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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 받은 사람과 책망 받은 사람(1)
2024년 10월 6일 / 마태복음 25:21(23), 34-40
마 25:21(23) / 주인은 그가 일을 썩 잘해 낸 것을 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네가 이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더 큰일을 너에게 맡기겠다. 자, 어서 와서 나와 함께 기쁨을 나누자.'
마 25:34-40 / 그리고 왕인 나는 내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받을 사람들아, 와서 천지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에 들어가라. 35) 너희는 내가 배고플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너희 집으로 따뜻하게 맞아들였다. 36)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와 주었다.' 37) 그때 그 의로운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이 배고프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렸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38) 또 언제 주님이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도와 드렸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39) 언제 주님이 병드셨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40) 그러면 왕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내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곧 내게 해준 것이다!'
9월 22일 추분이 지났고, 10월 8일은 24절기 중 17번째 절기로 공기가 차츰 선선해짐에 따라 이슬이 찬 공기를 만나 서리로 변하기 직전의 시기인 한로(寒露)이다. 농촌에는 추수로 바빠지고 있다. ‘이제 서서히 금년 한해도 마무리를 해야 할 때가 가까워 오고 있다는 말이 나온다. 세월의 무상(無常)함을 보면서 나름대로 영원한 영생에 들어갈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한다(벧전 5:8).
나이 들어감에 따라 손수 수위를 준비하거나 자손들이 미리 부모를 위해서 준비해 놓으면 부모들이 오래 산다는 속설도 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도대체 사람의 몸값이 얼마나 가기에 적지 않은 돈을 드려서 수의를 장만하는지? 생화학자 돌프빈더는 사람의 몸값이 얼마나 되나 계산하여 보고 싶어 시체를 가지고 별난 실험이지만 시도하여 보았다. 사람의 몸에서 꺼낼 수 있는 요소는 대강 17가지 정도였다. 새장 하나 청소할 수 있는 석회석, 못 한 개 정도 만들 수 있는 철분, 차 한 잔 정도 달게 할 수 있는 설탕, 세숫비누 5개정도 만들 수 있는 지방질, 성냥 다섯 갑 정도 만들 수 있는 인이었다. 돌프빈더는 이 요소를 가지고 화공약품 가게로 가서 계산하여 보았더니 약 3천원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 알았다. 사람의 몸값은 3천원이다’
정말 사람의 몸값은 3천원밖에 안 되는 것일까? 설렁탕은커녕 짜장면 한 그릇 값도 안 되고 김밥 한 줄 밖에 안 되는 것일까?
죽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시체를 위해서는 많은 돈을 들여서 수의를 준비해 놓으면서 장차 천국에 갈 때 입어야 할 세마포 예복은 어찌하여 준비하지 않는지? 예수님께서는 잔치 자리에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결박하여 내어 쫓으라고 하셨다(마 22:11-13).
사랑하는 여러분! 이 가을을 맞이하여, 추수의 계절을 맞이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는 믿음의 준비를 하여야 한다. 준비하지 못한 사람은 천국에 들어 갈 수가 없다. 마태복음 25장의 열 처녀 비유의 말씀에서도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은 밤새도록 신랑을 기다렸지만 기름이 없다는 이유로 등불이 꺼졌다는 이유만으로 잔치 자리에 들어가지 못하고 어두움에 쫓겨나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마 25:11-13).
참으로 세월이 빠르다. 어느새 오늘이 10월이 지나고 있다. 금년 2024년도 달력 1장 혹은 2장이 남았다. 성경에는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 5:16)라고 하였다.
나머지 두 달여 동안에 우리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아무도 모른다. 그 동안에 내 수한(壽限)이 다되어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정말 후회 없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 미련한 다섯 처녀와 같이 기름을 준비하지 못하였다가 쫓겨나는 사람이 되어서도 안 될 것이며, 본문의 말씀에서와 같이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과 저주를 받아 바깥 어둠에 쫓겨나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처지가 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아니면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에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3)는 예수님의 추상같은 책망을 받지 않아야 하겠다.
