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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렇지만, 특히 지난 여름은 뉴스 듣기가 겁났다. 생활고에 시달리다 고층 아파트에서 아이를 던지고 자신도 뛰어내린 지독한 에미가 있는가 하면, 아들 카드 빚에 절망해 독약을 마신 노부부도 있었다.
이렇듯 서민 세계에선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 날마다 반복되는데도 이전투구의 정치판은 늘상 그 모양에 그 꼴이니 이 슬픔으로 막힌 가슴을 어떻게 하면 풀 수 있을까. 정권 잡으랴, 잡은 권력 유지하랴, 바쁘디 바쁘신 정치인들에게 이런 해결책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답답한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무심한 세월은 구름처럼 잘도 흘러 살갗에 와 닿는 기운이 아침저녁으로 다르다. 말복이 남았다 해도 입추가 지났으니 이른 아침나절에 그늘에라도 들라치면 살갗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이 강퍅한 현실을 어찌하면 잠시라도 잊을 수 있을까. 강원도 산골로 들어가 찰옥수수 한 솥 삶아놓고 아라리 한 곡조 불러볼까, 아니면 서해 갯벌로 가서 구조개 캐다가 연탄불에 구워가며 쓴 소주 한 잔 들이켜 볼까.
그러나 잠시나마 시끄러운 현실 잊고 지내긴 대숲이 제일이 아닌가. 옛날 중국에서 죽림(竹林)에 모여 거문고 뜯고 술잔 부딪치며 청담(淸談)으로 세월을 보낸 일곱 명의 선비 얘기가 있지 아니한가. 하긴 그들도 대부분 다시 현실과 타협했거나 권력자에게 죽음을 당하긴 했지만….
이 땅에 대숲 좋은 고을은 적지 않다. 지리산 기슭의 구례 하동 산청의 대숲이 좋고, 익산 미륵사지를 지켜온 미륵산(430m)의 죽순맛도 일품이요, 북으로 올라가선 율곡 이이를 키운 강릉의 오죽(烏竹)이 아주 유명하다. 그래도 역시 대나무 하면 남도땅 무등산 기슭의 담양이요, 담양 하면 늘 푸른 대숲이 아닌가.
그렇게 나선 담양 나들이길. 나그네는 담양에 들 때는 대부분 호남고속도로 장성 나들목으로 나온다. 고속도로만 이용해 비아·서광주·동광주 나들목 모두 지나서 빙 돌아 들어가는 것보다 시간도 절약할 수 있거니와 국도변을 따르면서 왼쪽으로 펼쳐진 병풍산의 멋들어진 풍광을 감상하는 맛이 제법이기 때문이다. 또 88올림픽고속도로를 탈 경우에는 순창 나들목으로 나와 국도를 탄다. 담양의 가로수를 보기 위해서다.
국도 여행의 가장 큰 장점 가운데 하나는 가로수 감상이다. 허나 요즘 국도를 달리다보면 언짢은 풍경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꽃가루 날리는 걸 막고 전깃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플라타너스든 은행나무든 가로수 가지를 온통 베어내기 때문이다. 어떤 건 가지가 하나도 없어 마치 생명 없는 통나무를 박아놓은 것처럼 보이니 이런 고을을 지날 때면 애초 가로수를 기대할 바가 못된다.
가로수를 가로수답게 가꾸지 못할 바에는 뭐 하러 심어놓고 봄마다 가을마다 똑 같은 짓을 반복하는지…. 일부 고을은 가로수를 이렇게 ‘흑사리 껍데기’로 치부하고 있지만, 대숲 고을인 담양은 다르다.
견문이 좁은 탓인지 아직 대나무를 가로수 삼은 고을은 보지 못했다. 물론 담양의 가로수는 대나무가 아니다. 메타세쿼이아(Metasequoia). 대숲을 보고 누정에 오르기 위해 찾아간 담양 나들이길에서 대부분의 방문객들은 메타세쿼이아 가로수에 먼저 마음을 빼앗긴다. 이는 1972년 전국적으로 가로수 조성사업이 한창일 때 당시 담양의 시범 가로수로 지정된 나무다. 3~4년 짜리 묘목을 심은 것이 매년 1m씩 자라 30여 년이 지난 지금은 담양의 국도를 빛내주는 울창한 가로수로 자라났다.
