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혼자 아름다운 여울, 흐르다가 흐르다가 힘
이 다하면 바위귀에 하얗게 어깨를 털어버린다. 새도 날
지 않고 너도 찾지 않는 여울가에서 며칠째 잠이나 잤
다. 두려울 땐 잠 근처까지 밀려갔다 밀려오곤 했다. 그
림자를 턱까지 끌어당기며 오리목마저 숲으로 돌아누운
저녁, 바람의 눈썹에 매달리어 숨었다. 울었다. 구천동
모르게 숨어 울었다.
바람 수업
바람에 밀리어 다치는 슬픔은 싫어.
남의 나라 남의 땅 발붙여 선 자리가 문득 이방임을
느낄 때도
참아라 곱게 참아라 가슴에서 달이 되고 해가 되고 별
이 되도록 잊고 잊으라고 무수히 조약돌을 날려보지만
나도 없고 너도 없고 고개 들어 부를 아름다운 이름
도 없는 성년의 첫 학년
조용히 다쳐 돌아간 내 아이는 어디에서 비를 긋고
있을까.
어쩌면 꿈 어쩌면 베갯잇을 가슴에 묻고 잠드는
아이는 여태 쓸쓸해할까.
만났다가 헤어지고 그냥 돌아서 갈대를 쓸어넘기며
성성한 가을비의 며칠이 지나고 난 뒤
내 말 못하는 아이의 행려를 눈물날 듯 눈물날 듯 아
슬하게 놓치며 청년의 한 시절은 고요히 물길을 따른다.
오산 들녘
오늘은 물둠벙에서 뛰노는 한 마리 눈쟁이, 가지들은
우수수 잎을 쏟는다. 들녘 어느 곳에서는 오랜 수문이
어둠을 타 무너지고 능선 위 훤한 달은 슬픔을 관람하는
개구쟁이, 여름 한철 개구리 울어라. 오산의 불빛은 죽
고 달빛은 한 세상을 덮어 그 덮은 우에 잠마저 뿌린다.
축산항 1
-아침 기상
이쪽 바닥은 조용하고
저쪽 바닥은 따스하고
푸른 한켠으로 놓이는 축산항.
머리채 단단한 여자들의 아침이 온다.
이대로 한 마리 날치나 되어 마른 바다로 나갈까.
파도는 밀리다가
더 이상 밀리지 않는 자리에서 갈매기를 날리고
우수 뒤 며칠, 배들의 잔잔한 정박 너머로
팽팽히 당겼다가 놓치는 수평선.
세월 없는 사내들은 판장(板場)으로 나와
멀리 축산항 여자들의 싱싱한 뒷물을 엿본다.
축산항 2
-12월
눈이 내리고 거덜난 사내처럼
건성의 눈바람이 불다 간다.
발목이 빠진 채 논두렁을 걸으면
날으는 칼새, 지친 나의 한 마리.
어군을 쫓는 거룻배들은 밤도와 북으로 흘러가도
빛나는 것은 집어등만이 아니다.
그리움처럼 애매하게 부딪치는 이물과 고물.
지나치는 타인의 창마다
밝은 밤은 두껍게 성레를 키운다, 완강하다
그리 알고 자거라.
포구의 밤은 재빨리 오고
등대의 불빛만 흑조의 전역을 덮는다.
축산항 3
-신기동
그리고 눈이 내렸다.
내렸다간 녹고 녹는 언저리
어딘가 환한 함정이 기다리는 밤에
너무 멀었다, 집도 축항도
기댈 곳 없는 흔들림이 너무 가까웠다.
캄캄하게 코 막고 웅크린 어로의 불빛
나는 두시에 깨고 세시에 잠 깨어
바다를 엿보러 다녔다.
가난한 세간 다 뒤집어놓고
꺼이꺼이 목메이는 사내의 파산을
아찔하게 놓치며 다녔다.
축산항 4
-겨울비
늦은 바다에 비 내린다.
수평선을 따르던 갈매기의 물자멱도 그치고
술청의 군데군데 자리를 잡는 사내들.
겨울이 되어 많이 생각하는 사람과
사람의 일들이 빗줄기 사이로 어지러운데
내항은 갑자기 어두워져서
아슬아슬하게 방파제로 나가는 길도 잃는다.
그렇겠지, 어둠이 내리는 잠시 그 사이
바람에 바람이 빠지는 높이로 알 수 없는
젊음의 낙마.
언제나 모서리로 밀려나는
생생한 기억은 지친다.
축산항 5
-절장
사람들의 기억은 묻어버리라더군, 바다는
은밀히 가슴에 섬을 세웠다 지워버리는 아이들의 놀이.
등대길 방파제를 따라가면
수평선은 큰 괄호를 이루어 아득하더군.
썰물의 한때를 모래톱에서 찰박이는 조가비
상심한 몇몇은 나를 멈춰두고
잦은 파도의 뒷걸음만 오래 보라더군.
그리운 주막 1
산그늘 하나 따라잡지 못하는 걸음이
느릿느릿 다가서는 거기,
주막 가까운 북망에 닿아라.
