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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김씨(金海金氏) 연원(淵源)
김해김씨(金海金氏)의 연원(淵源)은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가락국기(駕洛國記) 등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서기 42년 3월 가락국(駕洛國)의 아홉 촌장(九村長)이 구지봉(龜旨峯)에 모여 나라를 통솔할 군장(君長)을 얻기 위해 하늘을 향해 의식(儀式)을 올리자 한줄기 빛이 내려와 함께 달려가 보니 금합(金盒)에 여섯 개의 알(卵)이 담겨 있었다.
얼마 후에 알 속에서 여섯 동자(六童子)가 나왔는데 그 중 제일 먼저 나온 자를 추대하여 왕으로 삼았다. 금란(金卵))에서 나왔으므로 성(姓)을 김씨(金氏)라 하였고 제일 먼저 나타났으므로 이름은 수로(首露)라 하였으며 국호(國號)를 대가락(大駕洛)이라 하였으니 이분이 바로 김해김씨의 시조(始祖)이신 김수로왕(金首露王)이시다.
서기 44년(甲辰年) 2월에 도성(都城)을 건축(建築)하고 궁실(宮室)을 조영(造營)영하였고 서기 48년(戊申年) 7월에는 아유타국(阿踰陀國) 공주(公主)인 허씨(許氏)를 맞아들여 왕비(王妃)로 삼았다.
거등왕(居登王), 마품왕(馬品王), 거질미왕(居叱彌王), 이시품왕(伊尸品王), 좌지왕(坐知王), 취희왕(吹希王), 질지왕(銍知王), 겸지왕(鉗知王)을 지나, 10대 구형왕(仇衡王)이 서기532년 신라에 양국(讓國)하고 상등(上等)의 위(位)와 가락국을 식읍(食邑)으로 받았으며, 그의 아들 세종(世宗) 과 무득(武得) 무력(武力) 모두가 각간(角干)을 역임(歷任)했다.
무력(武力)의 아들 서현(舒玄)은 백제(百濟)와 여러 번의 전투에서 공을 세워 소판(蘇判) 대량주도독(大良州都督)을 역임하고 629(眞平王51)년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을 함락시키고 각간(角干)으로 제수 받았으며 서현(舒玄)의 둘째딸 문희(文姬)는 태종무열왕비(太宗武烈王妃)가 되었다.
구형왕(仇衡王;仇亥)의 증손(曾孫)이고 서현(舒玄)의 아들인 유신(庾信)은 신라 무열왕과 함께 삼국통일의 대업(大業)을 달성한 명장(名將)으로 무열왕의 딸 지소부인(智炤夫人)과 혼인했다.
김해는 경상남도 남동부(南東部)에 위치하는 고장으로 고대국가인 여섯가야(六加耶)중 금관가야(金官加耶)가 종주국(宗主國)이였으나 서기532년 신라에 병합된 후 금관군(金官郡) 또는 금관소경(金官小京)이라 불리웠다. 김해김씨는 신라김씨의 알지계(閼智系)와 함께 우리나라 김씨의 양대산맥(兩大山脈)을 이루어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 변성하여 왔다. 특히 김해김씨는 족세(族勢)가 크게 번창해짐에 따라 148여파로 분파(分派)되었으며 그 중에서 금녕군파(金寧君派=京派)와 감무공파(監務公派=四君派),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三賢派), 문경공파(文敬公派)의 후손들이 가장 많다.
각파별 대표적인 인맥을 살펴보면 금녕군파(경파)의 중조(中祖) 금녕군(金寧君) 목경(牧卿)의 아들 보(普)는 공민왕(恭愍王)이 세자(世子)로 연행(燕行;국가의 사절로서 중국의 북경에 감)할 때 시종(侍從)한 공으로 충근량절보리공신(忠勤亮節輔理功臣) 수시중(守侍中)에 이르렀고 목경(牧卿)의 6세손 영견(永堅) 영서(永瑞)․영정(永貞)․영순(永純) 4형제가 빼어났으며 숙종(肅宗)때 명신(名臣) 우항(宇杭)은 영정(永貞)의 후손으로 1713년(숙종 39)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감무공파(監務公派)에서는 중조(中祖) 익경(益卿)의 손자 진문(振門)이 고려말에 예의판서(禮儀判書)를 거쳐 대제학(大提學)에 올랐으나 조선이 개국하자 관직을 버리고 이 색(李 穡)․박자검(朴自儉)등과 함께 은거하여 절의(節義)를 지켰으며, 그의 둘째 아들 추(錘)는 도총관(都摠管)을 넷째 아들 석(錫)은 찬성사(贊成事)를 지냈다. 막내 조(銚)는 세종때 집현전(集賢殿) 수찬(修撰)을 거쳐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올랐으며,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할 때 장영실(蔣英實)과 함께 간의대(簡儀臺)․자격루(自擊漏)․혼천의(渾天儀) 등을 만든 것으로 전한다.
특히 세종대왕(世宗大王)께서 그에게 평소의 소원을 묻자 “백년동안 날마다 어탑(御榻;임금이 앉는 제구)을 모시고 금규화(金葵花) 앞에 진퇴를 엎드려 묻기를 원합니다.”라고 대답한 것으로 「필원잡기(筆苑雜記)」에 전한다.
한편 진문(振門)의 5대손 극희(克禧)가 명사수로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막하에서 전공을 세우고 한산도 싸움에서 전사했으며, 그의 조카 완(完;학천군 극조의 아들)은 역전의 명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임진왜란 때 남원대첩(南原大捷)에 공을 세웠던 그는 1624(仁祖 2)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平定)할 때도 창성(昌城) 방어사(防禦使)로 길마재 결전에서 공을 세우고 진무3등공신(振武三等功臣)에 올라 학성군(鶴城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우 우(宇)는 병자호란 (丙子胡亂)때 벽동성(碧潼城)을 사수했던 명장(名將)으로 이름이 높았다.
우(宇)의 아들 여준(汝峻)은 볼모로 잡혀가는 소현세자(昭顯世子)와 인평대군(麟坪大君)을 호종(護從)한 18장사(壯士)의 한 사람으로 심양(瀋陽)에 갔을 때 옥하관(玉河關)에서 세자(世子)를 소리내어 울렸다는 <월명비안(月明飛雁)>의 노래를 읊어 더욱 명성을 떨쳤으며, 그의 용력에 힘을 뽐내며 목숨을 건 결투를 신청해 온 청나라 장수 우가(禹巨)의 코를 문질러 이김으로써 병자호란의 굴욕과 인질로 잡혀가는 세자를 호종하는 비애 등 백성들의 원한을 풀었다고 한다.
