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월의 시인은 백석입니다.
생애 및 연보 (1912.7.1~1996.7.7)
1912년 평북 정주에서 태어난 백석은 본명이 기행(夔行)이며 백석은 필명이다.
1918년 김소월을 배출한 오산소학교를 거쳐 오산 고보를 졸업한 후 조선일보 후원 장학생으로 일본 도쿄의 아오야먀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뒤 귀국하여 1934년 조선일보에 입사 「여성」지의 편집을 맡은 이듬해 「정주성」을 조선일보에 발표하여 등단했다.
이어 그는 등단 1년 만에 왕성한 시작(詩作) 활동의 결과 첫 시집 「사슴」울 출간했으며 김기림 ․ 안석영 ․ 함대훈 등 11인의 발기인으로부터 문학적 천재성과 열정적 시 정신을 평가 받았다.
백석은 그해 조선일보에서 나와 함경남도 함흥의 영생여고에 재직하면서 수많은 시편들을 발표하면서 창작에 열중했으나 문학 활동을 하는데 교사직과 지방이 걸림돌이 되었는지 재직 2년 만에 다시 서울로 옮겨와 「여성」지의 편집에 잠시 관계하다가 1939년 만주로 건너가 6년여 동안 거주하면서 가난한 생계유지를 위해 측량보조원, 측량서기, 말단세관업무, 소작인 생활 등 여러 차례 직장과 직업을 바꿔가며 이국에서의 고달픈 삶을 이겨나갔다.
그가 1945년 해방을 맞아 고향 정주로 돌아오기까지 계속 만주에 머물러 있었는데 1940년 단 한번 짧은 귀국시기가 있었다. 이유는 그가 번역한 토마스 하디의 장편소설 「테스」의 마지막 교정을 위해서 였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백석은 1935년 「정주성」을 시작으로 1947년 「적막강산」과 48년 「남신의주 박시 봉방」에 이르는 100편 남짓한 시를 발표한 이후 한국시단에서 자취를 감추는 비극을 맞고 말았다.
암흑기의 식민지 시대하에서도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빼어난 모국어를 구사하며 홀로 고독한 시세계를 걸어야 했던 그의 견결한 시정신이 실로 반세기만에 재발굴되어 그 진가를 인정받게 된다는 것은 문학사적으로나 개인사적으로 크나큰 수확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시는 대체로 현실에 눈뜨지 못한 유년시절의 전통적 생활과 풍요롭고 화목하게 느껴졌던 기억들을 추억과 회상을 통해 자아상실의 회복을 동경한 시풍과 끝없는 유랑과 표류, 방황을 거치면서 터득한 식민지 치하의 피폐한 민중의 삶을 예리하게 표출하였으며 빼앗긴 조국과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공동체의 복원을 위해 다채로운 방언과 구수한 향토적 토속어를 구사하여 대단한 서정성과 친근감을 갖게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시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시집
우리 시대 시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시집은 백석의 ‘사슴’(1936)으로 조사됐다.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시인은 서정주와 정지용이었다. 시 전문 계간 ‘시인세계’ 여름호는 시단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인 156명의 시인을 대상으로 ‘지난 100년간 간행된 시집 중 가장 큰 영향을 받았던 시집 1권’에 관해 설문조사한 결과를 실었다.
응답자는 김종길 김남조 홍윤숙 신경림 정진규 천양희 오세영 오탁번 강은교 노향림 신달자 이성복 정일근 안도현 함민복 문태준 손택수 등 원로에서부터 젊은 시인까지 고루 섞었다.
‘가장 큰 영향을 받았거나 좋아하는 시집’ 설문에서 백석의 ‘사슴’은 시인 12명으로부터 추천받아 1위를 차지했다.
그 뒤로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1974), 정지용의 ‘정지용 시집’(1935), 이성복의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1980), 서정주의 ‘화사집’(1941)이 추천자 수 9~6명으로 5위 안에 들었다.
시인별로는 ‘화사집’ ‘동천’ ‘서정주 시선’ ‘질마재 신화’의 서정주와 ‘정지용 시집’ ‘백록담’의 정지용이 각각 14명의 추천을 받아 공동 1위를 차지했다.
뒤를 이어 6위권에 든 시인은 백석, 김수영·이성복, 김종삼·김춘수, 이상·김소월, 기형도·황동규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