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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도봉에 눈이 내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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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한 정보 스크랩 내 고향은 김천입니다
박영근 추천 0 조회 154 12.11.16 17:3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르포라이터 민병준의 향토기행ㅡ김천

  영남의 첫 관문인 삼산이수의 고을

 

  직지사에서 가장 오랜 건물은 임진왜란 때 일주문·천왕문과 함께 화를 면한 비로전(毘盧殿). 용마루 너머로 보이는 황악산 전경은 한 폭의 참한 풍경화다. 일명 천불전(千佛殿)으로 불리는 이곳은 현겁 천불 부처님을 모신 곳이다.

1 오랜 세월 동안 김천의 젖줄 역할을 해온 감천. / 2 직지사 입구 주변에 꾸며놓은 직지문화공원. 지사를 다녀온 후 간단히 산책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 3 경부선 직지사역. 한때 직지사를 찾는 여행객들에게 사랑을 받던 역이지만 이젠 열차조차 멈추지 않는다.

  고려 초기 경잠대사가 경주 남산의 옥돌로 16년간 빚었다는 이 불상들은 모두 표정이 다르다. 불상 중에는 알몸인 불상이 하나 있는데, 민간엔 법당에 들어서자마자 이 불상을 발견하면 반드시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전해온다. 그러나 소망에 비해 발가벗은 불상을 금방 찾아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던지 1992년에 그 불상은 다른 작은 부처 틈에서 찾아내기 쉽도록 흰 색으로 칠하고, 나머지는 금색으로 칠했다. 하지만 이번 봄에 가보니 모든 불상은 똑같이 하얗게 칠해져 있었다. 결국 소중한 것은 쉽게 얻을 수 없다는 뜻인가? 아니면 모두 속절없이 허황된 이야기란 뜻인가?


  그런데 이 천불전 불상들은 아들을 원하는 부인들보다 시집 안 간 여성들이 더 관심을 갖는다고 한다. 미혼 여성이 법당에 들어섰을 때 천불 중에 가장 먼저 시선이 머무는 곳의 불상이 장래 자기 배필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원하는 대상이 아들이든 배필이든 경건해야겠지만, 사실 천불전은 누구든지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대승불교의 근본사상을 상징하는 전각이다.

 

  이외에도 직지사엔 석조약사여래좌상(보물 제319호), 대웅전 앞 3층석탑(보물 제606호), 비로전 앞 3층석탑(보물 제607호), 청풍료 앞 3층석탑(보물 제1186호) 등 많은 석조물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세월의 때가 묻은 보물급 석탑들 때문인지 천년고찰의 품격이 느껴지지만, 자료를 보면 이 석탑들은 모두 20세기 후반에 외부에서 가져온 것들임을 알 수 있다.


  직지사 대웅전 앞 동쪽과 서쪽에 서 있는 2기의 3층석탑, 그리고 비로전 앞에 세워져 있는 3층석탑은 1974년 경북 문경 도천사터에서 옮겨온 것이고, 청풍료 앞 3층석탑은 옛 강락사터에 무너져 있던 탑인데, 1968년 경북 선산군청 앞뜰에 옮겨 복원한 것을 1980년 직지사로 다시 옮겨 왔다. 또 직지사 성보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는 금동육각사리함(국보 제208호)은 경북 선산 도리사에 있는 세존사리탑 안에서 발견된 사리함이다. 또 한천사에서 출토된 금동자물쇠 등도 이곳에 있다. 이외에도 다른 절터에서 가져온 유산이 적지 않으니 직지사의 권세가 대단하다 아니할 수 없다.

김천 우시장은 한때 평양 우시장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규모가 컸다. 지금은 시내 외곽인 양천동에서 김천가축시장이란 이름으로 명맥을 잇고 있다.

  직지사엔 방랑시인 김삿갓의 재미있는 일화가 전한다. 직지사 스님과 시 짓기 내기를 하여 지는 사람이 이를 뽑기로 했다는데 결국 김삿갓이 이겼다. 제목도 ‘직지사 승려의 이를 뽑다(拔齒直指僧)’다. 직지사의 사세가 기울었을 때 이야기다.


  ‘금오라 했는데 눈이 쌓여 까마귀 머리가 희구나 / 황악이라는데 꽃이 피어 학머리가 붉구나 / 추풍인데 영상의 봄꽃은 괴이하고나 / 직지라 했는데 산중 꼬부랑길은 웬 말인가’


  시를 보면 황악산·추풍령·직지사는 모두 김천의 명소이고, 금오산 역시 김천과 구미의 경계에 솟은 명산이다. 김천의 명소를 모두 소재로 삼아 시로 풀어낸 김삿갓 특유의 재치가 돋보이는 시라 할 수 있다.

1 이른 아침의 김천 우시장 풍경. 소들이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 2 팔린 소가 새 주인을 따라가지 않으려 버티고 있다. 우시장에선 이렇게 사람과 소가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 3 우시장은 큰돈이 오고가는 곳이라 예로부터 돈과 관련된 수많은 이야기가 전한다. 한 농부가 소 판돈을 세어보고 있다.

  황악산에 오르다보면 김천 고을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흔히 김천을 일러 삼산이수(三山二水)의 고을이라 하는데, 삼산은 황악산·금오산·대덕산이요, 이수는 감천·직지천을 일컫는다.


  지세를 살펴보면 김천의 가장 큰 젖줄은 백두대간의 대덕산과 수도지맥의 수도산에서 각각 발원한 계류가 지례면에서 몸을 섞어 북류하는 감천(甘川)이다. 이후 황악산에서 발원하여 동류하는 직지천을 김천 시내에서 받아들여 북동쪽으로 흐르며 농소면·개령면·감문면·아포읍을 거쳐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이 감천은 조선시대 말까지만 해도 낙동강 하구에서 소금배가 올라올 만큼 깊었지만 이제는 종아리 정도 깊이밖에 안 된다.

1 조선시대 김천의 중심지였던 교동(금산동)에 있는 연화지. 조선 초기에 농업용수를 대기 위해 조성한 저수지였으나 경관이 좋아 풍류객들이 삼산이수를 형상화한 섬을 만들고 정자를 지었다. / 2 김천시 한복판을 지나는 경부고속철도. 이 외에도 경부선, 호남고속도로가 모두 김천 시내를 관통하는 바람에 분위기가 조금 어수선한 편이다. / 3 경부선 김천역. 1905년 경부선 철도 개통으로 김천역이 생기자 김천은 농축산물의 집산지로 성장하면서 상주의 상권까지 장악해 조선 5대 시장으로 성장했다.

  감천은 우리말로 ‘감내’란 말이다. 우리말에서 ‘감(검, 금)’이란 모든 만물을 있게 한 신(神)을 의미한다. 세월이 흘러 신이란 뜻은 없어지고 ‘중심’이라는 뜻으로만 쓰이게 된다. 그러니 감천이란 ‘김천의 중앙천’이란 뜻이 된다. 김천(金泉)의 옛 이름은 감물(甘勿)인데, 금물(今勿)이라고도 적었다. 그렇다면 한자로는 金泉이라 쓰면서 읽을 때는 왜 금천이 아니고, 김천일까? 발음의 편리상 ‘ㅡ’가 ‘l’로 바뀌는 현상으로도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음양오행설도 그럴 듯하다.


  고려시대에 목자득국이라는 도참이 유행했다. 고려 왕실은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씨 왕조의 등장을 막지 못하였다. 이성계의 건국은 목자득국의 도참이 현실화된 사건이었다. 이번엔 이성계의 고민이 커졌다. 오행(목·화·토·금·수)의 오행상극에서 ‘금은 목을 이긴다’는 금극목(金剋木)에 따라 쇠의 성질을 가진 금씨가 나무의 성질을 가진 이씨를 이긴다는 것. 그래서 이성계는 고민 끝에 금에 해당하는 금씨를 김씨로 읽게 하였다고 한다. 이 고을 지명도 이렇게 해서 김천이 되었다는 것이다.

