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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복면 노파의 비밀 비류신은 그 말을 듣자 아찔하여 몸을 가누지 못하고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 그것은 이미 그가 동정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천강지신공이 제일 강맹한 무공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신공이 소양(小陽)과 소음(小陰) 두 개의 큰 혈맥을 상처 입힌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데고 일단 상처를 입히기만 한다면 사람들로 하여금 도저히 견디기 어렵게 하는 것이었다. 그는 처량한 생각에 사로잡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자기의 운명이 때때로 죽음의 위협을 받아야 하며, 또한 가끔 사신과 도전하는 험난한 길을 걷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비류신은 씁쓰레하게 웃었다. “할머니, 천강지신공에 격중된 사람은 음양을 역전시키며 혈기를 거꾸로 흐르게 하는 방법 이외에는 달리 치료할 방법이 없다는 말입니까?” 복면노파는 흠칫 놀라며 말꼬리를 흐지부지 흐렸다. “있기는 있네만… 그러나… …” 비류신은 그 말을 듣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재빨리 다그쳐 물었다. “그러나 어쨌단 말입니까?” 복면노파는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대답했다. “그러나 자네보다 고강한 절정의 공력을 지닌 여섯 명의 고수가 필요하네. 그리고 여섯 군데의 위치에 갈라서서 그들 자신의 수련한 공력으로써 자네의 칠십이 대혈을 계속해서 두들겨야 한다네.” 비류신은 그 말을 듣자 마음속에서 잔뜩 부풀었던 기대가 반감되는 것을 느꼈다. 지금 이 시각에 여섯 명의 절정 고수를 찾아낸다고 해도 자기보다 공력이 고강한 사람이 몇이나 된단 말인가. 말할 것도 없이 그 방법은 실천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는 쓸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할머니, 더 이상 말하지 마시오. 나도 치료받을 생각은 포기했습니다.” 복면노파는 놀란 눈빛으로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자네는 정말 구경하기 힘든 괴짜이군 그래?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몸이 달아 묻더니 지금 와서 대번 거부하다니, 정말 변덕이 심하군.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네그려.” 분명 노파는 비류신의 기이한 거동에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비류신은 이때 우울한 심정을 억제하고 재빨리 생각을 돌렸다. ‘이 복면노파는 나의 은사인 야월광명지신도 소대호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그토록 슬퍼하지 않았던가. 아마 그녀는 은사와 막대한 관계가 있는 모양이다. 다만 그런 관계는 몹시 교묘하여 나도 갑자기 추측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지금 이미 사신의 손아귀에 들어 있다. 그러므로 죽기 전에 무슨 수를 써서든지 약간의 단서라도 찾아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사부께서 영웅의 기백을 과시했던 생전의 사적(事蹟)과 피맺힌 원한을 알 수 있을 것 이다.’ 이렇게 생각한 그는 다시 영준한 얼굴에 웃음을 띠며 상냥하게 입을 열었다. “할머니, 아까 할머니가 그렇게 슬픈 기색을 나타낸 것을 보니 혹시 나의 은사 야월광명지신도 소대호와 옛 부터 알고 있었던 사이가 아닌가요?” 이것은 훤히 알고 있으면서 고의로 그렇게 물어본 것이며, 또한 그의 총명함을 과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복면노파는 다시 눈물을 글썽거렸다. 몸을 가늘게 떨며 슬픔에 젖어있는 안색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 아픔을 느끼게 하였다. 노파는 한숨을 길게 내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과거의 일들이 노파의 눈앞에 순식간에 나타났다. 그것은 몹시 비참한 과거였다. 참담한 과거지사는 노파의 마음속에 십팔 년이라는 긴 세월을 두고 깊이 새겨져 있었다. 십팔 년! 이것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다. 그러나 노파는 그 기나긴 세월을 두고 일분일초도 잊지 않고 고통을 씹어왔을 것이다. 어느 때는 죽으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노파도 생각했었다. 그러나 육체적으로는 비록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르나 지향 없이 공중을 떠다니는 영혼은 비할 데 없는 고통 속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것은 지금 살아서 겪는 고통보다 더욱 심할 것같이 느껴졌다. 