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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성의 확보, 보편성의 획득-본격수필론강의 [법정론]/권대근
쌍두마차를 끌고 수필의 문학성으로 질주하라
- 구체성의 확보, 보편성의 획득 -
권대근
문학박사, 평론가
I. 열며
이번 강의의 의도는 수필의 문학성 문제에 대해 같이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그래서 문학성이 지니는 이른바 '구체성과 보편성'에 대해 먼저 살펴보겠다. 구체성과 보편성은 문학 고유의 특성이다. 그것으로 문학은, 여타의 인간 정신활동과 뚜렷이 구별된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문학의 독자성을 옹호한 이래로, 문학작품들이 영속적으로 자신의 생명력을 유지해 올 수 있었던 것도, 결국은 바로 감각적 구체성과 보편성 때문이었다.
수필의 메시지는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사상이 지닌 추상성을 어떻게 문학적으로 극복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다. 문학이 예술의 한 장르로 간주되는 까닭은 아름다움, 즉 심미성을 매개로 해서 우리의 정서적 쾌락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심미성은 감각이 지닌 성질의 한 차원이고 감각은 구체성 위에서만 성립되는 것이다. 따라서 수필의 문학성은 그것이 전달하고자 하는 교훈이나 사상을 어떻게 구체성으로 구제하느냐 하는 문제에 귀결되고 만다.
잡다한 이야깃거리가 어떻게 문학적 변용을 겪느냐 하는 문제는 보편성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흔히 수필을 일인칭 서술의 문학, 혹은 고백적 양식이라 하거니와 이러한 특성은 수필을 단순히 사적인 체험담이나 생활 주변의 잡다한 것을 기록하여 독자의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것으로 자칫 전락시키기 쉽다. 수필을 잡문이라고 하는 까닭은 바로 이런 연유에서다. 이야깃거리, 즉 소재는 무한하고 다양하다. 무턱대고 그 무한한 소재의 새로움과 신기함만을 추구한다고 문학이 되고 수필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소재들이 문학적으로 구제되기 위해서는 작가의 개성적이고 일관된 관점 아래 그것들이 내적 통일을 이루어야 하고, 그 통일성이 인생과 세계에 대한 어떤 해석을 드러내야만 한다. 그 해석이 온당할 때 우리는 거기에서 보편성을 보는 것이다. 이러한 보편성에 이르는 길은 멀고 멀다. 수필은 이야기 그 이상을 요구한다.
구체성과 보편성에 입각하여, 서로 다른 시대와 문화의 배경을 가진 다양한 독자들이 텍스트의 객관성에 그들 나름의 주관성을 가미해서, 보충적으로 문학성을 구현시킬 수 없었다면,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보편적 인류 유산으로서의 문학작품은 존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문학가에게 중요한 것은 문학이 어떤 방식으로 생성되는가 하는 문학성의 문제다.
II. 펼치며
1. 구체성
수필의 문학성 문제는 두 가지를 구제하는 데에 귀착된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구체성"의 확보인데, 이는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교훈이나 사상을 어떻게 구체성으로 구제하느냐 하는 것이다. 좀더 쉽게 말하면 사상이나 교훈은 추상인데, 이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을 어떻게 형상미학으로 구체화해내느냐에 문학성이 달려있다.
문학의 출입구는 인간 삶의 구체성이다. 구체성을 통해 삶의 보편적 진실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 문학이다. 구체적 삶이 소외되고 시인이나 작가의 섣부른 이념이나 일반화가 작품 전면에 드러나는 것은 문학성을 저해하는 일이다. 문학이 고정된 영역 안에 불변의 어떤 것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문학은 기존의 틀을 끊임없이 해체하는 데에서 생명력이 충전된다. 하지만 문학의 어떤 변화든 해체든 인간 삶의 구체성이란 바탕을 벗어나서는 무의미하다. 삶에 가까이 다가가 자신의 경험을 해석하고 거기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문학의 존재 방식이고 이유이다.
문학에는 삶의 구체성을 밀어내고 약화시키는 힘이 상존한다. 우선 문학을 가능하게 하는 언어 자체가 삶의 구체성과 우호적이지 못하다. 문학은 언어를 통해 존재하는 사물을 호명하고 삶을 구체적으로 표현한다. 문학이 지향하는 삶의 구체성이란 언어를 통하지 않고는 실현될 수가 없다. 그러나 언어는 한편으로 삶의 현실과 구체성을 포착하기에 한계를 안고 있다. 대상을 추상화하는 언어의 속성이 바로 그것이다. 언어는 대상을 왜곡함으로써 삶의 구체성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를 생성시켜 진실을 감추기까지 한다. 이러한 언어의 한계는 문학의 피할 수 없는 바탕이므로 운명처럼 수용해야 할 부분이다. 이보다 삶의 구체성을 훼손하는 더 심각한 요소가 있다. 문학 창작이나 이론에서 무의식적으로 작용하는 허위의식 같은 것이다. 이러한 허위의식은 글쓰기에서 현실과 삶의 구체성을 경직화하는 요인이 된다.