이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은 장성서 담양 읍내로 들어서는 국도변도 좋고, 순창서 들어서는 국도변도 괜찮다. 그중 가장 좋은 구간은 읍내에서 순창쪽으로 가다가 금월교에 이르는 십릿길. 그중 확장 국도를 외곽으로 돌려놓은 학동 마을 구간의 구 도로 풍광이 제법이다. 남도땅 말간 햇살에 연두색 이파리들 반짝이는 봄날, 시원한 녹음 드리운 여름, 잎사귀 황금빛으로 물든 가을, 그리고 빈 가지를 스치는 바람소리 자욱한 겨울, 어느 때 찾아도 좋은 길이다.
이 가로수가 대숲과 더불어 이방인들을 담양으로 불러들이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도로를 새로 내면서 베어질 운명에 처하기도 했으나 주민과 환경단체들이 힘을 모아 지킨 덕이 크다. 만약 담양 나들이가 단지 대숲과 죽제품 때문이라면, 나름대로 자랑할 만한 대숲을 갖고 있는 고을인 경남과 전북의 번호판을 단 차량들이 이다지 많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담양에 와서 대숲에 먼저 들든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을 먼저 거닐든, 나무가 주는 행복감이 참으로 크다는 사실을 저절로 깨닫게 된다.
또 한때 담양읍에 제법 큰 절집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오층석탑(보물 제506호)이며 석당간(보물 제505호) 같은 석물들이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을 가운데 두고 마주보고 있어 드라이브의 운치를 더해준다. 담양 전망이 뛰어난 남산(220m)을 배경으로 논배미 한쪽에 서있는 오층석탑은 고려 때 지어졌음에도 여전히 백제의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형식을 따랐음을 알 수 있다. 비교적 균형도 잡혔다는 전문가의 평가인데, 맞은편에 자리한 석당간도 맨 꼭대기 장식으로 설치한 유구가 비교적 잘 남아있다.
조금 실망스러운 건 석당간이다. 키 큰 나무틈에 서있는 건 그렇다 쳐도 당간 곁에는 세운 지 얼마 안 된 듯한 커다란 전봇대가 나란히 서 있어 석당간의 체면을 여지없이 깎아 내린다. 보물이면 보물답게 대접하든지, 자신 없으면 방해나 말든지 해야 하는데, 수백 년간 담양을 오가는 나그네들을 지켜봤을 석당간을 낡은 전봇대처럼 대우하고 있으니…. 미적 안목이 뛰어난 담양 사람들이 이를 가만 두고 있다는 것이 의아할 뿐이다.
여하튼 담양에서 맨 처음 방문객을 반기는 건 메타세쿼이아 가로수지만, 담양 고을 사람들은 자신들을 키운 건 8할이 대숲을 뒤흔드는 바람이라고 말한다. 담양의 주인은 단연 대숲인 것이다. 그래도 예전엔 이방인이 대숲 거닐긴 좀 힘들었다. 대숲을 대밭이라 부르는 데서 알 수 있듯, 대숲을 들어가는 건 남의 밭에 함부로 들어가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90년대 중반에 한 개인이 금성면 봉서리에 대나무골 테마공원을 열어 외지인들도 대밭을 거닐 수 있게 된 건 그나마 다행이다. 최근엔 읍내 한 중간 향교리 관방제림 근처 대숲에 오솔길을 냈고, 담양군에서는 앞으로도 이런 대숲을 여러 군데 개방할 예정이라니 담양에서 대숲 하나만큼은 실컷 거닐 수 있을 것 같다.
대나무는 미덕이 많은 식물이다. 사철 맑고 푸르니 고결한 인품의 선비를 닮았고, 굳고 곧음은 학문을 쌓은 학자에 비견된다. 또 하늘 높이 솟은 모습에선 군자의 풍모를 배우고, 속이 텅 비었으니 욕심을 버린 도인을 만난 듯하며, 단칼에 곧게 쪼개지니 원칙을 중시하는 장군을 보는 듯하다.
동양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이런 미덕을 지닌 대나무를 지극히 사랑했다. 특히 유교적 가치를 중시했던 우리 선비들은 대나무를 행실의 척도로 삼을 정도로 매우 아꼈으니, 글 좀 쓸 줄 아는 이는 누구나 대나무의 덕을 읊었고, 그림 좀 그리면 화선지에 대를 쳤다.
