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궁의 훼철(毁撤) - 그 많던 전각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경희궁은 지금 상태로 보아서는 조선시대 5대궁궐 중 가장 위상이 떨어지는 곳입니다. 우선 입장료가 없습니다. 볼 게 없으니 돈을 받기가 민망하겠지요. 또 관리의 주체가 문화재청이 아닌 서울시입니다. 지켜야 할 마땅한 유물이 없으니까요.
그러나 숙종·영조 때만 하여도 경희궁은 왕실로부터 가장 사랑 받는 궁궐이었습니다. 70여 곳의 건물과 20여 개 관청을 갖춘 궁궐이었으니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상상이 가질 않는 규모입니다.
경희궁은 언제 어떤 사연들이 있었기에 그 수많은 전각들이 사라진 것일까요? 경희궁 훼철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는 경희궁에 1909년부터 경성중학교(나중의 서울중·고등학교)가 세워진 다음에 중요 전각들이 서울 시내 각지로 옮겨졌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경복궁의 훼철은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경복궁영건일기≫에 따르면, 1865년 8월 22일, 영건도감은 경희궁의 건물 가운데 그런대로 상태가 좋은 숭정전을 포함한 다섯 건물만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철거하고, 목재는 상태가 좋은 것들을 나인 숙소나 궐내각사를 만드는데 사용하게 하였습니다.
즉, 경희궁의 중요 전각 몇몇을 제외하고는 모두 헐어 경복궁의 중건에 사용했으며, 박석과 층계석까지도 가져갔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경복궁 중건 초기에 이미 이건(移建)을 결정할 정도의 계획적인 조처였음을 뜻합니다.
경복궁 중건 이후에도 그대로 남아 있던 경희궁 전각들은 일제강점기에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왕조와 운명을 함께 하였던 것이지요. 중심 건물이었던 숭정전과 회상전은 각각1926년과 1928년 서울 필동 남산 자락에 있던 일본 조동종 계통의 조계사에 매각되었습니다. 지금의 대한불교조계종 조계사와는 다른 사찰이지요.
광복 후 조동종 조계사를 인수한 동국대학교는 옛 숭정전 건물을 학교 법당인 정각원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건물이 너무 낡아 옛 경희궁 터로 복원하기는 어려웠다고 하네요. 회상전은 1936년 화재로 소멸되었고, 흥정당, 정심합, 사현합도 세월이 지나며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 와중에서 살아남은 것도 있습니다.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은 1932년 지금의 장충동 신라호텔 자리에 위치했던 박문사로 팔려갔습니다. 박문사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기리는 조동종 사찰이었는데 이곳의 정문인 경춘문으로 있다가 1980년대 후반 다시 옛 경희궁 터로 돌아 왔습니다. 그리고 고종 때 만든 황학정은 사직근린공원 뒤로 옮겨져 아직도 국궁(國弓)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어 그나마 다행입니다.
“경희궁은 이래저래 망가져 있어서 아무리 주의 깊게 답사를 하여도 그 전모를 헤아리기 어렵다. 그렇다고 경희궁을 우리의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자는 말은 아니다. 없어진 것도 역사의 일부, 그것을 포함해서 우리 인식 속에서 다시 세워 이해하는 작업은 어렵지만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홍순민 교수의 글로 마무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