더구나 노파는 심중에 한 가닥 희망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 한 가닥 희망이야말로 노파를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도록 부축해 준 커다란 힘이었던 것이다. 노파는 오직 소리도 없이 눈물만 흘릴 뿐 조금도 울음소리를 내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은 대성통곡을 하는 것보다 더욱 처량해 보이고 애처로웠다. 노파는 심중의 비애를 간신히 누르며 다만 슬픈 과거에 조용히 몸담고 있었다. 비류신은 자기의 말 한마디가 노파를 그처럼 슬픔에 잠기게 할 줄 생각도 못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괴로운 심정을 금치 못하고 탄식하며 말했다. “당신들은 아마 한 쌍의 사랑하는 애인들이었나 보군요?” 복면노파는 처량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어찌 애인으로만 그쳤겠는가? 우리는 어엿한 부부였다네.” 비류신은 그 말을 듣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지금 자기의 눈앞에 있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 복면 노파가 은사의 부인이며, 또한 자기의 사모일 줄은 꿈에도 몰랐던 일이다. 그렇다면 소월녀와 복면노파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 외에도 혹시 한층 더 오묘한 관계가 있을지 모른다. 그런 관계를 생각해낼 수 있는 일이었으나 한편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비류신은 부드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소월녀는 당신의 딸이겠군요?” 그는 이렇게 말한 다음 재빨리 태도를 바꾸어 공손히 읍하며 말했다. “제자의 죄 백 번 죽어 마땅합니다. 아까 제자가 범한 과오는 사모님께서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복면노파는 급히 손을 저으며 말했다. “모르고 한 행동은 죄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니 어찌 너를 탓할 수 있겠느냐? 월녀는 비록 내가 낳은 아이지만 그 애와 나 사이에는 오직 스승과 제자의 정이 있을 뿐 골육의 정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그 애는 추호도 모르고 있단다.” 비류신은 감개무량한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모녀가 서로 얼굴을 맞대고 있으면서 모친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니 이것은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나는 사모님께서 어떻게 십팔 년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참고 살아오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복면노파는 애상에 젖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아(邪兒)야! 내가 오늘날까지 고통을 참고 살아온 것은 순전히 월녀 그 애를 위해서란다. 나는 그 애가 세월과 함께 커가는 것을 바라보노라면 비통한 심정이 적지 않게 감소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 애를 보는 순간 언제나 너의 은사 소대호가 생각났으므로 즉시 말 못할 깊은 고통 속에 잠기곤 했었다.” 복면노파가 사아야, 하고 친근하게 부르는 것이 마치 인자한 모친과 같이 느껴졌다. 비류신은 무의식중에 다시 자기 모친의 품에 돌아온 듯 감동에 쌓여 눈물을 흘렸다. 그는 흐느끼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사모님! 그럼 사모님은 이 진상을 월녀에게 끝까지 알리지 않을 작정이신가요?” 복면노파는 고개를 저으며 천천히 말했다. “그 일은 가급적이면 그 애에게 알려주지 마라. 월녀는 지금 매우 즐거운 생활 속에서 행복하게 지내고 있단다. 그런데 혹시 그 애가 모든 진상을 알게 된다면 뜻밖에 영원히 가시지 않을 상처가 남게 되는 것이니까… …” 복면노파는 비류신을 고즈넉하게 바라보며 온화하게 말을 이었다. “사아야! 너는 나의 의사를 이해하겠지? 이것은 모두가 월녀를 위해서란다. 그렇지 않으면… 아아! 과거는 돌이켜 생각할 필요 없는 것이며 모두 흘러 가버리는 것이다.” 이상한 격동이 비류신의 마음에 충격을 주었다. 그에게는 하늘이 너무나 공평하지 않다고 느껴졌다. 어째서 가지각색의 고통을 모두 이 죄도 없는 여인에게 내렸으며, 그녀들로 하여금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고통에 시달리게 한단 말인가? 그는 참을 수 없다는 듯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사모님! 사모님께서는 월녀로 하여금 영원히 도적을 부친으로 알게 하고, 그녀를 낳은 친부모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하실 생각이십니까?” 