그런 대나무 가득한 대숲에 들어 엉뚱하게 대꽃을 생각해본다. 대나무는 흔히 60년마다 꽃이 핀다고 알려졌지만, 사람들은 100년이 넘어야 핀다고 생각하고 있다. 무려 한 세기가 지나야 꽃이 핀다는 것도 참 대단하지만, 과문한 탓에 아직 대꽃을 봤다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꽃이 아닌 죽순으로 번식하는 대나무는 죽을 때 딱 한 번 마지막으로 꽃을 피운다. 대나무가 한 곳에서 오랫동안 번식하면 땅속의 영양분이 부족하게 되고, 결국 땅속의 영양분이 사라져 말라죽는 것이다. 더 이상 죽순으로 번식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대나무의 마지막 선택, 그건 자신의 씨앗을 남기기 위한 꽃이다.
그게 무려 100년이나 걸린다고 하니 이런 희귀한 대꽃을 본 사람은 분명 행운아일 것이다. 어쩌면 식물 세계에서 가장 슬픈 광경을 만난 것인지도 모른다. 하긴 우리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온갖 풀꽃들이 다 그렇지만, 그래도 왠지 한 세기만에 꽃을 피우고 스러진다는 대꽃 얘기는 들을 때마다 가슴 저리다.
대밭 거닐면서 운치를 만끽했으니 담양 죽제품을 살펴보자. 장날이 아니니 박물관으로 발길을 옮긴다. 흔히 죽향(竹鄕)으로 불리는 담양은 우리 민족과 호흡을 같이 해온 죽세공예품, 곧 죽물의 산실이다. 담양의 죽물 역사에 대해 옛 군지인 <추성지>엔 400여 년 전 전주에서 이사온 김씨 노부부가 참빗을 만든 것이 최초라 기록하고 있다.
이 참빗에서 시작한 담양의 죽물은 현재 700여 종에 달한다. <추성지>의 기록에 16세기 후반에 담양에 건립된 죽헌이라는 정자의 기둥, 들보, 서까래가 모두 대로 되었다는 내용을 미루어 볼 때 담양에서 대나무가 갖는 위상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담양의 죽물시장은 300여 년 동안 이어온 전국 최대 규모의 장터다. 최초로 장터에 나온 죽제품은 삿갓과 참빗이었다고 한다. 예전에 장날 아침이면 마을 사람들은 삿갓 대바구니 소쿠리 같은 죽물을 바리바리 이고지고 장터로 찾아들었다. 특히 조선시대엔 장날마다 삿갓이 하루에 3만 개쯤 팔려나갈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한다. 주민들은 아직도 죽물시장을 ‘삿갓점머리’라고 부르고 있다. 질 좋은 참빗도 청나라와 일본 상인까지 불러들일 정도로 인기 있었는데, 일제 때 일인들은 ‘진소(眞梳·참빗)조합’을 세워 세금으로 연간 쌀 3,000가마를 착취했다고 한다.
장날만 되면 시장통이 꽉 막힐 정도의 호황은 해방 이후까지도 이어졌다. 장난감이나 의자 베개 같은 새로운 죽세공품을 개발해 미국 영국 일본 등으로 수출하는 등 담양 죽물은 1970년대 중반까지 최고의 호황을 누렸다. 그러다 플라스틱 생활용품이 대량으로 쏟아져 나오면서 점차 하향곡선을 긋다가 중국산 제품을 비롯해 베트남 태국 등의 외국제품이 밀려들면서 심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렇듯 죽물 수요는 예전만 못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담양은 죽세공예품의 메카다. 세월 따라 품목도 변해 삿갓 소쿠리 키 참빗 등이 사양길로 접어든 반면, 돗자리 방석 전화받침대 자동차시트처럼 현대인의 취향을 반영한 죽물이 등장했다. 매년 5월마다 열리는 죽향축제엔 정교하게 제작한 꽃병 서류가방 골프채 등 현대적 감각의 공예품도 출품되는데, 이렇게 예술성을 높인 공예품은 마치 한 점의 예술품을 보는 듯한 감동을 준다.