사실 수필가들이 정확한 나를 드러내지 않거나 못한다. 우리 시대 ‘나’는 누구인가? 단절과 소외를 기반으로 하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누구나 ‘욕망하는 주체’다. 한마디로 결핍된 자아다. 이상주의자나 완전주의자가 아니다. 물신주의를 추구하고, 위선과 가식으로 포장한 페르소나를 버리면, 언제나 천박한 자아가 드러난다. 다중인격적이다. 욕망도 결핍도 심각하다. 상처도 많다. 그림자 속에 드러내기 싫은 것을 엄청나게 숨겨놓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아하-경험’보다 ‘덮개-기억’으로 진실의 ‘나’를 실감나게, 나의 내면을 리얼하게 그려내지 않는다. 나의 그림자와의 대면을 거부하는 정직하지 못한 자아다. 이런 착한 모습 보여주기가 구체성을 경직시키는 요인일 수 있다.
인간의 구체적 삶을 들여다보고, 그 진실을 옹호하고 훼손된 부분을 치유하고자 하는 것이 문학이 아닌가. 그런데 문학을 내세우면서도 그 기본을 무너뜨린다면, 그것은 모순이다. 문학이라는 초월적이고 절대적 가치를 하나의 관념으로 설정하고 수필을 그 안에 가두는 것은 수필적 현실에서 필요하다. 그렇다고 수필의 본질이나 본성, 특질이나 특장인 삶의 문학, 인간학이란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수필이 문학이 되어야 한다는 구호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수필의 문학화는 절실하다. 다만 문학화에서 수필의 정체성을 안고 가야 한다는 점이다. 수필은 구체성을 기반으로 하는 장르고, 개인의 자리에서 경험하는 일상적 경험을 글쓰기로 반추하면서 삶의 진리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시궁이후공이라, 난관의 삶을 거치온 자만이 생의 작은 이치라도 깨친다. 삶의 면면을 세심하게 감각하고 경험에서 철학을 채굴하는 수필가는 세계의 이면을 감지할 수 있다. 본래 생이란 구도의 과정이 아니던가.
텍스트의 의미 발생은 작가와 독자 사이의 역동적 상호작용이 일어났을 때 일어난다. 예전에는 저자가 중심에 있었다. 독서의 목표도 저자의 의도를 아는 것이었다. 지금은 아니다. 작가의 의도를 따라갈 필요 없이 독자에게 많은 권한이 넘어왔다. 독서의 방법도 비판적 읽기를 통한 독자의 해석으로 이동했다. 작가와 독자는 이제 한 몸이다. 수필가는 저자이면서 동시에 독자이다.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는 시대로 전환하면서 저자와 독자를 가르던 강이 없어졌다. 반드시 필자의 목소리가 강하고 필력이 있어야 호소력을 주는 것이 아니다. 평범하지만 진실된 목소리를 통해 어떤 이야기를 전달할 때 힘을 지니는 것이다. 수필은 이러한 구체성을 특성으로 창작된다고 할 수 있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란 수필을 예로 들어보자. 이 수필은 주제와 작가의 종교가 갖는 상관성 때문에 주제가 매우 형이상학적이고 일반인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고 판단되는 이치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게 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바로 이 수필이 ‘구체성’과 보편성‘의 요소를 충족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평범한 인간들에게는 자기가 가진 것을 버린다는 것이 그것의 필요성의 정도에 관계없이 매우 어려운 일이다. 작가의 표현대로 인간의 역사는 소유사처럼 보이기 때문이요,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소유하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성정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에게 소유욕을 버리라는 권유가 설득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법정의 이런 논리는 쉽게 공감을 획득한다. 그것은 작가가 삶의 과정에서 얻은 깨달음을 체험적인 구체성으로 제시하거나 그것을 논리적인 문장으로 우리에게 제시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2. 보편성
다른 하나는 "보편성" 확보인데, 이는 잡다한 이야깃거리 즉 정보나 소재를 어떻게 문학적을 변용하는가의 문제다. 다양한 소재들이 문학적으로 구제되기 위해서는 작가의 개성적이고 일관된 관점 아래 그것들이 내적 통일을 이루어야 하고, 그 통일성이 인생과 세계에 대한 어떤 해석을 드러내어야 하는데, 보편성은 그 해석이 온당할 때 얻어지는 공감이나 설득의 효과라 할 것이다.