비류신은 음성을 낮추고 계속 말을 이어 갔다. “사모님은 월녀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겠지만 그것은 오히려 그녀에게 해를 끼치는 일입니다. 한 인간이 자기의 친부모조차 알지 못하고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무의미한 것이겠습니까? 사모님께서는 월녀의 신세를 영원히 수수께끼로 만들 작정이 십니까?” 마음이 격동된 듯 그의 음성은 차츰 높아졌다. “그것은 너무나 지나친 행동입니다. 더구나 지금 그녀를 양육하는 사람은 바로 그녀의 부친을 살해한 원수입니다. 다만 사리를 조금이라도 판단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도적을 부친으로 섬기게 하여 영원히 후세에까지 불충불효의 욕을 얻어먹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모님의 생각은 완전히 틀린 것으로 저는 압니다.” 이때 우렁찬 고함이 그의 귀를 찔렀다. “닥쳐!” 비류신은 고함을 듣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비록 남에게 굽힐 줄 모르는 성격이었지만, 상대가 자기의 사모였으므로 차츰 후회하는 마음이 생겨 고개를 숙였다. 그는 비통한 목소리로 조용히 사과했다. “사모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복면노파는 그 말을 듣자 별안간 말씨를 부드럽게 하였다. “너에게는 잘못이 없다. 오히려 잘못이 있다면 그것은 내게 있다. 긴 세월 동안 나는 그런 이치를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야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나는 내가 어떻게 해야 옳다는 것을 이제야 겨우 알게 되었다.” 그녀는 탄식을 하면서 말을 계속했다. “아아! 십팔 년간이나 나는 모순된 생각에 사로잡힌 채 고통을 씹으며 살아왔단다. 그러나 지금에야 나는 깨닫게 된 것이다.네가 말한 것은 바로 나의 모순된 마음을 통쾌하게 지적한 것이다. 나는 이제야 비로소 진실한 인생의 의의를 깨닫게 되었다.” 복면노파는 이렇게 말을 맺고 괴로운 듯 눈물지었다. 그것은 비통에 젖은 피눈물이었을 것이다. 바로 이때-- 문 앞에 사람의 그림자가 얼씬거리더니 입구에 우뚝 버티고 섰다. 방안에 있던 두 사람은 동시에 흠칫 놀랐다. 그녀가 언제 이곳에 나타났단 말인가? 그 행동이 너무나 돌발적이어서 방안에 있던 두 사람은 자기의 눈을 의심할 지경이었다. 문 앞에 나타난 그림자는 지금까지 얘기의 주인공인 소월녀 바로 그녀였다. 소월녀의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애절한 눈빛으로 복면노파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하고 다만 감격의 눈물로 두 볼을 적시고 있었다. 숨 막히는 순간이 계속되었다. “어머니!” 갑자기 그녀는 이렇게 소리치며 복면노파의 품속으로 와락 달려들어 울음을 터뜨렸다. 두 모녀는 모두 몹시 감동되어 서로 힘껏 부둥켜안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모녀의 사이는 거침없이 밝혀진 것이다. 소월녀는 어려서부터 자기에게 모친이 없는 것을 매우 불만으로 여기고 모친이 있었으면 하는 소망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그녀가 자기를 낳아준 모친을 만났으니, 갑자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비류신이 이 광경을 목격하자 부지중 감동되었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 서서히 눈을 감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복면노파는 한숨과 함께 조용히 입을 열었다. “월녀야, 모두 들었구나?” 소월녀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네 모두 들었어요.… 어머니! 나에게까지 감쪽같이 속이시다니… …” 이때-- 이상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방안의 세 사람은 한결같이 놀랐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그 사람의 정체를 이리저리 추측해 보았다. 그러자 별안간 비류신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복면노파는 비류신의 어깨를 툭 치며 속삭였다. “사아야! 너는 상세가 매우 심하니 내가 상대하마.” 말을 끝낸 복면노파는 재빨리 몸을 솟구쳐 밖으로 뛰쳐나가더니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소월녀는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들고 말했다. “비 오빠! 당황하지 마세요. 여기는 나의 모친이 소를 하고 있는 곳이니 누구도 감히 들어오지 못하지요… 아아! 오빠의 안색은 어찌 그다지도 좋지 않은 가요?” 그녀는 갑자기 무엇인지 깨달은 모양으로 안색이 싹 변했다. “아! 오빠는 아마 나의 스승… 아… 아니 나의 모친의 천강지신공에 상처를 입은 모양이군요. 아! 이 일을 어쩌면 좋지.” 