그 후 세자가 돌아와 즉위한 다음에도 이 슬픈 기쁨과 옥하관의 달밤 일을 못 잊어 과거의 시제(詩題)에 <월명비안(月明飛雁)>의 노래를 자주 출제하였다 한다.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삼현파)의 중조(中祖) 관(管)은 고려에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고 학교를 건립하여 유학을 진흥시키는 등 나라에 많은 공을 세웠으며, 그의 현손(玄孫) 극일(克一)은 효행으로 이름을 떨쳤다.
극일(克一)의 아들 맹(孟)은 세종 때 문과에 올라 집의(執義)를 지냈으며, 밤에 용마의 꿈을 꾸고 세 아들을 낳아 준손(駿孫)․기손(驥孫)․일손(馹孫)으로 이름을 지었는데 이들 3형제가 모두 빼어나서 김씨삼주(金氏三珠)로 일컬어졌다.
1486년(中宗1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김일손(金馹孫)은 일찍이 당대의 거유(巨襦)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글을 배우고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등과 친교를 맺었으며 춘추관(春秋館)의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전라감사(全羅監司) 이극돈(李克墩)의 비행을 사초(史草)에 썼다가 그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연산군(燕山君)이 등극하여「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할 때 공교롭게도 이극돈이 당상관(堂上官)으로 참여하여 사초(史草)를 살피게 되니 김일손(金馹孫)의 스승인 김종직(金宗直)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난한 글)을 실은 것이 발견되어 이극돈이 노사신(盧思愼)․윤필상(尹弼商)․한치형(韓致亨) 등과 함께 연산군에게 알려 무오사화가 일어나 김일손은 권오복(權五福)․권경유(權景裕)․이목(李穆) 등과 함께 참수(斬首) 당하였고,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죽은 뒤에 큰 죄가 드러나 무덤을 파고 관을 꺼내어 시체를 베거나 목을 잘라 거리에 내거는 일)되었다.
김일손의 강직한 기개와 재능은 후일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고, 중종조(中宗朝) 영의정 남 곤(南袞)은 말하기를 “세상에 다시 탁영(濯纓;김일손 의 호)같은 이가 또 나올 수 있을까. 그의 문장(文章)을 물에다 비하면 탁영은 강하(江河)와 같고 나는 계천에 지나지 못하다.”라고 김일손의 짧은 생애(生涯)를 애석하게 여겼다.
삼현(三賢)의 한 사람인 김대유(金大有)는 김일손의 조카이며 김준손의 아들이다.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숙부 김일손이 참수당하자 부자(父子)가 함께 호남에 유배되었다가 중종(中宗)때 풀려나와 평생을 강개한 지절(志節)로 살았으며, 3개월간의 칠원현감(漆原縣監)을 마지막 벼슬로 사직하고 청도의 운문산(雲門山)속 삼족당(三足堂)에서 73세의 일생을 마쳤다.
김일손의 증손 언유(彦諭)는 고양(高陽)에 살면서 지극한 효행으로 명망이 높았고, 시(詩)와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특히 송설체(松雪體)에 능하여 공사의 비와 병풍․족자의 글씨를 많이 썼다.
언유의 아들 현성(玄成)은 광해군(光海君)때 폐모론(廢母論)에 불참하여 면직되자 청빈하게 여생을 마쳤으며, 시(詩)․서(書)․화(畵)에 모두 능했다.
그 밖의 인물로는 심하(深河)의 전투에서 공을 세운 김경서(金景瑞)장군과 소전공(少佺公) 김덕승(金德承;春秋館編修官). 예직(禮直;三道 水軍統制使) 홍도(弘道; 朝鮮風俗畵의 祖宗) 진희(晉熙;忠孝旌閭를 賜額받음) 외 <해동가요(海東歌謠)>를 남기고 「청규영언(靑丘永言)」을 편찬한 김천택(金天澤)등이 명문거족의 김해김씨를 빛냈다.
2000년 통계청의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김해김씨는 남한에 총 892,328가구, 4.125,86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신라시대 인물(新羅時代 人物)
김무력(金武力)
가락국(금관가야) 제10대 구형왕(仇衡王;仇亥)의 아들이다. 532년(법흥왕 19) 나라가 신라에 병합되어 신라의 무신으로 각간(角干)을 지냈다. 553년(진흥왕 14) 백제를 쳐서 동북의 변경을 빼앗고, 신주(新州;廣州)를 설치해 군주(軍主)로 임명되었다. 이듬해 백제의 성왕과 관산성(管山城)에서 싸워 왕과 좌평(佐平) 4명, 병졸 2만 9천여 명을 죽여 승리했다. 신라의 명장 김유신(金庾信)은 그의 손자다.
김서현(金舒玄)
가락국(금관가야)의 시조인 김수로(金首露)의 11대손으로 김유신(金庾信)의 아버지. 만노군태수(萬弩郡太守)로 있을 때 갈문왕(葛文王) 입종(立宗)의 손녀 만명(萬明)과 결혼하였다. 그 뒤 양주총관(良州摠管)으로 여러 번 백제와 싸워 국경을 침범치 못하게 하였고, 629년(진평왕 51) 소판대량주도독안무대량주제군사(蘇判大梁州都督安撫大梁州諸軍師)가 되어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딸 문희(文姬)는 뒤에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비(文明王后)가 되었다.