1 김천은 삼한시대 감문국이 자리 잡고 있던 고을이다. 감천 하류의 개령면에 있는 이 연못은 감문국 왕실 정원이었다고 전한다. / 2 충청·경상·전라의 세 도가 나뉜다는 삼도봉의 겨울 풍경. 정상의 ‘삼도 화합탑’엔 세 마리의 용을 태운 세 마리의 거북이 서 있다.

  김천은 신라와 고려시대엔 산간촌락이었다. 김천의 위상이 바뀐 것은 조선 초기에 역마제도가 생긴 이후. 김천 지역엔 전국 9대 간선도로의 하나인 김천도(金泉道)가 설치되었다. 영남지방에서 한양으로 이어지는 교통로는 여러 노선이 있었으나 추풍령은 비교적 평탄하여 우마와 수레가 넘기 편리한 점이 많았다.


  15~16세기에 인근 주민들의 물물교환과 주변 지역과의 교역중심인 장시가 전국에 등장하였는데, 임진왜란 이후 교통의 요지를 중심으로 주요 시장이 등장했다. 김천도 그 역할을 맡고 있다가 19세기 초에 이르러 상주·안동장과 함께 영남의 중심시장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또 지리적인 여건상 경북·충북·경남 3도의 과실과 곡식이 모여들어 ‘삼도시장’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김천시장은 1905년 경부선 철도 개통으로 농축산물의 집산지로 성장하면서 상주의 상권까지 장악해 조선 5대 시장(평양·개성·강경·김천·대구)의 하나로 성장했다.

1 개령면 광천리 빗내마을에 있는 빗내농악전수관. 빗내농악은 삼한시대 감문국의 나랏제사와 풍년을 비는 별신제가 혼합해 동제로 발달한 농악놀이다. / 2 사과꽃 만발한 김천의 농가. 김천의 봄은 산모퉁이를 돌 때마다 새하얗게 번지는 꽃구름 따라 피어난다. / 3지례와 증산 사이의 부항령에서 바라본 백두대간 삼도봉 일대의 산줄기. 강원도 첩첩산중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골이 깊다.

  자료를 보니 김천시장은 지금의 용호동(용암동) 일대에서 열렸다. 1922년 감천제방이 축조되기 전까지는 시장의 대부분은 백사장이었다. 황금동교회 앞을 흐르는 개울이 감천으로 유입하는 지점인 지금의 철교 부근은 삼각주를 이루어 높은 지대가 형성되어 이곳을 ‘용우머리’라 하였는데, 이곳이 바로 김천시장의 중심지였다.


  1930년대 이후엔 소를 팔고 사는 우시장으로 제법 유명했다. 가까운 선산·상주·성주에서뿐만 아니라 거창, 그리고 충청도 영동 주민들도 백두대간의 추풍령이나 괘방령을 넘어 소를 몰고 왔다. 거래는 농한기인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가장 많이 이루어졌는데, 당시 하루 장날에 거래되는 소는 평균 500~600마리로 나라 안에 유명한 횡성 쇠전과 수원 우시장도 역사와 크기에서 김천 우시장을 따르지는 못했다고 한다.


  당연히 우피(牛皮)의 거래량도 전국에서 가장 많아 우피의 외국무역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 우피의 큰 손인 김기진이라는 사람은 우피를 일정한 규격으로 접어서 쌓아 놓고 색깔과 촉감으로 등급을 판별했는데, 보통 전문가가 하루 걸리는 물량을 그는 한 시간이면 거뜬히 판별해냈다는 전설적인 얘기도 들려온다. 이런 배경으로 김천장 주변엔 한우고깃집이 성했고, 탁배기 곁들일 수 있는 장터국밥도 명성이 자자했다.


  길손도 1980년대 초반에 괘방령 근처에서 소를 키우던 외삼촌을 돕느라 방학 때면 내려와 소꼴을 베곤 했는데, 당시 김천 우시장도 몇 번 들렀던 기억이 있다. 김천서 성장한 이승하 시인의 ‘김천 우시장 탁배기 맛’이란 노래 한 번 들어보자.


 

  이전 맛 같지 않구마

  소 팔러 우시장에 나온 아부지를 따라와

  승하야 니도 한 잔 묵거라

  뜨물 같은 탁배기 한두 잔 얻어 마시던

  그 술맛은 어데로 가삐릿는지

  씹다 더 달싹해졌는데 더 씹다

  어무이 치료비 마련할라꼬

  큰 맘 묵고 끌고 나온 한우 암소

  하이고 나 원 참

  200만 원도 안 준대여

  또 소값 파동이래여?

  소고기, 비육우 무데기로 수입한 탓이래여?

  이번엔 우루과이라운드 때문이라네

  내도 84년 폭락 때 죽은 뒷집 박씨 아저씨처럼 

  솔랑은 이 우시장에 두고 가까

  우시장에 소 내삐리고 와

  농약 묵고 탁 죽어삐리까

  (하략)

 

  직지천변에 있던 옛 우시장은 1991년 외곽지대인 양천동에 새로 4,000평 규모의 터를 마련해 김천가축시장이란 이름으로 옮겨왔다. 요즘도 이곳에선 닷새마다 5일장(5, 10일)이 열린다. 새벽 4~5시에 가 되면 상주·문경·구미·성주·무주·영동 등지에서 올라온 소장수들의 흥정소리로 한바탕 소란이 벌어지는데, 이런저런 눈치를 살피던 이들도 결정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는 7시쯤엔 절정에 이르고, 보통 8~9시쯤이면 슬슬 파장 분위기가 된다.

 

  당연히 예전 우시장 풍경과는 많이 다르다. 탁배기 들 수 있는 주막집도 없고, 한우 고깃집도 없다. 하지만 타임머신을 거꾸로 돌려 마치 20여 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들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다. 최근에 한미 쇠고기 협상 타결 소식이 전해지면서 축산 농가는 공황상태에 빠져들었다. 한우 파동이 다시 밀려와 여러 목숨을 거둬갔던 1984년 폭락의 악몽이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농부로 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가 보다.


▲ 1 청암사 승가대학의 중심을 이루는 육화료. ‘여섯 가지 법으로서 모두 화합한다’는 승가의 실천 내용이 담겨 있는 건물이다. / 2 구성면 상원리에 있는 방초정. 건축 양식도 특이한 이 정자는 안팎에서 보는 풍경도 모두 괜찮다.

  사실, 김천 시가지 분위기는 조금 어수선하다. 우뚝 솟은 건물들보다는 경부선 철도와 경부고속도로뿐만이 아니라 몇 년 전 건설된 경부고속철도까지 김천 시내를 관통하기 때문이다. 김천의 젖줄인 감천과 직지천 주변에 이런저런 교각들이 복잡하게 얽혀있어 초행자는 이정표를 제대로 읽지 못해 엉뚱한 길로 빠지기 십상이다. 김천이 원래 길 때문에 부침을 거듭한 고을이긴 하지만 김천에 멈추지도 않는 경부고속철도가 시내를 관통한 일은 아무래도 아쉽다. 다행히 시내 평화동과 성내동 주변만 그렇지 외곽으로 조금만 벗어나도 곧 청정자연이다.