소월녀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녀의 이런 행동을 본 비류신은 감격하여 그녀를 넌지시 바라보며 말했다. “괜찮소. 이것은 하나의 액운이며 또한 나의 운명이오.” 이때 한 가닥 영감이 그의 머리를 번개처럼 스쳐갔다. 그는 재빨리 생각을 돌려 보았다. ‘천강지신공은 순양(純陽)의 경기(勁氣)이다. 만약 순음(純陰)의 경기로 그것을 저지한다면 혹시 효과를 얻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속히 시험을 해봐야지! 성패는 바로 이 한 번의 시험에 달려 있다.’ 비류신은 급히 소월녀를 향해 소리쳤다. “사매! 당신의 음유지기(陰柔之氣)로 속히 나의 현기(玄機)와 중추(中樞)의 두 혈도를 누르시오. 어서!” 소월녀는 의아한 눈초리로 물었다. “그런 방법으로 효과를 얻을 수 있을까요?” 소월녀는 비록 납득이 가지 않았으나 쌍장을 들어 동시에 비류신의 현기와 중추 두 혈도를 눌렀다. 비류신은 번개같이 일신의 음양지기로 항거했다. 묵묵히 진기를 끌어 올렸다. 그러자 상처 입은 곳에 다시 통증을 느꼈다. 그의 안면은 고통을 겪을 때마다 한 차례씩 경련을 일으켰다. 그의 온몸에서는 구슬같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는 이런 치료 방법을 포기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소월녀의 진기는 파도와 같이 그의 몸에 전해오고 있으므로 도저히 자신의 진기를 멈출 수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이 거뜬히 맑아졌으며 다시는 고통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이때 검은 그림자가 번뜩이면서 분노에 가득 찬 복면노파가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그녀는 몸을 채 멈추기도 전에 밖을 향해 날카로운 소리로 호통을 쳤다. “누구냐?” 고함소리를 따라 큰 소리로 껄껄 웃으며 또 한 사람이 방안에 모습을 나타냈다. 비류신은 나타난 사람이 소대천임을 알자 분노로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재빨리 몸을 솟구쳐 소대천에게 덮치려고 했다. 그러자 복면 노파는 한쪽 팔을 뻗쳐 급히 그를 저지했다. 그리고 노파는 눈을 소대천에게 돌리고 싸늘하게 말했다. “소대천, 그에게 털끝 하나라도 건드린다면 나는 너의 껍데기를 벗겨 버리겠다.” 지신도 소대천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비소협! 우리는 또 만나게 됐구려. 지령보에 찾아온 이상 어째서 나에게 아무런 통지도 안했소? 나는 응당히 지주로서 예의를 다 해야 할 것이 아니겠소?” 매우 의리가 있는 듯하였으며, 추호도 악독한 마두의 티는 찾아볼 수 없었다. 비류신은 일소에 싸늘한 태도로 대꾸했다. “당신의 호의에 감사드리오.” 소월녀는 자기의 부친이 나타난 것을 보자 흠칫 놀랐다. 지금 그녀는 자신의 신세를 이미 훤히 알게 되었다. 그녀는 지신도 소대천이 자기의 친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을 방금 알았지 않은가. 그뿐 아니라 그가 자기의 친아버지를 살해한 원수임을 알자 이제까지 존경했던 마음이 대번에 사라졌다. 그녀는 원망이 가득서린 눈빛으로 소대천을 쏘아보고 있었다. 지신도 소대천은 그녀의 그런 안색을 보자 별로 놀라지도 않고 오히려 태연히 웃으며 말했다. “월녀야! 어째서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느냐?” 소월녀는 독침에 찔린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감정이 격한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당신은 나의 부친이 아닙니다. 나는 당신을 저주합니다!” 지신도 소대천은 흠칫 놀랐다. 그리고 재빨리 사나운 눈초리로 주위를 훑어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월녀야, 왜 그러느냐? 혹시 굴욕이라도 당했느냐? 아니면 누군가의 우리 부녀 사이를 끊으려는 농간에 걸려던 모양이구나. 아아! 월녀야, 너의 모친은 이미 몇 년 전에 세 을 떠났으며 나는 너를 사랑하며 여태껏 키워 왔는데, 이제 와서 너는 이 애비를 버리겠다는 말이냐?” 소월녀는 참담하게 웃으며 머리를 두 팔로 감싸고 울기 시작했다. “아아! 하느님, 어째서 당신은 이런 사실을 저에게 알리도록 하셨습니까? 어째서… …” 방안은 삽시간에 비통에 젖은 분위기로 가득 찼다. 소월녀는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울더니 갑자기 밖으로 뛰쳐나갔다. 소월녀에게 있어서는 너무나 막대하고 감당키 어려운 타격이었다. 하나의 구김살도 없이 순진했던 소녀의 마음은 앞으로 상상도 못했던 어두운 그림자로 짓눌리게 될 것이다. 비류신은 소월녀가 울며 뛰쳐나가는 것을 보자 다급히 고함을 쳤다. “사매! 어디로 가시오?” 그도 재빨리 몸을 솟구쳐 그녀의 뒤를 쫓았다. 그리고 곧 따라붙어 그녀의 팔을 꽉 잡았다. 이때 우렁찬 고함이 터졌다. “그 애를 건드리지 마라!” 지신도 소대천은 잽싸게 손을 날려 오정개산(五丁開山)의 초식을 전개하여 비류신을 향해 격출했다. 복면노파는 소월녀가 뛰쳐나가는 것을 보자 심중에 가득 쌓였던 울분이 터지듯 지신도 소대천에게 폭발했다. 복면노파는 분노에 치를 떨며 앙칼지게 소리쳤다. “소대천! 청강지의 맛을 봐라!” 