김유신(金庾信)
595(진평왕17)년~673(문무왕13)년 때의 인물이다. 아버지 김서현(金舒玄)과 신라왕족 만명부인(萬明夫人;갈문왕의 손녀이고 肅歇宗의 딸)의 장남으로 태어나 609(眞平王31)년 15세에 화랑이 되고 따르는 무리인 용화향도(龍華香徒)를 거느리면서 화랑정신(花郞精神)으로 심신(心身)을 단련하였다. 629(진평왕51)년 중당(中幢)의 당주로서 낭비성(娘臂城) 전투에 출전하여 고구려군을 크게 물리치고 압량주(押梁州) 군주(軍主)가 되었으며 644(善德女王 1)년 반역을 꾀하는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을 제거하고 무산성(茂山城), 감물성(甘勿城)에 침입한 백제군(百濟軍)을 격퇴하였다. 648(眞德女王 2)년 백제의 대량주(大良州)를 쳐부수고 12성(城)을 함락시킨 공으로 이찬(伊湌)이 되고 상주행군대총관(尙州行軍大總管)에 올랐으며, 다음해인 649년에 다시 침입하는 백제군을 도살성에서 쳐부수었다. 654(진덕여왕 8)년 왕이 후사 없이 죽자 김춘추(金春秋)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660년(武烈王 7) 상대등(上大等)이 되어 당나라 소정방(蘇定方)과 연합하여 백제국을 멸망시키고 신라국이 삼국통일(三國統一)의 기반을 튼튼히 하였다,
663(文武王 3)년 백제의 부흥군을 토벌하고 665(문무왕 5)년 당나라에서 봉상정경 평양군 개국공(奉常正卿平壤郡開國公)에 봉해졌다. 668(문무왕 8)년 대총관(김유신)이 고구려 정벌에 나설 때 문무왕께서는 “공은 나라의 보배인데 적진으로 갔다가 예측하지 못한 일이 발생하면 이 나라의 장래를 누구와 의론 하겠소 공은 성내에 머물러 나라를 지키게 하시오 은연중 장성(長城)과 같아 근심이 없을 것이오.” 라고 말씀 하시므로 직접 출전하지 못하셨다.
고구려를 정벌하고 태대각간(太大角干)에 승차하고 삼국을 통일한 후 당나라 지원군을 돌려보내고 고구려를 완전히 평정하였다. 673(문무왕13)년에 죽으니 금산원(金山原)에 장사 지냈고 835(흥덕왕10)년에 흥무왕(興武王)으로 추봉(追封)되었으며 경주 서악서원(西岳書院)에 주백으로 모시고 춘추로 제향을 받들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내곳곳에 12개 사우를 세워 지방마다 유림에서 춘추제향을 받들고 있다.
김흠순(金欽純)
흠춘(欽春)이라고도 전하며 김유신의 동생이다. 진평왕 때 화랑이 되었고 660(무열왕7)년에 백제를 정벌할 때 형인 김유신을 도와 전공을 세웠으며, 662(문무왕2)년에는 내사지성(內斯只城)에 있는 백제군을 격파하였다 또한 663년(문무왕3)에는 백제의 거열성(居烈城)과 거물성(居勿城) 및 사평성(沙平城)을 공락하여 항복을 받았고 668년에는 당나라 군사와 함께 고구려를 정벌할 때 대당총관(大幢總管)이 되어 크게 공을 세워 각간(角干)이 되었다. 문무왕이 장군을 재상으로 삼으니 나라가 편안하여 현상(賢相)으로 명성을 떨쳤다.
김삼광(金三光)
김유신의 아들. 당(唐)나라에 살면서 좌무위익부중랑장(左武衛翊府中郞將)이 되어 당나라 장군 유인궤(劉仁軌)와 함께 고구려를 정벌하였다.
김원술(金元述)
김삼광의 아우이다. 일찍이 화랑이 되었다. 법민왕(法敏王 ; 문무왕)이 고구려의 백성을 받아들이고 백제의 옛 지역을 차지하니 당나라 고종이 크게 노하여 장수에게 신라군사를 토벌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왕은 장군 의복(義福)등을 보내어 대방(帶方) 들판에서 방어하였으나 패전하였다 원술이 싸워서 죽고자 하였으나 담릉(淡凌)이 만류하였다. 서울에 돌아오니 그의 아버지 유신이 “원술은 왕명을 욕되게 하였을 뿐 아니라 가훈 또한 저버렸으니 참(斬)하는 것이 가하다.”하였다. 왕이 용사(容赦)하였으나 원술은 부끄럽고 후회되어서 감히 아버지를 보지 못하고 전야(田野)에 숨어살았다.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께 뵈옵기를 청하자 어머니는 “부인은 삼종(三從)의 의가 있으니 자식의 뜻을 따르는 것이 마땅하나 원술은 이미 그 아버지에게 자식이 되지 못하였으니, 내가 어찌 그의 어머니가 될 수 있겠느냐”하고 마침내 보지 않았다. 원술이 탄식하면서 “담릉(淡凌) 때문에 죽을 기회를 놓쳤도다.” 하고 태백산으로 입산하였다 그 뒤에 당나라 군사가 와서 매소천성(買蘇川城)을 공격하니 원술이 전일의 부끄러움을 씻고자 힘껏 싸워 전공을 세웠으나 부모에게 용서받지 못하였다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겨 벼슬길에 복귀하지 않고 일생을 마쳤다.
김반굴(金盤屈)
김흠순의 아들이다. 660(무열왕7)년 황산벌 싸움에서 백제의 계백장군이 거느리는 결사대에 의해 전세가 불리해지자 아버지 흠순장군이 반굴에게 “신하가 되어 임금님께 충성하고 자식이 되어 부모에게 효도하며 위험을 보고 목숨을 바치는 것이 충효인 것이다.”하자 반굴은 홀로 적진 속에 뛰어들어 전사하였다. 그러자 신라군의 사기가 충천하여 백제군을 섬멸하자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 급찬(級湌)에 추증(追贈)하였다.
김윤중(金允中)
김유신의 손자로 신라 성덕왕 때의 장군이다 대아찬(大阿湌)으로 왕의 총애를 받자 왕족들이 질투 하였다. 733년(성덕왕32)에 당나라가 사신을 보내 발해를 공격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때 윤중이 장수로 지명되고 그의 아우 윤문(允文)등 3명의 장수와 함께 당나라 군사와 연합하여 발해를 쳤다.
김영윤(金令胤)
김반굴(金盤屈)의 아들이다. 김영윤은 세가(世家)에 성장하여 명예로서 자부하였다 684년(신문왕4) 고구려의 잔당 실복(悉伏)이 보덕성(報德城)을 의거하여 배반하니 왕은 토벌하라 명령하고 공을 황금서당(黃衿誓幢) 보기감(步騎監)으로 삼았다. 전선으로 떠날 때 무렵에 남에게 말하기를 “내가 이번 출전으로 종족이나 친구들에게 굳은 소리를 듣게 하지 않겠다.” 하였다. 가잠성(椵岑城)에 이르렀을 때 적장은 이내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들 적이 피로할 때를 기다리자고 물러나는데 영윤만은 싸움에는 전진만이 있을 뿐이라면서 홀로 적진에 뛰어들어 전투 끝에 전사하였다. 왕은 울면서 말하기를 “그 아버지가 있었으니 그 아들이다. 그의 의열(義烈)을 가상할 만하다.”하고 관작을 추증하고 유족에게 상을 후히 내렸다.