현재 담양에서 죽세공품을 생산하는 집은 현재 210여 가구로 1,400여 주민들이 70여 종의 죽물을 만들고 있다. 그중 낙죽(烙竹), 채상(彩箱), 참빗, 죽렴(竹簾)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대의 표면을 인두로 지져 그림이나 글씨를 새기는 낙죽은 가장 화려한 죽세공품. 낙화(烙畵)라고도 하는데, 참빗이나 합죽선 등에 십장생도를 비롯해 산수 국화 매화 포도 같은 문양을 그려 넣었다. 인두의 온도가 높으면 검정색, 낮으면 다갈색이 된다. 인두의 열이 식기 전에 무늬를 완성시켜야 하기 때문에 온도와 손놀림은 오랜 경험과 숙련된 기술이 필요한 작업이다. 요즘은 전기 인두로 낙을 놓지만 깊이에 있어서는 숯불 인두를 따르지 못한다.
낙죽장(烙竹匠)이란 이 기술을 가진 이를 말한다. 1대 이동연 장인이 세상을 뜬 뒤 1987년부터 국양문 장인이 명맥을 이었다. 국씨는 4살 때부터 참빗 만드는 기술을 배워 시장에 내놓을 정도로 뛰어난 낙죽장이었는데, 그도 1998년 84세의 일기로 타계했다. 현재는 1972년에 이동연 장인에게 낙죽 기능을 전수받은 이형진씨가 금성면 작업장과 대나무 박물관을 오가며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채상(彩箱)이란 대나무를 얇고 가늘게 쪼개 빨강 노랑 파랑으로 염색한 뒤 짜서 만든 대나무 옷상자를 말한다. 혼숫감을 담거나 바늘 실 헝겊 같은 바느질도구를 담는 반짇고리를 주로 만들고, 벼슬아치나 궁중에 바치는 봉물을 담아 보내는 데 사용했다.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채상을 담양 특산물로 기록하면서 ‘무늬와 촉감이 마치 비단을 두른 듯 곱다’고 설명했다. 13단계의 공정을 거치는 채상 작업은 현란한 색깔과 화려한 문양을 위한 염색과 마무리 작업이 매우 까다롭다고 한다. 서한규 장인(무형문화재 제53호)이 맥을 잇고 있다.
이외에도 역사도 길고 질도 으뜸인 담양 참빗은 향교리 고행주 장인(무형문화재 제15호)이, 해를 가릴 때는 대발로 불리는 죽렴(竹簾)은 봉산면 기곡리의 박성춘 장인(무형문화재 제53호)이 전통을 잇고 있다.
죽제품의 역사를 짚어보는 대나무박물관에서의 시간은 아무리 널널하게 잡아도 짧다. 대나무골 테마공원이나 죽녹원에서 대숲을 어슬렁거린 다음에 대나무박물관과 그 앞의 죽물점을 기웃거리면 담양의 대나무 사연은 얼추 들은 것이다. 거기에 담양 읍내를 지키기 위해 제방을 쌓고 나무를 가꾼 영산강 상류의 관방제림을 거닐면 담양에서의 대숲은 대부분 섭렵했다 할 수 있다.
이즈음이면 대부분의 방문객들은 급한 마음에 발길을 남으로 돌려 가사문학 정취 물씬 풍기는 누정으로 달려간다. 그러나 수백 년 동안 담양뜰을 지켜온 관방제림을 적시는 영산강을 계속 거슬러 북으로 오르면 담양에서 가장 깊고 그윽한 자연 풍광을 만날 수 있다. 바로 용추산 가마골이다.
담양은 대체적으로 북부 중부 남부권 세 권역으로 나눌 수 있다. 호남정맥과 접한 산악지역인 북부권은 영산강 최상류. 이 강의 시원(始原)이라는 가마골 용소에서 전설을 듣고, 6·25전쟁 당시 남부군들의 사령부가 있던 가마골 산책을 곁들이면 반세기 전 이 땅에서 벌어졌던 슬픈 역사를 더듬게 된다.
가마골 깊은 곳에 자리한 용추사의 소박함도 빼놓기 아깝다. 비록 일주문도 없고 거창한 석탑도 세우지 못했어도 여기저기 흩어진 부도군에서 한 때는 제법 규모가 컸던 절집임을 짐작할 수 있다. 입구께 자리한 해우소 건물의, 적당히 굽은 나무를 이용한 기둥엔 자연스런 곡선미가 한껏 넘친다. 가마골 초입에서 무려 5km나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가마골에 야영객들이 몰려드는 피서철에도 호젓하기만 하다.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소리도 더욱 그윽하다.
