새기고자 하였다.
이는 조선을 식민지화한 일본의 제국주의에 대한 추기경의 반발로 이어졌다. 어떠한 민족이, 어떠한 나라가 다른 민족과 다른 나라를 지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추기경은 일기장에다가 그러한 사실을 적었다가 들켜서 교장 신부로부터 호된 꾸지람을 듣기도 하였다. 그래도 그는 생애 말년까지 자주 올라갔던 북한산에서 동기생들과 조국의 운명을 화제로 삼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 결과 그의 마음 안에서만 독립 전쟁을 벌인 것이 아니라, 마침내 5학년 졸업반의 수신(윤리) 과목 시험 시간에 그 전쟁을 밖으로까지 비화시키고 말았다.
그가 답지에 황국신민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면서 이러한 방식으로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일제가 한국인을 황국 신민화시키려는 정책에 대하여 민족적 자존심과 젊은 혈기의 반항심에서 나온 것으로 설명한다.8) 이것이 그가 끝까지 한국 민족을 사랑하며, 한국이라는 국가를 위해서 국민으로서, 신학생으로서, 사제로서 현실 정치에 관심을 가지면서 활동하도록 만든 이유라고 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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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위의 책, p.51.
7) 위의 책, pp.68~69.
8) 위의 책,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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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경의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적 태도는 유학 시절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일본에 대한 반감이 더욱 커졌기 때문에 유학길 자체가 고행길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일본인 선원이 한국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것에 반발하면서, 자신에 대해서 일본인이 아니라 “나는 조선 사람입니다”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다.9) 상지대학에서 공부할 때도, 그의 표현을 따른다면 적국인 일본에 대해서 ‘적개심에 불타는 유학생’이 되었다고 한다.10) 그는 그렇게 그저 동포 친구들과 어울려 우국지사처럼 조국의 운명을 걱정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당시 그곳의 사람들은 그가 사제가 아니라, 정치가가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고 한다.11) 이것은 그를 잘못 이해한 것으로, 그는 어떠한 길을 걷든지, 나라를 어떻게 하면 다시 찾을 수 있을까, 지식인으로서 무엇을 해야 할까를 깊이 고민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추기경이 일본인 교수와 나눈 대화를 통해서 이를 잘 알 수가 있다.12) 그가 한국 학생들이 교활하다고 하자, 인간인 이상 약자가 강자 앞에서 비굴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하며 그를 비판하였다. 나쁜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을 이간시키고, 조종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었다. 그러한 그에게 당시 한국이 일본의 강압적인 식민 통치로 얼마나 큰 고통을 겪으면서 신음하고 있는가를 아는가 하고 물었다고 한다. 일본의 지배를 받는 한국 민족에게는 희망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추기경은 자신과 같이 한 글자라도 더 배운 젊은이들이 대학을 졸업해서 민족을 위해서 일을 할 수 없는 상황까지도 언급하였다. 그 교수가 “꼭 민족을 위해서만 일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다시 던지자, 그는 “그럼, 한 자라도 더 배운 우리가 고통받는 민족, 무지몽매한 민족을 내팽개치고 무슨 일을 해야 옳은 건가요”하고 대답하였다.
그러한 대화를 들었던 게페르트 신부의 우려에 대해서도, 그는 “민족이 저를 부르거나, 제가 민족을 위해 헌신할 기회가 온다면 주저 없이 달려갈 겁니다”라고 응답하였다.13) 한국을 극진히 생각했던 게페르트 신부는 추기경에게 사제의 길을 통해서 그렇게 살기를 바랐던 것 같다. 아마도 그는 사제로서도 민족을 위해서 제대로 살 수가 있다고 보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추기경은 “언제쯤 내 조국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다짐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고 한다. 그는 그러한 대화만으로도 감옥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신이 고지식하게 “입바른 소리를 잘하는 성격”의 사람이어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추기경의 반발은 그것과 연결된 일본의 군국주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14) 그가 일본이 치루던 전쟁에 학도병으로 끌려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그는 중국으로 파병되면 그쪽에 있는 우리 독립군에 합류해서 일본군과 목숨을 걸고 싸우자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한 친구와 일단 한국으로 돌아갈 ‘일본 탈출 대작전’을 세우면서, 함경북도의 청진으로 가는 배표를 구하기도 하였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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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위의 책, pp.78~79.
10) 위의 책, p.80.
11) 구중서, 앞의 책, p.42.
12)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pp.80~81.
13) 위의 책, p.81 및 p.83.
14) 위의 책, pp.8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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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동경에서 남쪽으로 약 1,000킬로 떨어진 지치시마라는 섬에 도착하였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에서 추기경은 전쟁이 끝나기를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가 없다고 하면서 동료 학도병 몇 명과 함께 전혀 거리를 모른 채로 미군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320킬로나 떨어진 유황도로 탈출하는 시도를 하다가 실패하기도 하였다. 그때 그는 자신의 사물함에 일본과 일본군을 비난하는 편지를 꽂아두고 출발했다고 한다.
추기경은 해방이 되면서 괌을 거쳐서 일본으로 돌아왔다. 그는 미국으로의 유학을 포기하고 귀국을 결심한 이유에 대해서 “하나는 재일교포들의 분열과 다툼이었다. 36년간 남의 나라 밑에서 설움을 겪다 해방됐으면 이제 한마음이 되어 조국의 미래도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재일 교포들은 툭하면 좌우로 갈라져 싸웠다.”라고 설명하고 있다.15) 그러한 상황은 귀국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당시의 현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그러나 신학교 울타리 밖은 무척 혼란스러웠다. 정치인과 국민들이 좌우로 갈려 극한 이념 대결을 벌이고, 곳곳에서 폭력투쟁을 일삼았다. 많은 지식인들이 좌익계열 단체에 가입해 활동했다. 일본 상지대학 선배들 중에도 적지 않은 수가 좌익 단체에서 비중 있는 책임을 맡고 있었다. 함경도 출신의 유학 동기를 서울역 앞에서 만난 일이 있는데, 그 친구도 좌익에 가담한 듯했다. 그 혼란스러운 이념 대결을 지켜보는 동안 내가 가톨릭 신자와 신학생이 아니었더라면 좌익 쪽으로 기울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라고16) 말한다.
마침내 추기경은 자기의 입장을 선택하였다. “당시 가톨릭 교회는 우익 성향을 보이기는 했으나 기본적인 입장은 중립이었고, 우리 신학생들 역시 그러했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후 달라졌다. “일반 대학 교수로 있던 한 선배가 내게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요즘 학생들이 ‘교수님 입장은 뭐고, 가톨릭 입장은 뭡니까’하고 자주 물어봐.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좌익과 우익 중간에 하느님 당(黨)이 있는데, 나는 그 당원이다. 하느님 당은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기우는 게 아니라 하늘로 곧장 올라간다’고 대답하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명답이라고 맞장구를 쳐 주었다. 내가 만일 하느님 당원이 아니었더라면 이념투쟁의 한복판에서 방황했을지도모른다.”라는 것이다.17) 이에 그는 좌익이나, 우익이 아니라, 중립이 아니라 하느님 당원으로서 앞으로 살아가기로 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이후 그의 사제로서의 삶에서도 일관되게 지켜졌다. 어떠한 사목 환경이 펼쳐지더라도 그는 여기에 기준을 두고서 살고자 했다.
추기경은 이념 대립의 결과 “조국 광복 5년 만에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나다니”라는 현실을 맞이하게 되자, 분단된 남북 간에 전쟁이 일어난 줄을 몰랐다고 하면서 “동족끼리 총을 쏘고 피를 흘리는 비극이었기에 더 슬프고 참담했다.”라고 말한다. 이에 공산주의에 대한 그의 태도를 밝히고 있다. 일본 제국주의나 군국주의에 대한 그의 태도에서도 분명히 드러났지만, 서로 연결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결코 이념으로 사람을 도구화하거나, 폭력이나 전쟁을 통해서든지 사람을 희생시킬 수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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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위의 책, p.109.
16) 위의 책, pp.123~124.
17) 위의 책,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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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시시각각 전해지는 전황을 듣고 있노라면 ‘이러다 나라가 공산화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걱정부터 앞섰다. 이 나라가 공산당 손에 넘어가면 가톨릭 교회가 무너지는 것이 불을 보듯이 뻔한 일이었다. 이미 북한 교회가 초토화되고, 많은 성직자들이 목숨을 잃지 않았는가. 그때 내 생각은 ‘이 전쟁에서 공산당이 이기면 차라리 산에 들어가서 게릴라전을 벌이겠다’는 데까지 미쳤다. 자유민주주의 국가 체제보다 민족 동일성을 우선시하는 요즘 젊은이들은 그때 내가 품었던 생각을 쉽사리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라고18) 하였다.
6·25 전쟁을 거치면서 나라 잃은 상태에서 민족을 우선시했던 추기경에게 어떠한 나라에서 국민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물음이 더욱 크게 다가왔다. 이에 그는 한국을 민주주의 국가로 만드는 것이 국민을 위해서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해방된 국가인 한국이 공산주의 국가가 아니라, 민주주의 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독일 유학을 통해서 정리된다. 독일에서 “민스터 대학 요셉 회프너 교수 신부님 밑에서 ‘그리스도교 사회학’을 배운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내가 그리스도 사상에 기초한 인간관과 국가관을 정립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준사람이 그분이다. 그런 이론적 토대가 허술했다면 1970~1980년대의 그 험난한 시기를 제대로 헤쳐 나왔을까 라는 의문이 든다.”라고 한다.19) 즉 독일에서 국가란 무엇인가, 어떠한 국가이어야 하며, 그 국가는 국민과 어떠한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에 대한 그의 생각을 구체화시킬 수가 있었다.
그리고 추기경은 “내가 교회발전에 조금이라도 이바지하는 길은 독일에서 보고 배운 것을 사목 현장에서 열심히 실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20) 이제 독일에서 배워온 인간관과 국가관이 귀국한 이후 추기경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바로 한국 천주교회가 교회를 위한 교회가 아니라 세상에 봉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21) 그는 이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올바로 알고 실천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것은 교회가 한국 정치의 민주화 과정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독일 유학 시절 추기경은 5·16 군사 정변을 일으킨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 선입견이 별로 좋지 않았다고 한다. 추기경이 된 이후에 대통령과의 관계가 급속하게 나빠졌다.22) 대통령이 1969년 3선개헌을 통해서 1인에 의한 장기 집권 야욕을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국가의 주인인 국민의 대통령 선출권을 박탈하는 것이었다. 대통령이 국민의 대표자가 아니라, 지배자인 독재자이며, 제왕이 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국가의 주인인 국민을 무시하거나 함부로 대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박정희 정권을 군사 독재 정권으로 성격을 규정한 추기경은 독재자의 특징을 말하고 있다. 대통령이 “우리 강산 구석구석 나무 한 그루에까지 애정을 쏟는 분이었다. 동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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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위의 책, p.130.
19) 위의 책, p.163.
20) 위의 책, p.173.
21) 위의 책, pp.169~171.
22) 위의 책, pp.217~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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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든 것을 자신이 가꾸고 돌봐야 한다고 생각할 만큼 집착이 강했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혼자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추기경이 박정희 대통령의 장례식장에서 “하느님이 원하시는 나라는 국민이 역사의 주인공이 되는 나라, 억압과 폭력의 공포가 없는 나라입니다.”라고 한 말을23) 통해서 바로 알 수가 있다. 이것이 그가 한국 정치의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이유이며, 목표였다는 것이다. 국민이 역사의 주인공이 되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그는 조선을 식민지화한 일본의 천황을 미워했듯이, 박정희 정권의 이러한 움직임을 받아 들일 수 없었다고 한다. 이제 그는 정권과 치열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추기경은 회고록을 통해서 자신이 참여한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흐름을 정리하여 언급하고 있다.
추기경은 1971년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서, “정치인들은 여야를 막론하고 공명정대하게 이 선거에 임하기를 강력히 요청한다. (중략) 가톨릭 신자 유권자는 국가 이익을 위해 양심이 명하는 대로 주권자로서의 권리를 행사해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24) 그리고 유명한 1971년의 성탄절 미사 강론을 통해서 비상대권을 잡으려는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였다. 그리고 그다음 해에 그는 7·4 남북 공동 성명에 대해서 대통령이 민족적 과업인 통일까지 악용하면서 1인 장기 집권체제의 사전 정지 작업을 위한 것으로 이해하면서, 8·15 시국 성명을 발표하였다.
추기경은 자신의 정치적 민주화를 위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정권이 1972년 10월 유신을 통해서 장기가 아니라, 영구집권을 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었다고 보았다. 이에 대해서 그는 대통령이 스스로 권력을 내놓을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으로 판단하였다.25) 대통령이 국가를 가난의 수렁에서 건져낸 뒤 독재자의 길이 아니라 한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기틀을 놓고서 물러났더라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훨씬 앞당겨질 기회를 가질 수가 있었을 터인데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국가안보에 해를 끼치고, 결국 권력자 자신이 불행하게 끝이 난다고 예견하였다. 이와 같이 판단한 그는 언론과 지식인들이 공포정치에 숨죽이고 있을 때 교회까지 침묵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나라가 어디로 가는지 몰라 답답한 시점에서 꼭 필요한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었다는 것이다. 마땅히 자신이 해야 할 일과 말을 하였다는 것이다. 이후 그는 한국 정치의 민주화가 실천될 때까지 그는 흔들리지 않고서 한국 정치의 민주화를 주장해 나갔다.