<무소유>에서 법정은 자신의 무소유 철학이 과연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소유욕에서 비롯되는 폐해를 구체적으로 적시함으로써 간접적으로 풀어보고자 한다. 불도에 정진하는 승려인 자신조차도 무엇인가를 가짐으로써 저절로 그것에 지나치게 집착하게 되는 과정을 겪음으로써 얻은 결론은 무엇인가를 소유한다는 것은 곧 그것에 의해 자신이 얽매임을 당한다는 사실이다. 작가는 ‘난’을 예로 들며, 그것이 자신의 구도적인 삶에 방해요소로 작용한다면 그것은 있어서 도움이 되기보다는 없어서 도움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에서 나아가 작가는 우리 모두가 지녀야 할 소유에 관한 자세를 제시하고 있다. 이것이 공감과 설득으로 다가와서 보편성을 확보하기 때문에 좋은 수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수필을 쉽게 써야 독자가 읽을 것이라는 전언은 독자의 수준을 얕보는 심리가 그 주장에 껄려 있다. 독자는 그리 만만치 않다. 적어도 책을 찾아 읽는 독자라면 수필가를 능가하는 지적 수준과 문화적 감각의 소유자일 가능성이 높다. 수필창작에 있어서 문학성의 차원을 연구하고 거기에 구체성이나 보편성을 어떻게 담아낼 것인가를 생각해 보지 않고 무조건 쓴다는 것은 자신의 경험치 이상의 세계를 담아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독자에게 감동을 주거나 독자를 설득할 의도가 없다는 말이다. 체험이란 유일한 자산만 가진 데다가 지적 영토가 척박한 사람의 수필이 어찌 독자에게 감동으로 다가가겠는가.
수필의 존재방식은 다양하다. 쓰기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이도 있을 것이고,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글을 쓰는 이도 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붓을 든 사람도 있고, 진실을 추구하는 수필 장르의 매력에 빠져 수필에 기웃거리는 사람도 있다. 살아온 자신의 인생사를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 수필계에 발을 내민 이도 있다. 개별적 존재자가 살아온 여정에 따라, 작가가 타고난 기질에 따라, 현재 처한 상황에 따라 수필은 색깔을 달리한다. 수필가의 숫자만큼 수필의 맛은 제각각이다. 수필의 배경 혹은 터전이 삶이라고 해도, 수필이 문학인 이상 감동을 주지 않는다면, 문학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일상의 어휘에 복잡한 심경과 균열하는 영혼을 담아낼 수 있다는 생각은 오만이다. 단순한 언어는 사고의 경직성을 드러낸다. 가능성과 상상력을 무화시키는 문장은 수필의 품격을 스스로 낮추는 것이다. 타고난 유머감각과 능청스러움, 속내를 감추는 구성 전략이 필요하다. 저자의 죽음을 선언한 롤랑 바르트의 전언은 의미심장하다. 저자가 가지던 거대한 권력이 무너졌음을 의미한다. ‘작가’라는 명칭이 풍기던 아우라를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작가가 영혼을 바쳐 창작한 작품은 얼마나 소중한가. 진실은 독자를 배반하지 않는다.
자기 포지션을 어디에 둘 것인지에 따라 모든 사회적 현상을 보는 관점이 달라진다. 포지션별로 같은 사건도 글이 열 개는 나올 수 있다. 사실 그 연습을 해야 한다. 참신성은 없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있지만 보지 못한 것을 드러내는 과정이다. 이를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여러 포지션을 가지고 있다는 다중성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그럴 때 성찰은 반성이라기보다는 자신을 인식하는 과정이다. ‘나 작가다, 남자다’ 등 한 가지 인식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진보·보수를 떠나 도긴개긴한 시선의 글과는 ‘다른’ 글을 쓰는 사람이 훌륭한 작가다. 어떤 사람인지, 어떤 글쓰기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자신의 고민을 자주 드러냈다. 자신이 사회에 종속된 주체라는 사실을 깨닫고 정체화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다양한 위치성을 가지고 경합해야 한다. 상호텍스트성을 통해 보편성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 하에서 법정은 인간의 역사가 소유가 아닌 무소유의 세계를 지향한다면 끊임없이 인간을 불행 속으로 몰아넣은 전쟁과 같은 현상은 사라지게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전쟁이란 이해관계의 소산이고, 이해관계는 바로 소유욕과 불과분의 관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작은 것을 취하기 위해 큰 것을 희생하는 전형적인 예가 전쟁임을 상기하면서 독자는 법정의 논리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깨달음의 한 과정으로서 무소유 사상을 얻게 된 이치를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는 이 수필은 작가 자신이 가고 있는 구도의 길이 주는 경건함과 구체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보편성으로 연결되어 감동을 준다.