  김천의 4월은 사과꽃과 자두꽃으로 황홀하다. 꽃이 피어있는 길가의 과수원은 사과밭, 아니면 자두밭이다. 길모퉁이를 돌 때마다 새하얀 꽃구름이 몽환처럼 피어오르니 누군들 속력을 낼 수 있을까. 하지만 아쉽게도 이 어수룩한 길손은 자두꽃과 사과꽃을 잘 구분하지 못하겠다. 고갯마루에서 차창으로 스치는 게 자두꽃인 줄 알고 가다 차를 세우고 주민에게 물어보면 사과꽃이란다. 조금 더 내려가 이번엔 사과꽃이겠지, 하고 여쭤보면 이 마을은 오로지 자두만 키운단다. 이런 일을 여러 번 겪은 길손은 결국 두 꽃을 구분하는 일을 포기하고 그냥 즐기기로 했다.


  이렇게 사과꽃과 자두꽃에 취해 달리며 구성면의 방초정에 앉아 한량 흉내도 내보고, 지례마을에선 졸깃졸깃한 흑돼지로 입을 즐겁게 한 뒤 지례 삼거리에서 903번 지방도를 타고 서쪽으로 차를 몰아 백두대간 삼도봉(三道峯·1,172m)을 우러른다. 삼도봉이란 이름은 이 봉우리에서 충청·경상·전라의 삼도가 나뉜다고 해서 지어졌다.


  백두대간 분수령엔 삼도봉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봉우리가 여럿 솟아 있다. 우선 화개재와 임걸령 사이의 지리산 삼도봉(1499m)은 전남(구례), 경남(하동), 전북(남원)의 분기점이다. 원래 낫의 날을 닮았다 하여 ‘낫날봉’이라 하였는데, 주민들은 ‘날라리봉’으로 불렀다. 그러다가 국립공원관리공단 측에서 어감이 좋지 않다 하여 삼도봉이란 새로운 명찰을 달게 된 것이다. 두 번째 소사고개와 대덕산 사이에 있는 삼도봉(1249m)은 전북(무주), 경북(김천), 경남(거창)의 영역이 만나는 꼭짓점이다. 초점산이라고도 한다.


  세 번째가 바로 경북(김천), 충북(영동), 전북(무주)이 하나로 만나는 이 삼도봉이다. 삼도를 충청·경상·전라로 이해한다면 이곳이 실질적인 삼도봉이라 볼 수 있다. 대동여지도에도 나와 있듯이 이미 조선시대에도 이렇게 불렸으니 요즘 유행하는 말로 치면 이 삼도봉은 ‘원조’인 셈이다.

▲ 1 김천 남서부의 대덕면에 있는 섬계서원의 은행나무. / 2 사대부 양반가의 기와집을 닮은 청암사 극락전. 조선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가 장희빈 때문에 쫓겨났을 때 은거하며 머물던 사연이 있는 곳이다.

  옛날 ‘원조 삼도봉’ 정상엔 세 개의 돌무더기가 있었다고 전한다. 삼도 사람들이 각각 자기 고을의 안녕을 위해 쌓은 것이다. 그런데 돌무더기를 크게 쌓은 도가 가장 잘 살게 된다는 이야기 때문에 사람들은 산에만 오르면 돌무더기를 크게 쌓았다. 그러던 어느 날 돌무더기가 가장 작은 고을 사람들이 돌무더기를 모두 허물어버렸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주민들 사이에서 전해온다.


  지금은 정상엔 세 마리의 용을 태운 세 마리의 거북이 서 있다. 바로 ‘삼도화합탑’이다. 삼도를 나누는 경계요, 동시에 삼도를 아우르는 정점이기도 한 이 산을 삼도 화합의 상징으로 삼자는 의도다. 삼도의 삼군 주민들은 매년 10월10일 이곳서 모여 조촐한 행사를 벌이고 있다. 그러나 어찌 삼도의 화합만 바라겠는가. 한반도의 대단합을 소망하게 되는 삼도봉이 아니겠는가.


  지례부터는 감천을 오른쪽으로 끼고 거슬러 오른다. 이내 감천과 헤어져 아흔아홉고개라고도 불리는 부항재를 넘을 때는 정말로 강원도 깊고 깊은 산골로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김천은 거의 대부분 감천의 수계에 속하는데, 남부인 부항재 너머의 이곳 증산면 지역만 성주·고령을 적시는 회천 수계에 속한다. 수도산에서 북동쪽의 금오산으로 뻗어내리는 금오지맥이 분수령을 만들기 때문이다.


  감천 수계에 직지사가 있다면 회천 수계엔 청암사(靑巖寺)가 있다. 불령산(佛靈山)이라고도 불리는 수도산(1,316m) 북동쪽 기슭에 자리 잡은 청암사는 858년(신라 헌안왕 2) 도선이 창건한 절집이다. 17세기 회암 정혜 스님의 강맥을 이어 1987년 문을 연 비구니 스님들의 승가대학이 있다. 우리나라 비구니강원 중 가장 외진 곳에 있기 때문인지 그다지 일반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다.


▲ 수도산 정상 가까이에 자리 잡은 수도암. 도선국사가 이 터를 발견하고 7일 동안 춤을 췄다는 이야기가 전할 정도로 조망이 좋다.

   청암사의 매력은 청기(淸氣)가 흐르는 고즈넉함이다. 청암이란 절집 이름에 걸맞게 바위와 나무가 어우러진 절집 앞 계곡도 참 좋다. 청암사는 이 계곡을 사이에 두고 두 구역으로 나뉜다. 계곡 북쪽의 낮은 곳에 자리 잡은 대웅전 영역과 그 남쪽 언덕 위의 극락전 영역이다.


  대웅전 영역에 있는 육화료(六和寮)는 승가대학의 중심을 이루는 건물이다. 육화란 ‘함께 공정하게 생활하며(身), 말로써 화합하며(口), 생각으로 화목하며(意), 다같이 계율을 지키며(戒), 법에 대한 의견을 같이하며(見), 유익한 일은 균등하게 나눈다(利)’로, ‘여섯 가지 법으로서 모두 화합한다’는 승가의 실천 내용이다.


  극락전에 들면 눈 밝지 않은 이들도 독특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정갈하게 가꿔진 입구의 텃밭과 돌담은 그렇다 해도 솟을대문 등 건축물의 구조가 사대부 양반가의 기와집을 닮았기 때문이다. 이 극락전은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가 1689년(숙종 15) 장희빈 때문에 폐서인되어 쫓겨났을 때 은거하며 만 3년을 묵었던 곳이다. 극락전 서쪽에 있는 보광전은 인현황후의 복위를 빌기 위해 세워진 것이라 하는데, 부처님의 가피 덕분인지 1694년 갑술옥사로 다시 왕후로 복위하였다.


  전체적으로 청암사는 비구니 스님들이 수행하는 절집답게 정갈하게 가꿔져 있다. 더불어 범종각에 있는 목어, 그리고 법고의 거북 생김새는 여느 절집과 달리 화사하고 귀엽다. 역시 비구니 절집답다. 하지만 청암사 강주와 주지 스님은 물론 학인들 모두가 태극권 유단자라 한다. 몇 해 전에는 전국우슈대회에 16명이 참가해 전원 메달을 따기도 했다고. 소심한 이 길손으로서는 경내에서 울력하는 비구니 스님들과 마주칠 때마다 눈 내려 깔고 합장하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 1 쌍계사터 앞으로 지나는 계류. 맑은 기운이 넘친다. / 2 청암사 목어. 비구니 절집답게 예쁘게 단장하고 있다. / 3 김천 일대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쌍계사터. 부처님이 앉아있던 연화대좌와 주춧돌만이 옛 영화를 증거하고 있다.

  청암사를 나와 수도산 정상 가까이에 자리잡은 수도암(修道庵)으로 향한다. 5만분의 1 지형도를 보니 무려 해발 960m쯤에 터를 잡았다. 때는 바야흐로 봄이 깊어가는 4월 중순인데, 이곳은 초봄이다. 아래 사하촌과는 계절이 한 달 가까이 차이가 난다는 게 과장은 아니었다.