김 암(金 巖)
김윤중의 손자이다. 암(巖)은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여 젊어서 이찬(伊湌)이 되어 당나라에 들어가 숙위(宿衛)가 되었다. 혜공왕 때 귀국하여 사천대박사(四天大博士)가 되고 양주(良州) 강주(康州) 한주(漢州) 3주의 태수를 역임하고 집사시랑(執事侍郞) 패강(浿江) 진두상(鎭頭上)이 되어 가는 곳 마다 백성들을 가족처럼 보살폈다. 778년(혜공왕14)에 왕명으로 일본국을 방문한즉 일왕이 어질음을 알고 억류하려 하였는데 당나라 사신 고학림(高鶴林)이 김암을 보고 매우 반가워하니 왜인들의 생각에 김암은 당나라까지 알려져 있는 인물로 짐작하여 감히 만류의 뜻을 접고 본국으로 정중히 귀국할 수 있도록 도왔다
김심희(金審希)
854(문성왕16)~923(경명왕7)년 9세에 혜목산(慧目山)의 원감대사(圓鑒大師)로부터 도(道)를 배우고 888(진성여왕2)년 송계(松溪)에서 포교하였다. 진례성(進禮城:김해)에 봉림사(鳳林寺)를 세우고 도를 말하니 그때 효공왕이 사신을 보내어 법력을 빌어 기원하였다. 918년(경명왕 2) 경명왕의 청으로 왕궁에 들어가 국사에 추존하고 법응대사(法膺大師)의 호를 받았다. 923년(경명왕 7) 봉림사에서 70세로 죽으니 경명왕은 진경대사(眞鏡大師)라 증시(贈諡)하고 탑호(塔號)를 보월능공(寶月凌空)이라 하였다. 근세까지 탑비가 봉림사에 전해 있었는데 왜구들이 서울에 옮겨둔 것을 현재는 국립박물관에 이전되었다.
고려시대 인물(高麗時代 人物)
김원현(金元絃)
도총관공파(都摠管公派) 중조(中祖) 김경신(金敬臣)의 아들이다. 고려 충렬왕 때 문과, 광정대부(匡靖大夫) 첨의평리(僉議評理) 상호군(上護軍)이다. 충선왕 때 양산(梁山) 방어사(防禦使)로서 왜적을 물리친 공이 있어 신라 박제상(朴提上), 임진왜란 때 절사한 양산군수 박영규(朴英圭)와 함께 양산춘추원(梁山春秋園) 장충단(獎忠壇)에 3조의열(三朝義烈)로 배향 양산 군민이 춘추로 제향을 받든다. 이때부터 세칭 김해 김씨 무리문중(김해시 한림면 퇘래리 퇴은)이 일어났다.
김방려(金方礪)
김원현(金元絃)의 손자이다. 자는 여용(汝用), 호는 축은(築隱).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백당재(栢堂材:사헌부 사간원의 총칭)에 들어갔고 성격이 강직하여 세상 사람들과 뜻이 맞지 않았다. 계묘년(1363:공민왕 12) 난리(德興君의 난동)때는 교주도(交州道:오늘의 강원도 회양중심 5도의 하나)에서 징병의 일을 잘하여 공민왕이 그 뛰어난 재주를 사랑하였고, 그해 재상 전녹생(田祿生)과 절동(浙東) 방국진(方國珍)에게 사신으로 가서 그곳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으며, 당대의 명사 김원소(金元素), 장저(張翥), 유인본(劉仁本) 등과 교우하였다. 1375년(우왕1)이첨(李詹), 전녹생(田祿生), 정몽주(鄭夢周)등과 이인임(李仁任)의 친원정책을 배척하다가 장류(杖流)되었고 뒤에 봉순대부(奉順大夫) 판종부시사(判宗簿寺使)에 이르렀다. 묘는 김해 덕도(부산시 북구 강동동)에 있는데 1729년 김해부사 홍덕망(洪德望)에게 현몽하여 조부 김원현(金元絃), 그 아들 김순생(金荀生)등 3대의 묘를 찾았다.
김보(金普)
금녕군파(金寧君派) 중조(中祖) 김목경(金牧卿)의 아들이다. 고려 공민왕 때의 문신. 호는 죽강(竹岡). 충정왕 때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고, 공민왕이 세자로 원나라에 있을 때 판도판서(版圖判書)로서 시종(侍從)한 공으로 즉위한 후 충근양절광보공신(忠勤亮節匡輔功臣)의 호를 받고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임명되었으며, 공민왕의 측근으로 친족들을 요직에 앉혔지만 모친상을 당하자 그와 권세를 다투던 김용(金勇) 일당의 간계로 강제로 3년상을 치르게 되어 벼슬에서 물러났다가 모친상이 끝나자 김해부원군(金海府院君)에 봉해졌다. 금후 대역죄로 몰린 기철(奇轍)의 일당으로 몰려 유배(流配)되었지만 신돈(辛旽)이 집권하자 좌시중(左侍中)을 역임하고 충근양절동덕보리공신(忠勤亮節同德輔理功臣)이 되었다. 뒤에 신돈에게 국정을 맡기는 것이 부당하다고 상소하여 신돈의 미움을 받고 파직되었다. 시호(諡號)는 충간공(忠簡公)이다. 이때부터 김해김씨 경파 문중(京派門中)이 크게 일어났다.
김유(金庾; ?~1386우왕12)
고려 공민왕 때의 무신. 김해출신. 공민왕 때의 홍건적을 평정하고 서울을 수복한 공으로 2등공신이 되고 흥왕사(興王寺)에서 일어난 김용(金勇)의 난을 평정하여 1등공신에 책록되었다. 그 후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원에서 공민왕의 아들이 없어서 충선왕의 아들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세우려고 하자 이를 반대하고 돌아와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추성익조공신(推誠翊祚功臣)의 호를 받았고 다시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가 되었다. 이때 탐라의 목호(耽羅牧胡)가 민란을 일으키자 삼도조전원수(三道助戰元帥)가 되어 이를 토벌하는 데 종군했다. 우왕의 유모 장씨의 옥사에 연루되어 합포(合浦)에 유배(流配)되었다가 곧 풀려 찬성사(贊成事)가 되었고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해로를 거쳐 갔으나 기일내에 도착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대리(代理)에 귀양 갔다가 3년후 정몽주(鄭夢周)가 명나라 황제의 생신하절사(生辰賀節使)로 갔을 때에 석방되어 함께 돌아왔으나 이인임(李仁任)의 미움을 사 청주에 귀양 갔다가 다시 풀려났으나 1386년(우왕 12) 가산을 몰수(沒收)당하고 또다시 순천으로 유배도중 경천역(敬天驛)에서 죽었다.