매일 1% 나아지면 1년 후에는 37배 성장한다'는, ‘작은 성장의 힘(The power of Tiny Gains)’ 하루를 소중히 여겨야하는 이유. 크고 원대한 목표는 첫걸음에서 시작한다. 하루가 모여 1년이 되고 1년이 쌓여 일생이 된다. 오늘도 또 한 번의 걸음 시작한다. 오늘부터라도 예수님께 책망보다는 칭찬을 받는 준비를 해야 하겠다. 결코 칭찬은 하루아침에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하시지도 않는다. 매일의 삶속에서 이루어지는 경건의 삶으로부터 이루어질 것이다.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교훈하신 달란트 비유와 양과 염소의 비유이다. 달란트 비유에서는 주인으로부터 칭찬과 상급을 받은 종이 있는가 하면 주인으로부터 책망을 받고 또 있는 것도 빼앗기고 어두움에 쫓겨나는 종도 있음을 볼 수 있다.
먼저 달란트 비유에서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목적은 세상에서 우리가 얼마나 충성하고 헌신을 하느냐에 따라 장차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상을 받을 수도 있고 책망과 저주를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말씀이다. 세상 사람은 책망하는 소리보다는 칭찬하는 소리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장차 예수님 재림하셨을 때에 하나님 앞에 가서 행한 대로 심판을 받을 때 칭찬 받는 사람과 책망 받는 사람으로 분리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도 심판대 앞에서 분리될 수밖에 없다. 예수님께서는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분리하실 것이다.
마 25:31-33 / 인자가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를 거느리고 와서 영광스러운 보좌에 앉을 때에 32) 모든 민족이 불려 나와 인자 앞에 모일 것이다. 그때 내가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갈라놓듯이 사람들을 갈라서 33)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둘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는 곡식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고 있지만 추수 때가 되면 반드시 가라지는 꺼지지 않는 지옥 불에 던져 넣는다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면서 오늘을 분발하자.
마 13:30 / 둘 다 추수때까지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내가 추수꾼들에게 일러서 가라지를 먼저 뽑아 불에 태우고 밀은 곳간에 거두어들이도록 하겠다.
복음 찬송에 있는 곡이다. ♬ 주님 내게 오시면
❶ 세상 부귀 안일함과 세상 근심하다가 주님 나를 찾으시면 어떻게 만날까 주님 내게 오시면 나 어찌 대할까 멀리 방황하던 나 불쌍한 이 죄인 이제 주 만 생각하며 세상 근심 버리고 두 손 들고 눈물로써 주만 따라가오리다
❷ 세상일에 얽매어서 세상일만 하다가 주님 나를 부르시면 어떻게 만날까 주님 내게 오시면 나 어찌 대할까 멀리 방황하던 나 불쌍한 이 죄인 이제 주만 생각하며 세상 권세 버리고 오직 주만 바라보며 주만 따라 가오리다.
❸ 지금까지 내가 한일 주님께서 보시고 훗날에 나를 보고 무어라 하실까 주님 내게 오시면 나 어찌 대할까 멀리 방황하던 나 불쌍한 이 죄인 이제 주만 생각하며 세상 영광 버리고 십자가를 내가지고 주만 따라 가오리다.
1. 칭찬 받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 있는가?
예수님이 이 세상에 33년 동안 계시는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나셨는데 그 중에 칭찬을 받은 사람은 불과 몇 명이 되질 않는다.
1. 예수님은 가버나움의 백부장을 칭찬하셨다.
마8장에서 백부장은 자신의 하인을 고쳐달라고 요청하였다. 특이한 점은 그는 예수님께 자신의 집으로 가시지 말고 말씀만으로 고쳐달라고 하였다. 그는 로마의 군인이다. 백부장은 지금의 대대장 정도의 위치로 당시 한 지역, 오늘날의 면 단위 이상 군이나 패리쉬(Parrish)정도 치안을 유지시키는 역할을 했다. 아마도 본문의 가버나움을 다스리던 군인으로 보인다. 그에 속한 군대는 수백 명 단위였다. 그렇기에 백부장이라는 계급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군대에서처럼 명령이 얼마나 큰 힘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아는 사람이었다. 로마 사람이고 지역에서는 막강한 힘을 가진 그였지만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 직접 와서 부탁을 하였다.