말과 함께 그녀는 다섯 손가락을 반쯤 갈고리같이 굽히고 힘껏 앞으로 튕겼다. 그러자 대뜸 두 줄기 흉맹한 강기가 허공을 가르는 예리한 소리를 내며 소대천의 일곱 개 요혈을 향해 날아갔다. 지신도 소대천은 천마행공(天馬行空)의 초식을 미처 전개하기도 전에 기습을 당했다. 그러므로 놀란 나머지 방금 비류신에게 취했던 공세를 거둬들이고 황급히 옆으로 피했다. 비류신이 몸을 돌려 그에게 덮치려고 하자 갑자기 소대천이 크게 소리쳤다. “잠깐!” 비류신이 사납게 노려보며 물었다. “당신은 또 무슨 할 말이 있소?” 소대천은 그를 향해 냉소를 흘렸다. 그리고 복면노파에게 몸을 돌리더니 천천히 말했다. “형수님! 복면을 벗어 왕년의 절세적인 형수님의 용모를 저에게 다시 한 번 보여주십시오. 설마 형수님은 계속 나를 속이려고 하지 않으시겠지요?” 그는 빙긋 웃으며 잠시 말을 끊더니 또 다시 이어갔다. “형수님이 지령보 안에 발을 들여놓은 후 나는 대뜸 형수님의 정체를 파악했었소. 그러나 월녀를 위해 나는 모르는 체하고 있었던 것이오. 그것은 당신들 모녀가 매일 함께 지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소.” 소대천의 목소리는 차츰 열을 띠기 시작했다. “왕년에 나는 비록 일시적인 충동으로 천리(天理)에 어긋나는 행위를 저질렀소. 그러나 심중의 고통은 실로 말로는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것이었소. 나는 가끔 둘째 형님께 참회하고 용서를 빌려 했으나 시종 용기를 내지 못했던 것이오.” 그는 여기서 또 말을 끊고 지그시 복면노파를 바라보았다. 연후에 진지한 어조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둘째 형님과 형수에게 속죄하는 의미에서 나는 평생의 심혈을 기울여 월녀를 사랑했으며 한 번도 꾸짖어 본 적 없었소. 그것은 무엇 때문인지 아시오? 그것은 바로 형수를 위해서였소!” 비류신은 그의 말 속에 어렴풋이 은사 야월광명지신도 소대호의 지난 한을 짐작할 수 있었다.그들 형제 사이에 생긴 충돌은 당연히 정(情)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복면노파는 눈물을 흘리며 대뜸 얼굴을 가린 검은 헝겊을 벗어 버렸다. 비류신은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절세적인 아름다운 용모가 목전에 나타났다. 그녀의 머리는 비록 반백이 되었으나 여전히 과거의 미모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 모습은 소월녀와 흡사했다. 만약 반백으로 변한 머리만 아니었다면 소월녀와 자매라고 생각될 만큼 똑같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비류신의 눈앞에 있는 중년의 여인이 자기 사부의 애처(愛妻)임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으므로 실감이 나지 않았다. 지신도 소대천은 몹시 격동된 어조로 소리쳤다. “아아! 매(梅) 누이! 당신은 아직도 옛날처럼 아름답구려.” “닥쳐요!” 아름다운 부인은 눈을 크게 뜨고 싸늘하게 꾸짖었다. 그리고 다시 야무지게 말했다. “나는 당신의 둘째 형의 아내이므로 응당 형수라고 불려야 하거늘 어찌 영매라고 부르오? 당신이 형에게 베푼 악랄한 수단을 논한다면 나는 벌써 남편의 복수를 했어야 하는 것이오. 그러나 당신이 여러모로 월녀를 사랑해 줬기에 여태껏 당신의 목숨을 연장시켜 왔던 것이오.” 아름다운 부인은 울분이 치밀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다시 싸늘한 어조로 말을 계속했다. “만약 당신이 아니었다면 우리 부부는 무엇 때문에 십팔 년간이라는 긴 세월을 서로 헤어져 한 맺힌 나날을 보냈겠소? 소대천! 당신의 마음은 너무나 악독하오. 만인의 공노를 살 악랄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당신은 그처럼 추한 일을 감행했던 것이오.” 지신도 소대천은 얼굴이 창백해졌다. “매 누이! 그것은 내가 너무나 당신을 사랑했기 때문에… …” 미모의 부인은 날카롭게 소리치며 그의 말을 가로챘다 “내겐 설중매(雪中梅)라는 어엿한 이름이 있어요. 당신이 만약 나를 형수라고 부르기 싫다면 나를 백설선자(白雪仙子)라고 부르시오! 다시 또 나를 누이라고 부르면 그때는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 지신도 소대천은 괴로운 듯 길게 한숨을 내쉬고 하소연하듯 입을 열었다. “매 누이, 당신은… …” 이때-- 찰싹 소리가 들리며 지신도 소대천의 두 뺨이 즉시 벌겋게 부어올랐다. 백설선자 설중매는 소대천의 따귀를 힘껏 갈기고도 여전히 분이 가시지 않은 듯 증오에 가득 찬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았다. 비류신은 한쪽에 서서 모든 광경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어렴풋이 모든 내막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절세적인 마두가 정에 묶여 그토록 연약하고 무능하게 변할 줄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그는 그만 씁쓰레 웃으며 몸을 돌려 밖으로 걸어 나갔다. “멈춰라!” 이때 소대천이 재빨리 그의 뒤에서 소리치며 덮쳐갔다. 