동으로 머리 누이고 한 길 깊이로 다져지는 그대
도래솔 성긴 뿌리가 새음을 가리고
나직한 물소리 고막을 채워 흐른다.
입 안 가득 머금은 어둠은 차마 눌 주랴.
마른 명주 만장 동이고 비틀비틀 찾아가거니
흐린 잔술에 깨꽃 더미처럼 흔들리는 백두.
그대의 하관을 엿보는 마음이
울음을 따라 지칠 때,
고추짱아 고추짱아 한 마리 헤젓는 가을 하늘 저끝.
그리운 주막 2
거랑가에 앉아서 노래 불렀다.
쉰소리 마른 소리 다 모여서
가버린 사람을 노래 불렀다.
울울이 차 넘기는 바람 보릿대
까맣게 씨 털며 파꽃이 매워
이 산등 온통 한 무덤으로
가차이 가차이 닿이는 하늘.
빚진 사내 곱은 사내 섭섭한 사내
어허 달구 무른 달구
어둠이 그물처럼 죄어들었다.
가락기 1
- 안골포 왜성
바다가 밀려왔다.
사람들이 만든 길
바다가 밀리는 곳에서부터 술래가 되고 싶은
아낙들은 하나둘 갯가로 나왔다.
바다가 밀려와서
계집 하나 회임하기를
눈 푸르고 키 큰 계집,
안골포 아낙들은 서둘러 불을 껐고
일없이 잔을 비우며 마을의 사내들은
어린 딸의 울음 소리를 들었다.
가락기 2
-양동리 고분
한여름 모기들이 퇴각한 동리길로
하나둘 돌아왔다.
바다로 나간 사람
소를 몰고 떠났던 사람
삼십 리 고갯길이 어두워지면서
집들은 바다 쪽의 봉창을 닫았다.
양동리 저녁은 쉽게 내려서
사람들의 길은 어둡고
숨죽이며 채이는 우물, 공동 우물가로
호기심 많은 아이들이 모여들 때
산중턱에서 수런거리는 사내들이 보였다.
목이 긴 사내 볼이 좁은
짚신의 사내 귀가 달아난
먼 전장에서 돌아온 사내들이
양동리 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립고 그리운 이름은 바다였다.
잠 없는 아이들이 숨어 보는
가락기 3
-봉황대
새가 날았다.
저문 산길을 따라가면
사금파리 하나로 모습 숨긴 봉황대
봉황새 날아가버린 언덕에서
한때 털거웃 부숭하던 기마족의 아이들이
제기차기로 하루를 보내고
동리 우물마다
소금물이 솟았다.
손으로 입을 막아 사람들은
가을을 견뎠다.
새가 날았다, 깃털 고운
한 마리 두 마리
가락국의 자모(子母)들
노을 내린 하늘에
우수수 바람으로 몰려나갔다.
가락기 4
-조만포
어둠을 가르고 누운 바다
곳곳의 불빛이 꺼졌다.
조만포 외곽으로
전의가 들끓는 밤,
사내들은 일찍일찍
아내의 배 위로 기어 올라갔고
갈꽃이 잠덧하는 한 곁으로
게들은 하얗게 버끔을 물고 쓰러졌다.
태야강 먼 물결소리
바람이 잘 드는 골짜기까지
힘이 부쳤다.
가락기 5
-유가리 조개무덤
잠든 아이들은
깨지 않는다.
유가리 언덕에 희게 묻힌 아이들
눈물 흘렸던 일 다
바다로 씻겨가고
반짝이며 발길에 차였다.
코를 막고 입을 막고 둘러서서
웃었다, 눈과 눈으로 마주보면서
바닷가 마을 하나가 소금기로 말라가는 것을
유가리 언덕에서 바라보았다.
아이들은 깨지 않는다.
한번 잠든 아이들은 일어서지 않고
석화된 조갑지들만
부스스 귀를 세웠다.
가락기 6.
-용원리 부인당
따뜻학 숨죽이고 있었다.
3월 지나 용원리
부인당 가면
서로 떨어져 증발하는 물기슭.
산을 등짐지고 가라앉은 아버지
물오르는 갈잎 속에서 쿵쿵
심장을 가누는 약한 딸들이 보였다.
포개졌다 어우러졌다
환하게 뚫린 구천 푸른 바닥,
시시각각 바람이 물을 갈랐다.
오냐 오냐 서에서 동으로
하늘나라로.
가락기 7
-만어사 돌무지
바다에서 건너오는 구름에는
비가 묻어 있었다.
만어산 앞자락에 비를 내리는 구름
신녀 만덕의 손등이 다 젖었다.
시든 익모초를 금방금방 토하면서
매일 저녁 등을 켜는 그녀의 일을
조바심하며 엿보았다.
비에 젖은 손은 희고
더욱 비가 내리면 하얗게 죽으리라.
죽어서도 등을 밝히리라.
만어사 여름 한철 비는
신녀 만덕의 발등을 덮고
저녁끼의 돌무지로 홀로인 강을 몰고 갔다.