이때 추기경은 자신과 정치의 관계에 대해서도 언급한다.26) 그를 정치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보아도 그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라고 보았다. 그는 “난 1970년~1980년대 격동기를 헤쳐나오는 동안 진보니, 좌경이나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고 한다. 정치적 의도나 목적을 두고 한 일은 더더욱 없다고 한다.”라고 말하였다. 그는 교회가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것이며, 결코 정치적이거나 어떠한 세속적 욕심을 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아마도 그가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것과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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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위의 책, p.317.
24) 구중서, 앞의 책, pp.64~66.
25)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p.245.
26) 위의 책, p.194 및 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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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적으로 되는 것과는 다르게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1975년에 서슬 퍼런 긴급조치를 선포하는 것으로 추기경의 기대에 크게 반발하였다. 이에 대해서 그는 “온갖 탄압에도 민주세력의 끈질긴 생명 력과 열망은 꺾이지 않았다. 1976년 초봄 명동에서 일어난 또 다른 사건이 그걸 입증 했다”고 말한다.27) 교회와 정부의 관계는 더욱 팽팽한 대결 양상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리고 더욱 응집된 민주화 진영이 유신반대 차원을 넘어서 박정희 정권의 퇴진 구호 까지 외치면서 전면 투쟁에 나섰다고 한다.28) 결국 부마사태가 터졌다. 곧이어 대통 령이 피살됨으로써 유신정권의 종말로 이어졌다고 보았다. 이에 대해서 추기경은 “고 문과 협박에도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외친 이들이 용기와 눈물이 없었다면 불 가능했을 일이다.”라고 말한다.29)
추기경은 이러한 상황이 전개되자,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나라의 역사적 운명은 크게 발전할 수도, 침체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이 곧 갈림길이며, 위기의 고비입니다” 라는 사실에 모두 주목하자고 말하였다. 그러나 추기경이 추구하였던 국민이 역사의 주인공이 되는 나라는 바로 오지 않았다고 말한다.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감이 온 나 라에 퍼졌을 때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그는 “국민들이 서울의 봄을 환호할 때 어느 누구보다 변화의 물결을 반긴 사람이 나다. 민주화에 대한 기대도 기대려니와 이제 강론대에서, 시국 기도회에서 정치 얘기를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서울의 봄은 일장춘몽에 지나지 않았다. 모든 것이 깨지고 말았다.”라고 한다.30) 그의 눈에 전두환 등 정치 장교가 군부를 장악하고 정 치권으로 세력 확장을 도모하는 것이 보였다는 것이다.
그 결과 추기경은 1980년의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고 보았다. 그는 “광주시민 들의 민주화 열망은 계엄군과 공수부대의 무력 진압 아래 처참하게 짓밟혔다. 광주사 태는 6·25사변 이후 최대 민족적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참으로 비통했다. 신군부 만행에 울분을 느꼈다. 난 본의 아니게 1970~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한가운데에 있었 다. 그 20여 년 중에서 가장 괴롭고 고통스러웠던 순간을 꼽으라면 주저하지 않고 광주의 5월이라고 말한다. 광주에 내려가 시민들과 함께 피를 흘리며 싸웠더라면 그토록 괴롭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한다.31) 또한 그는 “광주의 아픔이 잊혀지려면 적어도 1세기는 걸릴 것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광주의 5월은 우리 민족의 가슴에 너무나 깊은 상처를 남겼다. 희생자들의 민주화 공로가 뒤늦게나마 인정된 것은 다행이다.”라고 하였다.32)
추기경은 1983년 전두환 대통령 내외를 만났을 때의 일을 전하고 있다. 내외가 쉬지 않고 얘기하는 바람에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그의 권력론을 들을 수가 있다.33) “권력은 참으로 묘하다. 권력을 올바르게 사용하면 개인과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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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위의 책, p.280.
28) 위의 책, pp.286~287.
29) 위의 책, p.302.
30) 위의 책, p.327.
31) 위의 책, p.326.
32) 위의 책, p.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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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에게 도움이 되지만, 그 단맛에 취해 이성적 판단이 흐려지면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권력을 남성 전유물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군에서 남편이 별 한 개 장 성이면 부인은 별 두 개 장성”이라는 말이 있다.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여성도 권력에 매력을 느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봉사와 희생 없는 권력은 진정한 권력이 아니라 는 점이다.” 그 바람에 박정희 정권에 이어서 여전히 군사 반란이 일어나고, 간접 선 거로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국민이 역사의 주인이 되는 한국 정치의 민주화가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추기경은 1982년에 일어난 부산미국문화원 사건이 일어났을 때 위기도 있었다고 말한다 “아무튼 유신정권 때와 마찬가지로 제5공화국과 가톨릭교회는 편한 관계는 아니었다.
역시 군사 독재 정권이었다. 1982년 3월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은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은 관계를 더 악화시켰다.”라고 한다. “고조되는 반미 감정을 꺾기 위해 희생양을 찾고 있던 정부 입장에서 방화 사건은 호재였다. 더욱이 도덕적 우월 성을 확보한 가톨릭 위상까지 동시에 무너뜨리는 것은 그야말로 ‘도랑 치고 가재 잡 는’ 일이었다. 당시 정부 압력을 거부할 수 있는 언론은 한 군데도 없었다.”라고 말한 다.34) 그러나 추기경은 이에 대해서 “그래도 역사의 강물은 도도히 흘렀다. 민주화운 동 분수령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라고 보았다.
누구나 잘 알고 있듯이, 추기경은 “1987년 1월 14일 민주화운동의 도화선에 불을당기는 사건이 터졌다. 서울대생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이다.”라고 말한다. 고문으로라도 권력을 지탱하려는 정권의 추악한 실체를 그대로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그는 독재나 민주화운동 문제 이전에 하느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존엄성을 송두리째 짓밟은 만행으로 보았다. 이에 그는 추모 미사를 통해서 정권의 야만성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35) 그러나 전두환 정권은 하늘의 뜻인 민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호헌’으 로 맞서면서 장기 집권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있었다. 국민의 직선제 개헌 요구를 거부하였다. 직선제가 아니라, 오히려 장기 집권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있었다.
마침내 6월 민주화 항쟁을 통해서 그러한 흐름이 중단되었다고 한다. 명동성당의 농성자를 연행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때 너무나 유명한 “나를 밟고 지나가시오”라는 추기경의 말이 나왔다.36) 그는 이를 이 땅의 민주화를 향한 큰 걸음이기를 염원하는 상징적 조치였다고 말한다. 그는 “내 입장은 확고했다. 경찰병력 투입과 학생 연행은 상징적으로 시국 방향을 바꿔놓을 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이 나라가 민주화의 길로 나가느냐, 아니면 군사정권이 연장되느냐의 갈림길이라고 생각했다. 머지않아 승패가 드러날 것 같은 기 싸움의 마지막 승부처 같았다.”라고 파악하였다.
그 결과 군사 독재정권으로부터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추진하겠다는 대답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추기경은 이를 군사독재 정권이 국민과 야당의 민주화 공세에 백기를 든 6·29선언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는 “하느님 감사합니다. 드디어 한국에서도 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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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위의 책, pp.362~363.
34) 위의 책, p.366.
35) 위의 책, p.367.
36) 위의 책, p.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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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의 꽃이 필 것 같습니다. 감사기도가 절로 나왔다. 국민에게는 민주 쟁취이지만, 내게는 하느님께서 개입해 이루신 역사였다. 곧 군사정권 종식을 의미하였다. 봄 햇살 같은 희망이 마음을 들뜨게 하였다. 어느 누구도 그 점을 의심하지 않았다.”라고 말한 다.37) 이제 국민이 역사의 주인이 되어서 대통령을 간접 선거를 통해서가 아니라, 직 접 선거로 뽑게 되었기 때문이다.
추기경은 “그러나 뜻밖의 암초가 나타났다.”라고 한다.38) 양 김씨가 서로 대통령이 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그는 “군사 독재 정권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갈망했는가. 대통령 직선제는 거저 얻은 것이 아니라 수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피를 흘리고 목숨까지 잃으면서 쟁취한 획득물이었다. 그 소중한 기회가 타협할 줄 모르는 두 야당 세력에 의해 물거품이 될 판이었다”라고 보 았다.39) 그는 “당시 양 김씨가 타협을 통해 후보 단일화에 성공했더라면 우리나라 민주주의는 훨씬 앞당겨졌을 것이다. 그들이 끝내 타협점을 찾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민주주의에도 시간표가 있구나’라고 생각했다.”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노태우 정권을 거쳐서 1992년에 들어와서 문민정부가 들어서서 문민 통치 시대의 막이 오르게 되자 정말 기뻤다고 말한다. 그는 “아~이젠 목소리 높여서 정치의 민주화를 촉구하지 않아도 되고. 정권과 팽팽하게 대립할 필요도 없겠구나’라면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는 것이다.40)
3. 한국 사회의 인간화 지향
추기경이 사목 환경과 관련해서 정치와 함께 고민한 부분은 한국 사회의 현실이었다. 그가 즐겨 사용한 단어는 사회이다. 이때 그가 말하는 사회는 정치보다 넓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데, 정치와 경제 등까지 포함하는 의미에서의 사회로 표현하고 있다.41) 이와 함께 그가 주목한 것은 인간이었다. 인간이 바로 그와 같은 사회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인간이란 민족과 국민처럼 집단이기도 하였으며, 개인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추기경은 정치와 경제 등에 커다란 영향을 받는 한국 사회가 어떠한 곳인가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가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이것이 추기경의 또 다른 사목 환경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에 그는 사목 환경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이 땅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한국 사회의 인간화를 지향하고 자 하였다.
추기경은 인간에 대한 그의 깊은 관심이 어머니로부터 받은 교육에서 형성되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그에게 어머니의 존재는 참으로 절대적이었다. 이름 석 자와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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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위의 책, p.372.
38) 위의 책, p.372.
39) 위의 책, pp.373~374.
40) 위의 책, p.389.
41) 위의 책, p.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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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과 따지라고 하는 정도의 글자밖에 모르고, 가난 때문에 평생 고생했던 어머니에 게 곧은 신앙심과 여장부 같은 기질만은 대단하였다고 한다. 그는 그러한 어머니의 무릎에서 신앙심을 키우고 인간으로서 기본 교육을 받은 것을 하느님께 감사한다는 것이다.42)
이러한 까닭에 추기경은 조선을 빼앗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해서 여러 방식으로 저항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가 일본 제국주의를 치열하게 비판한 가장 큰 이유는 한국 민족이 사람으로서의자존심을 가지고서 사람답게 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본 제국주의가 한국 사람의 성과 이름까지 바꾸면서 황국 신민화시키려고 한 데에 서 잘 알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와 같이 한국 사람들이 일본과 일본인으로부터 탄압 받거나, 차별받고, 편견 속에서 살아가야만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징용을 나가거나 막노동 일거리를 찾아 고향을 등지고 떠난 한국인을 일본 형사들이 한국인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거나, 일본인 선원들이 한국인에게 발길질을 하면서 욕을 퍼부었던 것이라고 한다.43) 이것은 그와 허심탄회한 대화를 하기를 바랐던 일본인 교수의 발언에서 도 마찬가지였다.44) 그가 한국 학생들은 좀 교활한 면이 있다고 하면서, 그것이 한국인의 민족성인 것처럼 함부로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서 추기경은 한국 민족이 그렇게 된 것은 일제의 식민 통치가 한국인을 사람답게 살 수 없는 상황에 놓이도록 해서 그와 같이 되었다고 비판하였다.
여기에서 추기경은 어떤 민족이나 국민이 다른 민족이나 국민을 대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말해주고 있어서 주목된다. 일본인 교수처럼 학도병으로 끌려갔을 때 역시 허심탄회한 대화를 제의했던 나이 많은 일본인 고참 상사와의 관계에서도 이러한 모습을 살펴볼 수가 있다.45) 그들이 흉금을 털어놓고 얘기를 하자고 했을 때, 추기경 이 일본인이 한국인에게 행했던 차별의 부당성을 얘기하자 불이익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죠지 오웰이 영국의 식민지인 버마에서 경찰로 근무할 때 어떤 버마 사람과 가까웠을 때 일어났던 문제를 연상시켜 준다. 오웰은 자신과 버마 사람이 아무리 가까워진다고 하더라도, 결국 ‘대등하지 않은 친밀감’으로 이루어진 관계임을 깨달았다고 하였다.46) 이것은 그에게 영향을 받은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으로 이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추기경은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지배하는 한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는 사람으로서 올바른 관계가 맺어질 수 없다고 보았다.