김저(金佇;?~1389(공양왕1)
율은공파(栗隱公派) 중조(中祖). 자(字) 충국(忠國), 호(號) 율은(栗隱), 손(遜)으로 개명. 호두(虎頭)장군으로 알려진 고려 최대의 영걸 최영(崔瑩)의 생질. 홍건적의 난 때에는 공민왕을 호종하여 안동, 예천, 상주로 몽진하였다. 형조, 예조, 이조의 전서(典書)와 성균관 대사성, 수문전 학사를 역임하였다. 대호군(大護軍)으로 1389년(창왕1) 최영의 족당인 전(前)부령(副令) 정득후(鄭得厚)와 여흥(驪興)에 유배된 우왕을 만나 예의판서 곽충보(郭忠輔)와 접선, 이성계(李成桂)를 죽이라는 밀령을 받고 곽충보와 모의하여 팔관회(八關會)날에 거사할 것을 결정했으나 곽충보가 밀고하여 순군옥(巡軍獄)에 갇혀 이성계에 의하여 피살되었다. 장례일에 시신 위에 한 마리의 청조(靑鳥)가 '고려충(高麗忠)' 을 세번 연호하고 어디론가 날아갔다고 전한다. 그의 사후 119년만인 1508년, 덕치주의를 표방한 중종이 그의 충절을 기려 신원을 복원하고 왕명으로 종가(宗家) 소재지인 예천 미호동에 표절사를 건립하였다.
김순생(金荀生;順生)
김방려(金方礪)의 아들이다. 일찍이 여택재(麗澤齊)에 들어갔고 1362년(공민왕11) 문과에 올라 지청도 군사(知淸道郡事)에 이르렀다.
朝鮮時代 人物(조선시대 인물)
김조(金銚 ?~1455(세조1)
초명은 빈(鑌), 자는 자화(子和), 호는 졸재(拙齋). 1411년(태종11)문과에 급제하고 1416년 (태종16) 문과 중시에 아원(亞元). 1434년(세종16)직전(直殿)으로 갑인자(甲寅字) 주조(鑄造)에 참여했다. 1477년 한성판윤(漢城判尹)으로 정조사(正朝使), 1451년(문종1)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고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지냈다. 시호는 공간(恭簡)이다.
김극일(金克一)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 중조 김관(金管)의 현손(玄孫)이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어머니를 위해서는 종기를 빨고, 아버지를 위해서는 곱똥을 맛보았다. 전후 여모살이 6년을 했는데, 한 호랑이가 무덤 곁에서 새끼를 젖 먹이매, 극일이 제사지내고 나머지를 먹이며 가축을 기르둣이 하였다. 아버지에게 천첩(賤妾) 두 사람이 있었는데, 아버지의 생시와 같이 섬겼고, 그들이 죽어서는 기년복(期年服)을 입었다. 천순 갑신년(天順 甲申年;1464)에 이 일이 임금에게 들리어 정문 하였다. 청도 자계서원에 배향되었다. 이때부터 김해김씨 삼현파 문중(청도군 화양면 백곡리)이 크게 일어났다.
김계희(金係熙)
김순생(金順生)의 아들이다. 자는 회숙(晦叔), 호는 퇴은(退隱). 세종을묘(世宗乙卯;1435)에 생원(生員) 탐화랑(探花郞), 신유(辛酉;1441)에 문과에 올라 예문관 검열에 들어갔으나 부모가 연로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니 당시 집현전 학사들이 한강까지 나와서 송별하고 시로 읊으니 태허정(太虛亭) 최항(崔恒;뒤에 영의정)은 “청운의 뜻은 백운의 뜻을 빼앗지 못하더라”,(靑雲未奪白蕓思) 집현전 교리(校理) 노산(魯山) 이영서(李永瑞)는 “어버이 떠나 벼슬 하는 이 몇 사람인가 마는(離親 仕宦知多少)강위의 가을바람에 홀로 그대만을 보내네”(江山秋風獨送君)라 읊으니 모두가 조선명시다.
그때 지은 퇴은정은 그의 손자 김극검(金克儉), 증손 김관(金寬), 현손 김유신(金庾信) 등이 모두 한림학사를 역임하여 세칭 한림정(翰林亭)이라 부른다. 정자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나 지금도 그 마을을 한림정이라고 칭하고 그 면을 한림면(翰林面), 한림정역(翰林亭驛), 한림중학교 등이 있다. 홍문관교리, 사헌부감찰, 경상도도사를 거쳐 나주목사가 되어 은혜로운 정치를 하여 학교를 크게 수리 했으므로 백성들이 그가 간 뒤에도 생각하였다., 그가 죽자 백성들이 어버이 상을 당한 것 같았고 보(寶;계)를 세워 제삿날이 되면 고을의 모든 사람들이 모여 명륜당(明倫堂)에서 제사를 지냈다. 1462년(世祖8)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서 명나라 사신으로 다녀오고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지냈으며, 1463년(世祖9)에 인순부윤(仁順府尹)에 이르렀다.
김호인(金好仁)
1430(世宗12)~1491(成宗22)년 시중공파(侍中公派) 중조(中祖) 김탁(金琢)의 4대손. 자는 내극(乃克) 호는 매암(梅岩). 문종 경오(1450)에 문과에 급제하여 부사, 충주목사를 역임하다. 이때부터 김해김씨 시중공파(侍中公派) 문중(門中)이 크게 일어났다.
김수광(金秀光)
판서공파(判書公派) 중조(中祖) 김불비(金不比)의 아들이다. 문종경오(1450)에 문과하여 사간원 헌납에 이르렀다. 등과시(登科詩) 삼장말좌(三場末坐)하여 왈 “삼장장원(三場壯元)은 천하에 많으나, 삼장말좌는 천하에 없을 것이다.” 하였다. 이때부터 김해김씨 새티문중(김천시 마암면 장암리)이 크게 일어났다.