  이곳엔 수도암의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하여 동쪽과 서쪽에 서 있는 쌍탑(보물 제297호)은 859년(신라 헌안왕 3)에 도선국사가 세웠다고 한다. 참선 수도장으로 유명한 이 암자의 법당 앞마당에 서면 탁 트인 전망 끝에 금오산 암봉이 불꽃처럼 피어오르는 광경을 감상할 수 있다. 도선국사가 이 터를 발견하고 7일 동안 춤을 췄다더니 과연 괜찮은 조망이다.


  김천을 비롯한 경북 지역은 불교문화의 수입 창구이자 경주 불교의 보급 통로여서 다른 지역에 비해 경주의 불교가 빠르게 보급된 곳이기도 하다.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 김천에 오기 전 자료조사를 하면서 대동여지도 등 옛 지도를 살펴보았는데, 황악산엔 직지사가 표기되어 있지 않았다. 아마 임진왜란 후 거의 폐허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 수도산 기슭에서도 청암사나 수도암의 이름이 보이지 않았다. 다만 이곳엔 쌍계사(雙溪寺)라는 절집만 선명하게 표시되어 있을 뿐이었다.


  사실 예로부터 이 근방에서 가장 큰 절집은 쌍계사였다. 도선국사가 창건한 이 절집은 조선 후기까지 상당한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고 전한다. 실제로 청암사와 수도암은 초기엔 쌍계사에 속한 암자였다. 그리고 증산면은 물론 이웃 대덕면 일대의 땅이 모두 쌍계사 소유였으나 8·15광복 뒤 토지개혁 때 주민들에게 골고루 분배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6·25전쟁 때 대웅전 등 모든 전각이 불에 타버린 뒤 전설 속으로 묻혀가고 있다.


  지금 증산면사무소 일대가 옛 절터다. 면사무소 건물 뒤쪽은 대웅전이 있던 자리인데, 큼직한 주춧돌들 남아있는 장방형 터 한가운데엔 부처님이 앉았던 연화대좌도 있다. 다른 전각이 있었을 법한 자리엔 민가가 들어서 있었다. 주민들에 의하면 지금 면사무소 건물 자리가 절 앞마당이었고, 멋들어진 아름드리 소나무도 당시에 있던 것이라 한다. 부도밭은 서쪽으로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역시 민가에 둘러싸인 상태다. 결국 쌍계사 옛 절터에 마을이 들어서면서 면소재지가 형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눈을 감고 화재 이전의 절집 풍광을 상상해본다. 대웅전 뒤로는 아담한 시루봉(469m)이 솟아있고, 넓은 뜰 바로 앞 수도계곡의 반석으로 맑은 계류가 흐르는 절집. 아마 6·25전쟁 당시 불타지 않았다면 직지사의 아름다움에 뒤지지 않는 절집으로서 사부대중뿐만이 아니라 길손 같은 어리석은 사람들에게도 깨달음을 주었을 텐데…. 아쉽게도 지금은 안내판 하나 없이 방치된 신라시대 절터다.


  수도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길을 따르다 성주댐 근처에서 59번 국도로 갈아타고 실치재 고갯마루에서 잠시 멈췄다. 북쪽으로 곧게 이어진 국도 끝에 김천 시가지가 아른거린다. 그 중간엔 환상인 듯 새하얀 꽃구름이 여기저기 둥실둥실 피어있다. 다시 행복한 고민을 시작한다. 사과꽃일까? 자두꽃일까? 고향 같은 청정 산골, 김천의 봄은 이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김천, 어떤 곳인가


  경상북도 남서부에 있는 김천시(金泉市)는 동쪽으로 칠곡군·성주군·구미시, 서쪽으로 충북 영동군과 전북 무주군, 남쪽으로 성주군과 경남 거창군, 북쪽으로 상주시·구미시와 접한다. 수리적 위치로는 동경 128°04′∼128°09′, 북위 36°07′∼36°11′에 있다.


  동쪽에는 금오산(金烏山·977m)이 솟아 있고, 서쪽에는 남부부터 대덕산(大德山·1,290m) 삼도봉(1,177m), 황악산(黃岳山·1,111m)으로 이어지는 험준한 백두대간 분수령이 충북과 경계를 이룬다. 남쪽에는 국사봉·수도산·단지봉 등의 산지가 경남과 경계를 이룬다. 남동부에서는 성주군과의 경계에 형제봉(兄弟峰·1,022m)·염속산·백마산·염암산이 이어져 금오산에 이르고, 북으로는 광덕산·백운산·국수봉 등이 구릉지대를 이룬다. 백두대간의 추풍령·궤방령·우두령 등의 고개는 주요 교통로가 된다.


  하천은 백두대간의 대덕산과 ‘수도지맥(<신산경표> 참조)’의 수도산에서 각각 발원해 지례면에서 합류하여 북류하는 감천이 가장 큰 젖줄이다. 이후 감천은 황악산에서 발원하여 동류하는 직지천을 김천 시내에서 받아들여 북동쪽으로 흐르며 농소면·개령면·감문면·아포읍을 거쳐 낙동강에 합류한다. 감천 유역의 개령평야와 직지천 유역의 금릉평야 등 기름진 평야를 이룬다.


  김천은 삼한시대에 감문국과 주조마국이 있던 자리였고, 삼국시대 신라가 감문국과 주조마국을 병합하여 감문주를 설치했다. 신라 때는 금산군에 속하는 산간촌락이었으나 조선 초기에 역마제도가 생긴 이후 인근 주민들의 물물교환 및 주변 지역과의 교역중심지로서 역할을 담당했고, 1905년 경부선 철도 개통으로 농축산물의 집산지로 성장했다.


  1914년 금산·지례·개령군 일원과 성주군 일부를 병합하여 김천군이 됐으며, 1949년에는 김천읍이 시로 승격됨에 따라 김천군을 금릉군이라 했다. 1983년 금릉군 4개 리를 김천시에, 금릉군 2개 리를 선산군에 편입하여 김천시를 13개 동으로 통폐합했다. 1995년 1월 김천시와 금릉군이 합쳐 도농복합형의 통합시가 됐다.


  현재 아포읍과 감문면·개령면·남면·농소면·감천면·조마면·어모면·봉산면·대항면·지례면·구성면·부항면·대덕면·증산면, 용암동·성남동·평화동·양금동·대신동·대곡동·지좌동 등 1읍 14면 7동을 이룬다.


  전체 인구의 35% 정도가 농업에 종사하는데, 주요 농업지대는 개령평야와 금릉평야로서 이 시의 곡창지대를 이룬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 등이나 해마다 생산량이 감소하고 있고, 무·배추·양배추·파·양파·방울토마토·참외·수박·포도 등 채소류와 과일류는 증가하고 있다. 특히 포도의 경우 2003년도 생산량이 48,239t으로 전국 총생산량의 13%를 차지했으며, 김천시 농업소득의 23%를 차지하는 주요 고소득 작물이다.


  김천은 충청·전라·경상도를 잇는 교통의 요지이기 때문에 상업은 옛날부터 대구·평양·전주·강경과 더불어 5대 시장으로 발달했다. 그러나 근대교통의 발달과 더불어 통과지점이 되면서 급격히 쇠퇴했다.


  황악산 직지사

  대항면 운수리 황악산 동쪽 기슭에 있는 직지사는 418년(신라 눌지왕 2)에 아도화상이 창건한 사찰이다. 936년(태조 19)에 능여(能如)가 고려 태조의 도움을 받아 중건했는데, 직지사라는 절 이름은 능여가 절터를 잴 때 자를 쓰지 않고 직접 자기 손으로 측량한 데서 붙여졌다고 한다. 사명당 유정(惟政)이 여기서 승려가 됐다.