이와 같이 추기경은 어떤 사람이나 민족에 대하여 차별을 할 경우에 계속해서 반발 해 나갔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군이 그가 머문 섬을 점령하고서도 일본 군인 들을 본토로 송환하기 시작했을 때도 그러하였다.47) 일본에 의하여 억울하게 끌려온 한국인들을 먼저 풀어주지 않는 데에 대해서 반발하였다. 한국인들을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는 미군에게 사람으로서 똑같이 대해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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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위의 책, p.54.
43) 위의 책, p.79.
44) 위의 책, p.80.
45) 위의 책, pp.88~89.
46) 고세훈, 조지 오웰, 2012.
47)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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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요구를 하였다. 그 결과 일본인으로부터 신변의 안전에 위험을 느끼고 있던 그 섬 의 한국인들은 모두 미군 지역으로 옮겨갈 수 있게 되었다.
미군과 인연을 맺은 추기경은 이들로부터 민족과 국적이 달라도 다른 사람이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된다. 그러한 경험은 신학 생일 때 추기경은 스승인 독일 출신의 예수회 신부인 게페르트 신부로부터 이미 겪은 바가있다. 그가 식민지 나라의 신학생인 추기경을 진정으로 아꼈다는 사실을 그때 새삼 깨달았다고 한다.48) 그것은 가톨릭 신자인 미군 헌병과 군종 신부와의 만남을 통해서도 경험하였다. 이들과의 만남은 수십 년이 지난 뒤에도 다시 만나는 관계로 이어 졌다.49) 그 미군 헌병과 헤어질 때 추기경이 정표로 준 사진을 32년째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추기경에게 “당신은 쉽게 잊을 수 없는 친구”라고 말하였다.
태평양의 한 섬에서 이러한 경험을 하였던 추기경은 “‘가톨릭은 역시 인종과 민족, 언어, 이념을 초월하는 종교다’며 감격스러워했던”50) 시절을 회고하고 있다. 이에 그는 자신이 신학생이라는 사실을 넘어서 천주교 신자라고 한다면, 어떠한 사람이든 사 람을 이렇게 대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분명하게 가지게 되었다. 거기에는 경상도 출신이냐 아니냐는 지연도,51) 학연도 문제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추기경이 어떠한 사회이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인간화를 지향하게 된 또 다른 이유라고 할 수가 있다.
한국 민족이 다른 민족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추기경은 귀국선 에서, 안동에서 본당 사제로 사목할 때 겪었던 일을 통해서 언급하고 있다.52)
그는 귀국선에서 한국인과 결혼한 일본 여인을 만났다고 한다. 그는 국적을 떠나서 남편을 찾아가는 한 여자를 내팽개친 한국 남자의 무책임한 행동에 실망했다고 한다.
또한 안동에서 사목하던 그는 남편에게 소박맞은 일본 여자를 식복사로 들인 적이 있었는 데, 그때도 아기 둘을 데리고 고생하는 것이 안쓰러워서 “일본으로 돌아가는게 더 좋은 것 같다”라고 타이르고 수중에 있는 돈을 톡톡 털어준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의 이러한 입장은 다른 민족이 한국 민족을 지배하거나, 차별하지 않아야 하듯이, 한국민족도 다른 민족에게 그렇게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으로,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아가는 원칙을 말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것이 한국을 힘으로 지배하면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한국인에게 준 일본과 일본인을 어떻게 용서하고 화해하면서 함께 지내 야 하는 고민으로 이어졌음은 물론이다.53)
그러나 일본으로 돌아온 추기경에게,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그에게 조국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법도 원칙도 없는 혼란스러운 현실 속에서 오로지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이념으로 다투고 분열하고 있었다. 이들이 나라를 찾은 국민에게 무엇이 가장 먼저 필요한가에 대해서 정당한 관심을 거의 가지지 못하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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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위의 책, p.86.
49) 위의 책, pp.104~108.
50) 위의 책, p.103.
51) 위의 책, p.215.
52) 위의 책, p.111 및 p.147.
53) 위의 책, p.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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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이다. 그는 부산항에 들어온 선박에서 일어난 일들을 통해서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다.54)
사람들은 일본에서 온갖 설움을 겪은 동포들이 며칠 동안 먹지 못해서 힘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배려하기보다도 어떤 청년들은 장황한 정치 선전을 하는가 하면, 깡패들이 승객들의 짐, 부녀자들의 핸드백을 약탈하는 등 동포들에게 새로운 어려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결국 귀국 동포들의 감정이 폭발했다고 한다.
그리고 추기경은 대구에서 있었던 개인적인 경험을 계속 언급하였다. 부산으로 짐을 찾으러 가던 그를 심문한 경찰관의 고압적인 태도로 대판 언쟁을 벌인 적이 있었다고 한다.55) 이에 대해서 그는 “일제 압제에서 풀려났으면 국민들이 서로 감싸 주면서 한마음이 되어야 할 텐데 경찰관의 태도에서 보듯 현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난 그 경찰관이 미운게아니라 조국의 현실이 서글펐던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그에게 어떠한 나라가 되어야 국민이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 수 있는가에 대한 더욱 깊이 생각을 하도록 만들었다.
추기경은 정치인과 국민이, 그리고 많은 지식인이 극한적인 이념 대결을 벌이고, 곳 곳에서 폭력 투쟁이 일어났던 한국 사회의 현실을 크게 우려하였다. 그 결과 해방된 지 5년 만에 같은 민족끼리 서로 죽이는 6·25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때 그는 전쟁은 반드시 피해야 할 비극이라고 분명하게 말한다.56) 수많은 사람이 다치거나 죽거나, 그리고 이산가족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쟁이 끝나고서 흉년과 함께 많은 사람의 가난으로 이어졌으며, 사람들이 그야말로 초근목피로 연명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에 그는 본당 사제가 되었지만, 신자이든, 비신자이든 영혼의 구원에 앞서서 이들의 어려움을 실질적으로 돕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에 그들에게 먹을 것을 구해주거나, 고해소에서 직접 현금을 건네주기도 하였다.57) 그는 김천의 학교에 근무할 때도 학생들을 위해서 그렇게 하였다.58) 이들이 배워야만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한국 사회의 인간화를 지향했던 추기경은 독일 유학을 통해서 그리스도교 사상에 기초한 인간관을 정립할 수 있었다.59) 또한 그는 당시 열리기 시작 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다름 아니라, 「현대세계의 사목헌 장」이 천명하였듯이, 인간은 구원되고, 인간 사회는 쇄신되어야 하기 때문이었다.60) 이러한 까닭에 그는 독일 유학 시절 한국인 광부나 간호사나 입양아까지 사목적 관심을 가지려고 노력하였다.61) 그는 “이 때문에 학업에 지장이 많았지만, 어려운 사람을 보고 가만있지 못하는 성격이라 웬만하면 요청에 응하려고 했다”라고 한다. 외국에 와서 고생하고 있던 그들이 어려운 일에 부닥치면 도움을 청할 곳이 없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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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위의 책, pp.111~113.
55) 위의 책, pp.115~116.
56) 위의 책, p.129.
57) 위의 책, pp.138~142.
58) 위의 책, pp.157~158.
59) 위의 책, p.163.
60) 위의 책, p.271.
61) 위의 책, pp.168~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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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도와 달라”, “꼭 와 달라”고 하는 동포의 간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그는 어머니가 자신에게 보여준 사랑처럼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믿고 바라고 견디어 내는’ 사랑을 온전히 실천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독일에서 귀국한 추기경은 본격적으로 한국 사회의 인간화를 주장하였다. 그것이 그가 한국 사회에 이바지하는 길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교회를 위한 교회가 아니라, 세상에 봉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그는 “난 가톨릭 시보가 비록 종교 매체이지만 비신자도 읽고 싶은 신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상을 위한 교회’가 되려면 종교 매체도 세상 사람들과 소통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사설은 내가 거의 다 썼는데 사회적 사건과 흐름을 신앙적 눈으로 조망하는 주제도 심심찮게 다뤘다.
어느 날 신문사에 드나드는 정보과 형사가 “가톨릭 시보에서 이런 사회적 얘기도 쓰네요.”하며 관심을 보인 적이 있다.”라고 하듯이,62) 사회의 현실에 대한 그의 관심을 구체적으로 드러내었다.
이후 마산 교구장이 된 추기경은 단순한 관심만이 아니라, 더욱 적극적으로 한국 사회의 인간화를 추구하고자 하였다. 새로운 양상이 나타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정치의 비민주적인 상황만이 아니라, 정치와 유착된 경제가 낳은 사회의 비인간적인 상황에 대해서 발언하게 된 것이었다. 이에 그는 1967년 강화도의 심도 직물 사건에 가톨릭 노동청년회 총재 주교 자격으로 개입하였다.63) 다름 아니라 그가 노동자의 인권을 옹호하기 위해서 정면에 나선 것이었다.
추기경은 ‘노동자’라는 명칭조차 호사스러운 시절이라고 말한다. 노동자들이 인간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노동자들이 일하는 현장의 실태가 ‘물질은 공장에 들어가면 좋은 상품이 되어 나오는데, 사람이 공장에 들어가면 폐품이 되어 나온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는 것이다.64) 그와 같이 노동자가 열악한 환경에서 터무니없이 낮은 임금을 받고 일하게 된 것은 농촌의 희생을 전제로 한 산업화 정책의 희생양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그는 심도 직물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은 노동자의 기본적 인권과 권리를 짓밟는 노조 탄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에 추기경은 ‘사회정의와 노동자 권익 옹호를 위한 주교단 공동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노동자도 인간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노동자 역시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유 지하면서 인간의 권리를 지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회 정의라는 것이다. 이는 추기경이 추구하는 한국 사회의 인간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추기경은 이러한 충돌이 장차 한국 사회에서 계속해서 일어날 것으로 인식하면서, 첫 충돌이 교회와 연관되었듯이, 교회가 세상을 위해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일로 받아들였다.
이것은 한국 교회가 예민한 사회 문제에 대해 주교단 성명을 통해 최초로 발언한 것이었다. 따라서 추기경은 한국 천주교회가 교회라는 울타리를 넘어서 바깥의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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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위의 책, p.176.
63) 위의 책, pp.192~203.
64) 위의 책,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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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눈을 돌린 점에 대해서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가 그토록 관심 을 가졌던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에 대하여 발언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내 생각을 지배하는 가장 큰 주제는 예나 지금이나 ‘인간’이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존엄한 존재이기에 그 권리와 존엄성은 언제 어디서든지 지켜지고 보호받아야 한다. 이 같은 신념은 1970년대와 1980년대를 숨 가쁘게 헤쳐나오는 동안 내게 절대 적 판단 기준으로 작용했다”라는 사실을 크게 강조한다.65) 노동자이든, 농민이든 누구든지, 인간으로서 존엄성과 권리가 지켜지고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그가 동일방직 노조 탄압 사건에도 뛰어들었던,66) 또한 오원춘 사건처럼 짓밟히는 농민 운동에 함께 하였던67) 이유라고 말한다.
추기경은 서울대교구장으로서 취임 미사 강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너희들이 모시고 있는 그리스도를 생활로써 증거해 달라’고 하는 사회 요구를 명심해야 합니다. 이제 교회는 모든 것을 바쳐서 사회에 봉사하는 ‘세상 속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라고68) 다시 강조한다. 이에 그는 추기경은 정치와 경제 두 부분에 걸쳐서 사회의 인간화를 추구하고자 했다. 그 결과 재벌이나 기업가만이 아니라, 그와 연결된 정치권력과도 더욱 대립하게 되었다. 국민이 역사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군사 독재 정권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경제와 유착되었기 때문이다. 정치의 비민주적인 상황과 사회의 비인간화가 그와 같이 서로 맞물려 있었다. 경제성장을 빌미로 자본주 의의 기본 원칙까지 송두리째 무시하고 약자의 희생만을 강요하는 정권의 재벌 보호 정책은 끝이 없어 보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8·3 경제 조치에 대해서도 재벌을 비호하는 정책으로 비판하였다.69)
10월 유신으로 영구집권을 꾀했던 박정희 정권은 국민의,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를 심각하게 탄압하였다. 국민이 역사의 주인이 아니라고 하듯이, 이들은 인간을 객체나 도구로 전락시키고자 하였다.70) 국민이 인간으로서의 권리인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의 자유를 보장받을 수가 없었음은 물론이다.71) 그 결과 추기경은 한국 사회가 사제 든 누구든지 입바른 소리를 하려면 용공 분자로 몰거나, 도청 등으로 사람을 감시하 며, 마음대로 학생이나 직장인과 노동자를 퇴학, 퇴직하거나, 이들을 고문하며 구속하 거나, 고문, 심지어 죽음까지도 각오해야 하는 서슬 퍼런 억압의 공포 정치 시대가 되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이러한 탄압과 억압으로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하는 초헌법적인 철권통치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추기경은 이를 당시 한국 사회가 국가권력에 의한 폭력으로 말미암아 얼마큼 비민주적이며, 비인간적인 사회가 되었는가를 잘 알려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국민의 입과 귀를 더 단단히 틀어막고 비판보다 순종만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 사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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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위의 책, p.198.