이외에 바위로 이루어진 추월산(729m) 보리암에선 임진왜란 당시 김덕령 장군의 부인 흥양 이씨가 왜군을 피하다 순절한 이야기를 전해들을 수 있고, 호남정맥 산성산(573m) 둘레에 쌓은 금성산성에선 담양호와 담양평야를 굽어보며 남도 땅을 눈속에 담을 수 있다. 임진왜란 이후 장성의 입암산성(立岩山城), 무주의 적상산성(赤裳山城)과 함께 호남의 3대 산성으로 꼽힌 이력을 지니고 있다. 산성길이 잘 가꿔져 있다.
담양은 덩치가 작은 편임에도 볼거리가 많아 북부권만 해도 제대로 둘러보려면 최소 반나절은 잡아야 한다. 그러나 아직은 중부권이나 남부권에 비해 방문객 발길이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담양호를 빠져나와 29번 국도를 타고 남진하다 담양 읍내를 지나면 드디어 ‘문향(文鄕)’으로서의 담양을 만나게 된다.
담양 사람들을 키운 8할이 대숲에 부는 바람이라면 나머지 2할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전망 좋은 곳곳에 세워져있는 누정(樓亭)이다. 담양 주민들은 대숲과 더불어 누정을 대단히 소중하게 여긴다. 오례천의 면앙정, 증암천의 송강정 식영정 환벽당 소쇄원 같은 누정은 시가문학의 무대로서 호남가단의 구심점으로서 ‘가사문학권’을 이루고, 이곳을 중심으로 조선시대 가사문학이 크게 발전하여 꽃을 피웠다.
담양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이서의 ‘낙지가’를 비롯해 송순의 ‘면앙정가’, 정철의 ‘성산별곡’ ‘관동별곡’ ‘사미인곡’, 정식의 ‘축산별곡’, 남극엽의 ‘향음주례가’, 남석하의 ‘백발가’, 정해정의 ‘석촌별곡’ 등 대충 손에 꼽히는 것만도 수십 편에 이른다.
제일 먼저 반기는 건 면앙정-. 잘 알려진 소쇄원이나 식영정으로 바로 가느라 많은 방문객들이 빼놓곤 하지만, 1533년에 초정으로 건립된 이 면앙정에서 당대 호남 제일의 가단으로 꼽히던 ‘면앙정가단’이 이루어졌다. 호남가단의 원류요, 강호가도의 선구자로 여겨지는 송순(宋純·1493-1583)은 의정부 우참찬 벼슬을 마지막으로 낙향해 이곳으로 왔으니 당시 나이가 77세 무렵이었다. 송순은 이곳서 본격적인 문학생활에 들어섰는데, 제봉 고경명, 고봉 기대승, 백호 임제 등이 그의 문하에 있었다.
‘십년을 경영하여 초려삼간 지어내어/나 한 칸 달 한 칸 청풍 한 칸 맡겨두고/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다’
송순의 욕심 없는 자연 사랑이 돋보이는 시조 한 수로 늦더위 갈증을 풀고 발길을 계속 남으로 향한다.
이번엔 송강정(松江亭)이다. 정자의 주인인 송강(松江) 정철(鄭澈·1536-1593)은 조선시대에서 손꼽히는 문장가. 그의 정치역정은 실로 파란만장한 것이었고, 고비 때마다 그는 당시 창평현이었던 이곳 고향으로 돌아와 은거하며 작품생활에 몰두했다. 김시습이 해동 최고의 문장으로 절찬한 저 유명한 관동별곡 첫 머리의 ‘강호에 병이 깊어 죽림에 누웠더니’ 하고 죽림으로 표현했던 바로 그 고을이다. 그는 여기서 식영정을 오가며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같은 수많은 가사와 단가를 지었다.
되짚어보면 정치인로서의 정철은 피해자만은 아니었다. 1589년 우의정으로 발탁되어 정여립(鄭汝立·1546-1589) 모반사건을 다스릴 때는 서인의 우두머리로서 철저하게 동인 세력을 추방했다. 하지만 담양 가사문학 나들이에서 정치인 정철의 ‘철저한’ 면을 떠올리기보다는 그의 시를 읊어보는 게 어떨지. 술꾼이 아니더라도 누구라도 한번쯤 좋아했을 장진주사(將進酒辭)다.