누구 때문에 온 것일까? 자기의 하인이 중풍으로 괴로워한다며 고쳐달라고 하였다. 옛날에는 종은 재산의 일종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매매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런데 종이 중풍에 걸렸다.
오늘날도 중풍은 약이 없다. 그리고 아마도 노인이거나 나이를 많이 먹은 종 같다. 솔직히 종이 중풍에 걸렸다면 종으로서 역할은 포기한 것으로 봐도 당연할 것이다. 주인이라면 이 종을 의사에게 데려가기보다 그냥 죽도록 내버려 두거나 그냥 보내주는 것이 더 돈을 아끼는 것이다.
그러나 백부장은 보통 여느 주인과는 달랐다. 예수님께서도 이 백부장의 믿음을 높이 평가하셨다. 말만 하시면 낫게 될 것이라는 이 믿음을 예수님은 이렇게 표현하셨다.
마 8:10-12 / 그 백부장의 말에 감탄하신 예수께서는 군중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온 땅에서 나는 이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을 본 일이 없다. 11) 이 백부장과 같은 많은 이방 사람들이 세계 여러 곳에서부터 와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하늘나라에 들어가 앉을 것이다. 12) 그러나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을 위해 하늘나라가 마련되어 있는데도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 땅을 치며 통곡을 할 것이다.’
극찬(極讚) 중에 극찬이었다. 몇 번을 읽어보아도 이렇게까지 예수님이 표현하신 적은 사복음에 없을 정도였다. 이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을 무시할 정도가 아닌 모욕보다 더한 짓밟는 정도의 표현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어서 백부장에게 말씀하셨다. ‘집으로 가라. 네가 믿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하인의 병이 나았다.
2. 시돈 지방 가나안 여자(마 15:21-28)
이 여인에 대해 알기 전에 우리는 배경에 짚고 넘어가야 한다. 마태복음 15장을 보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합동하여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했다. 1절에 보면 원래 이들은 예루살렘에서부터 예수님을 좇아온 무리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결국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두로와 시돈 지방은 지금의 레바논에 속한 지역이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차로 4-5시간 정도의 거리였다.
예수님이 시돈 지방에서 말씀을 전파하고 계실 때 이방여인 하나가 예수님께 자기 딸에게 씌운 귀신을 축출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께서 냉정하게 거절하셨다.
마 15:24, 26 /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 즉 유대인들을 구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은 것이지 이방인들을 위하여 보냄을 받은 것이 아니다.’ 26) 예수께서 ‘자녀들이 먹을 떡을 강아지에게 주는 것은 옳지 않다.’ 라고 하셨다.
이 정도면 주위 사람들까지도 낯 뜨거운 상황이다. 그러나 여인은 자존심을 버린지 오래였다. 자기 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엄마는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예수님께 간청하였다.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조리 있게, 집요하게 예수님의 은혜를 쉬지 않고 간청하였다. 마치 재판관에게 사정하는 여자와 잠자리에 든 친구에게 빵을 구하는 자처럼 전심전력으로 간청했다. 그랬을 때 예수님은 믿음이 크다며 여인의 요구인 딸을 귀신에게서 해방시켜 주셨다. 이 사건은 이방인에게도 구원이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을 보면 이들은 예수님을 두로와 시돈 즉 이방 지역으로 가게 만들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유대인들 중에서도 정통이라고 하여 높은 자존심을 가지고 있는 집단이었다. 원래 이들은 서로 라이벌의 관계 혹은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께 대해서는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집요하게 공격하였다.
예수님께서 만났던 자 중에는 구원을 받은 사람도 있었지만 반면에 이들처럼 ‘외식하는 자’라는 예수님의 책망을 받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방여인과 정통 이스라엘 사람들 특히 지도자 중에 누가 진정한 믿음을 가졌다고 볼 수 있나?’ 우리라도 쉽게 판단할 수 있다.
3.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시고 칭찬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두루 다니시며 많은 이적과 말씀을 전하셨지만 예수님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최북방인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으로 가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이 임박해 오자 은연중에 제자들에게 당신에 대한 믿음을 확인하시고자 ‘이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다. 그러나 나온 대답은 정답이 하나도 없었다. 세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 정도로 인식을 하고 있었다. 예수님으로서는 한숨도 나오고, 참 어이가 없으셨을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번에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다. 이때 시몬 베드로가 기다렸다는 듯이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하자 예수님은 만족해하시면서 베드로를 칭찬하셨다.