김자정(金自貞)
조선 성종 때의 문신. 1453년(단종1)문과에 급제하여, 1472년(성종3) 선위사(宣慰使)로 충청․전라․경상도에 파견되었고, 1476년 승문원판교(承文院判校)로 역시 선위사가 되어 쓰시마(對馬島)섬에 가서 삼포(三浦)의 왜인을 쇄환(刷還)한 공을 치하했다. 1477년(성종 8) 재가금지(再嫁禁止)의 논의가 일어나자 예조참판 이극돈(李克墩)․한성부 우윤 심한(沈瀚) 등과 함께 유약(幼弱)한 과부인 경우에는 재가를 허락하자고 주장했고, 1481년(성종12) 노사신(盧思愼), 강희맹(姜希孟) 등과 함께 <여지승람 : 輿地勝覽>을 편찬했다. 1491년(성종22) 정조사(正朝使)로, 1495년(연산군1)에는 정조부사(正朝副使)로 각각 명나라에 다녀와 공조판서를 지냈다.
김적복(金積福)
중조 상서공 김감(金鑑)의 7대손이다. 1454년(단종2) 문과에 급제하여 현감(縣監)을 지내고 요유문중(평남 강동군 요유리)을 일으키다.
김극검(金克儉);(1439~1499)
김계희(金係熙)의 손자이다. 자는 사렴(士廉), 호는 담헌(淡軒), 괴애(乖崖). 1459년(세조5)에 생원(生員), 진사(進士)에 모두 일등. 같은해 문과(文科)에 오르고 한림(翰林)을 거쳐 1466년(세조12)에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장원(壯元), 발영시(拔英試)에 3등에 올랐다. 경상도사(慶尙都事), 양산(梁山), 함안군수(咸安郡守)로서 치적이 있고, 도승지, 홍문관 부제학(副提學), 황해․전라 관찰사(觀察使), 안동 대도호부사 명환(名宦)이 되었고 사헌부 대사헌이다. 그가 죽자 벼슬이 이품에 이르렀으나 집도 없고 저축도 없다고 하여 나라에서 크게 부의를 하고 서울에서 고향인 김해까지 안장을 하니 그 마을을 지금도 관찰사촌(觀察使村)이라 부른다. 사신(史臣)의 평론에 “극검은 성행(性行)이 청간(淸簡)하여 사림이 복종한다.”하였다.
김구(金龜)
사정공파(司正公派) 중조 김이형(金利亨)의 아들이다. 1466년(세조 12)문과에 급제하여 한림(翰林), 사헌부지평, 첨정(僉正)을 지내고 세칭 곡목문중(曲木 : 창원시 동면 화목리)을 크게 일으켰다.
김보문(金寶文)의 여
만호(萬戶) 김보문(金寶文)의 딸.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아버지가 앓자 하늘에 맹세하여, “만약 하느님이 고쳐주시지 않는다면 저는 죽어 버리겠습니다.”하더니, 아버지가 죽자 그 아우한테, “너는 살아서 어머님을 섬겨라. 나는 죽어서 아버지를 섬기겠다.”하고는 스스로 목매어 죽으니, 1491년(성종 22)에 나라에 보고되어 집을 정묘하였다.
김일손(金馹孫)
1646(세조10)~1498(연산군4). 절효공(節孝公) 김극일(金克一)의 손자이다.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 1486년(성종17) 문과에 급제하여 춘추관(春秋館) 기사관(記事官)이 되어 <성종실록>의 사초(史草)를 썼으며 전라도 관찰사 이극돈(李克墩)의 비행을 직필(直筆)하고 헌납 때 이극돈과 성준(成俊)이 새로 붕당(朋黨)의 분쟁을 일으킨다고 상소하여 이극돈의 원한을 샀다.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앞서 스승 김종직(金宗直)이 쓴 <조의제문(弔義祭文)>을 사초(史草)에 실었는데 1498년(연신5) 이극돈을 비롯한 훈구파의 유자광(柳子光)․윤필상(尹弼商)․노사신(盧思愼) 등이 그 일을 연산군(燕山君)에게 고하여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이에 김일손(金馹孫)을 비롯한 영남학파의 여러 학자들이 처형을 당했다. 스승 김종직(金宗直)을 닮아 사장(詞章)에 능했으며, 당시 고관들의 불의와 부패를 규탄했다. 시호(諡號)는 문민(文愍)이다. 청도의 자계서원(紫溪書院) 천안의 도동서원(道東書院)에 배향되었다.
김대유(金大有)
1479(성종10)~1551(명종6). 김일손의 조카이다. 자는 천우(天佑), 호는 삼족당(三足堂), 제학(提學) 김준손(金駿孫)의 아들. 무오사화로 숙부 일손(馹孫)이 사형을 당할 때 아버지와 함께 호남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중종1) 풀려났다. 1519년(중종14)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하여 호조좌랑(戶曹佐郞)․칠원현감(漆原縣監) 등을 역임했다. 기묘사화가 일어나 현량과가 파방(罷榜)되자 사임하고 청도의 산속으로 들어갔다. 청도의 자계서원(紫溪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저서:탁영연보(濯纓年譜)
김유신(金庾信 : 金有信)
김극검(金克儉)의 손자이다. 정희량(鄭希良)의 문인. 태몽(胎夢)때 흥무대왕(興武大王 : 金庾信)이 한 동자(一童子)를 보내어 같은 이름으로 지었고 후손들이 김유신(金有信)이라 부른다. 자는 흥노(興老), 호는 낙원(洛園). 1510(중종5)에 진사(進士)를 하고 1516년(중종11) 문과에 장원으로 입격되었다. 예문관 검열(禮文館 檢閱)에, 홍문관 수찬(弘文館 修撰), 교리(校理)에 올랐다.
김연광(金鍊光)
1524(명종19)~1624(인조2) 판도판서공(版圖判書公) 김첨검(金添劒)의 8대손이다. 자는 언정(彦精) 호는 송암(松巖) 1555(명종10)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내외직을 거쳐 창평군수가 되고, 회양부사(淮陽府使)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인과 관리들은 모두 도망갔지만 공은 성문앞에 정좌하여 적에게 참살당했다. 지식이 해박하여 시문(詩文)에 능했으며 후일에 예조참판에 추증되고 개성의 숭절사(崇節祠)에 배향되었다.