한 잔 먹세 그려, 또 한 잔 먹세 그려.
꽃 꺾어 술잔 세며 무진무진 먹세 그려.
이 몸이 죽은 뒤면
지게 위에 거적을 덮어 꽁꽁 졸라매 지고 가나,
잘 꾸민 꽃상여를 많은 사람들이 울며 따라가나,
억새 속새 떡갈나무 백양나무 우거진 숲을 가기만 하면 누런 해, 밝은 달, 가랑비, 함박눈, 회오리바람이 불 때
그 누가 한 잔 먹자고 하리요.
하물며 무덤 위에서 원숭이가 휘파람을 불며 뛰놀 때 뉘우친들 무엇하리요
이보다 멋들어진 권주가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구절마다 철철 넘치는 낭만, 허무, 절망, 냉소…. ‘원숭이 휘파람’이라는 당대 유행하던 표현이 조금 식상하긴 하지만, 전반부와 중반부의 표현이 워낙 뛰어나 시 전체의 흐름을 바꾸지는 못한다. 비교하자면, 당나라 이백의 다른 시편은 몰라도 ‘장진주’보다 운치도 뛰어나고 간결하다.
아마 낭만이 사라지고 있는 21세기엔 정철을 뛰어넘는 권주가를 짓는 이를 만나지 못할 것 같다. 술맛 당기게 하는 이 시가 있어 정치역정에서 풍긴 피 냄새를 그나마 상쇄해줄 만하다면 너무 너그러운 것인가? 다만 그 시대의 정치상황이 현재진행형인 듯한 게 안타까울 뿐이다.
송강정 마루에 앉아 담양의 특산주인 죽엽청주나 대잎술 한 잔 들이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입맛만 다시고 아쉬움으로 궁둥이를 뗀다.
송강정 언덕을 적시고 흐르는 증암천 물길을 20여 리 거슬러 식영정으로 발길을 재촉하니 길 좌우로 배롱나무 붉은 꽃이 한창이다. 꽃이 6월부터 9월까지 100일간 피어 있어서 백일홍나무, 또는 목백일홍이라 하고, 나무껍질을 손으로 긁으면 잎이 움직인다고 하여 간지름나무라고도 부른다. 별칭은 자미(紫薇)나무다. 예전에 식영정 앞 여울 주변에 배롱나무가 많아 자미탄(紫薇灘)이라 부른 데서 착안해서 가로수로 가꾼 듯한데, 연륜 탓인지 아직은 이름값을 하기엔 조금 부족하다.
가는 길에 만나는 명옥헌(鳴玉軒)은 이런 아쉬움을 달래주는 정원. 여름 한철 내내 피고 지는 목백일홍 우거진 광경이 인근에서 가장 좋은 곳이다. 면앙정과 송강정을 그냥 지나친 이들도 이곳은 들를 정도로 정원 풍광이 좋다. 정자 둘레엔 100여 년 수령의 목백일홍 수십 그루가 울창한데, 한창 만개할 때는 정자는 안 보이고 오로지 붉은 꽃잎만 장관을 이룬다.
이렇게 먼저 명옥헌에 들러 배롱나무의 붉음을 감상한 뒤라면 식영정 앞으로 펼쳐졌던 옛 자미탄의 여름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맑은 여울에 발 담근 나지막한 언덕에 자리한 식영정의 전망은 참 좋다. 늙은 배롱나무에서 번지는 꽃향기 그윽한 마루에 앉으면 잔잔한 호수 너머로 무등산이 지척이다. 정자 둘레로 펼쳐진 솔숲도 빼어나니 비록 대숲이 없다 해도 아쉬울 건 없다.
이 아름다운 식영정(息影亭)은 1560년에 김성원이 스승이요 장인인 임억령을 위해 지어준 것이다. 식영(息影)은 ‘그림자를 쉬게 하는 정자’나 ‘그림자를 끊은 정자’라는 뜻이다. 이들은 정자 이름을 지을 때 장자(莊子) 우화를 떠올렸다.
