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인자만의 삶
“너희 둘이 나를 위해 싸우는 순간부터 나는 다시 누군가의 삶에 얽힌 사람이 되어버려.”
인자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떨림 속에는 오랜 세월을 혼자 견뎌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단단함이 배어 있었다.
갑철과 태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인자는 천천히 눈물을 닦았다.
“나는 다시는 누구의 죄책감도 되고 싶지 않아.”
잠시 숨을 고른 뒤 다시 말했다.
“누구의 선택 때문에 상처받는 사람도 되고 싶지 않고.”
그 말을 끝으로 인자는 두 사람을 뒤로한 채 돌아섰다.
그날 이후였다.
인자는 병원에서 태수를 마주쳐도 예전처럼 웃지 않았다.
복도 끝에서 태수와 마주치면 잠시 걸음을 멈추는 듯하다가도 이내 고개를 가볍게 숙여 눈인사만 했다.
“누나.”
태수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응.”
짧은 대답이었다.
인자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지나갔다.
태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예전 같으면 따라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았다.
인자가 얼마나 힘들게 자신을 지키고 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태수가 커피 두 잔을 들고 인자 앞에 섰다.
“커피 한 잔만 하자. 딱 십 분이면 돼.”
인자는 잠시 커피잔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 나 지금 바빠.”
“그럼 나중에라도…….”
“태수야.”
인자가 처음으로 태수의 말을 끊었다.
“나한테 더 다가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차갑게 들리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이 나오기까지 인자의 마음속에서는 수없이 많은 생각이 오갔다.
태수가 싫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태수가 자신에게 다가올수록 마음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자는 그 흔들림이 두려웠다.
자신은 이미 너무 오랫동안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아왔다.
또다시 누군가의 삶으로 들어가 그 사람의 선택과 감정에 얽히고 싶지 않았다.
인자는 평생 자신의 삶을 뒤로 미루며 살아왔다.
어린 시절부터 그랬다.
갑철의 어머니 현숙이 자신에게 보내주었던 돈과 장학금은 인자에게 단순한 생활비가 아니었다.
가족을 살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인자는 그 돈을 아끼고 또 아꼈다.
자신을 위해 좋은 옷 한 벌 사는 것도 망설였고, 친구들과 밥 한 끼 먹는 것조차 줄였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동생들의 학비를 보탰다.
어느 날 동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나, 나 이번 학기 등록금은…….”
인자는 웃으며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 누나가 알아서 할게.”
“그래도…….”
“공부나 열심히 해.”
인자는 동생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나중에 너희들이 잘사는 게 누나한테 갚는 거야.”
그 말은 언제나 같았다.
하지만 동생들이 돌아간 뒤 편지를 읽을 때면 인자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창밖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청춘을 조금씩 잘라 가족들에게 나누어주는 것 같았다.
간호사가 된 뒤에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첫 월급을 받던 날이었다.
인자는 한동안 월급명세서를 바라보았다.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돈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인자에게는 가족에게 보내야 할 돈이었다.
생활비를 제외하고 남은 돈은 거의 모두 집으로 송금했다.
‘이번 달에는 동생 등록금도 내야 하고…….’
‘엄마 병원비도 조금 보내야 하고…….’
계산을 끝내고 나면 자신의 통장에는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래도 인자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아니.
괜찮다고 자신을 설득했다.
연애.
결혼.
그런 것은 자신에게 사치라고 생각했다.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고, 예쁜 옷을 입고 데이트하고, 함께 미래를 꿈꾸는 삶.
그런 것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아직 안 돼.’
‘우리 가족부터 자리 잡게 해야 해.’
그래서 인자는 자신의 인생을 계속 뒤로 미뤘다.
오늘도 미루고, 내일도 미뤘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자신의 행복을 미루는 것이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
그런 인자를 바라보며 태수는 점점 가슴이 아파졌다.
그러나 이제는 붙잡지 않았다.
기다리기로 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말없이 우산을 하나 더 챙겨두었다.
인자가 야간근무를 마치고 나오는 날이면 멀찍이 떨어져 걸었다.
힘들어 보이면 다가가고 싶었다.
하지만 인자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참았다.
그러던 어느 새벽이었다.
인자는 야간근무를 마치고 병원 밖으로 나왔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병원 현관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태수였다.
태수는 아무 말 없이 우산 하나를 내밀었다.
“이거 써.”
인자가 태수를 바라보았다.
“태수야.”
“같이 가자는 말 안 할게.”
태수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냥 누나가 비 맞는 건 싫어서.”
인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태수는 우산을 인자의 손에 쥐여주고 돌아섰다.
“나 먼저 갈게.”
인자는 한동안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눈가를 닦았다.
처음이었다.
태수가 자신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지 않은 것이.
사랑을 증명하라고 하지도 않았다.
자신의 마음을 선택하라고 재촉하지도 않았다.
그저 비를 피할 수 있도록 우산 하나를 건네주고 돌아갔다.
인자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 인자의 마음 한구석에는 작은 변화가 생겼다.
아주 작은 금이었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기에는 아직 이르렀다.
용서라고 부르기에도 아직 부족했다.
다만 태수의 변함없는 마음이 자신 안에 굳게 닫혀 있던 문을 조금씩 두드리고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인자는 여전히 혼자 살고 싶었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고 싶었다.
누구의 보호도, 누구의 동정도, 누구의 희생도 원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아주 작은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혹시…… 나도 누군가에게 기대도 되는 걸까?’
인자는 스스로 놀라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아니야.’
그러나 처음으로,
‘절대로 안 돼.’
가 아니라,
‘조금만…… 생각해 봐도 될까.’
라는 마음이 생겼다.
그 작은 변화는 인자에게 오랜 겨울 끝에 찾아온 아주 미약한 봄빛과 같았다.
그리고 태수는 그 봄빛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멀리서 기다렸다.
인자가 다시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