66) 위의 책, pp.291~296.
67) 위의 책, pp.297~302.
68) 위의 책, p.211.
69) 위의 책, p.249.
70) 위의 책, p.245.
71) 위의 책,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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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아니라 점점 어둠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 결과 그는 국민 가운데에서 가난한 사람들, 고통받는 사람들, 실의에 바진 사람들, 괴로워하는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하소연할 곳이 없는 억울한 사람들, 생존권을 위협받는 힘없는 사람들, 버림받거나 소외된 사람들, 그래서 약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를 지킬 수가 없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에 추기경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이 땅에서 가난을 몰아내고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5·16을 일으킨 것이 아닙니까? 그런 뜻을지닌 대통령께서 노사분규 현장에 가보면 노동자 편을 들어주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실 교회가 하 는 일은 대통령께서 하셔야 할 일입니다.”라고 말하였다.72) 따라서 그는 “정치, 경제 등 사회 모든 문제에서 인간 기본권이 유린당하거나 정의에 어긋나는 일이 있으면 ‘아니오’라고 말해야 합니다. 가톨릭에는 복음 정신에 입각한 인간관, 국가관, 세계관 이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하느님 모상으로 창조된 존엄한 존재입니다. 이 존엄성은 국가권력도 침범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존엄한 인간이 인간답게 살고, 또 충분히 행복을 누리도록 해주는 것이 정치 원리라고 생각합니다.”라는 사실을 강조하였 다.73) 그는 하느님이 원하시는 나라가 사람들이 억압과 폭력의 공포를 느끼지 않는 사회여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권력이 어떠한 경우에라도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를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추기경은 이러한 상황이 전두환 정권 때에도 계속 이어졌다는 사실에 대해서 매우 안타까워했다. 10·26과 함께 그러한 상황이 끝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연장되었기 때문이다. 군대까지 동원해서 5·18 민주화운동을 잔인하게 진압하는 일이, 그것도 북한이 아니라, 군사 독재정권에 의해서 6·25 전쟁 이후 최대의 민족적 비극이 일어났기 때문이다.74) 이는 국가 권력에 의한 한국 사회의 비인간화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것으로써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부산 미국문화원 사건이 일어났을 때 독재정권이 이를 기회로 삼아 “도덕적 우월성을 확보한 가톨릭 위상까지 동시에 무너뜨리”려고 하였다는 것이다.75) 그와 같이 비민주적이며 비인간적인 정권이 저지른 일로써 그 정점에 있었던 사건은 1987년에 들어와서 국가 권력이 서울대생 박종철 군을 고문하여 죽인 것이었다. 추기경은 추모 미사를 통해서 “고문으로라도 권력을 지탱하려는 정권의 추악한 실체를 그대로 드러내었다.
독재나 민주화운동 문제 이전에 하느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존엄성을 송두리째 짓밟은 만행”이라고 하면서, 독재정권의 야만성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76)
그러나 추기경은 1987년 6월 항쟁으로 정치와 경제의 민주화를 통해서 한국 사회 의 민주화, 즉 인간화를 추구하던 수많은 사람에게 계속 고통을 주거나, 피를 흘리거 나, 희생시키던 군사 독재정권이 그들의 의도와는 달리 무너지고 말았다고 말한다. 그는 이제 한국 사회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위한 기반을 비로소 확보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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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위의 책, p.263.
73) 위의 책, p.260.
74) 위의 책, p.326.
75) 위의 책, p.366.
76) 위의 책, p.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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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한국 천주교회의 쇄신 추구
세상의 정치와 경제의 민주화와, 이를 바탕으로 사회의 인간화를 바랐던 추기경은 한국 천주교회의 쇄신과 변화를 또한 바랐다. 교회를 위한 교회가 아니라면, 세상 안에 있는 교회 역시 계속해서 쇄신되기를 바랐다. 교회의 구성원들 역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즉 그는 교회가 교회다운 모습을 갖출 때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어머니로부터 인간으로서 기본 교육을 받았던 추기경은 사람으로서, 신자로서 어떠한 길을 걸으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일찍부터 생각하였다.
그는 자신이 사제가 되는것이 올바른 선택인가를 깊이 고민하였다. 장사를하는 사람이 맞느냐, 결혼해서 가정을 가지는 것이 그에게 맞는가의 문제였다. 그러나 그는 사제의 길을 이미 정해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77) 이제 그는 사제의 길에서 그가 잘살 수 있는가의 고민으로 이어졌다.78) 그가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 아마도 그의 말처럼 신앙적 순수함 때문에 세심병과 같은 결벽증 같은 증세를 가졌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영혼을 구제하는 사제가 될 자격이 없다는 자격지심까지 들기도 하였다. 만일 신부가 될 생각도 없이, 제대로 살 의지도 없이 신학교 교문을 들어섰다면 양을 훔치려고 우리를 넘는 도둑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생각까지 하였다. 그만큼 그가 보기에 사제란 언제, 어느 곳에서나 위선적인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신학생으로서 추기경이 크게 고민한 문제는 사제가 된다면 국가를 위해서, 사람을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였다. 결국 이것은 교회가, 사제가 이 세상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의 문제였다. 이러한 까닭에 그는 잊을 수 없는 인생의 스승으로서 공베르 신부와 게페르트 신부와 장면 박사를 들고 있다.79) 한국인이든 아니든 간에, 소신학교의 은사인 공베르 신부나 상지대학 은사인 게페르트 신부나 서울의 신학교 교장이었던 장면 박사 모두 그에게 한국인으로서, 사제로서 교회와 민족을 위해서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가를 보여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추기경의 사제론이 나왔다고 하겠다. 수도자가 이 세상에서 인간으로서, 신자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언급했던80) 그가 회고록에서 가장 초점을 맞춘 내용은 사제론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이것은 그가 사제 수품일을 선택한 이유에서도 찾아볼 수가 있다. 1951년 9월 15일 즉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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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위의 책, p.61.
78) 위의 책, pp.63~67.
79) 위의 책, pp.439~444.
80) 김수환 추기경 전집(2001)의 제 11권인 ‘수도자의 길’에는 그러한 내용이 실려 있다. 특히 「수도자 의 ‘인간적인 완성’을 위하여」라는 글에서는 “그러나 수도자가 신분으로 의식된 가운데, 즉 ‘교권주 의’에 준하는 ‘수도이즘’에 빠짐으로써 수도생활의 본질적인 복음생활이 흐려져 있지 않느냐 하는 것 입니다.”라고 하였다(신치구 엮음,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1999, pp.250~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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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에 사제 수품일로 선택하였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 걸은 분 인 성모님처럼 고통 속에서 예수님이 가신 길을 묵묵히 따르는 것이 사제의 길이 아니겠느냐는 것이었다.81) 그 전날인 14일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이고, 수품 다음 날인 16일은 한국의 첫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순교일이었는데, 사흘 연속 사제에게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정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추기경은 사제가 착한 목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82) 이에 그는 과연 한평생을 착한 목자로 살 수 있을까? 장점보다 단점이 많은 사람으로서 오히려 하느님 앞에 죄인으로 남을 가능성이 더 높지 않는가? 라는 물음을 던졌다. 이것은 그가 주교가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대주교가 되고, 추기경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에게 착한 목자의 본보기는 형인 김동한 신부였다.83) “형님의 약점은 바로 이 착한 마음에 있다. 남의 사정 다 들어주고, 때로는 사람을 너무 믿어서 속기도 하였다. 이런 선한 어리석음 때문에 교회 어른과 주변 친지로부터 진짜 어리석은 사람으로 오해를 받아 소외당하는 시련을 겪기도 하셨다. 그럴 때마다 형님은 묵주를 돌리면서 성모님께 의탁하셨다.”라고 한다. 그리고 그는 “하지만 공부는 형님이 훨씬 잘했고, 마음도 착했다”라는 사실을 더욱 강조한다.
국가나 교회가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던 시 절에 그는 희망원을 설립하여 행려병자와 장애인처럼 가난하고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살았다. 추기경은 이러한 형님에 대해서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 13)”라는 말씀을 온전히 실천하다 가신 분이라고 믿는다.”라고 말한다. 이에 추기경은 이러한 형의 삶과 신앙이 같은 사제로서 그가 걸어가야 할 길로 생각했다. 형이 따르고자 했던 예수님처럼 밥이 되어 주는, 먹는게 아니라, 먹히는 삶을 사는 사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추기경은 이러한 사제만이 진정 교회를 위해서나, 이 세상을 위해서 제대로 살아갈 수가 있다고보았다. 이것은 그가 사제가 된 이후 그가 걸어갔던 길이 잘 말해주고 있다. 안동 본당에서 사제나 신자들 모두 너무나 가난했다고 한다. 이것이 당시 교회 의 현실이었다고 한다. 이에 그는 당시 ”나는 안동 본당에서 신자들과 1년 반 동안 ‘소박한 꿈’을 꾸고 그 꿈을 키웠다. 나 자신을 온전히 바쳐 신자들의 영혼 구원은 물론 가난까지 구제하겠다는 꿈이었다. 어디 가서 돈을 끌어다 일자리를 만들어 주면 삶이 신앙이고, 신앙이 삶인 가족 공동체를 만들 수가 있을 것 같았다.”라고 한다.84)
두 가지를 모두 실천하겠다는 것은 추기경에게 소박한 꿈이 아니라 너무나 큰 꿈이 었다. 이렇게 해야 당시 교회의 현실이 변화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이를 위해서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안 주교를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하였으며, 신자들에게 고해소에서 돈을 건네주기도 하였다. 김천의 학교에서 교장으로 사목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배움이 필요한 가난한 학생들을 돕고자 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이렇게 사제란 언제나 먼저 신자에게 다가가면서 그들과 하나가 되고자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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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p.134 및 p.189.
82) 위의 책, p.143.
83) 위의 책, pp.343~348.
84) 위의 책,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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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들과 격의 없이 가까이 지내면서 동고동락했다고 한다. 그때 그는 사제란 언변이나 지식보다
카리스마가 필요하고, 하느님께서 함께 해주셔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85)
당시 추기경이 가난하고 어려운 형편의 사람들을 돕는데, 신자와 비신자를 가려서 하지 않았다는 사실 또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한국 교회에 소위 ‘밀가루 신자’라는 말이 생기기도 했지만, 그는 누구나 전후의 폐허 속에서 굶주림의 고통을 그나마 덜 수 있기를 바랐다.86) 여기에는 학도병으로 끌려가기 직전의 경험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는 사찰이었던 요코하마 대기소에서 감리교에서 목사 안수까지 받고 입대한 친구와 함께 성탄을 보냈던 일을 회상하고 있다. 그때 그는 벌써 일치 기도회(?)를 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옆에 부처님까지 모셔놓고서 말이다.87) 이러한 그의 태도는 그가 세계 주교회의에서 신자와 비신자의 혼인에 대한 교회의 변화를 요구한다든지,88) 유학자인 김창숙 선생의 묘소 참배로까지89) 이어졌다. 미군이 점령한 섬에서 만난 신자 미군과 사제를 통해서 가톨릭이란 어떠한 조건을 넘어서서 어떠한 사람들도 똑같이 대해야 한다고 배운 깨달음을 사제로서 현장에서 실천하고자 했다.
이때 추기경은 한국 천주교회가 어떠한 상황에 있는가를 깊이 파악하고자 했다. 이것은 그가 살고있는 시대에 대한 인식으로 연결되었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나라를 잃어버린 경험도 했으며, 해방 이후에는 이념의 문제로 조국이 분단되었고, 분단된 나라에서도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혼란스러웠다. 또한 교회역시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를 잘 파악하고 있지 못하였다. 이에 그는 한국 천주교회사의 흐름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자신이 살았던 시대와 사회에 어떠한 표징이 있는가를 살피고자 하였다. 조선시대의 순교사와 일제 강점기의 박해사와, 분단되면서 파괴된 북한 교회의 현실에 대한 관심도 그것이다. 6·25전쟁이 일어나고, 그 이후에 전 개된 시대가 말해주고자 하는 표징을 읽으려고 계속 노력하였다. 그는 이것을 한 나라에서 인간으로, 사제로 사는 사람으로서 당연한 책무라고 보았다.
한편 추기경은 당시 한국 천주교회가 세계 천주교회 속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파악하였다90). “또 이 무렵에 한국 교회는 어떤 의미로 소외를 당했다. 기세 높은 일본인들이 제2차 세계대전 패망 후 정신적 공허와 가난에 시달리자, 교황청은 이때로 일본 복음화
의 호기로 삼고 인적, 물적 선교자원을 집중투자했다. 비오 12세 교황은 세계적 선교회와 수도회에 서한을 띄워 일본에 진출할 것을 권고했을 정도이다.”라고 한다. 추기경은 직접 이러한 경험을 하기도 했다. 어느 수도회에 한국 진출을 요청했다가 곤란하다는 대답을들었다. “그때 섭섭한 마음과 함께 한국 교회는 스스로 일어서야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했다. 이에 그는 어떻게 하면 한국 천주교회가 자립할 수 있을까에 고민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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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위의 책, p.144.
