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감상
쌍둥이 언니와 동생을 같은 정체성으로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의 폭력성 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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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칼코마니에는 과슈(guache) 등을 종이에 바른 후에 캔버스 혹은 다른 종이에 눌렀다 떼는 방식이다.
그를 통해 작가들은 예측하기 어려운 색다른 형태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이 시에서 데칼코마니는 거울에 비친상과 비치는 대상이 대칭을 이루는 모습을 말하는 듯하다.또한 언니와 동생을 데칼코마니로 표현한 듯하다.
내 자아를 발견하는데 있어서 거울은 적합하다.서로 비슷한 소재로 은유한 것이다.실물인 나와 가상인 거울은 데칼코마니라고 볼 수 있다.
(인터뷰)영남일보 문학상 당선작 '데칼코마니'는 어떤 의미의 시인가
"당선작은 어떤 구체적 메시지 전달을 위한 시라기보다 이미지를 표현하는 시에 가깝다. 쌍둥이 자매의 미묘한 관계와 감정을 묘사했다. 정체성에 대한 인간의 심리를 이야기한 시다."
거울은 개인의 정체성을 의미하는데, 쌍둥이인 두 사람에게 한 사람의 정체성을 강요하는 사회를 비판하는 것으로 읽힌다.
다양하게 문제점을 변주하거나 문제점에서 파생되는 것을 변주 확장하는 구조다.
-배경: 하나의 정체성 강요
-문제점/파생: (1연) 하나의 정체성과 사람은 둘- (2연)다른 옷에 웃는 표정 - (3연)나란히 섬의 자학 - (4 ,5연) 자기를 잊음 - (이후 연) 심화확산- (마지막연) 쓴웃음 및 깨달음의 웃음
다양한 데칼코마니를 변주
거울과 언니, 나- 나란히 서다 - 마카롱 - 캐스터네츠
데칼코마니/한이로(필명)
내 방엔 거울이 하나
나는 언니였다가 나였다가
(거울인 정체성은 하나, 사람은 언니였다가 나였다가.데칼코마니라고 했으므로 겹쳐지면 안되니 언니와 나를 번갈아 언급한 듯)
서로 다른 옷을 입을 때
살짝 삐져나오는 다디단 표정
(서로 다른 옷을 입을 때는 각자의 정체성을 인정받았으므로 기쁘다)
나란히 서면
자꾸 뒤돌아보지 않아도 될 거야
우리에겐 곁눈질이 있으니까
(우린 닮았으므로 자꾸 뒤돌아보지 않아도 된다.일종의 자학모드. 또 하나의 데칼코마니 묘사다.일상속에서의 체험적 발견 문장을 넣어주면 표현이 생생해진다)
이따금씩
거울을 볼 때
나를 잊어버리는데
(사회에서 정체성이 같다고 인정해버리니 당사자인 화자도 정체성이 다르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나의 내면을 들여다 보지 않아서 잊어버리게 된다. 주로 외면만 보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잘 있니?
(나의 정체성은 보존되고 있는가)
학교를 벗어던진 우리는
(위에서 옷을 입다는 표현이 나왔으므로 이미지 연쇄를 위해 연장선상에서 벗어던지다는 대조적 표현을 사용)
나란히 자전거를 타고
횡단보도 위로 쏟아진 자동차들 사이로 뿔뿔이
흩어진다
(학교에서 같은 정체성 취급을 받다가 하교후 횡단보도 위에서는 각자의 정체성을 찾아 흩어진다)
반으로 나눠진 마카롱,
(마카롱은 데칼코마니의 변주이기도 하고 윗쪽에서 '다디 단'이라는 표현에 맞춘 이미지 연쇄를 위해 사용)
사라진 쪽이 너라고 생각하겠지
(또 하나의 데칼코마니인 마카롱이 반으로 나누어지는데, 사라진 쪽이 너라고 생각하겠지.원본이라고 생각하겠지)
바닥에 번진 우리의 그림자를 지우느라
붉어지는
늦은 오후의 얼굴들
(서로 원본이라고 다투다 얼굴이 붉어진다)
간호사가 건네는 푸른 옷을
(푸른 색은 위의 붉은 색과 대조를 위해 사용하기도 하였음. 더욱 고차원적으로는 같은 유니폼을 입음으로해서 정체성이 사라지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 그 병원의 모든 환자는 다 같은 옷을 입으므로 정체성이 사라지고 병자만 남음)
얼굴처럼
똑같이 입고 우리는
(병원은 정신병원이라고 볼 수도 있다.병원에서도 똑같은 옷을 입는다.)
사이좋게
캐스터네츠를 악기라고 말하고 난 뒤의 기분을
반으로 접는다
(캐스터네츠는 또 하나의 데칼코마니 변주. 쌍둥이는 한짝인데 사이좋게 지내야 정체성을 인정받는다고 화해를 강요받고 기분이 다운된다)
다른그림찾기와
같은그림찾기가
다른 말로 들리니?
(같은 것 속에서 다른 것 찾기나, 다른 것 속에서 같은 것 찾기나 같음의 프레임에 속해 있는 것이므로 다른 말이 아니다. 실제 퍼즐에서 같은 그림 속에서 다른 그림을 찾기 위해서는 같은 그림을 선행적으로 찾아야 한다.)