그리고 손을 쫙 벌려 비류신의 길을 막고 원한과 분노가 서린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비류신은 오만하고 남에게 굽힐 줄 모르는 인물이었다. 어찌 그 말에 걸음을 멈추겠는가? 그는 소대천의 저지를 아랑곳하지 않고 일소에 붙였다. 그리고 태연히 밖으로 달려 나갔다. 지신도 소대천은 격분하여 얼굴에 핏발을 세우며 호통을 쳤다. “너는 스스로 죽음을 부르는구나!” 말과 함께 소대천은 질풍같이 그에게 덮쳐갔다. 비류신은 그가 덮쳐오는 것을 보자 정신을 바짝 차렸다. 그리고 왼발을 갑자기 앞으로 크게 벌리더니 몸을 홱 돌려 쌍장을 좌우로 뻗쳤다. 그는 쌍장을 뻗치는 찰나 맹렬한 기세로 한 바퀴 돌며 소대천을 향해 뻗었던 것이다. 그의 장풍은 마치 거대한 파도처럼 우람하게 덮쳐갔다. 지신도 소대천은 무림에서 명성이 쟁쟁한 흑도의 고수였다. 그는 무림칠절에 속해 있는 인물이었으며 공력은 비할 데 없이 심후했다. 소대천은 냉랭히 웃으며 마치 태산과 같은 위세로 반격해 왔다. 쌍방의 강맹한 장력이 맞부딪치자 경풍이 사방을 휩쓸어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공중으로 먼지가 휘날렸다. 지신도 소대천은 몸을 비틀거렸고 비류신 역시 뒤로 두걸음 물러섰다. 곁에서 바라보던 백설선자는 가슴이 섬뜩해졌다. 그녀는 급히 걸음을 옮겨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녀는 서릿발같이 냉랭한 어투로 소리쳤다. “소대천! 당신은 그를 어떻게 할 작정이오!” 지신도 소대천은 한숨을 내쉬며 내뱉듯 말했다. “좋소! 이번만은 특별히 그를 놓아주겠소.” 비류신은 입가에 냉소를 띠고 낭랑하게 외쳤다. “소대천, 언젠가 당신은 내 손에 죽는 날이 있을 것이오.” 바로 이때였다. 뼈를 찌르는 듯한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실로 대담한 말을 하는구나. 귀하에게 어찌 그런 능력이 있단 말이오?” 비류신은 이 소리를 듣자 우렁차게 소리치며 밖으로 솟구쳐 나갔다. 지신도 소대천은 비류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입가에 괴이한 웃음을 띠었다. 그는 백설선자를 향해 가볍게 읍한 다음 곧 몸을 날려 비류신의 뒤를 따랐다. 비류신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즉시 경풍이 정면으로 밀어닥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신속히 숨결을 조정하고 날카로운 기합소리와 함께 금빛이 번쩍이는 잔금섭혼신편을 앞으로 뻗쳤다. 그 찰나-- 비명소리가 길게 울려 퍼지며 커다란 사람이 나무토막 쓰러지듯 쿵하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땅바닥에 쓰러졌다. 피가 사방으로 뻗치며 머리는 나동그라졌다. 눈 깜짝하는 순간 비류신을 비웃었던 목소리의 임자는 비참한 죽음을 당한 것이다. 비류신은 더 이상 개의치 않고 대뜸 몸을 날려 지붕 위로 올랐다. 사방은 죽은 듯한 적막 속에 가라앉아 있었으며,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때 한 줄기 사방의 그림자가 질풍같이 달려왔다. 그 자가 어떤 신법을 펼쳤는지 알 수 없었으나 그림자가 번뜩였다고 느끼는 순간 이미 비류신의 앞으로 당도했던 것이다. 그 사람은 땅에 내려서는 순간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비 노제, 우리는 뜻밖에 여기서 다시 만나게 됐군!” 비류신은 나타난 사람이 월광검 소대풍임을 보자 증오감이 치밀었다. 그는 간사스런 낯을 쏘아보며 냉랭히 물었다. “귀하는 또 무슨 가르침이라도 있으신지?” 월광검 소대풍은 잔금섭혼신편을 힐끗 쳐다보며 천천히 말했다. “흠! 나는 사람을 잘 알아보지… 비 노제가 그 진귀한 보편을 지니고 있으면 무모한 시비를 초래할 뿐이라네. 이미 피로 물들인 사건은 발생했으며, 모두 자네가 일으킨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비류신은 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더 이상 소대풍을 거들떠보지 않고 몸을 날려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월광검 소대풍은 크게 소리쳤다. “자네는 채찍집을 찾을 생각이 없단 말인가?” 비류신은 그 말에 즉시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그것이 어느 곳에 있는지 당신은 아시오?” 월광검 소대풍은 껄껄거리고 간사하게 웃었다. “알고말고! 나는 내 동생이 나에게 보복할 것을 각오하고 자네에게 알려주는 것이라네. 이것은 지극한 성의에서 하는 말일세.” 비류신은 암암리에 비웃었다. ‘네놈이 아무리 달콤한 말로 나를 유혹한다 해도 나는 역시 너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소대풍은 다시 말을 이었다. “지금 각 지방의 고수들은 모두 지령보의 북쪽 한 귀퉁이에 집결했으며, 나의 삼제 소대천도 곧 그곳에 당도할 것일세.”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네 줄기 검은 그림자가 쏜살같이 지령보의 북쪽을 향해 치달리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비류신은 그것을 보자 소대풍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도 몸을 날려 그들의 뒤를 추적해 갔다. 