마 16:17-19 /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참으로 복되구나. 네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인간의 생각에서 온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너에게 알려 주신 것이다. 18) 내가 네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그 어떤 죽음의 세력도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19) 또 나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너에게 주겠다. 네가 땅에서 잠가 둔 문은 어떤 것이든 하늘에서도 잠길 것이고, 땅에서 열어 둔 문은 하늘에서도 열릴 것이다!
엄밀히 따진다면 베드로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게 하셨던 분은 하나님이셨다.
그래도 어느 정도 베드로는 마음의 문이 열려 있었다.
누가복음 5장에서 예수님을 믿고 `선생님, 저희가 어제 밤새도록 애를 썼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다시 해보겠습니다.'라며 바다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렸다. 그물이 가득차서 찢어질 지경이 되었고, 배가 가라앉을 정도로 두 배에 고기가 가득 찼다. 이때 베드로는 이것을 보고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오 주님, 제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주님을 모시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한 죄인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게 될 것이다.’고 하시자 베드로는 곧 배를 호숫가에 댄 후에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그리고 요한복음 6장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후에 생명의 양식에 대하여 말씀을 하시자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떠나갔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물으셨다. ‘너희도 내 곁을 떠나려 하느냐?’ 이때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말씀으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은 주님뿐이십니다. 우리는 주님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아들이심을 믿습니다.’(요 6:67-69).
그러나 마태복음 16장에서의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지식만이 아닌 그동안 경험으로 얻은 정확한 답변으로 예수님을 감동시켰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하시고 또한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시겠다고 하셨다. 시몬 베드로는 이스라엘 역사에 언젠가는 오실 구원자이신 메시아가 누구인지, 하나님의 하나뿐인 아들이 누구인지, 세상을 구원하실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알았다. 바로 자기가 모시고 있는 예수님이야 말로 메시아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를 이 땅에서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실 유일하신 분이심을 바로 믿음의 눈으로 보고 알았던 것이다. 솔직히 표현한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진리를 그대로 수용한 것이었다. 물론 앞으로도 많은 사실을 알아야 하겠지만 천국 열쇠구멍만한 확신이 선 것은 사실이었다.
4. 예수님에게 향유를 부어드린 마리아를 칭찬하셨다.
예수님께서 하루는 베다니 마을에 가셨다. 나사로의 집에서 식사를 하실 때에 마리아가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였다. 이때 이를 시기한 사람들이 그것을 허비하고 낭비한다고 책망을 하자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를 칭찬하셨다.
막 14:8-9 / 이 여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였다. 내 장례를 위하여 미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준 것이다. 9) 내가 분명히 말한다. 온 세상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사람들의 기억에 남게 되고 또한 높이 평가될 것이다.
이 얼마나 복되고 감사한 축복의 말씀인가? 물론 마리아가 예수님의 장사를 염두에 두고 한 일은 아니다. 그것이 이와 같이 축복으로 연결이 되었다. 평소에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예수님께 대한 충성과 헌신이 이와 같이 축복으로 연결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예수님에게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야기는 4복음서에 모두 나오는 유명한 일화이다. 그러나 복음서마다 이 사건이 일어난 장소와 행동한 인물에 대한 증언에 크고 작은 차이가 있다. 요한복음만 보면 유월절이 가까울 무렵 베다니에서 잔치가 벌어졌고,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매우 값진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다고 한다. 나사로의 누이인 마리아가 왜 이런 행동을 했는지 이유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앞서 나온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라고 보는 것이 아무래도 가장 합리적이다.
삼백 데나리온(한 데나리온은 당시 남자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나 하는 값나가는 향유를 발에 쏟아 허비하는 것이 옳으냐의 문제로 시비가 벌어지는 가운데, 예수님은 마리아의 행위가 ‘나(예수)의 장례할 날’을 위한 것이라고 규정하셨다(7). 그런데 정말로 예수님의 장례를 염두에 두고 마리아가 향유를 부었다고 추정할 여지는 거의 없다. 오라비가 살아남은 것을 고맙게 여기는 마리아의 단순한 환대와 행동이 원래의 의도를 넘어서는 의미와 효력을 지니게 된 것이다. 마리아 자신도 모르게 그녀는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 셈이 된다.