86) 위의 책, p.159.
87) 위의 책, pp.89~90.
88) 위의 책, p.195.
89) 위의 책, pp.445~447.
90) 위의 책, pp.159~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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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추기경은 교계제도가 설립된 이후 한국 천주교회의 변화도 정리해본다. 1968년 10월 6일에 있었던 시복식에 대해서 그는 한국 교회에 축복이 내린 날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한국 교회가 선교 역사상 유례없이 평신도의 힘으로 세워진 데다 박 해와 전쟁의 시련 속에서도 해가 다르게 성장하는 모습이 대견스러워서 그러했을 것이라고 보았다.91) 자신이 추기경이 된 사실이나, 103위 성인식 및 세계 성체대회가 열린 것도 한국 천주교회가 세계 천주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자신의 위치를 확보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가 주도한 아시아 주교회의 연합회의 창설도 여기에 포함시킬 수가 있을 것이다. 그만큼 이전과 달리 세계 교회가 한국 교회를 인정 한다는 것이다.92)
이에 대해서 추기경은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소외는 한국 교회에 축복이 되었다고 말한다.93)섭섭한 마음과 함께 한국 교회가 스스로 일어서야 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방과 분단과 전쟁을 거친 한국 천주교회가 이후 크게 달라졌다는 것이다. 한국인 신자와 한국 천주교회가 자립적으로 주도적으로 개척해 온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일본 교세는 정체돼 있고, 한국 신부가 일본 신부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으며, 역동적인 성장력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그는 이 또한 하느님께서 한국 교회에 내려 주신 축복이라고 한다. 1년에 10만 명이 늘 정도였다는 그것이 기적이라고 한국을 방문한 교황에게 설명하였을 정도였다.
여기에서 추기경의 독일 유학이 가지는 의미를 살펴볼 수가 있다. 그의 일본 유학 배경에는 그에게 일본을 알기를 바란 교회 지도자의 바람이 작용하였다.94) 제2차 세 계대전이 끝나고서 미국으로 가고자 했던 것과 독일로 유학을 가고자 했던 것은 그 경우와 조금 달랐다.
그가 한국의 천주교회가 성장하려면 신부들이 그리스도교 전통이 깊은 나라에 가서 하나라도 더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95) 독일의 유학은 그에게 “마치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만 같았다”라고 한다. 그는 “신학교 시절에 배운 것보다 훨씬 앞선 내용을 접할 때는 ‘한국은 멀어도 한참 멀었구나’ 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인간에게 기쁨을 주는 것은 수없이 많지만 배움의 기쁨도 어느 것에 뒤지지 않는다.”라고 했다. 다시 말해서 그가 보기에 한국 천주교회가 크게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독일로 유학을가서 추기경은 교황 요한 23세의 등장에 환호하기도 하였다.96) 제2 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추기경은 교회가 변화되는 시대의 흐름에 적응해서 세상 한가운데로 나가 봉사하는 하느님의 백성으로 거듭 태어나자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자신이, 즉 교회가 먼저 쇄신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는 이를 교회가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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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위의 책, p.227.
92) 위의 책, p.232.
93) 위의 책, pp.160~161.
94) 위의 책, pp.78~79.
95) 위의 책, p.161 및 pp.169~171.
96) 의의 책, pp.169~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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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았다. 희망의 대역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한국 교회 역시 이러한 세계 교회의 흐름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제 그가 바랐던 것처럼 한국이 교회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그는 귀국 후 가톨릭 시보 사장으로서 한국 천 주교회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대한 소개를 하면서 참여하였다.
가톨릭 시보의 사장 신부로서 그의 활동은 잘 알려져 있다. 당시 그는 한국의 천주교회가 어떻게 변해야 하고, 무엇을 쇄신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말한다. 고심 끝에 유명한 목사, 스님, 그리고 명사들에 가톨릭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루빨리 고쳐야 할 단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등의 질문을 했다고 한다. 그분들이 보내준 답장 원고를 보니까 가톨릭을 사정없이 비판하는 글이 많았다. 그때 그는 교회 밖 사람들의 천주교에 대한 인식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원고들을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그대로 신문에 게재했다고 한다. 이에 대한 장면의 우려에 대해서도 그는 “그래서 세상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 알아야 고칠 것은 고치고, 바로잡을 것은 바로잡지 않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97)
따라서 추기경은 마산 교구장이 되자 취임사를 통해서 한국 천주교회의 쇄신을 매우 강력하게 요청했다. 그는 “우리 교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제시한 쇄신 정신과 사목 정신을 최선을 다해 신부들과 수도자, 신자들의 협동하에 구현시켜 나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요청을 우리가 확신하기 위해서는 복음의 빛 아래 깊이 반성하고 각성해야 합니다. 우리는 밖으로 도움을 기대하지 말고 우리 안에서 사도적 인재도, 물질적인 면도 스스로 발굴하고 육성시키는 방향으로 완전히 생각을 바꿔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98) 이것은 신학생으로서, 사제로서, 유학생으로 그가 경 험했던 모든 사실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교회가 먼저 반성하고 각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완전히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가 보기에 이제 교회의 변화와 쇄신을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서울대교구장이 되면서 취임 미사 강론으로 이어진다. 그는 당시까지 세상과 대화하거나 삶을 나누는 일은 전무하다시피 했던 교회가 세상 한가운데 있으면서 세상사에는 무관심한 채 교회를 위한 교회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99) 그리고 그는 어떠한 경우이든 교회가 이 세상에서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세 상에 관심을 가지더라도 교회나 구성원이 어떤 세속적 욕심도 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는 신자들에게 삶이 신앙이 되고 신앙이 삶이 되는 교회를 바랐다.
추기경은 마산 교구장 시절에 자신이 추구하고자 했던 사제론을 언급하였다.100) 그 러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 사제란 아무리 고달파도 신자들과 희로애락을 나누면서 살아야 한다. 그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것이다. 사제가 가난하거나 소외된 사람들과 동고 동락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사제로서, 주교로서 신자들과 식사를 같이 하거나 대화를 하면서 사목에 관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그들과 가까이에서 호흡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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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위의 책, pp.176~178.
98) 위의 책, pp.190~191.
99) 위의 책, p.211.
100) 위의 책, pp.192~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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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다고 한다. 그는 교회 역시 세상 안에 있기에 세상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을 덜어 주면서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펼쳐나가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으로 보았다. 즉 그는 사제가 누구인가를,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이 세상을 위해서 교회가, 사제가 먼저, 끊임없이 쇄신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추기경의 평신도론도 여기에서 구체적으로 나온다.101) “그래서 본당을 가급적 자주 찾아다니면서 신설 교구의 기초를 잡아 나갔다. 기초작업이라고 해봐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평신도가 참여하는 사목협의회를 결성하거나 사제 평의회를 결성하거나 사제 평의회를 조직하는 일 정도였다. 사제와 평신도 간 대화 창구를 만들기 위해 신자 강습회를 열었던 기억도 난다. 그때 나는 신자들에게 평신도도 신부 수 녀와 똑같은 하느님 백성이라는 사실을 인식시키고, 더 나아가 그들에게 맡겨진 시대적 소명을 일깨워주려는 생각이 간절했다.”라고 말한다. 평신도나 수도자나 사제나 세 례를 받은 신자로서 동등하며, 그 직무만 다르다는 것이다.102) 그는 김지하를 통해서 평신도라고 하더라도, 교회에서 아무도 심각하게 생각해 보지 않은 사목적 문제를 훤 히 내다보듯 예견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103) 그는 평신도의 참여에 대해서 후일 다시 언급하였다. 그는 복음자리 공동체를 만들 당시 정일우 신부와 제정구씨의 관계를 보면서 사제가 평신도를 ‘위해서 산다고 하는 말이 맞지 않다고 말한다. 오히려 서로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104)
그러나 추기경의 교회 쇄신론은 교회 내의 상당한 저항을 받게 되었다.105) 교회가 왜 정치 문제에 깊숙이 개입하느냐 왜 주교까지 추기경까지 나서느냐, 교회 피해가 얼마나 큰지 아느냐 등으로 그를 비판하였다. 이에 정의구현사제단과 반대 성향을 보이는 신부들이 ‘구국사제단’을 결성했다. 평신도 공화당원으로 구성된 대건회라는 단체도 있었다. 이를 그는 교회의 분열로 보았다. 이러한 상황은 함께 뜻을 같이했던 정의구현사제단과의 갈등도 민주화운동이 진행되면서 일어났다. 이들은 왜 추기경이 더 적극적으로, 더 과감하게 움직이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 그는 시간이 조금 지난 후부터는 정의구현사제단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살았다고 말한다.
추기경은 이러한 상황 전개에 대해서도 설명하였다. 교회까지 이념논쟁에 휘말리는 형국이었다고 한다. 논란의 핵심은 교회의 정치 개입이 정당한가, 아니면 분열을 조장 하는 이탈 행위인가 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그는 사제 본분론을 다시 주장한다.106) “전주교구 신부들에게 말한 대로 신부들이 본당과 사목활동까지 나 몰라라 하고 조직적 민주화운동을 하는 데는 찬성하지 않았다. 때론 불의에 저항하는 신부들의 올곧은 양심은 높이 살 만하다. 그러나 정치·사회 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는 데는 찬성하지 않는다. 더구나 사회참여 활동으로 인해 교회가 분열되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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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위의 책, p.194.
102) 김수태, 「꿈을 실천하는 평신도」, 신앙과 생활, 2001.
103)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p.277.
104) 위의 책, p.428.
105) 위의 책, pp.269~271.
106) 위의 책, p.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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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것이다. 그는 “나는 이 땅에서 독재의 맹위가 사그라들고 민주주의의 꽃이 피어나길 열망하면서 정치 문제에 대한 발언을 많이 했으나 그 선만큼은 분명히 지키려고 노력했다. 아니, 내 나름대로 그 선을 지켰다고 생각한다”라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분열에 대해서 “그리고 지금까지 마음에 남아 있는 앙금은 없다. 시간이 좀 흐른 후에는 모두 웃고 지냈다. 다같은 신앙적 형제인데 사소한 정치적 견해차가 무슨 큰 걸림돌이 되겠는가”라고 한다.107) 그럼에도 당시 교회의 상황은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이러한 까닭에 추기경은 사제로서 자신의 삶과 신앙에 대해서 성찰과 반성을 하였다.108) “참으로 기막힌 일이다. 내 신분, 환경, 받는 대접이 무의식중에 나를 ‘귀하신 몸’으로 만들어놓았다. 참으로 슬픈 일이다. 일종의 귀족 의식이 나도 모르게 몸에 뱄다. 어제 저녁 기도에서 “그리스도 당신처럼 모든 사람의 종이 될 만큼 가난한 자가 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는데, 이 얼마나 엄청난 모순인가. 나는 가난한 집 출신이다. 여러 해 동안 남이 집 셋방에서 살았다. 그런데 신부가 되면서 가난을 점점 잊어버리더니 주교, 대주교, 추기경이 되면서 불행하게도 귀족이 되어 버렸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당신을 낮추신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랑은 겸손이다. 그걸 먼저 깨달아야 했다”라고 고백한다,
추기경은 1981년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기후고 신부의 병문안을 갔을 때 있었던 일을 들려준다.109) 그가 평소 입었던 속옷 바지를 보았다고 한다. “그 속옷은 내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복음적 청빈의 표징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몹시 부끄러웠다. 나는 말할 것도 없고, 한국의 어느 신부가 그처럼 낡은 속옷을 입어 본 적이 있겠는가. 서울대교구장으로 있으면서 내 신앙과 생활이 과연 복음적인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 보곤 했다. 대답은 ‘아니다’에 가까웠다. 특히 사제로서 지향해야 할 복음적 청빈 생활에는 분명하게‘아니다’였다. 내가 좋아하는 설교 주제 가운데 하나가 복음적 청빈인데도 말이다.”라고 말하였다.
따라서 추기경은 한국 천주교회가 성장하면 할수록 더욱더 쇄신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교회의 지속적인 쇄신과 변화 없이는 세상을 위한 교회란 어쩌면 모순적이기 때문이다. 추기경은 이를 위해서 사제에게 세상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그곳에 머무르고 있는 하느님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인 인간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깊이 고민하기를 바랐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가 민족과 국민의 아픔에, 시대와 사회의 아픔에 제대로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이다.
5. 사목 환경에 대한 새로운 고민
추기경의 사목 환경은 6월 민주화 항쟁의 결과 획득한 직선제 개헌이라는 정치의 민주화를 통해서 크게 달라졌다. 국가권력이나 기업가 등에 의해서 인간의 존엄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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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위의 책, p.290.
108) 위의 책, p.313.