김경서(金景瑞)
1564(명종19)~1624(인조2). 초명은 응서(應瑞), 자는 성보(聖甫), 무과에 급제, 1588년(선조21) 감찰이 되었으나 집안이 미천한 탓으로 파직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다시 기용되어 평양 방위전에서 수탄장(守灘將)으로 대동강(大洞江)을 건너는 적병을 막은 공으로 평안도 방어사(防禦使)가 되었다. 이듬해 7,700의 병력으로 이여송(李如松)의 명군(明軍)과 함께 평양성(平壤城)을 탈환, 1594년(선조27) 경상도 방어사에 전직되었다. 이해 남한 일대에 도적이 횡행하자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의 명으로 이를 소탕, 그 공으로 이듬해 경상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에 승진되었으며, 1618년(광해군10) 평안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이때 건주위(建州衛)의 후금(後金)을 치기 위해 명나라의 원병요청(援兵要請)이 있자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부원수(副元帥)가 되어 원수(元帥) 강홍립(姜弘立)과 함께 출전했다. 이듬해 심하지방(深河地方)에서 전공을 세웠으나 부차(富車)에서 패전한 뒤 강홍립이 아군을 이끌고 금나라 군대에 항복하여 함께 포로가 되었다가 몰래 적정(敵情)을 기록(記錄)하여 본국에 보내려 했으나 강홍립의 고발에 의해 사형되었다. 우의정(右議政)에 추증(追贈), 시호(諡號)는 양의(襄毅)이다.
김완(金完)
1577(선조10)~1635(인조13). 중조 성균관 생원(生員) 김련(金鍊)의 5대손이다. 자는 자구(子具). 무과에 급제하여 경상방어사의 막하로 있다가 남원에서 전공을 세웠다. 1615년(광해군 7) 관무재시(觀武才試)에 급제하고, 1624년(인조2) 창성방어사(昌城防禦使)로 있을 때 이괄(李适)의 난을 만나 원수(元帥) 장만(張晩)의 선봉장으로 안현에서 반군을 격파, 진무공신(振武功臣)으로 학성군(鶴城君)에 피봉되고 황해병사를 지냈다. 시호는 양무(襄武)이다. 이때부터 김해김씨 사군파 문중(전남 영암군 서호면 몽해리)이 크게 일어났다.
김예직(金禮直)
김보(金普)의 9대손이다. 자는 문백(文伯), 임진왜란 때 백의종군(白衣從軍)으로 왕을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무과에 급제하여 포도대장․통제사를 역임하였다. 1618년(광해군10)에 광해군(光海君)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하려고 하자 이를 극간하다가 파직되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후에 임금께 죄를 청하였으나 인조는 김예직(金禮直)을 매우 가상히 여겨 오히려 상을 내렸다. 시호는 의헌(毅憲)이다.
김덕승(金德承)
김보(金普)의 10대손이다. 1595(선조28)~1658(효종9). 자는 가구(可久), 호는 소전(少痊)․소첩(巢睫)․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진선(盡善)의 아들. 1617년(광해군 9)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로 등용되었다. 경사(經史)와 운서(韻書)를 깊이 연구하여 중국어에도 능통했으며, 한학교수(漢學敎授)를 겸하였다. 예조정랑(禮曹正郞)․상례(相禮) 등을 거쳐서 사복시정(司僕寺正)이 되었다. 서화에도 솜씨가 뛰어났다.
김우항(金宇杭)
1649(인조27)~1723(경종3). 김덕승(金德承)의 손자다. 자는 제중(濟仲), 호는 갑봉(甲峰). 1682년(숙종7) 문과에 급제, 1689(숙종15) 기사환국 뒤 관계를 떠났다. 그 후 1694년(숙종 20) 폐비 민씨가 복위(復位)하자 주로 시강원(侍講院)에서 시서(司書)를 보다가 전라도 관찰사를 지내고, 1713년(숙종39) 우의정(右議政)을 역임, 1722년(경종2) 김일경(金一鏡)의 사친추존론(私親追尊論)에 반대하다가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화를 입었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김화중(金華重)
율은공(栗隱公) 김저(金佇: 遜)의 10대손. 자는 사웅(士雄), 호는 미천(眉泉). 1687(숙종7) 문과에 오르고 현감을 거쳤다. 수는 88세로 세칭 김해김씨 미우리 문중(예천군 보문면 미호리)을 크게 일으켰다.
김홍도(金弘道)
1745(영조21)~? 자는 사능(士能), 호는 단원(檀園)․서호(西湖). 호조참판 강세황(姜世晃)의 천거로 도화서 화원이 된 후 왕세계(王世孫)의 초상화(肖像畵)를 그렸고, 1781(정조5)년 어진화사(御眞畵師)로 정조(正祖)를 그렸다. 1795년(정조19) 신창현감(新昌縣監)이 되었다가 곧 사임하고 이듬해 왕명으로 용주사의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삽화로 판화를 그렸다. 풍속화에 있어서는 해학․풍자를 조화하여 서민적인 풍취를 그렸고, 당시의 화단에 고착된 무력한 중국 북화양식(北畵樣式)을 탈피, 대담하게 남화양식(南畵樣式)을 시도하여 신선한 조형미를 완성하였다. 작품으로는 쌍치도(雙雉圖)․군선도(群仙圖)․신선도병풍(神仙圖屛風) 등이 있다.
김양기(金良驥)
자는 천리(千里), 호는 긍원(肯園), 김홍도(金弘道)의 아들. 아버지의 재질을 닮아 산수화(山水畵) 옥목(屋木)을 잘 그렸다. 작품으로는 월전취생도(月前吹笙圖)․고목소림도(古木疎林圖)가 있다.
김제준(金濟俊)
1786(정조10)~1839(헌종5). 자는 신명(信明), 교명(敎名)은 아그나티우스, 김대건(金大建)의 아버지. 충남 당진출신.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아들을 마카오로 유학(留學) 보냈다 하여 국사범(國事犯)으로 체포되어 순교(殉敎)했다.