뿐만 아니라 마리아는 향유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렸다(3).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셨다는 이야기(13장) 역시 요한복음에서 돋보이는 일화이다. 제자들의 발을 다 씻어 주신 다음에 예수님은 서로 발을 씻어 주라시며 너희도 이렇게 하라고 본을 보여 준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3:14-15). 그렇다면 마리아는 다른 사람의 발을 씻겨 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행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마리아는 자신의 행위가 그런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알고 행한 것일까? 아브라함이 나그네를 환대한 일은 자신도 모르게 천사 일행을 접대한 결과가 되었다(창 18장).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사소한 일이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큰 그림 안에서 어떤 의미가 되는 것인지는 우리 자신도 알 수 없다. 마음을 다한 행동들은 원래의 취지를 넘어, 하나님의 뜻을 촉진하고 성취하는 가치를 부여받게 될 것이다.
5.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두 렙돈을 헌금한 여인을 칭찬하셨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가셔서 연보궤에 헌금하는 것을 유심히 보고 계셨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연보를 넣고 있었다. 부자는 자랑이나 하듯이 전대를 풀어 많은 돈을 넣었다. 그때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었다. 이에 예수님이 목격하시며 말씀하셨다.
눅 21:2-4 / 그때 한 가난한 과부가 와서 렙돈 두 닢을 넣었다. 3) 그것을 보시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참으로 이 과부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넣었다. 4) 그들은 쓰고 남은 것 중에서 얼마를 넣었으나 이 여자는 가난한 중에서도 가진 것 전부를 넣었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12:43과 누가복음 21:3을 보면 예수님의 평가가 나온다.
마가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막 12:43)라고 기록하고 있고, 누가복음에서는 ‘이르시되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눅 21:3)고 기록하고 있다. 즉, 예수님의 평가는 이 여인이 바친 돈이 그날 다른 사람이 바친 모든 헌금의 총액보다 더 크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본문을 읽을 때 과부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넣었다고 읽었는데, 원어에는 과부가 낸 헌금은 다른 모든 사람들이 낸 헌금의 총액보다 훨씬 더 많다는 뜻이었다. 그녀의 헌금을 하늘나라 저울로 달아보니 그 날 모든 무리가 바친 모든 헌금보다 더 많았다는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의 여인의 뜰에 놓인 13개의 소바롯이라고 하는 연보궤에는 지금으로 계산하면 수십억 원 정도의 돈이 들어간다고 한다. 한편, 참새 5마리 값인 두 렙돈은 지금으로 치면 1만 원 정도 된다.
두 렙돈은 누구든지 그냥 무시하고 지나쳐 버리는 지극히 적은 금액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과부의 두 렙돈이 나머지 헌금 총액을 능가한다고 선언하셨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늘의 평가인가?
사랑하는 여러분!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이 여인의 두 렙돈의 가치는 그 날에 연보궤에 넣어진 모든 액수를 능가한 액수이다. 과부의 두 렙돈에 대한 기사는 언제나 신자들로 하여금 진실한 신앙을 갖도록 동기를 부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과부의 거룩하고 신성한 두 렙돈, 즉 작은 두개의 동전을 취하시사 그 돈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시는데 무한한 자원으로 사용하신 것이다. 과부의 두 렙돈은 수천 년 동안 하나님 나라의 핵심을 알리고 참된 신앙을 알리는 거룩한 메시지가 되어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적 양식을 공급하여 왔다. 오늘 우리 역시 헌금과 신앙의 관계에 있어서 또한 바른 예배에 있어서 과부의 두 렙돈으로부터 무한하고 진실한 교훈을 얻고 있는 것이다.
과부의 두렙돈에 대하여 이 땅에 사는 그 어떤 사람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 정도로 영원토록 그 가치가 찬란히 빛나는 사건이 과부의 두 렙돈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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