삶의 현실에는 끝없는 소유욕의 굴레가 씌어져 있다. 그 욕망은 인간의 원초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현대 사회의 물질문명의 홍수 속에서 배태된 물질적 욕망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삶을 구속한다. 인간이 가진 것이 없이 태어나 가진 것이 없이 죽는다는 말은 유한자로서의 인간을 인식하는 허무주의의 소산은 아니다. 억지로 무언가 더 소유하려는 의도가 삶의 균형을 파괴한다면, 오히려 가난한 마음 속에 평정을 지니는 편이 더 나은 것이 아닌가.
불승의 입장인 작가가 깨달음의 편린으로써 서술하고 있는 이 수필은 삶에 있어서 소유의 의미를 성찰하고, 자신이 겪은 경험으로써 난초로 인한 집착의 피해를 ‘구체성’의 일환으로 제시함으로써, 소유욕의 허망함을 잘 드러내었다. 이러한 경험으로부터의 깨달음은 다시 사회와 역사로 시선을 확대하여 문명비판의 성찰로까지 전개된다. 성찰의 소산으로서, 이 수필은 사색적이며 담담한 필치가 전체 사상을 일관되게 나타내고 있어 ‘보편성’을 띤다. 평범한 삶 속에서 삶의 깊이 있는 진리를 스스로 터득하는 모습이 잘 드러내 감동을 준다.
III. 닫으며
- 문학적 근거와 학문적 비판
법정의 사유는 무소유라고 불리는데, 그것은 소유가 인간을 불행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우리의 상식과 맞지 않는 듯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더욱 행복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부자가 되거나 재물을 많이 가지기 위해서는 육체의 구속과 정신의 스트레스를 견디어야 한다. 법정은 그러한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는 소유를 추구하지 말아야 하고, 대신 자연과의 대화에서 행복을 찾아야 한다고 제안한다. ‘무소유’다. 그런데 그 무소유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자의적 의미를 넘어서 있다. 법정 자신이 새롭게 규정한 독자적 ‘무소유’ 개념이다.
(1) 구체성의 근거
지난해 여름 장마가 갠 어느 날 봉선사로 운허노사를 뵈러 간 일이 있었다. 한낮이 되자 장마에 갇혔던 햇볕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고 앞 개울물 소리에 어울려 숲 속에서는 매미들이 있는 대로 목청을 돋우었다. 아차, 그제서야 문득 생각이 난 것이다. 난초를 뜰에 내놓은 채 온 것이다. 모처럼 보인 찬란한 햇볕이 돌연 원망스러워졌다. 뜨거운 햇볕에 늘어져 있을 난초잎이 눈에 아른거려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허둥지둥 그 길로 돌아왔다. 아니나 다를까, 잎은 축 늘어져 있었다. 안타까워하며 샘물을 길어다 축여 주고 했더니 겨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어딘지 생생한 기운이 빠져나간 것 같았다.
나는 이때 온몸으로 그리고 마음속으로 절절히 느끼게 되었다. 집착이 괴로움인 것을. 그렇다, 나는 난초에게 너무 집념한 것이다. 이 집착에서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했다. 난을 가꾸면서는 산철(승가僧家의 유행기遊行期)에도 나그네길을 떠나지 못한 채 꼼짝을 못했다. 밖에 볼일이 있어 잠시 방을 비울 때면 환기가 되도록 들창문을 조금 열어놓아야 했고, 분을 내놓은 채 나가다가 뒤미처 생각하고는 되돌아와 들여놓고 나간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말 지독한 집착이었다.
며칠 후, 난초처럼 말이 없는 친구가 놀러 왔기에 선뜻 그의 품에 분을 안겨 주었다. 비로소 나는 얽매임에서 벗어난 것이다. 날아갈 듯 홀가분한 해방감. 3년 가까이 함께 지낸 ‘유정有情’을 떠나보냈는데도 서운하고 허전함보다 홀가분한 마음이 앞섰다. 이때부터 나는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 난을 통해 무소유의 의미 같은 걸 터득하게 됐다고나 할까.