김대건(金大建)
1822(순조22)~1846(헌종12).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神父). 세례명은 앙드레이고, 아명(兒名)은 재복(再福)이다. 천주교 신자인 아버지는 기해사옥 때 순교하였다. 1836년(헌종2) 프랑스신부 모방에게 영세받고, 예비 신학생으로 뽑혀 충남 내포에서 상경하여 역관(譯官) 유진길(劉進吉)에게 중국어를 배운 후, 모방신부의 주선으로 중국으로 귀국하던 중국신부 유방제(劉方濟)를 따라 최방지거․최도마와 함께 마카오의 파리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에 가서 신학을 비롯한 프랑스어․중국어․리틴어 등을 배우다가 미카오의 민란 때문에 마닐라로 피란하여 매스트르 신부 문하에서 신학과 철학을 연구했다. 1842년(헌종8) 수업을 끝마치고 6개월간 프랑스 함대제독 세실의 통역을 하다가 기해박해(:1829 헌종 5)이후 천주교도에게 박해가 계속되고 있는 고국에 밀입국하여 의주를 거쳐서 서울로 오다가 감시가 심하여 몽고로 갔다가 재입국을 기도했지만 실패했다. 1845년(헌종 11) 다시 혼자서 국경을 넘어 서울에 잠입하여 위축된 교세확장(敎勢擴張)에 진력하였다. 5개월 후에 프랑스 외방전교회 지원을 받기 위해 쪽배를 타고 상해에 가서 금가항신학교(金家港神學校)에서 한국인 최초의 신부직을 받고, 만당성당(萬堂聖堂)에서 처음으로 미사를 집례하였다. 1846년(헌종8) 5월에 선교사의 입국과 주청 선교부와의 통신연락에 필요한 비밀 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등산지방(登山地方)을 답사하다가 체포되어 6회에 걸친 혹독한 고문 후 선교사와 심부들 ․교우에게 보내는 유서를 쓰고 25세로 노량신 새남터에서 사형을 당해 순교하였다. 1857년(철종 8) 교황청(敎皇廳)에서 가가자(可可者)로 선포되고, 1925년 교황청에서 다시 시복식(諡福式)이 거행, 한국 전성직단(全聖職團) 대주보(大主保)로 정해지고,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위(福者位)에 올랐다.
근대인물(近世人物)
김원근(金元根)
1886(고종23)~1965. 육영사업가. 호는 청암(淸巖)․성재(誠齋). 일찍이 한문을 수학. 1908년 연청학원(燕淸學院)을 설립하고 조치원 청년회장이 되었다. 1942년 대성보통학교를 창립하고, 흉년마다 기민을 구제했다. 1935년 청주상업학교를, 1944년에 청주여상을, 이듬해에는 청주대학을 설립하였고, 1946년에 <충북신보사>와 충북산업주식회사의 사장이 되었다. 1952년 삼창토건 산업주식회사 사장으로 있으면서,1954년에는 청주대학에 대학원을 설치, 1959년에는 대성여자중학교를, 1961년에는 대성여자고등학교를 세웠다. 1962년 공익포상, 1964년 문화훈장(국민훈장)을 받았다.
김주열(金朱烈)
(1943~1960) 의거학생(義擧學生). 전북남원 금지중학(金池中學)을 졸업, 1960년 마산상고에 입학차 내려왔다가 이해 마산에서 3․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데모에 나갔다가 실종, 약 한달 후인 4월 10일 최루탄이 두부(頭部)에 박힌 시체로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다. 이 참사가 경찰의 소행임이 밝혀지자 정부에 대한 학생들의 분노가 폭발, 4․19의거의 도화선이 되었다.
김현철(金顯哲)
(1901~1989)호는 촌암(村岩). 서울출신 경제학박사. 항일구국 운동가. 상해 임시정부에서 재정담당. 2차 대전때 미국무성 정보담당관, 국방성 작전참모, 해방후 귀국 부흥부, 농림부, 재무부장관 내각수반.
김준연(金俊淵)
호는 낭산(朗山) 동경제국대학교졸업 독일베를린대학교수학. 동아일보주필, 1937년 손기정 일장기 말살사건으로 사직. M.L당(조선공산당)조직. 초대법무장관, 초대(제헌국회의원),3, 4, 5, 6代국회의원. 통일당 당수
김철호(金喆浩)
기아산업 창업회장
김성곤(金成坤)
호는 성곡(省谷), 보성전문졸업. 금성방직사장, 동양통신사장, 연합신문사장. 4, 6, 7, 8대 국회의원. 민주공화당 재정위원장, 국민대 이사장, 쌍용양회 회장.
김한수(金翰壽)
경남모직사장. 한일합섬 회장.
김기창(金基昶)
호는 운보(雲甫). 화가. 농아복지회 회장
김대중(金大中)
(1925~)목포상고. 제5, 6, 7, 8, 13, 14대 국회의원. 유신독재 반대로 투옥. 민주회복 국민회의 공동대표, 민주주의 국민연합 공동대표.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이후 국가 내란죄로 투옥되 사형이 선고되고, 석방 후 평화민주당 총재, 제 15대 대통령.
김종필(金鍾泌)
(1926~ )육사 8기. 육군준장예편 초대중앙정보부장. 제6, 7, 8, 9, 10, 13, 14, 15대 국회의원. 민주공화당 의장, 신민주공화당 총재, 민자당 최고위원, 자유민주연합 총재. 국무총리(3회)
김용철(金容喆)
대법원 판사. 법원 행정처장. 대법원장.
김병화(金炳華)
대법원 행정처장
김임식(金任植)
동의중고등학교설립 동의전문대학설립 동의대학교.설립이사장 3선 국회의원(재정분과위원장)
김봉호(金俸鎬)
5선국회의원(국회.부의장) (사)가락중앙종친회 회장
김종오(金鍾五);육군대장 (육군참모총장)
김용배(金容培);육군대장 (대한중석광산사장)
김상복(金相福);육군중장 (청와대 수석비서관)
김용순(金容珣);육군중장 (국회의원)
김종갑(金鐘甲);육군중장 (국회의원)
김익렬(金益烈);육군중장 (한국양회공업이사장)
김영관(金榮寬);해군대장 (영남화학사장)
김성은(金聖恩);해군중장 (국방부장관)
김두찬(金斗燦);해군중장 (대한조선공사사장)
김두만(金斗萬);공군대장 (공군참모총장)
첫댓글 잘봅니다 고마워요.
공부 하고 다녀갑니다.감사합니다.
선조님들의 성업을 잘보고감니다
저도 김해김씨 74대손인대 이번에 잘보고 갑니다.
좋은 정보 감사 합니다.
저도74세손입니다. 반갑습니다~
김해김문이 상당한능력과 절개 의리를지니고서도 이조에이르러 자못쇠잔함을 이해할수없다 이제는 복구할때가되었다
고려를 무너뜨리는 신흥세력들을이해할수없고 김저의죽음또한 억울할수밖에없었다 이조에벼슬하기를 포기하였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