‘옛날 어떤 사람이 자기 그림자를 두려워했다. 이 사람은 자신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려 안간힘 쓰며 달아났다. 그런데 그림자는 이 사람이 빨리 뛰면 빨리 쫓아오고 천천히 뛰면 천천히 따라붙었다. 그러다 이 사람이 급한 김에 나무 그늘 아래로 달아났더니 그림자가 사라져버렸다.’
그림자는 욕망이다. 정자 주인의 바람대로 식영정은 그 욕망이란 이름의 그림자를 잠시 놓아두고 한숨 돌릴 수 있는 곳이다. 늦여름 햇살에 드러났던 나그네의 긴 그림자도 식영정 그늘에 묻힌다. 무등산 그림자도 길게 드리워져 있다.
이 정자를 들렀던 이들은 많다. 면앙정 송순, 사촌 김윤제,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옥봉 백광훈, 구봉 송익필, 김덕령, 송강 정철 등등. 대부분 내로라하던 명문장이었던 이들은 앞다투어 식영정의 아름다움을 시로 남겼다. 그러나 그림자를 놓은 이는 몇이나 될까. 범부(凡夫)인 나그네에게 식영정은 잠시 머물며 호사스럽게 운치를 누리는 쉼터일 뿐이다. 그래도 앞만 보고 질주하다 이따금씩 그림자를 쉬게 할 수 있는 여유가 있다면, 소쇄원으로 가는 길에 줄기차게 따라붙는 이 그림자가 두렵지 않으련만-.
정자보다 대숲이 먼저 반겨주는 소쇄원(瀟灑園). 잠시나마 무거운 그림자를 쉬게 한 덕인지 마음이 가뿐하다. 대밭은 하늘로 뻗은 수직의 세계다. 나그네는 그 마음을 좇아 고개를 수직으로 올린다. 눈이 부시다. 햇살 때문이 아니다. 댓잎 때문이다. 푸르름에도 눈이 부시는가. 고개를 떨군다. 다시 수평의 세계다. 대숲이 짙다. 우수수, 댓잎 흔들리는 소리. 대숲을 거니는 바람의 흔적이다.
햇살도 거를 정도의 울창한 대숲을 지나면 계곡의 바윗돌이 조화를 이룬 아담한 계류가 나온다. 그 둘레에 자리잡은 정자의 풍정은 잘 그려진 한 폭의 산수화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민간 정원으로 평가받는 소쇄원의 경관에 반해 ‘소쇄원 48영’을 지은 김인후는 “소쇄원의 경치가 / 소쇄정에 알뜰히도 모였네 / 쳐다보면 시원한 바람 나부끼고 / 귓가에는 패옥(佩玉) 부딪히는 소리”(제1영)라고 노래했는가 하면, “홈을 타고 샘줄기 흘러내리며 / 높낮은 대숲 아래 못을 이루네 / 높이서 떨어진 물줄기는 물방아를 돌리는데 / 온갖 물고기가 흩지어 노네”(제12영) 하고 오감을 총동원하며 소쇄원의 아름다움을 영탄했다.
소쇄원은 양산보가 지은 것이고, 호남가단을 이룬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오가며 수많은 시를 남겼지만, 소쇄원의 진정한 주인은 울창한 대숲과 굽이굽이 돌아가며 떨어지는 와폭이다. 사실 이런 조건을 지닌 풍광은 이 한반도에 아주 흔하다. 하지만 거기에 건물을 짓고 담장을 세우고 화단을 꾸미면서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안목을 갖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소쇄원을 일컬어 ‘자연과 인공의 절묘한 조화’라고 한 찬탄은 적절하다. 거기에 시인묵객들이 다투어 빚어낸 문향(文香)이 정원에 포근한 생명력을 불어넣은 것이다. 자미탄의 식영정 환벽당 취가정이 이웃하고, 20여 리 거리에 송강정과 면앙정이 있어서 소쇄원은 더욱 빛을 발한 것일 터.
담양 사람들을 수천 년간 키워온 맑고 깨끗한 댓바람이 늘 불어대는 소쇄원-. 이 정원은 담양의 미학을 한 자리서 더듬어볼 수 있는 담양의 보물이었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은 정갈한 정원과 그 고운 자연 공간을 배경으로 지어진 아름다운 시가 지금도 불려지고 있지 아니한가.
글·사진 민병준 mbjbud@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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