월광검 소대풍은 간사스러운 웃음을 입가에 담고 비류신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비가야! 내가 너를 아직 이용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어찌 너를 순순히 내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놔줬겠는가? 흥! 오직 너만이 나의 삼제가 가장 골머리를 앓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지.” 그는 생각을 멈추고 소리를 내어 껄껄 웃더니 말을 꺼냈다. “핫핫… 다만 비류신 네가 나의 삼제를 함부로 날뛰지 못하게 제압만 해 준다면 잔금섭혼신편은 언젠가는 반드시 내 수중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 흣훗… 너희들은 가서 실컷 싸우기나 해라!” 웃음소리를 길게 남기고 그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지령보 북쪽의 한 모퉁이에서는 이때 마침 일 장의 성회(盛會)가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비류신은 그곳에 당도하자 이미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그들은 얼굴에 모두 기이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며, 마치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도 같았고 또한 감시하는 듯도 하였다. 넓다란 평지에는 어느새 고대(高臺)가 세워져 있었다. 고대는 이 장 높이에 일 장 넓이로 된 것이었으며 전체가 금황색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금빛도 찬란하게 금령대(金令臺)라는 세 글씨가 씌어져 있었다. 또한 금령대의 주위에는 네 개의 천막이 쳐 있으며 천막마다 한 조각의 방패가 걸려 있었다. 방패의 순서는 지령보, 도장맹, 사대섬, 흑룡강 네 파의 좌석으로 되어 있었다. 천막과 금령대 사이의 빈터에는 무수한 돌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것은 분명 무림에서 혼자 떠돌아다니는 호걸과 고수들을 위해 준비한 좌석일 것이다. 이때 주위에는 이미 적지 않은 강호 인물들이 당도하여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매우 냉담한 표정으로 좌석에 앉은 채 서로 한마디 말도 없었으며 인사조차 나누지 않았다. 장내는 무거운 침묵에 잠긴 채 매우 엄숙한 분위기로 꽉 차 있었다. 지령보의 인물들은 아직 아무도 나타나지 않아 천막안의 좌석은 텅 비어 있었다. 흑룡강파 역시 지령보와 마찬가지로 다만 빈 천막만 우뚝 세워져 있을 뿐이었다. 사대 섬의 천막 앞에는 이십여 명의 흑의 대한들이 운집해 있는 것 외에 천막 안의 네 좌석은 비어 있었다. 물론 네 개의 빈 좌석은 사대도의 영주들의 좌석임이 틀림없었다. 도장맹에서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당도해 있었다. 청풍검 선우철은 웃음 띤 얼굴로 좌석에 앉아 있었다. 그의 옆에는 빈 좌석이 하나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 둘레에는 도장맹의 고수들이 서 있었다. 위풍당당한 기세로 청풍검 선우철은 의젓하게 앉아서 쉴 새 없이 눈길을 돌려 주위를 훑어보고 있었다. 마치 그의 안중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듯했다. 천막 밖의 군웅들은 모두 불만스런 기색을 나타내고 있었으나 도장맹의 사람들은 아무런 내색도 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자 이때, 누군가 싸늘하게 코웃음을 치는 소리가 무거운 장내의 분위기를 깨뜨렸다. 순간 군웅들의 시선은 일제히 소리가 나는 쪽으로 집중되었다. 수백 개의 눈동자가 그 쪽으로 돌려졌던 것이다. 그 사람은 선우철을 뚫어져라 쏘아보더니 갑자기 우렁찬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소리는 상대방을 몹시 비웃는 듯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도저히 참을 수 없게 했다. 청풍검 선우철은 그쪽을 바라보는 순간 속으로 몹시 놀랐다. 그 사람은 티 없이 깨끗한 얼굴에 불그레한 홍조를 띠고 있었으며, 눈썹 끝이 위로 쭉 뻗친 드물게 보는 영준한 인물이었다. 선우철은 강호에서 오랫동안 활동해 왔으나 나타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선우철은 호탕하게 웃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귀하의 성함은 어떻게 되시는지? 이 천막으로 와서 만나주실 수 있겠소?” 날씬한 선비차림의 사람은 냉랭히 웃으며 대답했다. “감사하오! 그러나 나는 높이 추켜 주는 것을 감히 받아들일 수 없소이다.” 이렇게 말하며 선우철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제자리에 다시 앉았다. 군웅들은 제각기 이 선비의 행동이 이처럼 대담하고 괴이한 것을 보자 모두 섬뜩 놀랐다. 그들은 제각기 이 사람의 내력을 암암리에 추측하고 있었다. 선우철은 몹시 불쾌했다. 