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충주 숲거리 순교성지
충북 충주시 문화동 552번지(문화동544~봉방동11-1 일대)
충주 숲거리는 지금의 문화동⋅봉방동 접경 지역에서 조선시대의 군사 훈련 지휘소였던 무학당을 지나 충주천변까지 길게 이어져 있던 수풀 지역을 말한다. 조선 초기부터 이곳은 군사 훈련장이요, 충주의 대표적인 형장으로 이용되었다.
1801년의 신유박해 이후 천주교 박해가 계속되는 동안 이곳 숲거리는 각처에서 체포되어 온 천주교 신자들의 순교지가 되었다. 그들은 이곳으로 압송되어 오면서 갖은 수모를 겪거나 돌림매를 맞았으며, 마침내 참수형이나 군문효수형을 당함으로써 천상의 영광을 얻었다. 그중에서도 충주의 사도 이기연(1739∼1802)은 가장 먼저 천주 신앙을 받아들여 충주와 연풍 지역에 널리 전했으며,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이곳 숲거리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충주의 아전 출신 이부춘(1735∼1801)과 과부 권아기련도 천주교에 입교한 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숲거리로 끌려와 굳게 신앙을 증거하고 순교의 화관을 받았다. 한국 천주교회는 충주 숲거리 순교자 중에서 이기연, 이부춘, 권아기련의 시복을 추진하고 있다.
권아기련: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약전
조선왕조 치하 순교자 133위14중인, 부인1801.10. 4.충주. 권아기련(?∼1801)
권아기련(權阿只連)은 충주에 거주해 오던 아전 집안에서 태어났고, 장성한 뒤에는 충주 아전으로 있던 남편과 혼인하였다. 그러나 남편은 아들 둘이 태어난 뒤에 사망하였다. 그녀에게 천주 교리를 가르쳐 준 사람들은 충주에 살던 이기연의 며느리 권 여인과 이부춘의 아들 이석중이었다. 이후 권아기련은 세례를 받고 천주교에 입교했으나, 그녀의 세례명은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천주교에 입교한 뒤 권아기련은 두 아들에게 천주 교리를 전하였지만, 아들들은 신앙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신자의 본분을 부지런히 지키고 신심 함양에 충실하여 모두에게 모범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신앙 공동체의 모임에 열심히 참여하면서 주변의 여인들에게 교리를 전하는 데도 노력하였다. 그녀에게서는 신앙 생활에 방해가 되는 어떠한 냉담이나 게으름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권아기련과 이부춘·석중 부자는 각각 다른 곳에서 체포되었으나 함께 문초와 형벌을 받았으며, 세 명 모두 형벌 가운데서도 평온과 용기를 잃지 않았다. 특히 하느님께서는 권아기련에게 고귀한 항구심을 상으로 주셨고, 하느님의 은총이 신자들의 마음에 어떤 기적을 불어넣어 주는지를 알지 못하던 비신자들도 그녀의 꿋꿋함에 놀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 다음 이들 세 명은 함께 사형 선고를 받고, 권이기련과 이부춘은 1801년 10월 4일(음력 8월 27일)에 충주에서, 이석중은 다른 날에 충주에서 순교하였다. 그에 앞서 충주 관장이 형조에 올린 권아기련의 사형 선고문은 다음과 같았다.
“처음에는 이기연의 며느리 권 여인의 유혹을 받았고, 이어 이부춘의 아들 이석중에게 유인을 받았습니다. 사학을 전해 익혔고 점점 더 깊이 빠져서 과부의 혐오를 돌아보지 않고, 늘 못된 놈들과 더러운 곳에서 번갈아 가면서 서로 모임을 기약했으며, 남녀가 뒤섞였습니다. 인근의 여성들을 여러 방법으로 꼬여서 스스로 교주가 되었습니다. 반드시 다른 사람을 오염시킨 죄는 만 번 죽어도 오히려 가볍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