가락기 8
-가덕도
섬들이 흩어져 비를 피했다.
방풍림의 낮은 키 너머
남도식 발성으로 뒤집혔다 뒤짚어가는 파도
사내들은 배를 띄워 먼 바다로 떠나고
사내가 빈 마을, 갯가 마을에는
바다가 쳐들어와 오래 머물다 갔다.
허기가 지면 푸른 허기
뭍으로 나가는 산길에는
슬픈 여자들의 치마끈이 마구 밟혔다.
구형왕에게
- 죽지사 10
안녕하신지요 가락 기원 400년 당신의 귀밑머리 모래
바람 불고 낙강 깊숙이 말을 몰아 그리운 산과 들을 세
웠지만 안녕한지요 집과 가축들은 화왕산 높은 벼랑에
서 굴러떨어지는 돌에 가슴을 다치고 안개 솟는 그 새숲
에서 다시 며칠을 보낸 뒤 당신이 뿌린 말의 피와 고기
로 삶을 모의하던 목마 성채 잣나무가지들은 무고한지
요 기러기 따라 건너온 영주 먼 들에서 북창을 열어두고
편지 올립니다 나 여기 남아 새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그
릇을 굽겠습니다 다시 책력을 엮어 고기를 잡고 말리겠
습니다 틈나면 뵈러 가겠습니다 시혹 내 죽은 뒤라도 나
의 자식들이 아들을 길러 당신의 여자를 취하고 자식을
낳아 손손으로 끊이지 않는 인연을 이루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구강포에서
- 죽지사 9
이제금 바라보노니 사초의 헛됨과 강구의 지리멸렬을
몇 마리 갈매기로 날리며 물 건너 물길을 돌아 아이들이
누울 자리를 마련하고 이랑 골라 씨 뿌린 연년세세
무리의 즐거움이 대를 물려 세월 모를 한 날에도 갈
매기 날고 아비는 바다에서 건진 바다를 바다에 돌려주기
위해 그 바닥 가운데 여생을 묶어 돌아오지 않았지만
우도 대마 유구 살아 우리 못다 찾을 물길 따라 먼데
어화는 다시 한 떼의 왜구를 길러 봉우리마다 봉화가
오르고 푸른 정어리를 씹으며 이제는 살아 있는 사람과
죽어 있는 사람들이 나란히 젯밥을 받는데
이 세월 가고 난 뒤 한세월 밀려온다면 삶이 기른 매
떼가 마을을 돌고 아이들은 몰려와 흙을 파며 놀 것인가
계집들을 눕히고 다시 우리 놀아볼 것인가
이제금 바라보노니 구강포 오름에 가득한 달빛 달빛.
연산동의 달 1
-어능화
머리를 다치면 기우뚱거린다 분가한 자식들이 기우뚱
거리고 손자의 유치원이 기우뚱거린다 어머니 집에 남아
마른 발톱 씹으시고 5월부터 7월까지 어능화 몇 송이로
쪼그려앉은 슬픔.
시인 박태일씨는 1954년 경남 합천에서 나서 동래고, 부산대 문리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박사과정에 재학중이다.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미성년의 강>이 당선되어 시단에
등장한 이래 "열린 시"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절제된 서경과 빼어난 서정의 조화, 그 조화가 빚어내는 신선하며
때로는 지극히 감각적이기까지 한 표현, 그리고 의미와 운율을
통합하는 탁월한 솜씨등을 고루 갖춘 그는 시의 뿌리에 긴밀히
닿아 있는 근래에 보기 드문 시인이다.
그의 처녀시집인 그리운 주막은 전통적 시정신의 현대적 재창조 속에
고결하고 조화로운 삶에 대한 진한 그리움을 가득 담고 있다.
[ 아이들의 돌멩이에 쫓겨 허둥대는 텃밭의 장닭이 되어, 소위
역사라고 말하는 담벼락에도 기대보지 못하고 급하고 낭패한
마음이 되어 슬슬 땅바닥에 신이나 끌어보는 사람들의 아들로
자라, 못을 갈아 애호박이나 찌르면서, 그런 장난이 심심한 날에는
어두워가는 풍속에 섞여 먹머구리처럼 눈 껌벅거리면서, 지각을
꿈꾸면서 감당할 수 있는 꿈과 감당할 수 없는 체험을 자리바꿔
주면서 1인칭에 절망하고 3인칭에 경악하고 2인칭에 김빠져가면서
풍경을 믿으면서 말이 묶어주는 풍경, 기울어졌다 다시 걸어가는
풍경, 얼굴 뭉개진 풍경에 기대어 말의 실밥을 뜯으면서 이 풍진
삶의 가감승제, 따뜻한 자리에 도돌이표를 찍고 지워나가면서,
시는 적어도 전망의 투시물임을, 굳이 극복의 형식, 사랑의 방법이라고
믿으면서 자유와 절제, 가락과 뜻 사이로 엉거주춤 습하게 웃으면서,
이 철면피한 삶의 문법, 빌어먹을, 저 혼자 말 다하는 시 앞에서
이냥 막막해지면서, 콧물 눈물 질금거리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