그렇다고 중인들 앞에서 발작할 수도 없는 일, 하는 수 없이 얼음장같이 싸늘한 웃음을 입가에 담았다. 주위의 군웅들은 그의 얼굴에 나타난 음사한 냉소를 보고 모두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선우청의 얼굴에서 냉소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비류신이 나타났다. 그는 비류신을 발견하자 마음이 동하여 웃는 낯으로 말했다. “비형, 나는 여기서 오랫동안 기다렸소이다. 자아! 어서 이리로 오시오.” 이렇게 말하며 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친히 마중하러 나갔다. 군웅들의 시선은 모두 비류신에게 옮겨졌다. 그들은 선우철의 안색에서 그가 마중하는 사람은 필시 쟁쟁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군웅들은 나타난 사람이 바로 비류신인 것을 보자 모두 실망에 찬 한숨을 내쉬는 것이었다. 비류신은 선우철이 그토록 깍듯이 예의바르게 자기를 대해주는 것을 보고 매우 감동했다. 그는 매우 격동된 어조로 말했다. “선우형은 소제의 낯을 뜨겁게 하시는구려.” 두 사람은 서로 손을 맞잡고 함께 천막으로 들어왔다. 그들의 몹시 다정한 모습을 본 장중의 군웅들은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체를 추측할 수 없는 서생은 비류신이 나타나자 안색이 돌변했다. 그러나 그는 순식간에 다시 태연한 자세로 돌아왔다. 그리고 무심한 듯 다만 하늘에 뜬 구름만 바라보고 있었다. 비류신은 주위를 한 번 쑥 훑어보고 나서 천천히 물었다. “선우형, 오늘 이곳에 올 인물들은 많소?” 선우철은 냉소를 흘리며 대답했다. “용과 범이 섞여 있으나 별로 두드러진 인물은 없소.” 그의 음성은 매우 낮고도 잔잔하여 오직 자기만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 선비는 고의에서인지 무의식중인지 선우철을 노기어린 눈초리로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을 본 선우철은 왠지 마음이 걸렸다. ‘저 자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저 자의 눈초리는 매우 날카롭구나. 아무래도 나는 저 자를 조심하며 경계해야 되겠군.… …’ 비류신도 무심결에 선우철이 바라보고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그는 선비의 얼굴이 몹시 낯익은 듯했으나 어디서 본 사람인지 갑자기 생각해 낼 수 없었다. 그 선비는 비류신과 눈이 마주치자 오히려 그 기회를 틈타기라도 하 듯 재빨리 비류신에게 웃음을 보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다시 고개를 들어 금령대라고 쓴 세 글자를 무심히 바라보는 것이었다. 바로 이때 어디선가 징과 북으로 연주하는 군악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것은 마치 선악(仙樂)이기라도 한 듯 듣는 이의 마음을 경쾌하게 만들었다. 모여 있던 호걸들은 동시에 고개를 쳐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소리가 어디서 울려 퍼지는지 알 수 없었다. “사대도의 영주들께서 당도하셨소.” 우렁찬 전령의 소리가 적막을 깨뜨리고 장내에 메아리 쳤다. 천백 줄기의 눈길이 일시에 한 곳으로 쏠렸다. 말에 올라 선 사람은 전초도주 금환두발 진동철이고 순무도주 강개세 동백설과 장모도주 맹독도 사살수가 중간에 있었으며, 어간도주 일월도사 장죽림이 제일 뒤에 있었다. 그들 네 사람은 위풍도 당당하게 사대도의 천막으로 들어가 영주의 좌석에 각기 좌정했다. 수행해 온 졸개들도 좌우로 갈라선 채 모두 수중의 병기를 들고 있었다. 금환두발 진동철은 선우철을 바라보더니 마땅치 않은 듯 흥! 하고 입을 열었다. “저 두 놈이 먼저 당도했을 줄은 생각지도 못 했는걸… …” 비류신은 그 말에 왈칵 격분했다. 그는 진동철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당신이 올 수 있는데 남이라고 오지 못하겠소?” 이렇게 소리치며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선우철은 급히 그를 잡아 자리에 앉히며 속삭였다. “비형, 진정하시오. 이제 곧 가부께서 당도하시기만 하면 저들 사대도의 영주들도 꼬리를 감추고 도망쳐 갈 것이오.” 일월도사 장죽림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선우 노인에게 용과 같은 아들이 있다는 소문은 과연 거짓이 아니군! 이렇게 만나자마자 큰 소리를 치는 것을 보니… …” 선우철은 냉랭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며 암암리에 생각했다. ‘나의 공력은 비록 고강하긴 하나 도저히 사대도주의 적수는 못 된다.아직도 두 패의 강적이 당도하지 않았으므로 지금 손을 쓰게 되면 우리의 실력을 낭비시킬 뿐이지. 그러니 잠시 참는 게 좋을 것 같군.’ 현명한 그는 잠시 동안에 이미 이해득실을 판단했다. 그는 억지로 심중의 분노를 가라앉히며 냉정한 태도로 앉아 있었다. 또 다시 우렁찬 소리가 들려왔다. “지령보의 인물들이 당도하였소!” 전령의 말이 끝나자 곧 지신도 소대천이 지령보의 수하고수들을 이끌고 천막에 당도했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