  임진왜란 때 불에 거의 타버려 1610년(광해군 2)에 복구에 들어가 60여 년 후 작업을 끝맺었다. 현재 경내에는 석조약사여래좌상, 대웅전 앞 3층석탑, 비로전 앞 3층석탑, 대웅전 삼존불 탱화, 청풍료 앞 3층석탑 등의 문화재가 있다. www.jikjisa.or.kr 종무소 054-436-6174, 6013


  금동육각사리함

  직지사 성보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는 금동육각사리함(국보 제208호)은 경북 선산군 도리사에 있는 종 모양의 세존사리탑 안에서 발견된 사리함이다. 높이 17㎝로 기단·탑몸·지붕으로 구성되어 있고, 표면에 도금이 잘 남아 있다. 8각이 유행하던 통일신라시대에 6각형의 사리함이 나타났다는 점과 시대를 달리하는 종 모양 부도에 안치됐던 점이 특이하다.


  직지사 석조약사여래좌상

  직지사에 모셔져 있는 직지사 석조약사여래좌상(보물 제319호)은 광배와 불상을 하나의 돌로 조성한 작품이다. 머리는 민머리이고 정수리 부근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표현됐다. 얼굴은 마모가 심하지만 둥글고 풍만한 인상이다. 옷에는 평행 계단식의 무딘 옷주름을 표현했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이 아래를 향하고 있고, 왼손에는 약항아리를 들고 있어서 이 불상이 약사여래상임을 알 수가 있다. 광배는 넝쿨무늬와 불꽃무늬를 새겨 장식했다. 전반적으로 세부표현이 둔감해졌으며, 광배의 무늬도 세련미가 줄어든 점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의 양식을 계승한 약사여래좌상으로 볼 수 있다.


  직지사 대웅전 앞 삼층석탑

  직지사 대웅전 앞 동쪽과 서쪽에 서 있는 2기의 삼층석탑(보물 제606호)은 원래 경북 문경의 도천사터에 쓰러져 있던 것을 1974년 이곳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두 탑 모두 1단의 기단 위로 3층의 탑신을 올렸는데, 각 부분의 양식이 같다. 꼭대기에 올린 거대한 머리장식은 탑을 옮겨 세울 때 새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탑신의 1층 몸돌 높이가 지나치게 높으나 전체적으로 세련된 작품이다. 기단이 1단이고, 지붕돌의 들린 정도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짐작된다.


직지사 비로전 앞 삼층석탑

  직지사 비로전 앞에 세워져 있는 이 3층석탑(보물 제607호)은 대웅전 앞 3층석탑 2기와 함께 1974년 문경 도천사터에서 옮겨왔다. 1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리고 있다. 탑신의 1층 몸돌이 2·3층에 비해 매우 높으나, 전체적으로 비례가 적절한 세련된 작품으로 9세기 통일신라 후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직지사 대웅전 삼존불탱화

  탱화란 천이나 종이에 그림을 그려 액자나 족자형태로 만든 불화다. 조선 후기에는 대웅전이나 대광명전 등에 흔히 3폭의 불화를 봉안하는 것이 특징인데, 이 불화도 그러한 형식을 따르고 있다. 직지사 대웅전 삼존불탱화(보물 제670호)는 중앙에는 석가가 영취산에서 여러 불보살에게 설법하는 모습을 묘사한 영산회상도(보물 제670-1호), 왼쪽에는 화면의 중앙에 약합을 든 약사여래가 앉아 있는 약사회도(보물 제670-3호), 오른쪽에는 중앙에 아미타불을 두고 관음·세지 등의 보살과 신장상 등이 주위를 둘러싼 구도아미타불의 극락회도(보물 제670-2호)를 배치했다. 1744년(영조 20)에 그린 이 탱화들은 전체적으로 짜임새 있는 구성과 뛰어난 묘사력, 안정감 있는 색감 등으로 당시 불화를 대표하는 걸작에 속한다.


  한천사 출토 금동자물쇠 외 일괄

  직지사에서 보관하고 있는 이 유물들은 1989년 한천사 경내 정비작업 중 발견된 유물로서 금동자물쇠 3점과 청동반자 총 4점이다. 자물쇠는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매우 희귀하며, 문양이 아름답고 출토지가 분명해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함께 출토된 청동반자는 직경 39㎝, 입지름 22.5㎝로 고려 반자의 일반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3개의 고리가 있어 달도록 되어 있으나 1개는 없어졌다. 반자란 절에서 대중을 불러 모으거나 급한 일을 알리는 데 사용하는 타악기를 말한다.


직지사 청풍료 앞 삼층석탑

  이 3층석탑은 옛 강락사터에 무너져 있던 탑으로, 1968년 선산군청 앞뜰에 옮겨 복원한 것을 1980년 직지사로 다시 옮겨 놓았다. 1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우고 머리장식을 얹은 구조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탑을 옮겨 세울 때, 같은 시기의 석탑을 모방하여 복원해 놓은 것이다. 지붕돌의 치켜 오른 정도나 밑면의 받침수, 각 부의 세부적인 양식으로 보아 9세기경 통일신라시대의 탑으로 보인다. 보물 제1186호.


예념미타도량참법 6∼10권

  예념미타도량참법은 아미타불을 지극한 마음으로 예배하면서 죄를 참회하고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불교의식의 절차를 수록한 책이다. 이 책은 나무에 새겨 찍어낸 권6∼10의 다섯 권을 1책으로 엮었다. 간행기록이 없어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책 끝에 있는 김수온의 글을 통해 1474년(성종 5)에 세조비 자성대왕대비가 선대왕과 왕비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간행한 것이며, 왕실과 고승 및 당시 일류 기술자들이 총동원됐음을 알 수 있다. 16세기 초 해인사에서 다시 찍어낸 불경으로 판의 새김이나 인쇄상태가 처음의 것에 비해 손색이 없다. 판을 새긴 사람의 이름이 그 무렵 책들의 간행연대를 추정하는 근거가 되며, 서지학과 불교문화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보물 제1241호.


  직지문화공원

  직지사 입구에 있는 직지 문화공원은 직지사 주변의 난개발 방지와 전통사찰 보전, 관광객 휴식공간 등을 위하여 2004년 준공한 시민공원이다. 중앙의 음악조형분수를 중심으로 광장, 폭포, 직지사 경내의 물을 공원으로 흐르게 한 330m의 계류시설, 어린이 종합놀이시설, 지압보도, 산책로, 정자 및 파고라, 의자 등 각종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다. 이외에도 국내외 17개국 유명 조각가들의 작품 50점, 20개의 시비(詩碑), 전국에서 가장 큰 대형장승 2기, 성곽·전통담장, 야외공연장 등이 있다.


세계도자기박물관

   직지문화공원 안에 있는 세계도자기박물관은 도자기전시관·크리스탈전시관·영상실·수장고·도자기 체험실 등을 갖췄다. 박물관 건립은 경기 부천의 유럽자기박물관 복전영자 관장(61·여·귀화 한국인)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유럽과 중국·일본 등의 자기와 유리예술품 1,000여 점을 김천시에 기증하면서 이뤄졌다. 박물관에는 기증품을 중심으로 다양한 도자기와 크리스탈 등 500여 점이 전시돼 있어 세계 각국의 도자기를 비교 감상할 수 있다. 또 영상물을 통해 세계 각국의 도자기 역사와 흐름, 제작과정 등을 살필 수 있으며, 도자기 자료 검색기도 설치돼 있다. 입장료는 일반 1,000원, 청소년·학생·군인 500원이다.