109) 위의 책, pp.349~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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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권리가 제약되었던 비인간적인 사회의 현실에도 상당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러나 추기경은 질문을 계속해서 던졌다. 다름 아니라 이제 한국 사회가 어떠한 미래를 추구해야 하느냐의 문제였다. 이때 추기경이 1981년에 있었던 한국 천주교회 설립 150주년 기념미사에서 했던 말을 떠올리게 한다. “한국 교회는 일제 강점기에도 여러 형태로 탄압을 받았다. 북한 교회는 해방 직후부터 말 살되다시피 하는 고난의 길을 걸었다. 한국 전쟁 후에는 가난과 싸우면서 시대의 표징을 읽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협박과 편견에 굴복하지 않고 이나라 민주화운동의 선두에 섰다.
(중략)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현재와 미래이다. 사람이건 조직이건 위험 신호는 자만심에 도취되어 있을 때 나타난다. 우리는 교회사를 기릴 뿐 아니라, 민족의 현재를 변혁시키는 누룩이 되고, 민족의 미래를 밝히는 빛이 되고자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110)
추기경은 더이상 과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 영광만을 자랑할 때가 아니라고 한다. 정작 중요한 것은 현재부터, 그리고 미래라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세상이나 교회가 변화된 사회 현실이나 사목 환경을 새롭게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시대의 표징을 제대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야 미래로 올바르게 나아갈 수가 있다는 것이다. 즉 한국 사회와 교회가 이제부터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추기경은 교구장을 그만두는 1998년까지, IMF를 거치면서 회고록이 나온 2004년까지 크게 달라진 사목 환경이 어떠한가, 어떻게 대응하면서 살아가야 하는가를 언급하였다.
여기에서 비판적인 예언자로서 추기경의 역할이 다시 드러나고 있다. 세상이나 교회가 지금은 사람이건 조직이건 자만심에 도취되어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위험 신호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현재 상황을 진단하고자 하였다. 아직은 그러한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추기경은 직선제를 통해서 정치의 민주화가 이루어졌다고 했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정치적 민주주의를 위한 기틀을 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를 외형적이며 제도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추기경은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또 다른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개헌 이후 야당의 분열과 함께 일어난 정치적 상황에도 추기경은 비판적이었다. 그는 그것이 한국 정치의 민주화를 발전시키는 데에 어느 정도 제약을 준 것으로 생각하였다. 또한 그는 1995년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일어난 경찰의 명동성당 진입 사건을 통해서 민주주의의 정착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알 수 있었다고 말한다.111) 군사 독재 정권에서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공권력이 국민이 숨을 쉴 수 있는 완충지대인 소도와 같은 성역을 파괴하려고 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에 추기경은 ‘민주주의에도 시간표가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112) 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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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위의 책, p.342. 111) 위의 책, pp.40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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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 정권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새롭게 등장한 정치 권력에 도덕성이 있도록 하는 또 다른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비록 더디더라도 제대로 발 전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추기경은 정치와 경제가 유착한 상황에서 사회의 인간화를 추구한 시절을 언급하면서 새롭게 전개된 노동 현실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113) 노동자라고도 불릴 수 없던 시대에 천주교회까지 앞장서서 노동자의 권리를 확보할 수 있도록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노동자의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는 것이다. 이제 노동자들이 자신의 생존권 확보가 아니라, 기득권을 어떻게 더 많이 확보하려는 힘이 있는 이익집단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들의 이러한 움직임으로 교회가 상당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고 말한다.
추기경이 보기에 이러할 경우 국가와 사회라는 공동체의 발전과는 무관한 움직임으로 받아들여질 수가 있다는 것이다. IMF로 달라진 많은 사람의 사회경제적 변화도 이러한 그의 이해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을 것임은 물론이다. 이에 그는 “국제정세와 경 제 현실을 보건대 지금은 노사가 한마음이 되어 열심히 일해도 힘들 때다,
이건 한국인 특유의 ‘너 죽고 나 죽자’는 그릇된 자세다. 중국인 너 살고 나 살자, 일본인은 너 죽고 나살자 라고 하는데 왜 우리는 어리석게 다 함께 죽는 길을 걷고 있는지 답답하다.”라고 말하였다.114) 그가 추구하였던 공동선을 바탕으로 하는 국가라는 공동체, 사회라는 공동체가 이제는 파괴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한편 추기경은 교회 내의 상황에 대해서도 일정한 우려를 표시하였다. 한 해 10만 명에 달할 정도로 신자가, 구성원 가운데 지식인이 증가하였던 상황에 대해서도 그는 교회가 추구한 민주화운동 때문에 조금은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과연 그것만으로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던졌다.115) 이는 그가 중산층, 그리고 지식인층이 중심이되는 사목 환경 속에서도 대형화된 교회가 가난하거나, 소외되거나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새로운 노력을 하기를 바랐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사실 1990년대에 들어와서 한국 천주교회의 모습은 6·25 전쟁 후 본당 사제로서 그가 활동했던 시절과 는 너무나 다르게, 크게 변화되었다.
교회 내에서도 일어난 노사 갈등의 문제 역시 추기경에게 새로운 고민을 안겨주었다. 이에 그는 “교회 역시 시대가 바뀌고 규모가 커지다 보니 경영 논리가 도입되고, 그러다 보니 노사 갈등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취지가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교 회의 본질적 사명까지 훼손시켜 가면서 영위해야 할 사업이라면 한 번쯤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라고 말한다.116) 그리고 그는 북한 사목에 대해서도 말한다.117) 자신에게 맡겨진 사목 지역인 평양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채 기도를 빼면 교회가 민족의 화해나 통일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는 답답한 현실을
토로 하였다. 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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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위의 책, p.375.
113) 위의 책, pp.375~376.
114) 위의 책, pp.405~406.
115) 위의 책, p.284.
116) 위의 책, pp.387~388.
117) 위의 책, pp.396~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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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지금은 사람들이 천주교가 뭐가 달라도 다르더라고 말을 하지만, 앞으로 그렇게 언급되지 않을 상황을 염려하게 되었다.
언제나 종교인이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 추기경이 사제 본분 론을 다시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그는 한국통신 노동자들을 위해서 명동성당에서 단식 농성을 했던 젊은 신부들에게 “난 예나 지금이나 아무리 명분이 좋다고 하더라도 사목자가 사목 현장을 오랫동안 비워두고 무슨 일에 몰두하는 것을 찬성하지 않는다. 사목자의 본분은 자신에게 맡겨진 양떼를 돌보는 것이다. 그 본분에 소홀하면서까지 정신을 빼앗길 만한 일은 사목자에게 없다고 말한다.”라고 말하였다.118) 이에 그는 “요즈음 젊은이들이 순교를 까마득한 옛날의 이야기라고 여기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라고 한다. 또한 “지금 부귀영화와 목숨이 아니더라도 하느님만은 버릴 수 없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하느님 섬기는 일을 우선시하면서 살고 있는가, 우리 마음은 과연 어디에 있는지 성찰해 보지 않을 수가 없다.”라는 사실을119) 지적한다. 그는 사제를 비롯하여 사람들이 혹시나 하느님까지 잊어버리고 살고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우려하였다.
추기경은 그와 같이 달라진 당시의 사목 환경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빈부갈등, 이념 갈등, 세대 갈등으로 갈라져 있다. 요즘 생계형 자살이 속출하는 이유는 우리가 나눔에 인색함 때문이다. 사회분열이 끊이지 않는것도 상대편의 다른 생각을 존중하지 않아서 그렇다.”라고 한다.120) 그는 한국 사회가 새로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보았다. 이에 대해서 그는 마더데레사가 “가난·불평등·전쟁 등 인간 사회가 안고 있는 온갖 문제의 궁극적 해답을 갖고 계셨다.”라고 하면서, “굶주림은 먹을것에 대한 굶주림만을 뜻은 아닙니다. 헐벗음은 옷을 걸치지 못한 헐벗음만을 뜻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에 대한 굶주림과 인간 존엄성이 벗겨진 상태의 헐벗음이 야말로 현대를 사는 우리 모두가 걱정해야 할 중요한 과제입니다.”라고 한 말이121) 가지는 의미를 세상과 교회의 사람들이 크게 주목하기를 바랐다. 추기경의 경우 사제로서 그가 추구하고자 했던 인간의 영혼 구제라는 본질적인 과제가 더욱 중요하게 되 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에 추기경은 사회의 인간화라는 화두를 크게, 본격적으로 강조하고자 하였다. 그가 주장하는 사회의 인간화란 사회가 결국 정치와 경제까지 포함된다는 의미에서 정치의 민주화만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민주를 제대로 추구해야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 한다. 아직 한국 사회에는 국가폭력이나 재벌이 비인간화시키는 현실만이 아니라, 사 람들 하나하나가 더욱 인간화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이것은 정말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었다.
또한 제도나 조직의 변화로만 아니라 일상의 변화, 다시 말해서 일상의 민주화를 추구하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122)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면서 권리를 지킬 수 있는 인간화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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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위의 책, p.405.
119) 위의 책, pp.224~225.
120) 위의 책, p.400.
121) 위의 책, p.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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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를 만들 수 있는 길이라고 파악하였다. 그렇지 않다면, 제도적으로 민주화된 정치 까지 후퇴할 수도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사회의 인간화를 위하는 길이라면 추기경에게 교회나 세상의 구분이란 별다른 의미 를 지니지 못하는 것이었다. 교회 역시 새로운 변화나 쇄신이 없다면 그대로 안주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당시 추기경이 느꼈던 교회의 상황이란,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이 세계 주교시노드의 폐막 미사에서 “교회는 오늘날 모든 이들이 우리에게 던진 의문들, 우리 시대의 도전 과제, 즉 복음화의 긴급성과 인류를 괴롭히는 수많은 상처들 앞에서 무력하게 있을 수 없다”라고 하며 “삶에서 물러나 현실의 가장자리로 자신을 한정 시키는, 아무 생각 없이 제자리에 주저앉아 있는 교회는 자신의 불안 속에 안주하는 눈먼 교회가 될 우려가 있다”라고 한 말처럼 어쩌면 비슷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추기경은 사회든, 교회든, 사람인 “우리도 변해야 한다”라고 다시 외쳤다.123)
다시 말해서 추기경은 국가권력이나 기업가 등이 국민을 어떻게 대하는가의 문제 도 중요하지만, 국민 각자가 구성원으로서 진정한 의미에서 사회의 인간화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며, 이를 어떻게 달성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더욱 깊이 고민을 하면서 실천하기를 바란 것이었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순교자 가정이라는 신앙공동체로부터, 또한 신학생과 학도병 시절을 통해서 깊이 고민했던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였다고 하겠다. 한편으로 이것은 독일에서 국가와 사회 속에서 사람인 개인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배우고 고민했던 주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하는 것이기도 하였다.124) 이것은 크게 달라진 사회 현실 속에서 개인이 사회라는 공동체, 국가라는 공동체와 어떠한 관계를 맺어야하는 문제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추기경은 국민이, 시민들이, 이제는 개인들이 먼저 인간화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추기경은 우리나라가 “지리적으로 아시아 변방의 작은 나라에 살지만 강인하고 뛰 어난 민족이다. 하느님은 이 민족에게 척박한 땅을 주신 대신 뛰어난 머리를 허락하 셨다. 그러나 참으로 뛰어난 민족이 되려면 도덕 및 윤리 지수가 1위라야 한다.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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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배선영, 「‘정의 평화’ 활동에 대한 신자들의 솔직한 이야기」, 가톨릭 뉴스 지금 여기, 2022에서 의정부 교구의 신자들이 “일상과 동떨어진 방식으로 외치는 정의와 평화라고 할까? (정평위가) 외치 는 메시지가 맞는 말이지만, 삶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예를 들어 미얀마, 우크라이나 이슈가 중요 하지만, 이런 큰일에만 움직이는 것 같다. 미얀마 사태에 귀가 열리려면 그 이전에 징검다리들 놓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좀 더 와닿는 방식으로 정의와 평화를 이야기하는 방법을 고민 하는 게 시급하다.”라고 하면서, “정평위가 주로 사회 이슈를 쫓으며 활동하다 보니 일상에서의 정의 평화로 이어지지 못한 것 같다. 신자들과 함께 가기 위해 사회교리학교를 열었고 평소 사회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참여했지만, 더는 확장되지 않았다. 활동하는 사람들은 이슈를 따라가기도 버 거운 현실이라, 사람들이 얼마나 공감할지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못했다. 어떤 사인에 연대할 것인지 도 중요하지만 신자들과 보조를 맞추는 게 중요한 것 같다.”라고 한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123)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p.400.
