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덕왕릉(憲德王陵)
▲헌덕왕릉(憲德王陵)
▲헌덕왕릉(憲德王陵)
▲헌덕왕릉(憲德王陵)
무덤의 양식은 괘릉과 같이 완비된 모습이며 십이지신상은 전김유신묘와 같이 평복을 입었다. 현재 북쪽의 쥐(子), 소(丑), 호랑이(寅), 토끼(卯), 돼지(亥)등 5개 상만이 남아있으며 전대의 왕릉이 울산 방향으로 왕경에서 멀어져 가다가 헌덕왕릉 때 다시 왕경으로 되돌아온 경우이다. 고려, 조선시대에는 왕릉의 입지를 풍수지리설에 입각하여 선정하였지만 신라시대에는 산기슭, 절터, 평지, 산중턱 등 입지를 가리지 않고 왕릉을 썼다. 즉 헌덕왕릉의 경우 9세기 초 신라의 전성기를 지난 시점에 왕경으로 왕릉의 입지가 되돌아온 배경을 찾기가 쉽지않다. 조선시대의 기록에는 김유신 묘라는 설도 있었다 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모두 헌덕왕릉이 임천사 또는 천림촌 북쪽에 있다고 하였다.
○十八年, 冬十月, 王薨. 諡曰<憲德>, 葬于<泉林寺>北
18년 겨울 10월,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헌덕이라 하고, 임천사 북쪽에 장사지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헌덕왕전>
○陵在泉林村北.
능은 천림촌 북쪽에 있다.
<삼국유사 왕력>
▲헌덕왕릉(憲德王陵)
▲헌덕왕릉(憲德王陵)
▲헌덕왕릉(憲德王陵)
▲헌덕왕릉(憲德王陵)
헌덕왕릉 앞은 조선시대나 일제시대에는 북천이 흘렀다. 그리고 신라시대에 이곳에 임천사(泉林寺)가 있었다. 임천사에 있던 많은 석물들이 북천의 홍수로 떠내려 갔고 그 일부가 현재 황남대총 북편으로 옮겨졌으며 인근의 표암재에 남아 있는 석물도 이곳에서 옮겼을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임천사도 어느 시점엔가 홍수로 인하여 쓸렸던 것 같다.
북천은 신라시대에 이곳으로 물이 흐르지 않았다. 이곳에 다리가 있었다는 기록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신라인들은 제방과 숲으로 물을 통제하였으며 여름 한 철에만 잠깐씩 물이 흘렀던 것으로 보인다. 평상시에는 건천이었다. 따라서 이곳에 왕릉이나 절이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이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보문에서 금장대까지 북천이 완성되었으며, 이때 각 지방의 장정들을 동원하여 제방을 쌓고 읍성을 만들었다.
▲헌덕왕릉(憲德王陵)
▲헌덕왕릉(憲德王陵)
▲십이지신상(쥐)
▲십이지신상(소)
조선시대 초기에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어떤 관리가 「경주읍성 동북쪽 5리에 옛날 왕릉이 있는데 홍수로 무너져 석실이 드러나 있고 유물은 도굴되었으며 석실 벽에는 해와 달이 그려져 있다」는 보고를 하였는데 현재는 전하지 않지만 경주에서 벽화가 발견된 유일한 기록이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경비를 받아서 왕릉을 보수하였고 특히 영조 18년(1742) 8월의 홍수 때 절반 이상이 떠내려가 조정에 장개를 올려 수리비를 받아 수리한 적도 있었다. 석사자상, 석인상 등은 북천 홍수시에 떠내려갔고 일부가 수습되어 호인상의 머리부분이 경주고등학교 정원에 전시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삼국의 시조 능을 중요시하여 고구려의 동명성왕, 백제의 온조왕, 신라의 박혁거세와 등 시조의 사당을 국가에서 세우고 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또한 왕릉에 관한 보고도 끊임없이 받았던 것으로 전한다. 시조 능 뿐만 아니라 왕실에서 세운 사찰이나 유물도 중요시하여 전국에 있는 범종을 녹여서 농기구를 만들기도 하였지만 성덕대왕신종이나 개성 연복사종과 같이 왕실에서 발원하여 만든 종은 제외되었다고 한다.
▲십이지신상(호랑이)
▲십이지신상(토끼)
▲십이지신상(돼지)
▲호인상(경주고)
한편 헌덕왕릉의 십이지신상은 암릉 위에 서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황복사 동편의 구황동 왕릉터의 십이지신상 역시 암릉 위에 서 있어 조영 시기가 비슷한 시점인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헌덕왕이 승하하고 흥덕왕이 즉위하던 해에 흥덕왕비인 장화왕후가 사망하여 헌덕왕릉과 흥덕왕릉이 동시에 만들어졌다. 하지만 헌덕왕릉의 십이지신상은 평복을 입은데 비하여 흥덕왕릉에는 무복을 입었다. 그 차이가 무엇인지 현재는 알 수가 없다. 헌덕왕릉은 1970년대에 능을 정비하였고 2007년에는 흥덕왕릉의 상석을 모델로 하여 새로 마련하였다. 하지만 능의 규모가 흥덕왕릉보다 크지만 상석은 같은 규모로 만들어 비례가 다소 어색하다.
▲호인상(경주고)
<2009. 5.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