(2) 보편성의 근거
이 수필은 전형적인 이중액자 구조를 통해 주제를 형상화한다. 도입액자에서는 내화를 들려주게 된 기연과 동기를 제시한다면, 내화에서는 무소유의 삶을 결심하게 된 사건의 전말을 들려준다. 그리고 종결액자에서는 무소유 철학의 가치를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주제로 수렴한다. 특히, 작가는 도입액자와 종결액자 부분에 ≪간디어록≫을 인용함으로써 내화의 사실성과 진실성을 이중적으로 강화하는 효과를 거두게 한다. 사실적인 자기 체험을 내화에 삽입하고, 그 앞뒤에 성자의 이야기를 인용 제시함으로써 내화의 진실성은 한층 강화된다.
뿐만 아니라, 이 작품은 불교의 연기론에 바탕을 둔 ‘무소유’ 사상을 법정 자신의 일상체험에서 끌어와 고백하는 형식으로 실천 가능한 생활철학으로 대중화하는 힘을 얻는다. 이렇게 될 경우, 작가가 들려주는 무소유 이야기는 역사를 뛰어넘는 초월성과 보편성을 획득하게 되고, 대중들은 그들이 모방 가능한 삶의 모델로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무한히 붙잡는 삶, 붙잡음으로 인해 행복을 얻고자 하는 삶. 그러나 인간이 그렇게 추구하고 갈구하는 ‘붙잡음’, 그 속에 인간이 바라지도 않는 고(苦), 그 괴로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법정 스님의 수필. 『우리는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마음을 쓰게 된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이는 것,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얽혀있다는 뜻이다.』
이런 욕심으로 인해 번뇌가 생겨나고 소유함으로써 그것에 얽매이게 된다. 이에 법정 스님은 욕망을 단절하면 더 큰 마음의 평정과 자유를 얻을 수 있으므로 가지려고만 하지 말고 모두에게 베풀 줄 아는 자비의 실천이 더 가치로운 것이라는 점을 서술하고 있다. 물론 이야기의 시작과 끝부분에 신뢰성이 높은 ≪간디 어록≫을 도입한 것도 이야기의 설득력을 높이는 데 크게 일조한다. 문학의 양대 기능 속에 교시적 기능이 함유된 것은 그것이 본질적으로, ‘인간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 인생인가’라는 근원적 물음을 탐구한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또 그러한 문제의식으로부터 문학의 지향성이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다. 주어진 존재 조건 속에서 바람직한 인간상을 모색하는 것은 문학적 구원을 위한 변증법적 설득의 논리와도 연결되어 있다.
(3) 학문적 비판 -[논문] 배학수, 2010, 존재론연구 23권, 한국하이데거학회
소유의 부정에는 부를 행복을 위해 좋은 것이라고 믿으면서도 나쁘다고 믿는 자기-기만이 포함되어 있다. 한 연구자는 헤겔의 스토아주의 비판을 토대로 무소유 사상의 자기-기만과 위선을 분석하면서, 그것이 한국 사회에 준 이점과 한계를 논의한다. 무소유 사상은 거의 40년 동안 한국인에게 위안과 안전감을 제공했지만, 동시에 실제 세계에 대한 관계를 방해했다. 그는 무소유 사상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관을 고려한다. 그에 따르면, 행복이란 인간이 지닌 가능성의 실현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 개념은 외부의 소유 세계를 부정하지 않고, 그것을 인간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무대라고 간주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한 삶을 추구하지만 어떤 삶이 행복한 삶이냐 하는 데는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사람들은 삶의 외적 조건들(물질적 부, 건강, 사회적 지위 등등)을 성취하는 삶을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인간의 본질을 실현하는 것이라고도 말한다. 하지만 인간은 근본적으로 불안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삶의 조건을 생각할 때, 우리가 의지해야 할 유일한 것은 인간의 정신적 덕에서 행복의 열쇠를 발견한다는 견해도 있다. 이런 견해에는 스토아주의와 불교가 있다.
그래서 문학을 정의해서 "형상과 인식의 복합체"라고 한다. 문학의 개념을 바로 아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문학은 형상과 인식의 복합체라는 것, 형상은 구체성과, 그리고 인식은 보편성과 연결된다. 결론적으로 첫째, "구체성"의 결여는 미적 쾌락의 결여로 이어져, 심미성을 주지 못해 미적 구조로서의 문학적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둘째, "보편성"의 결여는 교훈성의 결여, 즉 인식의 결여로 이어져, 소재 제시나 나열에 불과한 단편적 잡문으로 전락하고 만다. 오늘날 수필들이 구체성과 보편성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는 것은 결국 작가들이 문학의 개념을 제대로 모르고 창작을 하고 있다는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