불령산 청암사


  불령산(佛靈山)이라고도 하는 증산면 평촌리의 수도산(1,316m) 북동쪽 기슭에 자리 잡은 청암사(靑巖寺)는 858년(신라 헌안왕 2) 도선이 창건했다. 창건 당시에 구산선문·동리산문 개조인 혜철(惠哲·785-861)이 머물렀다고 한다. 이후 고려시대와 조선 중기까지의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1647년(조선 인조 25) 화재로 소실되자 중건했다. 1897년에 폐사됐다가 1900년대 초에 극락전을 복원하면서 다시 절을 세웠다. 1987년 설립한 비구니승가대학에서 현재 140여명의 비구니 스님들이 경전공부와 더불어 수행을 쌓고 있다. www.chungamsa.org 전화 054-437-0038


  청암사 수도암 삼층석탑

  수도암은 수도산 정상 가까이에 자리잡은 암자다. 수도암의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하여 동쪽과 서쪽에 서 있는 쌍탑인 청암사 수도암 삼층석탑(보물 제297호)은 859년(신라 헌안왕 3)에 도선이 세웠다고 한다. 동탑은 단층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기단의 각 면에는 모서리기둥을 얕게 새겼다. 서탑은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렸는데, 1층 몸돌에 비해 2층 몸돌이 크게 줄었으나 3층 몸돌은 2층과 비슷하다. 동탑은 1층 몸돌의 위가 좁고 감실을 두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고, 서탑은 지붕돌 밑의 간격과 지붕돌이 넓다는 것이 특징이다. 두 탑은 통일신라 중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청암사 수도암 약광전 석불좌상

  이 불상은 청암사 수도암 약광전에 모셔져 있는 높이 1.54m의 고려시대 석불좌상(보물 제296호)이다. 머리에 원통형의 관(冠)을 쓰고 있어서 보살상처럼 보이지만, 광배와 대좌가 있고 신체 각 부분의 표현으로 보아 여래상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얼굴은 단아한 모습인데 마모가 심해 세부수법을 자세하게 확인하기 어렵다. 도식적으로 처리된 옷주름, 형식적인 광배와 대좌의 표현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청암사 수도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수도암에 모셔진 청암사 수도암 석조비로자나불 좌상(보물 제307호)은 통일신라시대 석조불상으로 진리의 세계를 두루 통솔한다는 의미를 지닌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것이다. 높이 2.51m에 이르는 거구의 불상이다. 전체적으로 정제되고 균형 잡힌 모습을 나타내는데, 위축되고 긴장감이 감소하며 탄력이 줄어든 점으로 볼 때 신라말에 만든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금릉 광덕동 석조보살입상


  감문면 숫골 아래쪽 산기슭에 있는 금릉 광덕동 석조보살입상(보물 제679호)은 고려시대 석불로 높이 2.25m에 이른다. 1959년 광덕저수지 확장공사 때 발굴되어 저수지 아래 왼쪽 산 밑에 세웠다. 화강암 판석을 평평하게 다듬어 새긴 풍만하고 화려한 모습의 관음보살상으로 착의법과 긴 관대가 달린 보관, 둥근 어깨의 신체 표현 양식 등의 조각 수법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조성된 불상으로 추정된다. 선이 뚜렷하고 보존상태도 매우 양호하다.


오봉동 석조석가여래좌상

  남면 갈항사(葛項寺) 터에 있는 오봉동 석조석가여래좌상(보물 제245호)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석불이다. 높이는 1.22m의 불상으로 군데군데 파손이 심한 상태이지만, 둥근 얼굴에 신비스런 미소를 띠고 있으며 눈·코·입의 표현이 사실적이다. 가슴이 발달했고 허리가 잘록하며, 왼쪽 어깨를 감싼 옷은 굴곡 있는 신체에 밀착되어 부드러운 옷주름선을 나타내고 있다. 오른손은 손바닥을 무릎에 대고 아래를 가리키고 있지만, 오른 손목과 손등뿐이며 왼손도 일부 깨졌다. 불상은 갈항사 3층석탑이 세워진 758년(경덕왕 15) 무렵일 것으로 추정된다. 갈항사터에서 발굴된 삼층쌍석탑(국보 제99호)은 일제강점기에 서울 경복궁으로 옮겨졌다.


금산향교

  김천시 교동에 있는 금산향교(도문화재자료 제257호)는 1392년(조선 태조 1)으로 추측되나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34년(인조 12)에 선비 강설·강여구 부자가 2대에 걸쳐 지었다. 최근에는 전교 현경길이 사재와 보조금으로 명륜당 등을 중건했다. 향교에는 문묘인 대성전과 강학하는 명륜당과 상류계급 자제를 숙식 시키는 동재와 서민 계급 자제의 기숙사인 서재가 있다. 유현을 모시는 동무와 서무는 없어졌다.


지례향교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지례면 교천리에 있는 지례향교(도문화재자료 제118호)는 1426년(조선 세종 8)에 처음 지었고,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90년(숙종 16)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지내는 대성전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다.


계령향교

  개령면 동부리의 개령향교(시문화재자료 제119호)는 1473년(조선 성종 4)에 관학산 밑에 처음 지었는데, 광해군(재위 1608-1623) 때 동쪽으로 옮겼다가 1837년(헌종 3)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지은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폐교되어 금산향교에 합쳐졌다가 1946년 복원했고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봉계 율수재

  봉산면 인의리에 있는 율수재(聿修齋)는 조선 성종 때 문신이요 학자인 매계(梅溪) 조위(曺偉·1454-1503)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유허지에 조성된 건물이다. 조위는 성리학의 대가로서 당시 사림에서 대학자로 추앙됐고, 김종직과 함께 신진사류의 기수였다. 글씨도 잘 썼으나 무오사화에 연루된 뒤 유배지에서 죽었다. 문집에 매계집, 글씨로는 조계문묘비가 있다.


  이 건물은 19세기 후반 중수돼 현재에 이르고 있어 구조 양식이 뛰어나지 않지만 당시의 형식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다. 앞뜰에 아담한 연못이 있고 뒤는 낮은 산으로 둘러싸여 고즈넉하다. 창녕조씨 문장공파 대종회 소유인 율수재에서는 1980년부터 김천문화원 주최로 매년 매계백일장이 열리고 있다.


  방초정

  구성면 상원리에 있는 방초정(도유형문화재 제46호)은 1625년(인조 3) 건립했으나 1736년 홍수 때 유실됐고, 1788년 ‘가례증해’를 저술한 이의조가 지금의 자리에 건립하여 현재에 이른다. 2층 누각으로 된 정자인데, 2층의 문을 걷어 올리면 마루가 되고 내려 닫으면 방으로 쓸 수 있게 했다. 이는 방이 양끝에 있는 보통의 누각과 다르다. 또 2층 누각 중앙의 온돌방은 1층에 아궁이를 마련해 두었다. 뜰 앞 연못 중앙에는 섬을 둘로 배치해 독특한 정원 형태를 이루고 있다. 건물·연못·수목의 배치 등은 조선시대 정원 조경양식 연구에 귀중한 자료다.


김천 과하천


  김천시 남산동 과하천(過夏泉)은 옛날부터 금이 나는 샘이 있어 금지천이라 하여 이 샘물로 술을 빚으면 맛과 향기가 좋아 주천(酒泉)이라 불렀다고 한다. 주천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샘물의 맛이 중국에 있는 과하천과 같다고 칭송하여 이때부터 과하천이라 불렀고, 이 물로 빚은 술을 김천 과하주라 했다. 금지천은 현재 묻혀있지만 지금의 과하천은 오래 전부터 ‘과하주샘’으로 불려오고 있고, 뒤쪽에는 1882년(고종 19)에 ‘금릉주천’이라고 새긴 돌이 세워있다.