124) 이충렬, 아, 김수환 추기경(1), pp.246~247에서 “회프너 교수는 국가가 공동선을 위해서 개인의 자유와 존엄성을 박탈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했다. 물론 인간은 사회 구성체의 일원이기 때문에 국가에서는 국민이 되고, 기업에서는 직원이지만, 개인이 존재하고 사고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을 독 점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김수환 학생 신부는 회프너 교수 신부의 ‘공동선’과 ‘인간 존엄성’ 에 대한 강의를 통해 국민들이 국가의 아래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라고 하고 있 는데, 이러한 내용은 추기경에게 개인의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하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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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들 앞에서 고개를 들기 힘든 부끄러운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한국 사람은 믿을 수 있다’, ‘거짓말을 안 한다’, ‘법을 잘 지킨다’, ‘외국인 근로자를 차별하지 않는다’, ‘생명을 소중히 여긴다’, ‘어려운 사람을 도우면서 산다’라는 인정을 받아야 진정한 1등 국가다”라고 말하였다.125) 도덕과 윤리가 뒷받침되는 그러한 국가, 그러한 민족, 그러한 국민, 그러한 개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신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005년 황우석 교수의 배아줄기 세포 진위 논란이 일어났을 때 나온 추기경의 발 언도 같은 내용이라고 할 수가 있다. “내가 진정으로 가슴 아파한 것은 우리 사회의 진실성 결여다. 그 사건은 한 과학자의 윤리 문제로 국한해서는 안 되고, 총체적 사회 구조의 문제로 봐야 한다. 우리 사회는 지난 수십 년간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표를 향해 매진하는 동안 ‘정직’이라는 소중한 가치를 잃어버렸다. 무엇이든 빨리빨리 결과만 내놓으면 탈법과 눈가림은 오히려 무용담이 되는 사회 풍조이다. 그래서 성수 대교와 삼풍백화점이 무너져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거짓말도 서슴지 않고 심지어 고귀한 생명까지 짓밟는다. 어쩌다 위법 사실이 들통나면 잘못을 반성하기는커녕, 말을 바꾸고 책임을 떠넘기기 일쑤다. 우리나라가 수 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빨리빨리 성과를 내는 바람에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진 것도 사 실이다. 하지만 정직이 사라진 사회, 인간 생명을 지키지 못하는 사회에서 경제성장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126) 이러한 까닭에 그는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서도 ‘진실’만을 말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언급하였을 것이다.127)
추기경은 이것이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라고 한다.128) 이때 그가 직접 경험한 일을 전하고 있다. “독일에서 한국인 신부가 운전하는 승용차 뒷좌석에 타고 어딜 간 적이 있다. 그 신부가 한밤중 텅 빈 사거리에서 정지신호를 무시하고 건넜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 신호등 앞에 뒤따라오던 차량 운전자가 우리 앞으로 오더니 “당신들은 왜 빨간 신호등을 무시하느냐”고 따끔하게 지적하였다.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어보지 않은게 천만다행이다”라고 하였다.129) 그는 인간화되기 길이라면 사제든, 평신도든, 신자이든 아니든 그러한 구분이나 구별이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는 것이다. 결국 그 사람이 인간으로서 어떠한가의 문제라고 말할 수가 있다.
이에 추기경은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신뢰와 정직이다”라고 한다. 그는 “지금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정직한 자세이다. 인간관계이든 국가 관계건 신뢰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머리 좋은 우리 국민들이 좀 더 정직하면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는건 시간문제일 것이다.”라고 말한다.130) 이때 그가 말한 관계의 의미를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에 의하면 사회의 민주화란 바로 정의로 연결되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제도만의 변화만이 아니라 집단과 집단, 국가와 국민, 그리고 사람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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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p.450.
126) 위의 책, pp.453~454.
127) 위의 책, pp.325~327.
128) 위의 책, p.453.
129) 위의 책, p.454.
130) 위의 책, p.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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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이에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지향점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 문제를 깊이 다룬 페터 비에리는삶의 격(2014)에서 역시 자아를 가지고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기본적인 특성에서 출발해 타인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 내가 타인을 어떻게 대하는가, 그리고 나는 나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가라고 하는 세 가지 관점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131) 이 역시 결국 인간관계의 문제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리고 이는 인간으로서 살아야 하는 삶이란 진정 무엇인가, 삶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기대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으로 연결되고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추기경은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이든, 국가와 국민과의 관계이든, 국가와 국가의 관계이든 그 관계가 올바르게 맺어져야, 그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가 지켜지는 사회의 인간화를 제대로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영복의 말을 따른다면, 그러한 관계의 수준이란 결국 한 사회의 수준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추기경처럼 정치의 민주화 이후 나타난 한국 사회의 현실과 미래를 우려하는 목소 리가 이어졌다. 2002년에 나온 최장집의 민주주의의 민주화가 바로 그것이다. 같은 내용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나는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가 질적으로 나빠졌다고 본다. 계급 간 불평등 구조는 훨씬 빠른 속도로 심화되어 왔으며, 과거 교육과 근면을 통해 가능했던 사회 이동의 기회는 크게 줄 어들었다 어느덧 서울의 강남을 중심으로 상층 계급문화가 발전하고 소득과 교육의 기회가 점차 정비례하는 현실에 대한 우려는 커지고 있다. 그 결과 권위주의와 급진주의 양자에 모두 비판적이면서 그간 온건한 방향으로 한국 사회의 변화를 이끌었던 중산층 중심의 세계관이 급 격히 약화 되어, 중산층 상층의 특권화된 사회 부분과 나머지 서민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부분간의 괴리가 커지고 있다.
(중략) 오늘의 한국 현실만큼 민주주의를 만드는 것과 지키고 발전시키는 것이 서로 다른 문제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하는 것도 없다. 잘 알다시피 민주주의를 수립하는 데에는 많은 사람들의 투쟁과 희생이 있었다. 그러한 투쟁과 희생이 있었기에 그야 말로 ’범국민적‘이라고 부를 만큼 감동적인 대규모 시민참여의 민주화운동이 가능했고, 이를 통해 권위주의 통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 민주주의를 사회적으로 안착시키고 내용적으로 발전시켜야 하는 단계에서 우리는 그 이전과 매우 다른 양상을 발견하게 된다. 이제 민주주의는 더이상 사람들의 기대 와 열정을 만들어내는 단어가 아니다. 일반 국민은 물론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한 사람조차 한국 민주주의의 현 상황에 대해 무관심하고 냉담하며 비판적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민주주의를 통해 기대했던 것과 한국 민주주의가 실제로 가져온 결과 사이의 격차가 만들어낸 실망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이 같은 실망이 현실 정치에 대한 환멸을 동반하면서 한국 민주주의를 위기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인 것이다. 민주주의로 전환하는 것보다 민주주의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것이 더욱 어렵다. 실망이 실망에서 끝나거나, 환멸이 환멸로 끝난다면 한국 민주주의는 물론 한국 사회의 미래는 없다.”132)
그는 직선제 개헌이라는 정치의 민주화가 시작된 지 20여 년도 안 되어서 민주주의의 민주화 문제를 제기하였다. 민주주의의 위기라고 한다. 사람들이 이전과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가 다시 권위주의의 시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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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페터 비에리, 「서문- 삶의 형태로서의 존엄성」, 삶의 격, p.13 및 p.15.
132) 최장집, 「이 책을 쓰게 된 이유」,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2002, p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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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는 듯하며, 인간으로서 개인의 이기심과 욕망이 극도로 추구되면서 공동체가 붕괴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해답으로 그 역시 인간의 문제로 돌아오고 있다.
“민주화 이후의 오늘날에는 총체적 인간보다는 ’부분적인 인간‘, 즉 민주적 정치과정에 적극적이되 자신의 자율적 가치와 내면세계를 가지면서 자신의 분야에서 실천하는 민주적 시민이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왜냐하면 운동이든 민주적 정치과정이든 그것이 전부 아니면 전무의 선택이 강요되는 상황에서 총체적 인간으로서의 참여자는 정체성을 오래 지속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민주화 이후 운동의 급속한 해체는 이러한 현상의 한 측면이다.
(중략) 민주화 이후의 한국 민주주의는 사회의 어떤 이념적·도덕적 기반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가? 단지 민주주의 그 자체에만 의존하고 있을 뿐이다. 아무런 버팀목 없는 기둥이 외부 충격에 넘어지기 쉽듯이 우 리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취약하다.”133)
개인이 자신의 자율적 가치와 내면세계를 가지면서 자신의 분야에서 실천하는 민주적 시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화 이후의 한국 민주주의가 어떤 이념적·도덕적 기반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가장 피해를입고, 고통을 겪게 되는 사람은 결국 서민이라고 말한다. 그 결과 2008년에 이르면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지식인, 그들은 어디에 서 있나까지 언급되기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는 사실은
오늘, 누구나 쉽게 민주주의의 위기 혹은 후퇴를 언급하고 있는 사실에서 곧바로 확인할 수가 있을 것이다. 영혼이 없는 지식 기능인 혹은 기술 지식인이라는 말도 함께 나오게 된 것도 그러하다. 다시 말해서 형식적인 정치의 민주화에 도취된 나머지 직선제 개헌 이후 20여 년에 걸쳐서 사회의 인간화, 즉 사회경제적 민주화를 제대로 추구하지 않은 결과 다시 정치의 민 주화까지 새로운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직선제라는 정치의 민주화에 만족하면서 새로운 관심사에 집중하지 않았던 세상과 교회 내의 사람들은 추기경의 말에 그다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보수 적으로 바뀌었다고 비판하였다. 그가 달라졌다고만 말하였다. 이른바 보수와 혁신 혹 은 진보의 논리로써 그를 오해하기도 하였다. 그는 변함없이 하느님 당의 당원으로서, 인간으로서 사제로서 자신이 살고 있던 시대와 사회의 징표를 읽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추기경의 이러한 바람은 달라진 사목 환경 속에서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그가 사목 환경에 대한 올바른 진단과 함께 사목 방향을 제대로 제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6. 맺음말
지금까지 김수환 추기경의 사목 환경을 다루어 보았다. 이때 필자의 이러한 접근이 여전히 추기경의 삶과 신앙에 대한 거시적인 흐름에 주목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말 하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 추기경에 대한 연구가 더욱 미시적으로 개별 주제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이 새롭게 계속해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또한 그 연구가 어떠한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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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 최장집, 「결론」, p.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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든 학문 외적인 의도를 가져서는 결코 안 될 것이며, 특정인에 의해서 주도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연구자들과 더욱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 를 통해서 추기경이 한국사 및 한국 천주교회사 속의 인물로서만 아니라, 동아시아를 비롯한 세계사 및 세계 천주교회사 속에서 차지하는 역사적 위치도 올바르게 파악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추기경의 사목 환경을 쓰기 위해서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를 읽고서 들었던 몇 가지 생각들을 언급함으로써 맺음말에 대신하고자 한다.
오늘처럼 교회가 추기경을 시복의 대상으로 삼아서 움직인다고 하면서 그가 직접 참여한 유일한 책인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가 절품 상태라는 사실은 어딘가 모순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무엇이 우선인가 싶었다. 추기경을 알기 위해서는 두꺼운 평전이나 여러 글이나 말의 묶은 책이
나, 너무나 방대한 김수환 추기경 전집을 모두 다 읽을 수 없는 현재 상황에서 우선 신자들이나 비신자들이 이 책부터 읽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능하면 추기경의 구술 내용이 본래의 모습 그대로 전해지는 새로운 형태의 책으로 나오면 바람직할 것이다.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에서 새롭게 다가온 단어가 있었다. 평전을 쓸 때 추기경이 불면의 밤을 지낸다고 한 언급을 새긴 적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의 ‘외로움’과 ‘고 독’이었다. 「책을 엮고 나서」라는 글을 쓴 오지영 신부 역시 “여느 사람은 엄두조차 내기 힘든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한국 교회를 이끌어 온 큰 어른의 ‘외로운 기도’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이 책에서 큰 어른의 기도를 듣게 될 뿐만 아니라, 인간의 나 약함, 그리고 보일 듯 말듯한 목자의 눈물까지 보게 될 것입니다.”라고134) 그 느낌을 말하였다. 추기경에 대한 정확한 언급으로 다가왔다.
추기경은 일제 강점기에 있었던 게페르트 신부와의 대화를 소개한다. 그가 “언젠가는 내가 고독해 보였던지 따로 부르셔서 “신부가 되면 더 고독하다. 그 고독을 이겨내는 좋은 방법은 너만의 도서관을 꾸미는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도스토예프스키 등 유명 작가의 고전을 읽으라고 권해 주셨다.”라고 한다.135) 그리고 추기경은 “젊었을 때는 사람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누가 취미를 물어보면 “사람들하고 얘기하는 것”이라고 말할 정도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요즘은 사람을 만나면 말수가 점점 줄어든다. 늙으면 사람을 붙잡고 자꾸 얘기를 하고 싶어진다고 하는데 다행스럽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조금 심심한 것은 사실이다. 외로움이라기보다는 거창하게 표현해서 인간 누구나 느끼는 실존적 고독일 것이다.”136) 그는 이러한 상태를 사막으로 말하기도 하였다. “어떨 때는 내 마 음이 사막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은수자들이 절대 고독과 침묵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은혜로운 사막이 아니라 그저 모래바람만 불어대는 황량한 사막 같기만 하다. 내 뉘우침과 성찰이 부족함을 탓할 수밖에 없다.”라고 하였다.137)
여기에는 추기경과 세상 및 교회 안에서의 상황이 커다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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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p.469.