내 방엔 거울이 하나인데
두 개
(강요받은 정체성은 하나인데 사람은 둘. 수미쌍관)
매번 언니였다가 나였다가
(이런 상황은 나와 언니에게만 있는 것이다)
입 꼬리 살짝, 올라간다
(쓴 웃음만 나온다. 지금까지 정체성 찾기 노력에 대한 흐뭇해하는 웃음, 살짝 뒤에 콤마를 찍은 것으로 보아 뭔가의 깨달음의 성격이 있는 듯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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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영남일보 문학상 시 수상작- 데칼코마니/ 한이로
데칼코마니
한이로(필명)
내 방엔 거울이 하나
나는 언니였다가 나였다가
서로 다른 옷을 입을 때
살짝 삐져나오는 다디단 표정
나란히 서면
자꾸 뒤돌아보지 않아도 될 거야
우리에겐 곁눈질이 있으니까
이따금씩
거울을 볼 때
나를 잊어버리는데
나는 잘 있니?
학교를 벗어던진 우리는
나란히 자전거를 타고
횡단보도 위로 쏟아진 자동차들 사이로 뿔뿔이
흩어진다
반으로 나눠진 마카롱,
사라진 쪽이 너라고 생각하겠지
바닥에 번진 우리의 그림자를 지우느라
붉어지는
늦은 오후의 얼굴들
간호사가 건네는 푸른 옷을
얼굴처럼
똑같이 입고 우리는
사이좋게
캐스터네츠를 악기라고 말하고 난 뒤의 기분을
반으로 접는다
다른그림찾기와
같은그림찾기가
다른 말로 들리니?
내 방엔 거울이 하나인데
두 개
매번 언니였다가 나였다가
입 꼬리 살짝, 올라간다
심사평
"발랄한 상상력 뒷면에 감춘 저항의식…詩 본원적 매혹 느껴"
본심에 올라온 열아홉 분의 작품은 제각기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쁘고 단정한 서정시에서부터 종교성을 띤 작품에 이르기까지 그 폭은 넓었으나, 미지의 영역을 탐색하거나 새로운 전망, 실험정신을 보여주는 작품은 찾기 힘들었다.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겠으나 대체로 말이 많았고, 사유와 상상력을 자신의 언어로 정련한 작품을 보기 힘들어 아쉬웠다. 산문적인 시의 경우, 시의 내러티브가 전개되면서 의미와 이미지가 확장되고 심화되어야 하는데, 반복에 그치거나 오히려 무너지는 경우가 많았다.
마지막 대상으로 남은 것은 '데칼코마니' '흰색 위의 흰색' '유리방' 세 편이었다.
'유리방'은 산문시인데 밀도 있는 전개와 예리한 언어감각을 보여주고 있어 눈길을 끌었다.
세상 혹은 세상의 폭력에 대한 은유나 상징으로도 읽힐 수 있는 유리방 속 존재들의 대화형식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시를 읽는 맛을 느끼게 해 주었으나, 현실에 대응하는 시인의 문제의식이 보다 다양하게, 입체적으로 표현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흰색 위의 흰색'은 말레비치의 그림 <흰색 위의 흰색>을 모티프로 한 작품으로 언어 구사가 빼어났다. 묘사와 진술의 능력이 돋보였고 시를 끌고 나가는 힘도 있었다. 그러나 평면적이었다. 눈덧신토끼와 스라소니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구체적 자기 경험과 겹쳐졌으면 시의 깊이와 울림을 더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데칼코마니'는 경쾌한 언어와 이미지 그리고 정서의 파동을 지닌 작품이었다.
그동안 우리 시가 보여준 거울에 대한 상상력과는 또 다른 관점을 보여주면서 자아·세계에 대한 흥미로운 인식과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발랄한 상상력의 뒷면에 감추어져 있는 기존 질서에 대한 저항의식, "이따금씩/ 거울을 볼 때/ 나를 잊어버리는데// 나는 잘 있니?" 같은 질문들, "다른그림찾기와/ 같은그림찾기가/ 다른 말로 들리니?" 같은 유희, 이것들을 한 편의 시에 유기적으로, 또 차분하게 담아내는 능력은 누구나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두 심사자는 시의 본원적 매혹을 느끼게 해 준 '데칼코마니'를 흔쾌한 마음으로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심사위원:이하석 시인·전동균 시인
수상 소감
"작품, 삶과 같아 언제나 미완"
거기서부터 여기까지,
아득하기엔 아린 나날이어서 먼 듯하지만 가깝고 가까운 듯하지만 먼 거리였다.
움켜쥐어도 끝내 잡히지 않는 햇살, 그럼에도 햇볕이 드는 곳을 자주 바라보았다. 열리지 않는 문을 끊임없이 두드리듯.
빛살을 엮어 만든 밧줄과 같은 인연의 힘으로 여기에 서 있다.
고마움과 미안함은 이따금 동의어로 쓰인다.
시를 쓰면서 그림을 생각하곤 했다. 그림을 그리며 시 쓰는 일을 떠올렸다.
그렇게 저 너머의 시간을 바라보며 걸었다.
걷는 것은 견디는 것과 닮았다.
작품은 삶과 같아서 언제나 미완일 뿐, 오늘의 뿌듯함이 내일의 부끄럼이 되곤 한다.
하지만 등 뒤에 있는 시간처럼 이 또한 성근 나의 일부이기도 하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빛나는 밧줄을 길잡이 삼아 환한 저 너머로 다시 걷는다.
제 시의 맨 앞에 계신 이용헌 시인님, 박동기 작가님, 고맙습니다.
사랑하는 엄마 아버지 어머니 큰모 삼촌 막모, 그리고 브라더 복문.
끝으로 제 손을 들어주신 심사위원님, 감사합니다.
첫댓글 https://youtu.be/o13RMX24i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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