김천 과하주

  김천 과하주(過夏酒·시무형문화재 제11호)는 수백 년 내려온 김천의 전통주다. 찹쌀과 누룩을 원료로 하여 남산동에 있는 과하천의 물을 사용하여 빚었는데, 이 샘물로 술을 빚으면 술맛이 좋고 여름이 지나도 술맛이 변하지 않는다고 하여 과하주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알코올 13∼14도 정도로 독특한 향기가 있고 맛이 좋다. 과하주는 일제강점기까지 ‘큰도가’(김천주조회사)에서 빚었는데 한때 중단됐다가 광복 후 재개되고, 다시 한국전쟁으로 자취를 감추었다가 1984년 송재성씨가 시험양조 끝에 본격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해 김천 명주(名酒)의 맥을 이었다. 1999년 송재성씨가 세상을 떠나 현재는 기능보유자가 없다. 직지사 입구인 대항면 향천리에 제조공장이 있다.


  김천 우시장


  김천장은 조선시대 전국 5대 시장의 하나로 꼽힐 정도로 규모가 컸다. 특히 우시장은 전국 최대 규모였다. 북쪽에서는 평양 우시장이 유명했고, 남쪽에서는 김천 우시장이 유명했다. 그러나 오늘날 경부선·경부고속도로가 통과함에 따라 시장의 기능은 축소됐다. 지금은 시내 외곽인 양천동에 김천가축시장이란 이름으로 명맥을 잇고 있다. 5일장으로서 매월 5, 10, 15, 20, 25, 30일에 우시장이 열리고 있다.


김천징

  징은 중국 고대로부터 널리 쓰여 온 타악기로 우리나라에는 고려 공민왕(재위 1351-1374) 때 중국 명나라에서 들여와 군대의 악기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징은 대정·가질대정·앞매꾼·전매꾼·센매꾼·풀무꾼이 한 조가 되어 제작한다. 제작과정은 놋쇠녹임·늘품질·도둠질·냄질·싸개질·달금질·울음잡기·가질·재울음의 순이다. 제대로 된 징의 소리는 깊고 긴 여운이 있으며 가슴깊이 파고드는 호소력이 있는데, 김천징(도무형문화재 제9호)이 바로 이런 특징을 갖는다. 징장 기능보유자인 김일웅씨는 4대째 함양에서 징을 만들어온 외조부 밑에서 기술을 익힌 후 김천 황금동 약물내기에 농악기 공장을 차려 지금까지 40여 년간 황소울음을 내는 김천징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김천 모필장

  모필(毛筆)은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도구인 붓을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짐승의 털을 추려 모아 원추형으로 만들어 죽관(竹管) 또는 목축(木軸)에 고정시켰다. 붓은 모양과 용도에 따라서는 장봉·중봉·초필, 그리고 심을 박은 것과 박지 않은 것 등으로 나눈다. 제작과정은 크게 털고르기·말기·물끝보기·대맞추기·마무리작업의 순이다. 모필장(毛筆匠·도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로 인정된 평화동의 이팔개씨는 18세에 붓과 인연을 맺은 후 붓 만드는 기술을 익히고, 24세에 영신당 필방을 열어 현재까지 붓에만 전념하고 있다. 그가 만드는 붓의 종류는 초필·인장필·미간·간필·주름필·중간필·중간대필·대필·소각·중대·액자 등 12가지인데, 털의 종류에 따라 제작과정이 다르다. 하나의 붓을 만드는 데 75회가 넘는 잔손질이 가야한다.


금릉 빗내농악

  빗내농악(도무형문화재 제8호)이 전승되고 있는 개령면 광천리 빗내마을은 삼한시대 감문국에 속했던 곳으로 넓은 개령들을 앞에 두고 뒤에는 감문산성의 성터가 있다. 빗내마을에는 옛 감문국의 나라 제사와 풍년을 비는 별신제가 혼합해 동제(음력 정월 6일)로 전승되어 풍물놀이, 무당의 굿놀이, 줄다리기 등의 행사가 행해졌고, 이들 행사가 혼합되어 진굿(진풀이)의 농악놀이로 발전했다. 전국 농악놀이의 대부분이 농사굿이지만, 빗내농악은 군대행진용의 진(陣)굿으로 가락이 강렬하며 종류도 다양하다. 모두 12가락(질굿 문굿 마당굿 반죽굿 도드레기 영풍굿 허허굿 기러기굿 판굿 채굿 진굿 지신굿)으로 구성되어 있다.


김천 옛날솜씨마을

  김천 남부 수도산 북쪽 기슭에 터를 잡은 증산면 평촌리 장뜰(장평)마을은 80여 가구의 300여 명의 주민이 오순도순 살고 있는 전통 마을이다. 몇 년 전부터 도시민을 상대로 농촌 체험행사를 펼치고 있다. 봄에는 호드기, 산나물·봄나물 채취, 모종심기(고추·호박 등), 여름에는 수도계곡 물놀이, 우물 물푸기, 고추·옥수수따기, 가을에는 메뚜기잡기, 새총만들기, 햅쌀방아찧기, 고구마캐기, 겨울에는 썰매타고 팽이치기, 꼬마메주, 고구마구워먹기 등을 체험한다.


  농경유물관 관람, 청암사 산책, 옛마당놀이(제기차기, 투호), 짚풀공예, 멧돌두부만들기, 가마솥찐빵, 천연염색, 야생화 압화 등은 사시사철 진행한다. 비용은 당일 1인 15,000원(점심 제공), 1박에 어른 35,000원(세끼 제공), 어린이 30,000원. 1가족만의 체험행사는 받지 않고 따로 날을 잡아 보통 3~4가족이 함께 진행한다. 10~15명 이상 가능. http://somsi.go2vil.org 054-437-0150, 이보영 추진위원장 018-780-0150


  오봉저수지


  남면 오봉리 금오산 북서쪽에 위치한 오봉저수지는 농경지 700ha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하여 1989년 준공했다. 잉어·향어·붕어 등의 물고기가 많아 인근 도시의 낚시꾼들이 많이 찾고, 여름에는 수상스키도 즐길 수 있다. 호젓한 산책로도 갖춰졌을 뿐만 아니라 인근에 갈항사지와 석조석가여래좌상 등 문화재도 있어 산책과 문화유산 답사를 겸할 수 있다.


  추풍령휴게소


  경부고속도로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는 상행휴게소와 하행휴게소는 구름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1971년 경부고속도로(428km)를 개통할 때 서울과 부산에서 각각 214km 떨어진 이곳에 휴게소를 설치하고 높이 30.8m의 경부고속도로 준공 기념탑을 세웠다. 현재 하행휴게소 뒤편에는 청공작·백공작·원앙이·금계·은계·공작비둘기·오골계 등을 기르고 있는 동물원과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길에서 만난 별미

  직지사 산채정식


  직지사 들머리에는 관광객들의 입맛을 유혹하는 음식점이 가득하다. 여러 종류의 음식이 있으나 가장 대표적인 음식은 바로 산채정식이다. 더덕, 두릅, 묵무침에 목이버섯, 송이버섯, 장어, 조기, 그리고 멧돼지구이, 소고기구이까지 40여 가지 반찬이 한 상 가득 올라온다. 요즘 산채가 많이 나올 때라 제대로 된 맛을 볼 수 있다. 양이 너무 많아 다 먹지 못하는 산채와 반찬이 아깝다면 산채비빔밥을 시켜도 된다. 여기에도 10여 가지 반찬이 딸려 나온다. 산채정식 1인분 13,000원, 산채비빔밥 7,000원.