135) 위의 책, p.81.
136) 위의 책, p.213.
137) 위의 책, p.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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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다. 군사 독재 정권이 세상 속에서 보여준 추기경의 활동에 대해서 비판하였기 때 문이다.
그것은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회고록에서도 간간이 드러내었지만, 구중서의 추기경평전에 나오는 내용을 통해서 자세한 사정을 살펴볼 수가 있다.138)
그는 한겨레 2004년 9월 23일 자를 통해서 인천교구의 한 신부가 추기경을 비판하면서 쓴 기사를 언급하고 있다. “사실 김 추기경이 바뀌었다고들 말하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김 추기경은 옛날부터 매우 귀족적이었어요. 정치적이기도 하고요. 1970년대 말에 독재 정권과 싸울 때도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과 이돈명·유 현석 변호사 등 원로 평신도들이 잘 이끌었기에 본래와 다른 모습을 보였던 게 아닌가 싶어요. 김 추기경의 정치적 모습을 보여주는 일화는 적지 않다.”라는 내용이었다. 구중서는 이를 1979년에 열린 정의 평화 위원회의 간담회에서 있었던 일의 연장선에 있는 내용이라고 말한다.
당시 함께 있었던 구중서는 추기경에게 “없는 사실을 사실과 다르게 말하는 것은 거짓이다. 나는 신문의 인터뷰 기사가 김 추기경을 비판한 점을 거론하며, 역사적 사실의 진전 순서마저 거꾸로 말할 수는 없지 않느냐”라고 추기경에게 물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 그는 “그런데 김 추기경은 세상이 원래 그런 것 아니냐며 담담한 표정으로 미소까지 머금었다.”라는 대답을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이를 그가 세상이 원래 그렇기 때문에 참는 수밖에 없다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래서 섭섭해하지 않는 것 같다.”라고 소개하였다. 이와 함께 그는 회고록에도 여러 차례 나오지만, 추기경이 삶에 대해서 불교의 가르침인 ‘인생이 고해’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고 한139) 사실까 지 덧붙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이 추기경에게 불면의 밤을 보내게 하였고, 또한 고독하게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교회 안과 밖의 비판만이 추기경을 그렇게 만든 것은 아닌 것 같다.
그에 대한 긍정적인 평판들 역시 그를 고독하게 했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때 평 전을 쓴 필자를 만났을 때 그가 “나를 추켜 올려주어서 고맙다”라고 짧게 말하였던 순간을 기억나게 한다. 지금도 ‘추켜 올린다’라는 그의 말을 새기고 있다. 이와 함께 이기백이 쓴 「함석헌 선생의 외로움」에 나오는 “이러한 과정에서 선생께서는 우리나라의 누구에게도 잘 알려진 분이 되었다. 그리고 선생의 주위에는 선생을 받드는 분들이 많이 계셨던 것이다. 그런데도 선생은 외로움을 호소하고 계셨다. (중략) 그러므 로 선생의 주변에는 선생의 명성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은있었으나 진정으로 선생을 아끼고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가 못했다고 생각된다. 선생의 외로움은 이러한 데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라는 말도140) 떠오르게 한다.
어쩌면 비판보다도 그러한 칭찬이 추기경을 더욱 고독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는 살아있는 그를 마치 우상화하려는 것으로 느끼기도 하였기 때문이다.141) 그는 “그런 비판을 한 분들께 감사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분들의 지적은 저에게도 큰 교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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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 구중서, 앞의 책, pp.185~192.
139)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p.272.
140) 이기백, 연사수록, 1994, pp.184~185.
141) 연합뉴스 2004년 3월 28일 자 보도 ; 아, 김수환 추기경 (2), p.489에서 재인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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줍니다. 지금까지 너무 칭찬 말씀만 듣고 살아서 ‘나를 우상으로 만들려는가’ 하고 은 근히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죽어서 하느님 앞에 갔을 때 ‘너는 그동안 칭찬을 다 들었기 때무에 나에게 칭찬을 들을 말은 없다’라는 말을 듣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했습니다. 비판과 욕을 먹는 것이 제 삶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오늘 어디서든지 다른 사람을 함부로 무시하면서 자기의 영광만을 보여주거나, 드러내고자 하는 현실도 문제이지만, 그를 이용하듯이 지나치게 올림으로써 자기를 높이려는 사람들의 행태 또한 역시 커다란 문제가 될 것이다. 따라서 “세상이 원래 그런 것이 아니냐”라고 한 추기경의 말은 회고록을 읽은 필자에게 상당한 충격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상황들은 인간을 벗으로 여기면서 그 벗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바치거나 밥이 되는 사람이 되고자 했던 추기경에게사람을 안다는 것(2024)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계속 던지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외로움이나 그 고독이, 세상이 원래 그런 것 같다는 그 고해의 세월은 추기경에게 오히려 끊임없는 자기반성과 성찰을 일으켰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내 뉘우침과 성찰이 부족함을 탓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러한 자기반성과 성찰이 황량한 사막과 같은 그의 외로움을 이겨낼 수 있게 해주었을 것이다. 이에 그러한 상황이 일어날 때마다 그는 “예수님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실까” 혹은 “주님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라는 말을 던졌는데, 이것이 바로 그의 화두가 되었다.142)
그리고 그는 하늘로부터 오는 대답을 들으려고 애를 쓰면서 “어떻게 사는 인간다운 삶이고, 어디로 가야 올바른 길로 들어서는 것인지 그 해답을 찾”고서 앞으로 나아가고자 했을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그는 회고록에서 자기 자랑이나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교구장직 30년에 대한 점수를 매긴다면 얼마나 줄 수 있을까? 이것저것 따져 평균을 내면 약 60점 정도? 더 이상 후하게 매길 자신이 없다.”라는143) 고백을 할 수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이 글을 준비할 때 한 수도자가 오늘 이 자리에 함께하는 분으로부터 필자가 발표한다는 소식을 미리 듣고서 추기경이 1977년에 한 노트에 쓴 글씨를 보내주었다. 1977년 8월의 것이다. “너의 사명은 끝나지 않았다. 아직도 살아 있으니...”라는 말이었다. 이것은 추기경이 자신에게 비판이든 칭찬이든 그러한 상황이 일어날 때마다 다짐했던 말로 들려왔다. 누가 어떻게 자신을 이해하더라도, 하느님 앞에서 비록 고독하더라도, 숨이 멈출 때까지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깨달으면서 그것을 실천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그러나 넓게 보면 인간은 어떤 처지에서건 나름대로 고 통을 안고 간다. 고통이란 것이 괴롭기만 한 것이 아니다. 인간은 시련이나 고통을 통해 한 단계 더 성숙하고 하느님 현존을 체험한다. 따라서 고통 없이 산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다.”라는144) 믿음을 가지게 하였을 것이다. 그때마다 추기경은 그의 말처럼 부족하지만, 모자라지만, 최선을 다했는가를 묻고 거기에 응답하고자 했을 것이다. 이러하기에 그는 “젊은이들에게 통일을 원하느냐고 물어보면 한목소리로 원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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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p.139.
143) 위의 책, p.411.
144) 위의 책, p.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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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그럼 통일을 위해서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꿀 먹은 벙 어리가 된다. 젊은이뿐만 아니라 국민 모두 통일을 원하지만, 자신의 역할은 거의 생각하지 않는 것같다. 통일은 대통령이나 사회지도층이 성사시키는 줄로 알고 있다. 참으로 통일을 원한다면 소극적 마음 자세부터 고쳐야 한다. 평화통일은 우리가 남을 위하고 사랑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라고 하면서,145) 추기경은 물론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난 각자가 자신의 역할, 즉 소명을 생각하고 실천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추기경에게 소명이란 이러한 내용이었다. 그는 “내 생각을 지배하는 큰 주제는 예나 지금이나 ‘인간’이라고 밝힌 적이 있는데, 이는 특출난 사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길을 충실히 따르려는 데서 얻은 것이다.”라고146) 말하였다. 이렇게 그에게 너무나 쉽고, 단순한, 평범한, 그리고 분명한 길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는 사제와 수도자들이 고민하는 인간적인 것과 성직 생활 혹은 수도 생활과의 갈등에 대해서도 계속 언급하였다.
“갈등은 있어야 하고, 어쩌면 우리는 보다더 좋은 수도자가 되려는 인간 적인 욕망을 끊어야 합니다. 여기서 인간적인 것은 무엇이며, 그것은 나쁜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래 전에, 어느 소년원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날 내가 소년들에게 말할 때, 그들의 얼굴은 잘 훈련된 근엄한 모습이었을 뿐 소년답고 인간다운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원장 신부님이 그들과 노래할 때 의 얼굴은 참으로 순진한 소년의 얼굴, 사람의 얼굴이었습니다. 그들을 더욱 인간답게 만들 때, 그것이 교화입니다. (중략) 이런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복음적 삶입니다.
그리고 이 삶은 그리스도를 닮게 하면서 우리를 더욱 인간다운 인간으로 만듭니다. 수도자의 생활이 우리의 인간다움에 도움을 주고 있는지, 반인간, 비인간으로 만들고 있지 않는지 의심스럽습니다.”라고147) 사제와 수도자의 인간다워짐을 이렇게 강조하였다.
이에 추기경은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한 인간으로서, 한 사제로서 자기가 살았던 시대와 사회의 징표를 끊임없이 읽으려고 했을 것이다. 아무리 힘들고 외롭더라도, 그 때마다 그의 말대로 끝이 없이 배워가는 기쁨을 새롭게 누리고자 했을 것임은 물론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추기경은 세상의 인간을 위해서 그리스도가 걸어가기를 바라지 않았던 길에 대해서 시대와 사회 속에서 큰 목소리를 내지않고, 큰 움직임을 보여주지 않고서도 그 흐름을 거슬러서 바꾸기 위한 저항을 줄기차게 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존재 이외의 조건들에서 나오는 힘을 지향하는 저항이 아니라, 그러한 힘을 끝까지 지양하고자 한 저항이었다. 그는 그렇게 자기의 삶이 신앙이 되고, 신앙 이 삶이 되는 이상을 향해서 걸어갔던 것이다. 그러한 주교, 그러한 추기경이 되고자 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그가 사제가 주교가, 추기경이 됐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라고 한 말을 통해서도 살필 수가 있을 것이다.148)
머리말에서 언급하였지만, 추기경에 대한 평가보다도, 그에 대한 더욱 정확한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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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 위의 책, p.399.
146) 위의 책, p.245.
147) 「수도자의 ‘인간적 완성’을 위하여」, pp.251~252.
148)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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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풍부한 연구가 더욱 필요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가 그토록 강조한 사람의 모습이, 신앙인의 모습이 제대로 잘 그려지도록 말이다. 학문적 차원과는 또 다른 그에 대한 현양 역시 그러해야 함은 물론이다. 이러한 점에서 오늘 우리가 그를 기억해야 할 방 식에 대해서도 새로운 고민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었다. 비에리의 말이다. 그는 이 세 상에서 숨을 쉬고 살아있는 사람들의 존엄성만이 아니라, 이 세상을 떠난 고인의 존 엄성을 어떻게 지켜주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고인에 대한 우리의 존엄성은 고인이 자신의 삶의 논리에 순응하며 살아온 방식과 고인의 유지를 존중해주는 데에 있다. 고인에 대한 존경을 다른 사람들이 보는가운데 표하는 것은 고인에 대한 존경이라기보다는 그것이 드러나기를 원하는 타인들의 기대에 부합하고자 하는 면이 더 크다. 또는 고인의 유지를 마음속에 새기며 조용히 혼자서 받드는 방법도 있다. 이때 고인에 대한 마음은 겉으로 드러나야 하는 여타 다른 존경심과는 성격이 다르다. 이것은 혼자 말고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존경심이다. 그리고 자족의 성격을 띄기 때문에 본래의 의미에 충실한 존경심이라고 하겠다.”149)
시복 운동이나 현양을 통해서 추기경을 드러내게 하더라도, 오늘 우리에게 이러한 노력도 함께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세상과 교회에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그러한 존경심이 조금은 그리운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의 고인에 대한 존경심이 바탕이 되지 않고서, 많은 사람이 오늘처럼 그를 기억하고자 하는 것은 그가 우려하면서 비판했던 집단주의의 방식이150)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할 때 우리는 이 세상과 교회 안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추구하고자 애썼던 추기경의 인간의 품격 (2015)을 제대로 지켜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여기에 추기경이 바라는 것처럼 오늘 우리도 사람으로서 자기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서 각자의 소명과 역할을 충실 히 실천해야 함은 물론이다. 그래야만 추기경의 기도처럼 오늘 모두가 겪고 있는 이 세상과 교회의 현실을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아름다운 곳으로 새롭게 바꿀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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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 페터 비에리, 「유한함을 받아들이는 존엄성」, p.451.
150)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p.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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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제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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