  지례 흑돼지


  흔히 꺼먹돼지로 통하는 김천 지례면의 흑돼지는 오래 전부터 이름 날린 토종 돼지다. 이 흑돼지는 비계층이 얇으면서 지방도 많지 않아 쫄깃하게 씹히는 질감이 좋다. 김천 시내에서 승용차로 20~30분 거리인 지례면 소재지에 흑돼지 전문식당이 여럿 있다. 이중에서 ‘현구원조2대불고기’(054-435-0319)가 유명하다. 삼겹살·목살 소금구이와 양념불고기가 모두 1인분(200g)에 6,000원.


  추풍령 할매갈비

  추풍령 고갯마루에서 김천 쪽으로 300m 정도 내려가면 왼쪽으로 보이는 추풍령할매갈비집(054-439-0150)은 김천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명성이 자자한 식당이다. 1993년 작고한 이금덕 할머니가 1945년 광복과 함께 영업을 시작한 곳이니 무려 60여 년의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셈이다. 현재는 며느리가 이금덕 할머니의 손맛을 전수받아 손님상을 차리고 있다. 돼지갈비 1인분(200g)에 7,000원.


일정별 길라잡이


●직지사권 김천의 서부에 있는 직지사는 김천의 상징답게 천년고찰에 어울리는 문화유산이 가득하다. 직지사 입구에 있는 직지문화공원 산책도 빼놓을 수 없다. 이외에도 과하주 제조공장, 추풍령, 직지사역 등이 모두 이 권역에 속한다.
●청암사권 수도산 기슭에 터를 잡은 청암사는 김천 남부 여행의 중심지다. 수도암도 빼놓을 수 없는 산중 암자. 입구에 농촌체험을 할 수 있는 옛날솜씨마을이 있다. 수도산에서 흘러내리는 수도계곡 풍광도 제법 수려하다.
●삼도봉권 삼도봉이 돋보이는 김천 남서부 지역이다. 조선시대의 특이한 정원양식을 보여주는 구성면의 방초정, 삼도봉 산행의 기점이 되는 부항면의 해인마을, 그리고 대덕면의 섬계서원과 조룡리 은행나무, 추량리 은행나무 등이 있다. 흑돼지로 유명한 지례면도 이 권역에 넣을 수 있다.
●시내권 도심에는 황금시장·평화시장·아랫장터 등 여러 시장이 있고, 외곽의 양천동에는 김천가축시장이 있다. 과하천, 금산향교, 봉황루 등이 모두 시내에 있다.



일정 짜기


●당일 수도권에서 3시간이면 접근이 가능하므로 중요한 곳만 둘러본다면 당일로도 괜찮은 일정이다. 추풍령 나들목→직지사→점심(산채비빔밥)→3번 국도→구성→지례→증산→청암사→수도암→귀가
●1박2일 첫날 점심 무렵에만 도착한다면 김천의 명소는 웬만큼 둘러볼 수 있다. 우시장이 열리는 장날(5, 10, 15, 20, 25, 30일)에 맞출 수 있다면 아침 6~7시쯤 김천가축시장을 찾아가보자. 추풍령 나들목→직지사역→직지사→저녁(산채정식·지례돼지)→숙박→우시장→청암사→수도암→귀가
●2박3일 1박2일의 일정에 삼도봉, 황악산, 수도산 중에 한 산을 올라갔다 올 수 있다.



교통


●자가운전
경부고속도로 추풍령 나들목과 김천 나들목 중 여행 코스에 맞춰 선택하면 된다. 수도권에서 직지사를 먼저 들르려면 추풍령 나들목으로 나오는 게 낫다.
수도권  경부고속도로→추풍령 나들목→4번 국도(김천 방면)→9km→덕천 삼거리(우회전)→3km→직지사 <3시간 소요>
영남권  경부고속도로→김천 나들목→4번 국도→덕천 삼거리(좌회전)→직지사 <부산에서 1시간40분, 대구에서 40분 소요>
호남권  88올림픽고속도로→고령 분기점→중부내륙고속도로→남김천 나들목→4번 국도→덕천 삼거리(좌회전)→직지사 <광주에서 3시간 소요>
충청권  경부고속도로→추풍령 나들목→4번 국도(김천 방면)→덕천 삼거리(우회전)→직지사 <대전에서 1시간 소요>
강원권  중앙고속도로→영동고속도로→중부내륙고속도로→경부고속도로→김천 나들목 <춘천에서 3시간30분 소요>


●고속·시외버스
서울→김천  서울고속버스터미널에서 매일 11회(07:10~18:20) 운행. 3시간 소요, 일반 12,100원, 우등 17,700원 / 동서울터미널에서 매일 6회(08:10~18:10) 운행. 3시간 소요, 요금 13,500원.
대구→김천  북부시외버스터미널(053-357-1851~3)에서 매일 10분 간격 수시(06:30~22:30) 운행. 1시간10분 소요, 요금 4,900원.
대전→김천  동부시외버스터미널(042-624-4451)에서 매일 13회(07:15~19:40) 운행. 1시간10분 소요, 요금 5,700원.
*김천공용정류장 054-432-7600


●현지교통
김천→직지사
  공용정류장(054-432-7600)에서 20~30분 간격(06:10~22:40) 수시 운행. 30분 소요, 일반버스 900원, 좌석버스 1,300원.
김천→부항  공용정류장에서 13회(06:20~19:30) 운행. 1시간 소요.
김천→청암사  공용정류장에서 매일 12회(07:30~16:30) 운행. 1시간 소요.



숙식(지역번호 054)


●직지사권
직지사 입구 시설지구에 김천 파크호텔(437-8000)을 비롯해 알프스산장모텔(437-8933), 샤르망(431-6119), 카오스(432-7477), 아미앙스여관(436-6114)등의 모텔급 숙박업소가 있다. 이외에도 공원민박(436-6328), 산마을민박(436-6811), 청솔민박(436-3408), 언덕민박(436-7190), 운수민박(436-6504), 돌집민박(436-4454), 북암민박촌(436-5231) 등의 민박 시설이 있다.
직지사 입구 시설지구에 송학식당(436-6403), 한일식당(436-6057), 경동산채식당(436-6029), 청산고을(436-8030), 황악식당(436-6131), 기차길옆오막살이(436-3399) 등 수십 개의 식당이 밀집해 있다.


●청암사권
청암사 주변의 증산면 유성리에는 최원경민박(437-0380), 홍재균민박(437-0350), 손태무민박(437-0135), 김종곤민박(437-0011), 평촌리에는 신난이민박(437-0017), 김춘보민박(437-0359), 조정식민박(437-0160), 김남철민박(437-4841) 등이 있다. 수도암 입구의 수도리에는 김종태민박(437-0834), 조성목민박(437-3766), 서말임민박(010-4696-6549), 차주철민박(437-5295) 등이 있다. 평촌리에 흑염소고기를 맛볼 수 있는 평촌식당(054-437-0018), 50년째 순두부를 차리는 할매식당(054-437-0017) 등이 있다. 수도산식당(437-0009)은 산채보리밥을 차린다.


●삼도봉권
삼도봉 등산로 입구의 부항면 해인마을에 해인산장(437-1991), 숲실산방(437-8250) 등이 있다. 해인문화예술농원(054-436-8543)은 차와 식사도 가능하다. 흑돼지로 유명한 지례면 소재지에 ‘현구원조2대불고기’(435-0319), 큰골가든(435-7054~3), 장영선원조지례삼거리불고기(435-0067), 부자가든(434-3700) 등이 있다.


●시내권
번화가인 평화동에 삼원장(432-7588), 롯데장(434-7771), 백금장(431-3135), 엘림장(430-2269) 등 숙박 시설과 식당이 아주 많다.
*김천시청 홈페이지 www.gimcheon.go.kr 대표전화 054-420-6114


/ 글·사진 민병준 sanmin@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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